낙원의 협박
시베라이트 평전 - 인간의 나이로, 대학교 졸업 학년 즈음.......
보석금을 내야한댔다. 시베라이트는 차후 집을 빼면 들어올 보증금을 계산해보았다. 그건 확실히……. 큰 돈이었다. 일단 학생 신분에서는 말이다. 어머니들이 얻어준 집을 무단으로 처분한다는 죄책감은 있었다. 그러나 크진 않았다. 보증금을 다시 한번 나눠보았다. 자기가 묵을 집을 구할 돈 얼마, 그리고 하티의 보석금을 낼 돈 얼마.
이런거 부탁해서 미안.
하티가 유리창 너머로 말했다. 시베라이트는 유리창을 가볍게 두들겨보았다. 교도관들이 흠짓 놀라며 자세를 바로했다.
괜찮아. 힘들긴 하지만 꺼내줄 수는 있을 것 같아.
어머니들은 아직도 시베에게 잘 해주고 있었다. 귀한 딸처럼 대우해주면 시베라이트가 지금 공부하는 것을 그만둘 것 처럼.
안되면 어머니들께 잠시 부탁해보자.
시베라이트는 학사 졸업 논문으로 20세기 사상사에 대해 쓰고 있었다. 그 주제를 듣고 어머니들은 황금기 이전이나 공부한다고 투덜거리셨다. 어머니들이 그게 내포하는 것에 대해 알면 시베라이트를 아카데미에서 퇴학시키고 집에 가둬놓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 때 일이겠지.
너, 어머니들과 아직 친하게 지내는거야? 다행이다.
아니. 그냥 어머니들이 나한테 일방적으로 잘 해주는거야. 잘 해줄 때 등골 빼먹어야지.
시베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하티는 끓는 소리를 내며 다음 말을 찾지 못했다. 아무튼 서로 말을 않고 있다가 면회 시간이 끝났다. 일단 집부터 옮기면. 처음 하는 부동산 업무였지만, 초심자의 행운 같은 것이 이런 일에도 붙어있는지, 제법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어머니들이 구해주긴 했지만 시베라이트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왜 말해주지 않은건지 시베라이트는 의아했다. 학생들이 많이 세들어 사는 방조차 없는 허름한 집으로 옮기는게 생각보다 비쌌다. 그래서 하티의 보석금이 살짝 모자랐고, 정말 급할 때 쓰려고 간신히 모으던 적금까지 깨야했다.
뭐……. 이것저것 제약은 많이 걸려있지만, 그래도 자유가 됐네.
하티는 이런 사정을 전혀 몰랐다. 알았어도 시베라이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석방이면 제약이 많을텐데 하나하나 확인해봤어?
당연하지. 이 하티 웨인즈, 제법 꼼꼼한 남자라고.
두 사람은 오랫만에 함께 밥을 먹었다. 옛날에 있었던 동아리 사건에 대해 뒷담화 겸 이야기를 하며 둘 사이에 있었던 석연찮은 감정을 풀려고 했다.
그런데 하티, 왜 구치소까지 들어간거야? 무슨 일에 휘말린거지?
시베라이트는 오랫동안 묻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하티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사실……. 시위를 하러 갔는데, 거기서 이게, 좀, 과격해진거야. 친구가 경찰때문에 머리가 깨져서 너무 화가 나는 바람에 맞대응을 했더니.
거짓말이었다.
친구는 누군데? 그 사람은 너 안 도와줬어?
우리같은 노동자가 무슨 돈이 있다고……. 무사했으니 다행이지.
맞는 말이야. 하티. 근데 무슨 시위였어?
거짓말.
너, 진짜 시위에 나가기는 한거야? 아니. 시위가 있기는 했어?
이 얘기 나중에 하면 안될까.
난 널 위해 돈을 썼잖아, 하티.
그걸로 내가 가진 이야기를 모두 샀다고 생각하는거야?
아니, 네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거야, 나는.
하티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시베라이트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날 위해 돈을 마련해준 소꿉친구. 이것이 하티가 어디론가 튀어가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았다. 하티는 굴리던 눈을 아래로 떨구곤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네 집에서, 어차피 묵어야하잖아.
시베는 하티가 말을 끝내게 두었다. 하티는 간신히, 그리고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 얘기해줄게.
하티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정직한 편이었다. 어릴 때는 그랬다. 시베라이트는 자신 앞에 있는 남자가 갑자기 낯설었다.
하다하다 이젠 테러범까지 데리고 사는거니?
시베라이트는 현관 앞에서 우뚝 멈췄다. 하티는 집에 들어오려다 머뭇거리며 다시 나가려고 했다.
아니, 웨인즈 군. 자네도 들어오게.
어머니가 돌을 쪼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티는 슬쩍 문을 닫으려다가 다시 문을 열고 현관에 한쪽 발을 내딛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시베라이트의 새 집을 알고 그 곳으로 찾아와, 어떻게 현관 비밀번호를 알아내어 집 안에 도사리고 앉아있었다. 시베라이트는 얼결에 하티를 보호하듯 양 팔을 펼쳤고, 하티는 좁은 현관에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들어오라 하지 않았니.
다시 한번 강요받았다. 이대로 하티랑 같이 도망간다면……. 시베라이트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그래, 일이 더 꼬이겠지. 어머니는 시베라이트의 침대에 앉았고, 시베와 하티는 벌 받는 아이처럼 벽에 등을 대고 서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내 아내에겐 아직 말 안 했어. 하티 웨인즈 군, 보석금으로 들어간 우리 돈을 다시 돌려주고 네 죗값을 치러라.
그게 그렇게 쉬운-
쉽게 해줄테니. 그리고 시베, 우리 시베……. 항상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네가 약간의 일탈을 벌이더라도 눈감고 모르는 척 했단다. 원래 어머니의 사랑은 보답받지 못하는 것이니, 네게서 따듯한 말을 듣는 것도 포기했어. 그런데 이건 선을 넘었구나.
내 이름으로 빌린 집이었잖아요.
시베라이트가 빽 소리질렀다.
왜인지 내 이름으로 모든 서류가 되어있어서 제가 알아서 했어요. 법적으로 문제 있나요?
아니. 문제 없지. 하지만 진짜 법적으로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시베?
어머니의 목소리는 더할나위없이 따듯했다.
저 애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도와준거니?
네.
시베는 하티의 말이 거짓말이라는걸 알았지만, 어머니 앞에서 당당하게 고했다.
시위였어요. 경찰이 먼저 공격해서 자기방어를 위해 맞대응을 했다가 폭력을 저질렀다고 끌려갔어요.
하티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자줏빛으로 달아올랐다.
그거 아니야, 시베.
알아.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돈을 꿀 정도로 절친하게 생각한 친구에게 거짓말을 했다?
어머니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하티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결심이 선 듯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맞아요. 테러라면 테러죠. 관공서에 불을 지르려고 했어요. 엘릭스니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각성자 공장을 감사해달라는 청원을 무시했거든요. 불이라도 지르면 뭐라도 될거라고 생각해서.
내가 시베를 네 동네에서 키웠던 이유는, 우리 시베에게 다양한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려주어 엘리티시즘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시베를 망쳐놓은 결정이었구나.
내 동네요? 우리 동네가 뭐 어때서, 우리 어머니들은-,
그래. 너희 어머니들. 말단 공무원이었지. 그래서? 그 동네에 말단 공무원 아닌 사람들이 어디 있었니? 불온한 말에 선동이나 되어서 무책임하게 가족과 아이들을 버린 말단 공무원은……. 그래, 너희 어머니들 밖에 없구나.
뭐? 무책임해? 어머니들은 나랑 시베라이트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스스로를 희생하셨던거야, “정상인” 이 아닌 자들도 국가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난 어머니들이 자랑스러워!
그 면도 어쩜 네 어머니들을 빼닮았니? 그래서 하티 웨인즈 군, 너는 행복했구? 너는 더 나은 삶을 수여받았니?
듣다 못한 시베라이트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어머니, 내 집에서 당장 꺼져요!
어머니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베를 쳐다보았다. 시베라이트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꺼져요. 다신 당신들 앞으로 나가지 않을거고, 당신들이 나한테 접근 못 하게 조치를 취할거야.
어림도 없다.
어머니가 시베라이트의 멱살을 잡고 질질 잡아끌어 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티는 반사적으로 시베의 어깨를 잡아챘다. 손아귀의 힘이 살짝 약해지자, 시베라이트는 어머니의 팔뚝을 있는 힘것 깨물었다.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는 동안 시베는 맨발로 문을 박차고 도망쳤다. 하지만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시베라이트는 집과 학교, 이 두 곳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좋은 말로 하면 범생이, 나쁜 말로 하면 멍청이. 학교 교정을 맨발로 터벅터벅 걷고 있으려니, 저쪽에서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뮬 루이터 선배였다. 졸업하고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고 소식만 들었다. 시베는 조용히 그를 피해가려고 했다.
시베라이트니?
뮬이 먼저 아는 척 했다. 아마 시베의 꼴을 보고 다가온 것일테다. 엉망이 된 스웨터에, 처량한 맨발, 일련의 소동에 헝클어진 머리까지. 뮬은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잠시 우리 집에서 숨 좀 돌리고 가.
그래도 되나요.
시베가 꿍한 목소리로 물었다. 뮬은 가볍게 웃었다.
그 사건 때문에 아직 나한테 앙심이 있구나. 뭐, 이해해. 나도 네게 미안한 마음이 있고 그걸 그냥 풀고 싶을 뿐이야.
뮬이 졸업하고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서클은 해체되었다고 한다. 도덕적 결백주의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서로를 힐난할 생각만 만만인 단체로 변질되었으니,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뮬은 무엇을 위해 서클을 유지하려 했을까? 시베라이트는 뮬의 뒤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시베가 옮긴 뒤의 집처럼……. 아니 그 집보다 더 끔찍한 몰골이었다. 창문이 너무 작아 동굴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물론 리프에서는 석실에서 사는 경우가 드문 것이 아니지만, 하려던 것은 이 말이 아니라…….
네 집보다 추레하지만.
뮬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밤이니까 커피는 좀 그렇지? 차 마실래?
아뇨, 괜찮아요. 물. 물 한잔만 주세요.
이제 선후배 간도 아닌데 말 편히 해.
시베라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옛날 일에 대한 복수, 라기 보다는 그냥 달갑지 않았다. 뮬은 어깨를 으쓱하고 물을 따라 시베에게 줬다.
너는 항상 어떤 사건에 휘말리는 것 같네. 아니면 사건을 휘몰고 오는 사람이 옆에 있던가.
오늘은 어머니들이었어요.
아.
뮬 루이터는 잠시 고민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얘기를 했다.
너도 부모님이 연구 과제에 대해 말을 얹으시니?
어쩌면 절연할지도…….
그 말을 입 밖에 꺼내놓자, 시베라이트 안에 남아있던 얄팍한 감정이라는 것이 위로 훅 올라왔다. 시베는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억지로 물을 마셨다. 뮬이 시베 옆에 앉아 다정하게 손을 어깨 위에 얹었다.
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지만, 아무튼 선택을 하지 않으면 둘 다 잃고 말거야.
뮬은 시베라이트에게 자신의 채널을 주고 잠시 집을 비워주었다. 말로는 친구가 잠시 줄 것이 있다는데,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왜 자기 주변에는 거짓말이 맴도는지 모르겠다. 시베는 조금 울었고, 많이 실망했다.
선택은 했어?
시베가 가겠다고 연락하자, 뮬은 기다렸다는 듯 집으로 돌아왔다. 시베라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것만 묻자. 너, 그 말 기억나니?
시베는 눈만 깜빡였다. 뮬이 목소리를 낮추고 엘릭스니 언어로 말했다. 시베가 더듬거리며 이해했던 바로 그 문장이었다.
여왕-켈을 없애겠다.
시베라이트는 그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했다.
충격적인 주장이나, 그 주장은 모순점만 안고 있죠.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너 20세기 사상사라는 이름으로 군주제와는 맞지 않는 연구를 한다고 들었어.
전혀 아닙니다.
시베라이트는 강하게 말했다. 뮬 루이터는 시베의 굳은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니면 됐어. 어두운데 조심해서 들어가고.
집은 난장판이 되었으나, 그 난장판의 책임을 물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며칠 뒤, 시베라이트는 그 좁디 좁은 집에서 쫓겨나 더 좁디 좁은 집을 찾아 헤메야했다. 어머니들의 압박이었다. 시베는 학사 논문을 쓰면서 일해야했고, 누우면 그걸로 끝인 새장같은 공간에서 지내야했다. 종종 하티가 생각났으나, 하티는 그 이후로 또 연락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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