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애화 - 2
카이멜 시레노바 x 리비에르 시라 (1000일 AU 로그)
D+500
맑은 날의 저녁이었다. 하얀 벽돌이 깔린 광장의 분수 근처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주황빛 노을 아래, 시계탑의 시곗바늘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리비에르는 1초, 2초, 움직이는 시계탑을 올려다보았다.
6시 59분.
바람이 상당히 쌀쌀한데 오늘은 이만 집에 들어가야 할까.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10월이 막 시작된 날씨에 두꺼운 겉옷 하나 걸치고 나오지 않은 것은 자신의 실수였으니 누구를 탓하랴. 생각은 그리하면서도 리비에르의 발은 버스 정류장과 정반대에 위치한 광장의 중앙 분수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냥,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뎅, 뎅, 뎅…… 시계탑의 종이 일곱 번 울려 퍼졌다. 매일 울리는 시계의 종소리였지만 그 잔잔한 울림에 오늘은 새삼스레 그리운 향수가 느껴졌다.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인데, 왜 이리 감성적일까.’
왁자지껄,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속에서 마치 혼자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리비에르는 홀로 깊은 생각에 빠져 걷다가, 앞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둘 다 넘어지는 사태는 간신히 면했지만, 상대방의 손에 들린 가방이 바닥을 구르면서 안에 있는 물건이 와르르 쏟아졌다. 리비에르의 정신이 빠르게 현실로 돌아오며 입이 자동으로 사과를 꺼냈다.
“앗, 미안해요. 딴생각하다 보니 그만.”
쭈그려 앉아 물건을 주워주려 손을 뻗은 리비에르는 상대방과 눈을 마주쳤다. 태양처럼 빛나는 금색 눈동자가 차분하게 리비에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운 얼굴선 옆으로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카락 위로 주황빛 노을이 쏟아져 내렸다.
…왜 순간 숨이 멈춘 것 같았을까.
확실히, 리비에르가 마주한 적발의 사람은 화려한 인상을 가진 미인이었다. 자연스레 호감이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리비에르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단순한 외모의 이끌림보다 조금 더 복잡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에서였다.
그저, 벅차오르게 반가웠다. 분명 이 섬에서 이런 사람은 본 적 없을 텐데, 분명 처음 만나는 외부인일 텐데. 마치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친구와 재회한 것처럼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사람 뒤로 저녁의 햇살이 비추고 있어, 눈이 부셔 눈물이 나는 것이었을까? 리비에르는 알지 못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차분한 목소리에 리비에르는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사과의 인사를 다시 건네며 리비에르는 살짝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정말 나답지 않은데. 오늘 왜 이러는 거지?’
그에게 어떤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으나 리비에르의 입술은 자연스럽게 다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마치 준비된 대사를 받아 읊는 기분도 들었으나, 리비에르는 심경이 워낙 복잡해 그 점에 크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저, 이 섬에서 처음 보는 사람인 것 같아서 좀 호기심이 들었거든.”
말을 꺼내고 보니 그럴싸했다. 리비에르와 부딪히는 바람에 바닥에 쏟아졌던 가방들은 다시 여성의 손에 들려있었지만, 얼핏 본 것만으로도 보통 하루 장 보는 사람이 구매할 양의 물품이 아닌 건 확실했다. 이 섬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 마치 최근에 새롭게 물품을 장만해야 할 일이 생긴 것처럼 각종 생활용품을 구매한다, 라.
“최근에 이사 왔나 봐?”
생각보다 친근하게 튀어 나간 말투를 깨닫고 리비에르는 뒤늦게 당황했다. 제멋대로 사는 인간이란 평가를 자주 받는 리비에르였지만, 은근히 사람과의 거리를 적당히 두는 그의 성격상 이제야 반말을 눈치챘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말투를 정정하려 입을 다시 열었지만, 의외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리비에르는 말없이 입을 도로 닫았다.
그냥,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다는, 미묘한 확신이 들었다. 상대방도 리비에르의 말투에 신경 쓰지 않았는지 무던하게 말을 받아주었다.
“오늘 아침에 막 이사를 끝냈네. 아직 소개도 하지 못했군. 카이멜 시레노바, 편한 대로 부르도록. 자네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카이멜. 카이멜, 시레노바.
그 이름이 혀에 녹아드는 맛은 달콤하고도 씁쓸했다. 부드럽게 굴러가는 그 발음은 처음 입에 담는 게 아닌 것처럼 익숙해, 리비에르는 순간 자기소개를 하는 것도 잊을 뻔했다.
“리비에르 시라. 만나서 반가워.”
너무나 익숙해, 이 사람이 제 이름을 이미 알고 있을 거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어쩌면 인연일 텐데, 혹시 도움 필요한 것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 줘. 이 섬에서만 인생의 반 이상을 살아서 모르는 게 없거든.”
정신을 차려보니 리비에르는 작은 메모에 자신의 번호를 휘갈겨 써 카이멜에게 건네고 있었다.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었을까. 처음 보는 사람이 이리 친근하게 다가오는데 당연하게 받아줄 것이란 예감은. 잠깐 망설이는 듯했으나, 카이멜은 이내 살짝 미소지으며 메모를 받아들었다.
리비에르는 환하게 웃었다. 하루의 마지막 햇살이 두 사람의 미소 위로 어느 옛날의 추억처럼 머물렀다.
* * *
참 오묘했던 그 저녁을 뒤로하고 일주일이 지나, 리비에르의 일상은 평소의 궤적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쥐어짜도 카이멜이란 사람을 과거의 흔적에서 찾지 못했기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친 느낌이 들어도 리비에르는 그저 기분 탓이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날 유독 피곤했거나 감수성이 쌓였었나 보지. 아니면 진짜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걸까?’
찜찜한 구석을 웃어넘기려 한 뻘생각이었지만 어째선지 카이멜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리비에르는 이내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설마? 진짜로? 내가 아무리 가벼운 성격이 탈이라는 말을 셀 수 없이 들으며 자라왔다만, 그래도 말을 나눈 것이 몇 분이나 됐다고, 이건 너무 빠르지 않나?’
탈선한 기차처럼 폭주하던 리비에르의 생각은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이 짧게 진동하자 간신히 멈추었다. 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진동에 리비에르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누구지?’
그러나 그의 손은 마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레 핸드폰으로 뻗고 있었다.
「 저번에 광장에서 만난 카이멜이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해도 좋다 해서 물어보네만, 이 섬에서 가장 큰 서점이 어딘지 알고 있나? 」
우연도 여러 번 겹치면 인연이랬는데. 이쯤 되면 진짜 네가 운명의 상대쯤 되는 것 아닐까? 리비에르는 끝내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웃었다. 어차피 깊게 고민하는 건 리비에르의 스타일이 아니었고, 우연이면 우연이랴, 인연이면 인연이랴,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 된 거, 카이멜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겸 다시 만나볼까. 잘 맞는 사람이면 친구가 생기는 거고, 설령 아니더라도 이 작은 섬에 살면서 언젠간 다시 마주치게 될 텐데, 미리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몇 번의 짧은 문자가 오간 후 리비에르는 다음날 11시, 광장에서 카이멜을 만나 서점으로 안내해주기로 약속을 잡았다. 리비에르는 빙긋 웃으며 마지막으로 답장을 보냈다.
「 그럼 내일 광장 분수 앞에서 보자~ 」
짧고 발랄해 보이는 문자를 끝으로 리비에르의 마음 또한 핸드폰처럼 잠잠해졌다. 풀지 못한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잡은 것처럼 조금은 후련해진 느낌이었을까. 리비에르는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날을 고대하며 잠에 들 수 있었다.
10월 중순으로 넘어가는 날씨는 서늘했지만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어제, 그저께 쏟아진 비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해가 쨍쨍하게 옅은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리비에르는 눈가 위로 손을 올려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맞물려 흐려질 정도로 청명하고 푸른 날이었다.
하늘의 색을 닮은 리비에르의 눈동자가 얼핏 현관 우산꽂이를 스쳤다. 두 사람은 너끈히 쓸 수 있을 것 같은 장대 우산을 지나쳐, 리비에르의 손은 자연스럽게 작은 접이식 우산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잠시 멈칫, 고민하다 도로 내려놓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큰 우산을 가져가는 게 나으려나~ 여차하면 둘이 쓸 수 있는 게 편할 테니까.”
비구름이라곤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이었지만 이 섬 주민의 오래된 관록이었을까? 리비에르는 오늘 이 우산이 요긴하게 쓰일 거란 예감이 들어 망설이지 않고 장대 우산을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
리비에르가 광장에 도착했을 무렵, 시계탑의 큰 손은 11에 가까워져 있었다. 멀리 찾을 필요도 없이, 카이멜은 분수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를 향해 다가가며 리비에르는 살짝 고민했다.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 평범하게, 좋은 날이라고만 말을 건네볼까?
“좋은 날이네, 리비에르.”
리비에르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말간 눈웃음으로 휘었다. 마치 자신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건넨 인사인 것만 같아, 절로 입가에도 웃음이 지어졌다.
“응, 산책하기에 딱 좋은 날씨네. 오래 기다린 건 아니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젓는 카이멜에게 리비에르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손짓했다. 이쪽으로. 서로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둘은 서점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올랐다. 둘 사이 많은 말이 오가진 않았지만, 리비에르는 조급한 마음이 들기는커녕 편안했다.
나중에 마음에 찰 만큼 대화할 기회가 올 것이라, 왜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조용한 서점 안까지 안내를 마친 리비에르는 집중하는 카이멜을 잠깐 관찰하다 이내 방해하지 않으려 시선을 돌렸다. 뭘 해야 할까, 나도 책이나 찾아봐야 하려나? 생각하기 무섭게 리비에르는 자신의 발걸음이 어느 책장 앞에 멈춰 서 있단 것을 깨달았다.
또 그 느낌. 이유를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의 시선을, 손을 이끌고 있다는 기분이 일었다.
리비에르의 창백한 손이 두꺼운 재질의 책을 책장에서 꺼내 들었다. 화려한 시계 그림이 그려진 동화책이 리비에르를 반겼다. 리비에르의 손이 홀리듯 표지를 넘겨, 동화의 첫 번째 페이지를 펼쳤다. 시린 색의 눈동자가 검은 글씨를 천천히 각인했다.
옛날옛날, 한 마법사가 살았습니다. 마법사는 굉장히 위대해서 못하는 마법이 없었답니다.
마법사는 마법이 담긴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아꼈던 물건은 마법의 별시계였습니다.
이 별시계는 매우 특별한 마법을 담고 있었습니다. 마법사가 직접 별의 조각을 모아 만든 이 시계는 세상의 시간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직 찾지 못한 책이 있는 건가?”
조용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에 리비에르는 화들짝 놀랐다. 그만큼 동화책에 깊게 빠져있었던 걸까. 몇 초 뒤 간신히 질문의 요지를 이해한 리비에르는 고개를 흔들고 동화책을 옆구리에 끼었다. 아직 보지 못한 뒷내용이 궁금하기도 했고, 문득 어린이집에서 자주 동화책을 읽어주던 아이, 마틸다가 이런 책을 찾고 있지 않았던가,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리비에르는 카이멜과 계산대로 걸어가며 동화책의 표지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마법사와 별시계 이야기.’
미약하게 두통이 일어 리비에르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옆에서 카이멜이 어디 불편한 데가 있냐 묻는 소리가 들려 표정을 풀고 고개를 저었다. 잠깐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아마도 그냥 기분 탓이겠지. 가볍게 넘겼다.
‘아니면 설마 비 탓이었으려나?’
서점 문을 열고 마주한 우중충한 날씨에 당황하기도 전, 들은 생각이었다. 리비에르는 멍하니 짙은 회색으로 변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우산을 챙기고 싶더라니, 오늘의 미묘한 기분도 저기압의 영향이 있진 않았을까, 리비에르는 머릿속 한구석에서 추측했다.
“아, 조금 곤란하네….”
카이멜의 혼잣말에 리비에르는 시선을 돌려 옆에 책을 팔 한가득 들고, 마찬가지로 비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카이멜을 눈에 담았다. 그의 난감해 보이는 기색에 리비에르는 카이멜이 우산을 들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음, 어떡할까….”
리비에르는 자신의 우산을 한 번,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물을 거의 폭탄처럼 퍼붓기 시작하는 먹구름을 다시 한 번 번갈아 보고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내 우산이 있으니 둘이서 쓰고 갈 수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책을 들고 있다 보니 책이 젖을 위험이 있겠지? 비가 조금 수그러들 때까지만이라도 어디서 잠깐 기다리지 않을래? 여기 건물 2층에 작은 카페가 있거든. 음료수라도 한잔 할까?”
리비에르의 제안에 카이멜은 잠시 고심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턱대고 빗줄기를 뚫고 갈 만큼 급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잠깐의 휴식 정도는 괜찮겠지, 그런 말을 하며 작게 미소지었다. 리비에르는 다시 서점 문을 열고 카이멜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기엔 시간이 걸릴 것 같았기에 둘은 건물의 2층으로 향하는 나선계단을 올랐다.
다다른 2층은 작지만 아늑해 보이는 카페였다. 카페 직원이 리비에르의 얼굴을 알아본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마찬가지로 짧게 인사를 마친 리비에르는 앞장서서 창가 근처의 푹신한 의자로 카이멜을 데려갔다. 슬슬 무겁게 느껴지는 짐을 빈자리에 내려놓고 리비에르는 빙긋 웃었다.
“섬에 온 환영의 의미로 오늘 음료는 내가 낼게. 음료는 어떤 거로 주문할래? 아메리카노 좋아하지?”
‘좋아해?’가 아닌 거의 확신에 가까운 물음인 것을 한발 늦게 알아차렸지만 정정하기도 전에 카이멜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네. 혹시 감이 좋은 편인가? 아니면 운이 좋은 편?”
반쯤 농담조인 말에 리비에르는 키득 웃으며 글쎄, 어느 쪽일까? 마찬가지로 장난스레 답하고 계산대로 걸어가 주문을 넣었다. 짧은 시간 뒤, 둘은 서로의 맞은편에 앉아 각자의 음료를 앞에 두고 비 오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비가 내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카이멜이 흘리듯 중얼거린 말에 리비에르는 시선을 카이멜 쪽으로 옮겼다.
“이 섬은 날씨가 상당히 변덕스럽거든. 여기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도 날씨만큼은 예측하기 어려워해. 오늘 아침만 해도 새파란 하늘이었잖아? 갑자기 소나기가 내릴 줄 나도 몰랐으니까.”
“그런 것 치곤 준비를 잘해왔던데. 아니면 장대 우산 정도는 늘 가지고 다니는 건가?”
…그러게.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리비에르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 평소 같았으면. 평소 같았으면 작은 우산을 비상용으로 챙겨 나왔을지언정, 큰 우산을 들고나올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텐데?
오늘 우산이 필요할 것 같다는 예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반대편에서 카이멜이 무슨 일 있냐는 듯 빤히 응시해오자 리비에르는 복잡해진 표정을 빠르게 정리하고 그 특유의 애매모호하지만, 겉으로나마 가벼워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오늘따라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감이 좋았던 걸까?”
리비에르는 자신의 청포도 에이드 컵을 톡톡 두드렸다. 네가 아메리카노를 좋아할 거란 예감이 들었듯이 말이야. 그 태평한 말투에 카이멜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알면 알수록 궁금해지는 사람이군, 자네. 이왕 이렇게 된 겸, 자기소개라도 해주지 않겠나?”
“소개야 얼마든지. 그런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뭐, 처음은 간단하게? 이름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리비에르 시라. 올해 스물다섯이고 이 섬에서 살아온 지 이제 15년쯤 됐으려나. 알만한 사람들은 거의 알고 지내다 보니, 이 섬에 외부인이 오면 괜히 호기심이 생겨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든단 말이지.”
한쪽 눈을 찡긋하자 카이멜은 눈꼬리를 살짝 내려뜨려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글쎄, 자네와 달리 내가 그리 흥미로운 사람일 거란 장담은 못 하겠지만. 그럼 공평하게, 이름은 카이멜 시레노바. 그러고 보니 우리 동갑이로군. 비슷한 나이대일 거라곤 예상했지만.”
나만 감이 좋은 게 아닌 것 같은데, 리비에르가 받아치며 머리를 굴렸다. 나에 대해 말할 게 달리 남아있을까? 왜인지 카이멜이 자신에 대해 벌써 알고 있을 것이란 착각이 계속 들어 망설이던 와중, 카이멜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그럼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이 섬에 대학은 없는 거로 알고 있어서 대학생은 아닐 거라 생각되는데 말이지.”
차분한 질문에 리비에르는 길을 헤매던 와중 방향을 제시받은 여행자처럼 활짝, 약간의 안도감을 담아 웃었다.
“맞아, 그래서 공부 좀 하려는 사람들은 섬을 떠나서 대륙으로 많이들 가지. 난 여기 어린이집에서 일하고 있어. 거창하게 선생님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고, 맞벌이 집안 아이들을 낮에 같이 놀아주고, 밥도 챙겨주고, 책도 읽어주고. 소소하다면 소소한 일이지.”
그러면서 리비에르는 옆에 놓인 책더미를 눈짓했다. 자신이 고른 동화책뿐만 아닌, 카이멜의 책에도 잠깐 시선을 준 리비에르는 해사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무엇보다 정식으로 발령받은 선생님은 따로, 내 앞에 있지 않아?”
카이멜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놀란 듯 동그래진 눈은 리비에르의 시선을 따라 자신이 고른 책을 흘깃 쳐다봤다가 이내 납득한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만 좋은 게 아니라 관찰력도 좋은 것 같군. 자네 같은 학생들이 많으면 내 일도 조금 쉬워지지 않을까 싶어질 정도네.”
“아하하, 과연 그럴까?”
그리 말하면서 리비에르는 스스로도 납득시켰다. 확실히, 카이멜이 고른 책의 대부분은 고등학교에서 쓰이는 교재였지만, 그 사실을 자각하기도 전에 이미 카이멜의 이 섬에 온 이유를 알고 있던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그럴 리가 없는데.
“고등학교 선생님이면 이곳에서 상당히 환영받겠네. 선생님이 많이 부족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어떤 분야의 심화 과정을 배우고 싶다면 여기선 조금 어렵기도 해서 말이야.”
내 동생도 그래서 지금 부모님과 같이 대륙으로 나가 있거든. 자연스레 화제를 전환하며 리비에르는 다시 스멀스멀 찾아온 묘한 기분을 떨쳐내었다.
그냥 단순히, 리비에르는 카이멜이 마음에 들었기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끌린 인연에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 * *
기시감.
카이멜과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며, 리비에르는 종종 찾아오는 오묘한 기분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말로는 ‘데자뷔’라고 할 수 있었을까? 분명히 몰랐어야 할 사실을 한 발짝 앞서 알고 있는듯한 친숙한 느낌을 달리 부를 단어가 없었다.
“가끔 보면 내 습관이나 취향을 다 꿰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보통 리비에르는 카이멜의 메뉴 선정에 터치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가끔 ‘이런 거 좋아하지 않아?’라며 가볍게 제안했을 때, 그의 선택은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카이멜의 취향에 적중했다. 처음 몇 번쯤은 카이멜도 놀라는 듯하였지만, 이제는 그저 웃으며 넘길 정도로, 예측 아닌 예측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아하하, 그러게. 그건 사실 나도 신기해.”
카이멜은 아마 리비에르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을 테지만, 리비에르 역시 기시감의 원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단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기시감의 빈도는 카이멜이 엮여있을 때 보다 자주 일어난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리비에르 선생님. 혹시 다음 주 크리스마스 축제에 카이멜 씨와 같이 갈 마음 없어요? 카이멜 씨는 이 섬의 크리스마스 축제가 처음일 테니 겸사겸사 안내도 좀 해주고.”
가령 이런 경우처럼. 리비에르는 아이들이 다 떠나간 어린이집의 놀이방 정리를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카이멜을 알게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런 제안은 처음 듣는 것이 맞을 텐데, 이상하게 질문이 귀에 익었다. 리비에르는 고개를 들어 어린이집의 원장인 헬렌을 올려다보았다. 헬렌의 주름진 눈은 막연한 기대로 반짝이고 있어, 리비에르는 실소를 흘렸다.
“한 번 물어보긴 할게요~ 아마 카이멜도 그때 시간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원장님은 이번 축제에 안 가시려나요?”
“아마도 그냥 집에서 벽난로나 때우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나이가 들었다 보니 슬슬 추운 바깥보다는 따듯한 곳에서 몸 녹이고 있는 게 좋거든요. 축제라면 지겨울 만큼 보기도 했고.”
“그것도 나쁘진 않죠. 이번 겨울엔 특히나 눈이 많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거든요.”
어머, 그래요? 여기 일 그만두고 기상청에 취직해도 될 것 같은데, 헬렌이 웃자 리비에르는 짐짓 무서워하는 척, 바들바들 떨었다.
“설마 절 자르시려는 건 아니죠?”
“우후후후.”
해가 점차 떨어져 추워지는 초겨울의 날씨 속에 유쾌한 웃음이 유난히 따스했다.
그날 저녁, 리비에르는 달력을 펼치고 핸드폰을 손에 든 채로 소파에 앉았다. 톡, 톡, 손가락 끝으로 12월 달력을 건들기만 몇 번째. 리비에르는 옆 탁자에 놓인 펜을 집어 들고 25일, 빨간 날짜에 두어 번 동그라미를 그려 넣고 곧바로 문자를 넣었다.
「 혹시 크리스마스에 따로 일정 잡은 거 있어? 달리 없다면 같이 크리스마스 축제에 한 번 가보지 않을래? 」
문자를 전송하기가 무섭게 전화가 걸려와, 리비에르는 하마터면 화면을 잘못 눌러 수신을 거절할 뻔했다. 급하게 전화를 받느라 발신인을 확인하지 못한 리비에르는 상대방에게 무난한 인사를 건넸다.
“네, 여보세요~”
“간만이다, 리비에르. 어째 전화가 이렇게 드무니?”
아, 어머니였구나. 리비에르는 자세를 약간 고쳐 앉으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전화 너머로 표정까지 전달될 리 없었지만, 그의 가벼운 목소리엔 애정이 배어있었다.
“음, 좀 오래되긴 했죠? 미안해요~ 요즘 새로운 친구가 생겨서 좀 바빴거든요.”
섬에 네 또래의 새로운 친구? 최근에 이사왔다니? 참 흔치 않은 젊은이구나. 뭐 하는 사람이니? 몇 번의 가벼운 질문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답변이 오가며 섬 주민들과 가족들의 안부를 나눈 지 조금 되었을까. 리비에르의 어머니는 통화의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리비에르. 혹시 다음 주에 휴가 낼 수 있겠니?”
“다음 주요?”
“그래. 올해는 우리가 섬으로 가기보다 네가 대륙으로 나와서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건 어떨까 싶었거든. 다른 일정이 없으면 헬렌 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며칠 휴가내서 나오면 시간도 넉넉할 것 같고.”
“그게… 음, 이미 다음 주에 약속이 되어 있어서요. 조금 힘들 것 같은데요.”
리비에르의 눈이 달력에 동그라미 친 25일에 와닿았다. 펜으로 그린 부분을 손으로 한 번 문질러도 이미 마른 잉크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리비에르는 그 사실에 문득 안도한 듯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고 전화기에 대고 다시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해요, 동생도 보고 싶긴 했는데.”
“그래, 이미 약속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여름에 한 번 휴가나 내서 나오렴. 그런데 그 약속은 누구하고 잡은 거니? 그 새로 사귀었다는 친구?”
“맞아요. 네네, 그럴게요.”
어머, 나는 또. 그런 일이었구나. 혹시 좋은 소식 있을 것 같으면 알려주렴. 리비에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짓궂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약간 어이없다는 눈으로 화면을 보던 리비에르는 뒤늦게 문자가 한 통 와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 딱히 없는데, 같이 가준다면 나야 좋지. 크리스마스 때 그럼 광장에서 만날까? 」
리비에르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오타가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빠른 손놀림으로 타자를 몇 번 두드려서 답을 전송한 리비에르는 기지개를 켜며 소파에 털썩 드러누웠다. 아직 꺼지지 않은 핸드폰 화면에 둘 사이에 오간 대화가 빛나고 있었다.
「 그럼 정확한 시간은 전날 정해서 가자~ 그때 봐~ 」
화면이 꺼지고, 벽시계의 작은 손이 10을 지날 때까지, 활짝 핀 웃음은 사라질 기미가 없어 리비에르는 생각보다 많이 들떴나보다, 자신의 감정을 그리 단정 지었다.
크리스마스가 되기까지 함박눈이 내렸다. 새하얗고 폭신한 눈이 이불처럼 거리를 뒤덮어 섬 주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삽을 들고 도보를 치우기에 바빴다. 리비에르 역시 자신의 집 앞은 물론, 어린이집 마당에 길을 터놓느라 바쁘게 팔을 움직여야 했다. 아이들은 마냥 신이 났는지 두꺼운 코트와 장화를 신고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며 마당에서 뛰놀았다.
“아무래도 진짜 기상청이 인재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추천이라도 넣어줄까요?”
헬렌의 우스갯소리에 따라 웃었지만, 리비에르는 점차 쌓여가는 눈을 보며 살짝 걱정이 들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축제가 열리는 광장은 사람들이 매일 아침 치우고 있다지만, 축제 당일에도 눈이 펑펑 내린다면 행사에 차질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가족 간 재회를 다음 기회로 미루면서까지 잡은 약속이었기에 그만큼 기대도 컸고, 만약 취소되기라도 한다면 아쉬움은 두 배가 될 것이었다. 때문에 리비에르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기대 반과 불안감 반을 품고 잠들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리비에르는 긴장한 얼굴로 방의 커튼을 걷었다. 새하얀 풍경이 옅은 눈동자에 눈부시게 비쳐 약간 미간을 찡그렸지만, 이내 리비에르의 표정은 환한 웃음을 띠었다. 밤새 내린 눈이 도로를 뒤덮고 있었지만,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들뜬 마음에 빠른 손길로 옷을 껴입는 리비에르의 눈에 옷장 한구석에서 작게 반짝이는 물건이 들어와, 리비에르는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작은 보석이 박힌, 푸른 다이얼의 손목시계가 옷장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 전에 그 이상한 책방에서 거의 강매당한 시계구나. 옷 주머니에 넣고 그대로 잊어버렸다가 떨어진 모양이네.’
허리를 숙여 시계를 주워들고 리비에르는 시계를 손에 굴리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조금 험하게 구른 것치곤 흠집 하나 없어 생각보다 튼튼한 물건인가보다 생각하기 무섭게 리비에르의 눈에 작은 하자가 들어왔다.
“보석이 하나 빠져있네?”
다이얼 숫자 12가 있어야 할 곳에는 작은 보석이 빠진 흔적만 남아있었다. 리비에르는 유리로 씌워진 다이얼을 톡톡 두드렸지만, 유리판은 흔들리기는커녕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떨어졌을 때 빠진 것 같지는 않은데…. 어차피 광장으로 갈 테니 책방을 찾아가서 물어봐야 하나? 아차.’
리비에르는 시계를 다시 들여다보고 일단 침대 위로 시계를 던져놓았다. 어느새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을 감수해야 할 시각이었다. 아무리 느긋한 성격의 리비에르였을지라도, 호감을 가진 상대와의 약속에 늦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리비에르는 버스에 오르고 나서야 시계를 잊고 나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달리고 있는 버스에서 내리기는 늦은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미리 도착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카이멜의 붉은 머리카락과 차분한 금색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오자 시계에 대한 생각은 싹 날아가, 시계를 잊은 것쯤이야 뭐 어떠리 싶어졌다.
뛰듯이 버스에서 내리고 광장에 모인 인파를 헤치며 카이멜에게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카이멜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리비에르를 올려다보았다. 쌀쌀한 날씨 탓이었는지, 아니면 축제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는지, 카이멜의 볼을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이 사이에서 자네를 어떻게 찾아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마침 타이밍이 좋군. 시력이 좋은가 보네”
“아마 그냥 평균일걸? 네 붉은 머리가 흔하진 않으니 더 확 눈에 들어온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저 안쪽으로 먼저 들어가 있었다면 찾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네.”
그럼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우리도 가볼까? 리비에르는 빙긋 웃고 카이멜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고 이끌었다. 장갑 낀 손이 맞닿고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손깍지를 끼었다. 서로의 체온이 두꺼운 천 너머로 느껴지는 착각도 들었을까. 둘은 초록색과 붉은색의 크리스마스 장식, 반짝이는 불빛, 경쾌한 금색 벨 소리가 가득한 거리로 들어섰다.
하얀 입김이 나오던 오전이 조금은 따스해진 오후로 넘어가고, 해가 점차 중천에 떠오르자 광장은 활기가 더욱 넘치기 시작했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웃음꽃을 얼굴에 피워내면서 광장에 열린 각종 판매대를 구경하고, 물 대신 눈이 가득 쌓인 분수대 안에선 눈사람과 동상을 만들며 유쾌한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축제의 열기 속에서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인파에 쓸리기도 하고, 잠시 멈춰서서 눈에 들어온 장식품을 구경하기도 하고, 조금 지쳤다 싶으면 비어있는 의자에 앉아 간식도 먹으며, 시끌시끌한 사람들 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었다. 얼마 돌아다닌 것 같지도 않았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하늘에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이 저녁 황혼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무언가를 한 게 참 오랜만인 것 같네.”
“나도 축제에 와서 이렇게 즐겨본 게 몇 년 만인가? 혼자 다니는 것보단 확실히 누군가 같이 노는 게 배로 즐겁지. 그게 카이멜, 너라면, 특히나.”
“별 소리를 다 하는군.”
얼핏 퉁명스레 들릴 만도 했으나, 옆으로 슬쩍 시선을 피한 카이멜의 얼굴에 싫은 기색은 없었다. 리비에르 역시 그 점을 빠르게 눈치채고 슬며시 입가를 휘었다.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한 듯 리비에르가 입을 열었으나, 시야 끄트머리, 가게 안쪽의 녹색 눈동자 한 쌍과 마주쳐 잠시 말을 멈췄다.
누구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녹색 눈동자의 소녀는 빠르게 사라져 자세히 살펴볼 틈은 없었다. 그러나 리비에르의 기억 속에 섬에서 저런 밝은 녹안을 가진 소녀를 본 기억은 없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리비에르는 잠깐 고민했지만 곧이어 근처 다른 곳에 관심을 빼앗겼다. 걸음까지 잠시 멈춰서는 바람에, 카이멜이 의아한 기색으로 리비에르를 돌아보았다.
“뭘 그리 보고 있나?”
“아, 저거.”
리비에르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둘은 몰려드는 인파를 피해 작은 판매대 앞에 다가갔다. 정교하게 맞춰진 나무판자 위에 작은 꽃장식이 나열되어 있었다. 목걸이, 팔찌, 핸드폰 걸이, 디자인은 조금씩 달랐지만 전부 똑같은 꽃을 묘사하고 있었다.
작은 노란색 꽃봉오리들을 둘러싼, 활짝 핀 푸른색 꽃잎이 어우러진 장식. 리비에르는 핸드폰 줄에 달린 장식 하나를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바다수국… 장식이네.”
이 섬의 특산품인 만큼, 리비에르에게 바다수국은 익숙한 꽃이었다. 매년 크리스마스 축제에 이 꽃을 본뜬 장식이 판매되기도 했고, 아마 모르긴 해도 최소 대여섯 개의 판매대에서 비슷한 장식을 팔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이 장식에 유독 관심이 가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 리비에르 씨. 장식 하나 사시게요?”
판매대의 주인이 리비에르를 알아보고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리비에르는 자신의 손에 들린 장식을 잠깐 내려다보고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거로 두 개 주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인사와 함께 포장된 장식을 받아들고 리비에르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카이멜에게로 돌아섰다. 빙그레 미소지으며 손등이 위로 향하게 내밀자 카이멜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손 또한 내밀었다. 검은색 장갑 위로 포장된 바다수국 장식 하나가 살포시 떨어졌다.
“우리의 첫 크리스마스 축제를 기념할 겸, 선물이야. 이 꽃, 바다수국이라고 부르거든. 섬의 유일한 특산품이어서 꽤 유명한데, 혹시 들어본 적 없으려나?”
“아니, 아직 들어본 적 없다만. 고맙네. 장식으로만 봐도 색이 참 예쁘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야.”
“그렇지? 사실 이 꽃의 진가는 밤에 나타나지만 말이야.”
잠시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카이멜은 고개를 기울였지만,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대신 장갑을 한 짝 벗고 포장을 뜯어 능숙한 손길로 장식을 자신의 핸드폰에 달았다. 작은 바다수국이 늦은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 * *
크리스마스 이후, 리비에르는 카이멜과 퍽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거의 매주 주말에 만나 경치 좋은 곳에 놀러 가서 식사도 하고, 가끔 작은 선물도 하고, 문자뿐만 아니라 종종 전화도 주고받고. 그렇게 서로와 보낸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3월이 끝나가며 거의 작은 산맥을 이루던 눈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리비에르와 카이멜 사이의 거리도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리비에르 선생님, 한 번 솔직하게 말해봐요. 두 분이 사귀는 거 진짜 아니에요?”
“으음, 아닌데. 별로 믿는다는 눈빛은 아니네요?”
적어도 ‘아직’은 아니죠. 리비에르는 속으로만 덧붙였다. 헬렌 역시 눈썹을 추켜세우며 팔짱을 끼는 것이 리비에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야근 후에 아이를 찾으러 온 보호자가 있어 리비에르와 헬렌은 늦게까지 어린이집에 남아 청소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청소는 뒷전이 되어 있었다.
“네에~ 그럼 그렇다고 해두죠.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다간 기회를 놓칠 수도 있어요? 카이멜 씨가 얼마나 호감 가는 사람인데요. 똑똑하지, 예쁘지, 능력 좋지.”
“그거야 저도 잘 알고 있긴 하죠….”
헬렌의 기세에 눌려 슬쩍 옆으로 눈동자를 굴린 리비에르의 눈에 전화가 걸려와 화면이 켜진 자신의 핸드폰이 들어왔다. 아, 무음으로 돌려놓고 알림 켜놓는 걸 까먹고 있었구나. 리비에르가 전화를 받아도 되는지 물으러 헬렌이 있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자 헬렌은 말없이 웃으며 받으라는 손짓을 했다. 리비에르는 감사의 뜻으로 빙긋 웃으며 전화의 수신 버튼을 밀었다.
“안녕 카이멜~ 좋은 저녁이야.”
“그래, 그런데 혹시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은 건가? 전화 받는 데 시간이 좀 걸리던데.”
리비에르는 상대방에게 보일 리 없는 미소를 지으며 창가 근처로 다가갔다. 붉은색 태양이 아주 희미하게 수평선에 걸려있었다. 확실히, 평소라면 이 시간이면 집에 도착해 있고도 남았었겠지. 리비에르는 전화 너머 카이멜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오늘은 어쩌다 보니 좀 늦어졌네. 막차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집에 가는 데 문제는 없겠지만.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했어?”
“혹시 다음 주 토요일 저녁에 시간 있나 물어보러 전화했네.”
“다음 주 토요일?”
목소리에 의아함이 묻어나는 채로 되물으며 리비에르는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토요일에 따로 일정이 있던가? 아마 없던 것 같은데. 리비에르의 주말은 언제나 카이멜을 우선으로 배정되어 있었기에 답이 나오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시간이야 당연히 있지. 무엇보다 어차피 내 주말은 늘 너를 위해 따로 빼놓는단 걸 모르진 않잖아?”
“허어.”
헛웃음이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왔지만 카이멜은 리비에르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 정확한 시간이나 장소는 정해뒀어?”
“그것까진 아직. 정해지면 따로 문자로 알려주겠네. 조심히 들어가고.”
“응, 그래. 그럼 좋은 밤~”
통화를 끝낸 리비에르는 문득 열렬한 시선을 느껴 뒤를 돌아보고 헬렌의 반짝이는 눈과 마주쳤다. 노골적으로 기대에 찬 시선에 리비에르는 그저 허허 웃으며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리비에르 선생님, 금요일 저녁엔 일찍 퇴근해도 좋아요.”
대신 월요일 출근했을 때 제가 좋아할 만한 소식 하나는 들고 와야 할 거예요. 괜히 그런 무언의 메시지가 전달된 것 같은 느낌에 리비에르는 허탈하게 웃었지만, 헬렌의 친절한 제안을 내치지는 않았다.
토요일 아침부터 리비에르는 설레는 마음을 품고 집안을 서성였다. 왜 약속이 하필 저녁이었을까. 타고나기를 느긋한 성격에 조바심을 느껴 본 적은 손에 꼽았으나 리비에르는 지금만큼은 시간이 빨리 흘러 약속 시각이 다가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 후로는 어디를 가는지 말을 안 해줬단 말이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몇 번이고 캐물었으나 카이멜은 완고하게 토요일 저녁을 기다리라는 말만 남겼었다.
그리고 드디어 약속한 시각이 다가오자, 리비에르는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저 멀리 황혼이 지는 바닷가가 보이는 길을 따라, 버스를 타고 달려서,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광장에 내렸다.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카이멜을 찾아 둘러보기를 몇 분,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카이멜과 눈을 마주치고, 리비에르는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둘의 저녁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카이멜은 리비에르에게 저녁 메뉴 선택지를 맡겼고, 리비에르는 잠시 고민하다 이태리 식당으로 골랐다.
“기왕 나한테 선택지를 맡긴 겸, 메뉴 추천도 받아보지 않을래? 여기 뭐가 맛있는지 알 것 같거든.”
리비에르의 자신감 있는, 그러나 어쩐지 애매모호한 말에 카이멜은 낮게 웃었다.
“알면 아는 거고, 모르면 모르는 건데. 알 것 같다는 건 또 무슨 뜻인가?”
“그냥 말 그대로? 한 번 믿어봐. 여태 내 추천이 틀린 적이 있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카이멜은 리비에르가 메뉴를 시키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반쯤은 자포자기한 심정이었지만, 리비에르의 말대로, 아직 그의 선택이 틀린 적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제 반쯤은 오히려 리비에르의 선택이 적중하길 기대하고 있었을까. 이번에도 리비에르는 카이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리비에르는 신선한 연어 샐러드와 따끈한 크림 파스타를 앞에 두고, 맞은편에 앉은 카이멜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어때, 이번에도 내가 맞았지? 카이멜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감이 좋은 건지, 눈치가 좋은 건지. 리비에르는 고개를 저었다.
“눈치가 그만큼 좋았다면, 네가 어디로 날 데려가려 하는지도 벌써 알고 있었겠지.”
“설마 아직도 눈치 못 챘단 말인가?”
리비에르의 눈썹이 둥글게 위로 휘었다. 설마 나를 진짜 독심술사나 예언가로 아는 건 아니겠지? 리비에르의 물음에 카이멜은 웃음을 터트리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이만 가볼까? 가는 동안 확실히 눈치챌 것 같으니까.
리비에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카이멜을 따라 일어섰다. 저녁 먹은 것을 계산하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리비에르의 표정은 바뀔 줄 몰랐다. 순한 얼굴에 변화가 생긴 것은 카이멜이 몇 대의 버스를 보낸 후, 섬 동쪽으로 가는 버스를 멈춰 세우고 리비에르에게 손짓했을 때였다.
‘아하, 설마 그쪽으로 가는 건가?’
단순한 추측이었지만 자신이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리비에르는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카이멜의 리드에 말없이 따랐다.
리비에르와 카이멜이 버스에서 내렸을 무렵, 누군가 하늘에 검은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밤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언덕 위의 작은 화원에 다다랐을 무렵엔, 작게 반짝이는 별들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역시나, 였나. 놀란 기색 없이 그저 조용히 웃는 리비에르의 모습에 카이멜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리비에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리비에르는 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밝게 웃으며 카이멜의 손을 잡고 화원의 유리문 안으로 들어섰다.
화원의 안쪽, 바다수국이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둘은 편안한 침묵 속에서 걸었다. 달빛이 유리천장을 통해 은은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리비에르는 카이멜을 돌아보았다. 그 어떤 바다수국보다, 카이멜은 리비에르의 눈에 환하고, 선명했다.
“네가 이곳을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크리스마스 때 장식을 선물 받은 이후로 조금 조사를 해봤지. 이곳의 특산품이라 알아내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네. 하지만 바다수국의 실물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기대했던 것보다 아름답군. 밤에 별처럼 빛나는 꽃이라니, 낭만적이지 않은가?”
“그렇지? 달빛이 내리는 화원에서, 아름다운 사람과 신비한 꽃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설레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인데, 리비에르.”
응? 순간 카이멜의 말이 머리에 늦게 입력되어 리비에르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카이멜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 리비에르에게 내밀었다. 푸르게 빛나는 꽃잎 사이로 작은 금색 꽃봉오리들이 반짝이자 리비에르의 심장이 한 박자 뛰었다.
꽃이 아름다워서였을까, 아니면 그 꽃을 나에게 내민 이가 너여서였을까.
“네 모든 시간이 나의 것이었으면 좋겠어.”
카이멜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살짝 상기된 그의 얼굴에서 카이멜이 조금은 긴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올곧은 금빛 눈동자는 흔들리는 법 없이 리비에르의 눈만 바라보고 있어, 리비에르는 마치 그 눈동자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심장이 뛰다 못해 터져나갈 것만 같았기에, 리비에르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매 순간 애정만 있길 바라게 되었을까. 언젠가부터 조금씩, 조금만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어쩌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네와 나 사이의 경계선이 흐려지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겠네. 그러나 이곳에서 내게 처음 다가와 준 게 자네라, 지금도 그게 참 기쁘고 행운이라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내미는 손을 자네가 잡아주지 않겠나?
리비에르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살짝 떨리는 손을 내밀어, 꽃다발을 든 카이멜의 손을 포개어 잡았다. 가까워진 둘의 얼굴을 바다수국이 환하게 비추었다.
“…이런, 선수를 빼앗겼네. 이번에는, 꼭 고백하고 싶었는데.”
‘이번’? 자신이 내뱉고도 의문을 모를 단어였지만, 맞닿은 카이멜의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기에 리비에르는 마냥 기뻐 의문에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이미 내 모든 시간은 네 것이야, 카이멜. 널 처음 본 순간부터, 너만을 줄곧 내 마음에 담아왔어. 나에게로 와줘서, 나에게 손을 내밀어줘서, 정말 고마워.”
월광이 찬란하게 빛나던 밤, 조용히 나눈 떨리는 고백. 그것을 사랑의 언어라 부르기에 한 치 부족함이 없었다.
* * *
달밤의 고백 이후로, 리비에르와 카이멜의 일상에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평소와 같이 주중엔 각자 출근하고, 주말엔 같이 식사를 하고, 시간을 보내며 달력이 넘어갔다. 구태여 달라진 점을 꼽자면 문자와 통화 횟수가 늘어났다는 것과 손을 잡는 등 소소한 스킨십이 잦아졌다는 것뿐일까. 둘 사이가 처음부터 워낙 담백했기에 큰 변화 없이도 만족했다.
그랬기에 주변 사람들도 처음에는 리비에르와 카이멜 사이의 작은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자 그중에서도 눈치 빠른 헬렌이 은근슬쩍 리비에르에게 물어왔다.
“리비에르 선생님, 요즘 카이멜 씨하고 굉장히 사이좋아 보이던데요.”
혹시…? 기대에 반짝이는 헬렌의 눈을 마주한 리비에르는 밝게 웃으며 끄덕였다. 망설임 없는 긍정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헬렌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활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죠! 처음부터 두 분 사이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네요. 어머머, 너무 축하해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헬렌을 보며 리비에르가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이렇게 좋아하실 줄 몰랐는데, 제 어머니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 같네요. 헬렌은 여전히 함박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머니까진 아니어도 솔직히 리비에르 선생님 이모 정도는 되는 느낌인걸요. 오죽 어렸을 때부터 봐왔어야죠. 그 조그맣던 아이가 다 커서 선생님이 되어 애들을 돌보고, 이제 연애까지 한다니!”
저런, 이제 섬 전체가 이 소식을 알게 되기까지 하루도 걸리지 않겠네. 리비에르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해 그다음 날부터 며칠간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질문 세례에 시달려야 했다.
들불같이 퍼진 소문이 잦아들고 조금씩 더위가 밀물과 같이 밀려들어 올 무렵, 리비에르와 카이멜의 주말 데이트는 섬의 흔한 일상이 되어있었다. 서로에겐 일상을 넘어서 상대방이 주말마다 자신의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무렵, 리비에르는 문득 말을 꺼냈다.
“그거 알아? 다음 주 목요일이 네가 여기 온 지 250일이 되는 날이라는 거.”
“그런가? 시간 참 빠르기도 하군. 자네가 그런 것까지 세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세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리비에르는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아니, 세고 있었겠지? 세세한 기념일까지 챙기는 꼼꼼한 성격은 아니었던지라 그 자신이 봐도 의외이긴 했었다. 그러나 10일, 한 달도 아니고 250일이나 되는 날을 그렇게 빠르게 계산해 낼 정도로 산수가 빠르진 않았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용건은 따로 있지 않았던가? 리비에르는 이미 지난 봄 날씨에 어울릴 법한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그날 저녁때 시간 괜찮으면 같이 저녁 먹지 않을래? 나나 너나 퇴근 후에나 만날 수 있을 테니 좀 늦어지겠지만.”
“음… 금요일이 학교 지정 휴일이라 괜찮을 것 같네. 그런데 그날 학교 행사가 있어서 평소보다 더 늦어질 수도 있고.”
“그럼 한… 7시 반쯤은 어때? 일이 7시에 끝난다 치고 이동 시간 넉넉히 잡으면 적당한 시각인 것 같은데.”
“그쯤이면 딱 좋네. 학교에서 떠나기 전 문자 하나 보내두지.”
그렇게 고대해 온 6월 11일이었다. 아침부터 리비에르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희한하게도 기분 나쁠 일은 전혀 없었지만, 어쩐지 아침에 기상했을 때부터 저기압인 상태가 이어져, 리비에르는 혹시 자신이 아픈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확인해도 몸은 멀쩡했기에 리비에르는 평소대로 출근길에 나섰다.
초여름 비가 한차례 쏟아지려는지, 하늘은 흐릿한 회색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리비에르의 얼굴에 습기 찬 공기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폭우라도 오려나, 리비에르는 버스에서 내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머리가 찌르르 아파져 리비에르는 인상을 찌푸리고 미간을 문질렀다.
‘…정말, 뭐지?’
단순하게 기분이 나쁘다고 하기엔 서늘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것이 소름 끼칠 만큼 불길했다.
꾸역꾸역 나간 어린이집에서도 리비에르는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런 리비에르에게 다행히도 부모들 역시 날씨가 심상치 않아 걱정되었는지, 대부분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6시가 채 되지 않았을 때 어린이집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두어 명밖에 되지 않았다.
“리비에르 선생님, 이만 들어가 보세요. 나머지는 내가 마무리하고 갈 테니까요.”
“네? 하지만….”
“보아하니 이 아이들도 조금 있으면 보호자가 데리러 올 것 같고, 오늘 선생님의 얼굴이 아침부터 영 안 좋아 보였는데. 혹시 어디 아파요?”
다른 사람 눈에도 이렇게 티가 날 정도였던가. 리비에르는 애써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유도 모르는 기시감으로 헬렌을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고, 진짜로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
“멀쩡해요~ 아마 날씨 탓 아닐까 싶은데. 아침부터 영 햇빛을 볼 수 없어서 말이죠.”
“정 그렇다고 한다면….”
헬렌은 영 못 미더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강하게 권유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찍 들어가세요. 진짜 할 일이 많이 남은 것도 아니잖아요? 나야 이 근처에 산다지만 리비에르 선생님은 버스까지 잡아야 하는데. 헬렌의 성화에 못 이겨 리비에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 시간이 한참 남은 채로 광장에 서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집에 다시 갔다 오기도 애매한 시각이라, 리비에르는 광장에서 하릴없이 돌아다니다가 작은 야외 카페에 앉았다. 카이멜을 만날 생각에 기대는 여전했지만, 이상한 저조함을 떨칠 수 없었다.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리는 것이 누군가 자신의 머릿속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리비에르는 멍하니 시계탑만 바라봤다. 얼른 약속 시간이 다가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째깍, 째깍.
…마치, 그때처럼…….
---째깍.
번개처럼 낯선 기억이 리비에르를 강타했다. 강렬한 파도처럼 물밀 듯이 옛 기억과 현재 기억, 익숙한 기억과 낯선 기억이 뒤섞여 리비에르는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수그려 두 손에 머리를 묻었다.
이상했던 가게. 10월 5일, 첫날의 만남. 책방에서 만난 소년과의 대화. 보석이 하나 빠진 시계. 알록달록한 동화책. 함께했던, 하지 못했던 크리스마스. 바다수국 화원. 어느 달밤의 고백. 6월 11일의 약속. 저녁, 7시.
사이렌. 해일. 그리고….
리비에르는 벌떡 일어섰다. 주변 사람이 놀라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생 그렇게 급하게 뛰어본 적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다리를 움직여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버스를 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리비에르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생각뿐이었다.
제발,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늦어선 안 돼.
쏟아져 들어온 해일에 관한 기억, 재해에 잃고만 소중한 사람. 창백하고, 또 창백했던 마지막 색깔이 뇌리에 남아 심장을 고통스럽게 찔렀다. 그에 비해선 폐에 이는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침내 리비에르의 눈에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고등학교가 들어왔다. 행사가 있다 하더니 야외행사였는지 많은 학생과 선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있었다. 리비에르가 뛰쳐들어가자 학생이나 선생이나 할 것 없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리비에르는 그에게 모이는 모든 시선을 깔끔히 무시했다. 차마 관심을 줄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했을지도 모른다.
애타게 고개를 돌리며 숨 막히는 몇 분, 몇 초가 지났을까. 드디어 눈에 익은 붉은 머리카락이 시야에 담기자 리비에르는 뛰듯 다가가 그 손을 잡았다. 느껴지는 온기에 아주 미약한 안도감이 들었다. 카이멜은 놀라 리비에르를 돌아보았다.
“리비에르? 자네가 왜 여기에….”
카이멜의 의문은 자신의 손을 잡은, 파리하고 떨리는 손길에 의해 멈췄다. 무슨 일이 있냐 묻기도 전에 리비에르가 숨을 가다듬고 다급하게 말했다.
“가야 해.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돼. 곧--”
처음에는 희미하게. 조금씩 날카로운 메아리가 커지며.
---왜앵, 왜앵, 왜앵!!
모든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아이, 어른 하나 할 것 없이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메가폰에서 터져 나오는 재앙을 알리는 소리에 얼어붙었다. 리비에르와 카이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리비에르였다. 리비에르가 카이멜의 손을 힘주어 잡자 카이멜도 잠에서 깨어나듯 흠칫 놀랐다.
“카이멜,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멀지 않은 곳에 대피소가 있어.”
학교가 아수라장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다른 선생들도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학생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카이멜은 리비에르의 간절한 하늘색 눈동자를 한 번 바라보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학생들을 두고 갈 수는 없어. 우선, 아이들부터 대피시키고.”
리비에르는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직감이 저 사이렌처럼 울리며 당장 카이멜을 데리고 대피소로 가라 외치고 있었지만, 리비에르 역시 선생님이었다. 학생들을, 아이들을 두고 가자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멈칫했던 것도 한순간, 리비에르는 카이멜을 도와 아이들을 대피소가 있는 방향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원체 인구수가 적은 섬이었기에 학생들의 수 또한 많지 않았다. 벌써 몇 명의 선생들이 선두에 서 아이들을 이끌고 대피소로 향하고 있었다. 리비에르는 뒤를 돌아보았다. 카이멜이 담당하는 아이들도 앞서가는 이들을 헐레벌떡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동장에 남아있는 사람은 리비에르와 카이멜, 그리고 두 명의 선생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다 대피했나요?”
리비에르가 서둘러서 묻자 카이멜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옆에 있던 선생들도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출석부를 전부 확인했는데… 한 학생이 없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으니, 잠깐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걸까 싶네.”
사이렌을 듣고 나오지 않았을까? 아니요, 아직 못 본 거로 봐선 학교에 남은 것 같아요. 혹시 겁먹고 어디로 숨었을 가능성은?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은데….
긴박하게 의견을 나누는 와중 이미 운동장 바닥은 젖어 눅눅한 흙냄새가 올라왔다. 리비에르의 시선이 바닷가로 향했다. 섬의 고등학교는 바닷가 근처에 있어 평소에는 전망이 좋다며 호평을 듣곤 했었다. 그러나 그 장점이 현재 무섭게 들이치는 자연재해 앞에선 치명적인 단점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물이 지어진 곳은 섬에서도 낮은 지대라, 이미 위협을 느낄 정도로 발 근처에서 물이 찰박이고 있었다.
한시라도 더 지체했다간 목숨이 위험했다.
“내가 가서 찾아오겠네. 먼저 대피소로 가서 기다려줘.”
단호한 한마디와 함께 카이멜은 학교로 뛰쳐들어갔다. 기겁한 선생들이 뭐라 하기도 전에 붉은 형상은 건물 안쪽으로 사라져 있었다. 리비에르는 망설이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까 구명튜브와 밧줄 좀 챙겨주세요.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나올게요.”
그 말과 함께 리비에르는 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카이멜을 쫓아 학교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도 카이멜은 한 교실, 한 교실을 둘러보느라 멀리 가지 않아 리비에르는 빠르게 그를 찾을 수 있었다.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교실 문을 하나씩 벌컥벌컥 열던 카이멜은 경악한 표정으로 리비에르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대체 왜 따라왔나?!”
“두 명이 찾는 게 한 명이 찾는 것보단 빠르잖아? 그리고 넌 대피소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모를 것 같기도 했고.”
카이멜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었는지 잠시 침묵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말싸움하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웠다.
두 명의 목소리가 빈 학교에 울리고, 애타게 얼마나 불렀을까. 몇 시간 같은 몇 분이 지나고서야 작은 목소리가 화답하듯 들려오자,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빠르게 구석에 숨어있던 아이를 챙기고 다시 건물의 정문을 나선 세 명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말을 잃었다.
하늘은 어둡고 캄캄했다. 단순히 밤의 고유색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이른 시각이었고, 밤의 베일이 포근한 검푸른색이었다면, 지금의 하늘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불길한 검보라색이었다. 그 밑으로 마치 하늘의 거울 같은 넘실거리는 검은 파도는 성인의 무릎까지 차올라있었다.
“리비에르, 대피소는 어느 쪽인가?”
카이멜이 빠르게 물었다. 아직 절망하기엔 이르다는 듯, 그의 손은 아이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으며, 단호한 눈동자는 아직 태양같이 빛나고 있었다. 리비에르는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목소리를 높여 거의 소리치듯 말했다.
“저 언덕길을 쭉 오르면 콘크리트 건물이 보일 거야. 하얀색 지붕! 쭉 직진이라 길을 잃지는 않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직진이든 뭐든,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기조차 힘들어 보인다는 점은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았다. 어떻게 움직여야 그나마 덜 위험할까. 카이멜이 입을 열어 학교 안에서 무언가 도구라도 들고나올까, 제안하려던 순간.
“시레노바 선생님! 리비에르 씨! 이쪽이에요!”
아까 남은 선생 둘의 목소리가 거센 바람 소리 위로 그들에게 들려왔다. 세 사람의 눈이 홱 돌아가자 그나마 잠기지 않은 언덕길 입구에서 밧줄을 나무에 단단히 매고 팔을 크게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안도감이 리비에르와 카이멜의 눈을 스쳤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들은 추를 단 밧줄을 리비에르와 카이멜이 있는 곳까지 던지는 데 성공했다. 무언의 동의 아래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밧줄을 아이의 허리에 단단히 묶고 난 후, 밧줄을 붙잡고 신호를 보냈다. 반대편에서 찬찬히 밧줄을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셋은 밧줄에 의지해 천천히 한 발씩 언덕길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무릎께에서 밀고 당기던 파도는 어느새 허벅지까지 차올라 있었다. 아이는 물론이거니와 월등히 키가 큰 리비에르와 카이멜 역시 휩쓸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러나 차근차근, 1센티미터씩이라도 안전지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한순간이었다.
강렬한 물살이 한차례 셋을 휩쓸었다. 숨을 토해낼 시간도 없이 잠시 셋은 검은 물에 잠겼다. 흠뻑 젖은 채로 셋의 모습이 다시 물 위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언덕길에 있는 선생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도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정확한 단어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손짓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밧줄을 묶어놓은 나무가 지나간 물살에 의해 옆으로 뽑힐 듯 기울어 있었다. 셋의 상황만큼 위태위태해 보이는 광경에 리비에르는 급한 손길로 학생과 카이멜을 언덕길로 떠밀었다.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절대로.
안전지대가 고작 몇 미터 안 남아있었다. 영겁과도 같은 시간 끝에, 리비에르와 카이멜의 끈질긴 손길에 학생이 물에 잠기지 않은 땅을 밟았다. 리비에르도, 카이멜도, 밧줄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던 선생들도 잠시 긴장을 놓았다.
전보다 높은 검은 파도가 덮쳐온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리비에르는 반사적으로 카이멜을 다른 이들 쪽으로 강하게 밀었다. 카이멜이 몇 발자국 땅을 밟고 휘청이는 것을 다른 선생들이 붙들었다. 마찬가지로, 카이멜은 반사적으로 리비에르에게 손을 뻗었다. 젖어 미끌거리는 손이 마찬가지로 차갑게 젖은 손을 아슬하게 붙들었다.
그러나 첫 번째 파도는 마치 경고였던 듯, 전보다 사납게 휘몰아치는 파도가 연달아 쳐, 맞잡은 손이 점차 빠져나갔다. 카이멜의 눈에 처음으로 검은 절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물살에 삼켜진 리비에르는 직감했다.
빠져나갈 수 없다. 그리고 동시에 상황과 동떨어진 감정이 밀려들어 왔다.
전과, 바뀌었다.
깊고 애절한 안도감이었다.
리비에르는 웃었다. 행복하지도, 밝지도 않은 미소였지만, 어두운 수렁에서 간신히 빛을 본 사람이 보일 법한, 구원받은 표정이었다.
“괜찮아, 카이멜. 괜찮을 거야. 너까지 다시 휘말리기 전에, 나를 놔 줘.”
카이멜이 물과 바람에 잠긴 유언과도 같은 말을 들었는지는 몰랐다. 손가락 끝이 끝을 스치며 온기가 떨어졌다.
남은 이의 절규 또한, 검게 섬을 물들인 해일에 삼켜졌다.
사이렌이 잦아들고, 검었던 파도가 한 수 물러간 후 대피소에서 간신히 나올 수 있었던 카이멜은 곧장 학교로 향했다. 한 차례 물에 잠겼던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리비에르의 핸드폰에 달려있었던, 줄이 끊어진 바다수국 장식뿐이었다.
얼굴 위로 흐르는 물줄기가 남은 파도의 잔해였는지, 쓰라린 상실의 눈물이었는지 그 누구도 몰랐다.
* * *
이 모든 것은 꿈이, 지독한 악몽임이 틀림없다고, 카이멜은 다음날까지 자신을 설득했다. 그다음 날은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한 눈물로 빌었다. 그러나 소리 없는 비명에도, 기도에도, 무심한 하늘에선 아무런 답이 없었기에, 사흘째 되는 날, 카이멜은 주먹을 꽉 쥐고 일어섰다.
울 만큼 울었다. 빌 만큼 빌었다. 그럼에도 바뀌는 것이 없다면, 그렇다면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사람들은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카이멜에게 한마디씩 위로를 건넸다. 최근에 이어진 연인에게 구해지고, 그 연인을 해일에 잃고, 이제 홀로 남겨진 이의 비극을 모두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더는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카이멜은 담담히 지인들의, 친구들의 위로를 들었지만, 그들에게 어떤 말도 돌려주지 않았다. 자신조차 그 슬픔에 동조했다간 리비에르가 영원히 떠나버렸다는 걸 인정할 것 같아서, 카이멜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실낱같은 희망일지라도, 아무리 희미한 가능성일지라도. 그것이 존재하는 한 카이멜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카이멜은 홀로 파도 속으로 실종된 리비에르의 수색에 나섰다.
처음에 사람들은 뻔히 보이는 결과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면서도 카이멜을 말리지 않았다. 카이멜이 그렇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면, 그냥 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을까.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카이멜의 수색이 멈출 기미가 없자 사람들은 점차 걱정어린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카이멜 씨, 그래도 조금씩 쉬어가면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러다가 카이멜 씨마저 쓰러지면 어쩌려고요.”
그러나 동료 선생님들도, 카이멜의 학생들도, 리비에르의 지인이었던 헬렌도, 그 누구도 카이멜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리비에르의 손을 놓친 장소, 섬의 고등학교에서 시작해서 중앙광장과 주택가, 바다수국 화원, 길게 늘어진 섬의 해안가, 상인들의 거리, 안 가본 곳이 없다 단언할 정도로 카이멜은 자신의 눈과 발에 의지하며 섬을 홀연히 떠돌았다.
리비에르의 푸른 머리카락 한 올조차 찾을 수 없었지만, 단 하루도 카이멜의 수색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을까. 카이멜은 다시 광장에 서 있었다.
광장은 고요했고, 고독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카이멜이 섬에 온 이후로 광장이 하루도 비어있는 날을 본 적이 없었기에, 괴리감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나운 물길에 휩쓸려 가게의 지붕과 간판, 시계탑과 분수대마저 일부 부서지고 무너져있었다. 그나마 큰 잔해는 사람들이 치워놨는지 폐허라 불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곳은 더는 리비에르를 처음 만났던 그 광장이라 부를 수 없었다.
앗, 미안해요. 딴생각하다 보니 그만.
마치 리비에르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아 카이멜은 젖어오는 눈을 깜빡였다.
아직은, 아직은 울 때가 아니야. 카이멜은 천천히 심호흡했다. 잠시만 쉬었다가 다시 일어서서 그를 찾으러 가자. 남아있는 분수대 난간에 걸터앉아 카이멜은 갈라진 벽돌 바닥을 내려보다, 눈을 감았다.
“……다시 만나네요.”
많이 낯선, 하지만 어쩐지 조금은 익숙한 목소리에 카이멜은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넓고 광활한 광장에,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무너진 잔해 속엔 두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품에 분홍색 토끼 인형을 안은, 채 열다섯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노을의 주황색을 담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두 갈래로 내려 묶은 소녀는 의미 모를 눈빛으로 카이멜의 수척한 모습을 응시했다. 민트색에 가까운 녹안은 청아했지만 차갑지는 않아, 카이멜은 심경이 복잡한 와중에도 소녀를 내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도 그랬지만, 왜 이리 소녀가 익숙하게 느껴졌을까. 혹여 언제 만난 적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물어보기도 전에 소녀의 시선이 카이멜에게서 떨어졌다. 소녀의 잠잠한 시선이 향한 곳은 광장의 무너진 시계탑이었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더는 돌아갈 리 없는 시계탑의 초침을 보며, 둘은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시계가 한 번 돌아갔네요.”
소녀의 녹안이 카이멜의 빈 손목을 향했다. 그제야 카이멜의 머릿속에 어느 한 옛날의 기억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너, 혹시 그때 책방의…”
카이멜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무너진 광장에 카이멜은 홀로 서 있었다. 마치 신기루였던 것처럼, 소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매섭게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카이멜의 머릿속에서 소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가 다시 흐려졌다. 이 섬에 도착한 첫날, 기묘한 가게에서 만났던 소녀, 그 소녀와 잠깐이나마 나눴던 이야기, 그리고….
…시계가 한 번 돌아갔네요.
카이멜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거칠어진 손이 빠르게 옷에 달린 모든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날, 학교 행사가 있던 날, 리비에르를 잃은 날 이후로 꺼낸 기억이 없으니 아마 여전히 가지고 있을 텐데. 마침내 카이멜의 손끝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닿자, 급하게 그것을 움켜쥐고 손을 주머니 밖으로 빼냈다. 카이멜은 멍하니 자신의 손에 들린 물건을 응시했다.
붉은색 다이얼을 가진 작은 손목시계. 숫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작은 보석들이 대신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숫자 12가 있어야 할 자리에 비어있는, 보석 하나를 제외하고.
시계의 초침은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째깍째깍, 작게 광장에서 메아리치는 그 초침 소리를 카이멜은 한동안 가만히 서서 듣고 있었다.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한 거지.”
조용히 중얼거리는 카이멜의 시선 언저리에 소녀가 바라보고 있던 광장의 시계탑이 들어왔다.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는 시계탑. 저 바늘이 7시를 가리키고 있을 때, 카이멜은 처음 리비에르를 만났었다. 카이멜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처음 만났던 그 시간, 그 시간으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번개처럼 소녀의 말이 다시 카이멜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시계가 한 번, 돌아갔네요.
카이멜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고, 허구와 허상 같은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자신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에 스스로 비웃고 넘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카이멜은 간절했다. 그 어떠한 허황된 가능성일지라도, 카이멜은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버릴 수 있을 만큼, 상실의 상처는 아물지 못했다. 피가 나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카이멜은 손에 든 손목시계를 꾹 쥐었다. 몇 분 뒤, 손을 다시 편 카이멜의 금색 눈동자에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다급한, 그러나 섬세한 손길에 따라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아갔다.
5시… 4시… 3시….
……그리고, 7시.
카이멜은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붉은색 다이얼을 가진 차가운 감촉의 시계가 조용한 초침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흐르는 강 같은 파란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이 방금 자신이 그랬듯, 손에 들린 푸른색 다이얼의 시계를 차분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리비에르가 문득 고개를 돌려 말을 건네왔다.
“색이 너하고 잘 어울리네.”
하늘색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했다. 입가가 빙그레 호선을 그렸다.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리비에르도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시계와 함께 큰 책무를 받아 조금은 무거워졌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한 명이 아닌, 둘이 함께라면, 그 어떠한 시련이 온다 해도 웃으며 맞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째깍, 째깍.
시곗바늘이 돌아갔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Written 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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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로그의 그림은 하리(@hariii015)님의 커미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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