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스타!

라이트노벨 주인공인 내가 같은 부활동의 남자 선배를 상대로 럭키스케베를 일으키는 바람에 나의 성정체성과 작품의 방향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건에 관하여

내 이름은 타카미네 미도리.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남자 고등학생이며, 어떤 라이트노벨의 주인공이다. 순식간에 평범하지 않은 것 같은 설명이 되어버렸지만 내가 평범한 남자 고등학생인 건 사실이다. 라이트노벨 주인공이라는 것은 중2병에서 비롯된 망상은 아니고 그냥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 세계는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써내려져가는 거구나, 하고.

내가 몸담은 이 라이트노벨(이하 라노베)은 현대 배경에, 아마 로맨틱 코미디에 가까운 일상물일 것이다. 일상물의 주인공이 으레 그러하듯 나는 기본적으로는 아주 평범하고 특별할 것이 없다. 노력을 절약하는 편이지만 실제로 무언가를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게 무엇이든 아마 그럭저럭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한 사람이겠지만.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이 그렇게 뛰어나게 잘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쉬이 다른 이의 호감을 얻어낸다. 물론 이건 서술트릭의 일종이고 실제로는 제법 잘생긴 축에 속할 것이다. 이것도 나의 내레이션으로 밝힐 만한 문장은 아니지만. 아, 이 이상 이쪽 설정을 언급하는 건 조금 위험하다. 서술트릭이니 내레이션이니 자칫하면 세계관의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

하여튼, 내가 나의 이야기를 로맨틱 코미디가 가미된 일상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내게는 특별한 능력이 없다. 물론 앞으로 특별한 능력이 개화할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건 크게 바라지 않는다. 전부 귀찮아질 뿐이다. 나는 웬만하면 평범하게 살고 싶다. 이왕 라노베 주인공으로 태어났으니 대단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었지만, 그런 것도 전부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게 될 뿐이다. 흑역사라는 꼬리표까지 붙여가며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 인생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라노베, 그러니까 일상물은 물론이거니와 능력자가 나오거나 이세계로 끌려가는 라노베까지 포함해도 주인공은 대부분 고등학생이다.

물론 나는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1학년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는 아직 긴 시간이 남아있으니 벌써 안심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커다란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 내가 주인공인 어떤 라노베의 도입부는 아마 이런 문장으로 시작할 것이다.

타카미네 미도리, 실수로 아이돌이 되어버리다.

그 문장으로부터 나의 인생은 급류를 타게 되었다. 실수로 아이돌 특성화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다니, 제정신 박힌 사람이 할 수 있는 실수는 아니었지만 라노베 세계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이건 그렇게 짜여진 세계다. 절대로 내가 멍청한 탓이 아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인 마지막 세 번째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울해지는 이야기인 동시에 가장 확실한 이유다. 내게 호감을 보이거나 내가 호감을 갖고 있는 여자아이들은 내 앞에서 일종의 서비스신을 연출하게 되곤 한다. 실수 내지는 실수로 포장된 세계관의 구속력에 의해.

그러니까, 좀 더 익숙한 말로 고치자면 럭키스케베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단어가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지만. 오히려 우울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지만. 그야,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서로 민망해질 뿐인 그런 상황을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이런 유치하고 민망한 사고가 다뤄지는 라노베에 수요가 있으니 나도 이런 수모를 겪고 있는 것이겠지. 이래서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동정 오타쿠 남자들과는 상종을 할 수가 없다. 물론 나도 라노베 주인공의 숙명에 따라 동정이고, 유루캬라 한정이라면 오타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조금 다르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아무튼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 좋아할 수는 없었고 실수라고는 해도 결과적으로 남학교에 입학을 했기에 한동안은 길거리에서 가볍게 일어나는 사고만 아니면 꽤 무사히 보냈다. 1학년이 입학하는 시기에 전학을 오게 된 2학년의, 이 학교의 유일한 여자인 선배가 있었기에 학기 초에는 조금 긴장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사람과는 럭키스케베가 일어나지 않았다. 묘하게 유루캬라 같은 느낌도 있었고 함께 있으면 편한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일로 서로 불편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여튼 드문 치유계 선배였다.

내가 라노베 주인공인 것처럼 그 사람도 그 사람 나름의 세계관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과로하는 인생을 굳이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타이쿤 계열 게임의 주인공 쯤 되는 건가?

아무튼 그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나를 부활동과 유닛에 끌어들인 3학년 선배였다. 당연히 그 선배는 나와 같은 남자였으나, 우리의 사이에는 당연하지 않은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말하자면 그 선배를 상대로 럭키스케베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모리사와 치아키. 내가 속한 전대 아이돌 유닛인 유성대의 리더이자 내가 속한 농구부의 부장이다. 이 정도까지 그와 겹치는 집단에 내가 소속된 건 우연이 아니다. 전부 모리사와 치아키가 나를 끌어들인 탓이었다.

모리사와 선배는 나와는 다른 타입의 인물로, 또 나와는 다른 의미의 주인공에 어울리는 남자였다. 전학생 선배처럼 장르를 붙인다면 역시 스포츠물일까. 아이돌 학교의 농구부라는 것은 스포츠물의 무대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도 조금 들지만 그는 어떻게 봐도 스포츠물에 어울리는 성정의 남자였다. 밝고 열정적이면서도 사람을 이끌 줄도 안다.

말한다면 완성된 사람이다. 주인공보다는 주인공을 이끌어주는 리더의 역할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나에게 역시 그런 존재였다. 부활동에서 유닛까지, 모리사와 선배는 차근차근 나를 자신의 영역에 들였다. 귀찮기는 했지만 싫은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나의 귀찮음이나 낮은 의욕을 물리치고 어떻게든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는 건 좋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런 사람과 계속해서 민망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역시 조금, 사실은 아주 많이 불편하다.

“타, 타카미네에에!”

마침 모리사와 선배의 긴박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계단 위에서부터 거의 날다시피 넘어지는 모리사와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이건, 피할 수가 없다. 그렇게 직감한 나는 오늘도 라노베 주인공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여자아이를 상대로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었는데, 모리사와 선배는 여러 의미로 과격하다. 그의 성격과도 관계가 있는 걸까. 내가 아무리 힘이 좋다고 해도 모리사와 선배는 남자고, 나보다 작기야 하지만 그렇다고 키며 무게며 나와 크게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위에서부터 날아오면 아무리 나라도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별수 없이 뒤로 넘어진 나와 내 위로 엎어진 모리사와 선배가 한데 엉켰다. 이렇게. 보통은 모리사와 선배의 실수로 내가 당하게 되는 입장이다. 모리사와 선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뱃가죽에 닿은 엉덩이가 바르작대며 자세를 고치는가 싶더니 똑바로 앉는다. 아니, 고쳐앉지 말고 비키라고.

“우오옷! 미안하구나!”

그래도 같은 남자다보니 모리사와 선배는 적어도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아예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제 엉덩이가 어디에 닿아있고 우리가 어떤 자세로 엉켜있든 그런 식으로는 절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거다. 순진한 탓일까, 아니면 남자는 성적으로 여길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탓일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 오히려 나로서는 고마울 일이다. 그가 만약 이런 상황을 민망해했다면 나든 선배든 둘 중 하나는 이미 서로 다른 유닛과 부활동을 찾아 도망쳤겠지. 유닛도 부활동도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변명거리로 꼬투리를 잡아 내뺄 만큼 싫은 것은 또 아니었다. 그래서 모리사와 선배의 대응은 내게 있어서는 수많은 불행 중 드문 다행이었다.

“하아……. 알았으니까 얼른 비켜달라구여…….”

“음! 그래!”

모리사와 선배가 재빨리 내게서 몸을 일으켰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모리사와 선배가 이런 상황을 묵인하는 건 정말로 그런 단순하고 허울좋은 이유인가? 모리사와 선배가 순진한 탓인가? 아니면 선배는 나와 같은 남자이기 때문에 부끄러울 게 없어서 이런 상황을 그냥 내버려두는 건가?

상황의 근거를 떠올린다. 럭키스케베는 언제나 호감을 가지고 있는 여자아이와 발생했다. 그리고 모리사와 선배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뭐, 그러지 않고서야 나를 이렇게까지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호감의 종류가 만약, 지금까지 럭키스케베를 일으켰던 여자아이들의 호감과 상동한 것이라면.

모리사와 선배는 내게 그런 종류의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걸까. 모리사와 선배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어떤 호감을 품어버려서, 이런 일들이 생겨버린 것일까. 그렇다면 조금 미안하다. 본인도 알아채지 못한 마음을 상대가 먼저 알아채고, 거기다 하필이면 내가 그 상대였던 탓에 몇 번이고 엉망진창에 대상조차 명확하지 않은 보여주기 식의 스킨십을 하고 만다. 거기에 사랑의 설렘이나 두근거림이라고는 느껴질 수 없을 것이야 당연했다.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타카미네? 어디 잘못 부딪치기라도 한 건가?”

아, 또다. 일어나지 않는 나를 살필 셈인지 모리사와 선배가 몸을 숙였다. 그 바람에 교복 셔츠 안쪽으로 탄탄한 가슴을 가르는 선명한 골이 보인다.

어처구니 없는 광경에 눈 앞이 아찔하다. 물론 그런 걸 봐도 나는 전혀 기쁘지 않다. 그저 조심성 없는 모리사와 선배의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났을 뿐이다. 내가 표정을 굳히자 모리사와 선배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진한 얼굴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구도 역시 결국은 세계관의 소행일 테다. 나는 투덜대며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실수가 잦으면서 어떻게 스턴트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 위험하지 않아여?”

모리사와 선배는 잘못한 게 없다. 문제는 나의 세계관이고 모리사와 선배는 우연히 걸려들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모리사와 선배를 탓하는 말이나 하고 만다. 누가 봐도 모리사와 선배의 실수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만은 사정이 다르다. 그런 내가 그렇게 말했다. 정말이지 최악이다.

하지만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모리사와 선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씩 웃고는 대답했다.

“날 걱정해주는 건가? 타카미네는 역시 상냥하구나!”

정말, 이 사람의 머리 속은 도통 알 수가 없다. 말을 섞을 기분도 들지 않아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때마침 지나가던 학생의 어깨가 모리사와 선배의 등에 스쳐 그의 몸을 무정하게 밀어버린다. 아, 또 이렇게 된다. 모리사와 선배가 휘청이듯 넘어져 내 품에 안기게 될 것은 아주 익숙하고도 뻔한 클리셰였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내게 있어서는 언제나 독이었다. 모리사와 선배의 실수로 일어나는 사고라면 오히려 나았다. 그를 책하고 앞으로 조심하라고 경고도 못 될 경고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부주의가 가져오는 시각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어떻게 주의를 주기도 애매했다.

보통은 부활동 중에 일어나는 일들이 그러했다. 푸시업을 할 때 소매통이나 깊이 파인 넥라인 안쪽으로 보이는 탄탄한 가슴이며 싯업을 하는 동안 세워놓은 무릎 탓에 통이 큰 바지가 흘러내려 보이는 매끈한 허벅지 따위는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싯업을 하는 동안 그의 하체를 고정해주길 부탁받았을 때에는 이 사람이 일부러 나를 도발하기 위해 이러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유니폼 안쪽으로 보이던 속옷은 까만색의 라인이 선명하게 존재를 과시하는 빨간색의 드로즈였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어차피 남자끼리고 그런 쪽으로 신경쓰는 게 이상한 일이다. 모리사와 선배는 무방비한 게 아니라 애초에 방비할 필요가 없다. 나는 같은 남자니까 조금 보여져도 상관없다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모리사와 선배에게 신경을 쓰고 마는 내가 싫다. 아마 나도 내 인생을 장악해버린 이 민망한 사고에 익숙해진 것일 테다. 사고와 실수를 넘어서 의도가 없는 단순한 행동에조차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 하는 거지. 아주 라노베 주인공 다 되셨다.

준비운동을 마친 모리사와 선배는 몸이 달았는지 목둘레를 잡아 유니폼을 팔락이며 바람을 일으켰다. 그때마다 유니폼 안쪽의 가슴이 보인다. 도드라진 유두가 계속해서 시야에 들어 애써 눈을 돌렸다. 그걸 계속 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방과 후의 연습은 금방 끝났다. 유닛연습이니 뭐니 빠지는 인원이 많았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타과 학생들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덜렁 남아있게 된 우리는 함께 하교하기로 했다. 모리사와 선배의 제안이었다. 세계의 수속이 그런 것인지 뭔지 우리는 곧잘 자연스레 둘만 남게 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별수 없이 그의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

우리는 땀에 젖은 몸을 이끌고 함께 샤워실로 향했다. 모리사와 선배의 부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묘한 불안감이 심장을 짓이기는 것만 같았다. 꾹 조여오는 숨통을 애써 모른체하며 나는 샤워기의 물줄기에 머리카락을 적셨다.

“우옷! 비누가 타카미네 쪽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렇게 꾸며낸 태도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모리사와 선배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다. 이내 발꿈치에 무언가 닿았다. 습기에 녹은 비누가 미끄러져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아, 기다려봐요.”

그렇게 말하며 샤워기를 잠근 순간이었다. 거의 동시에 모리사와 선배가 샤워부스의 커튼을 거두었다.

“잠깐 실례하마!”

커튼을 고정한 고리가 차르륵 움직이는 소리에 비로소 나는 모리사와 선배가 내가 자리한 샤워부스의 커튼을 쳤다는 사실을 알았다.

“엣, 무슨, 에에엑……!”

당황한 나는 몸을 돌렸고, 모리사와 선배의 살짝 상기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모리사와 선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음?”

그리고 그 순간 어쩐지 몸이 기울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느낌 따위가 아니다. 제대로 기울어졌다. 순간 바닥을 확인하면 내 발 밑에는 모리사와 선배가 놓친 비누가 놓여있다. 아, 이건 완전히 끝났다. 다시 한 번 모리사와 선배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의 당혹에 물든 얼굴 위로 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헉……!”

“우와앗!”

언제나처럼 우리는 함께 넘어졌다. 비명과 바닥에 몸이 부딪치는 소리가 넓은 샤워실에 크게 울렸다. 벌거벗은 몸이 이 이상 맞닿는 것이 싫어 바로 몸을 일으켰다. 손으로 짚은 살갗이 부드러웠다. 뭐, 살갗?

그랬다. 내 손이 짚은 것은 모리사와 선배의 맨살이었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그 중에서도 하필이면 가슴이었다. 내 몸을 지탱할 셈으로 힘을 준 것이 움켜쥔 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손바닥 아래의 그것은 운동을 해온 탓에 군살 없이 단단했고 남자의 몸답게 납작한 가슴이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별 일 아니었어야 했다.

하지만 모리사와 선배가 문제였다. 아무리 이런 상황에 익숙해졌고, 그걸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신체적인 자극에마저 무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리사와 선배가 흠칫 몸을 움츠리며 크게 신음했다.

“흐익!”

새된 신음이었다. 화들짝 놀란 모리사와 선배는 움츠린 그대로 굳어 내 아래에 있다. 그는 바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마 제가 뱉어낸 신음에 놀란 것이겠지. 모양 좋은 귓불이 새빨갰다. 그건 결코 더운 물에 상기된 것이 아니었다. 목욕물에 젖어 따끈하게 열이 오른 살갗과는 비교도 못 될 정도로 벌겋게 달은 귓볼이 안쓰럽다.

나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일으켰다. 먼저 자리를 피해주는 게 맞는 걸까. 모르겠다. 모리사와 선배가 어떻게든 먼저 움직여주기를 기다렸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여전히 시선을 떨어트린 채로 울상이 되어있다. 이번 건, 조금 심했다고 생각한다. 세계관.

그야, 제가 그렇게 신음할 줄은 모리사와 선배 자신도 전혀 몰랐겠지. 겨우 몸을 일으킨 모리사와 선배는 나를 피해 도망쳐버렸다. 그의 머리카락 끝에는 미처 씻어내지 못한 거품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물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리사와 선배가 만약 부끄러워하는 일 없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면 내 쪽이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을 것이다. 나는 한참을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그가 온전히 도망치기를 기다렸다. 차마 그를 만나고 평범하게 이야기를 나눌 자신이 없었다.

아니. 사실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 나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모리사와 선배는 다르다. 이런 멍청하고 민망한 사고에 휘말린 적은 없을 것이다. 아마 혼란스럽고 불쾌하겠지. 억울할 것이다.

의외로 여린 사람이니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을 멈춰세우고 싶지 않았다.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내 앞에 서면 평소처럼 선배를 연기할 것이다. 그래서 모리사와 선배를 따라가지 않았다. 모리사와 치아키가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도록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어쩌면 이 일을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이런 멍청한 사고는 반복될 것이다. 모리사와 선배는 얼굴을 빨갛게 만들고 도망갈 것이고 나는 그 자리에 홀로 남을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그는 온전히 나로부터 벗어나고 나는 온전히 홀로 남게 될 테다.

매번 그랬다. 지금까지도 곧잘 있었던 일이었다. 이건 사고다. 나와 서로 호감을 가졌던 것이 분명한 어떤 여자아이들을 떠올린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어느 쪽의 잘못이라는 오해의 여지조차 없는 사고였다. 그런데도 몇 차례의 사고 끝에는 그게 누구였든 서로에게 어색해졌고 끝내는 소원해지곤 했다. 이번에도 그런 걸까. 모리사와 선배와 나는 그렇게 멀어지고 마는 걸까.

나를 피해다니는 모리사와 선배를 상상했다. 실수처럼 마주친 순간 당황할 얼굴을 상상한 순간에는 무언가가 내려앉는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귀찮을 뿐인 사람이다. 내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지금만은 어쩐지, 가슴 한 편이 답답해져서.

2학년이 되어 후배 여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제대로 라노베 전개가 시작될 테다. 그러면 모리사와 선배는 자연스럽게 럭키스케베의 타깃에서 열외가 되겠지. 아니면 모리사와 선배는 모리사와 선배대로 유지가 되면서…….

뭐,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전부 부질없는 일이긴 하다. 모리사와 선배는 내가 2학년이 되는 시점에는 졸업해서 이 곳에 없을 테다. 가끔 만나기야 하겠지만. 호감의 어미는 쉬이 과거형으로 변하곤 한다. 모리사와 선배 역시 다르지 않을 테다. 열렬한 사람이니 더더욱 쉽게 식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게 되겠지.

그때까지만 참아달라고 하고 싶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모리사와 선배가 그런 나의 잘못도 아니고 선배의 잘못도 아닌, 그저 멍청하고 한심한 세계관의 농락에 패해 내게서 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졸업하고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하여튼 이 사람만큼 내게 신경써주는 사람도 드물고. 그리고 그렇게 생각이 미친 순간에야 작은 의문이 드는 것이다.

나, 모리사와 선배에게 왜 이렇게까지 신경쓰고 있는 거야?

그야 라노베의 타깃은 보통 동정도 아직 떼지 못한 오타쿠 남자들이다. 남자 상대로 서비스신을 연출해봐야 크게 의미가 없다는 거다. 뭐, 남자니까 오히려 수위에 크게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더 서비스신을 연출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여자 캐릭터를 그려놓고 남자라고 우기기의 일종으로 모리사와 선배처럼 딱 봐도 남자다운 남자와는 전혀 관계 없을 연출이다. 모리사와 선배의 캐릭터는 라노베에서는 사건을 만드는 타입이다. 결코 연애의 대상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모리사와 선배를 신경쓰고 있는 건 내가 속한 작품의 방향성에 혼란이 생기는 것을 걱정하는 탓이다. 그 뿐이다.

모리사와 선배는 나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등교를 했고 학교에서의 활동을 했다. 나는 미련하게 그 사실에 안도했지만 도망치지 않는 모리사와 선배의 마음이 쉬이 잡히지 않아 금세 또 의문을 느끼기는 했다. 선배는 이대로도 괜찮은 건가요. 뭐, 그런. 그야, 절대로 괜찮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그 남자는 나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제가 나를 피한다면 내가 상심할 것이라고, 자만에 가깝지만 결코 틀린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상을 하고 있겠지.

차라리 모리사와 선배가 라노베에 자주 등장하는 폭력 히로인처럼 럭키스케베가 일어날 때마다 나를 단죄했다면 이 죄책감은 조금 덜어졌을까. 물론 모리사와 선배 같은 체육계 남자에게 얻어맞는 건 나라도 조금 무섭고. 뭣보다 모리사와 선배는 폭력적이지도 않고, 라노베의 히로인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에 있어 모리사와 선배는 대체 어떤 존재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교정을 걷고 있으려니 문득 모리사와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타카미네~!”

“엑.”

들려오는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선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환청인가 생각했지만 내가 찾지 못하자 다시 한 번 들려오는 것이 환청은 아닌 모양이었다.

“여기다, 여기!”

“여기라고 해도…….”

설마설마 하면서 고개를 들자, 나무 위에 앉아있는 모리사와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이 위치는. 어쩐지 느낌이 왔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조금 서둘러 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그런 데엔 왜 올라간 거예여!”

“그렇지! 이 녀석을 봐라!”

내 말에 모리사와 선배가 조금 신이 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집중할 새는 없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제 재킷의 앞섶을 벌리는 손짓에 이를 악물었다. 손이 온전히 떨어진 순간에야 비로소 모리사와 선배는 위험을 감지한 것처럼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니까, 너무 늦다고!

“앗……!”

그러고도 모리사와 선배는 나뭇가지를 잡는 대신 앞섶의 여밈을 꽉 쥔다. 무언가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이었지만 그건 모리사와 선배 자신의 위험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말! 조심성 없기는! 곧 저 남자 아래에 깔릴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왔다. 엉덩이로 내 얼굴을 깔아뭉갠다든지, 또 내 위에 올라탄다든지 여러가지 상황을 상정한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좋은 의미로 말이다.

이번에는 다행이도, 제대로 받아든 것이다. 빈 말로도 가볍다고 할 수는 없을 몸이었지만 이 정도는 큰 무리도 못 되었다. 얼굴로 엉덩이를 받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나는 얌전히 내 품에 안겨있는 모리사와 선배를 내려다보았다. 어울리지 않게 얌전한 모양에 나는 금방 그 이유를 알았다. 모리사와 선배를 안아든 나의 손이 그의 겨드랑이 아래의, 옆가슴에 닿아있었다. 역시 이것도 럭키스케베의 일환이었구나.

정말 질린다. 나는 모리사와 선배를 고쳐안았다. 그러면서 그의 몸에 닿은 손을 자연스럽게 떨어내면 모리사와 선배도 희미하게 안심한 눈치다. 이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전부 삭혀버리는 것이 어쩐지 내키지 않아서, 나는 다시 한 번 불퉁하게 물었다.

“대체 왜 그런 곳에 있었던 거예요.”

제가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지. 살짝 기가 죽은 모리사와 선배가 눈동자를 굴리며 중얼거렸다.

“으음, 그게 말이다…….”

모리사와 선배는 여몄던 교복 재킷의 앞섶을 조심스럽게 열어 그 안쪽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 자리에 소중히 안겨있는 건, 보송보송한 털뭉치다. 무엇인지 확실히 구분이 가지 않아 멍하니 들여다보니 털뭉치가 바르작대며 모리사와 선배의 셔츠에 매달리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털뭉치에게서 고양이의 형체를 찾았다. 작은 고양이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던 모리사와 선배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 녀석을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말이다.”

그 진지하고 다정한 목소리에는 어째 할 말이 없어져서, 나는 퉁을 주며 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으……. 하여튼 조심하라구여.”

“음! 미안하구나!”

모리사와 선배는 흔쾌히 사과했다. 문득 샤워실에서의 사고를 떠올렸다. 하지만 나와 달리 모리사와 선배는 그날의 일을 크게 신경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신경쓰고 있다면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모리사와 선배가 그 일을 신경쓰고 있기를 바라기라도 했던 걸까. 그 사고에 대해 혼자 신경쓰고 있는 게 꼴불견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쩐지 불퉁한 투로 대꾸하고 말았다.

“선배도 같은 남자랑 계속 이런 식으로 스킨십하는 거, 기분 나쁘잖아요.”

내 말에 모리사와 선배가 잠깐 침묵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어쩐지 표정이 없다. 모리사와 선배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 역시 기분 나쁜 일이지?”

“네?”

나한테 그런 식으로 되물을 줄은 몰랐기에 나는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모리사와 선배를 바라보았지만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모리사와 선배가 내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려버린 탓이었다.

“같은 남자를 만지는 건.”

모리사와 선배가 그답지 않게 침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내 모리사와 선배는 다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순간 눈이 마주쳤고 모리사와 선배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깊이 숙인 허리는 사과의 의도다.

“정말 미안하다! 타카미네가 불쾌했다면 사과하마!”

“아, 아니……. 모리사와 선배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일부러 한 게 아니라도 타카미네가 나 때문에 불쾌했다면 당연히 사과해야지.”

고개를 든 모리사와 선배는 웃고 있었다. 웃는 채로 굳어버린 것만 같은 얼굴은 이 사람답지 않다. 그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리던 사람인데 지금만큼 부자연스러웠던 적이 없다. 가장 모리사와 치아키답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게 꾸며낸 것임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쩐지 눈 앞이 핑 돌았다. 그것이 머리 끝까지 열이 오른 탓이라고 이내 알았다. 목구멍까지 확 차오르는 부정적인 감정들에 그만 숨이 막히는 듯 했다.

그 이후로 모리사와 선배는 확실히 눈에 보이게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전부 익숙했다. 정말로 그건 지금까지도 곧잘 있었던 일이었다.

“……짜증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나를 좋아해주고 소중히 여겨준 사람이 우리의 선택이라고는 존중되지 않는 폭력적인 운명 탓에 나를 멀리하게 되는 과정을 싫어했다. 나는, 굳이 말한다면 모리사와 치아키의 열렬한 호감과 다정한 민폐를 결코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남자가 그런 사고들을 눈감아 줄 만큼 무디고 천진한 남자라서 다행이라고, 그런 치사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인정하자. 나는 모리사와 선배가 내게 가진 호감과 인내로 포장된 배려 위에 비로소 만들어진 관계에 안주했다. 나에게는 이 관계를 변화시킬 의지도 없었고 이 세계관의 문제를 해결할 생각도 없었다. 모든 문제는 라노베의 시대착오적인 세계관과 그런 나를 향하는 모리사와 치아키의 호감 탓에 생기는 것이라고, 문제의 책임을 나의 외부로 모조리 돌렸다. 전부 나의 잘못이었다.

“요즘 치쨩 부장, 연습 자주 빠지지 않아?”

농구부의 연습 중에 아케호시 선배가 모리사와 선배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를 향한 질문일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맥없이 대답했다. 선배의 말을 무시할 만큼 담력이 센 것은 아니었다.

“……뭐, 어디가서 또 이상한 사고나 내는 건 아닌지 걱정되긴 하네여.”

그게 모리사와 선배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는 주제에, 내가 하는 말이라곤 결국 그 정도다. 내가 툴툴대며 한 말에 아케호시 선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아케호시 선배의 얼굴을 확인한 다음에야 깨달았다. 또 실수했다. 이번에도 모리사와 선배의 탓으로 돌리고 말았다. 하지만 아케호시 선배가 의외라는 듯이 한 말은 내게도 충분히 의외였다.

“타카밍은 상냥하네.”

“엣. 갑자기 뭐예여…….”

“오, 상냥하고 힘세다고?”

“응응, 그거!”

이사라 선배가 익숙한 문장을 읊으면 아케호시 선배가 이사라 선배에게 윙크를 하며 받아친다. 같은 유닛이라 그런지 죽이 잘 맞는다. 나는 유연한 랠리처럼 이어지는 대화를 바라보며 죽상을 했다.

“그거 진짜 그만둬여…….”

“그치만 타카밍, 걱정되는 거잖아?”

“비꼰 건데요, 지금 건.”

“그거야 치쨩 부장이 타카밍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있으니까?”

한 점 티없이 커다란 눈동자가 여전히 똑바로 나를 향해 있었다. 오히려 아케호시 선배는 나를 답답하게 여기는 기색이다. 영문을 모르겠다. 아케호시 선배가 고개를 기울이며 덧붙였다.

“사고가 생겨도 받아줄 수 없으니까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거잖아.”

받아주다니? 그의 말에 의문이 들었을 즈음 이사라 선배가 아케호시 선배를 만류했다.

“어이, 스바루.”

어쩐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반응에 나는 이사라 선배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사라 선배가 상황을 무마하려는 양 어색하게 웃어보인다. 내가 모리사와 선배를 구해주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오히려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케호시 선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사라 선배에게 되레 묻는 것이다.

“왜 그래. 사리도 본 적 있지 않아? 2층에서 뛰어내리는데 온몸으로 받아주는 거.”

“음, 뭐. 부장도 타카미네가 받아주니까 더 날뛰는 건 있지.”

“……네?”

“타카미네가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사라 선배마저 그런 소리를 한다. 나는 그제야 이사라 선배가 아케호시 선배를 만류한 이유를 알았다. 당황한 나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건 마치.

“잠깐, 잠깐만요.”

마치 이 수많은 사고의 근거가 내게 있다는 것 같은 말이었다.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건 선배가 아니라 내 쪽이었다고. 그 호감 탓에 나는 모리사와 선배가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는 꼴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이라고. 내가 손을 뻗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면서도 전부 받아내고 말았다고.

이렇게 나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라면 나는 얼마나 노골적으로 그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고 있었던 걸까. 아케호시 선배가 다시 한 번, 제대로 못을 박았다.

“그렇잖아. 타카밍은 반드시 치쨩 부장을 받아준다고.”

하여튼 불편한 사람이다. 언제나 그렇게, 솔직하고 꾸밈없는 언어로 치고 들어온다. 짐승처럼 눈치가 빠르면서 짐승과는 다르게 언어를 쓸 줄 알아서. 순간 열이 올랐던 얼굴은 지금까지도 내리 뜨겁게 달아있는 것만 같다.

나는 이미 열기가 가신 뺨을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며 교문을 나섰다. 어차피 모리사와 선배도 나를 피해다니고 있는 마당에 나를 붙잡을 건 없다. 그렇게 생각이 미쳐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뺨을 문지르던 손짓은 멈춘 다음이었다.

모리사와 선배는 괜찮은 걸까. 제 실수도 아닌 문제로 내게 마음을 쓰고 있을 당신을 떠올린다. 괜찮을 리가 없다. 모리사와 선배를 만나야겠다. 그렇게 결심한 순간이었다. 어디서부턴가 조급한 발걸음이 들려왔다. 소리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교정의 펜스를 뛰어넘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모리사와 선배?!”

“타, 타카미네?! 어째서……!”

놀란 목소리가 나를 향한다. 본래 펜스를 뛰어넘어 몰래 하교하는 타입은 아니고, 오히려 성실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니 아마 부회장에게 쫓기거나 하고 있었을 테다. 그가 부회장의 심기를 건드렸을 행동이야 충분히 상상이 간다. 아마 펜스 너머에는 그 무시무시한 부회장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는 와중에도 나를 확인한 다음에는 몸을 무를 생각이나 했을까. 그 망설임이 당신의 패인이다. 이번에도 당신은 넘어질 것이다. 머리가 결론을 짓기도 전에 뻗어나가는 팔의 움직임을 이제는 안다. 나는 처음부터 모리사와 선배를 지탱해 줄 셈이었다. 언제든, 그랬다. 그걸 알게 된 지금에 와서도 나는 모리사와 치아키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으, 아…….”

모리사와 선배가 펜스에서 떨어진 순간, 어처구니없게도 이마가 서로 맞닿았다. 럭키스케베라면 여기서는 입술이 맞닿아야 하는 거 아냐?! 금속으로 만들어진 타악기로 이마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울리는 머리로는 그 정도의 생각을 했다.

눈 앞이 핑 도는 것 같아 제대로 눈 앞을 확인할 수도 없었으니 그저 내 몸에 부딪치는 것이 모리사와 선배의 마르고 단단한 몸이라는 것만 대충 알았다. 이미 부딪쳐버린 것을 어떻게든 추스려보겠다고 웅크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꾸물대는 모리사와 선배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중심을 잃은 몸이 무너진다. 모리사와 선배를 품에 안은 채 등에 닿는 딱딱한 바닥을 느꼈다. 역시, 아프다.

“으…….”

나의 신음에 모리사와 선배가 정신을 차린 듯 퍼뜩 웅크렸던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바람을 가르고 달려온 탓에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곧은 이마가 보였다. 이마가 발갛게 달아있는 걸 보니 오늘 저녁 즈음에는 혹이 생길 것 같다. 내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미, 미안하다!”

그런 사과를 해왔다. 그러더니 버둥대며 제 몸을 일으키려 한다. 나는 어느새 양손으로 붙들었던 그의 몸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놓아주었다. 그러면 모리사와 선배는 재빠르게 일어나 한 걸음 멀찍이 떨어진다. 안절부절 못하며 나의 눈치를 보는 것이 뻔히 보였다. 그래도 역시, 넘어진 나를 두고 도망칠 만한 사람은 아니다. 아마 모리사와 선배가 펜스를 넘은 순간 부회장은 그를 붙잡길 포기했을 것이고. 막연한 계산 끝에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나는 모리사와 선배보다 조금 느리게 일어났다. 바닥에 구르느라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하면서는 모리사와 선배에게 가볍게 퉁을 주었다.

“모리사와 선배의 실수가 아니잖아요.”

“……알고 있다.”

알고 있었구나. 이 둔해보이는 사람마저도. 그걸 새삼스레 확인하고 나니 어쩐지 머리가 찡하다. 지금 당장 도망치고 싶다. 이왕이면 영원히……. 내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던 모양이지. 모리사와 선배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건 타카미네의 상냥함이지.”

“그래서 참았던 건가요?”

나는 조금 서둘러 대답했다. 그건 마치 나의 분을 참지 못하는 것 같은 물음이었다. 모리사와 선배의 말은 지금도 변함없이 나를 포장하는 말이었다. 포장지 안쪽의 내장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숨이 막힌다. 나는 목 아래까지 차오른 매캐한 연기를 토해내듯 다시 한 번 물었다.

“기분이 나빠도, 참은 건가요? 날 생각해서?”

“아니.”

모리사와 선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 번도 참은 적 없다.”

말도 안 된다. 그의 말을 부정하려 입을 연 찰나 모리사와 선배가 말을 이었다.

“타카미네라면 괜찮다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모리사와 선배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엔 어쩌면, 그것마저도 나를 달래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에 나는 그 생각을 철회했다.

모리사와 선배는 곧바로 맥없이 시선을 떨어트렸다. 제 뺨을 긁적이는 손 끝이 그 쾌활한 남자의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당당하게 말해놓은 주제에, 태세 전환이 지나치게 빠르다. 그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다. 모리사와 선배가 말했다.

“이런 건, 역시 기분 나쁘겠지?”

그렇게 말하는 모리사와 선배의 얼굴이 조금 쓸쓸해보여서, 나는 나도 모르게 목을 울렸다.

“……역시 기분 나빠.”

“으, 음. 그렇지.”

모리사와 선배가 시선을 맞추지 못한다. 그 얼굴을 마주하니 어쩐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착각하지 말아요. 당신이 기분 나쁜 게 아냐. 나도 모리사와 선배라면 괜찮다고,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상관없다 뿐일까. 나는 언제든 간에 당신에게 손을 뻗었다.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거나 당신의 무게에 깔리는 정도라면 괜찮았다. 당신을 받아주고 싶었다. 어차피 나는 조금 힘이 센 것 외에는 달리 장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다.

라노베의 도식이란 으레 그러했다.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소년이 평범하지 않은 소녀를 만나 특별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것을 기본 골자로 삼는다.

하지만 내 눈 앞에 있는 건 일단, 소녀는 아니다. 언뜻 평범하지 않은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결국은 아주 평범한 소년이고 라노베의 히로인보다는 스포츠만화의 등장인물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런 우리의 이야기는 아주 특별할 것이 없다. 게임 속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이세계로 전이된 것도 아니며 여자아이들에게 잔뜩 둘러싸인 나날이 이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부정하고 나니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아졌다. 이 세계는, 라노베라는 장르가 가지는 중력을 잃었다.

“그게 기분 나빠.”

이를테면 특이점이다. 모리사와 치아키를 만난 뒤로, 내게는 라노베 세계관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는 세계관의 중력을 일그러트리는 인간이다. 이대로라면 이 이야기는 본래의 장르에서 벗어나고 만다.

하지만 그건 결코 모리사와 치아키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

아마 세계관도 나와 이 이야기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라노베 운운하며 내 마음을 애써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이 이상은 무리다. 이 세계의 방향성을 어그러트린 것은 모리사와 치아키가 아니다.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모리사와 치아키를 좋아하고 있다. 식을 것을 상정하지 않는 당신의 열렬한 호감이 기뻤고 당신의 다정은 민폐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너무 따뜻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지근거리에 마주한 눈이 커다래져 있었다.

“미안해요.”

나는 내게서 도망치려던 모리사와 치아키를 붙잡았다. 그대로 놓아주었더라면 이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앞으로도 나는 몇 번이고 모리사와 치아키를 향해 손을 뻗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모리사와 치아키를 안아들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넘어지는 모리사와 치아키를 받아줄 것이다.

무엇도 실수가 아니었다. 그건 나의 저항이었다. 바로 내가, 타카미네 미도리가 라이트노벨의 중력을 밀어내고 당신을 택했다.

“이건 실수가 아니에요.”

그랬다. 그 무엇도, 실수가 아니었다. 긴장하지 않은 척,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입술을 맞댈 생각이었는데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나는 모리사와 선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굳이 실수가 아니라고 덧붙였건만, 그건 애초 실수라고 착각하기에는 지나치게 정중한 입맞춤이었다. 어쩐지 뺨에 열이 올랐다.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낱낱이 들통날 것만 같아서.

우리의 입맞춤은 숨을 교환하는 일도 없이 마쳤다. 나야 라노베 주인공답게 한심한 동정이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혀를 얽고 서로의 타액을 나누는 진한 키스를 하는 방법 같은 건 모른다. 우리의 입맞춤이란 고작 그런 입맞춤이었다. 그런데도 숨이 벅찼다. 미련하게도 입술을 맞댄 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입술을 떨어내었다. 모리사와 선배가 지근거리에서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타카미네…….”

나를 향하는 나직한 부름에 흐트러진 호흡이 섞이는 것이, 아무래도 모리사와 선배도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 같았다. 그걸 깨닫고 나면 어쩐지 이 상황 자체가 한심하고 우스워져서, 내뱉는 말에는 나도 모르게 웃음기가 섞였다.

“모리사와 선배.”

이 이야기에는 더 이상 라노베의 도식을 적용할 수 없다. 라노베라는 장르를 바탕으로 쓰인 글로서는 실패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하지만 세상 일이란 대부분 그렇다. 모든 이야기가 작가의 바람대로 완벽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이야기 또한 방향성을 잃고 멋대로 흘러간 이야기 중 하나일 것이다. 방향성을 잃은 이야기는 가치가 없는 작품이 되는 걸까? 그야, 나의 이야기를 읽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나의 세계가 방향성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을 좋아해요.”

방향성을 잃고 헤매다 도착한 결말이 바로 이거다. 내 고백에, 모리사와 치아키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차마 싫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냐면,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연인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가 뒤집어지거나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해피엔딩이긴 한데, 이걸 내 멋대로 엔딩이라고 이름 붙여도 괜찮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세계는 방향성을 잃은 다음에도 계속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내 주변에도 자잘한 럭키스케베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곤 했고. 결국 나의 세계는 지금까지도 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뜻이다.

여전히 나는 라노베의 주인공이다. 언젠가 나는 평범하지 않은 소녀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어쩌면 갑자기 게임 속의 세계로 들어가거나 마법을 쓸 수 있는 이세계로 끌려가게 될 지도 모르지. 생각해보면 언젠가 이세계의 꿈을 꿨던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런 건 어떻게 되든 좋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갑자기 이세계에 떨어졌는데 죽을 때마다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정말 진심으로 죽고 싶어질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게, 나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우오옷! 타카미네에에!”

익숙한 괴성이 들려왔다. 이런 것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으으, 또예요……?”

나는 넌더리를 내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위였다. 여전히 모리사와 치아키는 멍청한 실수를 하고 나는 그걸 받아준다. 아무리 그래도 2층에서 떨어지는 건 대체 어떤 실수를 하면 그렇게 되는 건가 싶기는 하지만. 아무튼 잘 받았으니 문제 없다.

“고, 고맙구나……! 큰일나는 줄 알았다!”

“정말, 조심 좀 하라구여.”

뭐, 조금 덜렁대다 어디서 뚝 떨어지더라도 이렇게 내가 받아주면 그만이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 멍하니 목을 울려 생각한 그대로 입 밖으로 내려다, 순간 깨닫고 얼굴에 열이 올라 관두었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생각은 몇 번을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나의 진심이다. 나의 타박에 모리사와 선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으며 내게 되물었다.

“하지만 타카미네는 언제나 날 받아줄 거지?”

“윽.”

맞다. 맞지만. 머릿속으로 생각하다 삼키는 것과 확신이 섞인 목소리로 듣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조금 쑥스러워져 모리사와 선배의 시선을 피하면 모리사와 선배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린다.

아마 한동안은 이런 멍청하고 우스울 뿐인 평범한 일상이 지속될 것이다. 그 와중에도 내 세계는 몇 번이고 더 나를 잡아당길 것이고 나와 세계는 다시 한 번 방향성에 혼란을 겪게 될 지도 몰랐다. 하지만 괜찮다. 괜찮았다. 나는 내게 작용하는 중력을 밀어내고 모리사와 치아키를 선택해 일어나게 될 혼란을 받아들일 것이다.

애초에 방향이 정해져있는 이야기 같은 건 작품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방향성을 잃은 이야기에 가치가 없다고 한다면 짜여진 이야기가 아닌 모든 삶의 가치 또한 부정해야 하겠지. 그러니까, 조금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언제든 싫어할 수 없는 결말에 도달하게 될 것이고 내 곁에는 항상 당신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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