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에서 온 이상한 남자
시베라이트 평전 - 인간의 나이로, 대학교 석사 과정 수료 중........
사실 남자를 처음 봤다면 거짓말이었다. 교정에서도 드물게 남자가 있었고, 무엇보다 소꿉친구 하티도 남자였다. 스스로를 학부 졸업학년으로 소개한 남학생은 석사를 하며 조교 일을 시작한 시베라이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졸업논문에 사용할 자료를 찾는 것이 어려워 학과 사무실에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도서관 사서에게 물어보라며 쫓아낼 수도 있었다.
레닌주의, 요.
남학생은 쑥스러운듯이 웃었다. 남학생의 묘하게 매력적인 미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레닌주의라는 말에 어떤 감정을 느껴서였는지 시베라이트는 남학생을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남학생과 도서관에서 만나기로 약속잡자 조교 선배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저런 미모는 여자들 사이에서도 드문데, 저만하면 헤테로 로맨틱이 아니더라도 가능하지 않냐는 발칙한 말까지 들었다. 시베라이트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걸 선배들에게 구구절절 말했다. 하지만 시베라이트는 학과 사무실 막내였고……. 그렇게 남학생과 약속한 시간이 될 때 까지 시달렸다.
어쩌다 레닌주의는 공부하게 됐나요?
도서관에서 참고도서를 골라주다 시베라이트가 물었다. 남학생은 주춤하더니 또 그 쑥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시베라이트는 그 입꼬리를 잡아다 떼 갖다 버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변화……. 때문이랄까요. 선배님께서는 왜 레닌주의를 공부하게 됐습니까?
역시 나도 변화 때문이겠죠.
내가 저 학생에게 레닌주의로 사학과 논문을 썼다는 것을 이야기 했던가? 그런 사소한 의심은 접어두었다. 연애적인 관점이 아니더라도 남학생의 금빛 눈은 하던 말을 까먹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이었으니까. 시베라이트는 문득 하티를 생각했다…….
친구 때문이기도 했어요. 그 애가 나에게 공부하라고 했거든요.
좋은 친구네요. 저도 그런 친구가 있으면 좋을텐데.
말썽꾸러기에요, 하여간.
시베는 서가 사이를 살짝 들여본 사서와 눈이 마주쳤다. 사서가 검지를 올려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주었다. 시베는 다시 책으로 돌아갔다. 황금기 이전의 사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소련이 공산주의 체제를 이행하는 과정. 시베라이트는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미친듯이 공부했다. 하티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지만, 하티의 소식은 알 수 있었다. 그는 가석방 조건을 어겼다. 행방이 묘연해졌다. 경찰들이 찾아와 방해했다. 집안의 압박과 졸업 논문의 사상적 불온함 때문에 교수들은 시베라이트를 따돌리지 않는 척 따돌렸다.
사학에서 정치학으로 과를 바꾸신 이유가 있나요? 비슷한 과도 아니잖아요.
필요한 책을 다 빌리고 남학생은 시베라이트와 친해지고 싶은 듯이 은근히 물어왔다. 시베는 씁쓸하게 웃었다.
사학에서는 내 원서가 다 떨어졌거든요. 지금 지도교수님께서 제 논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집으로 돌아갔을거에요.
가족 분들과는 친하신가요?
졸업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저 골목을 지나서 하티나 리아흐스가 있었으면하고 바랐다. 그 곳에는 뮬 루이터가 어색하게 장미꽃 다발을 들고 서있었다.
혼자야?
뮬은 놀란 눈치였다. 시베는 그냥 웃었다. 장미꽃 다발은 시베의 몫이 되었다. 어쩐지 그 꽃다발을 버릴 수 없었다. 껄끄러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 선배가 준 꽃다발이 유일한 졸업식 꽃다발이 되다니. 시베라이트는 울지도 못했다. 방과 방 사이의 벽이 얇아 펜이 종이에 스치기만 해도 항의가 들어왔다.
너는 친하니?
시베가 대뜸 반말로 물었다. 남학생은 고개를 저었다. 남학생이 자신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진 않았지만……. 가족과 친하지 않다는 말은 진실인 것 같았다. 시베라이트는 그 말을 끝으로 남학생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남학생은 왜인지 시베라이트가 교정 너머로 사라질 때 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시베는 그게 부담스러워서 걸음을 빨리 했다. 교정은 술렁거리고 있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학과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저쪽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팔이 네 개였다. 엘릭스니였다. 시베라이트는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리아흐스?
무심결에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리아흐스는 위쪽 왼팔로 서툴게 각성자들의 사인을 흉내냈다. 검지, 를 입에 대는 모양이었다. 사서가 그랬던 것 처럼.
하티의 행방이 필요하다.
리아흐스가 낮게 말했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대놓고 쳐다보거나 힐끗거리며 어디론가 통신을 돌렸다. 신고만 아니기를 바랐다.
일단 교정에서 나가요.
하티의…….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큰일나요. 어서.
시베는 허둥거리며 리아흐스를 끌고 학교 밖으로 갔다. 남학생은 소란에 뒤늦게 도착했다. 시베라이트는 그를 보지 못했다. 일단 리아흐스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다. 시베의 집은 리아흐스 한 명으로 꽉 찼다.
하티요? 하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사람들이 하티를 쫓는다.
가석방을 어겼으니까…….
아니다. 그런 간단한 법이 아니야.
시베는 답답한 마음에 서툰 엘릭스니 언어로 리아흐스에게 차라리 모국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리아흐스는 시베라이트가 알아듣기 쉽도록 최대한 천천히 말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하티의 일이었다. 그의 말은 점점 빨라져……. 벽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리아흐스는 놀라 말을 멈췄다. 너무 목소리가 크다고 옆 방에서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알겠어요. 일단 돌아가세요, 리아흐스.
리아흐스가 시베라이트의 손을 꽉 잡았다.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 아이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다오.
시베라이트는……. 잠시 생각하다 리아흐스에게 물었다.
그 때, 하티가 당신과 당신의 동무들을 어떻게 구해냈나요?
시베라이트가 아직 고등교육을 받고 있을 때, 엘릭스니 거주권을 인정해달라고 말하던 리아흐스와 엘릭스니 활동가들이 잡혀가고, 엘릭스니 거주구역이 불타버렸을 때. 어머니들은 아직도 거기에서 살고 있다. 수많은 엘릭스니들이 타죽은 곳에서. 하티는 자신을 믿어달라고 하며 귀걸이를 돌려주었다. 리아흐스는 머뭇거렸다.
하티가, 그 때, 무기를.
더 자세히 말하기까진 용기가 필요했다.
총을. 가지고 당신들을 꺼냈나요?
그리고 그보다 더 내밀한 것을 말하기엔,
당신들이. 무력 투쟁을 위해 무기를 불법으로 수집하고,
너무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우리를 시위 장소에 나오지 못하게 한거였나요.
리아흐스는 여리디 여린 시베의 손을 만졌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리아흐스의 날카로운 손톱에 피부가 쓸리는 느낌은 아프고 불쾌했다.
그 때 하티가 당신들에게 무기를 돌려주지 않았던 거군요. 그래서 당신은 그걸 숨기려 하티를 내친거고, 나도 얽히게 하지 않으려…….
그만.
그럼 리아흐스.
시베라이트는 자신의 귀에서 귀걸이를 뺐다. 하티가 돌려줬던 우정 귀걸이였다.
만약 당신이 하티를 먼저 찾는다면, 이 귀걸이를 그 애에게 주세요. 내가 하티를 먼저 찾는다면 난…….
각성자들에게 넘기지만 말아다오.
난 하티에게 실망했어요.
시베라이트가 리아흐스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집 안에서는 울 수 없었다. 그건 집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학과 사무실. 순간 생각났다. CCTV에는 찍히겠지만 집에서 울다 벽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 것 보다 CCTV에 울부짖는 모습이 찍히는게 더 나았다. 걸음을 걷는데 눈물이 성큼성큼 떨어졌다.
선배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시베는 계속 걸었다. 커다란 손이 그의 어깨를 잡아채고나서야 시베라이트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잘 생긴 얼굴은, 그래, 선배들 말마따나 흔치는 않으니까……. 그런데 어디서?
선배님, 왜, 누가, 아니 무슨 일이에요?
남학생은 당황하며 자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손수건을 꺼내 시베라이트에게 건네주었다. 고맙단 인사도 못 하고 시베라이트는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끅끅거리면서 오열했다. 남학생은 가만히 그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몇 분 뒤, 시베는 자기가 한 번 만난 어린 학생 앞에서 추태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수건으로 입과 코만 가리고 시베가 말했다.
미안, 너무……. 너무 이상했지요?
남학생이 고개를 저었다.
헤어졌어요? 귀걸이가 안 보이는데.
시베는 남는 쪽 손으로 자신의 귀를 더듬었다. 당연히 귀걸이는 없었다. 제발 그 귀걸이가 하티에게 가기를 바랐다. 리아흐스가 아니라 자신이 하티를 발견하게 된다면. 시베라이트는 하티를 고발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하티는 선을 넘었다. 하티는……. 총으로 사람을 쐈다.
네. 헤어졌어요.
그 말을 하는 도중에도 목이 메어 시베는 한숨을 여러번 쉬어야 했다.
누군데요? 그 사람은.
왜요, 알면 혼내주게요?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혼내줄게요.
남학생은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베라이트는 눈물을 흘리면서 낮게 웃었다. 그런 모습이 바보같고 우스웠다. 다 바보같고 우스웠다. 시베는 이제 울면서 폭소했다. 여왕의 행렬에서 총을 꺼내든 하티도, 거기서 죽지 않은 여왕과 귀족들도,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남학생도.
그래요. 나중에 꼭 혼내주도록 해요.
시베라이트는 고개를 떨궜다. 군주제가 지속되어야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여왕직에 종사하는 한 여인에겐 유감이 많았다. 사회가 발전하려면 결국 폐지되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런 불법행위와 파괴, 테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더 큰 권력과 억압, 그리고 희생 뿐이었다. 내가 너무 순진한 것인가.
손수건은 나중에 빨아서 줄게요.
들릴 듯 말듯 작게 얘기하고 시베는 남학생을 스쳐 지나갔다. 집으로도 학교로도 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자신 만의 공터를 마련한 것도 아니었다. 시베라이트는 방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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