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솔 / Link
suspicion
“아저씨가 그 배신자의 제자 맞죠?”
오버워치 기념관에 걸려있는 사진에서 봤어요. 어느새 다가온 꼬마는 콜 캐서디에게 그렇게 거리낌 없이 말하더니 웃었다. 그건 캐서디가 본 그 어떤 웃음보다 잔인하고 영악했다. 심지어 리퍼라 불리는 존재보다 더.
꼬마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상기하고 있는 과거였는데, 누군가 물어보면 언제나 그래 당장 네 머리를 쏴버려도 이상할 게 없는 인간이 스승이었지. 하고 대답했었는데. 오직 자신이 맞는지에 대한 답을 기다리는 아이 앞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겨우 입을 여는 순간, 멀리 뒤에서 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불렀고, 캐서디를 바라보고 있던 아이는 어깨만 으쓱이더니 그를 지나쳐서 제 부모에게 돌아갔다. 멀어지는 부모와 아이를 보며 캐서디는 반 토막 난 팔을 만졌다. 의수와의 이음매에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환상통이 느껴졌다.
앙겔라 치글러에게 진통제를 받으려고 거점으로 돌아온 캐서디는 거점의 로비의 큰 스크린에 공지된 다음 임무 배치를 봤다. 찬찬히 살펴보다가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의무실에 향하는 동안에도 통증은 계속 이어졌다. 아프다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캐서디는 아까 본 임무 배치를 떠올렸다. 다른 건 생각할 틈조차 나지 않았다. 사실 오버워치가 다시 모인 후 처음 정한 배치에서 바뀐 것은 거의 없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비슷한 일을 했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비슷한 사람과 계속 함께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와해 된 조직이 일어서기 위한 순서였지만, 지금 캐서디의 머릿속엔 부정적인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의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치글러가 이미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원색의 재킷에 새겨진 숫자 76, 하얗게 세 버린 머리와 얼굴을 가르는 흉터. 잭 모리슨.
“캣. 왔어?”
들어온 캐서디를 보며 치글러가 인사했다. 고개만 까닥이고는 진통제를 요구했고, 그녀는 살짝 표정이 굳었지만 이내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먼저 온 환자의 팔에 붕대를 감고 있던 터였다. 캐서디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모리슨의 상처가 보기에도 심각해 보였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아까 했던 안 좋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굴러다니며 두통을 유발했다. 환상통이 이제 뇌까지 점령한 기분이었다.
“안 좋아 보이시네요. 영감님.”
까칠하게 나온 말은 가시처럼 퍼져서 사방을 찔렀다. 치글러가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고, 모리슨의 눈길이 그에게 향했다. 빤히 캐서디를 보다가 치글러가 붕대를 감고 있는 팔에 시선을 돌리고 뭐.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이참에 임무 배치를 바꾸자고 건의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내 재량이 아니다.”
“그러니까 건의죠.”
“…다 됐어요. 모리슨.”
둘의 대화에 낄 타이밍을 재던 치글러가 치료가 끝난 걸 알렸고, 모리슨은 붕대가 감긴 팔을 한 번 움직였다가 살짝 인상을 썼다. 하지만 곧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고, 치료하느라 뺐던 팔을 다시 재킷에 욱여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는 문으로 향했다.
“이번 임무는 쉬세요.”
나가려는 솔져의 등에 캐서디는 그렇게 말을 던졌다. 그의 걸음은 그 자리에서 멈췄고 자신의 옆으로 치글러가 다가왔다. 콜.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그만하라는 뜻을 전했으나 캐서디는 한 걸음 모리슨에게 다가가며 끝까지 말했다.
“내가 하면 되잖아.”
“건방 떨지 마라.”
“왜요? 내가 레예스의 제자라서 못 믿겠어요?”
“캐서디!”
모리슨은 살짝 한숨을 쉬더니 뒤를 돌아서 캐서디에게 다가왔다. 바로 앞에 서기도 전에 팔을 들어 올리는 게 보여서 캐서디는 자신이 맞는다 걸 예상했지만, 피하진 않았다. 틀린 말도 아니잖아. 난 방금까지 듣고 왔다고. 여기 있는 일부는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걸. 배신자의 제자. 도망간 겁쟁이. 그러고도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대는 머저리. 당신도 예외는 아니잖아. 바로 한 걸음까지 가까워지자 캐서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따악!
그다음에 난 소리에 캐서디는 귀를 의심했고, 이마가 심하게 아파서 짧은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눈을 번쩍 뜨고 벌어진 상황을 확인했다. 모리슨의 뻗은 팔이 자신의 이마에 향해 있었고, 시선을 위로 올리니 그의 제일 긴 손가락이 제 이마를 때린 상태였다. 너무 아파서 고개를 뒤로 빼고 이마를 만졌다. 아픈 이마까지 화가 치밀었으나 그저 그를 노려보는 것이 전부였다. 모리슨은 천천히 입을 열고 차분히 말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머리 좀 식혀.”
그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는 그대로 다시 캐서디에게서 멀어지며 의무실을 나갔다. 맞은 이마가 너무 아파서 계속 문지르면서도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내가 본 그 어떤 날보다 방금이 제일 멍청했어. 콜 캐서디.”
치글러의 질타가 뒤에서 들리면서 머리에 뭔가 떨어졌다. 바닥을 데구루루 구르는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너야말로 환상통 재발한 거면 다음 임무에서 빼라고 윈스턴한테 전할 거니까 컨디션 조절 잘해.”
마지막에 던져진 말까지 듣고 나니 바닥에 구르는 약병과 동질감이 느껴졌다.
deepen
“헛소리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의무실을 나온 솔져가 복도 끝에 도착했을 때, 모퉁이에 등을 대고 서 있던 아나 아마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서 그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못 믿는 건 사실이지?”
캣이 그런 면에선 예민하거든. 그러니 레예스 밑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거겠지.
아나의 이어지는 말에 그는 한숨을 쉬고 이번엔 그녀를 마주 볼 수 있게 몇 걸음 옮겼다.
“…못 믿지.”
이제 와서 내가 누굴 믿겠나.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씁쓸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도 지금 솔져의 이런 반응은 아나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건 나도 해당하는 말이야?”
“……어쩌면.”
“서운하네.”
솔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운함. 그건 아주 오래전 일을 떠올리게 했다.
-
잭 모리슨에게 평화의 시대라면 가브리엘 레예스를 처음 만났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임무와 대의만이 중요한 순진했던 그때. 군인 강화 프로그램, 전쟁, 오버워치 모두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시련이었다.
하지만 가브리엘 레예스. 동료, 전우, 라이벌, 질투, 악의. 스위스 본부가 터졌을 때, 내가 뭘 봤더라.
“이 폭발에서 네 녀석이 살아남길 바랄 거다.”
사방으로 퍼지는 불길 속에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온몸이 불타오르고 알고 있던 모습이 다 녹아 사라지는 순간에도 끝까지 입을 열었다.
“살아남아서 네 손으로 이룬 것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똑똑히 보게 할 거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공포는 그 순간에 존재했다. 살든지 죽든지 방금 그 말은 모리슨의 모든 것을 영원히 갉아먹을 것이다.
-
“난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사람에게 저주받았어.”
그건 내가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는 걸 뜻하지. 아나.
자백하는 모리슨을 보며 아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손을 들고 그의 뺨에 댔고, 그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가여운 잭.”
하지만 모든 일엔 원인이 있고, 방관 또한 잘못이야. 내버려 둬선 안 될 일도 있는 거 아니겠어?
-
캐서디는 정처 없이 걷다가 내려가던 계단에 풀썩 주저앉았다.
간도 크지. 그 잭 모리슨에게 멋대로 지껄였다니. 예전 같으면 상상도 안 했던 일인데. 진통제를 먹고 한결 나아지자 지난 일을 자책했다. 꼭 일 년에 한두 번은 평생 후회할 짓을 하는 것 같았다. 인상 쓰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캐서디는 일어설 생각 없이 누군지 확인하려고 몸만 틀어서 뒤를 돌아봤다.
“……영감님?”
세상에 이렇게 운이 없다. 재수 없는 날은 온종일 없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열 계단 위에 서 있는 모리슨은 아래 계단에 앉은 캐서디를 내려다봤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일 06시까지 B 거점으로 와라.”
“예? 그게 무슨…?”
“배치 다시 확인해.”
솔져는 그렇게만 말하더니 몸을 획 틀어서 다시 계단으로 올라갔고, 곧 한층 위로 사라졌다. 내일? 배치? 캐서디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모리슨이 올라간 층으로 들어가서 벽에 붙어있는 스크린 공지를 다시 확인했다.
[콜 캐서디. 임무 배치 변경. 솔져76 지원]
캐서디는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윈스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봐 고릴라 친구. 내 배치-!”
분노에 한껏 소리치고 들어왔는데, 윈스턴의 연구실엔 아나도 같이 있었다. 하려던 말은 속으로 기어들어갔고, 쿵쾅거리며 들어온 발걸음도 멈췄다. 캐서디를 본 윈스턴은 아나의 눈치를 봤고, 옆에 있는 아나는 언제나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캣. 변경된 배치 때문에 왔니? 그거라면 내가 윈스턴에게 부탁했단다.”
“네?”
“잭이 널 믿는지 못 믿는지 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듣고 계셨던 건가. 나오는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부사령관님. 그건.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운을 떼는데,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다시 모인 우리가 서로의 등 뒤를 맡길 수 있는지 확인할 좋은 시기고. 안 그래?”
“……네.”
마지못해 한 대답이었지만, 아나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지 다시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캐서디의 앞에 섰다.
“못 견디겠다 싶으면 지원요청 하렴. 내가 가마.”
그리고는 손으로 어깨를 두 번 다독이고 연구실을 나갔다. 아나가 나간 후 캐서디는 다시 윈스턴을 바라봤다. 그는 한숨을 쉬고 캐서디가 하려는 말을 알아챘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소 갑작스러운 면이 있지만, 저도 아나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다시 두통이 오는 것 같았다.
Trust
“…하.”
다음날 오전 6시. B 거점에서 기다리고 있는 캐서디를 보며 솔져는 짧게 한숨 쉬었다. 진짜로 해보자는 거군. 아마리. 그 불편한 기색에 캐서디는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그렇게나 불편하십니까?”
“혼자 하는 게 편한 것뿐이야. 게다가 혼자서도 충분한 일이고.”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더니 캐서디에게 보였다. 투명한 아크릴 상자 안에는 작게 빛나는 전지가 들어있었다.
“임무는 이걸 운반하는 거다.”
이게 무슨-. 캐서디는 말문이 막혔다. 이 작은 걸 운반하는데 장정이 둘이나 필요하다고? 그야말로 계략에 빠진 거나 다름없었다. 아무 말한 게 이렇게 되돌아오는군. 모리슨이 왜 한숨을 쉬었는지 이해했다.
“다만 거리는 좀 멀다. A 도시까지 가야 해.”
“……차를 타도 이틀은 걸리네요. 이게 뭡니까?”
“무언가의 동력이라더군. 끝까진 안 들었다.”
자연스레 윈스턴의 설명을 한 귀로 흘리는 모리슨이 상상이 되었다. 캐서디라도 그랬겠지만.
“그래서. 우린 뭘 타고 가죠?”
“지프.”
솔져는 고개를 들고 턱으로 오른쪽 뒤를 가리켰다. 캐서디의 시선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고, 그곳엔 광택 나는 검은색 지프가 보였다. 잘생긴 자동차를 보자마자 캐서디의 입꼬리가 끝에 걸렸다.
“……애냐.”
“당연하죠. 모리슨보다 한참 어리잖아요. 악-!”
설레서 한 대답에 정강이가 차였다.
-
콜 캐서디가 가브리엘 레예스의 이야기를 한다면 그건 아마 운이 없다는 말뿐일 것이다. 그랬다. 스승은 지독히도 운이 없었다. 아직도 그럴지는 알 수 없으나, 일한 만큼 보상받지 못한 것은 확실했다. 문제는 그 부족함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부하였던 자가 오늘부터 상관이 되는 좆같음이란. 캐서디는 이런 상황에 블랙워치에 합류했다. 레예스의 예민함은 살얼음판 수준이었고, 모두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나마 갱단에서 굴렀던 캐서디만이 그의 옆에 겨우 붙어있는 수준이었다.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극상이라니 얼마나 엿 같겠어. 그래서 캐서디도 한동안 잭 모리슨을 삐딱하게 생각했다. 얼마나 아부를 잘해서 저 자리에 올랐겠느냐며. 그랬었지만 역시나 질이 나쁜 인간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고집불통에 주변은 신경 쓰지 않는 외곬일 뿐. 깨닫고 나니 허무해졌다. 저렇게 미워할 대상도 틀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못 참겠어요?”
그 말을 꺼낸 건, 그래 어쩌면 자신에게 한 말일 거다. 이해하면서 참지 못하고 꺼낸 말에 레예스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진심으로 죽일 것 같은 눈이라고 알아챈 순간 주먹이 날아온 건 그다음이었다.
“개소리할 거면 당장 꺼져.”
뇌가 흔들리는 느낌에 제대로 들은 건지 판단할 수 없었으나, 나가떨어져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로 대번에 뒤로 물러났다. 그런 캐서디에게 레예스는 경멸이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 분노와 맞설 용기는 없어서 고개를 숙였더니, 자신을 때렸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비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간신히 삼키고,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더 숙였다.
내 말이 그렇게나 치욕적이었나?
-
캐서디는 지금 그때의 그 인내를 다시 경험하고 있었다. 지프를 타고 거점을 벗어나 평야를 달린 지 반나절이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그들이 한 대화는 운전 교대와 휴식하자는 이야기뿐이었다. 뭔가 다른 대화할 만한 주제를 꺼내도 길게 가지 못했다. 단편적으로는 모리슨과의 접점이 없기에 그랬지만, 애초에 그는 대화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뭘 알아야 믿든가 말든가. 캐서디는 혼자 속을 끓였다. 부사령관님 아무래도 이 사람은 절 진짜 못 믿는 게 맞는 것 같고, 등 뒤를 맡기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제멋대로 결론을 내고 조수석 등받이를 뒤로 젖힌 뒤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눈을 감았다. 운전 교대까지 잠이나 자는 게 나았다.
못 믿는 이유는 역시 가브리엘 레예스인가. 눈을 감았지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래도 나는 도중에 도망친 녀석이고, 게다가 몇 년이나 지났는데.
한참을 달리던 차가 멈췄다. 하룻밤 노숙할 장소를 찾은 것이다. 차에서 내리는 모리슨을 보다가 캐서디도 따라 내렸다. 지프 트렁크에서 침낭 두 개를 꺼내더니 하나를 캐서디 쪽으로 던졌다. 갑자기 던져진 침낭을 받지 못하고 데구루루 구르다가 캐서디의 발 앞에 멈췄다. 인내는 그때 바닥났다.
“대장이 그렇게 미웠어요?”
모닥불을 때려는 모리슨에게 질문이 던져졌다. 질타가 섞인 목소리였다. 그리고 질문은 언젠가 모리슨이 레예스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내가 이렇게나 미웠느냐고. 부싯깃에 붙은 불을 마른 장작 위에 올리고 그 위에 잔 나뭇가지들을 올리고 나서야 대답을 생각했다.
“…이제 와서 그게 중요한가?”
지금의 솔져에겐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가브리엘 레예스와 그에게 미움받았던 잭 모리슨이 없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캐서디는 열었던 입을 다시 닫았다. 그리고 그가 대답해주길 기다렸다. 중요했다. 아나 아마리가 원하는 신뢰의 기본은 이 대화 속 진심이다. 지금의 오버워치에 이자가 필요한 건 인정하지만, 자신의 등 뒤까지 맡길 수 있는지 합당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그래도 솔져는 침묵했다.
“적어도 나는 들을 권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권리? 그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사뭇 진지하게 말하는 그에게 가볍게 보일 순 없었다. 레예스가 용케도 참고 지냈군. 게다가 제자 행세라니. 그 녀석이 참 좋아하겠어.
“……레예스 옆에서 못 봤나?”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헐뜯었는지. 대답에 대한 반응은 싸늘했다.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듯했다. 그래. 오버워치의 입장과 블랙워치의 입장을 모두 이해했던 너에겐 더욱 싫은 기억이겠지. 그는 작게 한숨 쉬고 캐서디를 등지고 누워서 모포를 덮고 말했다.
“피차 안 좋아할 이야기는 꺼내지 마라.”
임무에 방해돼. 캐서디는 모리슨의 등을 쏘아봤다. 이렇게 앞뒤 꽉 막힌 인간을 어떻게 신뢰하시는 겁니까? 부사령관님. 자신을 여기까지 이끈 사람을 생각하고 혀를 차고는 자리에 누웠다.
다음날도 한참을 달렸다. 운전은 캐서디가 하는 중이었다.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제의 대화에서 그가 느낀 바로는 오히려 이편이 나았다. 운전석 쪽 창문을 열었다. 답답함에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 넘어오는 바람에 모든 소리가 묻혔다. 지평선 끝에 서서히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캐서디는 곁눈질로 솔져를 살폈다. 눈을 감고 있었다. 자나?
“미워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캐서디는 갑자기 들린 말에 옆자리의 솔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그는 계속 앞을 보고 있었다.
“미워하지 않았다고 한들, 게이브가 그만뒀을까?”
그렇게 생각하나? 체념한 얼굴이 캐서디를 더욱 열 받게 했다. 당신들 정말. 한마디 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캐서디가 잡고 있는 핸들을 붙잡고 획 돌렸다. 캐서디는 브레이크를 밟았고, 차는 도로를 벗어나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멈췄다. 다행히 보행자도 가로수도 없는 평지였다.
“미쳤어요!?”
놀라서 버럭 소리쳤는데, 그가 오른쪽 검지를 입가에 대고 작게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천천히 왼손을 들어서 앞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캐서디의 시선이 그가 가리키는 장소로 향했다. A 도시로 진입하는 왕복 이 차선 도로에 무장한 집단이 길을 막고 있었다. 게다가 지프가 급하게 방향을 꺾으면서 낸 소리를 듣고 다가오고 있었다. 머릿수를 센 캐서디는 둘이서 상대하면 어찌 될 것 같았다. 솔져는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서 운반할 물건을 꺼내더니 캐서디의 손에 쥐여줬다.
“넌 이걸 들고 가.”
“왜요? 둘이 처리하면 될 것 같은데.”
솔져와 의견이 갈렸고, 서로 미간을 찌푸리며 마주 봤다.
“지원이 있을 수도 있다.”
“이보다 더 많은 적도 해치운 적 있잖아요. 당신 말대로 지원이 있을 수도 있는데, 따로 행동하는 게 더 위험하지 않겠어요?”
아직 건네주지 못한 물건이 두 사람 손에 있었고, 솔져는 그걸 꽈악 쥐었다. 다가오는 적들 때문에 신경전을 벌일 시간도 없었다. 어금니를 꽉 물고 다시 제 주머니 속에 넣었다.
“무기 챙겨.”
결국, 내가 지겠군. 아마리.
-
“뭐라고?”
대체로 황당할 때 나오는 모리슨의 반응에 아마리는 그만 웃고 말았다. 하하. 잭. 그 반응은 엄청 오랜만인데? 재미있어하는 아마리에게 그는 인상을 썼다. 지금 그게 중요해?
“내가 왜 그 애송이랑.”
“캣이 누구한테 사격술을 배웠는데, 애송이라니.”
“실력 이야기가 아니잖아.”
“뭐든. 넌 캣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솔져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잘 모르는 사람을 은연중에 평가절하하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정말 그가 블랙워치에 있었기 때문일까. 자신이 이렇게나 편견에 빠진 인간이었나?
“그럼 수락한 거로 알게.”
스스로 되돌아보는 모리슨을 보며 아마리는 흡족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윈스턴의 연구실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 녀석 못 버틸걸?”
마지막 발악이었다. 같이 임무에 가라니 어림도 없었다. 게다가 이번 임무는 작은 건전지를 배달하는 일뿐이었다.
“그래? 난 당신이 못 버틸 것 같은데. 분명 나한테 도와달라고 할걸? 내기해도 좋아.”
“……좋아.”
하지만 아마리는 수완이 좋았다. 사람을 다루는 데에 그녀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었다. 승리욕으로 기어코 그의 수락을 받아내는 그녀였다.
-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웃으며 말하는 캐서디를 보며 솔져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했느냐고? 우리 둘이 충분하다고 했었지. 문제라면 타고 온 지프가 총알받이가 되어 아작났고, 목적지를 한참 걸어서 가야 한다는 점과 체력을 상당히 소모했다는 점이지. 소리 내 읊으며 잔소리할 수도 있었으나 그것마저 체력소모였다.
“…이제 어쩌죠?”
상황을 파악했는지 그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어쩌긴 뭘 어째. 생각하고 있었던 거 아니었나? 불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솔져는 그저 한숨만 쉬었다. 출발부터 지금까지 한숨만 백번은 넘게 뱉은 것 같았다.
“일단-.” “일단 쉬고 나서.”
동시에 입을 열었는데, 솔져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캐서디의 뒤쪽을 보더니 그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거세게 당겼다. 약간 거리를 두고 서 있던 터라 캐서디의 몸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보기 좋게 엎어졌고, 그의 무례함에 고개를 치켜들고 잭을 보려는데, 그의 몸이 뒤로 기울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 늘어진 비디오테이프처럼 천천히 재생됐다. 총탄 소리는 그 이후에 들렸다. 연달아 세 발. 왼쪽 어깨, 오른쪽 복부와 허벅지. 탄피가 뚫은 곳에서 피가 튀었다. 캐서디의 얼굴에 피가 묻었고, 솔져가 바닥에 쓰러졌다.
캐서디는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솔져에게 다가갔다. 피격당한 곳을 살펴볼 새도 없이 또 탄이 날아와 바닥에 꽂혔다. 그를 질질 끌고 다시 지프 뒤로 그를 숨긴 뒤 캐서디는 적의 위치를 확인했다. 상대방이 총격에 능숙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섬광탄을 던지고 피스키퍼로 쏴 맞추는 건 순식간에 끝났다. 적이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한 캐서디는 곧장 솔져를 다시 살폈다. 탄피가 어깨와 허벅지는 뚫고 지나갔지만, 복부엔 남아있는 것 같았다. 지프는 움직일 수 없고, 적이 또 올 수도 있었다.
뜬금없이 어제의 대화가 떠올랐다. 대장이 왜 그렇게나 모리슨을 싫어했는지 알 것 같네. 이가 갈렸다. 캐서디는 무전기를 들고 주파수를 맞췄다.
“여긴 콜 캐서디. 지원을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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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심하게 흔들렸다. 솔져가 눈을 뜬 이유였다. 천장이 흔들린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제 몸이 흔들리는 탓이었다. 살짝 고개를 돌리는데, 아마리가 제 옆에 앉아있었다.
“……내가 지원요청을 했던가?”
“맙소사. 잭 모리슨. 그놈에 내기가 뭐라고!”
모리슨이 눈을 뜨자마자 하는 말에 아마리는 기가 차서 그를 질책했다. 달리는 트럭 짐칸에 누워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어쩐지 죄다 흔들린다 했더니. 모리슨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내기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앞 좌석에서 날카로운 목소리에 질문이 들렸다. 아마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몸을 기울여 앞 좌석에 앉은 사람을 확인했다. 운전하는 캐서디가 백미러를 보며 화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이의 취미 같은 거지. 죽는지 사는지 같은 거.”
“그게 무슨!”
소리치는 캐서디의 목소리에 맞춰 차체가 크게 한 번 흔들렸다. 핸들을 좌우로 두어 번 꺾더니 다시 제 길을 찾아 달렸다.
“부사령관님!”
그녀는 캐서디를 보며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잭을 과소평가했어.”
다 늙어서도 이렇게 황소고집일 줄 몰랐거든. 캐서디는 좀 더 나은 대답을 기대했으나 둘 다 위로가 될 말은 하지 않았다.
“두 분 다 똑같습니다!”
차가 다시 한번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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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디가 솔져를 다시 만난 건 다음 날 저녁때였다. 임무 보고를 마치고 돌아가는 복도에서 테라스에 서 있는 그를 봤다. 병실에 꼼짝 말고 있으라는 아마리와 치글러의 말을 무시하고 테라스 밖을 보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저 인간 담배도 피웠었나. 캐서디는 혹시나 하고 주머니를 뒤졌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좋아. 말 걸 구실은 되겠네. 테라스로 나가는 문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렇게 생각했다.
끼익.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솔져가 살짝 고개를 돌리자 어제까지 지겹게 본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하고 테라스 밖 풍경을 보며 말했다.
“다신 안 볼 것처럼 하고 가더니.”
“초면에 실례합니다. 담배 좀 빌립시다.”
여전히 조금은 골이 난 말투였다. 난 시가는 없다. 솔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서 캐서디 쪽으로 내밀었다. 캐서디는 하얀 필터와 종이로 된 얇은 지궐련 한 개비를 꺼내며 대답했다.
“나이도 있으신데 시가로 바꾸시죠. 이런 싸구려 말고.”
“그런 취미 없다.”
담뱃갑을 다시 넣고 이번엔 다른 주머니에서 종이 쪼가리를 꺼냈다. 자세히 보니 종이 성냥이었다. 한 개 뜯어내서 뒤의 마찰 면에 성냥 머리를 긁었다. 아니 왜 골동품을 들고 다니세요? 주웠어. 이걸 어디서 주워요? 아니면 누굴 걸 뺏었-. 추궁하는 것 같은 질문에 솔져는 울컥하고 좀 크게 대답했다.
“알 게 뭐야. 싫으면 네 걸로 태우던가.”
그때 성냥에 불이 붙었고 캐서디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서 그 불에 담배를 태웠다. 태운 담배를 한 모금 마시고 연기를 내뱉었다.
“시가도 아닌데, 성냥으로 태우는 맛이라도 있어야죠.”
“입만 살아서.”
그러고 나서 둘 다 동시에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있었다. 있잖아요.
“…잠시라도 입을 가만히 두질 않는구나. 캐서디.”
“대장이 왜 당신을 싫어했는지 알 것 같아요.”
질린 소리를 하려는 순간, 말의 내용에 그는 다시 캐서디에게 시선을 돌렸다. 캐서디도 시선을 돌렸다.
“…당신 말이 맞아요. 그 자식은 그만두지 않았을 거예요.”
“……왜. 그런-.”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도 당신이 싫습니다.”
왜냐고 물어보려는데, 캐서디는 먼저 제 입장을 말했다. 솔져는 말을 삼켰다. 아무래도 좋아할 수 없는 사람. 캐서디에게 솔져는 그런 사람인 모양이었다.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캐서디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가 어떤 마음이든 지금 자기 뜻을 확실히 말해줘야 했다.
“하지만 신뢰합니다.”
이어진 말에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날 살린 당신은 믿습니다. 캐서디에게 감정을 인정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콜 캐서디. 모리슨은 속으로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어쩌지, 난 아무도 안 믿는데.”
“죽다 산 사람이 누굴 믿겠어요. 당신은 그냥, 죽지나 마세요. 그거면 됩니다.”
“리퍼가 들으면 기함하겠군.”
“그 사람이요?”
뭐.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제 와서. 모리슨은 캐서디의 마지막 단어를 곱씹었다. 이제 와서. 하하. 그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 이상 말이 없는 그를 캐서디는 살짝 고개를 돌려서 살폈다. 희미하게 입에 걸려있는 미소에 놀랐지만, 그도 곧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2017.01.26~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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