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테] 시작

어쩌면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 지명 및 이름을 원작에 맞춰 사용했지만, 필자가 더빙판을 본 관계로 호칭 등이 원작과 다를 수 있음

※ 설정 날조 주의

스포일러 주의 (최종장 이후의 시점)

"어서 오세… 아니, 이게 누구야."

여느 날과 다름없이, 컬러풀에 들어온 손님을 향해 인사를 건네던 야츠데는 손님으로 들어온 이들을 보며 반가운 마음을 가득 담아 환하게 미소를 그렸다.

"다녀왔습니다. 할머니."

야츠데의 미소에 답하듯, 쥬란을 선두로 야츠데에게 인사를 건넸고 가온은 인사를 건네다 못해 반가운 마음을 가득 담아 야츠데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제 품에 안겨들어 온 온기를 다독이며 야츠데는 두 눈으로 천천히 쥬란과, 마지느, 브룬, 그리고 제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며 재잘거리는 셋짱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가득 담아냈다. 그러다 문뜩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가온의 어깨를 잡아 살짝 밀어내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카이토는?"

"아… 카이토 말이야."

"그게 말이죠…. 빙하 월드에 갔는데, 갑자기 스테이시한테 볼일이 있다면서 기계토피아로 갔습니다."

"응. 그래서 카이토짱 없이 평행 세계를 구경하고 싶진 않아서 카이토가 돌아올 때까지 컬러풀에 왔어요!"

"그렇구나. 어서들 오렴. 오랜만에 왔으니 컬러풀 파르페 하나씩 먹고 계속 이야기하자꾸나."

4개월 만에 다시 만난 컬러풀 파르페에 다들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야츠데는 웃음을 터트리며 주방으로 갔고, 그럼, 제가 도와줄게요. 할머니! 라는 말을 외치며 가온이 그 뒤를 따라갔다. 주방으로 사라진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쥬란은 곧 시선을 돌려 컬러풀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카이토를 따라 평행 세계를 여행 한 지 4 개월, 누군가에게는 짧은 시간일 수 있지만, 근 1년 가까이 머물던 곳을 떠나 지내서 그런가? 굉장히 오랜만에 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느낀 가진 건 쥬란 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오랜만에 온 느낌이네요."

"느늣. 그런 느낌이 들어. 근데 하나도 변한 게 없어서 편안한 곳에 온 기분이야."

"솔직히 말해서, 컬러풀이 우리의 고향 집 아니겠어?"

이곳에서 우리의 인생이 다시 시작되었으니까. 어느 세계를 돌아도, 어떤 세계에 가도 결국 자신들이 마지막으로 돌아올 곳은 컬러풀, 이곳이었다.


조크스와 플린트에게 추천받은 세계를 가기도 하고 끌리는 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하고, 그러면서 그들은 빙하 월드에 도착하게 되었다. 얼떨결에 도착한 이 세계에서 카이토는 문뜩 스테이시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그땐 눈이 세차게 몰아쳤는데 오늘은 눈이 안오네. 감상도 잠시, 몰아치는 추위는 방한 용품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카이토에게 매서운 추위를 선물했고, 추위는 곧 생각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러다 얼어죽겠어!'

추위에 바들바들 떨어 얼어가고 있는 카이토 일행을 주민들이 발견해서 다행이였지 안그랬으면 전부 눈사람이 될 뻔 했다. 따스하게 옷을 챙겨입고 몸을 녹힌 카이토 일행은 본격적으로 빙하 월드를 제대로 구경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의 추천에 따라 스키도 타고 눈사람도 만들었고 저녁에는 빙하 월드의 특산품을 만들었다. 

다음날에는 눈싸움을 했고 눈 밭에 누워 밤하늘을 가득 메운 오로라를 실컷 구경하다, 몸을 녹이기 위해 근처 카페로 들어왔다. 언 몸을 핫초코로 녹이는 중, 카이토는 다시금 스테이시를 떠올렸다. 자신의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여러 평행 세계를 둘러보던 중, 이 빙하 월드에서 스테이시를 마주했다. 자신도 스테이시도 같은 목적을 상대보다 빠르게 이루어야 했기에 둘 다 평행 세계에 어떤 것이 있는지 둘러볼 여유가 있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서두룰 이유도, 이 세계를 둘러보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정말 실컷 즐기고, 알아가며 즐거움을 가득 채웠지만, 이 자리에 스테이시는 없었다. 그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잔뜩 들뜨고 흥분되었던 감정이 코코아의 끝맛처럼 쌉쌀하게 식어갔다. 같이 즐겼으면 좋았을 텐데….

"어?"

지금이라고 같이 즐기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문뜩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에 카이토는 그대로 머그잔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우뚝 선 카이토를 보며 가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무슨 일이 있냐며 카이토에게 다가갔다.

"얘들아! 나 스테이시를 만나고 올게. 먼저 먼저 여행하고 있어!"

"갑자기? 야 잠시만! 카이토!"

총알처럼 튀어 나가는 카이토를 겨우겨우 마지느의 마법으로 부여잡아 세웠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쥬란은 이마를 짚었다.

"알았어. 대신 너 없이 우리도 여행 다니기 싫어. 그러니 컬러풀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다들- 고마워. 그럼 다녀올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진 알 순 없었지만, 환하게 웃으며 폴짝폴짝 뛰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니 아무렴 좋은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셋짱의 도움으로 열린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는 카이토를 지켜보던 쥬란, 가온, 마지느, 브룬은 곧 셋짱과 함께 젠카이자 세계로 넘어갔다. 


게이트를 넘어서 카이토가 기계토피아에 도착하자, 기계노이드들은 금방 세상을 구한 영웅 젠카이자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카이토에게 달려왔다. 자신에게 거의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기계노이드에 놀란 카이토가 무의식적으로 방어 태세로 두 손을 들어 제 몸을 막아섰다. 그리고 그 손을 한 기계노이드가 덥석 붙잡았다.

"젠카이자!"

"네에,네?!"

"스테이시씨를 도와주세요!"

"네에-?"

그 말을 시작으로 기다렸다는 듯 주변에 있는 기계노이드들이 일제히 말을 하기 시작했지만, 여러 기계노이드들이 동시에 말하다 보니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카이토는 일단 기계노이드들을 진정시키며 주변을 조용히 시키고 제 손을 잡은 기계노이드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지 천천히 설명해 줄 수 있어?"

"아, 네네. 그게 사실은 ..."

기계노이드는 자신의 두 손을 꼭 모아 잡은 뒤 심호흡을 한 뒤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저희 기계토피아에 학교를 지으려고 모두가 힘을 보태고 있어요. 많은 논의 끝에 이지루데가 사용하던 별장을 학교로 사용하려고 해요. 근데 그 별장 안을 제대로 아는 기계노이드가 없어요. 스테이시씨는 혹시라도 모를 위험과 그로 인해 아이들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혼자 별장 안을 조사를 하러 갔어요. 혼자 조사하기엔 별장이 너무 크고, 위험하기도 해서 저희가 도와드리겠다고 했는데…. 자신이 이 별장을 학교로 사용하겠다고 결정했다면서 막아섰어요…. 저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젠카이자! 제발 스테이시씨를 도와주세요!"

절실한 말투 뒤로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계노이드를 보며 카이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느리게 깜빡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이 곳의 기계노이드들도 스테이시가 착하고 상냥한 사람인걸 알고 있다. 아, 이 사실을 스테이시가 알까? 제 일이 아니지만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스함을 가득 차올랐다.

"응. 나만 믿으라고"

전력으로 스테이시를 도와줄게.

어느새 스테이시에 대한 걱정으로 자신을 보던 기계노이드가 제 주변에 가득 모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토는 수많은 기계노이드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기계노이드들이 알려준 이지루데의 별장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지루데가 카이토의 부모님을 납치하기 전까지만해도 이지루데의 본거지는 토지텐드 팰리스가 아니라 이 별장이었다. 사실 이지루데가 토지텐드의 최고 간부가 된 건 카이토의 부모님의 기술을 빼앗아 토지루 기어를 만들었을 때였다. 최고 간부가 된 이후 전용 실험실이 생긴 이지루데는 어느 날, 제 별장에 들어가 무언가를 하더니 곧 그대로 자신의 별장을 걸어 잠궜고, 혹시라도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별장 근처에 접근하면 가차 없이 죽여버렸다. 몇몇 기계노이드가 어지루데의 손에 죽고 난 뒤에 별장은 기계노이드들에게 두려움의 장소가 되었고 그 누구도 별장 가까이 가지 않게 되어 그 별장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기계노이드가 별장 청소를 하러 들어갔다 살아 도망쳤고, 그 기계노이드에 의해 어지루테의 별장에 기계토피아의 모든 책들이 가득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소문이 기계토피아 전체에 퍼졌을 때쯤 그 청소부를 다시 봤던 기계노이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스테이시는 조용히 팔짱을 낀 채 고고하게 서 있는 고풍스러운 별장을 바라보았다. 카이토가 갇혀있던 모든 평행 세계를 해방한 뒤, 기계토피아에는 교육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억압된 사회속에서 제대로 된 배움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기계노이드들은 왕국의 멸망 이후 불어오는 교육의 물결 속에 하루하루 성장해 갔지만, 학교는 커녕 교육이라는 시스템 자체도 없던 기계토피아는 곧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급한 대로 선생님들과 함께 학교 월드와 젠카이자 월드를 참고하여 초등교육 체계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사방이 뻥 뚫린 곳에서 그저 책상과 선반에 꽂힌 몇 가지 책으로 학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곳에는 학교 월드나 젠카이자 월드에서 봤던 것처럼 안전한 학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스테이시는 앞으로 이 세계에서 자라날 애들과 살아갈 사람들에게 안전하게 배울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첫 학교라는 존재에 많은 이들이 수많은 후보지가 나왔고 치열한 토론이 이어졌고 쟁쟁한 후보지 속에서 스테이시가 처음부터 주장한 이지루데의 별장이 결국 최종 학교 후보지로 결정되었다. 결정에 따라, 스테이시는 최종 후보지가 안전한지, 안전하지 않다면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스테이시는 기어를 기어토징거에 끼웠다. 손잡이를 잡고 기어토징거를 돌리려는 순간―

"스테이시!"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스테이시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손을 붕붕 흔들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존재는 자신이 예상한 그 사람이 맞았다. 왜 네가 여기에?

"헉헉…. 와 여기 생각보다 머네."

제 앞에 멈춰 서며 숨을 고르는 카이토를 보며 스테이시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분명 한 달 전, 컬러풀에 갔을 때 늘 있는 카이토와, 기계노이드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에 야츠데에게 그들의 행방을 묻기도 전에, 야츠데는 카이토가 자신에게 편지를 한 통 남겼다며 편지를 건네주었다. 백색의 봉투에는 젠카이자를 상징하는 7개의 빛깔의 무지개가 포인트로 그려져 있었다. 편지봉투를 열고 안에 있는 편지를 꺼내자,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단정한 글씨체로 쓰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 스테이시

나랑 쥬란, 가온, 마지느, 브룬 그리고 셋짱까지! 우리는 이 세계에 수많은 평행 세계를 여행하러 떠나려고 해. 떠나기 전에 너한테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네가 다른 월드에 있다고 해서 편지를 써서 할머니한테 맡겨. 다음번에 다 같이 놀러 갈게. 그때까지 건강해!

추신, 언제나 응원해! 쉬면서 일해.

카이토가.

다른 세계라면, 학교 월드에 있었을 때 온 건가. 스테이시는 편지를 읽는 내내 이유 모를 짜증 섞인 섭섭함에 얼굴이 굳어갔다. 냉랭한 표정의 스테이시를 보며 야츠데가 걱정스럽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봤지만, 스테이시는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애써 만든 웃음과 함께 아닙니다. 아무것도, 라는 말을 하며 편지를 그대로 접어 제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기계토피아로 돌아온 스테이시는 팰리스 한 쪽에 대충 만든 집무실의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아 턱을 괸 채, 주머니 안에 있는 편지를 꺼내 읽었다. 지극히 평범한 내용을 담고 있는 편지에 왜 섭섭함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걸까. 편지를 던지듯 책상 위에 올리며 스테이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감정에 초조함을 느끼며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기 시작했다. 나를 빼고 여행을 가서? 아니, 애초에 현재 본인의 입장을 고려하면 여행을 다닐 처지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떠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편지 쓸 시간에 좀 기다리던가, 다시 한번 더 와서 얼굴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런걸 생각할 틈도 없이 평행 세계 여행을 하는데 꽂혀서 뒤도 안 보고 달려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잠시만.

턱에 있던 손을 풀고 천천히 허리를 세운 스테이시는 책상 위에 대충 던져둔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지금 저 녀석이 얼굴도 비추지 않고 편지로 떠난다는 말해서 짜증을 내며 섭섭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내가? 왜? 라는 의문에 제대로 답을 내리기도 전에 자신을 부르는 기계노이드에 의해 스테이시의 시선은 편지에서 기계노이드로 옮겨졌다. 

'스테이시씨, 저번 회의 때 최종적으로 결정된 교육과정을 정리한 자료를 드립니다.'

'아, 고마워.'

토지텐드가 사라졌지만, 기계토피아에게는 아직 해결하고, 발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암묵적으로 어쩌면 공식적으로 이 세계의 수장인 된 스테이시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고민할 시간적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편지는 지금 이 순간, 카이토를 만나기전까지 스테이시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힌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등장한 카이토로 인해 잊고 있었던 질문의 대한 답을 찾는 생각이 기억 한 켠에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와 같이 여전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할 정도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너, 평행 세계 여행은 어디에다 두고 여기 있는 거야?"

"아, 그게 말하자면 좀 길어. 일단 이 별장 탐색이 더 급한 것 같으니까 이것부터 하고 이야기해 줄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기계토피아에 도착하자마자 기계노이드들이 나한테 이야기해 줬어. 다들 널 엄청 걱정하고 있었어. 내가 그걸 다 느낄 정도였다니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입술과 그 위에 자리 잡은 눈동자를 살짝 접으며 미소인듯하면서도 웃음 같은― 표정을 그리며 카이토는 스테이시의 눈을 바라 보았다. 기계노이드들이 걱정을 해줬다는 사실이 조금 신경은 쓰였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신경 쓰이고 시선이 가는 건 자신을 바라 보고 있는 카이토였다. 항상 이런 식으로 카이토가 그려내는 웃음에 자신은 늘 쉽게 무너지고 바스러졌다. 정말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다 못해 가루가 되어, 날카로운 말을 내뱉으며 도망치지 않으면 바라시타라를 뛰어넘겠다는 일념 하나로 뭉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 만 같았다. 그러나 바라시타라가 없어진 지금은 조금 더 다른 의미로― 자신의 존재가 사라질 것 만 같았다. 저 표정 아래, 자신이 아닌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지금처럼 둘만 있을 때는 더욱더, 손 쓸 틈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스테이시는 마주하던 시선을 돌리다 못해 몸까지 돌린 채 별장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쓸 장소야. 꼼꼼하게 확인해야 해."

"물론이지! 근데 왜 이곳을 학교로 정한 거야? 많이 위험한 장소라면 다른 장소에 학교를 세워도 괜찮지 않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하는 카이토를 향해 스테이시는 팔짱을 끼고 별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첫째, 모든 기계노이드가 이곳의 위치를 알고 있어. 학교가 이지루데 별장이야. 라고 하면 기계토피아의 모든  기계노이드들이 위치가 어딘지 알고 찾아올 거야.

둘째, 이지루데의 서재에는 기계노이드의 모든 책이 있다고 하지. 그래서 도서관으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단 판단을 내렸어.

셋째, 골격이 이미 잡혀있어 안에 기존에 사용하고 있던 책상과 칠판만 달면 되어 인력과 자원 모든 걸 절약할 수 있지.

이러한 이유로 안전만 보장된다면 최적의 장소야."

그 안전은, 내가 만들면 되는 거고. 그 말과 함께 기어토징거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스테이시를 바라보며 카이토는 환하게 웃음을 그렸다. 자신이 그리도 좋아하는 성실하고, 상냥하고도 강인한 스테이시의 모습이었다. 아… 전력으로 도와주러 달려오길 잘했다. 

"그런 이유라면!! 나도 전력으로 간다!"

기어틀링거를 꺼내 들어 기어를 넣어 손잡이를 돌리며, 카이토는 오랜만에 젠카이저로 변신했다.


"우리 둘이서 둘러보기엔 너무 넓은 것 같아."

3층의 건물은 밖에서 봤을 때도 넓게 느껴졌지만, 안에 들어오니 더 넓게 느껴졌다. 

"다른 전대분들의 손을 빌리자."

카이토의 의견에 스테이시는 동의했다. 카이토에 의해 소환된 선배 전대들은 2층과 3층으로 흩어졌고, 카이토와 스테이시도 효율적인 탐사를 위해 서로 흩어져서 별장을 살펴보기로 했다. 1층에서 왼쪽으로 향하던 스테이시는 곧 굳게 닫힌 문을 발견했다. 문 앞에는 이미 팰리스에서 몇백 번이고 만저본 익숙한 도구인 스크린 패널이 있었다. 함정일까? 이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금까지 봤던 여러 문과 다르게 닫혀있는 걸 보아하니 무언가 중요한 방인 것이 분명하다는 건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어토징거를 든 손에 힘을 준 채, 스테이시는 천천히 스크린 위로 손을 올렸다.

"됐다."

몇 번의 익숙한 손짓 끝에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스테이시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어둡고, 보랏빛으로 가득해 이전의 토지텐드 팰리스가 떠올랐다. 벽면을 가득 채운 선반과 그 안에 빼곡하게 적재된 책들은 거대한 방안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기계토피아에 이렇게 많은 책이 존재했다니, 처음 보는 풍경에 스테이시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동안 이렇게 다양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었다고?"

스테이시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주먹을 말아쥐었다. 많은 생각이 교차하며 지나갔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지식들이 기계노이드들에게 공평하게 공개될 것이라는 명확한 사실만이 남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기어토징거의 총구를 천장 위로 겨누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정확히 천장에 달린 기이한 조명을 부셨고, 조명이 부서지자, 유일하게 이 방에 있던 하나의 창문 너머로 따사로운 햇살이 희미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또 하나의 토지텐드의 흔적이 사라졌다.

"이걸로 여긴 해결된 것 같군."

스테이시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브룬이 말하길, 책은 오랫동안 햇볕을 쬐면 안 된다고 했었다. 그래서 브룬은 매번 젠카이자 세계에서 가져온 책을 보관할 장소를 찾을 때마다 그늘을 찾아다녔다. 햇살은 예뻤지만, 책을 위해서라면 여긴 조명을 다는 편이 더 좋겠어. 그리고 높은 곳에 있는 서적은 아래로 내리면 좋을 것 같네. 일단 자세한 건 선생님들과 함께 더 이야기해 보자. 아직 둘러보지 못한 방이 남아있었기에 스테이시는 다른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다 멈춰 섰다. 멀리서부터 인기척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었다. 스테이시는 기어토징거를 문 앞에 겨누었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테이시!"

문을 활짝 열고 등장한 카이토에 스테이시는 숨을 돌리며 무심하게 기어토징거를 내렸다. 

"무슨 일이야. 적인 줄 알았잖아."

약간은 타박하는 듯한 스테이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다급한 걸음으로 카이토는 스테이시에게 다가와 양 어깨를 부여잡았다.

"사람들이…."

"…?"

"사람들이 갇혀있어!"

"뭐라고?"

"이쪽으로, 빨리 스테이시!"

카이토는 제빠르게 스테이시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잠시만! 이란 스테이시의 외침은 카이토에게 닿지 못한 채 둘은 그렇게 길게 뻗은 복도를 전력으로 질주했다.

중앙 로비에서 선 둘은 각자에게 가까운 쪽의 복도를 탐색하기로 했다. 그렇게 카이토는 오른쪽 복도를 살펴보게 되었다. 길게 뻗은 복도에는 방이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었다. 오른쪽 벽은 막혀있었고, 왼쪽 벽에는 창문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뭔가 너무 이질적인 분위기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 순간 무언가에 부딪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카이토는 그대로 두 걸음 뒤로 밀려졌다. 

"아야―"

이마를 부여잡으며 카이토는 두 눈을 끔벅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분명 앞에는 길게 뻗어진 복도만이 존재했다. 뭐지? 손을 뻗는 순간 손 끝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며, 허공에 파장이 그려지고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막혀있는 건가? 그렇다면, 카이토는 주먹을 쥐고 허공을 향해 크게 휘둘렀다. 카이토의 주먹이 닿은 장벽은 다시금 크게 울렁거리며 파장을 만들어냈지만, 장벽이 사라진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좀 더 강한 힘이 필요한가? 카이토는 기어틀링거의 총구를 장벽을 향해 겨누었다.

몇 번의 공격이 들어갔을까? 투명한 유리창에 금이 가듯 허공에 금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곧, 마지막 일격과 함께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파편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벽이 있던 너머에는 여전히 복도가 이어졌지만, 끝이 없어 보였던 아까와 달리, 복도의 끝이 있었고 그 끝에는 위로 향하는 경사로 같은 것이 있었다.

"저건 대체…?"

어디로 이어지는거지? 의문을 품으며 장벽을 넘어 복도를 가로지르는 순간, 벽면에서 갑자기 쿠다이커와 쿠닥커들이 생겨나 공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막은 카이토에게 틈도 주지 않고 거의 무언가에 홀린듯 공격해오는 쿠다이커와 쿠닥커들은 예전에 싸워온 이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상했다. 아무래도 저 경사로 끝에 뭔가 있는 것 같아. 그 생각을 끝으로 공격을 맞받아치며, 구다이커와 쿠닥커를 처리한 카이토는 숨을 한 번 고르고 경사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경사로를 벗어나자 짧은 복도가 보였고 그 끝에는 팰리스에서 봤던 것 같은 문이 있었다. 신중한 걸음으로 천천히 문 앞에 다가가자 갑자기 천장에서 스캔레이저가 나타나서 카이토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이건 뭐야?"

【신원 불일치, 침입자 발생, 정문 폐쇄. 정문 폐쇄. 침입자 제거 침입자 제거】

기계음이 잔뜩 들어간 소리가 복도를 울리더니 곧 경사로를 타고 쿠다이커와 쿠닥커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함정일까? 스테이시는 괜찮을까? 생각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자기 머리를 향해 무기를 휘두루는 걸 막으며 카이토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투에 미친 것처럼 달려 드는 탓인지, 월드를 상대할 때보다 더 힘든 것 같아. 카이토는 벽에 몸을 기대고는 숨을 내뱉으며 방금 전 전투로 인해 부서진 천장의 스캔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아, 맞다. 스테이시는 괜찮을까?

스테이시가 괜찮은지 먼저 확인하고 이 방으로 다시 오자. 벽에서 기댄 몸을 세워 서둘러 다시 경사로 쪽으로 가려는 순간, 쓰러진 쿠다이커에 카이토의 말이 걸렸다. 아슬하게 넘어지는 걸 피한 카이토는 으아, 라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카이토의 발에 의해 앞으로 살짝 더 밀려 나간 쿠다이커가 센서가 인지하는 영역에 들어섰는지― 부서진 센서가 뜨문뜨문 음성 메시지를 내뱉기 시작했다.

【확…ㅇ…문이―열……니…아―】

이번엔 또 뭐가 나오는거지? 기어틀링거를 다시 꺼낸 순간, 음성 메시지가 끊기고 굳게 닫혀있던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서는 보라색 불빛을 바라보며 카이토는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방 안은 굉장히 특이한 구조로 되어있었다. 길게 직선으로 뻗은 길 끝에는 큰 직사각형 바닥이 있었고 그 위에는 예전에 스테이시의 몸으로 팰리스에 갔을 때 봤던 스크린 패널이 있었다. 그 이외에는 바닥은 아래가 뻥 뚫려있어 자칫 잘못하면 떨어질 것 같았다. 여긴 뭐 하는 장소일까? 기어틀링거를 여전히 손에 쥔 채, 카이토는 길게 뻗은 직선길을 따라 걸어 스크린 패널 앞에 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스크린 위로 글자가 적힌 리스트가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시계 월드?"

홀로그램에는 대략 20개 정도의 월드들이 적혀있었다. 설마 여기 적힌 세계 아직 해방되지 못한 세계인가? 다급한 마음에 가장 먼저 적힌 시계 월드라는 글자를 누르자 바닥이 살짝 흔들리더니 아래에서 이상한 직사각형 상자가 올라와 공간을 채웠다. 꼭 관처럼 생긴 상자에 기이함을 느끼며 상자로 다가간 카이토는 놀라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람?"

상자의 윗부분에 자그마하게 있는 유리창 너머로 똑똑하게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설마, 이지루데는 자기 부모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납치한 건가? 

"잠시만요. 당장 구해드릴게요!"

몸을 일으키며 카이토는 패널 쪽으로 달려가 리스트 뒤로 보이는 스크린를 닥치는 대로 눌렀지만, 그럴 때마다 기계노이드가 아닙니다, 라는 경고창만 뜰 뿐이었다. 기계노이드, 기계노이드―스테이시가 필요해. 카이토는 스크린을 보던 시선을 돌려 상자의 윗부분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두 눈을 감고 잠든 사람을 보며 카이토는 두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이 사람도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친구겠지. 이미 어지루데는 자신과 동료들의 손에 죽었지만, 용서가 되지 않았다. 

"꼭 구해줄게요."

어쩌면 자신에게 한 말일지도 모르는, 그 말을 던지며 카이토는 스테이시를 찾아 그곳을 빠져나왔다.

사람이 갇혔다는 말만 한 채 제 손을 끌어 전력으로 달리는 카이토에게 불만 어린 기색을 표현하던 스테이시는 곧, 오른쪽 복도에 들어서자 보이는 쓰러진 쿠다이커와 쿠닥커를 보며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경사로까지 거의 쉼 없이 달려온 둘은 문 앞에 서서야 겨우 카이토가 멈춰 서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여기서도 한바탕 전투가 일어났군. 쓰러진 쿠다이커와 쿠닥커, 그리고 천장에 아슬하게 달려있는 센서를 보며 스테이시는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게..."

카이토는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모든 설명을 들은 스테이시는 미간을 찌푸리며 반 정도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이지루데는 대체 언제부터 사람들을 납치한거지?

"그러니까 빨리 사람들을 구하자."

"그래."

두 사람이 문 쪽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천장에 달린 센서가 치직 거리며 기계음이 잔뜩 섞인 소리를 뱉어냈다. 뭐야 또? 본능적으로 전투 자세를 잡는 카이토를 따라 스테이시도 따라 기어토징거를 잡아 올렸다. 지면으로부터 미미한 진동이 느껴지고, 기계 부품이 절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큰 진동과 함께 경사로 입구에서 쿠다이크와 닮은 듯한 기계노이드가 걸어 나왔다. 저벅저벅 걸어오던 기계노이드는 곧 두 사람을 바라본채 멈춰 섰다. 그 뒤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기계노이드에 카이토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고장 난 건가…?"

그 순간, 위험해! 라고 말을 내뱉으며 스테이시가 다급하게 카이토 앞을 방패로 막아섰다. 아슬하게 적의 공격을 튕겨내자 기다렸다는 듯 기계노이드가 둘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일단 이 녀석부터 없애자!"

"알고―있어."

기계노이드의 가슴을 발로 차며 스테이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기계노이드나, 월드와 다르게 움직임이나 행동 모든 것이 감정 없는 꼭두각시 같았다. 마치 이지루데가 이 방에 접근하는 사람을 없애기 위해 만든 기계 같았다.

두 사람의 마지막 공격이 기계노이드를 관통하고 나서야 기계노이드는 완전히 멈춰 섰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을 가둔 관 앞에 멈춰선 카이토는 변신을 풀고 자그마한 유리창 너머로 갇힌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서 스테이시 또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사람을 카이토와 함께 바라보았다.

이걸 감추려고 팰리스에 입성한 이후 별장을 걸어 잠그고 접근하는 이들을 죽였던거군.

사실 이지루데가 과하게 별장의 접근을 막는 걸 보고 무언가 있을거라는 추측이 팰리스네 간부진들에게 돌았지만, 지금까지 연구한 기술이 밖으로 세어나가는 걸 막기 위함이라는 어지루데 말과 함께 토지루 기어를 만들어 얻은 봇코와우스 신임 아래 다들 별다른 의심 없이 넘어갔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갇혀있을까 여기?"

두 주먹을 쥔 채 잔뜩 내려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카이토를 보며 스테이시는 말없이 옆에 있는 스크린 패널을 조작했다. 서재 때와 다르게 제법 복잡한 보안이 걸려있었다. 해제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어. 카이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크린을 만지는 스테이시 쪽으로 걸어가 스테이시와 스크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스테이시 어때? 이 사람들 전부 풀어줄 수 있어?"

"기다려봐. 조금 시간이 걸려."

"응. 내가 도와줄 일이 생기면 말해줘."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스테이시는 시선을 여전히 스크린에 둔 채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스크린을 조작했을까― 주변에 갑작스럽게 소음이 들리더니 뻥 뚫려있던 바닥에서부터 상자들이 올라와 제법 큰 공간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많다니."

"이지루데녀석."

토지루 기어를 만들며 토지텐드의 최고 기술자의 자리에 도달했지만, 그 전부터 봇코와우스는 기계토피아에서는 잘 없는 신기한 이지루데의 기술과 발명품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최고 간부가 되기 위해서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었고 그 한 방이 토지루 기어였다. 설마 그 모든 기술력이 다른 세계에서 훔쳐 온 거였다니. 봇코와우스가 알았으면 그대로 목이 날아가다 못해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비정상적으로 이 별장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그것으로 모자라 이 방을 지키는 꼭두각시까지 만들어냈다. 이제 좀 이해가 되네. 스테이시는 팔짱을 낀 채, 천천히 열리는 상자 아니 관을 바라보았다.

관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정말 가지각색의 월드에서 활약 하고있던 기술자 혹은 과학자였다. 카이토와 스테이시는 일단 이 사람들을 각자의 세계로 보내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열심히 사람들을 원래 세계로 보내는 과정에서 평행 세계 게이트의 반응을 셋짱이 감지하고 이상함을 느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며 셋짱은 쥬란, 가온, 마지느 그리고 브룬을 기계 토피아로 데려갔고 그렇게 모두가 힘을 합쳐 겨우겨우 그 많은 사람을 원래의 세계로 전부 돌려보낼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을 다 돌려보내고 나서 겨우 컬러풀로 돌아온 이들은 잔뜩 지친 기색으로 의자에 앉았고, 셋짱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야츠데는 모두에게 고생했단 말을 하며 정성이 담긴 컬러풀 파르페를 준비해 주었다. 곧 식사를 내주겠다는 야츠데의 말에 가온은 도와주겠다며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야츠데와 함께 주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주방에 들어가자 브룬은 잔뜩 지친 기색으로 스푼을 잡고 파르페를 천천히 뜨고 입에 밀어 넣었다.

"진짜 힘들었습니다."

"느늣…기절할 것 같아. 하지만 사람들이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럼. 진짜 이지루데녀석. 카이토 부모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납치했을 줄이야. 그때 한 방이라도 더 먹여야했었어!"

"그러게. 그래도 지금이라도 우리가 찾아서 다들 가족을 만나서 다행이야."

카이토는 여전히 가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이제는 자신이 성인일 때 모습으로 찍힌 사진이 있는 액자를 들어 바라보며 행복하게 미소를 그렸다. 이젠 정말 자신과 같은 슬픔을 가진 사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카이토는 행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쥬란은 카이토가 자랑스러운 듯 웃음을 터트리며 카이토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아니 이런 일이 있는 걸 알고 스테이시를 만나러 간 거야? 그랬다면 우리한테 설명을 해주지. 바로 도와주러 갔을 텐데."

쥬란의 말에 카이토는 눈을 두 어번 깜박이며 전용자리에 앉아 컬러풀 파르페를 한 입 떠먹는 스테이시를 바라보았다.

"아아아아―!!"

그리고 소리를 지르며 쥬란의 팔을 떼어내며 카이토는 스테이시를 향해 달려갔다. 갑작스럽게 소리를 지른 카이토에 마지느, 브룬 모두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스푼을 떨어트렸다.

"맞다! 완전히 잊고 있었어!"

"…뭐…뭘 말이야?"

"빙하 월드!"

"빙하 월드?"

카이토가 말을 더 이으려는 순간 밖에서 들린 소란에 가온과 야츠데가 주방에서 나왔다.

"무슨 일있어 카이토짱?"

"무슨 일 있니?"

"아, 아니아니. 갑자기 잊고있었던 게 생각나서."

잊은거? 가온의 되물음은 컬러풀 입구에 달린 커튼이 열리며 들려온 요호호이― 라는 웃음소리와 함께 묻혀졌다. 

"조크스?"

"오늘 재미있는 일을 했더라 너희들. 전 세계의 월드가 젠카이자 이야기로 아주 떠들썩해."

"치사하게, 재미있는 일을 너희들끼리만 해?"

"플린트! 다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보시다시피."

"그보다 갑자기 여행을 떠난다고 해서 놀랐는데 설마 벌써 끝난 거야?"

"질릴 정도로 찾아와서 여행 갈 월드 추천해달라고 할 땐 언제고, 벌써 싫증났어?"

"아니 그 정도로 찾아가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튼 아직 싫증 안 났어."

질릴 정도로? 찾아가서? 조크스의 방문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파르페를 먹고 있던 스테이시는 천천히 스푼을 내려놓고 카이토와 조크스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우리 너희들이 추천해 준 곳 갔다 왔어. 특히 워터 월드의 케리비안! 너무 재미있었어. 추천 고마워."

"그럼. 이 플린트님의 추천인데 재미있지 않을 리가 없지."

카이토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플린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스테이시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곧 떨리는 시선을 애써 감추며 파르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한텐 편지만 남기고, 저 해적은 직접 만났다고? 그것도 여러 번이나? 자신은 고작 보러 한 번 오고 말았으면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몰아치다 마지막에는 배신감이라는 이유를 모를 감정이 텅 가슴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 마치 체라 하나만 텅 남아버린 제 파르페 그릇처럼 말이다. 아까까지 맛있기만 했던 파르페가 갑자기 맛없게 느껴졌다. 아니, 대체 그 편지 쪼가리 뭐길래, 마음을 이렇게 뒤흔들고 모르는 감정만 만들어내는 거지? 그 편지가 카이토가 쓴 거라서 그런건가? 여전히 제 속도 모른 채 웃으며 다른 이들과 떠드는 카이토의 목소리가 제 마음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요글래 학교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데, 더 예민해지는 기분에 스테이시는 눈을 질끈 감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려 했다.

"스테이시?"

"아, 네 할머니."

야츠데의 부름에 스테이시는 몸을 살짝 떨며 자신을 보고있는 야츠데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피곤하니? 아까부터 불렀는데 답이 없어서."

"아, 죄송합니다."

너무 생각에 몰두한 탓이었을까? 스테이시는 야츠데가 부르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멋쩍은 듯 웃음을 그리며 스테이시는 괜찮다며 야츠데를 안심시켰다.

"그래 그럼 다행이구나. 아, 내 정신 좀 봐. 밥을 준비해야하는데. 밥 먹고 갈 거지 스테이시?"

"아 그게…."

"요즘 바쁜 건 알고있지만, 그래도 오늘은 고생했으니 꼭 밥은 먹고 가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고맙구나."

인자하게 웃으며 제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준 야츠데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스테이시는 조용히 숨을 내뱉었다. 빨리 밥만 먹고 기계토피아로 돌아가자.

저녁 식사가 끝나고, 컬러풀을 나서는 스테이시를 뒤따라 카이토도 컬러풀 밖으로 나왔다. 스테이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스테이시는 걸음을 멈췄지만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자고 가지, 진짜 기계토파이로 돌아가? 조크스도 자고가는데"

"…학교를 빨리 세워야 해서 시간이없어."

"음, 그거 내가 내일 도와주면 오늘 자고갈 수 있어?"

카이토의 말에 스테이시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돌려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컬러풀에서 은은하게 새어나오는 조명 아래 카이토가 제 손을 모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도와줄게! 오늘 너랑 별장을 탐사하면서 네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를 느꼈어."

"…마음은 고맙지만, 평행 세계 여행한다면서. 다시 떠냐야 하는 거 아니야?"

"다시 떠날 거지만 그게 꼭 내일일 필요는 없잖아. 아 맞다! 평행 세계 하니까 생각났다!"

환하게 웃으며 카이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곧 스테이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스테이시의 손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대체 무슨? 의문을 표하는 스테이시를 보며 그저 생글 웃음을 펼친 카이토는 스테이시의 손 위에 눈사람모양의 펜던트를 올려주었다. 눈사람은 꼭 자신을 닮은 듯한 옷을 입고 있었고 검은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이건?"

"빙하 월드의 특산품, 반짝이는 스노우맨 펜턴트야. 이 스노우맨을 소중한 사람과 비슷하게 만들어서 선물 해주는 게 빙하 월드의 관습이래."

"…이게 그럼 나야?"

"응! 안 닮았나? 음, 일부러 목도리도 검은색으로 하고, 여기 포인트 컬러는 보라색으로 넣었는데!"

 

진지한 표정으로 입술을 살짝 내밀며 제 손 위에 올려진 눈사람 펜턴드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는 카이토를 보자, 아까까지 자신을 휘몰아치던 섭섭함, 배신감 같은 이유 모를 감정들이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고작 펜던트 하나에 아까까지 자신을 혼란스럽게 했던 감정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위에서 살며시 흘러 내려오는 웃음에 카이토는 고개를 살짝 들고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고 있는 스테이시를 바라보았다. 이제서야 제가 알던 스테이시의 모습이 돌아왔다. 조크스가 등장한 이후로부터 뭔가 화가 난 듯 슬픈 듯 가라앉아있던 모습이 계속 신경 쓰였는데 말이야. 이젠 좀 마음이 놓이네. 여전히 스테이시를 바라본 채 카이토는 허리를 펴고 펜턴트를 조심스럽게 톡톡 쳤다.

"사실 너랑 같이 빙하월드에 가고 싶어서 기계토피아로 갔는데, 말할 타이밍을 계속 놓쳤네."

"왜 나랑 같이?"

"음, 빙하 월드에 도착하자마자 네가 생각났어. 우리 엄마를 찾아다녔을 때 너랑 빙하 월드에서 만났잖아. 그 때는 둘 다 엄마를 먼저 찾는 게 우선이였으니까 많은 세계를 둘러봤지만 제대로 보진 못했었잖아."

"…."

"다시 가서 보니까 내가 기억하고 있던 빙하 월드랑 너무 다른 거야. 너무 재미있고 이런 멋진 물건도 있고. 이런 모든 걸 나만 즐긴다고 생각하니 좀 마음이 그렇더라."

"…."

"그래서 너랑 같이 즐기고 싶어서 찾아갔어. 근데 바빠 보여서…아! 그래, 내가 학교 만드는걸 도와줄게! 내일 뿐 만 아니라 완성 될 때 까지. 완성되면 같이 빙하 월드로 놀러 가자!"

지금은 분명 밤인데, 왜 제 눈앞의 카이토는 아침의 햇살처럼 밝게 빛나고 있을까. 

"그래. 그러자."

"진짜! 야호! 그럼 내일부터 전력으로 도와줄게!"

가볍게 폴짝 뛴 카이토는 스테이시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스테이시는 당황한 듯 몸을 살짝 비틀다 곧 말없이 카이토의 포옹을 받아 들었다.


스테이시가 생각했던 것 보다 학교는 빠르게 완성되었다. 카이토를 따라 가온, 쥬란, 마지느 그리고 브룬이 힘을 보태주었고 이지루데 별장에 있던 보안 기술에 대해 플린트가 관심을 보이면서 얼떨결에 조크스와 캇타나와 릿키까지 학교를 완성하는데 힘을 보태주었다. 거기에 다른 기계토피아의 기계노이드까지. 이지루데의 별장이었던 곳은 근사한 학교로, 정원은 아이들이 실컷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으로 바뀌었다. 불멸처럼 느껴졌던 토지텐드가 망하고, 그들이 남긴 과거의 흔적들이 하나씩 지워지고 새로운 것으로 칠해지고 있다. 그것이 주는 감정은 말로 다 하지 못할 기적과 같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토지텐드의 흔적들이 지워지고 언젠가는 토지텐드라는 왕국 자체이 있었다는 사실 조차 사라지겠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세계는 충분히 멋진 세계가 될 것이다.

셋짱은 카이토와 스테이시를 빙하 세계로 이동 시켜 준 뒤 처음보는 기어하나를 카이토의 손에 올려주었다.

"이건 뭐야?"

"플린트가 이지루데의 별장에서 본 지식을 기반으로 만든 일회용 차원 게이트야 짹! 이걸 쓰면 젠카이자 세계로 돌아올 수 있어. 한 번 밖에 안되니까 꼭 돌아오고 싶을 때 사용해라 짹"

"고마워 셋짱."

"이것 이외에도 뭔가 더 발견한 것 같더라고 짹. 박사님들이랑 뭔가 만든다는데 나도 가봐야 해서 먼저 가보겠다고 짹"

"오! 진짜? 나중에 가서 봐야겠다. 조심히 돌아가. 고마워!"

두 사람을 향해 날개를 흔들며 셋장이 게이트를 타고 사라졌다. 카이토는 신기한 듯 눈빛을 반짝이며 기어를 바라보았다. 스테이시는 팔짱을 끼고 카이토의 손에 들린 기어를 바라보았다. 이지루테 녀석이 그곳에서 무슨 연구를 했는진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우리에게 유용한 물건이 생긴다면 좋은 일이었다. 

"어? 눈이다."

기어 위에 떨어지던 하얀 눈송이에 카이토는 기어를 들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흐린 먹구름 사이로,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다른 잔잔한 눈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네."

"저번처럼 폭설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땐 진짜 앞도 안 보여서 너무 힘들었는데."

 카이토의 말에 스테이시는 옅은 웃음을 그리며 손을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손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눈은 체온에 닿아 금방 녹아내렸다. 그렇지 않아? 카이토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뱉으며 고개를 돌려 스테이시를 바라보았다. 그땐 앞이 잘 안 보여서 몰랐는데…. 조금씩 조금씩 떨어지는 새하얀 눈 아래 서 있는 스테이시는― 그러니까 스테이시는― 눈처럼 하얀 피부는 평소와 다르게 찬 바람에 의해 옅은 붉은 빛이 돌고 있었다. 그 위로 떨어지는 바람결에 살랑이는 검은색 머리카락은 옅은 붉은빛의 피부와 대조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스테이시는 이 새하얀 눈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눈이 부실 정도로, 그리고―

"아름답네."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에 카이토는 놀란 듯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카이토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스테이시는 여전히 떨어지는 눈과 그 너머의 하얀 풍경을 바라보며 찬 바람에 붉어진 손을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확실히 폭설이 내리던 그날과 비교하면 아름답긴 하네."

"…그…그렇지!"

어색한 웃음을 감추기 위해 아까보다 감정을 실어 높은 목소리로 말하며 카이토는 스테이시를 향해 있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왜지? 난 뛰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안했는데 왜 전력으로 뛰었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지? 아니, 전력으로 뛰었을 때보다 더 뛰는 것 같았다. 왜? 라는 의문에 제대로 답을 내리기도 전에 자신을 부르는 스테이시의 목소리에 카이토는 어? 라는 맥없는 대답을 던졌다.

"그래서 뭐부터 할 건데?"

"아, 아. 스키부터 탈까?"

그게 좋겠다! 제법 높은 목소리로 말하며 카이토는 스테이시를 가로질러 앞으로 걸어가며 요동치는 심장 위에 조용히 손을 올렸다.

작가의 한마디

사실 스테이시랑 카이토가 오로라를 보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것 까지 쓰고싶었는데 기력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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