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애화 - 1
카이멜 시레노바 x 리비에르 시라 (1000일 AU 로그)
너와 함께한 천일,
그리고 하루의 이야기
파도 소리가 귀로 밀려들어 왔다. 노을의 색채에 물든 물결이 잔잔하게 밀려 나갔다가, 다시 세차게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모래 위를 덮쳤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내음이 눈물 같게 느껴져, 사뭇 애달프고도 애틋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손에 맞잡은 네 온기가 나를 감싸왔기에, 울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것으로, 오늘은 우리가 만난 지 며칠째 되는 날이었을까?
아마 더 이상 세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보름을 함께했고, 수많은 웃음과 울음이 가득한 날들은 이제 그저 과거의 한 파편일 뿐이었다.
오로지, 우리 둘만의 기억 속에만 남은.
이번도 마찬가지일까. 우리는 이번에도 돌아가게 될까? 우리는 이번에는 어디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
매번 잊는다는 사실이 서글펐고, 다시 만나지 못할까, 다시 기억하지 못할까 숨이 목을 옥죄어 오듯 두려웠다.
하지만 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너의 미소를 다시 눈에 담을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다시금 그 아름다운 날들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그 몇 번이라도, 백일을, 천일을 반복해야 한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을 알고 있었다.
“…노을이 눈부시네.”
붉은 태양이 점차 옅어지는 지평선 아래로 사라졌다. 마지막 온기의 잔재가 바닷물에 비쳐 반짝였다.
* * *
D+250
이처럼 화창한 날씨도 흔치 않았다. 인구가 겨우 300명이 될까 말까 한 이 작은 섬은 바다가 몰고 오는 변덕스러운 기후에 쉽게 영향받기 일쑤라, 제아무리 해가 쨍쨍한 날도 섬 주민 대부분은 작은 우산과 겉옷 정도는 늘 챙겨 다녔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래도 예외일듯싶었다. 막 출근길에 나섰는지, 작은 주택의 문을 잠그고 아침 햇살을 만끽하는 청년은 마치 한여름 날씨에 어울릴법한 얇은 옷차림이었다.
겨울에도 온순한 기후를 누리는 섬이어도 10월 초를 장식한 가을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청년, 리비에르는 개의치 않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샐쭉 웃었다. 그의 짧게 자른 푸른 머리카락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시원한 조화를 이루었다.
“리비에르 씨, 출근 안 하나요?”
이웃 주민이 빠른 종종걸음으로 지나치다 말고 의아하게 물었다. 한차례 리비에르를 쓱 훑어보더니 질문 하나가 잇따랐다. 안 추워요? 리비에르는 해사함이 만연한 눈웃음을 지었다.
“해야죠. 오늘은 그래도 날씨가 좋아서 괜찮네요.”
슬쩍 이웃의 손목에 있는 시계에 눈길을 주자 친절하게 답이 돌아왔다.
“8시 10분이에요.”
“아하, 감사합니다.”
급하게 다시 길을 나서는 이웃의 등에 대고 손을 흔들어주는 리비에르는 저세상 느긋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도 사실 농땡이를 피우고 있을 여유가 있진 않았다.
섬의 유일한 어린이집에서 맞벌이 집안의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인 리비에르에게 요구되는 출근 시각은 8시 40분이었다. 그의 느긋한 성격을 고려해 몇 분 정도는 늦을지라도, 최소 아이들보다는 일찍 도착해있을 의무가 있었기에 아쉬움을 띠면서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날씨도 맑은데 오늘 원장님에게 애들 데리고 야외 소풍은 어떨지 건의해볼까.’
리비에르는 머릿속으로 오늘의 놀이계획을 짜며 작은 주택이 여럿 지어져 있는 주택가를 벗어나, 섬의 중심지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만원이라 간신히 비집고 타, 덜컹거리는 도로를 20여 분 달렸을까. 리비에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넓은 광장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하얀 벽돌이 깔린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른 아침이었기에 더 북적이고 있었을까. 관광지로 유명한 섬도 아니었던 터라 섬에는 오래된 주민들이 많았고, 외부인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어렸을 적부터 섬에서 자란 리비에르 역시 섬 주민 전원 이름은 모를지라도, 최소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이 광장 정도는 눈감고도 무슨 가게가 있는지 전부 읊을 수 있었다.
그러니, 리비에르가 모르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워낙 구석진 곳에 있는 가게라,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몇 번 깜빡인 리비에르는 이내 저벅저벅 걸어, 의문의 가게 앞에 섰다.
정교한 무늬가 조각된 고풍스럽고 오래된 분위기를 풍기는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리비에르는 고개를 들어 가게의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 마술사의 책방 」
‘사람의 흥미를 잡아당기는 이름이네. 그러면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리비에르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손을 내밀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기름칠이 잘되어있는지,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오래돼 보이는 가게 안은 한적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방이라는 이름값을 하듯 가지각색의 책이 즐비하게 쌓여있는 책장만 시야에 가득했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손님도, 하다못해 직원도.
혹시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건가? 9시도 되지 못한 시각이었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리비에르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누가 자신을 도둑으로 오해하기 전에 도로 나가봐야 하나 싶어 다시 몸을 돌리던 리비에르를 붙잡은 것은 앳된 소년의 목소리였다.
“아 거기, 그래 당신! 그냥 갈라고? 기왕 들어온 김에 구경이나 더 하고 가지~?”
폴짝. 말꼬리를 장난스레 늘이며 리비에르의 앞으로 금발의 꽁지머리 소년이 빙글빙글 웃으며 튀어나왔다. 소리 하나 없는 소년의 움직임에 채 놀라기도 전, 리비에르는 이미 카운터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소년을 마주하고 있었다.
리비에르는 어리벙벙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소년을 관찰했다. 금발 소년의 나이는 기껏해야 열일곱, 열여덟 살 남짓 되었을까. 탁한 붉은 눈이 밝은 머리카락과 대조되어 퍽 인상적이었다. 두 눈 아래에 새겨진 검은 문신 때문에 더 눈이 갔을까. 체격은 리비에르보다 작았지만 그를 카운터까지 잡아끌고 나서도 전혀 숨찬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눈을 가늘게 접고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 웃으며 카운터 위를 손으로 가볍게 탕탕 내리쳤다.
“그래서~ 말해봐, 파란머리 형씨! 뭘 찾으러 여기까지 왔어? 책방이라고 써 있긴 하지만, 뭐, 여기 골동품도 있고, 잡다하게 다 있긴 있으니 생각나는 대로 털어놔 봐!”
“일단 형씨라는 호칭이 상당히 어색하니 리비에르라고 불러주면 좋겠네, 금발머리 직원님~ 그리고 여기 딱히 뭘 찾으려 들어온 게 아니라서 말이지.”
“나도 금발머리 직원님은 아냐! 아노렐, 아노렐이라고 불러.”
소년은 가슴팍에 달린 이름 명찰을 가리켰다. ‘아노렐’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사실 여기 직원이라기보다는 조수라고 보는 게 더 가깝거든. 아노렐이 고개를 흔들자 삐죽삐죽 튀어나온 금발 사이로 얼핏 분홍색의 브릿지가 보였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분명 찾고 있는 게 있을 텐데? 본인은 아직은 모를지라도 말이야.”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아노렐은 갑자기 카운터 밑 서랍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리비에르에게 반박할 여지도 주지 않겠다는 듯 집중한 얼굴이라, 리비에르는 아노렐이 제멋대로 생각하게 놔두기로 했다. 아, 그런데.
“이건 아니고.”
서랍을 열정적으로 뒤적이다 손에 잡힌 의미불명의 단검집을 뒤로 던지고.
“뭐야,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자그마한 금색 왕관을 제 머리에 쓰고 다시 뒤적거리는 소년을 리비에르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흥미롭게 지켜봤다. 세상에, 저 많은 물건이 어떻게 다 저 작은 서랍에 들어가 있었담.
‘마술사의 책방은 몰라도 저건 마술사의 서랍이라고 해도 손색없겠는데.’
그리고 몇 번의 물건 발굴과 투척을 반복한 끝에, 드디어.
“아! 여기 있었네!”
은색 줄에 달린 작은 손목시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짙은 푸른색의 동그란 다이얼에는 숫자가 있어야 할 곳에 희미하게 빛나는 보석들이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엄청 값비싸 보이는 시계는 아니었지만, 정교하고 세련되어 잘 만들어진 시계임은 틀림없었다.
정작 원하는 물건을 찾은 아노렐은 시계를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리비에르의 손에 막무가내로 쥐여주었다.
“자자, 이거 갖고 가. 원래 파는 물건은 아닌데, 그냥 가긴 찝찝할 수도 있으니 20달러만 줘~”
정말, 어린애라도 상인은 상인이란 건가. 사겠다는 소리도 안 꺼냈건만 미리 결론까지 지어버리고 값을 요구하는 아노렐에게서 리비에르와 맞먹을 정도의 마이웨이 기질이 보였다. 리비에르는 헛웃음을 짓고 지갑을 꺼내 들었다. 소년의 열정을 봐서라도 가게 매출이나 좀 올려줘야지 싶어 부른 값을 두 배로 치르고 얼떨결에 충동구매를 하게 된 시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8시 50분.
이크, 지각이다. 리비에르는 아노렐에게 인사도 대충 하는 듯 마는 듯 시계를 가방 안에 쑤셔 넣고 가게를 뛰쳐나왔다. 그럼 또 보자~ 뒤에서 아노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지만, 리비에르는 소년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또 지각하면 원장님이 월급에서 깐다고 했는데. 리비에르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지만, 옆길로 새어 지각한 것은 전적으로 제 탓이었으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월급을 최대한 사수하기 위해 숨차게 달리는 것밖에 없었다.
* * *
마지막까지 어린이집에 남아있던 아이가 보호자의 손을 잡고 나섰을 무렵, 벽시계는 6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을 돌아보며 작은 손을 흔드는 아이에게 내일 보자며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고, 리비에르는 기지개를 켰다.
‘아, 어깨 뻐근해.’
아침에 지각한 후 원장님에게 단단히 혼난 리비에르는 블랙기업에 갓 들어온 신입마냥 신나게 굴려졌고, 오늘따라 아이들도 평소보다 에너지가 차고 넘쳤다.
놀아달라, 업어달라 보채는 아이들을 달래고 밥 먹이랴. 기본 체력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리비에르는 아마 퇴근 전에 볼썽사납게 어린이집 마룻바닥에 뻗었을 것이다.
리비에르는 느릿느릿 어질러진 방의 마무리 정리를 하며 원장님의 눈치를 보았다.
‘저 이거만 끝내고 이만 퇴근해도 될까요?’
머리가 희끗한 어린이집의 원장, 헬렌은 퇴근을 바라는 간절한 무언의 눈빛을 마주하고 피식 웃었다.
‘나이가 들었다 보니 이제는 여기 선생님들마저도 애들처럼 보이네. 아니면 저 사람이 유독 제멋대로라 그런 기분이 드는 건가.’
실없는 생각을 뒤로하고 헬렌은 선선히 리비에르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거만 하고 가도 좋아요, 리비에르 선생님. 하지만 내일도 지각했다간 버스 끊기기 직전까지 청소시킬 줄 알아요.”
“네넵,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10분 뒤, 기쁜 마음으로 리비에르는 후다닥 어린이집을 나섰다. 해는 이미 반쯤 노을 아래로 사라져 얼굴에 닿는 공기가 서늘했다.
‘두꺼운 겉옷 하나 챙겨올 걸 그랬나.’
약간 후회하던 리비에르는 손을 카디건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고 퇴근 버스가 지나다니는 정류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작은 섬인 만큼, 버스 노선은 한정되어 있었고, 모든 버스는 필연적으로 광장에 있는 정류장을 거쳐 가게 되어있었다. 리비에르가 아침에 광장 정류장에 내려 어린이집으로 향했듯,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역시 광장을 거쳐야 했다. 오죽하면 모로 가도 광장으로 통한다는 말이 섬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쓰이고 있겠는가.
매일같이 지나다니는 광장이 지겨울 만도 했지만, 리비에르는 북적거리는 이 거리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그냥저냥,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중앙 분수대 근처에 앉아 사람 구경하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었다. 외부인이 적어 지나가는 행인 대부분은 리비에르가 이미 아는 사람이었지만도.
흐음. 리비에르는 자신의 단골 자리인 광장의 분수대로 천천히 걸어가며 갈등했다. 좀 춥긴 하지만 오늘도 조금 구경하다 들어갈까? 아니면 그냥 근처 가게로 들어가서 저녁이나 먹고 갈까?
‘아, 맞다, 가게.’
문득 아침의 일이 떠올라 리비에르는 잠시 가방을 뒤적이다, 책방의 소년에게서 산 손목시계를 꺼내 들었다. 지각할라 급하게 뛰어가느라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시계가 주황색 노을빛을 받아 반짝였다.
58초, 59초, 7시.
시곗바늘이 7시를 가리키는 동시에 광장의 시계탑에서 잔잔히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뎅, 뎅, 뎅. 총 7번.
잠시 시계탑에 눈길을 준 리비에르는 다시 손목시계의 시곗바늘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보석 하나가 빠져있네?”
본래 12라는 숫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작은 보석 하나가 빠진듯한 흠집만 남아있었다.
으으음…. 원래 하자가 있는 물건인가? 그리 비싸게 주고 산 시계는 아니라 굳이 그 책방을 다시 찾아가 수리를 맡겨야 하나 싶은 고민에 빠진 채로 걷던 리비에르는 순간 앞에 나타난 사람을 피하지 못하고 요란하게 부딪히고 말았다. 상대방에 손에 들려있던 가방들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앗, 미안해요. 딴생각하다 보니 그만.”
빠르게 사과를 하며 허겁지겁 시계를 다시 가방에 쑤셔 넣은 리비에르는 상대방이 놓친 물건들을 같이 주워주려 무릎을 굽혔다가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허리까지 구불구불하게 늘어진 붉은색의 머리카락이었다. 한순간 눈길을 빼앗을 만큼 화려한 색도 색이었지만, 리비에르는 이 섬에 살면서 이런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을 본 적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리비에르는 실례라는 것을 망각하고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하다 곧게 뻗은 눈썹 아래의 금안을 마주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차, 리비에르는 머쓱하게 웃으며 일어선 후, 각종 청소도구가 들어 있는 가방을 건네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다행히 순순히 가방을 받은 적발의 여성은 리비에르를 의아하게 여길지언정, 크게 기분 상한 표정은 아니었다.
“만난 지 몇 분 안 됐는데 벌써 실례를 두 번이나 범했네요. 다시 한번 미안해요. 이 섬에서 처음 보는 사람인 것 같아서 좀 호기심이 들었거든요.”
리비에르는 여성의 손에 들린 묵직한 장바구니들을 눈짓했다. 광장이 상인들의 중심지일지언정, 보통 주민들은 두 손에 가득 가방을 들어야 할 만큼 물건을 많이 사진 않았다. 어차피 일하러 가기 위해서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든, 광장은 사람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곳이었다. 산다 해도 기껏해야 며칠 먹을 음식, 집에 떨어진 생활용품 정도였을까.
리비에르의 타고난 성격이 느긋해서 그렇지, 눈치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이럴 경우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운 나쁘게 집의 모든 생활용품이 동시에 망가졌거나, 아니면 새로 이사 와서 구비해놓은 게 아예 없거나. 리비에르는 후자에 걸었다.
“최근에 이사 왔나 봐요.”
거의 확신하는듯한 물음에 상대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에 막 이사를 끝냈는데. 아직 소개도 하지 못했군. 카이멜 시레노바, 편한 대로 부르도록. 자네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확실히, 자세히 들으니 섬 주민 특유의 억양과 말투와 달랐다.
‘어쩌면 즐거운 인연이 하나 더 생길 수 있겠네.’
리비에르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비에르 시라. 만나서 반가워요. 오늘 실례에 대한 사과로 도움 필요한 것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줘도 괜찮아요. 이래 봬도 이 섬에서 산 햇수가 10년이 넘어가니 섬에 대해 모르는 건 없거든요.”
작은 메모 한 장에 리비에르는 빠르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 카이멜에게 건넸다. 카이멜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리비에르의 “부담 주려는 건 아니고, 혹시 모르니 그냥 받아둬요”라는 말에 감사를 표하며 메모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리비에르가 웃으며 건넨 인사에 카이멜도 옅게 웃고, “좋은 저녁 되길”, 그에게 무난한 인사를 돌려줬다.
* * *
리비에르에게 연락이 온 것은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난 저녁이었다. 지잉, 핸드폰이 카디건 주머니에서 진동하자 리비에르는 귀찮음이 역력한 얼굴로 느릿느릿 폰을 꺼내 들었다.
‘내일 모처럼 휴가를 냈는데 설마 일정이 생겨서 취소된 건 아니겠지?’
신을 믿지도 않았건만 기도하는 심정으로 리비에르는 문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발신인을 보자 곧바로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알 수 없는 번호로 오는 연락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원장님에게서 온 문자는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며 리비에르는 문자를 열어보았다.
「 저번에 광장에서 만난 카이멜이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해도 좋다 해서 물어보네만, 이 섬에서 가장 큰 서점이 어딘지 알고 있나? 」
아. 리비에르의 기억은 빠르게 붉은 머리의 외부인을 떠올려냈다. 맞다, 그런 일이 있었지. 리비에르는 잠시 고민하다 빠르게 자판을 타닥타닥 두들겨서 답장을 보내고 기다렸다.
「 가장 큰 서점이라면 리아메 길에 있는 비블리 서점일 건데, 광장에서 서쪽 길로 들어가면 얼마 안 가 보일 거예요 」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여 문자 하나를 더 보냈다.
「 마침 내일 오프인데 안내라도 해줄까요? 어차피 광장에 갈 일도 있고 」
거짓말은 아니었다. 귀찮다고 장 보는 것을 계속 미루다 보니 생필품이며 음식이며 사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것보단 새로 온 외부인에 대한 호기심이 더 우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뭐.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잡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카이멜은 핸드폰을 수시로 확인하고 있었는지 답장은 오래 안 가 진동과 함께 날아왔다.
「 자네에게 폐만 아니라면 괜찮네. 그럼 내일 광장에서 11시에 만나면 어떤가? 」
리비에르는 피식 웃었다. 몇 분의 짧은 만남, 몇 번의 간결한 문자로도 카이멜의 성격이 파악되기 시작됐다.
‘어째 원장님을 넘어설 것 같은 엄격하고 완벽주의 성향일 것 같단 말이지. 점차 그 사람을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고.’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도 조금은 지루한 일상에 신선한 자극이었다. 리비에르는 제멋대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지막 답장을 보냈다.
「 그럼 내일 광장의 분수 앞에서 만나요~ 」
약속에 이렇게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떠본 게 얼마만의 일일까. 리비에르는 밤늦게까지 설레는 마음을 품고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날씨는 서늘했지만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근 이틀간 비가 쏟아져 오늘도 비가 이어질까 우려한 리비에르였지만 걱정이 무색할 만큼 파란 하늘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리비에르는 작은 접이식 우산을 챙겨 가방 안에 넣고 벽시계를 힐끗 보았다. 10시 27분. 지금 나가면 딱 맞는 시각에 도착하겠다 싶어 리비에르는 느긋하게 현관문을 나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했다.
출근 시간이 지나 한적해진 버스에서 내려서 하얀 벽돌길을 걸어, 어느덧 투명한 물을 뿜는 광장의 분수대가 눈에 들어왔다. 리비에르는 구태여 열심히 카이멜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의 붉은색 머리카락이 한눈에 들어왔으니까.
카이멜도 시력이 좋은 건지, 관찰력이 뛰어난 건지, 그에게로 걸어가는 리비에르를 얼마 안 가 눈치채고 인사치레로 손을 흔들었다. 리비에르는 카이멜에게로 다가가며 빙긋 웃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나도 방금 도착했네.”
“그럼 다행이네요. 먼저 할 일이 없다면 서점부터 가볼까요? 여기서 멀진 않은데.”
카이멜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하자 리비에르는 살짝 가파른 오르막길을 가리켰다. 저 길을 반쯤 올라가다 보면 붉은 갈색 벽돌 건물이 있는데, 그 1층이 서점이에요. 근처엔 문구점도 있으니 필요하다면 같이 들려도 괜찮고요.
리비에르는 카이멜을 안내하며 스쳐 가는 가게들을 소개했다. 여긴 우체국이고요. 아니 사실 우체국 본점은 항구 근처에 있지만요. 여긴 밖으로 나가는 우편물들을 모아 본점으로 전달해주는 우편취급국 비슷해요. 저기가 아까 말한 문구점인데, 더 비싸고 퀄리티 있는 문구류를 원한다면 조금 더 올라가면 있어요. 아, 그리고 여기가….
“서점이네요. 이 골목에 붉은 갈색 벽돌 건물은 여기 하나밖에 없으니 헷갈리진 않을 거예요.”
리비에르의 말대로, 주변 흰색, 회색의 벽돌 건물 사이에서 서점 건물은 상당히 눈에 띄는 편이었다. 리비에르는 웃으며 문을 열고 카이멜에게 눈짓했다. 들어갈까요? 카이멜은 짧게 감사 인사를 하고 리비에르를 따라 서점으로 들어섰다.
서점 안에서 많은 말이 오가진 않았다. 도서관만큼은 아니지만 어쩐지 정숙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높고 높은 책장 사이에서 카이멜은 책 제목이 적힌 리스트를 대조하며 집중하는 기색이었다. 리비에르는 카이멜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같이 책장을 훑어보다가 눈에 띄는 책이 있어 조심스레 책장에서 빼냈다. 알록달록한 표지에 별이 반짝이는 시계가 그려져 있는 유아용 동화책이었다.
‘마법사와 별시계 이야기. 이거 마틸다가 보고 싶다던 동화책 같은데?’
맞벌이 부모 집안이라 늘 늦게까지 어린이집에 남아 동화책을 보며 시간을 때우던 작은 아이가 생각나 리비에르는 망설임 없이 동화책을 옆구리에 끼고 근처 책장을 고심하는 눈으로 응시했다.
‘온 김에 동화책이나 몇 권 사다가 쟁여둘까. 슬슬 있는 책들 다 읽어줘서 같은 걸 또 읽어주면 애들이 지루해한단 말이지.’
다 딴짓하는 것 같으면서도 참 귀신같이 똑똑한 애들이란 말이야. 리비에르가 키득이는 사이 카이멜이 책 몇 권을 안고 리비에르에게로 다가왔다. 자네도 볼일이 다 끝났나? 말하는 눈짓에 리비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조용히 책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섰다. 아니, 나서려고 했다.
“아… 낭패네.”
주룩주룩. 화창했던 날씨는 어디 가고 어느새 먹구름이 끼었었는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리비에르는 카이멜에게로 시선을 힐끗 돌렸다.
“혹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이멜은 고개를 저었다. 리비에르는 바닥에 커다란 물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빗방울을 한 번, 짙은 회색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한 번, 그리고 그들이 팔에 한가득 들고 있는 책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작은 우산 하나로 버틸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이럴 줄 알았다면 큰 우산을 들고 올 걸 그랬나.’
그러나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 리비에르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 아,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 카이멜에게 제안했다.
“이 건물 2층에 작은 카페가 있는데, 비가 멈출 때까지 음료라도 한 잔 마시고 있을까요? 아마 지나가는 소나기일 테니 30분 정도면 그칠 것 같은데.”
카이멜은 선선히 동의했다.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상태라면 모를까, 종이책을 잔뜩 들고 빗속을 뚫고 가는 건 어불성설이었으니. 그렇게 잠시 뒤,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2층 카페의 창가 자리, 서로의 맞은편에 앉아 음료를 한 잔씩 홀짝이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비가 내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카이멜의 말에 리비에르가 웃으며 대꾸했다.
“이 섬의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워서 말이죠. 여기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도 날씨만큼은 예측하기 어려워하니까요. 웬만하면 작은 우산 하나 정도는 늘 챙기고 다니는 걸 추천해요.”
리비에르는 자신의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카이멜의 곧은 눈썹이 그 모습에 추켜 올라갔다.
“우산이 있는데 굳이 남은 건가? 나 때문이라면 같이 안기다려도 되는데.”
리비에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우산을 다시 가방 안으로 집어넣고 자신의 청포도 에이드를 빨대로 저었다.
“비가 올 줄 몰라서 작은 우산을 가져온 터라, 이대로 빗속을 뚫고 간다면 머리는 무사해도 책은 다 젖을걸요? 겸사겸사, 당신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고요.”
여기 섬사람들의 오랜 고질병이죠. 새로운 외부인에 대한 호기심. 리비에르의 말투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가벼워 그리 기분 나쁘게 들리진 않았다. 이번엔 카이멜이 약간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고 진한 향이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상황이긴 하군. 그래서, 뭐가 궁금한 건가?”
궁금한 거야, 물어보고 싶은 거야 많았다. 어디서부터 질문을 해야 할지 모를 만큼. 리비에르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이내 솔직하게 웃어버렸다.
“판을 깔아주니까 오히려 적당한 질문을 못 찾겠네요. 그럼 일단 서로 공평하게 간단한 자기소개부터 교환할까요?”
리비에르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이름은 이미 알겠지만, 리비에르 시라. 올해 스물다섯이고 이 섬에선 열 살 무렵인가? 아무튼 그때부터 여기서 쭉 살아왔어요.
리비에르가 말을 멈추자 카이멜이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이어받았다. 아시다시피, 이름은 카이멜 시레노바. 나이는 같은 스물다섯이고, 며칠 전에 일 때문에 이곳으로 이사 오게 되었지.
“그러고 보니 동갑인데 편하게 말하지 그런가? 어느 쪽으로든 편한 대로 하게.”
“그래도 될까?”
반색하는 리비에르에 카이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나이대끼리 편하게 말하는 게 그리 큰 대수라고. 한층 기분이 좋아진 리비에르는 편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갔다.
“일 때문에 왔다고 했지? 무슨 일을 하는데?”
“고등학교 선생으로 왔네. 교육대를 막 졸업하고 이곳에서 채용 제안이 들어와서 승낙했지. 나도 많은 걸 배울 기회라고 생각했고.”
“확실히 여기 선생님이 많이 부족하긴 하지. 특히 고등학교 선생님은 말이야. 상당히 환영받겠는걸?”
선생님이라. 학생 연령은 다를지라도 비슷한 분야에서 일한다고 하니 괜히 친밀감이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리비에르는 카이멜이 옆에 쌓아둔 책에 슬쩍 눈길을 줬다.
‘사회탐구. 고등학생을 위한 사회의 이해. 사회과목 선생님으로 왔나 보네.’
리비에르가 카이멜이 산 책을 관찰하던 중, 카이멜 역시 리비에르가 고른 동화책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리비에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몇 번 눈을 깜빡이자 카이멜이 물었다.
“혹시 저 책들도 자네 일에 관련된 책인가?”
날카롭네, 리비에르는 눈을 접어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이집에서 일하고 있는데, 애들 읽어줄 동화책이 동나서 온 김에 몇 권 샀지. 옛날에는 동생이 매일 읽어달라 보챘는데, 어쩌면 계속 애들한테 시달릴 팔자인가.”
말은 그리했지만 입가에 웃음기가 만연해 카이멜은 리비에르가 아이들을 좋아하는 성격인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나이 차이가 상당히 나는 동생인가 보군. 카이멜의 추측에 리비에르는 습관적으로 애들한테 해주듯 박수쳤다.
“정답~ 지금은 대륙에서 공부하느라 나 혼자 살고 있지만. 어린 동생을 혼자 보낼 순 없어서 부모님도 같이 갔거든. 나야 뭐, 이미 성인이겠다. 일자리도 있겠다.”
“그래도 혼자 살겠다는 결정은 많이 고민하고 내렸을 것 같은데. 일이 좋아서 여기 남은 건가?”
“그것도 그렇지만.”
리비에르는 잠시 뜸을 들이다 창문을 응시했다. 카이멜은 리비에르를 따라 밖을 내다보았다. 어느덧 빗줄기가 그치고 하늘이 개고 있었다. 밝은 햇살이 한줄기, 카페 안으로 새어 들어와 리비에르의 하늘색 눈이 반짝였다.
“변덕스럽기도 하고, 때론 심심하기도 한 작은 곳이지만, 난 이 섬이 좋거든. 지루한 기억보단 그래도 즐거운 기억이 더 많았으니까. 그러니 카이멜, 너도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할 거라, 내가 장담해.”
비도 그쳤겠다, 슬슬 나가볼까? 리비에르는 밖을 손짓했다. 언제 또 비가 내릴지 모르니 날씨가 갰을 때 움직이는 게 좋겠지.
둘은 이후로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광장으로 돌아와 가게를 몇 군데 순회한 뒤, 헤어져 귀가했다.
“가끔 이렇게 불러줘. 그래도 심심한 것보단 즐거운 게 좋으니까. 우리 또래 사람들이 여기 많지는 않거든.”
리비에르의 장난스런 말투에 카이멜 역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도록 하지. 가끔은 자네가 먼저 불러주게나.”
집으로 돌아온 리비에르는 여전히 붕 뜬 기분이었다. 얼마 만에 누군가와 이리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더라. 다음날 어린이집으로 들고 갈 책을 한곳에 모아 정리하던 리비에르는 시계가 그려진 동화책에 손이 닿자 멈칫했다.
‘아 맞다. 나간 김에 그 이상한 책방이라도 들려볼 걸 그랬나?’
그러나 워낙 후회 없는 즐거운 하루를 보냈기에 리비에르는 얼마 안 가 수수께끼의 시계를 받은 책방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렸다.
* * *
“…자신의 왕국과 백성을 돌려받은 왕은 별시계를 마법사에게 돌려주고 왕국을 현명하게 통치했습니다. 왕과 백성, 마법사는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해피 엔딩이네요~ 리비에르가 동화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표지를 덮었다. 매끈매끈한 뒤표지에는 빛나는 별이 그려져 있었다. 리비에르의 다리 위에 앉아있던 소녀는 별 그림을 만지작거리다 리비에르를 올려다보았다.
“근데 선생님. 시간을 돌려도 왕은 왜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음, 그러게. 왕이 시간을 돌린 사람이라 혼자서만 기억하고 있었나? 마틸다는 어떻게 생각해?”
마틸다의 작은 얼굴에 고뇌가 떠올랐다. 한참을 끙끙대던 마틸다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치만 선생님은 똑똑하니까 선생님 말이 맞겠죠!”
리비에르는 웃음을 터트리고 마틸다를 조심스레 안아 들어 바닥에 내려주었다. 마틸다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리비에르를 쳐다보았다.
“칭찬 고마워, 마틸다. 자, 이제 곧 어머니 오실 시간이니까 집에 갈 준비해야지?”
네! 마틸다가 씩씩하게 대답하고 리비에르의 손길에 따라 두꺼운 코트를 챙겨입고 가방을 멨다. 리비에르가 보들보들한 털모자까지 머리에 완벽하게 씌워주자 타이밍 좋게 마틸다의 어머니가 도착했다. 리비에르는 마틸다가 도도도 어머니께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다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마틸다도 잘 가고, 내일 또 보자.”
“내일 봐요!”
그렇게 마틸다가 떠나자 떠들썩하던 어린이집에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리비에르가 놀이방으로 들어서자 뒷정리를 시작한 헬렌이 그를 반겼다.
“수고했어요, 리비에르 선생님. 오늘도 얼른 정리 끝내고 퇴근하세요. 곧 눈이 올 것 같은데, 버스가 막히면 곤란하잖아요?”
“생각만 해도 싫네요~ 여기만 치우면 되나요?”
헬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비에르는 빠른 손길로 장난감을 하나씩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놀이방 반대편에서 헬렌의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왔다.
“맞다. 리비에르 선생님, 카이멜 씨하고는 잘 지내고 있나요?”
“네?”
“어머, 놀랄만한 질문이었나요? 요즘도 종종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내나, 궁금했는걸요.”
리비에르는 머쓱하게 웃었다. 하여간, 이 작은 섬에서 소문 하나 퍼지는 속도는 참 빠르다니까. 하지만 사람도 적고, 새로운 일도 적고, 늘 조금은 심심해하는 섬 주민들이 리비에르와 카이멜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리비에르도 처음에 비슷한 이유로 카이멜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가. 리비에르는 헬렌에게 해줄 적당한 답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친한 친구죠~ 아시다시피 이 섬에서 제 또래를 찾기가 힘들잖아요? 비슷한 직종에서 일하기도 하고, 같이 얘기하고 있으면 즐겁거든요.”
헬렌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표정이 마치 막 사춘기에 접어든 조카를 보는 친척 어른의 시선 같아서 리비에르는 충분히 헬렌의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요~ 다 그렇게 친하게 시작하는 거지. 혹시 다음 주 크리스마스 축제에 카이멜 씨와 같이 갈 마음 없어요? 카이멜 씨는 이 섬의 크리스마스 축제가 처음일 테니 겸사겸사 안내도 좀 해주고.”
헬렌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엔 어린이집도, 학교도 쉬어 둘 다 휴일일 테고, 마냥 집에 박혀있는 것은 리비에르의 취향이 아니었다. 혼자면 심심할 테니, 카이멜을 불러 같이 노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것이었다.
“한 번 물어보긴 할게요~ 원장님도 축제에 가실 생각인가요?”
헬렌은 웃으며 손사래 쳤다.
“축제라면 이미 수도 없이 봐서 슬슬 지겨우니 집에서 벽난로나 때우고 있으려고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뼈마디가 다 시려서.”
에이, 저보다도 정정하신 분이 무슨 말씀을. 리비에르의 가벼운 농담에 둘은 깔깔 웃고 손을 털고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볼까요? 안녕히 들어가세요. 어린이집 문을 잠그고 이젠 쌀쌀하다 못해 손끝이 시린 퇴근길을 나서 리비에르와 헬렌은 각자 귀가했다.
‘크리스마스 축제….’
저녁이라고 하기엔 늦고, 밤이라 하기엔 약간 이른 시간에 리비에르는 소파에 앉아 달력을 넘기고 있었다. 어느새 올해의 끝이 다가오네. 감상에 젖으며 한 장, 한 장, 앞으로 넘겨 10월을 펼쳤다. 리비에르의 시선이 10월의 시작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카이멜을 처음 만났을 때도 이때쯤이었지. 이제 두 달 좀 넘었으려나?’
만난 지 오래 되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지만,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부쩍 친해져 있었다. 주중엔 둘 다 일로 바빴으니 주말에 약속을 잡는 것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목요일이나 금요일 즈음, 어떤 때는 리비에르가 먼저, 어떤 때는 카이멜이 문자를 보내 상대방의 일정을 묻고 장소를 정했다. 약속 장소는 주로 섬을 속속들이 아는 리비에르가 경치가 좋은 곳을 소개해주거나, 카이멜의 취향을 묻고 결정했다.
“크리스마스 축제도 상당히 볼만하단 말이지~ 그럼 물어나 볼까.”
리비에르가 전화를 집어 들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평소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아 전화가 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리비에르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아하. 하긴, 전화한 지 꽤 되었지.’
달력을 옆으로 치우며 리비에르는 편하게 소파에 다시 기대며 전화를 받았다. 네, 리비에르입니다~
“간만이다, 리비에르. 어째 전화가 이렇게 드무니? 이러다가 우리가 아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먹고 지내겠다.”
어머니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으며 리비에르는 픽 웃었다. 제가 뭘요, 라고 답하기엔 리비에르가 생각해도 전화를 안 한 지 꽤 되었기에 조금은 반성하며 가벼운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요즘 새로운 친구도 생겨서 좀 바빴어요. 다 잘 지내고 있죠?”
“우리야 잘 못 지낼 게 뭐가 있겠니. 너야말로 식사 제때 챙기고 있지? 그런데 새로운 친구라니, 최근에 누가 섬으로 이사 왔다니? 흔하지 않은 젊은이인가 보네.”
소소한 안부와 담소가 오갔고, 리비에르는 슬쩍 벽시계로 눈길을 줬다.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카이멜에게 문자를 보내 일정을 묻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전화가 길어질 것 같으니 내일 연락을 해야 할 듯 싶었다. 잠시 딴생각하던 리비에르는 어머니의 물음을 놓치고 말았다.
“네? 잠깐 딴생각하느라.”
“넌 어쩜 이리 변하지도 않고 한결같니. 혹시 다음 주에 휴가 낼 수 있나 물어봤단다. 올해는 대륙으로 나와서 우리와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건 어떠니?”
…아. 리비에르는 손을 뻗어 다시 달력을 집어 들고 날짜를 확인했다. 다음 주, 크리스마스. 축제와 완벽하게 겹치는 날이었다.
“혹시 그때 따로 일정이라도 있니? 아직 없으면 이쪽으로 놀려오렴. 말은 잘 안 해도 네 동생이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더라.”
“……없어요.”
한참을 고민하던 리비에르는 여동생 얘기에 끝내 승낙했다. 나이 터울이 많은 여동생을 거의 업어 키웠기에 리비에르는 동생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오랫동안 못 본 동생이 눈에 밟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축제는 내년에도 있고, 다음 기회는 있을 테니까. 아쉬운 마음은 여전했지만, 리비에르는 그리 결정했다.
“그래~ 그럼 배편 예약하고 시간을 알려주렴. 이쪽에서 기차표는 예약해둘 테니까.”
다음 주에 보자. 잘 자라. 좋은 밤 되세요~ 전화를 끊은 리비에르는 한참 폰을 만지작거리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많이 들떠있었나보다, 스스로를 위로하며 리비에르는 달력에 펜으로 동그라미를 쳐놓았다.
‘내일 원장님께 미리 휴가를 받을 수 있을지 물어봐야겠네. 왔다 갔다 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나흘이면 되려나.’
원장님도 알고 지내던 리비에르의 가족 소식에 반가워할 테지만, 어쩐지 조금은 실망한 눈빛이 벌써 보이는 것 같았다. 리비에르는 다시 한숨을 쉬고 소파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리비에르는 약간의 희망을 품고 커튼을 걷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앞이 한치 보이지 않는 새하얀 폭설이 리비에르를 맞이했다. 역시 틀린 건가, 리비에르는 실망스러운 얼굴로 커튼을 다시 닫고 방을 왔다 갔다 하며 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나마 지금은 전화라도 연결돼서 망정이지, 어제까지만 해도 전화도 먹통이라 가족과 연락이 안 돼 리비에르는 하루종일 전전긍긍 해야 했다. 눈이 무릎까지 쌓이는 바람에 모든 교통수단이 막혀 기차는커녕, 여관 밖으로 쉽게 나가지도 못했다.
“어머 어머, 이게 대체 웬일이라니.”
간신히 통신망이 복구되었을 때 리비에르는 곧바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예약해준 기차는 오늘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일정이 취소될 것이 뻔히 보였다. 눈을 뚫고 기차가 움직일 수 있다손 쳐도, 바퀴가 미끄러져 탈선하지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일기예보에 이 정도 규모의 폭설은 없었는데.”
“그러니까요. 그것 때문에 저 말고도 여기 발이 묶인 사람이 한둘이 아니던데요.”
“참 할 말이 없구나… 기차는 언제 다시 운행한다니?”
“모른대요. 그런데 지금 상황 봐선 일주일 안으로 다시 운행 시작하면 다행일 것 같은데요.”
리비에르는 잠시 뜸을 들였다 본론을 꺼냈다. 방 안에 리비에르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래도 이번엔 못 갈 것 같네요. 폭설이 기차가 움직이는 쪽으로 계속 올라가서… 그쪽으로 가기엔 좀 무리가 있을 것 같아요. 그나마 섬으로 돌아가는 항로는 하루 이틀이면 갠다니까 뱃길이 안전할 때 섬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고.”
“그래… 어쩔 수 없지. 많이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만나기로 하자. 돌아가는 길도 조심하고. 집에 도착하면 연락하렴.”
리비에르도 아쉽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자신이 티를 낸다면 어머니께서 더 신경 쓰실 게 분명했기에 부러 가벼운 말투로 인사했다. 네네, 그럼요. 그럼 다음에 봐요~
전화를 끊은 뒤 리비에르는 어린이집 원장 헬렌에게 며칠 늦을 수도 있다는 사정을 문자로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문자함을 다시 들어가 문자를 하나 보냈다.
「 어쩌다 보니 폭설에 갇혀서 엄청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됐네. 난 좀 많이 심심하니까 내 몫까지 크리스마스 축제를 즐기고 와줘~ 」
할 일도 없겠다, 리비에르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폰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리비에르에겐 다행히도 카이멜은 그리 바쁘지 않았는지 얼마 안 가 문자가 되돌아왔다.
「 안타깝게 되었군. 안전하게 돌아오고, 다음 약속 장소는 눈이 적은 곳으로 가는 건 어떤가? 」
얼핏 보기엔 엄청 엄격하고 깐깐해 보였지만 은근 다정한 면도 있단 말이지. 리비에르는 긍정의 답을 보내고 눈을 감았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리비에르가 섬으로 돌아온 것은 사흘 후였다. 이제 눈은 지긋지긋해, 입속으로 투덜대며 리비에르는 흔들리는 배에서 내렸다. 시간 날린 건 그렇다고 쳐도, 정말 할 일이 없어 심심해 죽을 것 같았다니까.
“그럴 것 같았지.”
익숙한 목소리에 리비에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두툼한 털모자와 코트에도 차마 다 가려지지 않는 붉은 머리는 하얀 겨울의 배경에도 퍽 인상적이었다. 카이멜이 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들어오는 배 시간이 이맘때쯤이길래, 한 번 들러봤지. 고생했네.”
“아, 진짜로. 근데 이렇게 마중 나와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그것참 감동적이네. 마침 줄 것도 있는데, 받고 진짜로 우는 건 아니겠지?”
농담조로 말하며 카이멜이 리비에르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리비에르가 갸웃,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자 투명한 비닐에 싸인 작은 핸드폰 줄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비닐에 붙은 로고를 보아하니 크리스마스 축제에서 사 온 기념품인 것 같았다. 작은 노란색 꽃봉오리들을 둘러싼 활짝 핀 푸른색 꽃잎이 어우러진 장식. 아, 이거.
“바다수국 장식이네?”
선물로 사 온 거야? 와, 세상에, 고마워! 난 아무것도 사 오지 못했는데. 리비에르가 호들갑을 떨며 장식을 받아들자 카이멜이 비식 웃었다. 그 폭설을 뚫고 뭘 사 오긴. 어차피 비싼 것도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네.
“그래도 그냥 받고 입 씻을 수만은 없잖아?”
리비에르는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난 듯 활짝 웃고 꽃장식을 흔들어 보였다.
“이거 좋은 보답이 생각났으니까. 기대하고 있어도 돼.”
작은 꽃이 겨울 햇살을 반사해 희미하게 반짝였다.
* * *
리비에르가 그 꽃장식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른 봄이었다.
3월 말, 이젠 날씨가 제법 풀려 눈이라곤 사람들이 밟지 않는 길가에 서리처럼 얇게 남아있는 하얀 흔적뿐이었다. 그간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주말에 만나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시간을 보냈지만, 리비에르는 선물로 받은 바다수국 장식에 대해선 말을 꺼내지 않았었다.
가끔 자신의 핸드폰에 달린 장식을 건드리며 미소짓기도 했지만 그뿐. 카이멜은 리비에르가 보답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마저 슬슬 잊어버리고 있었다.
“다음 주 토요일 저녁, 시간 내줄 수 있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음 주에도 만날 것 아니었던가?”
농담조의 말에 리비에르는 입가가 간질이게 웃었다. 아하하, 틀린 말은 아니지.
그들이 만나는 횟수가 늘수록 섬 주민들은 둘의 관계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뭐야, 진짜 사귀는 거 아니야?’ 어린이집의 원장 헬렌부터 시작해서, 단골인 슈퍼마켓 아저씨, 심지어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어머니들마저 둘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여간, 여기 사람들은 드라마라면 사족을 못 써서.
곤란한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리비에르는 빙글빙글 웃으며 화제를 돌리는 화술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카이멜은 어떻게 대처했으려나? 카이멜이나 리비에르나, 그 주제에 대해선 서로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알 길이 없었지만, 리비에르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다음 주엔 뭘 하고 싶은 건데?”
카이멜의 질문에 리비에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던 생각을 끊었다. 아차, 일정 잡던 중이었지.
“그건 아직 비밀. 그럼 토요일 광장에서 만나서 저녁을 먹고 그 후에 알려줄게. 조금 늦게 집에 들어가도 괜찮지?”
늦게? 그 시간에 열리는 이벤트라도 있나? 카이멜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지만, 리비에르는 고집스럽게 답해주지 않았다. 비밀은 비밀이어야 재밌겠지? 카이멜은 그 후로 리비에르를 몇 번 더 찔러보다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리비에르는 킥킥 웃다가 힌트를 하나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 장식 있잖아, 크리스마스 때 나한테 선물해준 거. 잘 쓰고 있어.”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리비에르는 그저 미소지으며 과일 칵테일을 홀짝였다.
다가온 토요일 저녁의 날씨는 청명했다. 주황색의 노을이 수평선에 보이는 바다마저 진하게 물들인 날이었다. 리비에르와 카이멜은 저녁으로 이태리 식당에서 연어 샐러드를 곁들인 크림 파스타를 시키고, 디저트로 노릇하게 설탕을 녹여낸 크렘 브륄레까지 먹고 일어섰다.
“그럼 가볼까?”
“그러지.”
각자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며 카이멜은 다시 한번 어디로 가느냐 물었지만, 리비에르는 의뭉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길만 안내할 뿐이었다.
식당을 나서, 언제나 그렇듯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주택가로 가는 버스도, 해안가로 가는 버스도 아닌, 섬 동쪽의 관광지로 가는 버스를 타자 카이멜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리비에르를 따랐다. 버스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어느 정도 달렸을까, 한적한 정류장에 내렸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둡게 변해가고 있었다.
자갈이 깔린 작은 산책길을 따라 언덕길을 오르고, 오르고. 그렇게 리비에르와 카이멜이 다다른 곳은 작은 화원이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벽 안쪽이 싱그러운 녹색으로 비쳐 보였다. 화원 바깥에도 작은 정원이 꾸며져 있었으며 군데군데 휴식을 위한 의자와 파라솔이 눈에 띄었다.
“예쁘지? 네가 겨울에 이사 오는 바람에 아직 이곳에 올 기회가 없었네. 여긴 지금부터가 절경이라. 이 섬에서만 볼 수 있는 꽃이 여기서 피거든.”
그래서 관광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연인들의 정석적인 데이트 코스이기도 하지만. 분위기가 괜히 어색해질 것 같아 마지막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등불이 은은하게 켜진 화원의 안쪽, 천장마저 유리로 되어있어 아마 낮에는 볕이 가장 잘 들 장소. 조금만 기다리면 달빛이 대신 광채를 비출만한 곳. 그곳에서 꽃이 빛나고 있었다.
“…밤인데, 꽃이 이렇게 선명하게 보인다고?”
생각보다 많이 놀랐는지, 카이멜은 꽃 근처로 다가가 손을 뻗었음에도 선뜻 만지지 못하고 있었다. 별 가루를 뿌린 것처럼 가운데에는 작은 노란색의 꽃봉오리가 반짝이고 있었으며, 그 주변을 둘러싼 푸른 꽃잎은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것이 푸른 달과도 같았다. 카이멜은 깨달았다. 아, 이 꽃은.
“바다수국. 이름 기억하고 있으려나? 혹시 크리스마스 축제에서 장식 살 때 이 꽃에 대해서 설명 들은 적 있어?”
“하도 사람이 붐비고 있어서 사실 판매대도 제대로 볼 틈이 없었다만….”
“그렇구나. 어쩌면 여기 사람들은 이 꽃에 대해서 다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해줄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 아까 말했지? 이 섬에서만 나는 꽃이라고. 그만큼 여기 주민 중에선 이 꽃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
리비에르는 손을 뻗어 근처에 예쁘게 리본으로 묶인 바다수국 꽃다발 하나를 들어 카이멜에게 건넸다. 만져봐도 괜찮아. 여기 있는 꽃은 마음껏 구경하라고 가져다 놓은 꽃이거든. 카이멜은 그 말에 리비에르에게서 꽃다발을 받아들고 가까이서 바다수국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종류의 수국은 보통 여름, 가을쯤 피잖아? 여기 바다수국은 이른 봄에만 피고, 여름이 가기 전에 져. 그것만으로도 희귀종이라 볼 수 있는데, 밤이 되면 빛나는 이 특이한 체질 때문에 거의 환상종 아니냐고도 했었지. 섬의 토질이 특이해서 그런 건가? 내 전공은 그쪽이 아니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열띤채로 설명을 이어가는 리비에르를 카이멜이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황금색 눈동자 안에 별이 헤엄치고 있는 것만 같아, 리비에르는 잠시 숨을 멈췄다.
“정말 신비하고 아름답네. 장식의 몇 배로 보답받은 기분이군. 데려와 줘서 고마워.”
바다수국 위로 미려한 웃음이 번졌다. 여린 달이 떠오른 밤하늘 아래, 유리 벽 안으로 엷은 은색 월광이 장막처럼 둘 사이로 내려앉았다.
별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 * *
6월 11일, 목요일. 리비에르는 달력을 다시 확인했다. 11일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빨간 펜을 손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리비에르는 저번 주, 카이멜이 꺼냈던 말을 떠올렸다.
“11일 저녁까지 학교 행사가 있어서 12일이 지정 휴일이라고 하는데, 바쁘지 않으면 목요일 조금 늦게라도 저녁을 같이하지 않겠나?”
“6시 이후이기만 하면 난 괜찮은데, 주말도 아니고 갑자기? 그날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어?”
주중에 만나는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리비에르나 카이멜이나 여유롭게 일정을 잡을 만큼 일이 일찍 끝나진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주말에 약속을 잡는 편이었다. 때문에 리비에르는 긍정의 답을 주면서도 고개를 갸웃 기울여 물어봤다.
“글쎄, 특별하다고 해야 할까? 어젯밤 문득 떠올라, 내가 이 섬에 온 지 얼마나 지났는지 확인해보니 11일이 딱 250일이 되는 날이지 뭔가.”
“그래? 와, 세월 엄청 빠르다. 확실히 기념할만한 날이네. 그럼 시간 여유롭게 잡아서 7시반쯤 어때? 광장의 분수 앞에서 보자.”
……250일. 리비에르는 작년에 쓰던 달력을 찾아 10월로 넘겼다. 잠시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하던 리비에르는 10월 5일에 6월 11일과 마찬가지로 빨간색 동그라미를 쳤다.
Day 1. 카이멜을 처음 만난 날이었다.
250일. 카이멜이 이 섬에 온 지 250일. 내일이 되면 리비에르가 카이멜을 만난 지 딱 250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 250일 동안, 참 많이도 웃고, 벅차게 즐거웠지.’
첫 만남은 우연이었고, 그다음은 순수한 호기심에 다가갔었다. 그렇게 한번, 두 번 만남을 이어가다 이제는 별다른 약속 없이도 주말은 서로에게 배정되었다 여기게 되었다. 가랑비가 옷에, 마음에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스며들듯, 어느새 너는 내 일상에 이렇게 스며들게 되었는가.
어느새, 이제는 네가 없는 내 삶을 상상할 수조차 없게 되었는가.
…어느새, 너를 향한 이 감정이, 더 애틋한 무언가로 바뀌게 된 것일까.
하늘에 구름이 먹먹하게 끼어있었다. 리비에르는 점차 짙은 회색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걱정스레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세차게 머리카락을 헝클이고 가는 것이, 태풍이라도 불려나 싶었다.
‘비 예고는 없었는데.’
그러나 섬 날씨가 변덕스러운 것이 하루 이틀이었던가. 옆에서 아이들이 놀아달라 칭얼대는 것을 적당히 안아서 달래며 리비에르는 다시 하늘에 시선을 주었다. 기분 탓인지 조금 더 어두워진 것만 같았다. 퇴근할 때쯤이면 조금 나아지지 않으려나, 희망을 품으며 리비에르는 펄럭이는 커튼을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그러나 희망과 달리, 6시가 지나 아이들이 하나둘, 부모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음에도 하늘은 더 어두워졌으면 어두워졌지, 개지는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마틸다를 보내고, 헬렌 역시 날씨가 심상치 않은 걸 느꼈는지 리비에르의 등을 떠밀었다.
“아무래도 비가 세게 내릴 것 같은데, 자칫 버스 끊기기 전에 집에 가요. 정리는 내일 해도 괜찮으니까요.”
덕분에 리비에르는 예상했던 시각보다 이르게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6시 44분. 광장 시계탑의 바늘이 째깍째깍,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리비에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날씨 탓이었는지 평소보다 한산했다. 이때쯤이면 퇴근하는 사람들, 저녁 약속이 있는 사람들, 그저 놀러 나온 사람들이 모여 북적여야 했을 터였다.
리비에르는 주머니 안에 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잠잠한 거로 봐선 카이멜에게 연락은 없는 모양이었다.
“…약속을 다른 날로 미뤄야 하나.”
아직 아쉬운 마음에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점점 바람이 물기를 머금어 가는 것이 불길한 기분이 들어, 이윽고 리비에르는 폰을 꺼내 들고 카이멜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당장 약속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문자보단 전화가 빠를 터였다.
‘………어?’
전화 너머가 잠잠했다. 리비에르는 영문을 모른 표정으로 폰을 귀에서 떼고 화면을 바라봤다. 아예 수신이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하필 이럴 때….”
날씨가 변덕스러운 만큼 기후도 때로 불안정한 섬이었고,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비가 많이 내린다 싶을 땐 가끔 전화가 먹통이 되는 일도 있었다. 예상할 수 있었던 말썽이지만, 이때만큼 반갑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한 번 더 통화를 시도해본 리비에르는 타는 마음에 시계탑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6시 58분.
차라리 카이멜의 학교로 바로 찾아갈까? 뜬금없이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괜찮은 것 같았다. 어차피 자신이 연락이 안 된다면, 카이멜 역시 리비에르에게 연락할 방도도 없을 테고, 괜히 서로 헤매다 엇갈리는 일을 만들자니 시간이 남아도는 자신이 그쪽으로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카이멜의 학교가 여기서 버스로 두 정류장이었던가?
리비에르는 발걸음을 옮겼다.
시계탑의 초침이 움직였다.
…58, 59.
---왜앵, 왜앵, 왜앵!!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시계 종 소리를 묻어버렸다. 순간 리비에르는 멍하니, 우왕좌왕 소란스러워진 사람들 사이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러나 어릴 때부터 섬에서 자라와 교육받아온 리비에르의 머리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해일 사이렌.
사이렌이 뜻하는 재앙을 깨달은 건 리비에르만이 아니었던지, 사람들의 표정이 급격히 공포에 질려갔다. 비바람도, 때론 폭설도, 태풍도 이 섬에서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해일은 리비에르도 한 번밖에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때가 7살이었었나? 아버지의 손을 잡고 대피소로 몸을 피했던 기억이 남아있었다. 당시 큰 피해가 없었던 것이 기적이었다는 얘기도.
리비에르는 사람들을 따라 무의식적으로 대피소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다가 멈칫했다.
‘…카이멜은?’
카이멜이 해일 대피소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까? 높은 확률로 모를 것이었다. 섬에 오래 산 사람 중에도 대피소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이가 간혹 있었다. 하물며 카이멜은 이곳에 온 지 250일밖에 안 되지 않았던가. 운이 좋으면 같이 있던 사람들을 따라갈 수도 있겠지만. 혹시, 혹시 근처에 아무도 없다면?
시간은 아직 있을터였다. 아직 있어야 했다.
리비에르는 버스 정류장에 눈길을 주고,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지금 버스를 잡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버스가 언제 올지도 모르거니와, 이 상황에 제대로 된 운행을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반대 방향에서 몰려오는 인파를 헤치고, 분수대를 지나쳐, 길목 사이사이로 숨 가쁘게 뛰었다.
이렇게 여유가 없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마음이 급박해 본 적도 없었을 것이었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리비에르의 귀에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멈춰선 리비에르의 시선이 옆에 작은 골목길로 향했다. 그곳에서 주저앉아 울고있는 아이는, 리비에르 자신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마틸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퇴근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신나게 집에 갈 때였는데, 왜 마틸다가 이곳에 있는 거지? 리비에르가 채 의문을 품기도 전에, 익숙한 얼굴을 알아본 마틸다가 울며 리비에르에게 다가와 매달렸다. 서럽게 우는 마틸다를 안아 올려 등을 쓸어주며, 리비에르는 숨을 고르고 물었다.
“마틸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어디 계시니?”
엄마… 손… 분수… 울음으로 뭉개진 발음을 리비에르는 간신히 조합해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인파에 쓸려 분수 근처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치고, 길을 헤매다 어쩌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된 모양이었다.
리비에르는 마틸다를 안은 채로 다시 분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급한 마음은 급한 마음이었지만, 울고 있는 마틸다를, 특히 이런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아이였어도 당연히 도왔겠지만, 매일 얼굴을 보며 부쩍 친밀해진 아이라면 더더욱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다행히, 마틸다의 어머니를 찾는 데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사람들이 전부 대피소로 피신했는지, 광장에 남아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패닉 상태에 빠진 채로 마틸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던 여인은 리비에르와 마틸다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뛰어왔다. 마틸다를 받아, 안아 드는 얼굴이 흐르는 눈물로 젖어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리비에르 선생님. 마틸다, 어디…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리비에르 선생님도 어서 피하세요. 지금 버스도 다 끊겨서 서두르지 않으면 진짜 큰일 나요.”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카이멜이 대피소의 위치를 모를 것 같아서, 카이멜부터 찾아서 가려고요.”
카이멜… 카이멜 시레노바 씨요? 마틸다의 어머니가 잠시 이름을 곱씹다가 다급해진 얼굴로 리비에르의 팔을 붙잡았다.
“리비에르 선생님, 카이멜 씨가 혹시 학교에 계셨다면 그쪽으로 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학교 부근으로 가는 길은 이미 물에 잠겨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학교에 계셨다면 다른 선생님들도 같이 있었을 테니, 대피소로 무사히 갔을 거에요. 지금 그쪽으로 가는 건 자살이나 다름없어요. 무엇보다 가까운 대피소하고도 반대편이잖아요. 어찌어찌 학교로 무사히 가신다고 해도, 절대 제시간에 대피소까지 돌아올 수 없어요.”
리비에르는 갈등에 잠긴 표정으로 망설였다. 마틸다의 어머니는 리비에르의 팔을 다시 잡아끌었다.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학교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던 리비에르는 멈칫했다.
어두운 파도가 수평선을 삼키고 있었다. 고도가 낮은 지역은 이미 잠겼다 봐도 맞을 터였다. 마틸다 어머니의 말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간다 해도 사나운 물길에 발걸음이 막힐 터였다.
선택지가 없었다. 타는 마음을 뒤로하고, 리비에르는 모녀를 따라 대피소로 걸음을 옮겼다.
…무사할 거야. 무사해야 해. 리비에르는 간절히 기도했다.
* * *
……이럴 리 없어.
대피소에서도 물어물어 카이멜의 행방을 찾았지만, 섬 인구의 절반이 모인 비좁은 공간에서 특정 사람을 찾기엔 어려움이 있었기에,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리비에르였다. 불행 중 다행히도 아침이 밝아오자 바다는 비교적 잠잠해져, 큰 문제 없이 대피소를 나설 수 있었다. 리비에르는 급한 발걸음으로 학교 근처에 있는 다른 대피소로 향했다.
……이건, 아니야.
사람을 찾는 이는 리비에르 혼자뿐이 아니었다. 애타는 표정을 지으며 어딘가로 급박하게 뛰어가는 사람들, 찾고 있던 이들을 안고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 …원하지 않던 소식을 들었는지, 망연자실한 채로 주저앉아있는 사람들. 대피소에 다다를 때까지, 리비에르의 불안한 마음은 커져만 갔다.
……이럴 수 있을 리, 없어.
타는 듯한 붉은색의 머리카락은 그곳에 없었다.
리비에르는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혹시 카이멜 본 적 있으세요? 고등학교 선생님들 행방 아는 사람 있나요? 10분, 20분. 리비에르는 지쳐가는 줄도 모르고 대피소 내부를 헤맸다. 대피소가 거의 비워질 때쯤에서야 리비에르는 원하는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선생님들이요? 선생님들은 왜… 아, 리비에르 씨.”
몹시 지쳐 보이는 한 남성이 리비에르의 얼굴을 알아보고 말을 흐렸다. 리비에르는 직감했다. 자신이 찾던 소식을, 이 사람은 알고 있다. 리비에르는 답을 재촉했다. 인내심도, 이성도 끊기기 직전이었다.
“카이멜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요?”
답을 망설이며 우물쭈물하던 남성을 붙잡고 다그치던 리비에르의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비에르 씨…. 일단, 절 따라오셔야 할 것 같아요.”
리비에르는 돌아보았다. 고등학교의 원장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이게 현실이라면. 나는……
너에게 어떤 색이라도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네 얼굴을 덮은 하얀 천이 그토록 어색하고 안 어울릴 수 없었다.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바로 아이들을 대피시켰어요.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할 만도 했지만, 시레노바 선생님은 그 누구보다 침착했고…. 그런데, 아이 중 한 명이 낙오되어, 다시 데리러 간 시레노바 선생님은…….”
차라리 착각이었으면 했다. 그러나 네 아름다운 그 붉은 머리는, 그 다른 누구와도 착각할 수 없었다.
“정말… 정말 용감했어요. 제 몸 사리지 않고 아이를 위해 뛰어든 그 행동은. 정말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었어요….”
안타까움에, 슬픔에 말을 흐리는 원장에게 리비에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복잡하고도 원시적인 감정이 머릿속에서, 가슴에서 휘몰아치고 있어 제대로 나열된 단어 하나조차 소리로 꺼낼 수 없었다.
그래,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네가 했을 생각쯤이야, 행동쯤이야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올곧던 너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영광된 빛으로 뛰어들었겠지.
그러나 그 영광이 나에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네 영광의 뒷자리에 남겨진 나는 이제 어찌해야 할까.
“……내가 잘못했어.”
내가 조금 더 일찍 너에게 닿을 수 있었더라면. 너를 붙잡을 수 있었더라면.
무언가라도, 아주 작은 무언가라도 바뀌지 않았을까.
이 비극에 자신의 잘못은 없었다 해도, 자신의 죄로 돌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슬퍼만하기엔, 네 죽음에 애도만 하기엔, 이 흘러넘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차라리 내 죄라고,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참회하고 싶었다.
차라리 나를 대신 데려가라고, 그 어떤 신에게라도, 악마에게라도 빌고 싶었다.
잃은 뒤에서야 깨닫게 되는 사랑은, 너무나도 애달파 마음이 저려, 눈물조차 날 수 없는 서글픔이 아닌가.
…며칠이 지났을까.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든, 그것이 리비에르에게 의미가 있었을까.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는 말은 이때의 리비에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리비에르는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통신이 간신히 복구된 후, 재난소식을 들은 가족이 발을 동동 구르며 리비에르에게 연락을 해왔지만, 리비에르는 핸드폰에 달린 바다수국 장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릴 듯 저려왔기에, 자신의 생존을 알리는 문자 하나만 보내놓고 배터리가 다 죽을 때까지 폰을 방치했다.
죄책감이 약간 들기도 했지만, 리비에르는 자신의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다른 이들까지 챙길 겨를이 없었다.
집안에만 박혀있다가, 견딜 수 없이 가슴이 답답해지면 닥치는 대로 가방에 물건을 쓸어 담고 나와 방황하고. 그것을 반복하기를 몇 번째.
리비에르는 다시 광장에 다다랐다. 하얀 벽돌길에 물때가 묻어 회색으로 얼룩져있었다. 광장의 가게도 반파된 곳이 다수였으며, 섬의 자랑이었던 분수와 시계탑조차 무사하지 못했다.
그 후로 멈춰버린 시간. 차라리 멈춰버렸으면 하는 시간을 시계탑은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카이멜을 처음 만난 곳도 이곳이었지.
리비에르는 부서진 분수대의 잔해 위에 걸터앉아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이제 어찌해야 하나.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째깍, 째깍.
고요한 광장에서, 들릴 리 없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리비에르의 공황을 깨뜨렸다.
저 부서진 시계탑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닐 테고, 이게 대체 어디서 들려오는 초침일까. 그리 생각하던 리비에르는 문득 무언가 기억나, 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리비에르가 꺼낸 것은 작은 보석이 하나 빠진, 푸른 다이얼의 손목시계였다.
“……아, 이건.”
그때, 그 책방에서 사 온 시계였지. 그 가게는 무사하려나. 거창하게 ‘마술사의 책방’이란 이름까지 달고 있었는데, 마법처럼 무사하지 않을까. 그런 실 없는 생각을 하다 리비에르의 기억은 한 아이에게 읽어주었던 어떤 동화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려냈다.
“…왕과 백성, 마법사는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마법사와 별시계 이야기. 그런 제목이었던가. 시간을 돌리고 돌려, 천재지변을 피할 수 있었던 왕은,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했었다.
그렇기에 동화였다. 현실은 이토록 잔인했기에.
리비에르는 파리한 손에 시계를 꾹 쥐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이 천재지변이 일어나기 전으로, 모든 것을 돌릴 수만 있다면.
너를 처음 만났던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리비에르는 천천히, 시계의 초침을 거꾸로 돌렸다.
2시… 1시… 12시….
……7시.
…그것은, 언젠가의 만남이었을까.
“안녕, 리비에르라고 해. 이제부터 서로 지겨울 만큼 보면서 지낼 테니까 잘 부탁해~”
“그래. 카이멜이라고 하네. 피차 마찬가지니 서로 원만하게 지내도록 하지.”
파리한 손을 뻗어 내밀었다. 상대방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틀림없이 웃고 있었다. 단단한 힘을 가진 손이 자신의 손을 붙잡았다.
리비에르는 맞잡은 손을 통해 전해져오는 그 온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첫 번째 시계가 돌아갔다.
Written 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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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로그의 그림은 하리(@hariii015)님의 커미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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