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솔 / Secret Travel
현대 요원 au
콜 캐서디에겐 첫 휴가였다. 왜 이렇게까지 쉬는 날이 없었는지 생각을 해봤지만, 일이 바빴다는 것 외엔 특별한 일이 없었다. 쉼 없이 일할 이유가 있었나? 처음엔 타당한 이유가 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변명으로 변했고, 이제 그에게 일은 생존의 문제일 뿐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휴가를 보낼 곳으로 캐서디가 선택한 건 타국이었다. 그의 상사 가브리엘 레예스에게 가려는 나라를 말하니 비웃었던 게 떠올랐다.
[네가 거길? 무슨 언어를 쓰는지 알고 가냐?]
대답하지 않았다. 영어를 쓰면 그만 아니냐고 답하려다가 그러면 분명 말꼬리 잡고 늘어질 게 뻔해서 조용히 휴가 신청서만 내밀었다. 한참 신청서를 바라보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살짝 인상을 썼다. 그건 오랜 기간 옆에서 눈치 보며 함께 일한 캐서디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정 변화였다.
[…뭐, 가면 유령이나 조심해라]
사람 홀리고 다니니까. 사인을 마친 신청서를 다시 건네주며 레예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나저나 유령이라니 그런 실없는 말을 할 줄이야. 여행지에 도착한 캐서디는 입국심사를 마치고 짐까지 챙겨서 공항을 나왔다. 우선 호텔까지 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리무진 버스의 시간표를 확인하려고 어깨에 멘 짐을 내려놓은 순간, 누군가 캐서디의 가방을 들고 쏜살같이 도망갔다. 상황은 금방 파악됐다. 직업병 덕분이었다. 바로 그 뒤를 쫓아갔다. 공항에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요리조리 잘도 도망갔지만,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상대방이 생각보다 빠르다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한참을 달려서 캐서디는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이 자식이 누구 가방인 줄 알고 훔쳐가? 그는 붙잡은 옷을 잡아당겨서 뒤로 넘어뜨렸다. 그러자 상대는 기지를 발휘해 들고 간 가방을 캐서디의 얼굴에 집어 던졌고, 그걸 막으려고 두 팔을 위로 올렸다. 가방이 자신의 팔을 치고 시야를 잠시 가렸다가 바닥에 굴러떨어지는 사이에 가방 도둑은 그대로 도망갔다. 쫓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발에 떨어진 가방을 주우며 생각을 접었다. 시작부터 이러기냐. 주운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메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런.”
전혀 알 수 없는 건물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너무 멀리 와버렸다.
휴대폰의 GPS를 켜고 지도 앱을 보며 한참을 걸었지만, 공항은 보이지 않았다. 초반에 보였던 건물도 이젠 보이지 않았다. 걸을수록 허허벌판뿐이었다. 날도 점점 저물고 있었다. 하긴 도착했을 때가 오후 세 시 즈음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방향이 틀렸나 의심하는 사이 멀리서 건물의 빛이 다시 보였다. 캐서디의 걸음이 빨라졌다. 제발 공항이길. 빨라지는 걸음마다 그렇게 속으로 외쳤다.
거의 다 도착했을 땐, 달리고 있었다. 무거운 가방에 긴 비행시간과 여태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한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였다.
“뭐야…여기가 아니야?”
도착한 곳은 공항이 아니었다. 지도에 표시된 곳을 다시 확인했다. 자세히 보니 경비행장이라고 나와 있었다. 찾고 있는 공항은 여기에서 또 한참을 가야 했다. 운이 이렇게나 없다니. 한순간에 기운이 빠지고 배도 고프기 시작했다. 공항이고 호텔이고 누구에게 뭐라도 물어서 음식을 파는 곳으로 바로 가버리고 싶었다.
“실례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근처 가게처럼 보이는 단층 건물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가 얼굴을 팍 찌푸리며 캐서디를 봤다. 명백히 불쾌한 감정이었다. 머릿속에서는 그만둬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본인도 힘든 상태에 그럴 여유는 없었다. 살짝 긴장한 채로 계속 이어서 물었다.
“공항으로 가려면 어디로….”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이 캐서디에게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알 수 없는 언어로 크게 말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빠르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억양의 음절이었다. 레예스의 비웃음이 스쳤다. 이래서였나. 전혀 처음 듣는 언어라 제대로 반응할 수가 없었고, 캐서디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니까. 공항이요. 비행기 타는 곳. 말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상대방도 계속 무언가를 말했고, 감정은 극에 달한 것 같았다. 낌새가 좋지 않았다. 설마. 캐서디가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뒷걸음을 쳤는데 그가 갑자기 달려들더니 캐서디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한 손으로 멱살을 잡은 손을 쳐내려는 순간, 제삼자가 끼어들었다. 멱살을 잡고 있는 상대방의 손목을 잡아떼고 번쩍 들었다.
“그만.”
남자의 목소리는 지하 밑에서 울리듯 머릿속을 헤집었다. 목소리 다음으로 인식한 건 그의 얼굴이었다. 왼쪽 눈썹 위부터 오른쪽 눈 밑까지 사선으로 짙게 남은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은 흰 머리, 다부진 몸, 까만 정장. 그는 캐서디를 슬쩍 보고는 자신이 잡고 있는 현지인의 손을 놓은 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남자는 현지 언어로 상대방에게 말을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가도 가로젓고, 손을 쓰며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했다.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남자가 캐서디에게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뭐라고 한 거야?”
“고, 공항이 어딘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현지인에게 대답했고, 몇 마디 더 주고받더니 이내 상대방이 이해했는지 웃었다. 상대방은 남자의 뒤에 서 있는 캐서디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와 둘만 남게 된 캐서디가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신 건지….”
“이 건물이 관계자 외에 출입 금지인데 자네가 자꾸 들어오려고 해서 막았다고 하더군. …뭐, 단층 건물이니 구멍가게로 착각할 순 있겠지. 공항은 이 길로 쭉 30분 정도 더 걸어가면 돼.”
꼬르륵.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말보다 위가 먼저 한계를 알렸다. 민망해서 하려는 말이 나오질 않고 마주친 눈도 차마 피하지 못했다. 상대방은 정장 상의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뭔가를 꺼내서 내밀었다. 그의 손 위에 작은 초콜릿 두 개가 놓여있었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타국에서 고생이 많군.”
그 말을 듣자마자 울컥했다. 소매치기당할 뻔하고, 길을 잃고, 말도 제대로 못 해서 오해를 사고. 여행이 계획대로 흐르기만 할 순 없었지만, 시작부터 너무 험난했다. 시간이 지나도 캐서디가 자신이 내민 초콜릿을 받지 않자 캐서디의 손을 잡아서 펴고 초콜릿을 줬다. 그제야 캐서디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향했다. 뭔가 결심했는지 내민 그의 손을 도리어 붙잡으며 말했다.
“저녁! …대접하겠습니다.”
감사 인사로. 그는 잠시 놀란 눈을 했다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대답했다.
“난…일행이-.”
딩동. 남자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그에게서 알람이 들렸다. 캐서디에게 잡힌 손을 급하게 빼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내용을 확인했다.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알람이 두 번 더 울렸다. 확인을 전부 끝냈는지 휴대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넣더니 캐서디를 보며 말했다.
“…장소는 어디지?”
짧은 한숨과 살짝 억울한 표정은 덤이었다. 캐서디는 처음으로 미소 지으며 다시 손을 앞으로 뻗어서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콜 캐서디입니다.”
인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허공에 떠 있는 손을 잠시 보기만 하다가 이내 그 손을 맞잡고 답했다.
“잭 모리슨.”
갑작스럽게 정해진 자리지만, 생각 없이 제안한 건 아니었다. 자신이 예약한 호텔의 고급 레스토랑으로 갈 생각이다. 도와준 사람에게 소홀하게 대접할 수는 없었다. 호텔까지는 모리슨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다시 공항으로 갈 필요 없이 바로 가자고 그가 제안했다. 호텔의 위치를 알려주고 캐서디는 레스토랑 예약을 위해 곧장 호텔에 전화를 걸었다.
-취소된 자리가 있긴 하지만, 특석이라 가격이 다릅니다. 괜찮으신가요?
특석? 살짝 불안한 예감이 스쳤지만, 달리 아는 곳도 없어서 예약했다. 예약 전화를 끊자 가만히 듣고 있던 모리슨이 입을 열었다.
“그 호텔 꽤 비싸지 않나.”
“네. 뭐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여행 온 것 같은데 무리하는 거 아닌가?”
“뭐, 괜찮아요. 돈을 꽤 벌어서.”
조수석에 몸을 기대고 운전하는 모리슨을 빤히 바라보았다. 옆에서 보니 뚜렷한 이목구비와 턱선. 그는 확실히 누가 봐도 잘생긴 사람이었다. 흠이라면 두 개의 선명한 흉터에 구겨진 표정이 기본이라는 것 정도.
“모리슨 씨는 여기에 경비행기를 타고 왔습니까?”
“뭐?”
“경비행장에 계셨잖아요.”
“…거긴 개인 소유의 비행장이야. 정확히 말하면 우리 회사 소유의 비행장이지.”
아. 짧게 이해한 소리를 냈다가 몸을 세우고 어색하게 웃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당장 그 빌어먹을 지도 앱을 지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그럼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미국.”
“미국 어디요?”
차가 멈춰 섰다. 캐서디가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호텔 앞이었다. 운전석의 모리슨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자 그가 살짝 웃고 있었다. 입가 난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난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아.”
호텔에 도착 후 차에서 내리고 우선 프런트에서 체크인했다. 그에게 로비에서 잠시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 곧장 예약한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 위에 가방을 두고 그 안에서 멀쩡한 옷을 찾아서 갈아입었다. 향수를 뿌리고, 머리를 단정히 빗고 다시 로비로 돌아와서 모리슨 앞에 섰다. 전보다 깔끔하게 나타난 자신을 빤히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리슨에게 캐서디는 무안해서 먼저 물었다.
“왜, 왜요?”
“아니. 아무것도. 그만 가지. 슬슬 배가 고픈데.”
“…이쪽이에요.”
레스토랑에서 예약한 자리를 안내받은 캐서디는 당황했다. 물론 특석이라고는 했지만.
“이 자리가….”
“네! 저희 레스토랑이 자랑하는 특석입니다.”
예약하기 힘든 자리인데 운이 좋으셨네요. 웨이터가 자랑스럽게 하는 말에 캐서디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벽 한쪽이 전면 유리창으로 호텔 주변의 아름다운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고급스러운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그 무엇보다 캐서디를 당황하게 한) 격리된 개인실이라는 점이었다. 이 고요한 자리에서 오늘 처음 만난 사람, 그것도 남자 두 명이 식사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그려지질 않았다. 캐서디는 조심스럽게 모리슨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반응 없는 두 사람을 두고 웨이터가 들어가 테이블에서 의자를 빼며 앉을 수 있게 했다. 아니, 저-. 다른 곳을 요청하려고 입을 연 순간 모리슨이 그 자리에 다가가더니 앉았다. 그가 앉는 움직임에 맞춰서 웨이터가 의자를 테이블 쪽으로 밀어줬다. 익숙하게 앉은 그를 보며 캐서디는 살짝 멍해졌다. 앉은 자리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캐서디가 미동도 없이 자신을 보고만 있는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서 그를 보며 말했다.
“…계속 서 있을 건가?”
“괜찮아요?”
“뭐가?”
“이런대서 저랑 밥 먹는 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우린 처음 만나고, 또 여긴 너무-.”
“분위기 있군. 야경도 멋있고. ……역시 나랑 먹기엔 조금 아까운 자리인가?”
“아니요! 절대 그런 건 아니고-.”
“다행이군. 그럼 앉지.”
모리슨이 앉은 자리의 맞은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캐서디의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리슨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앉을 의자 옆에 캐서디가 서자 모리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니 자네 꽤 잘생겼군.”
“…못생겼다는 말을 생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주문은 추천메뉴로 받았다. 모리슨은 메뉴판을 보고 어떤 음식이 있는지 알았지만, 캐서디는 음식의 이름을 읽어도 가늠하지 못했다. 그걸 알아차린 모리슨은 먼저 메뉴판을 덮고 오늘의 추천 메뉴로 하겠다고 대답했고, 캐서디도 그에 따랐다.
“복잡한 건 질색이라.”
웨이터에게 메뉴판을 건네더니 픽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웃는 입가의 상처에 또 눈길이 갔다. 주문을 받은 웨이터가 방을 나가고 문이 닫히자 공간이 고요해졌다. 순식간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여기엔 회사 일 때문에 오신 겁니까?”
어색함을 깨기 위해 캐서디가 질문을 했다. 질문을 받은 모리슨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렇지.”
“무슨 일 하세요?”
“…뭐, 이것저것.”
애매한 대답이 나오고 다시 어색함이 감돌 뻔했으나 문이 열리고 웨이터가 애피타이저를 들고 들어왔다. 와인이었다. 웨이터는 들고 온 와인을 잔에 따른 후 다시 방을 나갔고 모리슨은 잔을 들어 향을 맡은 후 조금 마셨다. 그가 마시기 시작하자 캐서디도 한 모금 마셨다. 제법 알코올 향이 올라왔다.
“왜 이런 곳으로 여행을 왔지? 여행으로는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닌데.”
이번엔 모리슨이 질문했다.
“…특이한 걸 좋아하거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단순한 현실도피였다. 게다가 날짜와 상황에 맞는 여행지가 이곳뿐이었다. 그 사이 웨이터가 다시 들어왔다. 이번엔 수프와 빵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모리슨은 숟가락을 들고 수프를 한 입 떠먹었다. 먹느라 말이 없어서 숟가락이 접시에 닿은 소리만 들렸다. 이 고요함이 싫어서 개인실을 피하고 싶었던 건데.
“왜? 분위기가 어색해서?”
말을 꺼낸 건 모리슨이었다. 속마음을 들키자 캐서디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묵묵히 빵을 뜯어 먹었다.
“당연한 거니까 내 눈치 보지 말게. 억지로 대화를 이어갈 필요는 없어.”
그 말에 머릿속에 말라붙은 불편함은 사라졌지만, 동의하진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랑 밥을 먹는데 어떻게 눈치를 안 봅니까? 이렇게 보여도 무례한 놈은 아니에요.”
모리슨의 숨이 잠시 멈췄다. 둘 다 공간을 메우는 정적을 피부로 느끼고 있을 때, 메인요리가 왔다. 타인이 끼어든 소리에 정적은 사라졌고, 접시에 정갈하게 담긴 요리가 각자의 앞에 놓였다.
실수했구나. 그저 편하게 밥을 먹자는 의미였는데. 모리슨은 자신의 눈치 없음을 탓했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와 이렇게 마주 보고 식사한 게 몇 년 만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이프로 요리를 자르며 앞에 앉은 사내를 힐끔 살펴보려다가 다시 눈이 마주쳐버렸다. 서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선을 돌릴까 망설이다가 모리슨은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세상에 이런 상황이 얼마 만이지? 모리슨이 웃자 캐서디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모리슨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두고 자세를 고쳐 앉은 후 말했다.
“스무고개 할 줄 아나?”
엉뚱한 질문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스무고개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질문 1. 무슨 향수를 쓰지?”
머리를 굴리는 캐서디에게 모리슨이 먼저 질문을 시작했다.
“향이 좋군.”
캐서디는 그제야 의도를 파악하고 표정을 풀었다.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둘은 식사를 하며 질문을 주고받았다. 잭 모리슨은 나이가 50이 넘은 중년이고, 직업에 관련된 건 대답할 수 없지만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고, 고향은 인디애나 블루밍턴. 옥수수 농장을 물려받을 뻔했고, 쉬는 날엔 주로 집에서 잠을 자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본다고도 했다. 영화를 본다는 말에 흥분해서 서부영화도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저 피식 웃으며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답했다.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말하고 웃고 먹는 모든 행동에 캐서디는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 입가에 길게 난 흉터는 외면하려고 해도 계속 시선이 향했다. 호기심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야해.’
모든 식사가 끝나고 계산까지 마친 후 둘은 밖으로 나왔다. 역시 일반 식당보다 배로 많이 나와서 정산된 금액을 봤을 때 식은땀이 났지만, 옆에 서 있는 모리슨을 보니 또 아무렇지 않았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랑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맛있는 걸 먹었으니 된 거겠지. 모리슨을 배웅한다는 이유로 호텔 밖까지 같이 나온 캐서디는 망설이다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회사 숙소로 가야겠지.”
“숙소도 제공해주고 좋은 회사네요.”
“…뭐. 딱히 그렇지도 않아. 해준 만큼 부려먹지.”
“바로 가셔야 합니까?”
“왜 아쉽나?”
모리슨은 캐서디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입 끝을 올려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미소 짓는 입가의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위아래가 살짝 어긋나 있었다.
“…네.”
짧은 대답에도 목소리가 떨렸다. 바라보던 모리슨의 눈이 살짝 커졌다. 놀라는 모리슨을 보고 캐서디는 아차 싶었다. 고개를 숙이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 너무 들이댔나. 부담스러울 텐데. 이런다고 더 있어 줄 사람도 아닌 것 같고, 이미지만 나빠지는 거 아니야? 하. 콜 캐서디 진짜 나이 거꾸로 처먹지.
“산책 좋아하나?”
혼자 자책하는 사이 모리슨이 물었다 놀라서 고개를 들고 그를 봤다. 웃는 얼굴은 사라졌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다만 살짝 당황한 기색이 남아있었다. 배가 불러서 말이야. 이대로는 잠이 올 것 같진 않군. 캐서디는 눈을 끔벅이며 이어지는 말을 느리게 이해했다. 그러니까…산책….
“역시 좀 피곤하-.”
“산책! 엄청 좋아합니다!”
엄청 좋아해요. 식후 산책…. 목소리는 서서히 기어들어갔다. 식후 산책보다는 식후 시가 한 대를 더 좋아하는 자신이 떠올라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주눅이 들었지만, 이제 없을 기회를 차버리고 싶진 않았다. 큰소리로 외쳐서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둘에게 쏠렸지만,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모리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쪽으로.”
비싸고 좋은 호텔엔 없는 시설이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모리슨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한 산책은 고작 호텔 주변을 걷는 것뿐이었는데, 훌륭한 조경에 멋진 산책길이 되었다. 캐서디는 앞선 그의 걸음을 따라 바로 옆에 섰다.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모리슨의 모습이 낯설었다. 여태까지 본 모습과 또 다른 모습이었다. 시간마다 사람이 이렇게 달라 보일 수도 있나?
“너무 잘 얻어먹어서 오히려 내가 뭐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네…….”
“어?”
“네?”
“…원하는 게 있나?”
“연락처-. 그러니까 보답 보다는…다음에 또 만나면…좋겠는….”
버벅대는 캐서디를 보며 모리슨은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전화번호는 일 때문에 매번 바뀌어서 의미가 없고 대신.”
그는 안쪽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더니 영수증. 하고 말했다 캐서디는 또 넋을 놓고 보다가 놀라면서 주머니 이곳저곳을 뒤졌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가 나왔고 그걸 모리슨에게 내밀었다.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뭉친 종이를 보며 모리슨은 또 씨익 웃었다. 그걸 집고 직접 펴서 손바닥에 둔 후 무언가를 적어서 다시 캐서디에게 건넸다.
“이메일. 매주 확인하니까 씹힐 걱정은 말고.”
건네받은 종이에 적힌 메일주소를 빤히 바라봤다. soldier76?
“직업 군인이에요?”
“…예전엔.”
캐서디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접어서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모리슨의 반응을 봤다. 더는 말할 수 없다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캐서디의 시선은 다시 앞으로 향했다. 이메일이 너무 뻔해요. 그런가. 보냈는데 묻히고 그런 건 아니죠? 매주 확인한다니까. 답변 주시는 거예요? 내용 봐서. 기다리는 메일이라도 있어요? 모리슨의 발걸음이 멈췄다. 캐서디도 한 걸음 앞서가다가 멈췄다.
“산책이 끝났군.”
둘은 어느새 다시 호텔 앞에 도착해 있었다. 출발할 때만 해도 크게 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일찍 도착했다니. 캐서디는 아쉬움에 모리슨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기 위해 입을 뗐다. 흉터가 다시 엇갈렸다.
“피곤해 보여.”
“……그래요?”
캐서디는 천천히 모리슨에게 다가갔다.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렸지만, 그것도 두 사람만의 소리였다. 둘 사이에 틈이 희미하게 보일 만큼 가까워졌을 때 캐서디는 걸음을 멈췄다.
“…그만두는 게 좋아.”
“왜요?”
“시작과 동시에 끝날 관계니까.”
캐서디는 그의 양 볼을 잡고 입을 맞췄다. 모리슨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도 입을 떼지 않고 계속 지켜봤던 입술의 흉터를 핥았다. 조금 거친 느낌이었다. 한 번 더 핥으니 입이 살짝 벌어졌고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뜻밖에 밀어내거나 거부하진 않았다. 캐서디가 리드하는 대로 입을 맞춰줬다. 부드럽고 목적이 명백한 입맞춤이 길게 이어졌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 이상 그들에게 향했다. 야유를 보내기도 하고 휘파람을 부는 사람도 있었다. 더는 이어가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쯤 멈췄다. 어느새 모리슨의 허리를 한쪽 팔로 안고 있었다.
“…So, one night?”
“……Just one night.”
그대로 모리슨의 손목을 잡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내려온 엘리베이터를 놓칠세라 나오는 사람들을 비집고 둘은 가까스로 탔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짧게 입을 맞췄다. 방이 있는 층에 도착하자 문이 열리고 복도를 뛰어서 방까지 갔다. 열쇠로 문을 열고 모리슨과 방으로 들어갔다. 문고리에 방해금지 안내판을 걸었고 문이 닫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캐서디가 벽으로 그를 몰아서 키스했다. 지겨울 만도 했는데 둘 다 계속 달아오르기만 했다. 젠장. 캐서디의 머릿속에 점점 여유가 사라져갔다. 그때 모리슨이 캐서디를 밀었다. 처음 보이는 거부에 금방 뒤로 물러났다.
“무슨…?”
“…씻고 나와.”
나도 씻을 거니까. 빨리. 갑자기 그게 무슨-. 황당했지만, 얼굴까지 새빨개져서 말하는 모리슨을 보며 캐서디는 다시 입을 꾹 닫고 상의를 벗어 던진 후 욕실로 들어갔다. 씻으면서 조금 진정되자 이게 맞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급하게 씻고 가운을 두르고 나오자 차례를 기다리던 모리슨이 입고 있는 정장 상의를 벗고 넥타이를 푸른 뒤 욕실로 들어갔다. 남겨진 캐서디는 마실 게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가 벗어서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정장에 시선이 멈췄다. 조용히 근처로 다가가서 손을 뻗었다. 말 못할 직업이 뭔지 계속 궁금했었다. 저 정장에 그의 직업과 관련된 뭔가 있지 않을까. 예상하는 직업과 상상도 못한 직업 사이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가장 긴 손가락이 상의에 닿으려는 순간 욕실에서 물 떨어지는 크게 소리가 들렸다. 캐서디는 뻗었던 손을 거두고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이놈의 직업병. 지금 저 사람이랑 자러 와서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야. 발걸음은 침대로 향했다.
그러는 사이 모리슨이 나왔다. 하얀 셔츠만 걸친 채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 걸린 물방울이 어깨와 바닥에 똑똑 떨어졌다. 하룻밤 상대가 빤히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자 민망했는지 머리를 털던 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미소가 번지려는 입을 가까스로 참으며 그의 손목을 잡아끌고 침대에 눕혔다. 젖은 머리에 닿은 침대 시트가 물에 서서히 젖어갔다. 붉은 얼굴, 긴 흉터, 꾹 다문 입, 작은 흉터. 찬찬히 모습을 새기던 캐서디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억눌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 너무 야해요.”
모리슨이 작게 웃는 소리가 아로새겨졌다.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이 눈에 직선으로 비췄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옆자리를 더듬거렸다. 모리슨? 옆엔 아무도 없었다. 캐서디는 상체를 일으켜서 주변을 둘러봤다. 간밤에 아무 데나 벗긴 옷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방을 살펴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호텔 시계만 째깍거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상황파악이 되자 탄식이 흘렀다.
“부지런하시긴.”
주변을 살펴서 어제 입은 재킷을 찾았다. 침대 근처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침대 위를 엉금엉금 기어가서 주우려다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부딪힌 어깨를 문지르며 재킷을 줍고는 안주머니를 뒤졌다. 종이쪽지를 꺼내서 다시 펼쳐봤다. soldier76. 잭 모리슨.
‘돌아가면 꼭 메일 보내야지.’
끝난 관계는 다시 시작하면 된다.
캐서디는 침대 위에서 오래 뭉개다가 가까스로 생각을 고쳐먹고 일어나서 나갈 채비를 했다. 배가 고픈 것도 이유였다. 옷을 갈아입는데, 아까 넘어지면서 부딪힌 어깨가 욱신거렸다. 잘못 부딪혔구나. 아픈 걸 인지하고 조심스럽게 옷을 마저 갈아입었다.
카우보이모자와 선글라스, 편한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호텔 밖을 나섰다. 해도 쨍쨍하니 날씨가 좋고 오늘은 어제보다 더 좋은 날이 될 거라 생각한 그 순간.
“!”
갑자기 자신을 덮친 남자가 손목을 잡더니 그대로 등 뒤로 당겨서 올렸다. 깜짝 놀라고 당황스러웠지만, 그보다 고통이 앞섰다. 아까 넘어졌던 쪽의 어깨였다. 극한 통증에 아무 말도 못 하고 힘이 빠져서 자신을 붙잡고 있는 남자에게 기댔다. 거친 움직임에 선글라스와 모자가 떨어졌고, 남자의 발에 짓밟혔다.
“꼼짝 마!”
그 말 그대로 캐서디는 움직일 수 없었다. 관자놀이에 차가운 금속성의 물체가 닿았다. 곁눈질로 확인한 물체는 검고 길고 방아쇠가 있고, 손가락이 걸려있었다.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남자는 캐서디를 인질로 잡고 뒷걸음질 쳤다. 캐서디도 어쩔 수 없이 뒷걸음질 쳤다.
“다가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총 내려놔.”
캐서디는 남자가 대화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흉터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왼쪽 눈썹 위부터 오른쪽 눈 아래까지 난 흉터, 그 흉터와 평행을 이룬 입술의 흉터까지. 어젯밤 침대에서 끝도 없이 입 맞추고 어루만졌던 그 사람.
“…잭?”
캐서디를 본 모리슨의 왼쪽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그도 권총을 쥐고 있었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있었고, 캐서디를 인질로 잡은 사내를 겨누고 있었다. 뒤죽박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캐서디를 인질로 삼은 남자는 계속 뒷걸음질 쳤다. 억지로 질질 끌려가는 탓에 어깨의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당신…뭐야. 이거 놔!”
“반항하지 마! 대가리에 구멍 나고 싶어?”
“다시 한번 말하지. 총 버려!”
모리슨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모두 피신해 있는 상태였다. 대치가 이어지자 모리슨은 총을 들고 있지 않은 한 손을 귀에 대고 뭔가 말하고 있었다. 캐서디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남자에게 힘겹게 말을 걸었다.
“이봐 언…제까지 이렇게…있을 순…없잖아.”
“…그래. 그렇지.”
그러더니 사내가 들고 있는 총을 캐서디에서 모리슨에게로 향했다. 심장이 터질 듯 크게 뛰었다. 모리슨과 사내를 번갈아 보면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막아야 한다. 뭐라도 총을, 방아쇠를, 총구를!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캐서디는 살짝 무릎을 굽혔다. 그러자 같이 기댔던 남자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고, 놀라서 캐서디를 밀었다.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자 사내의 총이 바로 앞에 쓰러진 자신에게로 향했다. 죽을 것이다. 방아쇠에 건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눈을 질끈 감고 고통을 각오했다.
잭 모리슨, 나는. 당신은.
탕! 단 한 발의 총성이 났지만, 그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눈을 뜨고 상황을 봤다. 앞에 서 있었던 사람이 사라져버렸다. 좀 더 몸을 일으켜서 아래를 봤다. 사내가 쓰러져 있고 바닥에 피가 고여 갔다. 어깨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하게 느껴졌다.
“콜.”
뒤에서 이름을 부르고 어깨를 건드는 것에 놀라 캐서디는 몸을 틀고 팔을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몸만 틀어지고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통증이 거세게 올라와 그만 비명을 질렀다. 상대방은 그대로 얼어버렸고 그건 캐서디도 마찬가지였다.
“……당신.”
“사령관님.”
온통 검은색으로 무장한 사람이 모리슨을 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그제야 움직임을 보였다. “그래. 수습해.” 명령하면서도 모리슨의 시선은 계속 캐서디를 향해 있었다. 놀란 그를 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서 캐서디의 팔을 잡았다. 움직이지 않는 쪽 팔이라 고통에 이를 악물고 인상을 찡그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창백한 모리슨의 얼굴과 통증에 나오려는 말은 수없이 막혔다. 그가 잡고 있는 캐서디의 팔을 살피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손수건이었다. 여러 겹으로 접어서 캐서디의 입으로 가져갔다.
“무슨…짓입니까.”
말은 그때 나왔다.
“혀 깨물지도 모르니까 물어.”
“그러니까 왜-.”
“빠진 어깨를 맞춰야 해. 심하게 아플 거다. 그러니까 물어.”
고통의 원인을 듣고 어쩔 수 없이 모리슨이 갖다 댄 손수건을 물었다. 그는 다시 캐서디의 양팔을 잡았다.
“아프면 소리 질러. 괜찮으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빠진 팔을 잡아당겼고 오늘 그 어떤 순간보다도 고통스러워서 소리를 질렀다. 손수건에 억눌린 소리였지만 그 주변에 죄다 울려서 수습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씩 캐서디에게 향했다. 모리슨은 당기자마자 인상을 찌푸렸지만 굴하지 않고 땅긴 팔을 돌렸다가 다시 그의 어깨에 맞춰 밀어 넣었다. 어깨가 제대로 맞춰지자 비명이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모리슨은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캐서디가 물고 있는 손수건을 꺼내려 했다. 고통에 세게 물고 있는 것도 몰랐는지 잡은 손수건을 한 번 흔들고 나서야 입을 벌렸다. 손수건엔 잇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 의료팀!”
모리슨의 부름에 바로 한 사람이 그의 옆에 섰다. 어깨 고정해드려. 명령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의료팀은 바로 의료품이 있는 곳으로 멀어졌다. 고통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욱신거렸다.
“……그래서 뭡니까. 당신.”
“오버워치 국제 안보국 소속 잭 모리슨입니다.”
“뭐?”
“이번 사고의 피해는 저희 오버워치에서 배상합니다.”
모리슨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사이 의료팀이 다시 캐서디에게 다가와 목과 어깨에 걸쳐서 팔걸이를 대줬다. 팔걸이로 어깨가 한결 나아지자 캐서디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리슨과 마주 서서 한참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할 말이 그것뿐이에요?”
화난 목소리가 모리슨의 귓가에 울렸다. 할 말은 많았다. 하면 안 될 말이 대부분이라는 게 문제일 뿐. 모리슨은 눈을 감았다. 어제 단 하루의 여흥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나 깊어진 걸까. 다시 천천히 눈을 뜨고 흔들림 없는 눈으로 캐서디를 마주했다.
“미안하다. 콜.”
캐서디가 한쪽 눈썹을 치켜뜨는 게 보였다. 그게 아니라고 운을 띄웠지만, 그가 먼저 말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뭐, 그거야 저도-.”
“잊어.”
“……네?”
“그게 신상에 편해. 나 같은 사람하고 엮여봤자 방금과 같은 꼴 난다.”
모리슨은 그대로 걸어갔다. 캐서디는 멀어지는 그를 따라가려고 몸이 앞으로 향하다가 멈췄다. 어제 알았던 사람과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모리슨은 더 멀어졌고, 주변이 거의 정리 되었는지 관계자들도 아까보다 많이 없었다. 관계자 한 사람이 캐서디에게 다가와 명함을 건넸다. 치료비 일체와 정신상담 등에 관련된 내용을 말해줬지만, 제대로 듣지 않았다.
모리슨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다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기분 안 좋아 보이네.”
오랜만에 본부에 나타난 모리슨을 보며 그의 동료 아나 아마리가 인사했다. 신입 요원 명단을 막 들춰보던 모리슨은 다시 파일을 닫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주 보게 되자 아마리는 뭐, 항상 그랬나? 하고 대신 답했다. 그는 그저 피식 웃었다. 항상 그렇게 보이는 탓도 있지만, 지금은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반년 전 타지에서 만나 하룻밤을 보낸 상대가 어젯밤 메일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끝인 줄 알았는데.
[Hello. Sunshine?]
메일 본문의 인사말을 보자마자 저절로 미간이 확 좁아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신입 교육?”
아마리는 모리슨이 손에 들고 있는 파일의 제목을 보고 물었다.
“반년 동안 현장만 뛰었더니 질려서.”
“힘들어서는 아니고?”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 자네는 어쩐 일이야?”
“약속이 있어. 이번 신입은 몇 명이야?”
“지금 보려고.”
모리슨은 들고 있는 파일을 다시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갑자기 들려온 인사에 파일을 보려던 모리슨과 아마리가 고개를 들었다. 모리슨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국제 안보국으로 발령받은 신입 콜 캐서디입니다.”
모리슨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캐서디를 다시 만났다.
20xx. x. x. 3일전
제목: 제목 없음
보낸 사람: sunsetcowboy@xxxxx.xxx
참조:
Hello. Sunshine?
반년만입니다.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 생각 많이 해봤는데, 딱히 잊어야 할 이유를 못 찾았습니다.
조만간 뵙게 될 것 같습니다. 너무 놀라지 마시고, 화내지 마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Cole.
2017. 3. 25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