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라이트 평전 - 낙원

낙원으로

시베라이트 평전 - 인간의 나이로, 대학교 박사 과정 수료 중........

하티의 눈은 배신감과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은 정확히 시베라이트를 향하고 있었다. 키 큰 남자가 하티의 팔을 꺾어 고개를 억지로 숙이게 하고 어디론가 끌고갈 때 까지 하티는 그런 눈빛으로 시베를 쳐다보았다. 그 감정은 태양만큼이나 강렬해 시베라이트는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의문에서 간신히 헤어나오자 시베라이트는 남자 후배가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시베라이트는 하티가 던진 의문으로 다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실성할 것 같았다. 하티의 귀에는 시베라이트의 귀걸이가, 그러니까 우정 귀걸이가 걸려있었다. 시베라이트는 그것을 보고 후배의 팔을 살포시 잡아끌었다.

저 쪽으로 갈까?

시베라이트가 고개를 살짝 돌려 하티를 쳐다보려고 했다. 우정 귀걸이가 한 눈에 들어왔다. 리아흐스와 만났구나, 내가 신고할까봐 말을 안 한걸까, 하지만 그런 감상에 빠져있기엔 하티는 너무 가까이 있었다. 길가에 예쁘라고 놓은 작은 정원석을 들고는. 그걸 흉흉한 모습으로 번쩍 치켜올려서. 주변에 사람들은 그들을 어떻게 보았을까? 어떤 눈빛으로, 어떤 감정으로 쳐다보았을까? 돌덩어리에서 흙이 툭툭 떨어지는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하지만 돌은 빗나갔다. 후배는 불쾌한 낌새를 눈치채자 재빨리 몸을 돌렸고, 어디에서 나왔는지 감도 못 잡겠는 남자가 하티의 손을 꺾었다. 돌은 후배의 머리가 아니라 튀어나온 남자의 발 위로 떨어졌다. 그대로 연행이 되었다.

괜찮아요?

시베라이트가 후배를 향해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앞서 말했듯 없었다. 인파는 시베라이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귀걸이. 귀걸이를 보고 있었다. 시베는 걱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걱정받지 못했다. 그는 홀로 남았다. 웅성웅성 몰려든 사람들 속에서 멍청하게 서있었다. 그들을 뚫고 나가 후배를 찾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발 끝만 보고 멍하게 서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사람들은 거의 다 해산한 뒤였다. 어떤 여자가 머뭇거리며 시베라이트에게 뭔가 물어보려고 했지만 부끄러운 것인지, 시베가 위험한 사람일거라고 생각한건지 그냥 자리를 뜨고 말았다. 여자는 무슨 질문을 던지려고 했을까? 시베라이트는 무엇을 답했을까?

저, 요즘 잘 풀리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렇게 말을 해야했을까? 그렇다. 시베라이트는 요즘 잘 풀리고 있었다. 석사는 문제없이 통과되었다. 박사도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논문 디펜스가 약간은 버거웠지만 시베라이트는 그만큼 실력이 있었고, 그보다 더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아직 막내 조교일 때 만난 남학생과도……. 시베라이트는 남학생에게 손수건을 빨아 돌려주었다. 어머니들이 중요한 때에 쓰라며 준 향수를 살짝 뿌려 손수건의 구김을 감춰보려 했다. 남학생은 그걸 알아차렸는지 작게 웃었다. 두 사람은 종종 만났지만 아직은 어색했다. 후배님. 선배님. 보다 가까운 호칭을 붙이고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후배는 어느 면에서 시베라이트보다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에 대해 많이 알았다.

무정부주의, 아.

시베 역시 공부해본 적 있는 분야였다. 시베라이트는 당당하게 경제적 정책은 공산주의적 기반 위에서 이뤄져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는? 정부 형태는 무정부여야하는가? 흔쾌히 “네” 라고 말하기에 무정부주의는 이론적 공백이 너무 많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꼬리를 물고 이론적 모순에 빠져 허덕이고 있지 않던가.

무정부주의는 정부 형태에 대해 말하면서, 정부론 조차 없잖아요, 후배님.

시베라이트가 커피를 앞에 두고 말했다. 후배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무정부주의에 정부론이라뇨?

우습겠죠. 모순되어보이고. 하지만 정부가 없어진 뒤의 사회 형태에 대한 어떤 비전을 제시해야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게 무정부주의의 정부론이 되겠죠.

후배는 눈을 반짝이며 시베라이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어느 면에선 후배가 시베라이트보다 많이 알았다. 권력 구조의 모순이라던가, 여왕제와 귀족제도의 헛점 등, 유독 권력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무정부주의에 대해 후배는 시베라이트에게 종종 물었지만, 시베는 그 이상으로 답을 하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기도 없었거니와 그 얘기를 하면 하티 웨인즈가 자꾸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나코 일리걸리즘. 하티는 테러를 통해 무엇을 이룩하려고 하는가? 시베는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 선배님, 또 뭐 때문에 한숨이에요? 제가 좋은 것 물어왔다고요.

후배는 너스레를 떨며 시베라이트를 달래주었다. 후배가 “물고온 것” 은 진보 성향 잡지사 정기 연재 자리였다. 후배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 선배님은 정치사회부 논객이 된거라고.

고료는?

시베라이트는 걱정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시베라이트는 박사를 따기 위해 일을 해야만 했다. 조교 월급으로는 부족했다. 아르바이트는 오래 하지 못해 단기 아르바이트 위주로 알아보느라고 버는 돈은 많지 않았다. 만약 고료가 없다면 없는 시간을 쪼개 잡지사에 연재를 할 수 없다. 후배는 당황했다.

없……. 없지 싶은데요.

두 사람 가운데에 끔찍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베라이트는 자신의 입으로 생각이 없음을 표현해야했다. 자신의 무언가가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그걸 어떻게든 못 본 척 하고 싶어서 시베라이트가 물었다.

우리, 데이트 할래요?

후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시베는 그걸 보고 웃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지만, 어떻게든 잘 풀어나가고 있었다. 박사 과정도, 하티 일도, 그리고……. 연애사도.

하티 웨인즈 씨의 테러를 다들 기억하고 계실겁니다.

교수가 강의실을 오가며 손바닥을 짝짝 쳤다. 학생들이 술렁였다. 시베라이트는 속이 울렁거렸다. 리아흐스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하티는 마라 소프와 귀족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리아흐스가 숨겨둔 무기를 빼돌렸기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티는 잊힐 때 즈음이면 귀족들에게 총을 쏘았다. 교수의 이어지는 말은, 테러는 용납할 수 없지만, 여왕직과 귀족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를 주고 있다고. 여왕제는 선출직이긴 하지만 직접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발전된 사회 형태로 이행하기 위한 발판 중 하나일 뿐이지 영원히 여왕직을 선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시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도망치듯 강의실을 나오려고 하자, 교수가 한발 앞 서 시베라이트를 막았다.

잠시 교수실로 왔으면 하네.

교수는 시베에게 차를 내주고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자네가 하티 웨인즈 씨와 긴밀한 관계임을 알고 있네. 소꿉친구라고 들었는데.

시베라이트는 등골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하티의 범죄 때문에 사복 경찰이 붙었다는 것을, 시베라이트는 알고 있었다. 시베는 공부를 끝내야 했다. 하티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지만 자신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티와의 약속을 지켜줘야했다. 그러려면 자신은 연행되면 안됐다. 조용히 공부했다. 논문 내용으로는 연행되지 않기 때문에 시베는 글자 하나하나가 인두가 된 것 처럼 논문을 써댔다.

저, 죄송하지만…….

아.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궁금하겠지. 뮬 루이터 박사에게서 들었네. 자네를 고발하는 늬앙스는 아니었어. 어쩌다 흘리듯 말했는데, 내가 그걸 기억해서.

교수님, 사실 이런 말씀을 시작하신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시베라이트 예비 박사, 나는 자네에게 제안을 하고 싶어요. 하티 웨인즈 씨를 돕고 싶거든. 그 사람의 자수를 유도해주면 내가 그 사람의 변호를 맡겠네.

시베라이트는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티의 자수는 자신도 원하는 것이라며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하티는 야생 늑대였다. 누구든 하티를 잡아 그의 머리를 벽난로 위에 장식해놓고 싶어했다. 리아흐스에서 연락이 없는 것을 보니 잘 도망치고 있는 것 같았다. 시베라이트는 어떻게 잘 해보겠다고 무엇을 잘 해야하는지도 모르는 채 얼버무렸다. 그래도 후배가 있으니까. 시베라이트는 공부에 매진해 약간 맹해보이는 인상의 후배를 생각해냈다. 두 사람은 급작스럽게 만났고, 권력구조에 대해 토론했다. 그리고 상당히 뜬금없이 시베라이트는 말했다.

우리, 데이트 할래요?

데이트는 하티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 시베라이트는 혼자 남겨졌다. 아이처럼 울면서 엄마라도 찾고 싶었지만, 시베라이트에게는 어머니들이 없다. 절연했다. 그럼 나는 뭘 찾아야하고 뭐에 의지해야한단 말인가? 시베라이트는 지금 이 상황을 직시할 수 없었다. 바로 본다면 시베는 피를 토하며 죽을 수도 있었다. 시베는 그래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후배님.

시베라이트가 연락을 남겼다.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어요. 많이 다친게 아니면 우리 같이 얘기해요.

그래서 시베라이트는 울드렌과 얘기했다. 울드렌은 시베라이트 앞에서의 맹한 모습을 벗어던지고 평소의 당당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다가갔다. 시베라이트는 이미 취해서 그 둘의 차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뭔가 달라졌다고 생각을 했을 뿐이다. 아니,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이 내가 알던 후배가 맞나? 그러나 시베라이트는 지쳤다. 알아보고 연구하고 진실을 밝히기에는 시베라이트는 너무 지쳤다. 하소연하고 싶을 뿐이었다. 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단어들을 쏟아내고 계속 쏟아냈다. 울드렌은 웃었고, 시베라이트는 따라 웃었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시베라이트는 술집이 아니라 자신의 방에 누워있었다. 입을 맞췄던가? 아니면, 하룻 밤을 같이 하였던가. 알 수 없었다. 이 불안한 마음이 차라리 기억이 없는 밤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티에게서 연락이 와있었다.

네가 보고싶었어. 그리고 보여주고 싶었는데, 왜 넌 날 배신한거지?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