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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볕이 좋았다. 만연한 여름날이야 안 그런 날이 더 적겠으나, 요코 씨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않았다. 강렬한 태양 빛이 창문을 투과하고 매끄러운 등나무 식탁 위를 따뜻하게 데웠다. 이런 날이면 실내에 전등을 켜도 집 안은 어두컴컴하게 느껴진다. 요코 씨는 문득 집안이 꼭 거대한 아귀의 입안 같다는 장난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주 공상에 빠져드는 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바로 등 뒤 주전자에서 찻물이 끓어올라 요란한 소리를 내고, 사랑스러운 손자가 재빨리 불을 끄고서 "할머니, 찻물이 다 끓었어요." 라고 말한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늘은 마당에 빨래를 널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현관에서 무언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두침침한 풍경를 주의깊게 살펴보니, 곱슬곱슬한 흰 털이 보였다. 요코 씨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고 다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포치, 밖에 놀러 나가니?"

포치라고 불린 아이는 고개를 쏙 내밀고 대답했다.

"네, 할머니. 금방 다녀올게요!"

무어라 대꾸할 틈도 없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닫혔다. 요코씨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언가를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라네 마을 풍경은 당연한 것들의 연속이다. 어릴적부터 익숙하게 봐온 흙길, 오밀조밀한 주택. 심지어 얼마 전 부쩍 커진 나무의 위치까지. 미우라는 눈을 감고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맞힐 자신이 있었다.
익숙하면 질릴 때가 되었는데도 요즘은 부쩍 모든 것들이 새롭게 느껴졌다. 미우라는 새삼스레 눈 앞의 풍경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면 개울물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반짝이는 물길이 부지런히 나뭇잎을 나르는 것이 보였다. 큰 나무 뒤로는 길고양이가 숨는 것이 보이고, 나뭇가지가 드리운 아래에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회색 콘크리트로 그어진 직선. 딱딱하고 낯설게느껴지던 학교 건물에는 사실 친절한 선생님과 경비아저씨 같은 어른들이 바삐 돌아다니고 있다. 할머니를 따라 겨우 가던 슈퍼에는 어린 아이를 위한 발 받침대가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 놓여있다. 혼자서는 겨우 입구 주변이나 들락날락 오가던 숲도 완전히 다른 장소처럼 느껴졌다. 이런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굳이 고심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잔뜩 생겼으니까. 함께 한 기억이란 것이 무기질한 장소에 숨을 불어넣으면 보잘것 없는 풍경도 생명을 얻은 것처럼 태동한다. 미우라에게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미끄럼틀처럼 비탈진 산길을 오르며 발치에 채이는 덩굴을 걷어냈다. 미우라는 뒤에 오게 될 사람이 질긴 줄기에 걸려 다치지 않도록 매번 공을 들였다. 마침내 평평한 길이 나오고, 큰 구멍이 뚫린 나무가 시야에 들어온다. 비밀기지라고 부르는 그곳에 들어가는 대신, 방향을 틀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안녕, 잘 있었어?"

평평한 땅 아래에는 친구들이 묻어둔 '보물'이 잠들어있다. 미우라는 턱을 괴고 한참 그 땅을 내려다 보았다. 보물이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최근 생긴 일과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동없는 바닥을 들여다 보는 일이 질렸는지, 아이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일도 보자. 그리고…."

어째서인지 집에서 나서기 전,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떠한 바람은 소원을 빌고자 하는 경건한 결심이 없을 때 무심코 툭 튀어나온다.

"너희는 앞으로도 날 그렇게 불러주면 좋겠어."

미우라 쥰이라고.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데도 목소리가 작아지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당장이라도 소원 아닌 소원을 고쳐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미우라는 보이지 않는 것에 쫓기듯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쯤 어느새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차고 거센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굵은 빗방울에 땅이 젖어들었다.

그날 이후, 미우라가 땅 속에 묻힌 보물에게 다시 말을 걸 수 있는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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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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