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혹은 필연

* 치아키 x 테토라 x 치아키 논시피

* 유혈 표현 주의

* 피쳐 1 x 세기말 워즈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닌 사고였다.

벽에 처박혀 핸들과 앞바퀴가 박살난 바이크의 뒷바퀴가 반동으로 인해 계속 돌아갔다. 엔진은 액셀에 얹혀진 돌무더기로 인해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만약에라도 살아남다면 모든 책임은 운전자인 내가 물어줄거다. 그렇게 생각했으면서도 한켠으로는 도망가야만 한다는 본능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어차피 털릴 것도 없는데 괜찮으려나.

엔진이 무언가에 걸린 듯한 소리를 내며 귓가에 맴돌았다. 나아갈 곳이 없는데도 나아가려하는 그 모습이 어리석었다.

이대로라면 분명 과부하로 폭발한다.

“… 그렇게는 안돼.”

반신이 피로 물들어있었다. 액셀을 밟고 있던 다리는 그대로 바닥에 짓이겨져 겨우 형체만 남았고, 핸들을 불잡은 팔은 당연하게도 남아나지 않았다. 왼팔은 부숴진 벽 파편에 직격타를 맞고 회생불능에, 오른팔은 브레이크가 듣지 않은 탓에 급히 감속을 시도하느라 절반이 날아갔다. 평소 착용하던 장갑이 없었다면 도저히 팔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형체였다. 길게 이어진 붉은 길을 응시하던 나는, 어떻게든 더 이상의 희생을 막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붙어있었지만 말을 듣지 않던 다리에 온 힘을 다해 움직였다. 그나마 멀쩡한 왼팔을 이용해 액셀에 올려진 돌을 치워냈다.

이걸로 일단락 됐어.

그대로 안장에 몸을 기대었다. 바람이 시리게 불어오며 상처를 스쳐갔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도 눈이 감겼다.

잠과 죽음은 먼 친척이라 하던가. 이제서야 이해되는군.

평소와 같을거라고 생각했던 바이크가 오작동을 일으켰다. 몇 년 째 수리를 맡기지 않고도 멀쩡할거라 생각했던 그의 실수였다. 브레이크가 갑자기 듣지 않을텐데에, 라는 지인의 걱정을 듣고도 호쾌하게 괜찮을거라 말대꾸를 했으니 원망을 받게 될 미래가 제 눈앞에 뻔히 보였다.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거절해놓고선 다시 볼 면목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한 번 더 살아남고 싶었다. 살아나서, 남은 인생을 빛내고 싶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기에는 너무나도 싫었다. 내가 달려온 인생은 진흙에 처박히기 위한 것이었나?

그럴 리 없어.

진흙 구덩이 속을 한바탕 구르던 노력가가 손을 내밀어주자, 나 자신에게 물은 질문이 부정당했다.

“넌 누구인가?”

치아키가 의식을 회복하고 난 뒤 자신의 은인에게 물은 첫 질문이었다.

“… 하?”

“말 그대로다. 마냥 도움만을 받을 순 없으니까 말이다. 나중에 답례라도 해주겠다!”

“아녀아녀, 저한테 그럴 필요 없거든여. 괜히 엮였다간 곤란해질텐데.”

“괜찮다!”

거의 온몸에 붕대를 감았음에도 지칠 기색 하나 없는 치아키가 되려 기운차게 대답했다.

“이번 일은 사고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도와준 너에게는 꼭 답례하고 싶다!”

“됐다니까여…”

아침을 가져온 쟁반을 들고 병실을 나가려던 남자가 문득 멈춰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었다. 기웃거리는 치아키를 돌려보낸 그가 메모지를 벽에 불혔다.

“필요한건 여기에 다 적혀있으니까 알아서 하십셔.”

매정하게 쏘아붙힌 남자가 진짜로 문을 열고 나갔다. 너무하는군… 하며, 치아키는 벽에 붙은 쪽지를 읽어나갔다.

“나구모 테토라인가… 정말 꼭 필요한 정보를 제외하곤 없구나. 마음을 좀 더 열어도 됐는데!”

그러면서 과장된 포즈를 취한 치아키가 멈칫 하며 제 팔을 움켜쥐었다.

“아야야… 아직 아픈건 여전하구나…”

그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몰던, 그렇지만 지금은 완전히 박살난 바이크는 지금 이 건물 창고에 고스란히 모셔져있다. 테토라의 말로는 완파당했으니 부품이라도 빼서 쓰겠다는 의도라고 한다.

그럴리가.

“그럼 나도 고쳐쓰려는건가. 살려줬으니 내 일을 도우라며 온갖 부조리한 일은 시키는건 아니겠지…!? 정신차려 모리사와 치아키, 여긴 만화가 아니다! 그런 치사한 악의 조직같은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던 차였지만, 당장 그런말을 하는 치아키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던건 악의 조직 덕분이었다. 심지어는 도망쳐도 괜찮다는듯 문을 활짝 열어놓고선 자리를 비운 그들이었다.

“… 역시 악의 조직같은건 존재하지 않군. 이 지경이 돼도 세상은 정의로운건가…”

“아까부터 뭘 꿍얼거리고 있슴까.”

화들짝 놀라 몸을 떨며 뒤돌아본 치아키의 시선 끝엔 자신을 구해주고 치료까지 해준 악의 조직, 그 중에서도 대장인 나구모 테토라가 있었다.

“놀랐다… 그러니까, 나구모? 계속 생각해봤지만 역시 답례를 해야—”

“됐슴다. 몸 상태는 괜찮은 것 같네여.”

치아키를 침대에 밀어 눕힌채 이리저리 살피던 테토라가 문득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당신, 어제 저기서 사고났었슴까. 핏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그건… 모르겠군. 그때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 됐슴다. 지금 멀쩡하면 다 된 일임다. 하반신은 아예 갈렸던데, 걸을 수는 있겠슴까?”

테토라의 손을 잡은 치아키가 천천히 걸어간다. 다행이 어젯밤과는 달리 말을 잘 들었다. 화색이 번지는 치아키의 얼굴을 보며, 테토라가 픽 웃었다.

“저한테 감사하지 마십셔. 아는 의사 분이 잘해준 덕임다.”

“그럼 나구모도, 의사 씨도, 둘 다 은인인 셈이군.”

“전 빼달라니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던거린 테토라가 창문에 몸을 기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거 아심까.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 보면, 당신 머지않아 죽슴다. 그렇게 바보같이 착해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세상임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았지 않은가.”

“전부 운이 좋아서 그런검다. 만약 어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쩔 셈이었슴까?”

“그때는… 아쉽지만 생을 마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또한 내 운이 닿지 않았을 뿐… 아팟!?”

가볍게 치아키의 등을 때린 테토라가 약한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바보같네여, 하는 말과 함께 이야기를 이었다.

“당신같고 좋네여. 정의라곤 박살난 세상에서 정의를 추구한다… 보답을 바라고 하는 일이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는게 좋을텐데.”

한순간, 치아키에게 쓸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말을 하던 녀석도 있었지, 하며 잠시 생각에 잠긴 치아키가 대답했다.

“보답을 바라지 않으니 이러는거다. 본래 인간은 온정으로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니까.”

“사회적… 뭐? 아무튼 그런건 지금 필요 없잖슴까. 이만 가던길 가보십셔. 나같은 나쁜 놈한테 걸리지 말고.”

“어, 어어…? 아니, 나구모는 착하다! 그러니 나를 살려준거 아닌가!”

반강제로 등을 떠밀린 치아키가 도착한 곳은 외진 창고였다. 테토라의 아지트 근처에 있었음에도 불구, 인기척이 거의 없는 곳. 테토라가 창고의 문을 열자 문에 붙어있던 먼지가 후두둑 떨어졌다.

“우왓, 이건 복수인가…!?”

“그럴 리가 없잖슴까. 자 여기. 당신이 꽤나 애용하던 녀석같길래, 지인 불러서 다시 고쳐냈슴다. 안 가져간걸 다행으로 여기십셔.”

외진 창고 안에, 유독 최근에 들어온 듯한 바이크 한 대가 있었다.

치아키가 몰던 그 녀석이었다. 몸체에 그려진 불꽃 무늬로 알 수 있었다.

“앗, 이 녀석…!”

“불만 있슴까? 그럼 제가 가짐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 기뻐서 그랬다. 이제 핑계를 대지 않아도 되니…”

치아키가 주춤거리며 차체를 만졌다. 사고가 난 적 조차 없었다는 듯 흠집 하나 없이 매끈한 표면이었다. 그 외에는, 몇가지 부품이 바뀐 것만 빼면 완벽한 본래의 바이크였다.

“… 고맙다, 나구모.”

“제가 한건 지시밖에 없는데여. 참고로 그거, 작동은 잘 됨다. 브레이크에 뭐가 걸려있었길래 제거했더니 멀쩡해졌슴다. 그러게 착하면 멍청한 놈이라니까…”

몇 분이고 제 바이크를 응시한 치아키가 자신의 몸을 살피더니 바이크에 올라탔다. 테토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동을 건 치아키가 만족에 가득찬 목소리로 테토라에게 말했다.

“그럼 한바퀴 돌고 오마! 수리비는 내 가방에 있는 아무거나로 괜찮으니 마음껏 가져가도록!”

“그게 아니라…! 출발했네… 저렇게 나대다가 오늘내일 죽는거져. 하여간 멍청하기만 해갖곤…”

바람에 날리는 먼지와 함께 완벽하게 브레이크를 걸어잠근 치아키가 기운차게 돌아왔다. 그를 반겨주는건 귀찮은 듯 하품을 하는 테토라 한 명 뿐이었다.

“나를 기다렸나!”

“네네… 사지 멀쩡히 돌아왔네여.”

“날 뭘로 보는건가!?”

테토라가 가방을 돌려주며 한숨을 쉬었다. 언제 다쳤냐는 듯 다시 본래의 성격을 되찾은 치아키가 헤실헤실 웃으며 바이크에서 내렸다. 그런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테토라가 ‘그럴 수 있지’ 하는 표정으로 베낭을 다시 되돌려줬다.

“참, 내 이름은 모리사와 치아키다. 불타는 하트의 모리사와 치아키.”

“네네, 이거나 가지십셔. 시범운행은 다 끝난 것 같은데, 이제 떠나기나 하세여.”

“매정하구나… 그럼 이만 떠나겠다. 나구모도 조심해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치아키는 테토라의 전초기지에서 멀어져갔다. 부우웅 울리는 엔진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그림자를 지켜보던 테토라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미처 말하지 못한 진실을 밝혔어야 했다.

“… 모리사와 씨 진짜 바보네. 그래서 못 말했나…”

지난달 치아키의 아지트를 습격한 테토라는 몰래 트랩을 하나 설치했고, 치아키는 그것에 걸려들었다. 단순히 브레이크가 듣지않게 되는 트랩이었고,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다. 실제로 치아키의 지인인 어느 수리공은 제거를 추천했다. 그럼에도 대가없이 호의를 받으면 안된다며 거절했고, 어젯밤의 사고가 나게 된 것이다.

제 손으로 죽이려 해놓고 제 손으로 살리다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었다. 변덕이었을까.

아니면 이 세상의 희망을 본 것일까.

자신의 처지에 헛웃음만이 새어나오는 테토라는 그가 사라진 곳을 오랫동안 응시하다가, 이내 자신의 전초기지로 향했다.

유독 태양빛이 밝은 저녁이었다.

“역시 수리해줬군.”

중간정검을 위해 바이크에서 내린 치아키가 차체를 살피며 내뱉은 말이었다.

아무리 작은 사고라도 바이크의 표면에 남은 기스는 평생 남는다. 그런데도 치아키의 바이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했다. 사람이 죽을 정도의 충돌이었는데도.

테토라가 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하하, 어쩐지 평소와 다르다 싶었더니… 아직 세상은 살만한가보군.”

실소를 내뱉은 치아키가 정비를 끝마치고 다시 바이크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석양빛을 향해 달려나가는 바이크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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