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lude (1)
경원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사절단을 전부 보내고 나니 한 꺼풀 벗고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앞으로도 해야 할 게 산더미였지만 잠시라도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마음 편히 쉬고 싶었다. 그런 무의식이 반영된 탓인지 경원은 꿈속에서도 단잠을 자는 중이었다. 구름 위를 떠다니며 하늘을 유람하고 있는 경원을 수많은 크고 작은 동물들이 뒤따랐다. 여기가 바로 도원경이구나. 경원은 영원히 이곳에서 뒹굴거리고 싶었다.
머리맡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가 지긋지긋한 현실이라는 무저갱으로 끌어내렸다. 어제 막 갈아끼워진 듯 포근한 이불과 침대 위로 퍼지는 햇살이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 같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보지만 한마디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다. 눈을 감은 채 손만 더듬어 시계를 찾은 경원은 다시 낙원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폭신한 구름 위로 재차 소환된 그는 털 뭉치들에게 둘러싸여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 알람이 울렸으니까 5분, 아니 10분만 더 이러고 있자. 그렇게 생각한 순간 볼에 촉촉하고 말랑한 것이 닿는 게 느껴졌다. 아아, 고양이 밥을 줘야 하지. 미안하지만 조금만 기다려주게. 5분만⋯⋯.
“장군님, 일어나세요.”
으음, 알겠네. ⋯근데 너 말을 할 줄 알았던가? 경원은 문득 위화감이 들어 슬며시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들이치는 햇빛이 눈부셔 살짝 찡그리자 저를 깨우던 인영은 창가 쪽으로 몸을 옮겼다. 아마도 햇빛을 가려주는 듯했다. 역광 때문에 누군지 똑바로 알아볼 수 없었다. 아직 몽롱한 상태인 경원이 곧 입을 열었다.
“⋯고양이?”
“하하. 또 고양이 꿈을 꾸셨나 봐요? 그 아이는 제가 이미 밥을 주고 왔으니 걱정 마세요.”
인영은 웃으며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경원은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눈을 떴음에도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인영은 평소보다 키가 컸고 머리카락도 길었다. 혹시 누워있어서 착각하는 게 아닐까 싶어 일어나 앉아봐도,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며 다시 봐도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자라는 게 가능한 일인가? 혹시 5분만 더 잔다고 하는 걸 50년을 더 자버린 게 아닐까? 목소리마저 달랐다면 알아볼 수 없었을 것 같았다. 경원은 한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인영에게 말을 걸었다.
“⋯⋯연경?”
“네. 왜 그러세요? 아직 잠이 덜 깨셨나요?”
커튼을 다 정리한 연경은 침대로 다가와 경원을 끌어안으며 이마를 맞대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잠 깨는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경원은 다시 눈을 감고 싶었다. 아니, 실제로 눈을 감았다. 이곳이 아직 꿈이라면 다시 눈을 떴을 땐 원래대로 돌아왔길 간절히 바랐다. 고작 하루 만에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게 아닌가? 외형이 바뀐 건 그렇다 쳐도 성격마저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 넌 내가 아는 그 아이가 맞는 게냐⋯⋯.
경원이 눈을 감는 걸 허락의 신호로 받아들인 연경은 곧바로 이불을 들추며 경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경원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잠깐, 네가 나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것까지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 설마 아까 고양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연경의 손이 잠옷 사이를 가르며 들어왔다. 생각에 빠져있던 경원은 익숙지 않은 손길에 놀라 연경의 손을 급하게 잡아 빼며 몸을 살짝 뒤로 뺐다. 그리고 연경이 걷어내버린 이불을 끌어와 덮으며 몸을 가렸다. 연경의 갈 데 없어진 손이 허공을 떠돌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연경, 너⋯ 언제 이런 걸 배운 것이냐.”
“무슨 소리세요? 장군님이 가르쳐 주셨잖아요.”
내가? 언제? 성교육을 시킨 기억은 없는데.
경원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리자 연경이 곧 아. 소리를 내며 말했다.
”죄송해요. 하긴, 어제 제가 너무 심하긴 했죠⋯ 알겠어요. 오늘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을게요.“
경원은 이마를 짚었다. 뭘 선심 쓰듯 말하는 거야? 이대로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너 미친 것 같다.‘고 하면 연경이 놀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경원은 조금 돌려서 말을 꺼냈다.
”그런데 너⋯ 그새 키가 많이 자란 것 같구나.“
”정말요? 예전엔 이제 다 자랐으니 포기하라고 하셨잖아요. 얼마 전에 나무에서 떨어지는 꿈을 꿨는데, 다시 키가 자라나봐요!“
연경은 눈을 빛내며 방 한편에 세워진 거울로 달려가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제 모습을 확인했다. 등 뒤로 길게 늘어져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찰랑이는 머리칼을 보며 경원은 생각했다. 아니, 고작 그런 꿈 하나로 그만큼이나 자랄 리가 없잖은가.
”그리고⋯⋯.“
”어떠세요? 정말 키가 자란 것 같나요?“
”⋯그래. 그보다 말투가 많이 겸손해졌구나.“
”네? ⋯아! 어젯밤에 반말한 것 때문에 그러세요? 죄송해요. 그런데 장군님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볼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는 연경에게 경원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무마했다. 그래, 생각하는 걸 멈추자. 일단 용녀에게 데려가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지. 갑자기 몸이 자란 탓에 머리가 이상해진 걸지도 모른다. 혹시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은 아닐까? 허나 그 아이가 현실과 혼동할 정도로 항상 이런 꿈을 꾸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건 그거대로 머리가 아픈 일이었다. 경원은 분명 같은 사람이지만 약간 낯설어진 제자를 바라보다가 곧 한숨을 작게 뱉으며 말했다.
”출근 준비를 해야겠구나.“
“⋯장군님, 어디 아프세요? 은퇴하신지가 언젠데⋯ 아직도 잠이 덜 깨셨나 봐요.“
경원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정도까지 현실과 동떨어지게 혼동할 수도 있는 건가? 연경이 너무 진지하고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정작 정신이 이상해진 쪽은 자신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언제 은퇴를 했다는 건가. 바로 어제까지도 출근해서 일하고 네가 마중 나와서 집에도 같이 왔지 않나. 그러나 경원은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아이 상상 속의 나는 은퇴하고 집에서 뒹굴거리며 고양이나 돌보는 안락한 노후를 즐기는 노인이지 않은가. ⋯⋯생각해 보니 꽤나 괜찮아 보이는 삶인데.
“오늘은 저와 데이트하기로 하셨잖아요. ⋯혹시 제가 어제 너무 괴롭혀서 가기 싫어지신 거예요?"
아니, 나는 출근을 해야 한다니까.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경원은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용녀에게 가기 전에 익숙한 곳에 데리고 다니다 보면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고⋯ 그걸 핑계로 약간 늦어도 청주가 뭐라고 하지는 못하겠지.
“오늘은 저와 데이트하기로 하셨잖아요. ⋯혹시 제가 어제 너무 괴롭혀서 가기 싫어지신 거예요?"
아니, 나는 출근을 해야 한다니까.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경원은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용녀에게 가기 전에 익숙한 곳에 데리고 다니다 보면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고⋯ 그걸 핑계로 약간 늦어도 청주가 뭐라고 하지는 못하겠지.
경원은 자기가 말해놓고 부끄러운 듯 꺅꺅 소리를 지르는 연경을 무시하고 곧바로 옷장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항상 입던 옷은 온데간데없고 잠옷, 아니면 편안한 외출복⋯ 온통 처음 보는 옷들뿐이었다. 어제 세탁하고 안 찾아왔던가.
”내 옷은 어디 갔지?“
”네? 어떤 옷⋯ 아! 그건 제 방에 장식해놨는데⋯ 갑자기 그 옷은 왜 찾으세요?“
”그건 또 언제 가지고 간 것이냐⋯⋯ 아니다. 네 방으로 가자.“
경원은 방을 나가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러 연경의 방문 앞에 섰다. 정신 계통 이상도 남에게 옮을 수 있는 거였나? 오는 동안 계속해서 위화감이 맴돌았는데 무엇이 잘못된 건지 퍼뜩 떠오르지 않아 기분이 영 답답했다.
“왜 그러세요? 문은 안 잠겨있어요.”
경원은 옆에 서있는 연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앉아있을 땐 몰랐는데 서서 보니 키가 제법 커서 더욱 낯설었다. 분명 어제까진 한참 내려다봐야 했는데⋯ 그러고 보니 맞는 옷이 없었을 텐데 저 옷은 어디서 난 거지. 너는 어째서 이렇게 자연스러운 게냐. 연경을 붙들고 추궁해 봤자 영문을 모르는 건 그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경원은 빨리 이 상황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모든 의문을 뒤로하고 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제 방에 오는 건 오랜만이시네요. 저도 자주 오지는 않아서 조금 더러울 텐데⋯ 잠깐 기다리시면 옷을 가져올게요.”
연경이 자신을 뒤로하고 먼저 방으로 들어가 짐을 뒤적이는 동안, 경원은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물론 네가 말한 것처럼 내가 여길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방 꼴이 이게⋯ 이게 다 무엇이냐. 내 돈을 반강제로 가져가서 샀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간 게야? 경원은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사진들과 선반에 전시된 잡동사니들에 압도되어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좋아하던 검은 몇 가지 밖에 없었고 구석에 작은 책상과 옷장이 있는 게 다였다. 너 여태 이런 방에서 생활했던 게냐. 이런 곳에서 지내니 머리가 이상해질 수밖에. 그러고 보니 침대도 없잖아? 이런 방에서 잠은 도대체 어디서 자란 거야?
“여기 있어요. 이 옷은 입기도 불편하고 이제 입을 일도 없다고 하셨으면서 갑자기 왜⋯⋯ 장군?”
경원은 옷을 들고 다가오는 연경을 지나쳐 사진으로 가득한 벽면 앞에 다가가 섰다. 멀리 있어서 알아채지 못했지만 난잡하게 걸려진 사진 속엔 전부 연경과 경원, 두 사람이 담겨있었다. 간혹 그들의 독사진도 있었다. 경원은 보는 내내 혼란스럽기만 했다. 사진 속의 자신은 본 적 없는 옷을 입고 낯선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일상들을 찍은 사진 같았지만 그중엔 분명 민망한 사진도 있어서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너와 이런 사진들을 찍었다고? 잠깐, 내 어릴 적 사진은 어떻게 구한 것이냐.
“사진이 꽤 많아졌죠? 이제 선반에도 둘 곳이 없어서 정리를 좀 해야 하는데. 매번 생각만 하고 미루게 된다니까요.”
경원은 이제 결심해야만 했다. 용기 내어 믿고 싶지 않은 현실과 마주할 시간이었다. 경원은 선반 한편에 놓인 어제까지 자신이 쓰던 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연경. 지금이 몇 년도지?”
연경은 매우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경원을 잠시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8403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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