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애화 - 3
카이멜 시레노바 x 리비에르 시라 (1000일 AU 로그)
D+750
나는 아마도, 꿈을 꾸었던 것 같다.
파도 소리가 시원하게 귓가를 때렸다. 파도에 이는 거품이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과 데칼코마니를 만들어,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았다. 드넓은 바닷가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바람에 살짝 비뚤어진 모자를 고쳐 쓰며 저만치에서 천천히 따라오는 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새파란 하늘과 깊은 바다의 색 안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늘 여유가 넘치더니 오늘은 뭐가 그리 급한가?”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도 싫지는 않았는지 순순히 페이스를 맞춰 따라왔다. 금색과 하얀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래사장을 걷기 시작하며 말을 받아주었다.
“모처럼의 휴일인데, 시간이 아깝지 않게 보내야 하지 않겠어? 우리 조수님들한테 일이야 잠시 맡기고 왔다지만, 오래 떠넘기고 있긴 미안하기도 하고~”
“자네가 그렇게까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건 처음 알았네.”
와, 너무해. 짐짓 상처받은 척하며 울상을 지었지만, 상대는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였기에 통하지는 않았다. 과장되게 입을 삐죽거리던 것을 그만두고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 바다 가까이 이끌었다. 푹푹 모래 속에 빠지던 맨발이 단단하게 젖은 모래 위로 넘어가며 발자국을 남겼다. 발등까지 적시는 투명한 바닷물이 달아오른 발을 식혀주었다.
발자취가 파도에 사라졌다가, 다시 새겨지고, 다시 사라지고. 둘은 한참을 그렇게 걸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평범한 사람처럼 이런 곳에서 휴일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래. 책방을 통해서라면 이곳에 이동해오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이 섬, 난 상당히 마음에 들었거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우리가 만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
누가 먼저 꺼낸 말이었을까.
“그래, 나도.”
상관없었을까. 어차피 이어진 마음은 같은 감정을 비추고 있었으니.
설탕을 녹인 것같이 달콤한 기억의 파편이었다. 그만큼 여운만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져, 손끝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애타는 마음만이 남았다.
이것은 꿈이었을까. 머나먼 과거의 기억이었을까. 간절했던 소망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을까.
이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은, 나는 무엇으로 정의해야 했을까.
* * *
저녁으로 물든 광장의 하늘 위로,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그 밑으로 많은 사람이 시끌시끌 북적이며 오가고 있었다. 쌀쌀한 10월의 가을 날씨에 한층 열기를 더해주는 분위기였다고 할 수도 있었을까.
리비에르는 광장의 하얀 벽돌 바닥을 보며 우두커니 서 있다가, 붉게 노을 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산들바람이 그의 푸른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지나갔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새를 좇아, 리비에르의 시선은 광장의 시계탑에 다다랐다. 1초, 2초 앞으로 움직이는 시곗바늘을 눈에 담았다.
뎅, 뎅, 뎅….
리비에르는 종소리의 메아리마저 저녁의 광장에 잦아들 때까지, 그 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 그 울림의 잔상마저 귓가에서 사라질 무렵, 리비에르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시계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서로밖에 없었다. 웃고 있었을까? 울고 싶은 아린 마음이 들어 표정이 살짝 일그러져 있었을까? 이유 모를 이 친숙함을, 둘은 어떻게 이토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거리는 어느새 좁혀져, 손만 뻗으면 서로에게 닿을 수 있을 만큼, 구태여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을 만큼, 그리 가까워져 있었다.
“…안녕. 우리 초면이지?”
리비에르가 먼저 빙그레 웃으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카이멜의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
“그렇겠지. 오늘 막 이사 왔으니 말이네. 하지만 초면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으니, 혹 자네의 연락처를 받을 수 있을까?”
카이멜이 내미는 핸드폰을 받아 자신의 연락처를 입력하는 리비에르의 손길엔 한 치의 주저함이 없었다. 카이멜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리비에르는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줬다. 네 연락처도 주지 않을래? 둥글게 웃었다.
카이멜의 곧은 손에서 돌려받는 핸드폰의 빈 고리가 어쩐지 조금 허전해 보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거의 한 시간째 작은 이층 카페에 앉아있던 리비에르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빗방울이 창가를 때리고 가는 시원한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이 묻힐 정도로 강렬한 소나기였다.
그렇게 계속, 리비에르는 기다렸다.
저벅저벅.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아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밑의 서점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 왔는지, 신발 밑창이 젖어 미끄러지는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조금 뒤 카페 안쪽으로 모습을 드러낸 붉은 머리카락의 사람은 양팔에 책을 품고 있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리비에르는 설핏 눈을 휘어 웃었다.
“안녕?”
기다리고 있었어. 꺼내지 못한 말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갑작스레 건네진 리비에르의 인사에도 놀라지 않고 카이멜은 망설임 없이 리비에르가 앉아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합석해도 되겠나?”
리비에르에게로 향한 발걸음만큼 자연스럽게 나온 물음이었다.
“그럼, 물론이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나온 권유에 카이멜은 빈자리에 책을 내려놓았다. 음료 주문하고 오겠네, 말을 남기고 카운터로 사라진 카이멜을 잠시 바라보다가 리비에르는 눈을 감고 푹신한 의자에 기댔다. 카페 직원과 카이멜이 주고받는 말이 작게 배경음악처럼 흘러왔다.
잠시 후 돌아온 카이멜의 손에는 커피 한잔과 청포도 에이드 한잔이 담긴 트레이가 들려있었다. 청량한 밝은 녹색을 띠는 음료를 리비에르의 앞에 놓아준 카이멜은 리비에르의 맞은편에 앉아 따듯한 커피잔을 손에 쥐었다.
잠시 편한 정적이 흘렀다.
“오랜만이지?”
“그때 만난 후로 일주일이었던가?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이라고 할 수 있겠군.”
잠시 무언가 말하려고 한 듯 입을 열었지만 묘한 표정을 지으며 붉은 입술을 다시 꾹 다무는 카이멜을 보며, 리비에르는 왠지 그가 삼킨 말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리비에르는 분위기가 가라앉기 전, 하얀 거짓을 입에 올렸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 몰랐는데, 이것 역시 인연일까?”
아니면 운명이었을까?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은 후로 아직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지만, 오늘,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곳에서 만나지 않았나. 드물게 주어진 휴일에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우산을 집어 들어, 막연하게 카페로 나와 리비에르는 기다렸다. 평소 광장 분수대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더 좋아했던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일부러 자주 찾지 않는 이곳에서, 리비에르는 기다렸었다.
…왜 굳이 오늘?
“그냥… 오늘, 왠지 모르게 조금 특별한 날인 것 같지 않아?”
“그런가?”
말문이 의문으로 끝나긴 했지만, 조용히 웃는 카이멜의 얼굴에서 혼란스러운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보인 것은 동의의 미소 같기도 했다.
“조금 그런 것 같기도 하긴 하네. 나도 오늘은 이곳에 꼭 와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
“혹시 꿈에서 나를 여기서 만나게 될 거라는 걸 보았다거나?”
농담처럼 웃어넘겼지만, 리비에르나 카이멜이나, 반 박자 늦게 웃음을 터뜨린 간극에 대해선 말이 없었다.
우리를 오늘 이곳으로 이끈 그것은 과연 그저 꿈이었을까?
다시 평온하고 잔잔한 침묵이 머물렀다. 더 이상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아도 불편하기는커녕, 오래 함께했던 사이인 것처럼 온화하게 따스했다. 빗줄기가 점차 잦아들며 바깥의 풍경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회색이었던 세상에 색채가 하나둘 번져 물들어가는 광경을,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조용히 같이 지켜보았다.
잔이 바닥을 비우고, 차갑게 식고 남아있던 얼음이 다 녹아버린 지도 한참.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둘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깨끗해진 유리창을 통해 햇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결국 별로 쓸 일은 없었겠네?”
리비에르는 카이멜이 팔에 걸친 장대 우산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카이멜은 책을 주섬주섬 팔에 끼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들고나와야 할 것 같았거든.”
이사 온 지 오래되지도 않았을 텐데, 벌써 섬사람 다 됐네. 리비에르의 말에 카이멜의 금빛 눈이 빛났다. 난 배움이 빠른 편이거든. 기묘한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그럼 다음에 보지, 리비에르.”
계단을 내려가 서점의 문을 열고, 소나기가 지나간 싱그러운 가을 날씨를 마주하며 카이멜이 인사를 건넸다. 리비에르는 다시 새파래진 하늘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 카이멜.”
헤어짐은 언제나 약간은 아쉬웠기에, 다음을 기약하는 약속은 뿌리칠 수 없는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 * *
기시감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문득 그립고 벅찬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를 때면, 리비에르는 이유 없이 뭍에서 익사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소리 내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다가, 한없이 눈물 흘리며 울고 싶었고, 그 무엇보다 카이멜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대라는 이름의 바다에 빠져 이대로 가라앉아도 후회는 없다는 듯, 나는 그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리비에르는 제 앞에 있는 탁상달력을 매만졌다. 카이멜을 처음 만난 10월 5일부터, 일주일 뒤 서점의 카페에서 만난 날, 그다음 맞이한 주말, 그리고 그다음과 다다음. 둘의 만남은 단풍이 든 나뭇잎이 전부 떨어지고, 조금씩 창문에 서리가 끼다가, 하얀 구름처럼 내리는 눈이 쌓이기 시작하는 12월까지 이어져 왔다.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진 12월 25일. 리비에르의 시선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 하얀 미소가 입가를 스쳐 지나갔다. 리비에르는 벽시계에 슬쩍 시선을 주고 이제는 달달 외워버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몇 번 가지 않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 카이멜~ 잠깐 시간 괜찮아?”
“괜찮다만, 이 시간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음, 별건 아니고.”
아니, 별것 맞긴 맞았다. 적어도 리비에르에게는 중요한 약속이 될 터였으니까.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을 빙글빙글한 웃음을 지으며 일부러 가볍게 말을 꺼냈다.
“혹시 크리스마스에 약속 있어?”
“크리스마스 당일? 있긴 하지.”
…응?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해, 평소보다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어디서? 누구와?? 갑자기 생겨난 질문은 산더미처럼 많아 어느 것 먼저 꺼낼 수가 없었다. 혼돈에 빠진 리비에르에겐 다행히도, 카이멜은 그런 그를 빠르게 구원해주었다.
“자네와 말일세. 그럼 어디서 몇 시에 만나면 되는 건가?”
순간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며 리비에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거 한 방 먹었네. 안도감이 훅 몰려와 작게 한숨을 쉬자 건너편에서 카이멜의 즐거워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농담이 자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만들어진 약속은 지키자는 주의라, 그럼 크리스마스 날, 광장의 분수대에서 10시에 보자.”
“그래. 기대하고 있겠네.”
전화를 끊고 리비에르는 창밖으로 눈 내리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충동에 휩싸여 리비에르는 눈을 맞이하려 밖으로 뛰쳐나가려다, 밤의 차가운 기온을 상기하고 우선 코트를 가지러 자신의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옷장을 열고 두꺼운 코트를 꺼내는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리비에르의 시선이 향한 곳은 옷장의 바닥, 작은 손목시계가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째깍, 째깍. 리비에르는 조심스럽게 시계를 손에 들었다. 시계의 다이얼과 닮은 하늘색 눈동자가 보석이 빠진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은 리비에르는 책상에 시계를 올려놓으려 몸을 틀었다가 마음을 바꾼 듯, 옷장에서 코트를 꺼내입고 주머니 속에 시계를 흘려 넣었다.
잠시 후, 리비에르는 코트를 입고 집 앞마당에 나와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별이 수놓은 검푸른 하늘을, 손끝이 얼어붙을 때까지, 그렇게 리비에르는 겨울의 장막 아래 한참을 녹아들어 있었다.
밤새 눈이 내릴까도 싶더니, 밝아온 크리스마스의 아침은 시리면서도 맑았다. 어젯밤 대충 의자 위에 걸쳐둔 두꺼운 코트를 진회색 스웨터 위로 껴입은 리비에르는 밝은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겨울의 햇빛은 차가우면서도 냉혹하지 않았다.
휴일의 오전이었지만, 리비에르처럼 크리스마스 축제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광장으로 향하는 버스가 거의 만원이라 리비에르는 간신히 비집고 탈 수 있었다. 시끌벅적 흥이 오른 사람들 사이에 있자니 들뜬 감정이 옮아,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며 작은 창문 밖을 내다보게 되었다.
밤사이에 내린 눈이 깔끔하게 치워진 도로를 달려, 소복이 나뭇가지에 쌓인 눈가루가 흩날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버스는 중앙광장 정류장에 멈춰 섰다.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의 틈에 섞여, 리비에르는 거의 떠밀리다시피 광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의 분수대까지 다다라서야 리비에르는 인파에서 벗어나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문득 사람들 틈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와 눈을 돌리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카이멜이 웃으며 리비에르를 향해 장갑 낀 손을 흔들었다. 리비에르도 마주 웃어주며 카이멜에게로 다가갔다.
“오래 기다리진 않았지? 날씨가 조금 춥기도 하니까.”
“겨울에 이 정도면 온화하다고 볼 수 있지. 축제를 돌아다니다 보면 금세 추위도 잊을 테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가볼까?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한겨울에도 따듯해 보이는 둘의 뒷모습이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틈으로 사라지기까지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인파에 섞여 크리스마스 축제를 즐겼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잡다한 판매대를 둘러보다, 같이 바다수국 모형의 장식품을 파는 곳에서 똑 닮은 핸드폰 걸이를 사서 끼고. 걸으며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몇 년째 비슷한 크리스마스 축제에 참여해온 리비에르는 능숙하게 광장을 누비고 다니며 카이멜을 안내했다. 그러나 축제에 처음 참여하는 카이멜 역시 리비에르만큼은 아닐지라도, 여유롭게 여러 판매대를 둘러보고 있어, 아마 안내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게 했다.
이러나저러나, 리비에르나 카이멜이나, 함께 돌아다니며 색다른 구경을 하는 것이 즐거웠기에,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되어 있었다. 아직 광장에 인파가 빠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은 열기가 가라앉아 다들 오전 시간보다는 전반적으로 느긋하게 구경을 하고 있었다.
“우리도 잠깐 숨이나 돌릴까? 카페라도 가서 잠시 앉아있지 않을래?”
리비에르의 제안에 카이멜은 선선히 승낙했다. 둘이 자주 가는 카페의 방향으로 몸을 틀었을 때, 누군가가 리비에르에게 세게 부딪혀 왔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에 휘청거리는 리비에르를 카이멜이 옆에서 붙들어, 간신히 넘어지는 건 면했다. 둘의 고개가 뛰어와 부딪친 아이에게로 돌아갔지만, 이미 범인은 빠르게 사라지고 없었다. 얼핏 저 멀리 달려가는 밝은 금발이 보인 것 같기도 했다.
“…괜찮나? 저 아이는 대체 뭐람.”
카이멜이 그 무례함에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투덜댔다. 아마 소년으로 추정되는 저 금발 아이의 뜀박질이 조금만 느렸더라면, 붙잡아서 훈계하고도 남았으리라. 리비에르도 곧 정신을 차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축제니까, 생각보다 들뜬 아이들이 간혹 있기도 하지. 그리 말하며 가볍게 넘어가려 했으나, 어째선지 뛰어가던 소년의 뒷모습이 눈에 계속 밟혔다.
‘…어디서 봤을까?’
주로 아주 어린 아이들을 보는 리비에르의 직업 특성상, 학교에 다닐 나이대의 아이들은 건너건너 얼굴만 알고 지내는 편이었다. 방금 부딪힌 소년도 그런 아이 중 한 명이었을까? 골똘히 고민하던 리비에르의 소매를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리비에르는 반사적으로 카이멜을 쳐다보았다가, 그의 소매를 잡은 이가 카이멜이 아니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누구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청명한 민트색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리비에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두꺼운 털 코트 위로 소녀의 주황빛 머리카락이 두 갈래로 차분하게 묶여 쏟아졌다.
“이거 떨어뜨렸어요.”
차마 누구냐고 물어보기도 전, 소녀는 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리비에르의 손에 차가운 쇠붙이를 쥐여주고 빠르게 뒤돌아 떠나갔다. 그 움직임이 마치 길고양이처럼 조용하고 날쌔 리비에르나 카이멜이나, 소녀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까지 말을 꺼낼 기회가 없었다.
“…방금 저 소녀.”
“응? 혹시 아는 사람이야?”
리비에르는 말을 끝내고 나서야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고등학교에서 선생님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카이멜은 이제 그 나이대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 정도는 외우고 있겠지만, 방금 리비에르에게 말을 건 소녀는 겉보기엔 아직 고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저런 아이를 이 섬에서 본 적 있던가?’
15년. 이 섬에서 살아온 햇수가 결코 적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뒤적여도 저런 노을과 비슷한 색의 머리카락이나, 선명한 녹안을 가진 아이는 리비에르의 기억 속에 없었다.
“아는 사이라고 하기엔 미묘하게 기억이 안 나지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나보단 여기서 오래 산 자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글쎄, 나도 처음 보는 아이 같아서.”
풀리지 않은 문제를 붙들고 계속 고민해봤자 해답은 나오지 않았기에, 리비에르는 대신 소녀가 손에 들려준 물건으로 관심을 돌렸다. 푸른 다이얼을 가진 작은 손목시계에 눈이 잠시 묻었었는지, 유리에 물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이 시계를 주머니에 넣어놓고 잊고 있었네. 카이멜의 관심도 잠시 리비에르의 손에 들린 시계로 쏠렸다. 한창 반응이 없자 리비에르는 카이멜을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았다. 카이멜의 표정이 놀란 듯 보여, 리비에르가 도리어 눈썹을 위로 휘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어?”
“…그 시계, 아니. 조금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카페에 가서 얘기하지.”
리비에르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짧은 시간 후에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 리비에르는 차분히 기다렸다. 따듯한 핫초코를 한 잔씩 앞에 두고 나서야 리비에르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시계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어?”
리비에르의 추측에 가까운 시작에, 카이멜은 따듯한 잔을 들어 한입 홀짝이고, 다시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잠시 그 시계를 봐도 될까?”
리비에르는 망설임 없이 시계를 카이멜에게 밀어주었다. 카이멜이 손을 뻗어 조심스레 시계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몇 분이 지나 카이멜이 말없이 시계를 되돌려주자, 리비에르는 시계를 받아들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말을 재촉했다. 카이멜은 잠시 고민하듯 입술을 달싹이다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나도 이것과 비슷한 시계를 하나 가지고 있거든. 다이얼의 색상만 제외하면, 심지어 보석이 하나 빠진 부분까지 완벽하게 똑같네. 둘이 같은 시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 그래? 혹시 그 시계 어디서 구했는지 기억나? 같은 디자인의 시계라면, 아마 같은 가게에서 구매한 게 아닐까 싶은데.”
“한 번밖에 가보지 않았지만… 여기 처음 이사 온 날, 광장에 있는 한 작은 책방에 들렸었네. 지금 생각해보니 시계를 주워준 그 소녀, 그때 책방에서 만난 아이하고 상당히 닮았었는데. 이름이 리리라고 했던가?”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리비에르는 다시 손에 들린 시계를 응시했다. 째깍째깍, 초침이 앞으로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던 리비에르가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혹시 내일 시간 되면 네 시계도 가져와서 보여주지 않을래? 똑같은 시계에다, 하자마저 같다니 조금 궁금해져서.”
“내일도 휴일이니 문제 될 건 없지. 그럼 11시쯤 다시 여기서 볼까?”
그래, 좋아. 대답하는 리비에르는 속으로 직감했다.
드디어, 이 이유 모를 기시감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 * *
그날 밤, 리비에르는 꿈을 꾸었다.
그리운 사람이 나왔었던 것 같기도 했다. 때론 평온하고, 따듯하고, 때론 기쁜 목소리로 말을 걸었던 것 같기도 했다. 선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어째서였을까. 단순히 꿈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눈부신 붉은색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리비에르는 내밀어진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째깍, 째깍. 얼핏 초침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손이 채 닿기도 전에, 붉은 머리카락은 동화에 나오는 인어처럼, 거품으로 사라졌다. 차가운 감촉이 손에 느껴져, 리비에르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손에 들린 시계의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고 있었다.
너를 처음 만났던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작은 속삭임처럼 들린 목소리는 익숙했고, 또한 낯설었다. 물속에서 뭉개져 울리는 것만 같아,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진 까마득한 공백이 있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익숙한 자기 방의 천장뿐이었다.
휴일이었지만 어제 늦게까지 크리스마스 축제를 즐긴 사람들이 많았는지,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카페 안은 생각보다 한적했다.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가장 사람 없는, 구석진 창가 자리를 골라 앉았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다. 새삼스럽게 침묵이 어색하단 기분이 들었다.
그 정적을 처음 깬 것은 카이멜이었다.
“여기. 어제 말했던 시계를 가져왔네.”
작은 가방을 열고 시계를 꺼내, 리비에르에게 내미는 손길은 조심스러웠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받아드는 리비에르의 손이 카이멜의 손을 살짝 스쳤다. 가볍게 머무른 그 온기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리비에르의 시선이 찬찬히 시계를 훑었다. 유리로 덮인 붉은색의 다이얼 안에서, 시곗바늘이 째깍째깍 돌고 있었다. 초바늘이 숫자 12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나쳤다. 리비에르는 그곳에 작은 보석 하나가 빠져있다는 것을 빠르게 알아챘다.
카이멜에게 시계를 돌려주는 대신 리비에르는 둘 사이의 테이블에 시계를 올려놓았다. 잠시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리비에르는 자신의 시계도 꺼내 옆에 나란히 두었다. 두 시계가 똑같은 시각을 가리키며 1초, 2초 흘러갔다.
“…진짜, 네 말대로 두 시계가 다이얼의 색을 제외하곤 완전히 같네. 디자인이 같은 건 우연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보석이 하나 빠진 점마저 같다는 건 좀 희한하지?”
잠시 동의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리비에르가 먼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우연이 반복되면 인연, 또는 필연이 된다는 말이 있었지.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왜인지 우리가 만나서 친해지고, 여기 이렇게 같은 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그냥 우연만이 아닌 느낌이 들어.”
리비에르 스스로도 말을 끝내고 너무 허황된 이야기인가 싶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카이멜은 웃지 않고 도리어 진지한 표정으로 리비에르의 말을 경청했다. 그에 용기를 얻어 리비에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실은 어젯밤에 꿈을 꾸었거든. 확실하진 않지만, 너를 본 것 같기도 했어. 그런데 생각보다 네가 너무 친근하고 익숙해서, 우리가 서로 알고 지낸 게 고작 두어 달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들더라.”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 문득 기억이 났다. 리비에르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한 쌍의 시계에 머물렀다.
“이상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쭉 이유 모를 기시감이 들었어. 광장에서 너를 만났던 날에도, 비 오는 날 카페에서 얘기를 나눴던 때도. 어제도, 그리고 지금도. 기분 나쁜 기시감은 아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잊어선 안 될 것을 잊었다는 느낌 같은?”
리비에르가 놀라 카이멜을 쳐다보았다. 카이멜은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마치 깊은 망각 속으로 흩어진 기억의 파편을 그러모으려는 듯 눈썹을 한데로 모으고, 금빛의 눈동자는 사념을 헤엄쳤다.
“확실히, 꿈같은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 그 경험이 자네만의 착각이었다면 말이네.”
하지만? 리비에르는 카이멜이 말하지 않은 단어가 둘 사이에 울리는 것을 느꼈다. 어지럽게 흩어지던 생각들이 점차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카이멜은 리비에르의 안도감을 눈치챈 듯 말을 꺼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단순히 허황된 소리라고는 할 수 없겠군. 기시감은 둘째치고서라도, 상식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이 몇 있었거든.
가령, 우리가 비 오는 날 만났던 카페 기억하나? 난 그날 필요한 교재를 찾으려 서점을 갔었네. 그런데 왜 하필 그 서점이었을까? 비블리 서점이 이 섬에서 가장 큰 서점인 것은 맞지만, 그때 누구에게도 서점이 있는 곳을 물어볼 생각은 안 했거든. 그냥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어. 누구에게도 길을 묻지 않고,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찾아갔었지.”
이제는 다 식어버린 핫초코를 골똘히 바라보다 카이멜은 잔을 손에 들었다. 반쯤 남아있는 짙은 갈색 액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내려보고 있었을까.
“그리고 자네가 말한 꿈, 나도 엇비슷한 꿈을 어제 꾸었네. 이상하게 그 무엇도 선명하지 않아 무엇에 대한 내용이었는지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지. 카이멜은 붉은색 다이얼의 시계를 손에 들었다.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뒤로 이른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었다.
“나와, 자네와, 이 두 개의 시계는 확실히 어떤 접점으로든 엮여있어. 그 접점을 찾아내면 이 모든 수수께끼는 풀리겠지.”
명쾌하고 명료한 결론에, 리비에르는 안도하듯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푸른 다이얼의 시계를 들고, 주머니에 도로 넣는 대신 손목에 찼다. 어색한 무게에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리비에르는 눈웃음을 지었다.
“네 말이 맞아. 계속 찾다 보면 무언가 실마리가 더 나오겠지. 우선 이 시계를 산 그 가게부터 찾아가 볼까? 들어보니 우리가 만난 직원은 달랐지만, 같은 가게에서 산 게 맞는 것 같아서.”
“시작하기 나쁘진 않겠군. 자네가 편한 시간은 언제인가?”
“당장 내일도 상관없어. 1월 2일까지는 쭉 어린이집 휴일이니까. 아마 고등학교도 마찬가지겠지?”
카이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내일, 광장 11시에 만나지. 그리 말하며 카이멜도 자신의 손목에 시계를 채웠다.
간신히 나아갈 방향을 잡은 것이 무색하게도,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휴일이 끝나고 해가 바뀌기까지, 시계를 구매했던 가게를 찾지 못했다.
그다음 날인 27일,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광장에서 만나 기억 속에 남은 가게를 한참 찾아 헤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책방의 간판을 광장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가게가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으로 갔을 땐 전혀 다른 가게가 서 있어 둘은 당황했었다. 혹시 책방이 자리를 옮겼나 생각하기엔 겉에서 보이는 가게의 구조마저 완전히 달라, 결국 망설이다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싶어 그다음 날도, 연휴가 끝나기 전까지 계속 광장을 헤맸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연휴의 마지막 날, 둘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주말에 다시 광장에서 만나 책방을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둘 다 돌아가야 하는 직업이 있었고, 아무리 풀리지 못한 수수께끼가 마음에 걸린다 할지라도 그들의 일상보다 우선시할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리비에르는 오랜만에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출근 버스에서 남은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려 노력했다.
‘안 풀리는 문제를 붙잡고 골머리만 썩여봐야, 해결되는 건 없겠지.’
온전히 털어내지는 못했지만, 리비에르가 어린이집에 도착했을 즈음 그는 겉보기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밝게 미소지으며 헬렌에게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잘 쉬고 왔나요, 리비에르 선생님? 크리스마스 축제는 어땠어요?”
충분히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리비에르는 표정의 변화 없이 여전히 가볍게 웃으며 답할 수 있었다.
“네~ 재미있었어요. 오랜만에 기념품도 샀고요. 선생님도 휴일 잘 보내셨고요?”
그리 말하며 리비에르는 핸드폰을 꺼내, 한쪽 모서리에 달린 바다수국 장식을 헬렌에게 보여줬다. 어머, 혹시 카이멜 씨하고 맞춘 커플템인가요? 짓궂게 웃으며 헬렌이 찔러봤지만, 리비에르는 능숙하게 빙글빙글 웃으며 답을 회피하고 넘어갔다. 아이들이 출근하는 부모님 손을 잡고 하나둘 도착하고 있었기에 둘 다 바빠져, 헬렌도 더 캐묻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 걸까, 휴일 내내 집에서 놀았기 때문에 그런 걸까, 아이들도 평소보다 에너지가 넘쳐나 헬렌과 리비에르는 아이들과 놀아주느라 종일 숨돌릴 틈이 없었다. 더 놀겠다는 아이들을 달래서 점심을 먹이고, 조금 더 뛰어놀게 두었다가 다시 어르고 달래서 낮잠을 재우면서 둘도 깜빡 졸았을까. 달콤한 휴식의 시간은 소망보다 일찍 끝나, 아이들이 집에 갈 시각이 될 즈음 리비에르도 헬렌도 기운이 쭉 빠져있었다.
체감상 벌써 8시는 훌쩍 넘은 것 같은데…. 오늘만큼은 바로 집에 가서 일찍 뻗어야겠다. 단단히 다짐하며 무릎을 꿇고 앉아 기계적으로 놀이방을 정리하던 리비에르의 등을 누군가가 톡톡 건드렸다. 리비에르가 돌아보자 단발머리의 작은 여자아이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말간 웃음을 지었다. 아이의 손에 매끈매끈한 표지의 동화책이 한 권 들려있었다.
“리비에르 선생님. 저 책 읽어주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마지막까지 남아, 아직 혀 짧은 소리로 부탁하는 마틸다에게 리비에르는 밝게 웃으며 손짓했다. 마틸다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예 자리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버린 리비에르에게로 총총 다가갔다. 자, 그러면 오늘은 무슨 책을 읽어볼까요~ 노래하듯 말하기가 무섭게 멀리서 헬렌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비에르 선생님~ 혹시 거기 마틸다 있나요? 마틸다 어머니 오셨어요!”
마틸다의 얼굴이 삽시간에 울상이 되었다. 못내 아쉬운지 손에서 동화책을 놓지 못하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문과 리비에르만 번갈아 보고 있었다. 리비에르는 바닥에서 일어나 웃으며 마틸다의 코트를 집어 들며 아이를 달랬다.
“선생님이 내일 읽어줄게요~ 하룻밤만 자고 오는 건 금방이니까 조금 기다리는 건 할 수 있겠지? 어머니가 추운 바깥에서 기다리면 안 되니까.”
“네에…. 그럼 선생님이 이 책 가지고 있다가 내일 읽어줘야 해요. 약속!”
작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리비에르는 빙긋 웃으며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꾹꾹 엄지 도장까지 찍어줬다. 그래, 약속~ 손가락을 건 손을 흔들자, 리비에르의 셔츠 소매 속에 숨겨져 있던 시계가 잠시 빛을 반사해 반짝였다. 마틸다의 관심이 단번에 리비에르의 시계로 쏠렸다.
“선생님, 이거 별시계 같아요!”
“…응?”
놀란 물음에 마틸다는 까르르 웃으며 리비에르에게 들려준 동화책을 가리키고, 다음에 리비에르의 시계를 가리켰다. 반짝이는 게 많이 박혀있는 게 별 같아요!
헬렌이 늦어지는 마틸다를 찾으러 왔기에 리비에르와 마틸다의 대화는 거기에서 끊어졌다. 리비에르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마틸다가 안겨준 동화책을 뒤집어서 표지를 내려다보았다.
마법사와 별시계 이야기. 별이 반짝이는 시계 그림이 리비에르를 반겼다. 다시 찾아온 기시감에 목덜미가 괜히 서늘해져, 리비에르는 손으로 뒷목을 세게 문질렀다.
“리비에르 선생님, 애들도 이제 다 집에 돌아갔으니 정리 대충 됐으면 이만 퇴근해도 돼요~ 오랜만에 출근해서 힘들죠?”
“하하, 정말 귀신같이 절 잘 아시네요.”
리비에르는 가방에 동화책을 집어넣고 바닥을 뒹굴던 장난감 몇 개를 마지막으로 상자에 던져 넣었다. 코트를 입고 어린이집을 나설 채비를 끝마친 리비에르는 헬렌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광장으로 가는 리비에르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빨랐다. 그러나 리비에르는 도착하자마자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대신, 곧바로 카이멜과 자주 가는 카페로 방향을 틀었다.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 이제는 보지 않고서도 칠 수 있는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길게 이어지자 괜히 초조해지는 기분이었다. 끊고 다시 걸어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 무난한 인사가 들려옴과 동시에 기계적인 수신음이 끊겼다.
“응, 나야, 카이멜. 갑자기 미안한데, 오늘 큰일 없으면 시간 내줄 수 있을까?”
“오늘? 지금 퇴근하긴 했다만. 갑자기?”
“보여줄 게 생겨서. 괜찮다면 우리 자주 가는 그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와줄 수 있어?”
“그래. 버스 타고 가면 한 15분 정도 걸릴 것 같으니 그럼 거기서 만나지.”
확실히 갑작스럽기는 했다. 카이멜이 당황할 만도 했다. 그러나 리비에르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이 동화책이 수수께끼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열쇠가 될 것이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20분 뒤, 카페의 입구에서 카이멜의 모습이 드러나자 리비에르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갑작스럽게 미안해, 잠깐 여기 앉아있을래? 내가 가서 간단하게 먹을 거라도 사 올게. 카이멜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비에르는 카운터로 빠르게 걸어갔다. 오래 지나지 않아, 리비에르는 트레이에 샌드위치 두 개와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테이블에 내려놓고 카이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보여준다는 게 뭔가?”
갑자기 불려 나와서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궁금한 기색이었다. 리비에르는 말없이 가방을 뒤적여 동화책을 꺼냈다. 책인가? 고개를 기울여 묻는 카이멜을 향해 애매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응, 동화책이야. 아직 나도 읽어보진 않았는데, 표지와 제목을 보자마자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어서. 꼭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기왕이면 너와 같이.”
리비에르는 책을 들고 일어서 카이멜의 옆자리로 움직였다. 카이멜은 리비에르가 옆에 앉자 책을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동화책의 제목을 살펴보던 카이멜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스쳐 갔다. 리비에르는 조용히 책을 첫 페이지로 펼쳤다. 알록달록한 책의 활자와 삽화가 리비에르와 카이멜을 반겼다.
옛날옛날, 한 마법사가 살았습니다. 마법사는 굉장히 위대해서 못하는 마법이 없었답니다.
마법사는 마법이 담긴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아꼈던 물건은 마법의 별시계였습니다.
이 별시계는 매우 특별한 마법을 담고 있었습니다. 마법사가 직접 별의 조각을 모아 만든 이 시계는 세상의 시간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별시계가 탐이 난 왕은 사람을 시켜 시계를 몰래 훔쳐 왔습니다.
‘이 시계만 있으면 나도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어!’
그러나 왕이 별시계를 만지는 순간 시계에 박혀있던 별의 조각이 빛나며 사라져버렸습니다. 별이 이기적인 왕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겁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왕국에 온갖 천재지변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지진과 해일, 모래폭풍과 때아닌 폭설에 휩쓸린 왕국은 멸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왕은 비통해하며 마법사를 찾아갔습니다.
‘무엇이든 하겠소! 제발 이 왕국을 살려주시오.’
‘아이고, 왜 별의 시간을 훔쳐서 이런 재앙을 불러온 겁니까.’
마법사는 왕의 어리석음을 혼내면서도 해결책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별의 조각을 되찾아 시계를 고치시오. 조각은 별의 해안가로 돌아가 잠들어있을 것이오. 혹시 죽을 위험에 처하거든 시곗바늘을 돌려 시간을 돌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시오.’
왕은 그날부터 마법사의 말을 따라 별의 조각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높은 산을 넘고, 깊은 숲을 지나고, 드넓은 바다를 건너 왕은 드디어 마법사가 말한 작은 섬의 해안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왕은 모래 속을 뒤지며 계속, 계속, 별의 조각을 찾았습니다. 사나운 파도에 휩쓸려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왕은 마법사의 조언대로 시계를 돌려 목숨을 구하고, 자신의 임무를 다시 기억해내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조각을 찾았습니다.
별의 조각을 찾아다닌 지 천일째 되는 날, 왕은 드디어 하얀 돌에 박혀있던 별의 조각을 찾아냈습니다. 조각은 아주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왕은 별에게 기도했습니다.
‘내 욕심 때문에 세상이 이런 위험에 처하게 했소. 다 내 잘못이나 내 백성들은 죄가 없으니 한 번만 용서해주시오.’
별은 왕의 기도를 듣고 왕을 용서해주기로 했습니다. 별의 조각은 다시 시계로 흡수되어 빛나기 시작했고, 왕은 마지막으로 시계를 돌려 천재지변이 오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렸습니다.
자신의 왕국과 백성을 돌려받은 왕은 별시계를 마법사에게 돌려주고 왕국을 현명하게 통치했습니다. 왕과 백성, 마법사는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마지막 페이지가 끝났다. 그러나 리비에르나 카이멜이나 동화책을 덮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풍랑을 맞이한 배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는 상당히 닮아있어, 둘은 말로 꺼내지 않아도 서로가 깨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 년 뒤, 이 섬에 해일이 덮칠 예정이었다.
* * *
어떤 정신으로 그날 저녁 헤어져 집에 돌아갔는지는 모르겠으나, 다시 주말이 되어 만났을 때, 리비에르와 카이멜 둘 다 어느 정도 생각의 정리가 끝나, 겉으로나마 차분한 상태였다. 그러나 어느 쪽도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어, 둘은 앞에 놓인 찻잔이 식어갈 때까지 침묵을 유지했다.
“…카이멜, 너는 어디까지 기억해?”
마침내 리비에르가 던진 질문은 간단했지만, 그에 답하기는 쉽지 않았다. 카이멜은 머릿속에서 답을 정리하는 듯 잠시 눈을 깜빡이다, 흐릿한 기억을 되짚는 것처럼 천천히 대답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그날 실수로 부딪히는 바람에 자네가 물건 줍는 걸 도와줬었지. 서점에 가는 길을 물었을 때도 안내해준 이가 자네였고. 크리스마스 축제에서 장식을 선물해 준 것도.”
리비에르가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카이멜의 말을 이었다.
“그럼 아마도 네가 날 바다수국 화원으로 데려갔겠지? 무엇보다, 해일이 온 날도 기억할 테고.”
“…그래. 그날 자네가 실종되었기에, 내가 시간을 돌렸었네.”
마지막 말은 카이멜 자신도 선뜻 믿지 못하겠다는 망설임이 묻어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카이멜은 고개를 살짝 흔들며 보다 단호해진 어투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아직도 완전히 믿기진 않네. 하지만 시계를 돌린 것이 마지막 기억이고, 그 후에 다시 자네를 만나게 되었으니 아마도 이 시계가 시간이 돌아간 원인일거라 추측할 뿐이지.”
“아마 네 말이 맞을 거야. 왜냐하면 나한테도 시계를 돌린 기억이 있거든.”
자네가? 놀라 눈썹을 추켜세우는 카이멜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리비에르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곤 끄덕였다.
“그게 아마 우리가 진짜로 처음 만난 날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그땐 내가 대륙으로 나가 폭설에 갇히는 바람에 너와 같이 크리스마스 축제를 가지 못해서, 네가 바다수국 장식을 선물로 사다 줬었어. 그래서 내가 답례로 바다수국 화원으로 데리고 갔었고.”
다리를 꼬고 상체를 살짝 앞으로 굽혀 손에 턱을 괴었다. 아무래도 시간을 돌렸다는 가설하에, 매번 조금씩 경험이 달라진 것 같네. 혹시 내가 말한 부분들, 기억나려나? 리비에르의 물음에 카이멜은 인상을 쓰고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몇 분 뒤 카이멜은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라고 할 수 없겠지만 아무리 집중해서 생각해봐도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은 없군. 아주 희미한 흔적만 남아, 마치 누군가가 오래된 흑백사진 위로 물을 엎질러 흐려진 것만 같은 기분이네.”
“…그 동화에서 나온 것처럼, 시간을 돌린 본인만이 기억을 가지고 돌아간다는 뜻일까?”
나도 네가 말한 기억에 대한 부분은 선명하지 않거든. 리비에르도 카이멜도 정답은 알지 못했다. 이제는 마틸다에게 돌려준 동화책의 내용을 동시에 떠올렸다. 유아용 동화책인 만큼 세부적인 설정은 뭉뚱그린 단순한 이야기였기에, 왕이 기억을 가지고 회귀한다는 부분도, 그 이유도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그저 내용에 따라 유추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동화책은 대체 이 시계하고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이 시계에 대해 알고 쓴 책일까? 아니면 동화책을 바탕으로 누군가가 이런 시계를 만들어낸 걸까?”
“글쎄, 섣불리 추측하기엔 단서가 너무 없긴 하지. 작가도 무명이라 적혀있고.”
“아, 나도 혹시나 싶어서 검색해봤는데 출판사도 지금은 없어진 회사라고 해서. 보니까 이제 그 책도 절판 돼서 구하기도 엄청 어려워졌더라고.”
“수수께끼를 풀면 풀수록 질문만 많아지는 기분이군…. 작가도 출판사도 찾을 수 없다면, 결국 이 시계를 산 책방으로 다시 방향을 돌려봐야 하는 건가? 책방이니만큼 그 동화책에 대해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역시 그럴 것 같지. 그래서 말이야.”
한번 실험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잠시 고민하다가 리비에르는 카이멜에게 물었다.
“네가 시간을 돌렸을 때, 혹시 몇 시로 돌렸는지, 기억하고 있어?”
“응? 아마… 7시였던 것 같은데. 우리가 처음 만났던 시간으로 말이네. 그런데 시간은 왜….”
설마 하는 표정으로 리비에르를 보는 카이멜에게, 리비에르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아마 네 생각이 맞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로 7시로 돌렸었어. 우리 그 시간에 맞춰서 그 책방이 있던 곳으로 가보자. 실패하더라도 시도해보는 것 자체는 괜찮지 않을까?”
카이멜이 고개를 끄덕이고 시계를 슬쩍 보았다.
“나쁜 제안은 아니네. 저녁을 이르게 먹고 가면 시간이 맞겠군. 오늘 당장이라도 괜찮다면.”
카이멜의 말에 동의하며 리비에르도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느지막이 하늘의 정점에서 내려가기 시작하는 오후 4시가 지나고 있었다.
오후 7시가 가까워지는 광장에는 휴일이라 유독 사람들이 많았다. 간간히 리비에르와 카이멜을 알아보는 지인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돌려주며, 둘은 천천히 광장을 돌아 한 구석진 가게 앞에 멈추어 섰다. 리비에르는 옆눈으로 광장의 시계탑을 슬쩍 쳐다보았다. 과거의 시간에서 해일에 무너졌던 시계탑은 굳건하게 서, 시곗바늘이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을 과거의 시간이라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 리비에르는 잘 몰랐다. 한번 겪어본 일이니 과거의 시간이 맞을 텐데도, 시일로 따지면 지금으로선 아직 오지 않은 6월의 날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이 엉켜버린 시간선에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초침이 천천히 시계방향으로 돌아갔다. 58초, 59초….
뎅, 뎅, 뎅, 뎅….
하나, 둘… 일곱 번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리비에르는 시계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매일같이 듣는 종소리가 오늘따라 어색하게 메아리가 귓가에 남았다. 그에 정신이 팔려 리비에르는 카이멜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을 한발 늦게 알아차렸다.
“리비에르, 자네의 감은 그 시계에만 의존하는 게 아닌 것 같군.”
그게 무슨 말이냐 되묻기 전에 리비에르는 카이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볼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없었던 고풍스러운 무늬가 조각된 문이 눈앞에 보였다.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 문에 달린 간판이 살짝 흔들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술사의 책방이라….”
카이멜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지. 리비에르는 잠시 굳었다가, 천천히 손잡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잠겨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달리, 리비에르의 손길에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틈새만 열린 문에서 손을 떼지 않고, 리비에르는 카이멜을 돌아보았다. 들어갈까? 무언의 눈빛을 보내자 카이멜은 고개를 끄덕이고 리비에르의 손을 잡았다. 들어가자. 리비에르는 문을 활짝 열고, 카이멜과 함께 책방 안으로 들어섰다.
책방에 처음 왔을 때처럼, 안쪽은 한적하고 고요했다. 높은 책장에 가득 쌓인 책들은 하나같이 오래되어 보여,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번에도 가게를 찾은 손님은 오직 리비에르와 카이멜 뿐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리비에르와 카이멜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갔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소녀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낮게 묶인 주황색의 양갈래가 그 움직임을 따라 찰랑거렸다.
“생각보다 조금 오래 걸렸지~?”
뒤편에 있는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금발의 소년도 벌떡 일어났다. 붉은 눈이 가늘어지며 씩 웃자,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이쪽으로.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소녀의 민트색 눈이 리비에르와 카이멜을 살짝 탐색하듯 응시하다, 소년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아노렐, 거기 있지만 말고 손님 맞을 준비 좀 해봐요. 소녀의 타박에 그제야 소년은 꾸물꾸물 가게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니까… 리리라고 했었지? 이름 말이네.”
카이멜이 소녀에게 말을 붙이자 소녀는 잠시 망설이다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앉아서 자세한 얘기를 하도록 해요. 리리의 권유에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소파에 앉았다. 어느새 소년, 아노렐은 작은 탁자까지 끌고 와서 위에 건성으로 찻잔을 세팅해놓고 있었다.
작은 나무 의자를 들고 온 리리는 둘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노렐 역시 커다란 쿠션을 끌어다가 그 안에 폭 파묻혔다. 자세는 불량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아노렐은 제대로 집중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듯, 시선은 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 찾아왔다면, 우리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겠지?”
예를 들어, 시계에 관해서라거나, 시계에 관해서라거나?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노렐이 검지를 까닥였다. 예의를 지키라며 째려보는 리리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아노렐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리비에르가 기억하는 그 제멋대로인 소년이 여전해서 그랬던 걸까. 리비에르는 도리어 더 편안하게 웃으며 대꾸할 수 있었다.
“정답~ 이거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랐는데, 그렇게 콕 짚어주니 얘기가 조금 수월해지겠네.”
찰칵. 작은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리비에르는 손목시계를 끌러 손에 올려놓고 아노렐을 향해 내밀었다. 샹들리에의 불빛에 푸른 다이얼과 그 안에 박힌 보석들이 반짝 빛났다.
“좀 먼 길을 돌아왔지만, 이제 이 시계에 대해 설명을 들을 때가 왔다고 생각하는데.”
리비에르의 말이 끝나자 카이멜도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러 손안에 쥐었다. 잠시 시계에 시선을 주었다가, 카이멜은 리리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보이는 태도에서 유추하건대, 이 시계가 가진 능력에 대해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리리, 네가 이 붉은 다이얼의 시계를 나한테 주었고, 리비에르의 말에 따르면 아노렐이 리비에르에게 푸른 다이얼의 시계를 주었다고 했지. 너희들이 이 시계의 진짜 주인이 맞나?”
아노렐은 성의 없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글쎄에- 애매하게 말을 흘리는 아노렐 다음으로 리리도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맞지만, 어찌 보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이 애매해진 시간선만큼, 시계의 관리자직도 지금 애매한 상황에 놓여있어서요.”
꼬여버린 이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예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낫겠네요. 리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무릎에 놓인 분홍색 토끼 인형을 잠시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맑은 눈에는 어떤 결의마저 엿보였다.
“이 시계가 시간을 되돌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충분히 짐작하고 있겠죠? 강력한 만큼 위험한 힘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자각하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만큼 많은 책임이 뒤따라야 하는 물건이에요.”
리리의 시선이 카이멜의 손에 들린 시계에 머무르다, 카이멜 옆에 앉은 리비에르의 시계에도 잠깐 스쳤다. 소녀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래서 시계의 관리자라는 직이 생긴 거예요. 각 시계에 한 명씩.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몰라요. 아마도 까마득한 먼 옛날이야기겠죠. 때론 관리자라 불리기도 했고, 혹은 시공의 마술사라 불리기도 했고. 진실이 소문으로 이어지고, 이야기가 전설이 되고, 전설이 동화로 각색되고, 이제는 그 동화마저 서서히 잊혀갈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을 거예요.”
점차 초조해지는 듯 리리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고 말이 조금씩 빨라졌다.
“시계의 관리자가 되면 시계의 영향을 받아 본래 주어진 수명보다 훨씬, 훨씬 오래 살게 되어요. 물론 불사라는 뜻은 아니라서, 관리자들은 조수를 들여 교육하고, 시계의 힘을 제대로 제어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때가 되면 조수에게 관리자직을 물려줘요. 저희도 그렇게 관리자직을 물려받은 거고요.”
아니, 사실 저희의 사례는 조금 달랐어요. 리리의 말이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입술을 꾹 다문 것이 다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아노렐이 설명을 이어받았다.
“위험한 힘이라고, 리리가 말했지? 근데 관리자라고 해서 위험하지 않다는 게 아니거든. 오히려 시계의 힘을 제대로 억누를 수 없으면 그 위험에 가장 먼저 노출되는 사람이 그 관리자거든.”
그날처럼 말이야. 빵! 아노렐이 풍선이 터지는 모습을 재현하듯 양팔을 밖으로 쫙 뻗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얼굴은 여전히 씩 웃고 있었지만 유쾌하기보단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아노렐은 굳은 리비에르와 카이멜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때 관리자였던 마술사님들은 어찌어찌 시계의 힘을 안정시킬 수 있었어. 그 폭발적인 힘을 억누르는데 조금 큰 대가가 필요했을 뿐이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거야. 그 때문에 나와 리리가 예정보다 일찍 관리자직을 물려받게 되었지.”
문제는 그 밖에도 있었어요. 다시 감정을 차분하게 억누르고, 리리가 입을 열었다. 손은 여전히 토끼 인형을 꾹 쥐고 있었지만 리리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전 관리자님들이 시계의 힘을 억누르는데, 상당히 많은 힘이 필요했어요. 그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면서, 관리자의 영혼과 시계의 힘 일부가 섞이게 되었어요.”
시계에 보석이 하나 없는 것도, 이미 알아차리셨죠? 리리의 말에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두 개의 다이얼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쌍둥이처럼, 둘 다 숫자 12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 보석이 하나 빠져있었다.
“시간을 조종하는 힘의 원천은 그 보석에서 나오는 거예요. 대대로 관리자들은 그 보석을 별의 조각이라 불렀죠. 열두 개의 조각 중 하나에, 인간의 영혼이 섞이며 시간선 어딘가로 사라져버렸어요. 그 때문에 시계의 힘이, 현재 많이 불안정해졌어요. 우리로선 다시 폭주하지 않도록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게 고작이죠.
그래서 시계를 완벽하게 안정시키기 위해, 우리는 이곳에 별의 조각을 되찾으러 왔어요.”
리리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아노렐도 옆에서 작게 휘파람만 불고 있을 뿐, 더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리리와 아노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카이멜이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그 별의 조각이 이곳에 있다고, 이 시간에 있다고 확신하는 이유가 있나?”
“아~ 그것만큼은 내 왕관을 걸고 확신할 수 있지.”
왕관? 카이멜이 뜬금없는 얘기에 되묻자 아노렐은 대충 그런 게 있어~ 넘기고 말을 이었다.
“6월 11일. 무슨 일이 일어날 건지 알고 있지?”
“…해일 얘기인가 보군.”
카이멜의 말에 아노렐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해일, 원래는 일어나면 안 되는 재앙이었다고?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아노렐이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덕분에 얼마나 일이 귀찮아졌는지 알아? 그 보석도 시계의 일부야. 시간을 조종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심지어 시계에서 떨어져 나간 제어가 안 되는 힘이 아무렇게나 막 떨궈져 있으면 어떻게 되게요? 정답은~ 원래는 없었어야 할 엄청난 큰 천재지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짝짝짝! 혼자서 박수를 치고서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아노렐의 목소리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덕분에 조각이 떨어진 시간선과 장소를 쉽게 유추해낼 수 있었지만~ 리리나 나나 함부로 이 책방을 떠나서 돌아다니지 못해. 우리가 관리해야 하는 게 그 시계뿐만은 아니라서. 오래 자리를 비웠다간 오히려 더 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그래서 맡긴 거지.”
당신들에게, 그 시계를 말이야. 아노렐의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듯한 어투에, 리비에르는 미간을 모았다. 마지막 퍼즐 조각이 잡힐 듯 말듯 눈가에서 아른거렸다.
“그런데 그게 왜 우리였어? 그 하고많은 사람 중에, 우리를 선택한 이유라도 있어?”
다리를 살짝 흔들고 있던 리리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노렐이 빙그레 웃었다. 있지, 그거 알아?
“같은 영혼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영혼이 조각났다고 해도, 다시 온전한 형태로 회복하려는 본능일까? 조각난 영혼끼리 다시 접촉하게 되면, 스스로 치유하며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거든.”
그리고 설령 육체가 죽는다 해도,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윤회한다고들 하지. 조금 상처가 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다시 온전한 육체만 얻는다면, 겉보기론 크게 티가 나지 않아. 쉽게 말하자면, ‘환생’이라고 하면 이해하려나? 아노렐이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휘었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말이야.
“새로 얻은 육체가 전 모습과 이렇게까지 닮았으리라곤 생각하지도 못했어. 우연일까, 필연일까? 덕분에 알아보는데 힘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나 할까~?”
거기까진 기억하지 못하려나, 우리의 마술사님들은?
샹들리에의 밝은 불빛 아래, 두 사람의 손에 들린 시계는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다시 찾아온 주말, 리비에르는 이른 오전에 다시 버스를 타고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털털 소리를 내며 다듬어진 길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리비에르는 벌써 일주일 전에 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일단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알겠어. 사라진 보석, 그러니까 별의 조각을 찾으면 영혼도 시계도 원래대로 돌아오고, 해일도 없던 일이 된다는 거지?”
“그거야, 당신들의 성공 여부에 달렸겠지?”
아노렐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구체적인 설명은 리리의 몫이었다.
“영혼과 시계가 온전해지기 전에 해일이 일어나면, 그건 없던 일로 만들 수 없어요. 천재지변이 생기는 원인을 제거한다고 해도, 이미 생겨버린 재앙은 어쩔 수가 없으니까요. 그땐 시계의 힘을 사용해,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밖에 없죠.”
“다시 시간을 되돌려야 한다고 하면, 우리는 이번엔 온전히 기억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는 건가? 시간을 돌려 조각을 찾아야 하는데, 다시 전부 잊어버리게 되면 비극이 되풀이될 확률이 높아지지 않나.”
아노렐과 리리는 시선을 마주했다. 대답을 한참 고민하며 눈빛을 주고받다가, 이윽고 대답한 사람은 리리였다.
“사실 저희도 잘 몰라요. 시계의 힘이 온전했으면 시계를 돌리는 당사자들은 당연히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겠지만….”
“그건 오히려 우리가 물어보고 싶은데? 둘이 한 번씩 시계를 돌려봤을 거 아니야? 시간을 거슬러 돌아왔을 때, 어디까지 기억할 수 있었어?”
아노렐의 이어진 질문에, 이번엔 리비에르와 카이멜이 침묵했다. 한참 머리를 긁적이다 리비에르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실히, 이걸 ‘기억한다’라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네. 종종 모르고 있어야 할 사실을 알고 있다거나, 그런 기시감이 스칠 때가 있지만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또 아니라.”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 그 기시감으로 우리가 이곳까지 다시 오는데 시계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돌려야 했지 않은가. 또 모든 것을 잊게 된다면 다시 이 지점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확신할 수 없지.”
“그건 곤란해요.”
리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리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에겐 그만큼의 여유가 남아있지 않아요.
“말씀드렸죠? 별의 조각 하나가 실종된 이후로 시계의 힘은 쭉 불안정했다고요. 그건 현재진행형이라 시간이 흐를수록 그 힘은 더욱 불안정해지고, 폭주할 가능성이 커져요. 시간을 돌려 다시 시작하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오직 그 불안정한 힘에 의존한 거예요.”
아노렐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꽁지머리에서 삐져나온 금발이 사방으로 격하게 흔들렸다.
“예를 들자면, 당신들이 돌아오는 날짜가 언제였더라. 맞아, 10월 5일이 아니라 그보다 한 달 전이 될 수도 있고, 일 년 전이 될 수도 있고, 진짜 재수 없으면 아예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게 되면 타임 패러독스까지 생기게 된다고. 한번 어긋나기 시작한 시간선은 다시 바로잡기가 만만치 않아서, 저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세계 하나 말아먹는 건 순식간이 될 수도 있다는 거지. 하지만 일단 이 대화의 요지는 그게 아니니까, 패스, 패스. 손을 흔들며 아노렐이 경쾌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시계를 안전하게 써먹을 기회는 몇 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돼. 한 번? 두 번? 운 좋으면 세 번까지는 시간 오차 얼마 없이 돌릴 수 있을지도?”
가벼운 어투에 진지함이라곤 느껴지지 않았지만,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사태의 심각성을 빠르게 자각할 수 있었다.
“결론은 그럼 그거네. 이번 해일이 오기 전에, 그러니까 6월 11일 전까지, 우리가 별의 조각을 되찾아 시계를 온전하게 복구하고 너희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
아노렐과 리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조수가 남은 책방을 떠나기 전, 카이멜은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혹시 조각이 있을 만한 장소를 더 정확하게 추릴 방법은 없는가? 시간이 많이 단축될 것 같은데.”
“죄송해요, 그건 저희도 알 수 없는 부분이라, 도와드릴 수가 없네요.”
리리의 얼굴은 진심으로 미안해 보였기에 카이멜이나 리비에르나 소녀를 타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리리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해일은 항상 이 섬을 향해 와요. 단 한 번도 비껴간 적이 없죠. 그 혼란의 한가운데엔 분명히 별의 조각이 있어요. 이 섬 어딘가에 그 조각이 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어요.”
이번 정거장은 중앙광장, 중앙광장입니다. 버스의 안내 메시지가 리비에르의 상념을 깼다. 끼익,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자 버스의 문이 열리고, 리비에르는 서둘러 가방을 챙겼는지 확인한 후 버스에서 내렸다.
빠르게 걸음을 옮겨 광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서서히 시야에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분수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분수대에 얇게 쌓여있어, 대리석이 아닌 얼음처럼 보이기도 했다. 봄이 와서 눈이 녹으면 분수대는 다시 맑은 물을 내뿜기 시작할 것이었다. 돌고 돌아 다시 오는 계절을 환영하듯이.
그곳에서 카이멜은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로 낮게 묶은 붉은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리비에르의 기척을 느낀 듯 카이멜이 리비에르가 다가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날부터 리비에르와 카이멜의 기묘한 보물찾기가 시작되었다.
하루, 이틀, 주말마다, 휴일마다.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별의 조각을 찾아 섬의 온갖 외진 장소를 둘러보았다. 작은 손목시계에 박혀있던 조그마한 보석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매의 눈으로 구석진 곳까지 샅샅이 살피며 둘은 포기하지 않고 매주 새로운 장소에서 수색을 이어갔다.
사람이 드문 주말의 이른 오전에는 광장의 작은 골목길을 빠짐없이 돌았고, 오후에는 버스를 타고 멀리 나가 인기척이 드문 곳을 순회했다. 둘이 흩어져서 찾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노렐이 귀띔해주길 둘이 함께 있을수록 영혼의 끌림이 강하게 느껴질 것이라 했기에, 둘은 기꺼이 함께 다녔다.
리비에르나 카이멜이나, 누구에게도 서로 사귄다고 공표는 안 했지만, 어느덧 둘이 함께 보이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해져 섬 주민들은 어련히 둘이 연인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이번 시간선에선 둘의 관계를 확고하게 결정짓는 말을 누구도 꺼내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리비에르나 카이멜이나, 정정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1월에 희게 쌓인 눈이 2월에 살짝 녹았다가, 3월 꽃샘추위에 다시 얼고, 이윽고 초봄을 맞아 흐르듯 녹아내렸다. 군데군데 젖은 흔적과 채 녹지 않은 서리만 남기고, 겨울의 잔향이 사라지는 동안 별의 조각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눈이 녹았으니 이제 좀 찾기 쉬워지지 않을까? 적어도 삽 들고 눈의 언덕을 파헤치진 않아도 될 거 아냐?”
리비에르의 우스갯소리에 카이멜이 피식 웃었다. 글쎄, 그 삽을 들고 땅을 파헤쳐야 하는 건 아닌지 슬슬 의구심이 들긴 한다만.
“그럼 다음 주 주말엔 어디로 가볼까? 광장이나 주택가, 상점가 부근은 더 찾아보는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그러게… 그쪽은 정말 이 잡듯 뒤졌는데도 아무런 수확이 없는 거로 봐선, 이제 다른 쪽으로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지?”
“그럴지도 모르겠군. 어디 생각해둔 곳이라도 있나?”
“사실 이제 찾아보지 않은 곳은 사람들이 거의 가지 않는 자연공원이나 섬을 둘러싼 해안가밖에 안 남았어. 자연공원이야 주말 두세 번 정도면 다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해안가가 조금 더 막막해서.”
작은 섬이었지만 섬의 둘레가 일부 바위 절벽을 제외하곤 전부 모래 해안가로 이루어진 만큼, 샅샅이 뒤지는 것은 고된 작업일 터였다. 카이멜도 이를 알아차렸는지 표정이 살짝 난감해졌다. 모래사막에서 바늘 찾기가 따로 없군. 카이멜의 말에 리비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정확한 비유라 뭐라 할 말이 없어지네. 하지만 일단 다음 주에 가고 싶은 곳은 따로 있어서, 그곳부터 가보려고 하는데.”
그럼 다음 주 안내도 맡기겠네. 카이멜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아, 눈치챈 모양이네. 리비에르의 입꼬리도 같이 올라갔다.
3월 말의 밤바람은 선선하기보단 서늘했다. 늦은 저녁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달이 점차 높이 떠올라, 이제 거의 하늘의 중앙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은색의 달빛을 받아 유리로 만들어진 화원이 한낮 못지않게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유리문 앞,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번 시간선에선, 이곳에 아직 와본 적이 없었었군.”
“그렇지, 아무래도 이 꽃이 피는 시기가 이른 봄이다 보니. 내가 처음 이곳에 너를 데려온 것도, 네가 나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와 준 것도, 다 이맘때쯤이었지.”
세 번째 방문이었지만, 설레는 마음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카이멜이 먼저 손을 뻗어, 유리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조용히 문이 열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바다수국이 리비에르와 카이멜을 반겼다.
푸른 꽃잎과 금색 꽃봉오리의 사이에 서 있자 마치 별바다에 떠다니는 몽환적인 느낌마저 들어, 흡사 꿈을 걷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그 꿈을 깨고 싶지 않아, 둘은 한동안 고요히 침묵을 지켰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빛나는 꽃들에 파묻혀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은 잘 보이지 않았다. 리비에르는 카이멜을 돌아보았다.
“…그냥 감이지만, 이곳에 있을 것 같지는 않네. 별의 조각 말이야.”
수색이 시작된 지 두 달이 훌쩍 넘어, 이제는 어느 정도 느낌만으로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카이멜도 리비에르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말을 얹지 않았다. 잠시 손을 놓고, 리비에르는 돌아서서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다수국 꽃다발 하나를 집어 들었다. 푸른 머리카락 끝에 반딧불이를 닮은 빛무리가 모여드는 착각이 들었을까. 리비에르는 한 손에 꽃다발을 든 채로 카이멜에게 다른 손을 내밀었다.
“우리 바닷가로 가보지 않을래?”
달빛이 밝으니 운이 좋으면 별의 조각을 환하게 비춰, 기적처럼 찾을 수 있지도 않을까? 순진한 동화 같은 말을 꺼내는 리비에르에게 카이멜은 그저 웃어주었다. 뭐, 나쁜 제안은 아니니 자네 말대로 한 번 가볼까? 카이멜은 리비에르가 내민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손을 잡은 채로 다시 유리화원을 나서, 고른 자갈 언덕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사람이 텅 빈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해안가로 내려가는 좁은 나무계단에 발을 디뎠다. 판자가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에 섞여 들어갔다. 천천히 내려가, 단단한 판자가 아닌 푹신한 모래를 밟자 소금에 절여진 바람이 물씬 풍겨왔다.
사박사박. 푹푹 빠지는 모랫길을 끊임없이 걷자, 조금씩 발밑이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밤이라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젖은 모래 속에 그들의 발자국이 남고 있을 터였다. 리비에르의 손안에 들린 빛나는 바다수국 꽃다발을 등불 삼아, 모래와 바다의 경계까지 그들은 걸어갔다.
바닷바람은 차가웠다. 발끝까지 아슬하게 다가오는 밀물을 유리마냥 달빛이 환하게 비췄다. 파도에 이는 하얀 거품이 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여, 정교하게 만들어진 작품과도 같았다.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그곳에 서서 파도가 밀려들어 왔다가 다시 떠내려가고, 몇 번씩 반복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늦은 여름, 바다수국이 다 지고 나면 여름을 떠나보내고 가을을 맞이하는 행사가 열려. 사람들이 바다수국 모양의 풍등을 만들어서 바다에 띄우는 놀이를 하거든. 그것만큼은 아직 못 봤겠네. 아쉬운 대로 우리 진짜 바다수국이라도 한번 바다에 띄워보지 않을래?”
계절이 흐르는 것을 축복하듯, 우리의 6월이 무사히 지나 7월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바다수국을 감싸고 있던 리본 끈을 풀어 종이를 벗겨냈다. 빛나는 꽃의 반절을 카이멜에게 들려주고, 반절은 리비에르가 안은 채 젖은 모래 위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손끝에 얼음장 같은 바닷물이 닿았다. 리비에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송이, 한 송이. 바다수국을 파도에 떠나보냈다. 옆에서 카이멜 역시 자신과 같이 꽃송이를 바다에 띄우는 것이 보였다.
기울기 시작하는 달이 바다수국을 월광으로 감쌌다. 검푸른 바다 위에 푸른색과 금색의 빛깔이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그 풍경은 마치 바다에 별이 무수히 빛나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 * *
리비에르는 초조한 표정으로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이른 여름 아침의 시원한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그와 조금 다른 서늘한 감촉이 리비에르의 목을 타고 내려왔다. 손목에 찬 시계에서 조용히 째깍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굳이 달력을 찾아보지 않아도 오늘의 날짜만큼은 착각할 수 없었다. 리비에르는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떴지만, 날짜가 변하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6월 11일. 세 번째 맞이하는 250일.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의 마지막이 다가왔다.
주어진 시간이 줄어들수록 마음만 다급해졌지만 하루 지나 하루, 번번이 허탕만 치는 날이 늘어가 재해의 날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자,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둘 다 급하게 휴가를 신청했다. 카이멜의 학교나, 리비에르의 어린이집이나, 갑작스러운 신청에 당황했지만, 그들의 간절한 요청에 못 이겨 둘은 마지막 닷새가량의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모래가 옷에서 떨어지지 않는 날이 없을 만큼, 둘은 해안가를 뒤지고, 또 뒤졌다. 해안가가 시작하는 섬의 바위 동굴부터, 매일 해안가를 따라 걸으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에 해가 떨어져 수색을 더는 할 수 없을 때까지. 그렇게 필사적으로 찾았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 잔인하게도 찾아온 6월 11일이었다.
가볍게 차려입고 이제는 집처럼 익숙해진 해안가로 나가자, 그곳에서 카이멜은 리비에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말없이 아침 인사를 주고받았다. 푸른 눈동자와 금색 눈동자에 서린 간절함이 무척 닮아있었다.
유독 바람이 세게 불었다. 파도가 거칠게 모래사장 위를 덮쳐와, 해안가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모래와 파도 속에서,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세상에서 동떨어진 것처럼 존재했다.
오전이 지나 오후가 되어, 태양이 중천에 떠올라도 덥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바람이 더욱 세져 그런 것이었을까. 하늘의 푸른색이 점점 회색으로 짙어져갔다. 모래사장이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1센티미터씩, 조금 더 지나 손바닥만큼 물에 잠겨가고 있었다. 야금야금, 시간도, 모래도 거친 물속으로 삼켜졌다.
오후 2시 반. 오후 3시 반. 4시, 5시.
어느덧 깜깜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들이마시는 공기에 습기가 가득해 숨이 턱턱 막혀왔다. 해안가의 반절이 벌써 차오른 바닷물에 잠겨있었다. 더 오래 머무르고 있기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달리 선택지가 있었을까. 카이멜이 리비에르의 손을 잡아 왔다.
“우리가 아직 찾아보지 못한 곳이 어디 남아있지?”
“이젠 거의 다 찾아봤어. 이 모래사장이 끝나는, 저 절벽까지 별의 조각이 없다면, 아마….”
리비에르의 시선이 넘실거리는 바닷가로 향했다. 카이멜의 눈동자가 그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갔다. 파리한 손끝에, 해안가에서부터 이어지는 다리가 보였다. 10미터가량 이어지는 다리의 끝에 훤히 트인 명소가 보였다. 해안가보다 높은 고지에 있어 다행히 아직 물에 잠기지는 않았지만, 높아지는 파도에 다리가 젖어 올라가기에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다.
“…더 늦기 전에 가지.”
카이멜의 단호한 목소리에 리비에르는 대답 대신 잡은 손을 이끌었다.
오르막길의 다리를 오르는 리비에르와 카이멜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결연했다. 어느 한쪽이 미끄러지려 하면 서로 붙들어 의지하며, 한걸음, 한걸음. 조금씩, 확실하게 명소를 향해 올랐다.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가 삐그덕거렸지만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려, 둘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가장 높은 곳까지 다다랐을 때, 하늘은 검보라색의 폭풍이 되어있었다. 높은 고도의 바람이 훨씬 강해져 이리저리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눈 앞을 가릴 정도라, 카이멜은 서둘러 손목에 낀 머리끈으로 대충 머리를 묶어 올렸다. 그럼에도 시야가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재해 같은 하늘과 밑에서 괴물의 아가리처럼 입을 벌린 검은 파도뿐이었다.
그 폭풍 속에서, 작은 빛이 반짝였다.
명소 한가운데 세워진 바다수국 조각상. 하얀 돌로 만들어진 꽃 안에서 백색보다 더 밝게 빛나는 작은 조각이 박혀있었다. 리비에르와 카이멜이 홀린 듯 그 빛을 향해 다가가자, 조각이 더 밝게 빛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자 보인 것은 작은 돌 꽃봉오리 사이에 박힌 보석 두 개였다. 하나의 색으로 지칭하기엔 눈을 깜빡일 때마다 색이 바뀌는 것 같았지만, 그만큼 일정하게 머금은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라진 별의 조각이,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의문이 들기도 전에 리비에르는 조각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카이멜의 손도 조각의 빛에 이끌린 듯 천천히 다가갔다.
손과 손이, 손과 보석이 닿았다. 순간 눈앞이 번쩍이며 시야가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손끝에서부터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와 온몸으로 퍼져, 마치 따듯한 물속에 담근 기분이 들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온전한 안온감이 들었다. 도망칠 수 없는 재해 속에서 무한한 안도감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빛이 사그라들자 보인 것은 바다수국 조각상에서 사라진 보석이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시선이 손목에 찬 시계로 향했다.
열두 개의 보석이 다이얼 안에서 작게 반짝이고 있었다.
발아래에서 파도가 사납게 몰아쳤다. 조금 있으면 리비에르와 카이멜이 발을 디디고 있는 곳마저 파도 속으로 사라질 것이 명백했다. 얼핏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리비에르도, 카이멜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망설임이 생기는 것은, 그들이 결국 인간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다음에도 널 기억해낼 수 있을까?”
물음이 파도 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카이멜은 리비에르의 단어 하나 놓치지 않았다. 손을 힘주어 잡았다.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리비에르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어찌 보면 카이멜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걱정할 것 없어. 몇 번의 시간을 건너야 하든, 설령 세계의 반대편에서 너를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너는 나한테 있어 가장 특별하니까, 가장 특별한 사람이니까.”
가장 특별한, 사랑이니까.
“우리는 분명 다시 기억할 수 있을 거야.”
그것이 리비에르가 필요로 했던 마지막 확신이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약간 갈라졌지만 포개어오는 감촉은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눈물이 흐르진 않았지만, 바닷바람의 짭짤한 맛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영원 같던 몇 초 뒤, 떨어진 두 사람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담겨있었다. 마지막 기회의 문이 곧 닫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서로의 손을 다시 한 번 꼭 잡았다. 우리 다시 만나는 거야, 약속해. 무언의 약속과 함께 두 개의 시곗바늘을 돌렸다.
6시… 5시… 4시….
돌아가는 시계 위로, 폭풍의 장막이 걷히고 별이 하나씩 숨겨진 모습을 드러내는 환상이 보인 것 같기도 했다.
“…아주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너여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슬퍼해야 하는 걸까?”
“기왕이면 기뻐해 줬으면 좋겠군. 마지막 순간까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어찌 보면 축복 아닐까?”
“그래, 네 말이 맞네. 하지만, 바라는 것이 욕심이 아니라면,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딘가에서, 그것이 아주 먼 미래가 된다 할지라도.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그럼 말을 정정하지.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아니까, 우리는 웃으며 잠시 눈감을 수 있다고.”
“자, 약속이야. 우리의 이별은 시간을 넘어 재회하는 그때까지야.”
그러니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시간을.
만약 이 기도가 저 별에게 닿는다면,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우리가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 있을 수 있기를.
Written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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