流れ星 별에서 떨어진 괴물 #2
우주생명체 미도리 x 인간 치아키
원작을 반영하지 않은 au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캐붕, 날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취향을 타는 소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정확한 검토를 거치지 않아 어색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고요한 적막에 잠긴 거실에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어제 읽다 둔 책장부터 넘겨내는 치아키였지만, 느긋하게 펼쳐지는 흰 종이에 빽빽하게 들어찬 검은 활자 중에서 단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책일지라도 다른 곳에 모든 신경이 쏠린 상태라면 집중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책을 읽는 척하던 눈을 굴리자 소파로부터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웅크리고 앉은 아이에게 시선이 닿았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재까닥 연락하라고 신신당부한 카나타와 헤어져 집에 돌아온 후로 계속 저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그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정작 아이는 마음의 문을 열어줄 기미를 좀체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고작 이 정도로 의지가 꺾일 모리사와 치아키가 아니었다.
지금껏 한 글자도 읽히지 않았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히 다가갔는데 그마저 눈치챈 아이가 그렇지 않아도 한껏 웅크렸던 작은 몸을 크게 움찔거리며 움츠렸다. 잔뜩 겁먹은 낯으로 쳐다보는 모습에 바로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경계하는 눈빛을 내비치는 그에게 양손을 좌우로 휘휘 휘저었다.
“미, 미안하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다.”
내가 너무 성급했던 모양이구나. 자, 더는 다가가지 않을 테니까. 치아키는 아이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상태에서 한쪽 무릎을 꿇어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어주고 싶었다.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자신만큼은 언제나 그의 편이 되어주겠다는 진심 어린 다짐이 부디 그에게 전해졌으면 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저를 향해 경계를 바짝 곤두세웠던 아이가 제게서 돌아섰던 몸을 슬쩍 돌려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크게 벌어진 동공이 흔들렸다. 여태 제대로 눈을 맞추어주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그였다. 그나마 꼽자면 그에게 다가가려 할 때 퍼뜩 튀어 오른 몸을 움츠리며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본 게 다였다. 그랬던 그가 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가 무얼 하려고 할 때마다 지레 겁먹기 일쑤였던 그가 이번에는 저와 얼굴을 마주해 주었다. 이 말인즉슨, 마음의 문을 굳건하게 걸어 잠가 가망이 없어 보였던 그에게 한 발 다가들었다는 소리이지 않은가. 예상치 못한 수확에 치아키는 얼떨떨한 눈을 끔뻑거리며 눈앞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곱슬곱슬하게 물결치는 밀빛 머리카락. 그 사이로 빼꼼 삐져나와 이따금 쫑긋쫑긋 서는 한 쌍의 주황빛 더듬이. 티 한 점 묻지 않은 뽀얗고 깨끗한 피부. 오밀조밀하고 또렷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 새초롬하니 앙증맞은 복숭앗빛 입술. 그리고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우주처럼 영롱한 비췻빛 눈동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예쁜 표현을 모조리 가져다 쓰더라도 한참 모자랄 만큼이나 참 어여쁜 아이였다. 이처럼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저절로 행복해져서 웃음이 날 만큼 하염없이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세상에 또 존재할까 싶었다.
마치 넋이 나간 듯이 입까지 쩍 벌어진 멍청한 표정으로 보다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그를 향해 무심코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 뇌리에 한 장면이 퍼뜩 떠올랐다. 매섭게 치켜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한껏 경계했던 아이의 모습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그에게 향했던 팔을 황급히 거두었다. 갖은 노력을 거듭해온 끝에 간신히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선 참이었는데, 제 섣부른 행동 하나로 소중한 인연을 그르칠 뻔하였다. 자칫 여린 그에게 돌이키지 못할 상처를 입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가 아직이었구나.”
끝없이 추락하는 듯한 기분을 떨치고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그래도 귀청이 떨어질 만큼 커다란 목소리를 더 높여가며 외친 치아키는 그에게 불끈 움켜쥔 주먹을 내보이며 말했다.
“오늘부터 너와 함께 지낼 모리사와 치아키라고 한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마치고는 흰 이를 드러내 씩 웃어 보였다. 하지만 아이는 아무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잠시 눈알을 굴렸다가 자신을 멀뚱멀뚱하게 올려다보는 그와 눈길을 맞추었다.
“괜찮다면 너의 이름도 알려주지 않겠나?”
그가 지레 겁내지 않도록 눈매를 곱게 접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다정다감한 투로 이름을 물었다. 한데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단지 조그마한 입술을 앙다물 뿐이었다.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은 둘 사이에서는 적막한 공기만이 감돌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입에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는 자신을 한없이 순진무구한 눈으로 조용히 주시하던 아이가 동그란 머리를 모로 갸우뚱 기울였다. 마치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이. 불현듯 한 줄기의 섬광이 뇌리를 스쳤다. 커다래진 동공이 그에게 향했다. 설마하니 이름이 없는 상태인가?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만했다. 강렬한 빛을 내며 지구로 떨어진 커다란 운석에서 이 아이가 발견되었을 당시, 연구원들은 어땠을까. 분명 난생처음 접하는 생명체를 파악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을 터였다. 다른 곳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그들이 그저 연구 소재에 불과한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을 리 만무하였다. 그래도 이름은 무척 중요한데 말이지. 꼭 독한 술을 들이켠 것처럼 입안에 씁쓸한 뒷맛이 가득 맴돌았다. 순간적으로 입가에 어릴 뻔한 쓰디쓴 조소를 어렵게 삼켜내고 아이를 넌지시 응시하였다.
느릿하게 깜빡일 때마다 나풀나풀 흔들리는 가는 속눈썹 아래로 오색찬란한 별빛 물결이 흐르는 광활한 우주를 한가득 품은 듯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두 눈망울.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황홀토록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차마 다른 데로 눈을 돌리지 못하고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넋 놓아 보다가 헤벌어진 입술을 달싹거렸다.
“…미도리.”
저도 모르게 웅얼거린 입술 새로 새어 나온 소리에 화들짝 놀라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한 생명체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건, 그 주체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한 톨의 먼지와도 같은 존재를 끝없이 광활한 우주 질서에 편입시키는 신성하고도 위대한 작업을 진정 자신이 진행해도 되는 건가. 고개가 절로 설레설레 저어졌다. 아니, 결단코 그래선 안 되었다. 얼떨결에 그의 보호자가 된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오히려 저보다는 그를 발견해서 돌보아주었던 카나타야말로 그에게 정체성을 부여할 적임자로 적합하지 않을까. 나름대로 머릿속에 도출된 결론에 따라 그 장본인에게 연락하고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시야에 가득하게 들어차는 아이의 얼굴. 아무런 때가 묻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 같은 수수하고 청초한 얼굴이 각막에 새겨지는 순간, 가슴이 크게 덜커덕거렸다. 그래, 인정한다. 이 아이의 이름만큼은 자신이 직접 지어주고 싶었다. 저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런데도 포기가 되지 않았다. 자꾸만 욕심이 났다. 정말이지 참으로 염치없는 소망이긴 하지만, 앞으로 그가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 이름의 장대한 우주 속에다가 저라는 존재를 깊숙이 새겨놓고 싶었다. 바짝바짝 말라오는 입술을 혀끝으로 축인 치아키는 조금 전 저도 모르게 무심코 흘려보내었던 이름 석 자를 다시 한번 입 밖으로 조심스레 내어보았다.
“미도리.”
제 모습을 오롯하게 담아낸 두 비췻빛 눈동자가 맑게 반짝였다.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새긴 순간 이름 모를 뜨거운 감정들이 당장에라도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마음속에 빈틈없이 꽉 들어찼다. 먹먹하게 메이는 목을 애써 삼켜낸 치아키는 두 눈을 멀뚱거리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보이며 다정한 톤으로 인사를 건네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마, 미도리.”
조금이라도 호감을 쌓고 싶은 마음에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빙긋이 지어 보았다. 하지만 정작 저를 말끄러미 올려다보는 아이는 대답은커녕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까까지는 잘만 마주했던 시선도 더는 맞추지 않았다. 기어코 고개를 팽 돌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가 자신에게 허락해준 시간은 여기까지였던 모양이었다. 꽉 막혔던 그와의 관계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인 상황이기는 하나,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였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게 웃었다. 벌써 고생길이 훤히 내다보이는 것만 같았다.
하늘 높이 떴던 태양은 어느덧 뒷산 저편으로 뉘엿뉘엿 넘어갔다.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짙게 드리우는 어슴푸레한 시간에 치아키는 초조한 낯으로 방문 앞을 서성였다. 굳건하게 닫힌 방문 너머에는 절친한 친구의 부탁으로 돌보아주기로 한 아이, 미도리가 있었다.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식사를 거부하며 방문을 걸어 잠근 이는 여전히 방에서 나오지 않은 채였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는데 도통 열릴 기미가 없는 문에 마음이 납덩이를 매단 듯이 무거웠다. 갑갑한 가슴에 차곡차곡 쌓였던 한숨이 길게 나왔다.
이런 식으로 미도리가 식사를 거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그런 줄 알고 저한테 아이를 맡겼던 친우에게 일조를 구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준비한다면, 그때만큼은 아이도 거부하지 않고 잘 먹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제 바람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세상에 둘도 없는 친우가 조언한 대로 그가 좋아한다는 음식을 차려서 건네 보았지만, 아이는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어떻게든 한 입이라도 먹여보려고 입 앞까지 음식을 가져다 대주어도 고개를 이리저리 홱홱 돌려가며 끝끝내 입을 열어주지 않았다. 덕분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제가 문을 열지 못해서 이렇게 쩔쩔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애당초 이 집의 주인은 저였다. 집주인에게 모든 방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가 없을 리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안에서 문을 잠갔더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딸 수 있었다. 당장 문을 확 열어젖히고 홀로 방구석에 틀어박힌 아이에게 달려가고픈 마음이야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면 깨어지기 쉬운 유리구슬처럼 무척 섬세한 아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본인이 선명하게 그어놓은 선 안에 들이지 않겠다며 저한테 경계의 날을 바짝 세웠던 이었다. 그만큼 빈틈없이 꽁꽁 닫혔던 마음의 창을 몇 번이고 두드린 끝에 기어코 균열을 내어 가까스로 한 발짝 다가서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토록 어렵게 틈을 만들어냈건만, 까딱했다가는 다시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로 섣불리 행동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었다. 자신은 미도리의 보호자였다. 아이를 돌보아야 할 사명을 지닌 자로서 이대로 아이가 쫄쫄 굶게 가만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효과적이고 올바른 양육 방법에 관한 육아 콘텐츠를 통해 저만의 요령을 터득했다. 이제 그간 갈고닦았던 비장의 무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유감없이 선보일 때였다.
목 안에 불이 붙은 듯한 갈증에 바짝바짝 말라오는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땀이 축축이 배어나는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두 눈을 감고 깊게 들이쉰 숨을 길게 내리쉬었다. 긴장하지 마라, 모리사와 치아키. 너 자신을 믿는 거다. 넌 한번 마음먹은 일이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들고 매달려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존재이지 않던가. 그 어떠한 역경과 고난이 눈앞에 닥쳐도 굴복하지 않는 강한 열정과 굳은 의지를 갖춘 사람. 그게 바로 나, 모리사와 치아키이지 않나. 저 자신을 다독이는 말을 주문처럼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며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앙금처럼 남은 불안을 모조리 다 떨쳐내고자 가슴을 활짝 펴서 크게 심호흡하고는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손끝에 잡힌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다가 주섬주섬 꺼내 든 치아키는 잠깐 큼큼하며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하하하, 정의의 히어로 등장이다!”
좀체 열릴 기미가 없는 문 너머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방에선 어떠한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주위의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으면서 쥐 죽은 듯한 정적만이 고요하게 감돌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대로이긴 했다. 다만 호기롭게 지른 것치고는 이렇다 할 성과는커녕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현실의 벽에 부닥치니 입이 조금 썼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비록 일체의 자의도 없이 오로지 타의에 의해서였다고 하긴 하나, 그래도 제가 맡은 아이였다. 지금 아이의 보호자는 엄연히 저였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소임을 도맡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 생명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이름까지 지어주지 않았는가. 앞으로 그가 나아가야만 할 일생이라는 방대한 우주를 책임지기로 마음먹은 이상, 힘이 닿는 한 끝까지 노력해보고 싶었다.
“으음, 이상하군. 분명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는데 말이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다소 과장되게 고개를 갸웃거린 치아키는 방구석에 숨어들어 나오지 않는 그에게 닿도록 부러 언성을 높였다. 얕은 숨소리 하나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적막만이 흐르는 방문 너머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그마한 기척이 느껴졌다.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힘주어 아래로 끌어내리고는 문 앞을 서성서성하는 이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거기 아무도 없는가?”
가볍게 던진 질문 하나에 문짝 너머로 부산스러운 소음이 났다. 여태 고요했던 방안에 타박타박하며 어수선하게 울리는 발소리가 무척 다급해 보였다. 입술 새로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양껏 흘린 치아키는 별다른 재촉 없이 가만히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거대한 요새의 굳건한 철벽처럼 좀처럼 열릴 조짐이 없었던 문에 드디어 변화를 보였다. 달칵하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서서히 벌어지는 문틈 사이로 그토록 기다렸던 얼굴이 빼꼼 나왔다. 절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마치 수채화 물감처럼 입가에 퍼지는 엷은 미소를 숨길 노력도 하지 않았다. 오밀조밀한 입술을 꾹 문 채 눈을 바삐 굴리는 아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었다.
“오, 귀여운 꼬마 친구로구나. 잠시 뭘 좀 물어도 괜찮겠나?”
상대가 경계심을 가지지 않도록 사근사근하게 말을 붙여보았지만, 정작 미도리는 대답 대신 흠칫하며 가녀린 어깨를 움츠릴 뿐이었다. 제 딴에는 상대방이 놀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다가들었던 거였는데, 유리구슬같이 여리고 섬세한 이를 상대로는 무용지물인 듯싶었다. 하지만 제게는 만회할 기회가 남았다. 아이가 다시 문을 닫는 대신 문 뒤로 숨은 고개를 끄덕여주었으니까. 그래도 눈물겨운 노력 끝에 간신히 피워낸 조그만 불씨가 아직 꺼지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럼 실례지만 하나만 묻지. 혹시 미도리라는 친구를 아는가?”
제가 던진 질문에 문 너머로 땡그란 눈동자를 깜빡인 미도리가 고사리 같은 손을 꼼질꼼질하다가 조심스레 본인을 가리켜 보였다. 순간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되고 말았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다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지금껏 아이가 보인 행동만 보더라도 대답은커녕 제 이목을 피해 숨어드느라 정신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틀렸다. 아이는 본인에게 주어진 물음을 회피하지 않고 진중하게 응해주었다. 한 마디로 딱 잘라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들로 너절히 뒤얽힌 파도로 술렁이는 가슴을 어떻게든 추스르려 애쓰며 아이를 향해 활짝 웃어 주었다.
“오오, 그렇군! 네가 바로 미도리구나!”
그러나 구름 위를 걷듯 한껏 고조된 기분을 차분하게 다스리기에 상당히 역부족이었고, 끝내 입에서 북받친 음성이 나오고야 말았다. 제가 낸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미도리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크게 부릅뜬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불꽃이 타닥타닥 튀는 눈총에 서린 뾰로통한 감정에 아뿔싸 싶어 급히 입을 다문 치아키는 아까보다 볼륨을 낮추어 말문을 열었다.
“아차, 소개가 늦었군. 난 정의를 수호하는 레드라고 한다.”
일요일 아침마다 방영하는 특수촬영물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처럼 다소 과장이 섞인 동작으로 소개를 마쳤다. 슬쩍 반응을 살펴보니 저를 쏘아보는 눈빛 속에서 당장 잡아먹을 기세로 타올랐던 불길이 조금씩 수그러드는 게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서도 긴가민가했는데, 그래도 아이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내어 천만다행이지 싶었다. 하지만 아직 한참 멀었다.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하고 손을 뗄 생각은 결코 털끝만큼도 없었다. 지금껏 가시를 뾰족하게 세우며 경계했던 아이가 마음을 열어줄 결정적인 한 방을 터뜨릴 적시기였다.
“오직 너만을 위한 히어로이지.”
아이와 시선을 마주한 채 담담히 읊조리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속눈썹 아래로 또랑또랑하게 빛나던 방울눈이 한순간에 토끼 눈처럼 커다래졌다.
“…히어로?”
“응, 히어로.”
곤경에 빠진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주는 정의로운 존재란다. 이제껏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복숭앗빛 입술을 연신 오물거리던 미도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자칫하면 모르고 지나쳐 버릴 만큼이나 희미한 소리였다. 하지만 이를 놓치지 않고 똑똑히 들은 치아키는 만면에 화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레 그래왔듯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내렸으리라 생각했건만, 전혀 기대치 못한 수확이었다. 감격에 벅찬 마음을 추스르며 히어로의 정의를 간략히 짚어주고는 줄곧 입속에서 맴돌았던 한마디를 밖으로 내었다.
“그리고 나는 오로지 미도리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히어로이지.”
일순 호기심으로 그득하였던 천진난만한 눈망울이 맑게 일렁였다. 흡사 속이 훤히 내다비치는 유리구슬 같았다. 그 속에서 펼쳐지는 찬란한 우주에 일순 넋을 잃을 뻔했지만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자, 그럼 미도리. 나를 부를 이유를 알려주지 않겠나?”
치아키는 아이를 향해 온유하게 웃어 보이며 나긋나긋이 물었다. 아이는 아무 답도 내어주지 않았다. 그저 물음표로 가득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진무구한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일순 터져 나올 뻔했던 웃음을 어떻게든 참아내고 아이가 말문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바라다보았을까. 통통하고 앙증맞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던 미도리가 아까부터 달싹였던 입술을 삐죽 내밀며 웅얼거렸다.
“…부른 적 없는데.”
지극히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야 정말로 저를 부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 같이 당황한 내색을 과장되게 비춘 치아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부른 적이 없다고?”
그거참 이상하군. 분명 미도리가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구태여 소리를 낮추지 않은 채로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흘려놓은 치아키는 곁눈질로 상태를 살폈다. 아이는 다소 혼란스러운 듯했다. 가만두어도 저 혼자 또르르 굴러가는 구슬처럼 생긴 동그란 눈알이 한층 똥그래져선 부단히 되록되록 굴러다녔다. 아무 잘못 없는 이가 한시도 가만있지를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가 참 눈물겨웠다. 아무래도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할 듯싶었다.
“그래, 알았다. 미도리가 아니라고 하니 넘어가도록 하지.”
웃음기를 한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말하자 방금까지 울상이었던 아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치 하늘에 짙게 드리웠던 먹구름이 말끔하게 걷힌 듯했다. 그 나이에 딱 어울리는 순진무구한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워서 순간 무심결에 나올 뻔했던 웃음을 가까스로 삼켜내며 말을 마저 이었다.
“하지만 만일 어둠에 휩싸일 만한 위기가 너에게 찾아온다면, 그때는 망설이지 말고 곧장 나를 불러 다오.”
그러기 위해 내가 있는 거니까. 하마터면 튀어나올 뻔한 본심을 도로 잇새로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아직 핏덩이 같은 어린애한테 괜한 부담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말하고팠다. 오로지 단 한 명만을 위하여 각오를 다진 자신의 정의로운 마음을 부디 알아주었으면 했다. 한낱 부질없는 욕심인 줄 익히 알면서도 차마 버리지 못해 아이의 양어깨를 잡고 시선을 똑바로 맞대었다.
“모리사와 치아키 이름을 걸고 맹세하마. 네가 나를 부른다면, 언제 어디서든 반드시 너에게 달려가겠다고.”
결코 역경에 처한 너를 홀로 두지 않겠다고. 이제 막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처럼 한없이 어여쁜 얼굴에 아슴푸레 피어난 미소만큼은 기필코 지켜내 보이겠다고. 열의에 찬 자신의 얼굴을 오롯이 담아낸 비췻빛 눈망울을 향해 맹세한 결의를 가슴 속에 단단히 새겨놓은 치아키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해당 글은 소장본을 목적으로 작성되어졌습니다. 따라서 도중에 연재를 멈추고 뒷 이야기는 소장본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