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레일

인간의 신념에 대하여

현대 AU

커플링 표기가 혼파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줄요약: 개판오분전

나무처럼 생겼지만 사실 나무로 장식했을 뿐 안에는 철판이 든 육중한 대문을 보며 남자는 생각했다. 콱 혀 깨물고 죽어버릴까. 그런 생각이 들고야 마는 것은 남자가 오늘 해야 할 일이 너무나 황망하고, 험난하고⋯⋯ 결정적으로는 너무나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연인의 집에서 자신의 집으로 한 시간 남짓한 거리를 운전하며 남자는 줄곧 그 생각을 했다. 어디 가로등에 들이박아 사고라도 내 버릴까. 버스에다 역주행으로 돌진해 볼까. 좀 꼴사납긴 하지만 그가 앞으로 거쳐야 할 그 험난한 산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러나 그 때마다 연인의 해맑으면서도 의뭉스러운 얼굴이 떠올랐고, 배우자의 능글맞으면서도 때로는 솔직한 낯짝을 떠올렸다. 물론, 혹은 애석하게도 둘은 동일인이 아니다. 그것이 오늘 블레이드이면서도 응성인 남자가 거쳐야 할 험난한 산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경원은 거실에 서류를 잔뜩 늘어놓고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는 매번 겉으로 칼퇴를 부르짖으며 6시만 되면 만사를 제쳐놓고 집으로 도망가는 대표이사로 유명했지만 사실 그는 거대한 기업의 사장답게, 혹은 답지 않게도 일과 가정의 구분이란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남자였다. 집이 곧 회사이고 회사가 곧 집이니 결국 차이라곤 새벽 3시에 운전할 것이냐 저녁 6시에 운전할 것이냐 뿐이다. 경원은 새벽 3시에 운전을 하는 것은 너무 졸려서 도저히 못 해먹겠으니 차라리 러시아워에 운전하기를 택했다. 재택근무자의 숙명대로 주로 저녁을 준비하는 블레이드의 요리 실력이 -이미 죽어버린 그의 손재주와는 별개로-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혹은 여전히 일취월장하고 있다는 점도 이유가 될 수는 있겠다. 그 요리 실력과는 별개로 온종일 혼자 서재에 앉아 각종 시안과 씨름하고 있을 그를 배려했거나. 사실 블레이드는 어느 쪽이건 별로 반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떨떠름함은 과연 오늘을 예견해서인가? 손으로만 인사하면서도 귀에서 스마트폰을 떼어놓지 못하는 경원을 보며 블레이드는 생각했다. 경원은 단지 잠시 기다려달라고 입 모양만으로 말하며 손짓할 뿐 평소와 조금도 다른 구석이 없었다. 다른 구석이 있기를 바랐는지, 없기를 바랐는지. 이제와서는 모르겠다. 다만 그는 방에 들어가 몸을 씻는 대신 어제 입고 나간 것과 같은 코트를 식탁 의자에 걸어 놓고 그 의자에 걸터앉아 경원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 그래, 알겠어. 응. 그건 마케팅부에서 알아서 결정하라고 하게. 어차피 난 미적 감각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으니까. 그래.” 그렇게 말하는 경원의 표정에서는 한 치의 자괴감이나 아쉬움도 보이지 않았다. 경원은 스스로를 일컬어 미적 감각이 멸망한 남자라고 스스럼없이 일컫고는 했으나, 애초에 자신의 단점을 거침없이 인정하는 것은 그 단점을 압도하고도 남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라고, 10년 전의 경원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었다. “오늘은 좀 늦었네? 어제는 말도 없이 외박해서 미안.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

블레이드는 경원의 말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머지 어, 그래, 따위의 영혼 없는 대답을 내놓고 말았다. 경원이 전화를 끊으면 하겠다고 생각한 말이 갑자기 경원의 입안에서 튀어나왔기 떄문이다. 물론 이유는 달랐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경원이 그의 외박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세상 대부분의 죄인이 그렇듯이, 블레이드 또한 그 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느꼈다. 잘못이란, 죄란, 부정이란 어쩌면 숨기기만 하면 씻겨 내려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어제는 미안했어요. 블레이드는 오늘 아침 연인이 매끄러운 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을 손으로 꼬며 멋쩍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신을 여기까지 끌고 갈 생각은 아니었어요. 하긴, 어차피, 계획된 대로 흘러가는 건 아무것도 없는 관계지만⋯⋯.

블레이드는 나찰의 전부를 안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지만, 길지 않은 교류에서나마 그의 습관이나 방식 같은 것은 그럭저럭 파악할 수 있었다. -그만큼 깊은 관계였던 것이다.- 나찰은 충동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은 갈망이고, 기본적으로는 계략에 가까운 온갖 계획이었다. 그는 마치 거미줄을 꿰듯 인생을 사는 남자였다. 때때로 결과가 예상에서 벗어날지언정, 행동이 이성을 벗어나게 두는 사내는 아니었다. 바로 전날 나찰과 몸을 섞으면서도, 블레이드는 손길과 목소리 하나하나가 이성에 좌우돠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배우자와 몸을 섞을 때 늘 뒷덜미를 잡아끌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그 이성을 지워내고 싶었고,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 밀어붙였다. 그게 스스로 제 몸을 팔아넘긴 노예처럼 매달리는 꼴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사실 블레이드는 그런 기만이 싫지 않았다. 나찰이, 경원이, 세상에 무엇도 제 발밑에 두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처럼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인간들이 구태여 저를 기만하는 감각이 싫지 않았다. 그 욕망이 기껍다고도 생각했다. 아니, 지금도 생각한다. 악취미라는 말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자승자박인 걸 알면서도.

무엇보다도, 누더기 한 장 걸치지 않고 몸을 겹치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그 지리멸렬한 천재성이, 감히 다른 인간들은 넘보지도 못하는 그 까마득한 재능이 블레이드에게는 안쓰러웠다. 옛날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타인을 동정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 자신이 가장 잘 알면서도 손을 뻗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손에 뺨을 비비는 몸짓이 본능인지, 유혹인지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손을 거둘 수가 없었다.

“아니, 신경 쓰지 마. 나도 어제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손에 땀을 쥐는 긴박감 같은 건 없었다. 목소리가 조금 갈라지는 듯도 했으나 원래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낮은 음으로 우렁우렁 울리곤 했으므로 약간의 금 정도는 그리 거슬릴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도자기를 금으로 때운 것처럼 요염하게도 들린다고, 어느 밤 경원은 능글맞게 웃으며 놀리기도 했다. “호텔에서.”

경원은 놀라지 않았다. 단지 시선을 피하듯 눈을 돌렸을 뿐이다.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으로, 경원은 금세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낯으로 물었다. “그래? 누구랑?”

블레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경원이 한낱 질투 따위로 타인에게 해꼬지를 할 인간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다만 배우자에게 떠벌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누구에게건 침대 사정을 떠벌리는 취미 따위는 없었으나.

“아, 누군지 알겠다. 그 공예가군. 예명이 나찰이라고 했던가?”

그 침묵이야말로 대답이었다. 경원은 빙긋 웃었다. “얼굴이야 꽤 잘 빠진 양반이긴 하지. 아는 사람 사이에선 유명한데 숨기느라 고생 깨나 하겠어.”

“화내지 않는 건가?”

“내가? 내가 왜?” 그때까지 턱을 괴고 심드렁한 자세로 앉아 있던 경원이 턱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같잖다는 양 양손을 허공에 툭 던지며 짓궂게 웃었다. 장난기가 느껴지는 몸짓이었으나 경원은 그런 표정으로 장난을 치지 않는다. 장난을 칠 때의 경원은 오히려 솔직했다. 저런 표정은, 대체로, 상대를 경악시키기 전의 의식 같은 것이나. 경고거나. 이제부터 네가 뒤로 까무러쳐도 이상하지 않을 소리를 할 것이다, 같은. “난 어제 연경이랑 잤는데.”

블레이드는 그저 말을 잊고, 경원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이름이 머릿속의 그 소년이 맞나 생각했다. 건방지고, 맹랑하고, 열망이 드글드글 끓는 눈으로 제 보호자를 올려다보던, 패기와 열기가 한여름의 햇빛처럼 흘러넘치던, 블레이드에게는 막 쪼개진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롭던 소년. 올해로 어른이 되었노라고 생일날 경원이 장미꽃 한 송이를 준비해 갔던 그 소년.

어쩌면 그 날의 선물은, 장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 당연한 얘기지만 다른 사람에겐 비밀로 하자고. 서로를 위해서.” 경원은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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