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오(過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내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을 돌려 빠른 걸음을 했다. 도저히 상관에게 하는 태도라고 볼 수 없었으나 아무도 그를 돌려세워 꾸짖거나 하지 않았다. 곱상하게 생긴 얼굴과는 달리 속으론 시꺼먼 생각을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게 이유였고, 한마디 해봤자 그가 충성하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 자기들 입만 아플게 뻔하다는 게 이유였고, 겉과 속이 다를지언정 항상 웃음은 잃지 않던 그가 오늘처럼 사뭇 다를 때에는 건드려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이미 아는 게 그 이유였다.

사내는 등 뒤로 나름 생사를 함께 한 전우들이 안 보이게 될 즘에야 속도를 줄이다가 길가에 멈춰 섰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제법 진지한 얼굴을 하고 삐딱하게 선 채 한 손으로 단말기를 만지작거렸다.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거리에 사내는 그렇게 오랫동안 홀로 서 있었다. 위아래로 화려하게 움직이는 엄지손가락만이 애꿎은 화면을 틱 틱 쳐대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장군 뭐 해?】

【나 곧 끝날 것 같은데. 갈 때 뭐 사갈까?】

연경은 문자메시지 창이 켜진 화면에 얼굴을 들이대고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분명 읽은 거 맞는데⋯.”

마지막으로 보낸 것이 두 시간 전이다. ‘나 도착했어.’를 시작으로 수많은 메시지가 전송됐지만 아무리 화면을 올리고 내려봐도, 심지어는 기계가 고장 난 거 아니냐며 전원을 껐다 켜보아도 연경의 눈에 보이는 건 제가 보낸 메시지가 다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젠 답장이 왔겠지 하며 메시지 창을 켜본 게 몇 번째인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제 나이보다는 많았을 것이다. 반응이라고는 상대방의 ‘읽음’ 표시만이 전부인 일방적인 대화를 하염없이 들여다보던 연경은 이내 나머지 손을 들어 두 엄지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많이 바빠?】

명랑한 기계음 소리를 내며 전송된 메시지와 상반되게 메시지 주인의 얼굴은 어두운 빛이었다. 까닭은 상대에게서 돌아오는 답이 여전히 ‘읽었다’는 뜻이 다였기 때문일 테다. 의미 없는 내용을 몇 번 더 보내봐도 결과는 같았다.
경원의 이런 행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의 하루 일과는 매일같이 촘촘히 짜여있다. 분 단위로 쪼개어진 삶을 살면서도 잠시 숨을 돌릴까 하면 귀신같이 일이 몰려들었다. 하물며 그는 한 선주의 장군이고 그에 따르는 책임이 있을진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이라 할지라도 어찌 사사로이 하루 종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물론 연경도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리도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먼지 쌓인 컨테이너 사이로 느닷없이 거센 바람이 일었다. 연경은 아직까지 대답이 없는 단말기를 손에 꼭 쥐고 결연한 표정으로 땅을 박찼다.

연경이 자신의 불안이 그저 기우이기를 믿으며 신책부로 갔을 때, 안 좋은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그 미신에 힘을 실어주게도 당연히 경원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청주가 경원의 행방을 안다는 것이었다. 청주는 경원이 여느 때처럼 용존에게 갔다고 했다. 연경은 또다시 가보겠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을 돌렸다.

경원과의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를 하는 건 연경의 일상이었다. 연경은 매일같이 온 나부를 종횡무진하는 경원을 쫓아 동분서주했다. 그건 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수련이기도 했고, 가끔은 유희이기도 했고, 어쩔 땐 대화 수단일 때도 있었다. 그 수많았던 과정들을 두고 추리하건대, 목적지에 그가 없을 확률은 높았다. 가감 없이 단정사로 달려가면서도 연경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단정사에 그는 없었다. 연경은 숨돌릴 새도 없이 또다시 땅을 박차고 달렸다. 경원이 갈만한 곳은 어디든. 자기가 모르는 곳에 있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장군님은 오늘 안 오셨는데요⋯.’

마지막으로 도달한 불야후에서 그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연경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번에도 말이 끝나기 전에 등을 돌렸다. 이제 경원이 있을만한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이건 감 따위의 비과학적인 미신이 아니라 통계에 따른 확신이었다.

사실 처음 신책부로 복귀했을 때, 연경은 직감했다. 그 미신은 틀렸다. 자신의 걱정이 정말로 기우였음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태평한 분위기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토록 예민하게 굴게 되는 이유는. 마음이 술렁이는 까닭은. 지금 당장 그를 만지고,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제 눈앞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지는 충동의 의미는⋯⋯.

연경은 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꼭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 이유 없는 불안감을 종식시켜줄 신을 향해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경원은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이 끝이 정해져있는 시시한 놀이를 한 적이 없었다. 신책부를 빠져나와 뒤돌아가면 나타나는 정원. 애초에 경원은 그곳에 있었다. 자신이 돌아올 곳에.

“하⋯⋯.”

그건 안도이기도 했고, 자신에 대한 책망이기도 했다. 연경은 아직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경원은 그럼에도 괜찮은 척 애쓰는 연경이 안쓰러웠다. 그를 위한다는 이기심에 이렇게 되어버린 것 같아 무던히 노력했다. 어딜 가든 웬만하면 그와 동행하거나, 항상 진동모드인 단말기를 그의 연락만은 소리가 나도록 설정해두거나, 심지어 씻고 잠드는 순간까지도 함께하거나 하는 것들. 연경도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노력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새벽에 자다 깨 옆에 잠들어 있는 경원을 확인하는 것은 이제 가끔 있는 일이 되어버렸다. 졸린 눈을 하고서도 자는 경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불안이 가시는 듯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눈만 껌뻑이고 있으면 곧이어 시선 때문에 잠이 깬 경원이 다정하게 더 자라고 말하며 등을 다독여주는 것도 좋았다. 좋으면서도 싫었다. 이제 그만 벗어날 때도 됐는데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위로를 받고 있는 자신에게 짜증이 치밀었다. 연경은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오늘만 해도 같이 가달라는 어리광 한마디면 됐을 일인데 약한 소리를 하지 않은 건 다 그 이유에서였다. 상호 간의 노력들이 쌓여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떨어지자마자 이 꼴이었다.

연경은 턱까지 차오른 숨을 천천히 고르고 경원이 깨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가 앉았다. 턱을 괴고 앉아있는 경원의 앞에 조그마한 약병이 놓여있었다. 발소리가 나도 깨지 않는 것을 보니 약기운에 취해 잠든 모양이었다. 무방비한 모습에 연경의 미간이 세로로 좁혀졌다. 문자메시지 창이 켜진 채 한 손에 쥐어진 단말기에서는 답장을 쓰던 도중이었는지 커서가 깜빡거렸다.

연경은 잠든 경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잠든 모습에 가슴이 다시 철렁하게 내려앉았다. 숨까지 참으며 집중하고 나서야 작게 들썩이는 어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제 기우였다는 것을 확인받는 순간. 그제야 숨통이 트이고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잠시 단잠에 빠진 스승과 그 곁을 지키는 제자. 제3자가 보기엔 제법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연경은 과거에 말미암은 죄책감과, 또 부응해 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로 가득 찬 머리가 무거워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조금 더 컸더라면, 조금 더 실력이 좋았더라면, 그래서 의지가 될 수 있었더라면⋯⋯. 진정됐던 마음이 무색하게도 거짓말처럼 또다시 불안이 증식했다. 경원이 깨기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어서 일어나기를, 웃으며 눈을 맞춰주기를, 뭐라도 좋으니 아무 말이라도 해주기를. 연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주화입마에 빠진 자신을 메시아의 손길이 어루만졌다. 머리 위로 느껴지는 온기는 연경이 생각했던 것보다 뜨거웠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이리 땀이 나도록 달려온 게냐.”

경원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 가라앉았지만 다정한 목소리를 했다. 연경은 그 변치 않는 다정함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경원은 답장을 쓰다 잠들었다며 미안하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연경의 손등을 덮었다. 연경은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온 성자의 손끝을 만지작거리다 뭔가를 결심한 듯 깍지 껴 잡았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장군이 너무 보고 싶어서.”

“⋯⋯.”

경원은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웃으며 자신이 보고 싶었다 말하는 연경을 애처롭기도, 애틋하기도, 그리고 다정하기도 한 웃음으로 헤아렸다.

“그러냐⋯. 나도 네가 보고 싶던 참이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연경아, 너밖에 없구나.”

“그거야 당연히 내가 장군을 더 좋아하니까 그렇지.”

“건방지구나. 네가 날 이기려면 아직도 멀었어.”

경원이 자기는 네가 나오는 꿈까지 꿨다는 둥 꿈에서 고양이로 변하던데 몹시 귀여웠으니 어서 빨리 변해보라는 둥 실없는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 분위기에 완전히 감화된 연경이 그제야 비로소 진실된 미소를 띠었다. 경원이 그런 그가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금 끌어당기자 연경은 그를 마주하며 힘껏 끌어안았다. 그들은 이제 저녁으로 뭘 먹을 건지, 돌아오는 휴일에 무엇을 할 건지 따위를 이야기했다.

연경은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기어이 꿈꾸던 미래를 이뤄낼 자신을 믿으며. 가끔 오늘처럼 불안에 떠는 날엔 자신만의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며. 변함없을 무한한 신뢰에 화답하며.

<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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