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라이트 평전 - 낙원

낙원 탈출 계획 1

시베라이트 평전 - 인간의 나이로, 30대 중후반.......

그 날의 풍경은 시베라이트는 광기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시베라이트. 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있었다. 갈 길을 잃은 눈길은 마라 소프를 노려보기에는 강단이 없었고, 그렇다고 순순히 떨구기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하티라면 저 사람의 목을 조르고 울드렌의 눈을 찔렀겠지. 노려볼지 말지 힐긋힐긋 저 여인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권력 앞에서 이렇게 초라하다니. 자신의 옆에는 절연한 어머니들이 서있었다. 아무리 네가 방황해도 그렇지, 결국 우리에게 영광을 가져올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시베는 결국. 눈길을 떨구었다.

그걸 바랐다는 듯이 자신에게 작위가 수여되었다. 마라 소프는 단아하지만 아름다운 칼을 들었다. 리프 미학의 정수였다. 왜인지 따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라 소프와 테키언의 능력일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그리고 끝이었다. 끝? 울드렌 소프가 선언했다.

시베라이트 래디언트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보여 반란분자 색출에 앞장섰으며, 그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는 후작위를 수여한다.

네가 울드렌 소프 대공이었다고.

사라지는 남학생의 등 뒤에다 소리쳤다. 네가 울드렌 소프 대공이었다고. 내가 하티 웨인즈의 친구였기에 내게 접근한거고, 웃기지도 않는 “순진한 남자애” 역할을 한거고, 또,

맞다.

울드렌 소프는 질린다는 듯이 얘기했다.

작위를 줬으니 너도 섭섭하진 않을텐데?

그게 아니지.

시베는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게 아니지!

그래. 그건 아니겠지. 하지만,

난 이 작위를 거부한다.

울드렌 소프는 안타깝다는 듯이 눈썹을 내렸다.

그럼 넌 하티 웨인즈와 같은 감방을 쓸텐데.

뭐?

말 그대로. 작위를 받거나, 반란분자로 고발당하거나.

뮬 루이터가 갑자기 생각났다. 아무 생각 없이 자신과 하티의 친분을 떠벌리고 다닌 사람. 뮬에게는 즐거운 수다였겠지, 그 때문에 몇 번 들볶임을 당한 것을 생각했다. 하티의 머리는 결국 왕가의 벽난로 위에 장식되었는데 다들 뭘 그렇게까지 했는지 갑자기 우스워졌다. 시베는 지쳐서 낮게 큭큭 웃었다. 울드렌 옆에 있던 키 큰 남자가 작게 움직였고, 울드렌은 그를 제지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한거지?

대공 나으리, 작위가 있으면 뭘 해, 나한테 필요한건 박사학위인데.

울드렌은 활짝 웃었다.

최고의 교수에게 자네의 논문을 통과시켜달라고 하지.

하티, 네 말대로 공부를 했고, 받을 수 있는 학위는 다 받았어, 너는 그 동안 뭘 했는지 들려줘. 시베라이트는 입 안에서 쓰게 배신자라는 단어를 굴렸다. 하티는 배신자였다. 그리고 시베라이트도.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너무 오래 시간이 걸렸다. 시베는 하티를 구해내기 위해 고군분투 했지만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베라이트는 하티의 배신자라는 이름을 가져가기로 했다. 작위 수여식이 끝났지만 아무도 박수를 치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그걸 일부러 연출했다는 듯이 왕족들은 자리를 떴다. 시베라이트는 연단에서 초라하게 퇴장했다.

시베라이트는 초라한 삶을 이어나갔다.

그 이후로.

계속.

박사 학위 소지자이자, 후작인 시베라이트는 괜찮은 연구원을 골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교수와 친구들을 고발했다는 소문은 시베라이트가 연구원에서 배척받는 이유가 되었다. 받아들였다. 자신이 후작위를 받아들이면서 안고 갈 일이라고 생각했다. 엘릭스니 정책 연구원에서 시베라이트는 혼자서라도 뭔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희망도 잠시, 시베는 엘릭스니들을 본 적도 없는 각성자 연구원들 사이에서 국가가 원하는 연구, 국가가 원하는 리서치, 국가가 원하는 설문조사를 해야했다. 그래도 뭔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신, 리아흐스 알지.

갑자기 어떤 연구원이 시베라이트를 덜컥 붙잡았다.

불쾌해요.

시베는 그의 손을 억지로 떼냈다. 연구원은 독같은 숨결을 내뱉었다.

얼마 받고 그를 팔았지?

리아흐스 마저. 하티의 은신처를 마련해주기로 했다. 시베라이트는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구원은 시베를 뒤로 세게 밀치고 도망쳤다. 시베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울지 않았다.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티가 이겼다, 그 녀석은 시베라이트의 배신자지만 시베라이트는 하티와 리아흐스의 배신자였다. 하티는 한 명만 배신했다. 시베는 죽은 눈으로 일을 했다. 국가가 원하는 연구를 해주고, 국가가 원하는 결과를 내주었다. 동료들은 그를 따돌렸다. 상사들은 고발당할까봐 그의 앞에서 몸을 사렸다. 시베라이트는 죽은 눈으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는 점점 기괴하게 변형되었고 거기서부터 도망치려면 그는 죽어야했다.

일이 많아서 야근을 해야겠어요.

시베라이트가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서류를 정리했다. 네, 하는 짧은 말 한 마디가 전부였다. 야근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몇 명 있을 것이지만 누구도 시베에게 저녁을 같이 하겠냐, 법인 카드로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 이런 말을 하진 않았다. 시베가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연구실 안에 종알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베라이트는 시간에 맞춰 저녁을 먹고 오겠다며 연구실을 나섰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편의점에 들러 가장 독한 담배와 맛대가리 없는 위스키를 하나 샀다. 연구소에서 몇 분 걸어 나오는 작은 공원에 앉아서 담배갑을 서툴게 뜯고 위스키 병을 돌려 열었다. 술을 한 모금 마시고 크게 기침을 했다. 인상을 찌푸린 채 담배의 어느 부분이 입에 닿는 것인지 고민하고 있자, 한 여자가 담배를 탁 소리 나게 뺏었다. 여자는 담배가 자기 것이라는 듯 입에 물었고, 익숙하게 담배를 피웠다.

진짜 이걸 피려고 했어?

여자는, 목소리마저 익숙했다. 시베는 여자를 들여다보며 술을 천천히 삼켰다.

시베라이트. 오랫만이야. 나야,

여자가 담배를 빨아들이고 다시 연기를 내뱉었다. 나야, 뮬. 시베는 놀라 일어섰다. 그 바람에 술병이 와장창 넘어졌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술병에서 술이 꿀럭꿀럭 쏟아졌다. 시베라이트는 잿빛으로 질려 뮬을 쳐다보았다. 뮬은 담배 때문인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인지 고개를 살짝 돌려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왜……. 왜 나한테 왔어?

뮬이 꽁초를 휴대용 재떨이에 비벼 껐다.

이 담배, 내가 가져간다.

왜 왔냐고 묻잖아!

시베라이트는 회사에서 당했던 것들의 복수를 하려는 듯 뮬의 뺨을 있는 힘껏 쳤다. 뮬의 뺨에 자줏빛 자국이 났다. 시베라이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눈물을 흘린 것은 뮬이었다.

미안해, 시베. 하지만 도와달라고 할 사람이 너 밖에 없었어.

빚이라도 졌나보지? 도와줄 수 없어.

얘기하기 곤란해.

내가 아직도 네 후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뮬 루이터.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우리를 버리지 말아줘.

시베라이트는 뒤돌아 뛰었다. 술을 두 모금 밖에 마시지 않았지만 속이 울렁거렸다. 밤바람에 눈가가 보랏빛이 되었다. 울지 않는다. 시베는 평소보다 늦게 연구실로 돌아왔다. 땀에 푹 절은 시베라이트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연구원에는 시베밖에 남지 않았다. 작게 알림이 떴다. 학술 사이트였다. 지금 로그인을 해두고 있긴 한데,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확인해보니 단순한 알림 문자였다. 시베의 논문이 인용되었다는 알림. 그 논문은 시베의 박사 때 논문이었다. “공산주의적 관점에서 본 엘릭스니 분리주의“의 논문 인용이 1건…… 시베라이트는 멍하게 그 알림을 보았다. 그 논문이 인용이 되는 일은 없었다. 시베라이트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눈물이 흘러 그의 뺨을, 턱을, 잔뜩 적시고 말았다. 시베는 울지 않았다. 울어서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시베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흐르는 눈물을 닦고 굳건하게 걸었다. 회사 밖에는 뮬 루이터가 서있었다.

뮬.

울었어?

그게 중요한게 아니에요. 저에게 도움을 요청할 게 뭔가요?

미리, 고마워.

시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베라이트는 자신의 인생을 망친 것이 아니었다. 시베라이트는 결코 순진하게, 바보같게, 주변 사람들을 팔아먹은 것이 아니었다. 권력이 하고자 하면 그 일은 대부분 이뤄진다. 특히, 개인에게는. 뮬 루이터가 운전을 하며 말했다.

시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나……. 엘릭스니를 사랑하게 됐어.

이름은 피낙. 리프에서 태어난 젊은 엘릭스니고, 리프의 문화에 익숙하며, 스피치어를 하고, 스스로를 리프-늑대의 엘릭스니로 생각한다. 그러나 리프는 그를 그냥 “몰락자” 라고 말한다. 리프의 국민이 아니라. 뮬은 일 때문에 피낙을 처음 만났다. 피낙은 각성자들이 그러하듯, 스스로를 여성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뮬은 그게 우습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우스운 감정은, 정말로 우습게도, 사랑으로 변하였다.

뮬. 저도 얘기할게요. 저 아직 당신을 용서하지 못했어.

이해해. 결국 시작은 내가 하티와 네 관계를 떠벌리고 다녀서 그런거잖아. 후작위를 거절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건 왜 그런거야?

안 받으면 나를 잡아가겠다고 했으니까.

깊은 침묵이 이어졌다. 뮬은 사과로 끝날 수 없는 일이 시베라이트에게 벌어졌음을 알아버렸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뮬은 찢어지는 심정으로 말했지만 시베에게는 그냥 통상적인 탄식이었다.

뮬, 나는 리아흐스를 고발했어요. 내가 한게 아니라 울드렌이 한 것이었지만, 내가 울드렌에게-…….

말하지 않아도 돼. 사실 리아흐스 때문에 너에게 갈까 말까 고민했거든. 근데 난 이제 진실을 알았어. 너를 의심하지 않아, 이젠.

피낙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피낙은 내 말을 들어.

뮬 루이터의 집에는 탈피를 몇 번 안 해본 것 같은 젊은 엘릭스니가 있었다. 뮬보다는 나이가 적겠지만, 그렇다고 뮬을 도둑이라고 놀릴 정도는 아니어보였다. 시베는 뮬에게 장난이나 걸려는 자신의 생각에 놀라 헛기침을 했다. 피낙은 유창한 스피치어로 말했다.

엘릭스니의 권익 증진은 불가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단체로 망명을 떠날 것이고, 그게 불가하다면 이 항성계를 벗어나 새로운 땅에 정착하여 공동체를 만들 것입니다.

피낙!

뮬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시베를 본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런 얘기를 꺼내? 내가 조심, 또 조심해야 한댔잖아.

피낙은 웃었다. 엘릭스니의 소리가 아니라, 각성자들이 내는 “하,하,하,” 소리로 웃었다! 시베라이트는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피가 도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앞에서 시베라이트는 큰 소리로 울었다. 뮬과 피낙은 당황해 시베를 안아주었다. 시베는 그 안에서 아이처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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