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ndeau

회선곡

* 고어 묘사 주의!!!

* 도미넌트 -> 유니버스 테토라 x 민간인 -> 코멧쇼 치아키 + 도미넌트 마다라

* 지인 생일선물

* 치아키가 계약 잘못해서 고생하는 내용

*치아키가 많이 구름(총 3번)

* 공미포 약 43000자

* 9/14 전체공개


모리사와 치아키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큰 꿈을 가진, 그런 평범한 사람. 간간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받는 월급으로 살아가기도 하는, 잘난 점 하나 없는 시민. 평소와 별 다를 것 없는 착장으로 편의점을 향하던 모리사와 치아키. 후드를 푹 눌러쓰고선 편의점의 문을 열었다. 딸랑거리는 환영용 종 장식의 소리와 어서오세요, 하는 직원의 목소리. 치아키는 괜히 맞인사를 하며 인스턴트 도시락이 진열된 곳으로 향한다.

“… 다 나가버렸나.”

자신이 자주 먹던 도시락이 다 나가버렸다, 그걸 인지한 치아키는 어딘가 서운한 표정이었다. 이런 날도 있을 수 있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아쉬운대로 비슷한 도시락과 과자 몇 붕지를 고르고 계산대에 간다. 직원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치아키와 또래로 보이는 남성. 자연스럽게 지갑을 열고 현금을 꺼낸 치아키에게 직원이 말을 건다.

“그러고 보니까 최근 이 동네에 자주 소란이 발생하더라고요. 누가 멋대로 남의 집에 들락거린다던가…. 안 그래도 시끄러운 동네인데, 더 시끄러워서 짜증나요.”

“그런가…. 그런 사람들은 경찰 분들이 이렇게 이렇게, 팍팍 잡아줘야 할텐데 말이죠.”

치아키가 가벼운 잡담을 나누며 현금을 건넨다. 직원은 익숙한 듯 거스름돈을 건네며 치아키의 배웅을 한다.

“그럼, 내일도 또 오십쇼.”

또 다시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직원은 한숨을 쉰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월급과 생활비의 합산을 계산해보며 중얼거렸다. 안정적인 생계 유지를 위해서는 앞으로 몇 년을 더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직원이자 아르바이트생인 남자가 문득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아아, 우울해. 죽고싶다….

습관적으로 검은 봉투 안을 확인하며 구매한 물품을 확인하던 치아키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강한 공기의 역행이 흘렀다. 본능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흐름을 추적해나가던 치아키는, 그 끝에 어느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

그 끝에는 하나의 괴물이 있었다.

그렇게 정의한 치아키는 즉시 얼어붙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일순 느낀 치아키는 그것의 몸짓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애꿏은 사람의 사체를 찣어발기고 있었다. 차마 두눈 뜨고 볼 수 없을 광경을, 치아키는 그대로 눈에 담고 있었다. 겨우내 충격을 이겨낸 치아키는 그것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심히 뒷걸음질을 쳤다.

짤그락.

제 욕구에 따라 움직이던 그것이, 그만 버려진 캔을 밟아버린 치아키를 인지하고 말았다. 순간 치아키는 숨이 멎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여기서 물러나면 죽음 뿐이라는 심정이었다. 허무하게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질문이었다.

“… 여기서 뭘 하는건가. 무고한 시민을 죽이지 마라.”

그늘진 으슥한 골목에서도 그것의 눈은 호박색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잠시 치아키를 노려보던 그것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두려움에 얼어붙은 치아키에게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은 성의없는 대답 몇 마디 뿐이었다.

“무시하십셔. 말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님다.”

“혹시 내가 너를 발견한 바람에 당황한건가?”

그것은 치아키를 바라본 채 입을 다물었다.

빌어먹을, 정곡을 찔렸다.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주술이 걸리지 않았나보다. 무턱대고 처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악마는 계약자가 아닌 민간인에게 피해를 끼치면 그만큼 수명이 줄어드니까. 그렇다고 해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 저 인간이 무슨 짓을 할 지 어떻게 아는가. 그렇다면 내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인가.

가만히 치아키를 노려보던 그것은, 피가 묻은 그대로 치아키의 소매를 붙잡았다. 겁에 질려 작게 몸을 떤 치아키에게 그것이 한 제안은 단순하고도 강력한 한마디.

“무시를 못하겠다면, 내 부탁을 들어주는건 어떰까?”

약간의 힘을 실은 언행이었고, 그런 것에 조금의 저항력조차 없던 치아키에게는 실로 충분한 능력이었다. 멍하니 발언자를 쳐다보던 치아키는 다시금 초점을 되찾고 평소와 같이 말한다.

“부탁이라, 알겠다! 무엇이든 말하도록!”

“그러니까, 일단 목소리나 낮추십셔. 동네방네 소문내서 좋을게 뭐 있슴까?”

“미, 미안하다….”

그것은 한숨을 짧게 내쉬곤 팔짱을 꼈다. 여전히 양 손에는 피가 잔뜩 묻어있었고, 익숙한 듯 그 자국을 내색하지 않았다. 단지 치아키만이 겁에 떨고 있었고, 치아키만이 차갑게 식은 채 붉은 피와 내장을 쏟아내고 있는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치아키의 시선이 닿는 제 뒤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머리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사지는 뜯겨나가 나뒹굴고. 눈치를 보는 치아키에게 사진을 보여준다.

“뭐, 그건 됐고. 이 사람 알고 있져? 어서 이 사람이 사는 집으로 안내하십셔.”

“이 사람…? 최근 사업이 잘돼서 이사 준비를 하는 걸로 알고 있다만…. 참. 그 사람은 죽이면 안된다.”

“….”

아무말 없이 자신을 올려다본 그것의 눈동자가 채도 낮은 붉은색과 함께 금색을 띄었다. 자신의 끝을 직감했음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 용기를 피워낸 피아키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됐으니까 안내나 하십셔. 더 이상 귀찮게 굴면 당신도 저 꼴이 나고 싶은걸로 알겠습니다.”

“… 안내하겠다. 따라와라.”

재촉하는 말을 못 들은 척 골목 바깥 쪽을 향하는 치아키를 보며, 그것은 한숨을 또 다시 쉬었다.

난 이런 못 미더운 녀석한테 뭘 바라는걸까.

“좋아, 여기다 나구모! 헌데 이 분에겐 무슨 볼일인가?”

치아키는 길을 안내받으며 그것과, 이제는 나구모라고 부르는 소년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스몰 토크를 하며 얻은 수확은 서로의 생각보다 많았다.

방금 전까지 시신을 뜯어내던 괴물의 이름은 나구모 테토라. 청소년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마계의 일원, 쉽게말해 악마다. 남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것 따위는 손가락을 튕기는 정도로 손쉽게 할 수 있는 그런 악마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면이 있는 것 같기도…. 좋아하는 건 고기, 특히 갈비 부위. 싫어하는 건 당근. 악마 주제에 싫어하는게 왜 있나 생각하면서도 쉽사리 질문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치아키였다. 딱히 알 필요는 없는 정보였지만 그래도 알아낸다고 해서 별 상관은 없으려나.

그에 비하자면, 치아키는 특출난 것 없는 청년이었다. 유일하게 남들과 다른 것 마저도 이루어질 가망 없는 소박한 소원 하나 뿐이다. 사람들에게 응원받는 히어로가 되고 싶다, 라는. 그런 허황되기 그지없는 망상에 그칠 꿈 하나. 그것을 이뤄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차가운 사회에서, 모리사와 치아키는 홀로 살아왔다. 그러기를 어느덧 몇 년째,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성인이 된지 오래였다. 이 세계는 특촬물이 아니기에 그런 꿈은 접었어야만 했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며 사업가의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이었다.

“별 일은 아니고…. 잡깐 기다리세여.”

테토라는 몇번은 드나든 듯 능숙하게 잠긴 현관문을 따버리고 무단침입을 행했다. 치아키가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테토라는 눈 깜짝할 새에 거실을 지나, 침실로, 그리고 침대로.

“… 일어나라, 그럴 상황인가?”

치아키는 그것을 듣고만 있었다. 다리가 웁직이지 않는다. 순전히 공포심으로 추정되는 감정의 다음으로,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미약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기운으로 추정컨대, 그건 분명 마계의 것이었다. 둔감한 치아키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출처를 가진 강대한 바람이 불어오고선, 갑자기 날카롭게 고막을 찢는듯한 남자의 비명소리.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비명에 치아키는 몸을 움츠리며 귀를 막는다. 한순간 치아키는 집 내부의 광경을 상상했다. 간신히 숨이 붙은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남자와,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축 늘어진 팔을 즈려밟는 나구모. 이 순감은 내가 관여한들 변할 리 없어. 치아키는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더해 참담한 광경을 그려낼 수 있었다. 피투성이의 거실, 쓸려나간 핏자국, SOS를 외치는 붉은 손자국. 상상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것만 같은 현장이었고, 치아키는 자신의 예상이 헛소리라는 듯 검은 어둠만이 뒤덮은 현관과 거실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대로,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지났는지 모른다. 치아키가 공포에 절어있는 긴 시간이 지나고, 남자의 비명이 잦아든다.

아직 살아있다. 구할 수 있다.

결론에 도달하고 나면, 치아키는 생각할 틈도 없이 참흑한 현장으로 달려나간다. 이젠 어떻게 되든 상관 없으니까, 그런 심정으로 손에 든 비닐봉투와 매고 있던 책가방을 내던지고 뛰쳐나갔다.

지금이라면 살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만해라, 나구모!”

흠칫, 그 장소에 있던 피해자와 가해자가 당황한다. 일방적인 폭행을 당하던 피해자는 급히 도망치는 시늉, 일방적인 폭행을 행하던 가해자는 위협하는 시뇽을. 그것을 전부 목격한 치아키는 최선의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사람을 구하는 히어로로서, 그는 악을 적대하기를 골랐다.

“남의 사정에 간섭 마십셔.”

“남이 아니야! 그 사람은 내 이웃이다! 그 사람, 때마침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만…!”

“이사?”

테토라는 그 단어에 반응하며 사업가를 무참히 짓밟았다. 간신히 숨만 붙어선 힘겨운 들숨과 날숨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얕은 꾀나 써선 도주를 계획하고 있었나.”

더 이상 살려둘 가치도 없는 죄인이군. 그렇게 생각한 테토라는 곧장 전 계약자의 머리를 차 날려버렸다.

“운 좋으면 중상, 운 나쁘면 사망. 팔 한짝은 가볍게 잘려나갈 테고….”

공포에 질린 눈동자로 쓸데없는 정의를 추구하던 치아키는 여전히 테토라를 말리려는 기색이다.

그렇게 호랑이를 앞에 둔 사슴처럼 떨고 있는 주제에, 누가 누굴 도와줘?

테토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왜, 왜 웃는건가! 나도 내 나름대로의 용기를 낸건데도…!”

“그래, 잘 봤으니까 더 말하지 마십셔. 오늘 일은 못 본 걸로 하져.”

“안된다.”

“엑.”

보통 이러면 다 감사합니다, 하고 도망치지 않나? 테토라는 표정으로까지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그에 대해 치아키는

“나는 히어로다. 아직 견습이지만…. 하하. 그래도 불의를 무시하는 짓 만큼은 할 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웃의 일이잖은가!”

하며 되도 않는 핑계를 댄다.

“그게 뭐가 히어로임까….”

한숨을 푹 쉰 이후 문득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만약 그게 저 사람의 바람이라면…. 얘기는 빠르겠구나. 원래 악마라는건 사람이 방심한 틈을 타서 그 사이에 스며드는 생명체다. 그런 것 쯤은 어린 인간도 알고 있다고 들었으니, 다 큰 어른이라면 나에게 괜한 억울함은 가지지 않겠지. 애초에 나같은 악마를 왜 믿는건지 모른다. 지금에라도 정부에 찌를 수 있을텐데…. 그만큼 멍청해서 그런건가. 절로 웃음이 나오는군.

“저기, 그러면. 저랑 계약 하나 하지 않겠슴까?”

“싫다.”

정정. 쓸데없이 자기주장만 확고한 멍청이.

왠지 주녹이 들어버린 표정으로 테토라의 눈치를 보던 치아키가 황급히 이유를 덧붙힌다. 왠지 그래야말 할 것 같은 분위기라서.

“… 그러니까! 원래 나구모같은 악마랑 계약하면 그 끝은 파멸 뿐이라고! 들었다….”

“무상으로 하져. 여기까지 데려다준건 감사하고 있으니까여.”

자신만만한 영업 성공의 미소. 확승을 장담하는 자신감에 어쩌다 말려든 치아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다. 이런 꾐에 넘어가면 안된댔어, 어머니가…. 그게 뭐 중요함까? 언쟁의 공방을 주고받던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튀기는 기류가 형성된다. 먼저 항복한건 모리사와 치아키 쪽. 내가 이길거랬지, 하는 표정으로 공중에 떠 치아키를 내려다보는 테토라의 표정은 그야말로 포식자의 표정이었다.

“자, 그럼…. 계약 해야겠져? 더 이상 핑계도 없을 테고.”

“… 하하, 그렇군. 진짜 아무 짓도 안 하는거 맞나?”

“군말 말고 이거나 보십셔.”

테토라가 보여준 계약서에는 깔끔하게 한 문장 뿐이었다.

‘갑은 을에게 소망을 말할 수 있으며, 을은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루지 않고 갑의 소망을 이루어준다.’

간결한 한 줄의 문장 밑에는 작은 사각형이 그려져있고, 을 칸에는 테토라의 표식. 당연하다시피 마계의 계약서는 처음 보던 치아키는 작게 떨며 긴장한다. 수상하지 않다는 몇십 번의 인증을 받고서 겨우내 갑 칸에 사인을 남긴다.

검붉은 계약서는 공중으로 떠오른 뒤 테토라의 손짓 하나에 검을 불꽃으로 타버려 재 한 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한낮의 폭죽처럼 신묘하고 고혹적인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치아키는 오히려 안심한다. 미묘한 표정변화를 감지한 테토라는 팔짱을 끼며 이해되지 않는 듯 치아키를 쳐다본다. 나구모 테토라는 그 수명이 다하더라도 모리사와 치아키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그것은 그들의 출신이 다른 한 계속될것이다.

“음…. 그렇다면 소망을 말하겠다! 내 파트너가 되어줘!”

“예?”

“언어 그대로다! 나구모 네가 언제까지고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길 바란다!”

“당당하게 무슨 소릴 하는 검까…. 그럼 모리사와 씨가 죽기 전에는 가지 말라는 검까?”

“그런 셈이지! 그 반대도 성립되고!”

그때 그런 귀찮은 일이 벌어질 줄 알았더라면, 나구모 테토라는 아마 계약을 하자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라곤 요만큼도 되지 않는 바보 멍청이 주인.

인기척이 사라진다. 극악무도한 그 녀석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겠지….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겨우 창문으로 나간다. 주택의 장점이라면 아마도 이거겠지, 도망에 유리하다는 거.

젠장. 갑자기 계약을 이행하겠다는게 뭐냐고. 역시 검은머리 짐승 것들은 믿으면 안된다는 옛말은 틀린 적이 없다. 이건 내 돈이다. 내가 피땀흘려 벌어낸 내 재산이고, 내 수익이다. 제 아무리 날고 기어도 멋대로 가져갈 수 있을리가 있겠나. 지옥까지 끌고 갈 자본은 거대했고, 그로 인한 대가를 방금 막 치뤄낸 참이다. 나구모, 라고 했던가…. 인간도 아닌 주제에 잘도 그런 이름을 가졌군. 이웃 놈이랑 친해보였으니까 그 녀석만 찾아내고 인질을 잡는다면?

오랜 역사에서도, 악마를 이긴 인간은 있었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무슨 짓이든 해봐라. 네가 친구를 내칠 정도의 잔혹하고 매정한 녀석인가.

덤벼라, 나구모 테토라.

“여보세요, 거기 처리반 맞습니까. 돈만 있으면 뭐든 가능하다고….”


나구모 테토라라는 중급 악마와 계약한 뒤 며칠이 지나고, 모리사와 치아키의 생활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가끔 아르바이트를 나가고, 늦은 시간에 돌아오고. 그것의 반복인 지루한 일상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라면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파트너’의 존재이겠지만. 물론 파트너라 함은, 인간이나 동물 따위가 아닌 악마다. 계약자가 아닌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런 악마.

“알바는 재밌슴까?”

“당연히 재미없다.”

손님이 하나 있는 편의점의 카운터에는 치아키, 그 옆에는 치아키만 보이는 테토라. 치아키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테토라에게 조용히 대답한다. 은제 반지를 반짝이며 치아키의 옆으로 다가온 테토라는 킥킥거리며 그에게 기댄다.

"그럼 그렇져. 그러게 저한테 파트너나 되라는 소원을 빌면 안됐져.“

치아키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무언가를 무시한 채 계산을 부탁하는 손님의 상품을 이리저리 돌리며 바코드를 찍는다. 삑, 삑, 하나 둘 쌓여가는 군것질거리에 부시럭 소리가 귓가에 스친다.

“그러고 보니, 알바 씨. 저기 뒷산에 소문 하나 도는거 알고 있어? 무슨 귀신이 있다던가…. 가끔 가로등 꺼지는거 있잖아? 그게 귀신이 하는 짓이라고, 동생이랑 친구들이 말하던데. 학생이 어떻게 좀 말려봐.”

“그런가요. 어린 아이들은 다 그럴 나이긴 하죠. 제가 말해도 잘 안될걸요, 하하….”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는걸 몇 살때 깨달을까 싶어…. 그럼 이만. 알바 수고하십쇼.”

떠나는 손님의 등을 향해 꾸벅 고개숙여 인사를 한 치아키는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한다. 마침 교대시간이라는 핑계와 함께 조끼를 벗은 치아키는 웃으면서 곧장 편의점을 나간다. 무슨 생각인지 뻔히 보이는 테토라는 픽 한숨을 쉰다.

“가끔 보면 모리사와 씨가 제일 미친 거 같슴다.”

“악마와 계약한 것 이상으로 미칠 수는 없다.”

“그럼, 준비됐나? 모리사와 치아키, 출격!”

“출격, 예에이…. 제가 어쩌다 여기에 휘말린검까….”

파트너라 함은 자고로 곁에 붙어있어야만 하는 존재이니, 테토라는 말 그대로 치아키에게 귀속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치아키가 무슨 짓을 하던 말릴 수도 없다. 가령, 지금 소문의 근원지인 산을 오르겠다는 치아키라던가.

“진심으로 오를검까? 무슨 사고를 당해도 제 책임은 절대 아님다. 명싱하십셔.”

“명심하고 있다. 설령 사고를 당해도, 일을 주도한 내 탓이겠지.”

또 다시 들려오는 테토라의 한숨. 이걸로 몇 번째인지 세던 것도 잊어버렸다. 갈거면 어서 가기나 하라며 등을 떠미는 테토라에게, 치아키는 하하 웃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 응대한다. 따가운 누군가의 시선을 무시한 채, 치아키는 등산로를 밟기 시작한다.

등산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래의 사람들 보다 평균 이상의 체력을 가졌던 치아키와, 악마인 테토라. 서로 도시락을 챙기거나, 나뭇가지를 가져와서 유령이 붙어있는 것 처럼 장난을 치는 둥.

“… 내 뒤에 귀신이 따라다닌다는 거짓말은 자제해줬으면 좋겠군.”

“악마한테 그런 소릴 해봤자 어쩌라는건가, 싶기만 하거든여.”

그렇게 시시콜콜한 수다와 장난을 곁들여 목적지까지 도달한다. 어느덧 시간은 늦은 밤 12시, 산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암흑이 찾아오고도 남을 시간. 치아키는 그 분위기에 압도당한다.

“그러게 왜 여기까지 와서 얼어붙는검까?”

“나, 나는…. 그러니까, 히어로라서 그렇다!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고 지구를 구해내는 정의의 레드! 악당을 물리치고 우주와 은하를 관철하는 유성!”

“또 헛소리.”

허공에 휘적대며 특촬물의 변신 포즈를 횽내낸다. 치아키는 그렇게 하면 진짜 히어로라도 된 것 처럼 겁을 먹지 않았다. 자기가 진짜 히어로라도 되는 듯 기운넘치는 목소리로 테토라에게 외친다.

“자 그럼! 귀신…이 나온다는 곳은 어딘가!”

“그렇게 무서워하면 오질 말던가…. 좀 더 들어가야 함다.”

“… 그런가!”

“방금 쫄았져.”

“절대 무섭거나 돌아가고 싶거나 하지 않다!”

당당하게 내뱉은 말과 다르게 공포에 질린 치아키에게 있어서 야산은 강대한 존재다. 테토라는 몇십 분 전부터 그것을 알아챘고, 은근슬쩍 그것을 이용해 놀리기도 하며 여기까지 이끌었다.

괜히 그랬나…. 그래도 하고 싶다는데 뭐 어째. 그래도 모리사와 씨는 자기가 한 말은 번복하지 않으니까. 나는 파트너로서 어울려 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단지 그 뿐이다, 깊게 관여할 일은 없다. 그게 계약자를 둔 악마가 하는 일이다. 설령 계약자가 겁쟁이에, 미신을 잘 믿고, 쓸데없이 정의롭더라도….

“불렀나?”

“아녀. 바람소릴 잘못 들은거 아님까.”

치아키는 주변을 살피며 찾아낸 버려진 정자로, 테토라를 이끌고 향한다.

“우선 시간도 늦었으니 대비를 다시 해야 한다. 여기에서 가방 정리를 다시 하고 가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곤 마루에 걸터앉아 웃는다.

그 미소가 싫다. 남의 일에 간섭이나 하는 웃음이.

"이건 아직 배터리가 남아있고, 이건…. 다 썼군. 슬슬 추워질테니 겉옷도….“

“재잘재잘 떠들지 마십셔. 야생동물이라도 덤비면 별 수 없슴다. 자, 겉옷은 입고 배터리는 갈아끼우면 되져?”

허둥대며 가방을 정리하는 꼴을 도저히 보지 못하겠다. 그렇게 생각한 테토라는 치아키가 뒤적거리던 가방을 강제로 뺏어 간결히 정리해준다. 배터리가 부족한 손전등은 새로 갈아끼우고, 구겨진 옷은 대충 펼쳐서 치아키에게 걸쳐준다.

“아, 아아…. 고맙다 나구모. 너에게 이런 친절을 받는건 처음이군.”

“당신이 그렇게 답답하게 구니까 이러는 거잖슴까.”

은근슬쩍 시선을 돌린 치아키가 숲 깊은 곳을 응시한다. 무언가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한 새까만 어둠에 눈을 뗄 수 없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지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보면 어느새 테토라는 정비를 다 마쳐놓고 기다린다. 아무말 없이 한심하게 치아키를 쳐다본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가 뭐가 좋은지, 테토라는 이해를 하지 못한다.

“… 아, 미안하다. 잠시 한 눈을 팔았군.”

“도대체 공허의 어디가 좋은검까? 텅 비어선 아무것도 없는데.”

치아키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제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곤 말한다.

“원래 히어로라면 어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나가는 법이다. 왠지 어두컴컴한 곳에선 갑자기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으니…. 어쩔 수 없다. 히어로로서의 본능이야.”

“핑계는 무슨. 옷이나 똑바로 입으십셔. 이제 슬슬 추워짐다.”

어색하게 웃음을 띤 얼굴로 움직일 채비를 하는 치아키의 귀에 나뭇잎이 밟혀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냐!”

“쉿.”

답지않게 놀라 괴성을 지르는 치아키의 입을 틀어막은 테토라. 그들의 앞에 나타난건 등산객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산악인.

“저기…. 실례되지만, 제가 길을 잃어서요…. 혹시 함께 내려가주실 수 있습니까?”

그런 등산객이 부탁해온 말은 뜻밖의 말이었다. 입이 틀어막힌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등산객을 바라본 치아키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내려가는 길 정도는 알고 있는 치아키는 가뿐히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었다. 조심히 테토라의 손을 내린 치아키가 공손한 미소를 짓고 등산객에게 대답했다.

“당연히 가능하죠.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세상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치아키가 가방을 매고 하산 준비를 한다. 적당히 껴입은 옷은 체온을 보존시켜주었고, 가방은 가볍게 맬 수 있는 수준의 무게였다. 테토라는 그런 선의를 베푸려는 치아키를 보며 혀를 찬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치아키의 뒤를 따르는 테토라는 계약을 강요할때의 그런 얼굴이었다.

“그렇게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무작정 따르면 어떡함까? 나쁜 사람일 수도 있는데.”

“아하하…. 그래도 지켜줄 것 아닌가? 너는 나의 파트너니까.”

또 다시 치아키에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한숨. 등간객과 약간의 거리를 두며 앞장서서 다행이지, 가까이 붙어있었더라면 분명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을 것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미소와 함께, 치아키가 테토라에게 다시 말을 건다.

“그렇지만 저 사람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나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얼굴엔 선글라스랑 토시로 무장을 했는데도? 진심으로 하는 소림까?”

“진심이다. 나는 차라리 믿었다가 손해를 보는 편이 훨씬 편해서.”

답답할 정도로 순하게 구는 치아키를 보며 테토라가 느낀 점은 하나였다. 저러다가 분명 사고치겠네. 등산객은 잘 따라오고 있었고, 주변의 낭떠러지를 주의하며 치아키를 엄호했다. 그것은 치아키가 말하는 ‘착한 사람’의 증거이기도 했다. 나쁜 사람이면 알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근거였다. 정적 후, 테토라의 한숨이 길게 들려왔다.

“또 한숨인가…. 그렇게 한숨을 쉬다간 행운이 달아난다.”

“미신 안 믿슴다.”

“나구모 네가 미신 속의 존재 아닌가…. 우왁!?”

정신없이 걷고 있나 하면 대형 사고를 간신히 피한다. 테토라는 간신히 목을 기어올라오는 욕지거리를 참은 채 치아키를 뒤로 잡아당긴다.

“누구 행운이 달아나는건지.”

“… 면목없군….”

치아키에게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는 괜히 테토라와 투닥대는 당사자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등 뒤까지 밀착한다. 치아키와 한 뼘이 넘게 차이나는 키. 당연지사 치아키가 눈치를 챈다.

“앗, 걱정 감사합—”

그러나 때는 늦는다. 등산객, 사실은 그런 척 테토라에게 상처를 입은 얼굴을 싸맨 사업가는 팔을 뻗는 것 만으로 치아키를 가볍게 이길 수 있었고, 그 결과는 자연스레 치아키의 추락으로 이어졌다.

가파른 비탈길을 이리저리 치이며 굴러 떨어진다. 튀어나온 돌에 머리를 얻어맞기도, 부러진 나뭇가지에 몸을 찔리기도 하며, 중력의 인도는 절벽에까지 이어졌다. 모리사와 치아키라는 한 명의 사람이 이겨낼 수 없는 힘이 그를 절벽으로 끌어당기고, 미처 저지할 틈도 없이 치아키를 무자비하게 튕겨낸다.

순간, 모리사와 치아키는 나구모 테토라에게 전한 호의가 부족했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잘 대해줄걸, 하는 생각을 했다.

추락하는 모리사와 치아키를 지켜보던 것은 나 하나 뿐이었다. 내가 속으면 안됐었다. 당연히 등산객이니 자외선을 막으려 얼굴을 가렸으리라 생각했다. 함정이었다. 나를 우롱하고 모리사와 씨를 무참히 죽이려던 덫.

눈 앞에서 추락하는 인간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 몇 초간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벙쪄있었다. 그런 순간도 잠시 모리사와 씨가 굴러떨어지며,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다급히 내 이름을 부르며 도망치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느 때보다 긴박한 구조신호다. 내려가야만 한다고 판단하기도 전에, 몸이 그것을 강행했다. 그러나 내려갈 수 없었다. 모리사와 씨를 밀쳐버린 그 녀석, 그 증오스런 팔로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것을 일부러 밀쳐내듯 뿌리친다. 비탈길을 내려가 주위를 살핀다. 옅게 남아있는 혈흔과 냄새를 쫓아 도착한 곳은 땅이 끝나는 절벽이었다. 착각일거라 믿고 주변을 수색한다.

없다. 그 어디에도 모리사와 씨가 없다. 있어야만 하는 존재가 사라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든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비탈길의 끝, 절벽의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게 아닐거라고 믿은 주제에, 괜시리 헛짓을 한다. 아니야, 헛짓이 아니야. 그저 계약자를 찾으려는 행동이다. 그 계약자는 지금 장난을 치고 있는거고.

어딜 간검까. 재미 없으니 어서 나오십셔.

모리사와 치아키, 당신은 영원히 종잡을 수 없었던 인간이었어. 이런 최후를 맞이할 것 마저 몰랐으니까.

“악마 형씨, 그만 하고 올라오는게 어때? 형씨도 저 남자랑 같이 떨어지고 싶어?”

완벽한 도발이었다. 그것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고, 이후의 일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복수를 한 것만이 기억났다.

돌아오지 않을 것에 대한 복수.

아니,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살아있으니까.

조금이라도 인기척을 낼 걸 그랬다.

겨우 부상을 이겨내고 기운을 차렸다. 죽지 않았다. 운이 좋게도 툭 튀어나온 바위지형에 떨어졌었다. 가방이 조금 찢어졌지만 그 외의 손해는 없었다.

부상은 논외였다.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휘몰아쳤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움직이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게 해서 가방을 열어본다. 불행 중 다행으로 휴대전화는 잘 작동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었다.

곧바로 119에 구조요청을 보낸다.

나구모는 내가 죽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범인을 잡아 나와 똑같이 떨궈버렸다. 틀림없다, 내가 고개를 들자마자 본 모습이었다. 내 옆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 떨어지더니, 그 너머로 보이는건 나구모. 태양의 후광게 가려졌음에도 지지 않고 금색의 눈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분노의 색이다. 살아있다는 것을 알렸다면 저 사람은 죽지 않았을까. 나 때문에 누군가 떨어진건가? 나는….

누군가를 도우러 온 거였는데.

왜.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몇 시간의 수면 끝에, 나는 밤중에 깨어났다.

나구모는 내 손을 잡은 채 곤히 자고 있었다. 단지 병문안의 이유로 찾아온 것 같았다. 아마 시간이 늦은 지금은 자고 있을테니…. 나중에 깨고 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우선 나는 괜찮다는 것과, 그 사람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너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 또…. 이런 생각을 하는 틈에 나구모가 조금 뒤척였다. 엎드렸으니 잠자리가 불편한가보군. 조심히 내가 베고 있던 배게를 겹친 팔 밑에 깔았다. 한결 편안해보이는 나구모의 표정을 보며 한숨 놓는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곤란하다. 분명 나에게 무어라 투정을 부릴텐데…. 그래도 받아줘야지, 그게 연장자로서, 친구로서의 예의이니까.

실은 알고 있다. 내 몸은 엉망이고, 타인의 도움이 없다면 걷지도 못한다. 그런 주제에 허세를 부리는 이유는 간단해. 나는 히어로니까, 모두를 실망시키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 정의였다. 달빛에 비친 오른팔이 보였다. 좁은 간격의 상처투성이였다. 붕대를 하지 않은게 용할 정도였다. 그래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나구모에 비하면 별 거 아니겠지…. 조심히 나구모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그리곤 쓰다듬는다… 조심히, 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개인 병실에 있는 나와 나구모 둘만을 비추는 것은 창가에 뜬 보름달 뿐이었고, 그것은 우리를 주목시키는 듯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단지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었다.

오늘 밤은 길구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나구모?

네. 이 밤이 싫어질 정도로, 아주아주 긴 밤임다.

긍정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기에, 가만히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그래, 저 사람이 치아키 씨라고 했던가아.”

“그렇ji. 이 사람이 뭐가 재밌다고 그러는de?”

“그냥….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어. 왠지 재밌는 일이 있을 것 같아서 그래애.”

“… 적당히 하고 돌아wa. 인간이랑 엮여봤자 좋을 거 없으니gga.”

“마마 못 믿어어? 알아서 할테니까 무시 좀 해줘어….”

“믿을 만한 짓을 했어야 믿ji.”

“너무하는구나…. 그러엄, 조금의 ‘축복’을 내려볼까아.”

“축복같은 소ri.”

보기 좋게 욕을 얻어먹는다.

병실에 누워있는 저 사람의 이름은 모리사와 치아키라고 한다. 지금까지 감시한 입장으로선, 글쎄. 그렇게까지 유능한 존재는 아니었다. 겨우 정 따위에 매달리는 정의감만 넘치는 인간. 그보다 쓸모없는 존재는 없었다. 인간은 그런 생명체였다. 실체도 없는 허황된 것에 대해 약속을 하곤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가만히, 달빛이 내리쬐는 병실을 바라본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흥미를 돋구었다. 약간의 ‘도움’을 준다면…. 그래.

재미있는 장남감이 되겠어.

술집의 소란과 네온 사인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결과는 점점 좋아지다 못해 평소보다 신체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신체가 새로 재구성이라도 된건가, 싶으면서도 온몸 곳곳에 남아있는 횽터를 보면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나구모가 나를 흩어보며 걱정하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인다. 별거 아닌 상처에도 애워싸고, 그런 과보호를 하며 나를 걱정해주겠지…. 헛된 공상을 하며 밤길을 걸어갔다.

나구모가? 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단순히 계약자를 지키려는 모습은 아니다. 그렇다고 위선도 아니야. 원래 악마는 남과 계약을 하게 되면 친절해지는건가? 나는 절대 모르는 일이었다. 언제까지고 평범한 인간일 테니까, 나구모의 심정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겠지…. 그렇지만 모른 채로 있어도 되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건 아니니까…. 나는 나대로의 방식으로 나구모를 이해하면 되는거야. 그러면 나구모도 날 이해해줄테고, 별다른 말 없이도 내 사정을 알 수 있게 될거다. 어디까지나 아마도지만, 그래도 나구모니까 나에게 해를 끼치친 않을거야.

“좋아, 괜한 걱정이었군!”

서둘러 집으로 향한 후 현관을 열고 잠을 청한다. 오늘 밤은 짧기를 고대한다.


멍하니 모리사와 씨가 차려주는 아침을 받아먹었다.

추락 사건 이후, 몇 달간의 입원을 어제 막 끝마친 모리사와 씨는 괜찮다고 한다. 신체에 이상도 없고, 정신도 멀쩡하다고 한다.

실은 괜찮지 않다는걸 안다.

괜찮은 척은 무슨…. 한 번 툭 건드리면 뿌리부터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만큼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금 나한테 아침을 만들어준다. 목 뒷부분의 횽터가 눈에 들어온다. 그 녀석에게 밀쳐 떨어졌을때 나뭇가지에 긁혀 생긴 상처다. 팔뚝을 가로지르는 상처도, 무릎을 기점으로 끊긴 수술자국도, 전부 그 녀석이 입힌 상처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을 저질렀다. 모리사와 씨와 똑같이 밀어버렸다. 단지 저항을 하기 때문에 조금 매를 들었을 뿐이다. 팔을 부러트리고, 다리를 묶어버리고, 그렇게 유기견을 내던지듯 밀어버렸을 뿐이다.

전부 내 탓이었다. 내가 눈치를 챘어야 했다. 눈치없는 모리사와 씨보다 한시 빨리 알아챘어야 했다. 어쩌면 눈치없는건 나일지도 모른다. 멍청한 것도 나고, 쓸데없이 정의로운 것도 나고, 모리사와 씨를 향한 악담은 사실 나에게 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계약자 한 명에게 왜 이러는걸까, 나도 그것의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냥….

그럴 리가 없는데.

치아키의 아침상은 된장국과 계란말이, 흰 쌀밥 뿐이다. 조촐하다면 조촐한 아침을, 테토라는 아무 말없이 자신의 심경과 함께 씹어삼킬 뿐이었다. 자신에게 태클을 걸던 평소와 달리 조용한 테토라의 모습을 본 치아키는 가만히 맞은편에 앉는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연스럽게 텔레비전을 킨다.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실족사 위장 살인, 범죄자의 행방은?’

마치 누군가를 향해 들으라 선전포고를 하는듯 단호한 어투의 아나운서가 말한다.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한다느니, 반드시 검거에 성공해낼 것이라느니. 그런 소리들을 외면할 수 밖에 없는 테토라였다. 아는 체를 해봤자 좋을건 없으니까, 그렇지?

평소보다 맛있게 됐다며 어서 먹어보라며, 치아키는 횽터 가득한 팔을 탁상에 올려놓는다.

“왜 먹질 않는건가, 혹시 입맛이 없는건가?”

“아녀…. 아침부터 저런 뉴스는 조금 그렇지 않나 싶어서.”

그런 핑계로 다른 채널을 돌린다. 자연스럽게 모른 척. 아마도 자연스러웠을거야.

그렇게 돌린 채널에는 몽타주가 나오고 있었다. 나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뚝 닮은 사람. 나 그 자체가, 디지털 화면에 출력되고 있다. 손을 움직여야만 했다. 그럴 수 없었다. 움직여야 했다, 움직일 수 없다. 머릿속이 새까맣게 물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뭔갈 해야만 했다. 모리사와 씨에게서 화면을 치워버려야 헀다.

그런데 아무것도 못하겠어.

흘깃 테토라를 바라본다. 무언가를 불안해하며 공포에 떠는 테토라의 시선을 따라 도착한 곳은 텔레비전의 한가운데, 뉴스의 몽타주. 특히 테토라를 닮은 그것은 치아키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역시나, 치아키의 눈에도 테토라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몽타주가 왜 테토라를 닮은거지? 왜? 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치아키는 머리를 굴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책을 찾는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건 뭐가 있지? 쓸데없이 과민 반응을 한다면 나구모가 무슨 반응을 할 지 모른다. 최대한 침착하게…. 그럼 뭘 할 수 있지?

답은 간단했다. 나는 히어로였다. 아이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최우선 임무다.

“그러고 보니 나구모! 내가 떨어졌을때 있잖은가.”

치아키는 은근슬쩍 자신에게로 주제를 돌린다. 효과적이었다. 테토라는 겨우내 치아키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치아키를 바라보며 평소처럼 트집을 잡는다.

“그때 무슨 일이라도 있었슴까? 지금 말할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이번엔 엄청 대단했다! 그 사람이 날 밀쳤을 때,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지 뭔가! 그래서 눈을 감고 ‘아, 죽는구나’ 싶었을 때, 튀어나온 곳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치아키의 말을 흘려들으며, 테토라가 아침을 챙겼다. 계란말이는 조금 짰고, 된장국은 밍밍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주는대로 받아먹기라도 해야 눈치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테토라는 그런 존재였다. 눈치가 보이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어우러드는 것은 익숙했다.

그래서 치아키는 모른 척을 하기로 했다. 자신이 가진 최선의 선의를 베풀며.

왜냐하면, 나는 히어로니까. 정의의 레드니까.

“그래서 말이지…. 나구모, 듣고 있나?”

“네. 마저 말하십셔.”

치아키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며 슬쩍 예능 방송으로 바꾼다. 테토라도 눈치채지 못하게, 과장된 행동을 하며 시선을 돌린다. 자신에게 주목시킨 시선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빠르고 신속히 리모컨을 조작한다. 그 순간만큼의 치아키는 테토라의 우위였다. 그것이 모리사와 치아키라는 인간의 본성이었다.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배려심. 테토라가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선의와 자선.

어디에나 예의가 있듯, 본성이라고 해서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악마와 계약한다고 해서 모두가 세계정복을 꿈꾸는 것도 아니었고, 램프의 요정에게 소원을 빈다고 해서 모두가 요정을 풀어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인간이다. 테토라가 평생에 걸쳐도 이해할 수 없을 존재.

“그날 밤은 창문에 비치는 달을 보고 있었는데…. 응?”

치아키의 전화벨이 울린다. 그의 전담 매니저로부터 온 전화다. 나름 자칭 타칭 히어로라고, 매니저를 데리고 다닌다. 물론 치아키는 전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단지 친구처럼 여길 뿐. 치아키는 손짓으로 테토라에게 양해를 구한 후 바깥으로 나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음, 나다. 모리사와 치아키.”

“드디어 받았네. 빨리 스타프로로 오라구, 계속 문자도 보냈잖아!”

“엑, 그랬었나!?”

급히 메신저 앱을 확인한 치아키가 입을 다문다. 몇 분 뒤 침묵을 깨트린건 기계음이 섞인 전화의 소리.

“그러니까, 등록을 하려면 장본인이 와야…. 여보세요, 듣고 있어? 무시까지 하다니! 우우, 모처럼 반짝거리는 동전도 찾았고, 계란 후라이도 예쁘게 돼서 럭키한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하하…. 미안하다, 지금 가겠다!”

성난 상대방의 통신 종료음과 함께 치아키의 전화가 끊긴다. 머쓱하게 웃으며, 치아키가 다시 테토라를 스간다.

“으음…. 나구모, 미안하지만 일이 있어서 말이다. 잠깐 나가보겠다.”

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 테토라의 따가운 표정을 받으며 자신의 방으로 간다.

전달받은 바에 따르면, 오늘은 모리사와 치아키가 정식 히어로로 등록되는 날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외출복을 챙겨입는 치아키는 근심 하나 없는 듯 활기찬 모습이었다. 이런 옷과 저런 옷을 번갈아가며 자신에게 대보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걸친다. 얼마 되지도 않는 멋을 부리며 거울 앞에 선다.

“이 정도면…. 괜찮은건가.”

청바지와 붉은 포인트가 들어간 가죽 자켓. 어떻게 보면 치아키답다고도 할 수 있는 그 옷차림을 한 채 방에서 나온다.

“정말로 미안하다…! 배가 고프다면 냉장고에 반찬이 많이 있으니까, 그거라도 먹거라. 그럼 이만! 다녀오마!”

그렇지 않은 척, 테토라는 슬쩍 배웅을 해준다. 치아키가 현관문을 닫고 나서자, 테토라는 정말로 혼자가 되었다.

병실을 보던 때가 떠오른다. 아무도 없다는 듯 쓸쓸하고 차가운 복도와, 그 위를 걸어다니는 나 하나뿐인 그림자.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약하게 켜진 조명을 등지면 그림자는 더욱 길게 늘어난다. 어느덧 걷고 걸어 모리사와 씨가 있는 병실에 도착하면 걸음을 멈춘다.

들어가도 될까.

생각을 정리한다. 혹시나 생명이 위독한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들어가는 것 자체가 실례인건 아닌가. 자기혐오를 끝마치고 나면 결심이 선다. 어차피 중요한 사람도 아니니 그냥 들어가기로 한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밀어내면, 그 앞에는 흰 침대에 누워있는 한 명의 환자.

모리사와 씨는 생채기와 상처가 가득한 팔에 링거를 꽂고 있었다. 작게나마 숨을 내뱉으며 잠들어 있었고, 그 얼굴은 고난 따위는 겪지 않은 듯 평화롭고 고요했다. 나는 차마 그 정적을 깰 수 없었다. 모리사와 씨가 만들어낸 것은 내 스스로 손댈 수 없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의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가만히, 조용히. 색색, 모리사와 씨가 숨을 내쉬었다. 나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봤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얇은 천이불을 들춰내면 찢어진 상처를 다시 이어꿰맨 흔적이 있다. 조금 건드리면, 그새 마취가 풀린건지 인상을 찌푸린다.

나는 왜 한낱 인간 따위에 연연하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여태까지는 계약자를 살리기 위한 행동이라며 변명을 했다. 이젠 그것마저 한계가 온다. 확실히 정의할 단어를 찾아야 했다. 만약 내가 함께 있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렇다면 나는 떠날 수 있다. 여차하면 강제로라도 밀어낸다. 만약 내가 붙잡지 않아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앞으로 떨어지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그러니까 대답을 들려줘.

“모리사와 씨.”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기다린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침대의 빈 자리에 머리를 뉘인다. 폭신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침대. 그런 차가우며 따듯한 곳에 모리사와 치아키가 누워있었다. 기약없는 숙면을 가지는 모리사와 씨가, 외로워 보였다.

그런 모리사와 씨가 나를 두고서 혼자 떠난다. 뒤따라가기엔 늦었다. 손발이 맞지 않는 내가 강제로 따라갈 이유는 없다며 자기세뇌를 해보지만 그것마저 효과가 없다. 순간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만다. 만약 내가 살인범인걸 알아서, 그래서 내 곁을 떠난건…. 모리사와 씨는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오늘만 해도 히어로니, 정의니, 하는 것들을 지껄이는 모리사와 씨였다. 그런 멍청이가 잠깐 사이에 텔레비전을 봤을 리가. 그저 우연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는다. 그저 모리사와 씨가 돌아와서 사고는 치지 않았냐고, 그렇게 말해주길 원한다. 무엇을 해야 할 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를 떠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아마도 나 따위에 실망했겠지. 알고 있었다. 나는 한순간 감정에 휩쓸려 사람을 죽여버린 살인자였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으로 들릴 터였다. 더 이상 엮이지 않도록 나 혼자 남겨둔 것인가? 헛웃음이 나온다. 그렇지만,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모리사와 치아키다! 불렀나!“

“네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무슨 사람이 하루도 지치는 날이 없어.”

“너도 마찬가지로 하루도 빠짐없이 귀엽지만 말이다!”

“엑.”

매니저가 방에 치아키를 강제로 밀어넣는다. 치아키가 계속 주절거리며 들어가진 방은 히어로 전문 관리 센터 ‘스타메이커 프로덕션’, 속칭 스타프로의 가장 높은 방이다. 스타프로의 회장이 있으며, 가장 화려하고 쾌적한 방.

“어서와, 모리사와 치아키 씨.”

그곳에서 치아키를 반기는 것은 텐쇼인 에이치다. 스타프로의 설립자이자 명실상부 최강의 경영자. 치아키는 그런 에이치와 오랜 친구였다. 친구에게서 들리는 존칭을 어색해하며 천천히 카펫을 밟으며 걸어간다.

“으음…. 그래, 나다. 여기엔 무슨 일로 부른거지?”

“너라면 충분히 예상한 줄 알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너에게 지원을 해줄 수 있게 됐어.”

“그런것 쯤은 알고 있다! 굳이 날 부른 이유는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단순히 문자로 공지만 해줘도 될 일이다만….”

에이치가 작게 웃으며 찻잔을 든다. 깊은 붉은 빛을 내는 홍차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후후…. 글쎄, 왜일까? 단순히 너와 내가 친구라는 이유로 부른다는 것은 굉장히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지. 그렇다면 무슨 이유에서 불렀을까. 기업의 사장과 거래처의 직원을 횽내낸 연극을 하려고? 그것도 아니야. 많이 궁금해보이는구나. 그렇디면 정답을 알려줄게, 이리와. 답은 간단해.”

기나긴 서두가 끝난 뒤 에이치의 부름에 따라 모노톤의 책상으로 향한다. 그 위에는 종이가 한 장, ‘신생 그룹 설립’이라는 제목을 가진 서류. 에이치는 그것을 치아키에게 건네주며 부가설명을 덧붙힌다.

“당황스럽지? 최근 ‘크림슨 프로덕션’이라는 블랙 기업이 날뛰고 있어. 돈이나 재물과 같은, 값나가는 것들만 바친다면 무엇이든 하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극악무도한 기업이지. 이 녀석들, 우리 히어로들의 정보도 빼돌린 적이 있어서 말이지. 스타프로의 수장 텐쇼인 에이치로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녀석들이야. 그래서 말인데 치아키, 우린 이 곳에 스파이를 하나 심을거야. 정예 히어로 몇몇을 꼽아서, 남들의 눈을 피해 크림슨 프로덕션에 밀어넣는거지. 이름하야, ‘코멧쇼’ 작전. 어때, 너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 않니? 어쩌면 고양이가 가득한 독방에 작고 가여운 생쥐를 여러마리 밀어넣는 격이겠지만, 그래서 네가 필요해, 치아키. 너라면 아직 놈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어. 가혹한 일이겠지만, 되도록이면 네가 이 생쥐들 사이에 숨어들어 지휘를 해주었으면 해.”

“즉 요컨대, 나더러 스파이가 되라는 건가.”

“빙고.”

“여전히 말이 길군. 음….”

치아키는 계약서를 받아들고 꼼꼼히 읽어본다. 악마의 계약서와는 달리 사회의 계약서는 잘 읽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있으니까. 찬찬히 흩어본 계약서의 내용은 단순했다.

코멧쇼. 크림슨 프로덕션에 잠입하는 작전. 참가인원이자 신생 히어로 그룹이며 스파이들인 ‘유성대’에 합류해 리더를 맡으라는용건. 제약은 없음.

“이게 끝인가?”

“보다시피. 원한다면 이것저것 더 늘려줄 수도 있어. 월급은 1000으로 한다던가, 초필살기는 매일 1번씩이라던가….”

“됐다. 불만을 가진건 아니다.”

가볍게 사인을 한 치아키가 에이치에게 서류를 건넨다. 투박하면서 가장 단순하게 이름만 달랑 적혀있는 사인이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는 첫 계약인 치아키가 긴장한다.

“… 좋아. 내일부터 천천히 시작할게. 자아, 그럼. 나는 서류를 심사하는 동안, 너는 이 건물을 둘러보고 있어도 돼. 원한다면 내 허가증을 줄 수도 있으니 말만 해.”

“아니…. 괜찮다. 텐쇼인 너야말로, 무리하지 말아라. 네가 무너지면 그야말로 끝장이야.”

가볍게 인사를 나누면서 방을 나간다. 그런가 하면, 치아키는 곧바로 다리가 무너진다.

“너, 너무 긴장했나….”

간신히 제 페이스를 유지하며 복도를 걸어다닌다. 이래봬도, 치아키는 지금 엄청나게 기뻐하고 있다. 건물의 노선도를 보며 탐사 계획을 세운다.

뒷일은 생각하지 못한 채로.


“이 녀석이지? 모리사와 치아키. 20대 초반에 히어로 지망생. 시끄럽고 정의롭다.”

이어지는 대답은 조용히 끄덕이는 고갯짓.

“그래…. 맡겨만 둬라. 대가는 준비했겠지.”

남자는 조용히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넨다. 그걸 받은 남자는 그림자 속에서 미소지은 채 남자를 돌려보낸다.

“알아 들었겠지. 이번엔, 음…. 그래. 너희가 다녀오면 되겠구나.”

스타프로 시설 내부를 전부 둘러본 치아키의 평은 이와 같았다.

“시끌벅적하군.”

어둑하게 태양이 지고 있는 거리에 치아키가 걸어가고 있었다. 나구모가 늦은 저녁을 챙기진 않았을까, 걱정하며 걸음을 재촉하며 돌아가는 치아키. 그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있었다. 한박자 늦게 뒤따르는 그림자를 따라, 누군가 뒤를 쫓고 있었다.

“하하하! 저 사람이었나아. 보기 좋아졌네, 응응.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어!”

헛소리를 지껄이며 호탕하게 웃는 남자의 뒤로 한 무리가 발소리를 죽이며 쫓아온다. 남자는 문득 웃음기를 지우고선 뒤를 돌아본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남자는 가만히 바람을 맞으며 형체없는 그림자를 응시한다.

“… 뭐어, 잘 하겠지이.”

남자는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 처럼.

“응?”

위화감을 느낀 치아키가 뒤를 돌아본다. 아무것도 없는 빈 거리를 보며 기시감을 느낀다.

“기분 탓인가….”

그렇게 치부한 치아키는 마저 가던 길을 간다. 큰 길은 빙 돌아가야 되니 늦는다. 그래서 치아키가 고른 길은 인적 드문 골목길이다. 어둑하며 인기척이 없는 그 곳은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치아키는 한 번 마음을 다잡고선 골목으로 향한다.

치아키를 미행하는 어느 남성도 따라 들어간다. 발소리와 기척을 줄이며 조용히 뒤를 밟는 남자는 모통이를 돈다.

그 곳에 치아키가 있었다.

“역시 내 뒤를 밟고 있던건가. 목적이 뭐지?”

남자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말대꾸한다.

“뭐겠냐. 네놈을 죽이러 온거지.”

“야만스럽군. 미안하지만 선약이 있어서 말이다. 이만 가볼….”

치아키의 말이 다 끝마치기도 전에 남자가 달려든다. 미처 피하지 못한다. 달려드는 남자를 억지로 맞아들인 치아키는 일순 무언가 파고드는 감각을 느낀다.

칼이다.

닿은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뾰족한 날붙이가 옷을 뚫고, 맨살을 뚫고 파고 들었다. 숨이 잠시 멎었다. 당혹스러웠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습격이었다. 남자가 한 발 물러섰다. 복부를 엇비슷하게 빗겨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아… 으.”

상처를 부여잡고 반대편으로 도망친다. 조금씩 배어나오는 피가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신다. 지체할 틈이 없다. 당장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다. 아무라도 괜찮으니까 내 앞에 나타났으면 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친다.

“나, 구모…?”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서야 깨닫는다. 완전한 오판이었다. 나구모?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지…. 날 미워하는 녀석이 여기까지 걸음을 할 리 없다고 깨닫는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착각도 정도가 있지, 이건 그냥 망상 아닌가.

그림자의 주인은 지금 날 쫓는 녀석과 한 패인 듯 하다. 잠시 경직을 일으킨 새에 붙잡힌다.

“잠깐…! 이거 놔, 너도 한 패인거냐!?”

양 팔이 잡혀 오도가도 못 한 채로 남자와 마주한다. 석양에 비친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살의를 품은 눈빛이다. 마다할 것도 없이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이미 한 번 피가 묻은 날붙이를 들고서 다시 달려든다. 피해야 했다.

어떻게?

최대한의 전력을 내도 피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히어로인 주제에 사나운 꼴만 보인다. 다시 또 하나, 이번엔 조금 위에 구멍이 뚫린다. 마찬가지로 피가 흘러나온다. 남자는 진심으로 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 날아온 것은 발길질이었다. 상처에 덧씌워진 고통에, 나가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양 팔을 붙잡힌 주제에 저항을 하려고 한다. 단언컨대 누구보다 나약한 저항일 것이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보면, 남자의 동료가 여럿 보인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내가 크림슨 프로덕션에 갈 수 있을까. 피해만 끼치는게 아닐까. 나보다 배로 더 큰 체격을 가진 남자들에게 실컷 얻어맞기를 반복하면, 저도 모르는 새에 무언가를 흘린다. 역시나 피였다. 입을 꾹 다물어도 사이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어스름이 꽃 핀 골목에는 내 흔적만이 있었다. 남자들은 그럼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무력을 내게 퍼붓는다.

이렇게 한심한 주제에 뭐가 히어로라고….

남자들은 죽으라는 둥의 실없는 소리만 반복하며 계속, 또 계속, 나를 해친다.

“너 인마, 그러게 누가 살인마를 숨기고 있으래?”

잘 작동하지 않는 머리로도 그 한마디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경찰이나, 그런 쪽의 사람일거다. 그래서 나구모와 함께 사는 날 처벌하려고, 이렇게…. 그렇다면 무엇도 할 수 없구나. 그렇게 깨닫는다. 여기서 괜히 나서지 않으면, 죽는 것은 나 하나 뿐이다. 그러니까, 나구모를 지키려면 가만히 버텨야만 한다. 나중에 원망을 듣더라도 이 정도라면, 그러면 괜찮지 않을까. 여전히 나구모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뭐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냐며 또다시 모질게 굴 것이 뻔했다. 그 날선 목소리를 들은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지, 이게 나라는 사람의 본성이라 그렇다, 미안하다. 나구모는 다시 어이없어 할 거고….

그렇지만, 그래도.

이 꼴볼견인 계약자를 용서해다오, 나구모.

“… 윽, 하하….”

목구멍에서부터 붉은 핏덩이가 역류한다. 이유없는 불쾌감. 남자들은 개의치 않는다. 핏덩이를 밟아 으깨버리곤 다시 나에게 달려든다. 더 이상 저항해봤자 쓸모가 없다는 걸 알았다.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편해진다는 것도, 누군가 도와줬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도, 전부 직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무엇도 포기할 수 없었다. 제각기의 날붙이가 나를 무참히 찌른다. 허리, 종아리, 팔, 쇄골. 여전히 나는 고통에 찬 소리만을 말할 수 있었고, 남자들은 그것을 즐거이 여기는 듯 했다. 저항해야 하는건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저만치에 떨어진 휴대폰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짓밟히고 상처입어 쓰지 못하게 된 목으로, 수신자의 이름을 부른다.

“나구모.”

“어라.”

모리사와 씨가 나를 부르는 착각. 그것에 이끌려 노을이 지는 거리를 내려다보면 땅거미가 일고 있었다. 모리사와 씨는 늦는다. 시민이라도 구하고 있으려나.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도망친걸까.

부정적인 생각은 떨쳐낸다. 급하게 끼니를 해결하고선 전화를 건다.

몇 분이 넘도록 무응답.

괜히 짜증나서 집어던지듯 전화를 끊어버린다. 이 사람은 어디에 뭘 하러 갔는지 알려주지 않는 것이 문제다. 지난 번에 산속 소문을 해결하러 갈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모리사와 씨의 경로를 예상해보자면, 아마 볼일이 있는 어느 곳으로 가서 해결을 한 뒤, 주변 가게를 둘러보다가 소품점을 발견. 그 곳에 들어간 모리사와 씨는 누군가의 생각을 하더니 소품샵으로 들어간다. 그 곳에서 껴안기 좋은 크기의 검은 호랑이 인형을 사오고선,‘네 생각이 났다!’ 라며 나에게 자랑한다. 호랑이가 아니라 악마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나에게 거절당한 인형은 자신이 껴안고 잠에 드는 용으로 사용할 것이다. 아마 지금 쯤 인형을 고르고 있으려나. 빨리 좀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한가지 재밌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이 갑자기 나를 마주치면 어떻게 반응할까? 히나타 군 같은 생각이나 한다. 그만큼 지루하고 할 일도 없으니까 그런거다. 전적으로 모리사와 씨가 나빴다. 검은 마스크와 빨간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아무 후드 집업을 걸친 뒤에 야외로 나간다. 본래라면 보이지 않았을 내 그림자가 길게 뻗는다. 모인간이랑 너무 오랫동안 있었나…. 모리사와 씨의 경로를 예상하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좁을 골목을 통과해나간다. 고양이가 걸어다니고 빈 깡통 쓰레기가 발에 채이는 그곳을 지나면 익숙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평소라면 날 수 없을 냄새인데.

혈향의 유혹에 이끌려 길을 튼다. 이건 본능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설마 이런 걸로 혼내진 않겠지… 설마. 툭하면 이게 본성이라는 핑계로 별 관심도 없는 사람을 구하는 녀석이 날 혼내면 그것도 이상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야단 정도라면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왜냐하면 내가 당신의 말을 너무 잘 들어서 이런 일이 난 거니까.

골목의 끝에 도착했다. 고개만 돌리면 실체가 드러난다.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웠다. 나는 언제나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는 악마였단 말이다. 그런데 왜.

심호흡을 한다. 그렇게 해야만 진정될 듯한 심장박동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조금씩 시야를 차지하는 붉은 색의 비율을 보자니, 한 마디로 끔찍했다. 그렇게만 말해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고, 그 다음에는….

이 곳에서 마주할 리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사람.

“모리사와 씨.”

역광이 테토라를 감싸고,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천천히 걸어간다. 겨우 눈을 뜬 치아키가 고개를 든다. 날카롭게 스쳐가는 안광을 이끌며, 테토라가 일행에게 몸을 던진다. 본래 치아키에게 향했어야 했을 횽기가 목표를 바꾼다. 테토라가 남자의 손에서 날이 선 칼을 앗아간다.

반격의 서막을 노을이 장식했다.

무자비했다. 절제하며 움직이는 몸짓을 보자니 너무나도 잔인하고, 그렇다고 맥없이 쓰러지는 것들을 보자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무참히 난도질당한 신체는 붉은 선이 몸을 가르지로고 있었다. 영문도 모르는 그대로 눈을 뜬 채 쓰러져있다. 한순간 치아키는 그들을 바라보며 불쌍하다는 생각을 해버린다. 분명 나쁜 사람들일텐데.

겨우 붙잡고 있던 정신이 점점 가라앉는다. 조금 더 깨있어야 나구모를 볼 낮이 있을텐데…. 한심하다. 내가 불러놓고 내가 보질 못하다니. 힘을 쥐어짜낸다.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내 안에서 무언가 새어나온다. 그것을 막으려 한다.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감기는 눈을 뜨려 한다. 나구모를 보려 한다.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눈이 감긴다. 의식이 가라앉는다.

움직여야 하는데.

“거 참, 그러게 누가 사람 아무나 골라잡고서 패고 있으래?”

“시, 시끄러워! 너같은 녀석이 올 줄 알고서 했겠냐!?”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모리사와 씨를 가만히 바라본다. 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을 제외하면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싫어서 온 거였는데.

“너 이 자식. 실족사 위장 사건 범인이지? 두고 봐. 우리 보스한테 다 말했다.”

“중얼중얼 아가리만 털지 말고 반격을 하라고.”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는 남자의 말. 나는 남자의 머리를 걷어차 벽에 처박는다. 죽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나에게 있어 저런 놈은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건…. 피아식별만 겨우 가능할 정도로 흥건하게 뒤집어쓴 피를 옷으로 닦아내고 모리사와 씨의 이름을 부른다.

“모리사와 씨.”

툭툭 건드려본다.

“저기여.”

발로 차 보기도 한다.

“야.”

미동이 없다. 차라리 모르는 척이라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소름끼치도록 조용했다. 각도를 돌려 얼굴을 확인한다. 피에 젖은 머리카락, 땅바닥에 쓸린 생채기, 아래에서부터 튀긴 피, 상처로부터 얼굴을 타고 내려오는 피. 부상을 확인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들춘다. 악의가 느껴진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취약점만을 노린 흔적이 수두룩했다. 이 현장을 본 사람 따위는 없었다. 노을만이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고, 모리사와 씨는 그것을 인지하기라도 한 듯 조용히 자는 것 같았다.

아니, 자는게 아니야.

아무리 일찍 잠자리에 든다지만 저녁조차 먹지 않고 자는 사람이 어디있어.

“모리사와 씨, 일어나십셔.”

일으켜 앉힌 모리사와 씨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본다. 그제서야 움찔, 하며 눈꼬리를 떤다. 그럼에도 즐곧 눈을 뜨지는 않는다. 이런 자존심은 세우지 않아도 된다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모리사와 씨에게 말을 건다.

“… 일어나라고. 왜 늘 이런 식이야? 내가 이렇게 당신에게 놀아나는게 좋은거야? 그럼 말을 하라고, 실컷 당해줄게. 당신 장난이라면 수십 번은 받아줄 수 있고, 당신 잔소리라면 수십 번은 들어줄 수 있어. 당신만 있으면 돼, 모리사와 씨.”

담담히 쏟아내는 테토라에 말에 그럴 필요는 없다고 대답하려던 치아키였다. 몸은 원하는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어둠 속 어딘가로 빨려들어갈 것 같다.

나구모 테토라는, 그런 모리사와 치아키를 품에 안은 채 숨죽여 울고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팔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호들갑 떨지 말라고, 울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전부 내 탓이었다. 나구모에게 걱정을 끼친 것도, 그래서 나구모에게 마음 고생을 시킨 것도, 모두 다 내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래야만 내 자신의 반성을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유성대는 다른 녀석들에게 맡겨야겠구나.

팔을 움직여 나구모를 안아주고 싶었다. 고개를 돌려 나구모를 바라보고 싶었다. 손을 움직여 나구모를 달래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력했다. 히어로 따위가 아니야. 나는 보잘 것 없는 조무래기다.

실은 알고 있었다. 나는 심성이 뒤틀려있다.

모리사와 씨가 걱정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단지 당신이 무사히 돌아왔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악마니까, 그럴 수 없는 거였겠지.

모든게 내 잘못인 것 같았다. 내가 괜히 이 녀석과 접촉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됐을 거다. 내가 일을 벌려서. 나 하나 때문에.

정신이 든다면 사과부터 전한다고 다짐했다.

“너, 거기 너…! 뉴스 그 녀석, 이 살인범…!”

아.

분명…. 모리사와 씨네 편의점 오전 타임. 항상 의욕없이 무기력하던 녀석이 갑자기 무슨 일이야?

“… 네가 신경쓸 건 아니잖아.”

분명히, 그 녀석은 내 목소리가 떨리는걸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나한테 오고 있겠지. 그러고는….

나를 현장에서 욺겨준다.

“그, 저기…. 일단 당신, 거기에 가만히 있으세요. 내가 처리할게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선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경찰? 병원?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제 나는 잡힌다. 모리사와 씨의 걱정이 늘어날 거다. 이런 걱정을 하는 와중에도 남자는 모리사와 씨에게 자신의 점퍼를 넘겨준다. 모리사와 씨를 편히 뉘이고선 물을 넘겨준다.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 사이에, 그 남자는 가능한 모든 것을 전부 해냈다.

어쩌면….

진짜 파트너는 저 녀석이 아닐까.

에이, 무슨 생각을. 나는 악마니까 못하는게 당연하잖아.

“… 네, 여기가, 그러니까… 으으.”

“스타프로 인근 카페 「COCHI」 옆 골목.”

“래요. 응?”

언듯 조금씩 들리는 전홧소리. 그것에 끼어들었다.

테토라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 투성이였다. 왜 자신이 해를 입은 것도 아닌 주제에 남의 해에 민감히 반응하는가. 그냥 무시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던건가? 그러면 편해질텐데.

치아키는 다른 남자에게 맡기고, 노을을 등지며 걸어가는 테토라의 모습이 유리창에 비친다. 태양보다도 붉은 눈시울을 애써 무시한채 도착지를 향한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인근의 병원으로 달려갔다.

결국 나는 이런 때에도 아무것도 못했다.


몇 시간 전, 수술이 끝났다고 한다. 나는 모습을 감춘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무탈한 듯 누운 모리사와 씨의 얼굴은 평소보다도 어려보였다.

모리사와 씨를 찾아간 불청객은 나 한 명이었고, 단지 병문안만의 이유로 찾아왔다. 정말로 그 뿐이었다. 계약자가 죽으면 많이 곤란해지니까.

“당신이 깨있다면 태클을 걸었겠지.”

침묵한다. 나 따위가 모리사와 씨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답례였다. 어쩌면 내가 오는 것을 원치 않았을지도. 그래도.

이제서야 인정할 수 있었다. 단지 계약자라는 말은 전부 핑계였다. 모리사와 씨는 파트너이면서, 친구인데다, 선배이자, 동료였다. 그렇기에 소중했고, 그렇기에 잃을 수 없었다.

완전히 파트너 실격이다.

더 이상 뭐라 하더라도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물론 내 잘못이다. 그러니 나만 책임지면 되는 일이야. 그냥…. 그 뿐이야. 후회가 물려온다. 내가 막았더라면. 내가 따라갔더라면. 내가 잔소리를 했더라면. 내가 확실하게 처리했더라면.

내가 모리사와 씨를 조금만 더 신경썼더라면.

이제서야 후회하면 뭐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는데. 후회 뿐인 자리를 떠나지도 못 한 채 말없이 누워만 있는 모리사와 씨를 내려다본다. 아아, 어리석구나. 나구모 테토라. 차라리 모리사와 치아키가 일찍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붙잡았을까. 한탄스럽도다.

겨우 자리를 뜰 수 있다. 최대한의 힘을 써서 자리를 욺긴다. 후드를 눌러쓰고 시선을 내리깐다. 인간의 몸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겨우 몇 명에게 얻어맞는 정도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게 말이 되는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제약 따위에 얽매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한탄스럽다. 그런 제약 따위 부숴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마계를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지금쯤 모리사와 씨와 나란히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깨어난 모리사와 씨와 허물없는 이야기도 나눴을 것이고. 애초에 이런 일 따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존재 자체가 죄스러웠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참회법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나는 머리보다 행동으로 승부를 보는 성격이다. 참회 따위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기도를 올리기는커녕 악마인 내가 뭘 할 수 있지?

“… 방법이 없는건 아니잖아?”

허탈한 웃음을 지은 채 병원을 나선다. 그렇지…. 되도록이면 쓰고 싶지 않았던 방법이, 아직 내 안에서 희미하게 존재를 발하고 있다. 그것이 내 본성이다. 악마라는 것은 본래 이런 잔혹한 짓이나 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더욱 히어로의 곁에 있어선 안될 존재였다. 모리사와 씨가 중상을 입은 건 그래서였던 것 같다. 내 탓이다.

그러니 참회를 한다. 조용히 기색을 숨기며 버려진 폐건물로 향한다.

내가 싫지 않았다. 나는 나인 채로 좋았고, 모리사와 씨는 히어로인 채로 좋았다. 원래 선인은 악인과 함께 공존하는 존재다.

모리사와 씨는 진정한 히어로였다. 그런 당신이 소중했다.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을 동경했다.

그래서 나는 내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핫, 나구모…!?”

이제는 익숙하다. 순백의 천장. 애매하게 얇은 이불. 삐삐 거리는 소리와 함께 결과값을 출력하는 기계. 지금 나는 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럼 나구모는….

“없구나.”

기분 탓이었다.

있던 것 같았는데.

“… 미안하구나. 늘 그렇게 혼자만 남겨두게 되다니….”

반성한다. 나구모는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거야.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야겠지.

“분명 고기를 좋아했다던가…. 좋아, 퇴원날 저녁은 소갈비다!”

뒤이어 기침소리. 이 정도도 안되는건가…. 목에 감겨진 붕대를 어루만졌다.

툭.

테토라의 손에서 남자의 머리가 맥없이 떨어졌다. 눈을 뒤집어까고선 흰자만 드러낸 머리는 테토라의 발길질에 저만치로 굴러갔다. 겁에 질린 표정을 한 채 뒷걸음질 치는 그림자를 노려보며 나즈막히 목소리를 내리깐다.

“왜, 도망치게?”

손짓 몇 번으로 그림자를 구속한 테토라는, 이어 그림자의 목을 긋는 시뇽을 한다. 그림자의 머리와 몸통은 분리되고, 테토라의 얼굴에 붉은 액체가 튀긴다.

“다음.”

천천히 남은 사람들을 노려본다. 크림슨 프로덕션의 녀석들은 전부 나쁘다고 알고 있다. 악은 본디 더 강한 악으로 찍어눌러야 하는 법이다. 테토라는 치아키와 완벽히 반대되는 존재였고, 때문에 이 대형 인질극은 테토라만이 할 수 있었다. 천천히, 말단 조무래기들에게 겨눈 손가락을 움직인다. 맨 왼쪽에서 맨 오른쪽으로, 천천히 가던 손가락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춘다. 천천히. 인질에게 향한 손가락이 움직인다.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으로 허공을 가르는 손짓은 날카로웠다.

“너. … 자백할 생각은 없는 건가.”

소리없이 한 사람을 지목해 다가간다. 겁에 질린 사람에게 테토라는 무표정으로 응대한다.

인상을 찌푸린다. 누군가 보스를 숨긴 것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더욱 분노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묻는다. 너희의 주도자는 어디있나.”

여전히 응답하지 않는 인질들. 테토라는 쯧, 혀를 차며 야외로 나선다. 보스의 흔적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숨겼다. 그 녀석은 갱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다고 좋아라 날뛰고 있을 테지. 다시 한 번 크림슨 프로덕션을 바라본다. 쓰레기들이 모여봤자지. 테토라는 슬쩍 업화를 건물 안에 던져넣는다.

“아무래도 좋아. 죽지만 않을 정도면 됐지.”

받은 만큼의 환납이다.

겨우내 도망쳤다. 난 이런 곳에서 죽을 녀석이 아니니까, 겨우 초짜 히어로의 동료 따위에게 죽을 쏘냐. ‘받은 만큼의 환납’ 이라니.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무슨 그런 소리를…!

“뭐야, 인간이네에?”

몰래 파놓은 뒷길에 서있던 것은 나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큰 사람 어쩌면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건 직후였다. 흔히들 만화 속에 묘사된 그 모습의 악마가—

“에이, 표정이 왜 그래애? 웃어보라구우. 네 운명이 바뀔 수도 있는 기회잖아아.”

그래. 악마란 그런 존재이다. 철처히 자신의 손익과 흥미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이기적인 생명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나구모 테토라? 그 따위 녀석이 뭐가 중요한가. 제 아무리 일대다로 싸우면서 적장을 무참히 썰어대는 녀석도 그 한계는 인간이다. 겨우 인간이 악마에게 덤벼들려 한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인간은 절대로 악마와 그 추종자를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약육강식. 그것이 세상의 이치고, 그것이 세상의 순리다.

나는 그것을 향해 납작 업드려서 외쳤다.

“악마님! 부탁드립니다, 저와 계약을 맺는건 어떠십니까! 필시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악마는 나를 빤히 쳐다보곤 고민한다. 당연한 결과일거야. 내 인생은 잘난 점 하나 없으니까, 그만큼 더 매력적인 먹잇감, 이겠지.

어서 나를 먹어라. 네가 나를 포기할 수 있을 쏘냐?

“… 그래, 어디 한 번 해볼까아. 너, 조건은?”

“조, 조건은,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대가 뭐야, 그대가아. 부끄럽게 그런 거창한 말은 말고, 음…. 미케지마 씨. 그렇게만 불러줘어.”

악마가 제 이름을 순순히 밝혔다. 어쩌면 가명일지도 모르는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면 악마는 계약자에게 귀속된다고 하지…. 이 녀석, 잘만 하면 한 탕 벌어들일 수 있겠는데. 애써 떠오르는 비웃음을 감춘 채,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계약자인 척. 사람을 속이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있어. 그것이 악마라고 해서 변하는건 아니야.

“그럼, 저, 미케지마 님! 원하는 대가를 마음껏 가져가십시오! 저는 그만큼의 힘을 원합니다! 누구도 깔보지 않을 만큼의, 그런 강대한 힘을…!”

“에에, 뭐야. 정말로 그것뿐이야? 고전적인 소원이잖아아. 더 디테일을 추가할 수는 없는거야아? 뭐…. 그래. 네가 원한다면.”

얼핏 고개를 들어 바라본 악마의 너머에는 붉은 빛이 감도는 달이, 악마의 뒤를 비추며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를 향해 길게 뻗은 그림자는 위협적일 만큼 길게 늘어져있었다.

세차게 휘몰아치던 바람소리가 멎어들고, 정적만이 찾아왔다. 악마는 나를 바라보며 시꺼멓던 그림자를 뚫고 녹빛 안광을 내비쳤다. 소름끼치고, 무엇이든 삼켜낼 듯한, 그런 독을 품은 초록색. 그것이 나를 꿰뚫었다.

“좋아, 계약 성립이다. 내 흥미에 부응하길 기도하마.”

“… 아아, 감사합니다.”


“모리사와 씨!!!”

이번엔 조용하진 않겠군. 테토라의 목소리를 들은 치아키가 몸을 일으키며 떠올린 생각이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현관을 박차고 들어오는 테토라를 마중한다.

“나구모 왔는가! 지금은 늦은 밤이니 목소리를 낮춰주길 바란다.”

테토라는 가만히 치아키를 바라보며 제 안에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려는 감정을 제어한다. 발소리도 없이 조용히, 그리고 인기척도 없이, 치아키에게 접근한 테토라가 할 일은 폭력행사나 욕지거리가 아니었다. 단지 가만히 손목을 잡은 채 치아키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치아키는 그런 테토라를 이상하게 여긴다. 슬쩍 눈치를 보며 빠져나가려 해도 더 강한 힘으로 붙잡혀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있을 뿐이었다. 부담스러운 테토라의 시선을 피하며, 차아키는 말한다. 나는 괜찮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라고. 테토라에게 그 말은 닿지 않는다. 테토라는 그저 치아키의 무사 귀한을 고대하고 있었을 뿐이고, 그렇기에 그 모습을 눈에 새기고 있을 뿐이었다.

“… 나구모?”

“그렇게 혼자 뛰쳐나가기만 해선…. 나 혼자 내버려 두니 좋았슴까? 계약주 내버려두고 혼자 죽으려 드니까 좋았나고.”

그 말에 원망이 담겨있다. 치아키를 향한 감정은 아니었다. 화풀이의 대상을 그로 정했을 뿐이다. 테토라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준다. 돌이킬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탓에 서운했다. 차라리 나를 원망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되새기며, 누구를 향했는지 모를 울분을 토해낸다.

“정말로…. 진짜, 최악임다. 왜 그런 짓을 해서….”

치아키에게 향하는 말이었으며, 동시에 치아키에게 향하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무슨 신념을 가졌는지 모를 눈빛으로 조용히 테토라를 쳐다본다.

“나구모.”

“…”

“미안하구나. 마음대로 탓해라. 전부 내 탓이다, 내가 잘못했어.”

테토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단지 치아키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누구의 잘못인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치아키의 팔은 테토라를 향해 안아준다.

“지, 지금 뭐하는.”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정적 속에서 테토라는 가만히 치아키의 얼굴을 상상한다. 주녹이 들었을까? 나에게 실망했을까?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더 이상 상상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모리사와 치아키라는 인간은 그렇게 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나구모 테토라보다 훨씬 강했고, 훨씬 올곧았다. 그래서 테토라는 가만히 치아키를 안아준다. 나의 우상, 나의 파트너. 강한 척은 이제 필요없었다. 치아키는 생각보다 약했고, 테토라는 뒤늦게 그것을 깨닫는다.

“… 용서해주는 건가.”

“아직. 나중에, 마음의 준비가 된다면 그때 털어놓겠슴다.”

“하하…. 그런 점도 나구모답구나. 고맙다, 미워하지 않아주어서.”

이때만큼은 쓰다듬는 손길이 믿지 않았다. 따뜻한 온기를 품은 치아키의 손 위에, 테토라가 손을 겹친다.

“… 마십셔.”

“뭐? 미안하다, 잘 못 들었군….”

“다시는, 멋대로 판단하지 마십셔. 그렇게 약속하지 않으면, 저는 계약 같은건 파기해버릴검다.”

“아무래도 미운 털이 박혔나보구나…. 약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계약을 파기할 생각은 없지 않은가?”

정곡을 찔린다. 그럼에도 평소와 같이 미소지으며, 주먹을 내밀어 보인다. 이 사람이 밉지 않으니까, 내 나름의 정성을 담는다.

모리사와 씨도 똑같이, 서로의 주먹을 부딫힌다.

“약속한다. 태양이 무너지는 그 날까지 지키도록 하마.”

“과장은…. 그럼 태양이 무너지고 난 뒤엔 지키지 않겠다는 소리임까?”

“음…. 그렇다면, 우주가 무너질 때까지 지키마. 언젠가 태양이 무너지는 날이 오더라도, 우주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테니 말이다.”

“…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림까.”

“내가 나구모에게 한 소리다. 잊지 말고 기억해라.”

“네…. 당신이야말로.”

치아키가 퇴원을 한 날의 밤이었다. 몇 달만에 다시 만난 테토라가, 치아키의 눈에는 조금 달라보였다. 기분탓이겠지, 여기며 치아키가 말을 건다.

“… 자 그럼, 어서 들어와라. 너를 위해 특별한 저녁을 준비했다.”

조용하지만 기백 넘치는 외침.

“그런다고 용서해줄 것 같슴까?”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은 테토라는 메인디쉬에 관심을 가진다.

“이건….”

“소갈비다. 네가 좋아하던 것 같길래.”

“당신이 이럴 돈이 어디있다고…. 그럴 시간에 자기 계발이나 하십셔. 히어로나 돼서 맞고 다니기나 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곤 잘 먹는구나.”

“일단 날 위해서 해준거니까…. 버리긴 아깝잖슴까.”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아 고기를 뜯는다. 평소답지 않게 조미료는 적당했고, 굽기 또한 적당했다. 누구 한 명만을 위한 요리였다. 테토라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채 식사에 전념한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은 차갑고, 쓸쓸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니 테토라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가만히 창문을 바라본다. 치아키는 그것을 바라본채 흐믓하게 웃는다.

“하하, 보기 좋구나. 아무튼…. 그럼 화해된건가?”

“뭐…. 대충은요.”

휘이잉.

바람이 분다. 평소와 다른 사갑고 서늘한 바람. 테토라가 그것을 감지하고 주변을 살핀다. 당연하다시피 아무도 없다.

“무, 무슨 일인가…. 혹시 귀신이라도 있는 건가!?”

치아키가 지레 겁을 먹고선 테토라의 등 뒤에 달라붙어 숨는다.

“그런거 아님다. 없으니까 나오십셔.”

“으으….”

“하하, 들켰구나아? 역시 테토라 씨구나아…. 마냥 손을 놓을 수는 없겠네.”

“자아…. 어디, 얼마나 잘났는지 볼까아.”

슬쩍 열린 창문의 틈새로, 무언가 흘러 들어오듯 침입해온다. 구둣굽이 바닥에 부딫히며 마찰음을 낸다. 어깨에 걸친 코트자락은 바람 하나 없이도 공기의 흐름에 따라 흩날리고, 그것이 거슬린 남자는 손짓 한번에 창문을 쾅 닫아버린다. 누군가 깰 법한 소음에도 어느 사람 한 명 깨지 않았다. 남자는 발에 채이는 가구들을 피해 치아키의 방에 들어간다.

“… 어이쿠.”

“당신 누구야.”

그러려고 했다. 방문을 열려는 남자의 팔을 테토라가 잡아낸다. 조명에 굴하지 않는 어둠을 뚫고서 두 쌍의 눈이 빛났다.

“누구냐고 물었어.”

“너라면 대답해줄거야아?”

테토라를 도발하듯 말끝을 강제로 늘린다. 여전히 팔을 붙잩힌 채인 남자는 장난스레 의자에 앉는다.

“거봐, 안 해줄거면서어.”

식탁에 기대어 팔을 괸다.

“우선 진정하는게 어떨까아. 나는 너한테 관심 없거든, 모리사와 치아키만 보고 떠날 거야아.”

“그게 될리가.”

슬쩍 이를 간 테토라가 먼저 주먹을 날렸다. 일순 표정이 바뀐 남자는 여유롭게 피한다.

“하하, 벌써 본성을 드러내는구나아! 그러면 안되지이, 나쁜 악마 씨네에!”

“그러는 당신은 아닌 줄 알아?" 마찬가지인 주제에.”

연달아 날아오는 테토라의 연공은 가볍게 흘려보내진다. 그런 테토라를 비웃은 남자가 천천히 다가선다.

“나, 너 알고 있어. 조심하렴.”

“괜히 민간인 같은거 건드리지 말고 저리 가.”

“이상하다, 원래 네가 예의도 없는 녀석이었나아?”

바람을 가르는 무언가의 소리. 그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했음에도 얼추 예상할 수 있었다. 테토라의 볼에 붉은 선이 하나 그어진다.

“적어도 위아래는 지키는게 좋을거얼?”

피는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그러는 당신이야 말로. 여긴 내 구역이야.”

“하하, 과연 그럴까아?”

그렇게 선전포고를 날린 남자가 까닥 손짓을 한다. 닫혔던 창문이 다시 열리고, 세차게 강풍이 휘몰아친다. 테토라가 그것을 받아내는 동안 남자는 조용히 치아키에게 접근한다. 테토라가 깨닫은 것은 이미 늦은 때, 즉 치아키의 방문이 열린 순간이었다.

“잠깐, 모리사와 씨…!”

“쉿.”

“우음…. 나구모?”

치아키가 인기척에 눈을 뜬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자신보다 조금 더 큰 남자를 마주한 치아키는 그대로 얼어붙는다.

“앗. 하하…. 조금 시끄러웠지. 미안미안! 그럼 이만, 마마는 가볼게에!”

“응…? 그래, 조심히 가봐라….”

비몽사몽한 치아키의 배웅을 들은 남자가 쾌활하게 작별인사를 한다. 눈 깜짝할 새에 검은 연기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남자를 본다. 정확히는 이미 떠난 그 자리를, 테토라는 분노에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 저기, 나구모. 방금 그 사람은….”

“몰라도 되는 사람임다. 모르는 사람임다.”

“…”

테토라의 표정에 불안이 스친다. 치아키는 애써 모르는 척을 한다.

그 후로 며칠 동안은 평탄했다. 남자가 다녀간 뒤로는 치아키를 노리는 사람도 없고, 자동적으로 테토라도 치아키의 집에 눌러 살고 있었다. 가끔 농담을 던지며 동거를 하게 된 둘을 제외하면, 특이할 것도 없었다.

그런 틈새를 타서, 누군가는 작전을 짜고 있다.

격전은 생각보다 평범한 일상에서 열렸다.

모리사와 씨의 진급을 축하하기 위해 주변 소품샵에서 전대물의 피규어를 사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뭐가 있고 뭐가 없는지 정도는 전부 꿰고 있었다. 운 좋게 모리사와 씨가 가지지 못한 피규어를 구했고, 다급한 마음에 순식간에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벌써 모리사와 씨와 함께 살게 된지 몇 달이다. 시간은 빨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 은 아니다. 나랑 처음 접선한 날에는 사장이 히스테리를 부린 탓에 모리사와 씨가 야근을 하게 됐고, 그로부터 며칠 뒤에는 야산의 소문을 조사하다가 대형 사고를 치게 되고…. 다행히 모리사와 씨에 대한 뉴스는 나지 않았다. 내가 전부 뒤집어 썼다. 어디서 누가 본건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럴거다. 누군가 나를 보고선 신고를 해서, 내가 살인범으로 몰리고…. 틀린 말은 아니니까, 뭐. 그 이후로 마스크나 선글라스 등등을 상시 구비해야하는 것이 조금 귀찮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살만해졌다. 요즘엔 많이 뜸해지기도 했고….

다만 귀찮은게 있다면, 아직 날 알아보는 몇몇이 있는 탓에 이렇게 얼굴을 가리고도 빙 돌아가야 한다는 거다. 이 나라는 치안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도통 모르겠다. 역시나, 지금도 큰 번화가를 외면하고 좁은 골목길로 가고 있다. 모리사와 씨가 아니니까 깡패나 불량배에게 습격당할 일도 없으니 안심이다. 어쩌면 그냥 내 자체가 ‘이쪽‘ 체질일 수도 있지만, 지금 그건 알 바 아니다. 나에게 중요한건 모리사와 씨에게 피규어를 안전 배송하는 거다. 선물을 받고서 기뻐하는 그 모습을 보면 벌써부터 들뜬다. 슬쩍 마스크를 올려 입꼬리를 가린 뒤 발걸음을 재촉한다. 훤히 보이는 그 미소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면, 내 대답은 ’YES‘다. 그 미소에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지키고 싶은거다.

“거기, 테토라 씨 맞지이?”

이 녀석이 나타나기 전에는.

나중에 알게된 건데, 이 녀석은 미케지마 마다라라고 하는 고위 악마였다. 뭐더라, 마왕의 지인이라던가. 하나 확실한건 내가 감히 덤빌 수 없다는거다.

사실 이럴 줄 알았다. 항상 이런 좋을 때만 뭐가 튀어나와서 방해하더라.

“상대해줄 시간 없어.”

“매정하구나아! 조금만 상냥하게 말해줄 생각은 없니이?”

그렇게 말하고선 나를 벽 끝까지 밀어붙힌다. 피규어가 떨어지는 소리.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 그래도. 지금 시간을 뺏기면….

“… 아하. 너 지금 치아키 씨 생각하고 있구나아?”

그 사람 지금 집에 혼자 있을걸. 너무나도 의도가 뻔한 도발이다. 두 번 다시 넘어가지 않는다. 저 녀석은 위험한 사람이니까 내가 잘 방어해야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모리사와 씨에겐 너무 많은 빚을 졌으니까. 이렇게라도 갚아야 하는 거야.

“아마 지금 쯤이면…. 그렇지, 반쯤 죽어있겠구나! 치아키 씨 집엔 이미 간 사람이 있단다♪ 어서 가지 않으면 치아키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의도를 알면서도 걸려들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모리사와 씨가.

무턱대고 달려들었다. 당연히 실패할 것을 알았다. 손짓 하나에 나가 떨어져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어느새 아픈 것도 모른채 계속 덤벼들고 있었다. 분명 상성 같은건 잘 알고 있고, 나는 저 사람과의 대진운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있잖아. 나는 소중한 사람을 지키면 안되는거야?

“저기이, 잠깐만, 테토라 씨이. 내 말 좀 들어볼래애? 네가 이런다고 해서 변하는건 없어. 가만히 있으라구우. 에잇.”

가볍게 나를 제압해 무너트린다. 악을 쓰며 버티는 나를 보고선 비웃는다. 물론 가소로워 보이겠지.

“그으…. 왜 이러는진 모르겠는데, 그 사람은 마마가 보낸게 아니야아? 귀찮게 달려들지 말자고오.”

딱. 손가락을 튕긴다.

주술이다. 강제로 정신을 무너트리려는 그런 저주. 힘이 풀린다. 초점이 맞지 않는다. 버텨야 하는데, 그러질 못한다. 모리사와 씨에게 전해야 할 선물이 있는데.

완전히 정신이 끊긴다.

“그러게 내 말 좀 들으랬잖아아.”

“… 당했군. 이러면, 나구모가… 걱정할, 텐데….”

겨우 정신을 붙잡는다.

천천히 무슨 실수를 했는지 되짚어 본다.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현관을 연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구모가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은 능숙하게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군다. 그리고는…. 나를 가지고 논다. 도망치려고 하면 다리를 붙잡아 끌어당기고, 조금의 저항을 하면 그의 수십 배로 되돌려줬다. 기억도 하기 싫었다. 멋대로 침입을 해서 한다는 짓이 폭력 행사라니, 이게 뭐야. ‘놀이’의 끝은 보일 기미가 없었고, 내가 정신을 잃었다고 판단한 녀석은 그제서야 마무리를 지었다. 내 머리채를 움켜쥐고선 선반에 내다꽃는다.

아프다. 엄청 아프다. 죽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못하는 새에 발소리가 들리고는 현관문이 닫힌다. 정적이 찾아왔다.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이 겨우 분위기를 띄운다. 흘러나오는 피를 막으려 손을 얹는다. 역부족이다. 손바닥으로 막히지 않을 거라고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정신을 차려야했다. 나구모가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벽을 짚고 일어나 수건을 찾는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시야가 흐려지는 탓에 보이지 않는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구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면…. 그러려면, 내가 멀쩡하다는걸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죽을 수 없다.

그런데 왜.

살려줘, 나구모.


치아키를 데려오는 남자는 언뜻 보면 평범했다. 체격이 유별나게 커다란 것도 아니고, 전투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다만 마다라의 가호를 받고 있었을 뿐이다.

“좋아좋아, 잘 하고 있구나아!”

마다라의 앞에 치아키의 몸이 힘없이 떨어진다. 테토라와 달리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저항이라곤 할 수 없었다. 마다라의 주술로 구속당한 테토라가 가만히 마다라를 노려본다.

“뭐, 왜. 불만 있어어?”

“모리사와 씨는 가만히 두십셔.”

“하하, 그게 걱정이구나아? 괜찮아, 괜찮아아! 치아키 씨는 절대 안 건드려어! 그보다 테토라 씨, 저 사람 본적 없어어?”

“설마 저 녀석이 절 봤겠습니까? 그 전에 도망쳤는데.”

남자가 테토라를 비웃는다. 테토라는 그와 동시에 남자의 정체를 깨닫는다.

“… 당신, 크림슨 프로덕션….”

모른척, 남자가 테토라를 내려다본다. 비릿한 웃음과 함께 테토라의 목을 향해 들이대는건 짧은 칼. 남자가 마다라를 보고, 치아키를 보고, 테토라를 보고 비웃는다.

“이제서야 알아챘어?”

조금씩 테토라의 목에 칼날이 파고 든다. 짐짓 모른척 여유롭게, 얼굴에 철판을 깔듯 뻔뻔히 나선다.

“그래서? 그러면 안되나? 누구 씨 덕분에 많이 고생 좀 했지. 재미는 봤냐?”

남자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한순간 칼날이 볼을 스친다. 뜨겁게 타는 듯한 상처에 테토라는 몸을 작게 떤다.

“뭣, 이거…. 당신, 나한테 뭔 짓을.”

“글쎄다아?”

마다라가 능청을 피운다. 실은 테토라도 알고 있었다. 테토라는 마다라가 걸어버린 주술로 인해 신체 능력이 약해졌다. 그패서 평소와는 다르게, 단지 철제 나이프일 뿐에도 가뿐히 상처를 입는다. 어림짐작 정도는 아무리 테토라라도 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머리를 굴리는 건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사지를 움직일 수 없던 테토라가 남자에게 걷어차인다.

“뭘봐, 처음 맞아보냐?”

눈동자를 굴리며, 계속 얻어맞으며, 탈출할 궁리를 생각한다. 피를 토하고, 벽에 처박히고, 누군가는 버티기 힘들 정도의 폭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아프다. 죽을 것 같다. 모리사와 씨는 이걸 버티고 있던거였나. 나는 보잘 것 없는 녀석이었구나. 하하…. 마지막 선물은 준비해줄까. 아무도 모르게, 모리사와 씨가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조금씩 마력을 나눠준다. 이러면 금방 정신이라도 차리겠지. 모리사와 씨는 겨우 이 정도로 나빠질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게 믿어.

테토라는 굴복한다. 무언갈 하려고 해도 마다라의 손짓 한 번에 무산된다. 정신을 이어나갈 수 있기에 겨우 사고방식을 잇는다. 그뿐이었다. 강제로 끌어올릴 체력도 없었다. 꾹 다문 입에서 조금씩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나구모를 보고 있었다.

움직여야 했다. 나구모를 구해야 했다.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언젠가 이런 상황이 있었을까? 아니, 없었다. 부끄럽지만, 항상 나구모가 구해주는 쪽이었어. 나 자신이 우스웠다. 분명 나는 히어로일 텐데. 이런 현실은 싫어!

언젠가 사람들을 전부 구해내겠다는 다짐을 한 적이 있다. 그리 먼 옛날도 아니야. 그냥 지나가듯 한 소리였어. 그래도, 나구모. 너는 내 동료니까. 내가 구해줄거라 약속도 했는데.

미안하다.

한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스친다.

나구모, 내가 만약 희생한다면 너는 날 미워할건가?

지금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을 시간이 없었다. 나구모가 의식을 잃기 전에, 어서.

불행 중 다행으로 나구모는 꽤나 잘 버텨주고 있었다.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적의 관심을 나구모에게서 나로 가져오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소리를 질렀다. 당연하다시피,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목의 회복이 더디었다. 여전히 쇠에 긁히는 듯한 소리가 내 본래 목소리에 섞여들렸고, 그럴 때마다 고통은 늘어났다. 그럼에도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평소보다 높아보이는 선반이 연탄 냄새를 풍기며 우뚝 서있었다.

이거다.

발소리를 죽이고 몰래 걸어간다. 저걸 넘어트리면 적어도 시간은 벌 수 있다. 그 틈에 나구모를 데리고 빠져나가면, 아니 119에 신고를 한다면, 크림슨 프로덕션과의 기나긴 악연도 끝나는거다. 하하, 승진을 하자마자 다시 승진을 하게 생겼군! 그런 티를 내색하지 않으며 선반에 발을 건다. 이래봬도 많이는 아니지만 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나구모가 위험해지기 전에 막는 정도는 할 수 있어. 신중하게, 타이밍을 봐가면서…. 기회는 한 순간 뿐이다. 운에 맡기는 수밖에.

지금.

죽기살기로 나구모의 이름을 부르며 금속 선반을 넘어트린다.

“나구모, 일어나라!!”

마다라는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지금껏 자신과 계약해온 인간들을 떠올리며, 치아키에게 겹쳐본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너무나도 명백히 달랐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정의로웠고, 순진하며, 온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렇지.

히어로.

“… 재밌구나아.”

치아키가 처음 깨어났을때, 마다라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연약한 개미가 무언가를 하려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마다라는 지켜보기만 했다. 개미는 홀로 판단을 해냈고, 그것을 실행으로 욺겼다. 무어라 끼어들 여지도없이 완벽한 ‘선’의 모습이었다. 몇백년 간 본 적 없는 진정한 정의에, 마다라는 조금 도움을 주기로 했다. 일부러 조이는 나사를 느슨하게 했다.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일부러 방관만을 했다. 그것이 쾌락과 흥미를 추구하는 악마의 본성이었으니까.

조금 판을 바꿔볼까.

엄청난 굉음을 내며 선반이 무너진다. 남자는 그것에 깔리고, 테토라는 그것으로 간신히 고통에서 해방된다. 참고 있었던 숨을 단숨에 내뱉은 테토라가 치아키에게 안아진다.

“다행이구나, 나구모…. 고맙다.”

앞으로 며칠간, 치아키의 제대로 된 목소리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너무 많은 무리를 했다. 테토라는 그것의 원횽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붙잡고 간신히 버티는 치아키를 편하게 눕혀준다. 동시에 자신은 멀쩡하다며 안심시키고, 어느 한 명을 향해 총알같이 튀어나간다.

“… 어이쿠우.”

테토라는 누구도 보지 못할 속도로 마다라의 넥타이를 잡아 끌었다. 누가봐도 명백한 살의를 품었다. 그것쯤은 여기에 있는 누구라도, 설령 마다라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테토라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다. 거역죄로 물려 마계에서 추방당하겠지. 그것으로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이 정도 쯤이야. 결의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휘두르려던 테토라였다.

“잠깐, 나구모!”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세계는 굴러간다.

치아키가 테토라를 끌어당긴다.

“이거 놔.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번 건은 간섭 못해.”

“나구모. 내 말 들어라.”

“당신은 알 필요 없어. 애초에 제정신인거야? 지금 저 녀석 때문에 당신이 죽을 뻔 했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나!”

서로간에 처음 오가는 호통소리. 테토라는 침묵했다.

“… 소리친건 미안하다. 그리고 이해한다. 넌 날 위협한 저 녀석이 엄청 싫겠지, 죽이고 싶을만큼.”

“알면 그런 소리는 그만 하지 그래?”

“그러니 내가 판단하마. 하나 확실한건, 너와 나의 ‘정의’가 다르다는 거다. 그러니 이번 일은 피해자인 내가 판단해. 나구모 넌 빠져있어라.”

“그렇지만…!”

“반복하지 않는다. 불만이 많다는건 알고 있어. 모두 이해한다.그렇지만 지금은 내가 ‘선배’로서 너를 품어줄 때다.”

조심히 테토라의 손을 떼어낸다. 테토라는 그에 대한 불만 따위 가지지 않았다.

언제나 이길 수 없던 것은 자신이었다.

“… 뭐, 그러던가. 당신은 항상 그랬지. 그래서 난 당신을 이길 수 없나봐.”

이번에도 역시 이길 수 없었어.

테토라가 실소를 터트리며 한발 물러난다. 그에 대한 치아키의 답은 미소 뿐이다. 그것을 보는 마다라는 상황을 이해한 뒤 과장된 웃음을 짓는다.

“잘됐구나, 잘됐어어! 해피엔딩이네에! 자아, 그럼! 나는 어떻게 처리하려고 그래애?”

“처리하지 않는다.”

“응?”

치아키는 흐트러진 마다라의 넥타이를 정리해준다.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치아키를 바라보는 두 사람에게, 그는 간단한 대답을 한다.

“꼭 처단해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나는 지금 당장 너를 처단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까 왜….”

“나는 모두의 히어로야. 만약 당신이 악마라고 할 지언정, 나를 위협했다고 할 지언정, 겨우 그런 이유로 외면하지 않아. 당신도 동동하게 도움받을 자격이 있어. 왜냐하면, 그것이 ‘히어로’니까.”

멀뚱멀뚱, 마다라가 치아키를 내려다본다. 원한다면 죽여버릴 수 있는 약한 생명체. 죽이는 것이 질린다면 마계로 데려가 일꾼으로 삼을 수도 있다. 어쩌면 불사의 몸을 내주고 장난감으로 써먹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마다라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 자신을 가로막은 이 인간은 누구보다도 강한 의지가 있었다. 그것을 흥미롭게 여긴 마다라가 잠시 미래를 엿본다.

비극이 기다리면서도 그것을 이겨내는 것의 연속이었다. 그 옆에는, 한 명의 사람.

아하.

치아키의 운명이 궁금해져서, 마다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발소리, 지친 숨소리. 그것들이 들리는 혼란통에서 마다라는 그들의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과연 그들이 어디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의 절차였다.

퍽. 무언가 터지는 소리.

치아키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려 했다. 그러나 한 발 빨랐던 건 테토라였다.

“왜, 왜 이러는가.”

“… 아마 안 보는게 좋을걸여.”

그런 말을 하며 뒤를 돈 테토라의 눈에 머리가 사라진 한 명의 시체가 들어온다. 혈향이 느껴지기에 예상은 했다. 이 녀석은 방금 전까지 우위를차지하던 녀석이겠지. 이걸로 크림슨 프로덕션은 파괴된다. 도망간 사람들을 제외하면, 한 명도 빠짐없이.

뒤를 돌려는 모리사와 씨를 막은 것에 악의는 없었다. 그냥, 모리사와 씨는 이런걸 못 보니까. 좀비가 사람을 물어뜯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는 겁쟁이이다. 그런 겁쟁이가 실제로 머리가 터진 사람을 본다면 뻔하지 뭐. 그러니까 이건, 내 나름의 배려인거다.

“이런 건 못 보잖슴까. 딱히 볼 필요도 없고….”

“… 하하, 알겠다. 나구모 나름의 배려인거군.”

“재미없어라아.”

조용히 마다라를 노려본다.

“많이 재밌는데. 자기 계약자를 죽이고서 괜찮겠슴까?”

“그러엄. 저런 놈보다 너희가 훨씬 재밌으니까아. 나로서는 손해볼 거 없는 내기였는거얼?”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었다. 조용히 마다라를 경계하며 건물을 빠져나간다.

“그래서…. 내 운명이 재밌어 보여서, 그렇게 멋대로 계약자까지 죽인 채 나를 따라오기로 한거라고?”

“그렇지이! 이제 동맹이니까 걱정 말구우.”

“…”

툭.

“아얏, 왜 때려어!?”

“모리사와 씨를 대신한 히어로 펀치임다.”

“테토라 씨는 악마인데도오?”

“그럼 내가 하겠다. 에잇.”

툭툭.

“너무해애…. 미안하다니까아. 진짜로 아무 폐도 안 끼칠거야아. 남의 계약자에겐 함부로 손대면 안되기도 하고오.”

“진짜인가?”

꽈악.

“… 그런 식의 손을 댄다는게 아니었지마안.”

“그대로 한 방 먹여주십셔.”

“아직 아무것도 안했는데에?”

“하하…. 나구모가 원래 내 걱정이 좀 많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수십번을 말했지만 변함없더군….”

“그건 네가아.”

“아니다! 히어로로서 시민을 구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건, 그러니까…. 불가피한 사항이야!”

“그렇게 빠져나가려고 한 게 벌써 몇 번째임까? 모리사와 씨가 괜히 남들에게 신경쓰지 않고 제시간에 돌아오기만 했어도 피할 수 있던 사고가 몇 개인데. 저번에 괜히 길을 알려주겠답시고 안내하다가 죽을 뻔한 기억은 벌써 잊어버린검까? 그것때문에 고생을 몇번을 한건지…. 그리고, 그 다음에도 똑같은 짓을 하다가 묻지마 살인이나 당할 뻔하고.”

“그, 그만해라….”

“아직 안 끝났슴다. 그렇게 약해빠져선 뭘 어쩌려고여? 칼에 찔릴 뻔 했을때 제가 구해줬더니, 고맙다는 말은 못할 망정 사과나 하고. 당신이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검까? 차라리 저랑 같이 욕이라도 시원하게 했으면 얼마나 좋아, 하다못해 애도라도 표해? 허 참…. 이 세상에서 그렇게 착해서는 손해만 입는다고여. 아무리 히어로라지만 조금은 나빠지는게 어떰까?”

“그건 안된다고 하지 않았나.”

“…”

퍽.

“왜 때리는건가…!”

“그냥, 재수없는 것 같아서. 그렇게 답답하면 뭐가 좋은지….”

“재밌기만 한데 뭘 그래애.”

퍽.

“… 또 맞는구나아.”

“너도 맞았군…. 그, 나구모. 이 사람은 네 위쪽 사람이라 하지 않았나…?”

“뭐 어떰까? 내가 이러고 싶다는데….”

“그거 대드는거 아니니이…?”

“하하, 원래 그렇대도…. 그러니까, 혹시 이름이.”

“미케지마 마다라. 편하게 마마라고 불러주면 좋겠구나아!”

“그래, 미케지마 씨!”

“마마래도….”

“음. 미케지마 씨. 나구모에 대해서 말이다만…. 혹시 원래 저렇게 정이 많은 녀석인가?”

“으응? 아니지이. 원래 저러면 마계에서 큰일나.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던게 용할거얼?”

“아무 일도 없었다기엔, 내가 무슨 사고를 당할 때마다 계속 사라지곤 했었다. 경위서를 쓰고 온다던가….”

“어쩐지….”

“뭔가 그 반응은. 나구모가 무슨 일이라도 벌인건가?”

“반대야아. 고분고분 와서 경위서만 쓰고 다시 내려가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는게 아닐까 하면서 케이토 씨가 많이 감시했었다구우.”

“케이토라면…. 다른 악마겠군.”

“응. 결국엔 아무것도 아니라니 안심이지만….”

“하하, 나구모가 그래보여도 나는 많이 아끼니 말이다. 그렇지, 나구모?”

“… 나구모?”

“듣고 있나, 나구모?”

“… 네.”

“그래서, 이번 일은 유감스럽게 됐군. 미케지마 녀석이 별 일 아니라기에 안심했는데…. 구제불능 자식.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서 벌인 일인가?”

“모를 리가 있겠슴까. 전부 제 잘못 맞져.”

“… 순순히 인정하지 마라. 어째 너란 녀석은….”

“전 그냥, 제 계약자를 지키고 싶었을 뿐임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님다.”

“그게 문제라는 거다만. 네 녀석은 왜 굳이 무고한 인간에게 네 마력을 넘겨준거냐. 그렇지 않아도 살아남았을 녀석이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님까. 당연히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으니까…!”

“조용히 해라. 질문이 아니다. 마계의 입장이 얼마나 난처한지 알면서도 그런 짓을…!”

“그럴 수 밖에 없던 상황인거 알고 있잖슴까! 전 제 최선의 수를 내보인검다. 더 이상 모리사와 씨를 모욕하면 당신이라도….”

“나구모. 가만히 있어. 난 네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

“…”

“알겠나. 진정이 됐으면 좋겠군. 나도 네 녀석의 상황을 알고서 최대한 생각한 결과가 이거야. 미안하군….”

“어째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죄다 미안하다고만 하는지…. 이보십셔, 당신 잘못 아니니까 걱정 마세여. 제 잘못이란 말임다.”

“그래…. 그렇군. 그래서 퇴출 명령에 불복하지 않은건가. 내가 미울텐데도….”

“… 하하. 모리사와 씨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 보네여. 그 사람은 이럴때 군말없이 받아들이거든여.”

“그런가…. 모리사와라는 녀석은 너와 많이 친한가보군.”

“… 아녀. 아마 아닐검다. 그 사람은 이제 히어로에여. 저 따위가 갈 수 있는 위치가 아니란 말임다….”

“나구모. 그런 약한 소리 말아라. 가능한 한 내가 도와줄테니…. 우선, 네가 마계를 나서는 순간 계약자의 기억은 전부 잊혀질거다. 그 사람과 인간으로서 다시 친해져도 된다는 소리지…. 이런 것 밖엔 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

“뭘 이런거 가지고. 그럼, 수고하십셔. 나구모 테토라, 이만 퇴근임다.”

“… 그래.”

어느덧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마력도, 힘도.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알려둬야 한다. 그 계약자 녀석, 많이 멍청하니까…. 내가 잘 설명해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오해만 빛게 될거다.

그런건 싫어.

내가 목숨까지 바쳐서 너를 구했는데, 겨우 판단 하나를 잘못했다고 헤어져야 한다고?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모리사와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란걸 알고 있다. 그렇다고 마음 한 켠의 불안감을 떨쳐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지금 고민을 하는 짧은 순간에도 날 잊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우선은 만나러 가야겠지. 조금 남은 힘은 나중을 위해 아껴둘까.

별을 넘고, 우주를 넘어, 지금 만나러 간다. 이제는 수없이 눈에 새겨진 도시의 풍경을 다시 그려간다. 이제는 낮설어질 일만 남은 회빛 건물을 지나, 그 사람의 집에 도착한다. 아직 채 귀가하지 않았나, 집은 적막으로 가득 차있다. 가만히 소파에 앉는다. 고요를 깨트리는 텔레비전의 소리만이 나를 반긴다.

예능 프로그램을 송출하던 화면 밑에, 시퍼런 헤드라인이 나타난다.

‘살인범 나구모 테토라 목격, 보안 강화 요망’

참, 지금은 살인범이었지. 진퇴양난이라는 말은 지금 가장 적절한 말일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에 쓰이는 말인가. 조용히 화면을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조작해 송출을 끊어버린다. 다시금 고요함이 나를 찾아온다. 한 사람을 보지 못한다고 이렇게 초조해 하는 꼴이 우숩기 그지없었다. 내가 그렇게 잘난 존재이기라도 했던건가.

아니. 나는 살인범이다. 폐건물에서 연쇄살인을 저지를 끔찍하고 역겨운 살인범. 그런 나 따위에게 모리사와 치아키라는 행운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스쳐가는 인연, 이었지. 끊어진 인연의 붉은 실을 다시 이을 수 없는건 전국민이 알고 있는 상식이다. 나는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었고, 그런 상식 따위는 몰랐다. 그래서 이런 무모한 짓을 감행했지.

우습구나, 나구모 테토라.

그렇다면 내가 없어진다면 모리사와 씨는 더욱 더 유명세를 떨치겠지. 유명한 히어로가 되어서, 불의를 처단하고 선의를 관철하는…. 그런 그의 파트너가 될 사람이 부러웠다. 질투심이 느껴진다. 모리사와 씨의 파트너는 나였는데 감히 누가. 내가 차지해야만 하는 자리에 누군가 꿰차여진 채로, 레드로서의 이름을 떨칠 모리사와 씨는 행복할까. 그럴거다. 그럴 때 쯤이라면 나 같은건 잊혀질게 뻔하니까.

그런데,

만약 그러기 싫다면.

히어로가 악당을 처리하는건 꼬맹이라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상식이오, 악당이 히어로에게 발각당하는 것 또한 변함없는 이치이다. 모든 악당은 히어로에게 발각당하고, 모든 히어로는 악당을 처단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만약 그것이 여전하다면.

내가 대악당이 된다면 모리사와 씨를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재회하면 파트너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

이런 나라도 다시 당신의 옆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그런가요?

그렇다! 나구모는 나의 영원한 파트너니까! 혹시 불안하기라도 한건가?

그렇다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도 좋다!

비로소 내가 해야할 일을 깨닫는다.

나는 내 손으로 박살낸 크림슨 프로덕션으로 또 다시 향했다.

건물은 멀쩡해서 다행이야.

“당신, 가족한테도 버림받은 불쌍한 도박중독자에 못난 아들이지? 당신에게 좋은 일자리가 있는데 말이야….”

“이거이거 대단하네. 어린 여학생에 손을 대고 죽이기까지? 쓸만하겠어.”

“수제 마약이나 빨더니 짭새에 잡히게 생겼네? 형씨, 잠깐 나랑 얘기할까?”

“면허가 정지됐는데도 기어이 술을 퍼마시다니. 근성 하나는 봐줄만 하구나.”

“네 여친이 경찰에 찌를거라는 생각은 못했나? 나는 그렇게 힘만 세선 멍청한 녀석이 좋더군.”

“밀수입인가? 그런 짓을 한다고 들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는데…. 그래, 숨기는건 잘한다고 했지.”

“키보드만 몇 번 두드리면 남의 계좌가 나오는 줄 아나봐. 그 머리는 높게 사주마.”

“왜 너희 따위를 왜 받아주냐고? … 이유가 있을 것 같나? 그저, 서로간의 합의 하에 도착한 곳이 여기였을 뿐이다.”

“RB, 출격이다.”


수십 년이 지났다. 결론적으로, 모리사와 치아키는 유성대의 대장이 되었다. 유성대의 멤버도 자신이 직접, 발로 뛰면서 섭외했다는 듯 하다.

“다들, 주목! 이번에, 오래전에 격퇴당한 ‘크림슨 프로덕션’이 다시 부활했다는 것 같다! 우리 유성대가 나서야 해!”

그리고 지금은 오래전 누군가 격파한 대악당 그룹 ‘크림슨 프로덕션’이 부활했다. 그말인 즉, 스타프로에 비상이 걸렸다. 그에 대응하기 위해, 에이치는 최강의 전력인 유성대의 모리사와 치아키를 앞세워 작전을 세웠다. 지금 치아키가 소리치는 이유는 그것이다. 긴급 대책 회의. 참여한 사람들은 듣는둥 마는둥 치아키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네네, 언제까지 그 얘기안 할 거에요? 귀찮게시리….”

“모르는 소리! 원래 이런 일일수록 우리가 더 신경써야 한다는거 모르나!”

“잘 알고 있죠…. 하아, 히어로 때려칠까.”

“농담으로도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그래서, 크림슨 프로덕션의 일 말이다만….”

치아키의 옆에 둥둥 떠다니며 은신한 마다라가 창밖을 흘겨본다. 평소와 다른 불온한 기운. 누군가에겐 기적이려나.

아니, 기적이 아니야. 이건….

“… 그런가아. 재미있는 녀석이네.”

소리죽여 쿡쿡 웃는다. 마다라는 머지 않은 미래를 보았고, 그 결과 지금에 이르렀다.

‘축하해, 치아키 씨이.’

“… 그런가.”

유성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라는 정보를 듣는다. 유능한 부하 하나가 얻어온 정보였다. 이 녀석은 크림슨 프로덕션에 데려오기 전 스토커 짓을 하던 녀석이다. 잠입에는 일가견이 없다. 정보를 손에 넣었으니 슬슬 이 쪽도 움직여줘야겠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면 양옆을 지키고 있던 부하들이 나를 향해 무릎을 꿇는다. 이런 낮간지러운 짓은 하지 말라고 해도 끊이질 않는다. 이게 본능이라는건가. 내 앞에 집합한 녀석들을 천천히 흩어본다. 겁에 질린 녀석과, 아랑곳 않고 충성을 바치는 녀석. 그래봤자 다 같은 쓰레기 놈들이지만…. 그렇기에 이 한 자리에 모았다. 크림슨 프로덕션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RB의 몸집을 불려 존재감을 표출하기 위해.

이 한순간의 계획을 위해.

스리슬쩍 문을 걸어 잠군다. 이대로 무슨 사단이 나더라도 어차피 묻혀진다. 우리는 최악의 악당들이니까. 그런 놈이 죽는다고 해서 관심을 가질 녀석은 없을거야.

아니…. 어쩌면 한 명, 있을 수도 있겠네. 그렇지.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주마. 그렇게 각오하며, 나는 슬며시 구석에 놓여있는 중장기를 집어든다. 언젠가 부하 중 하나가 쓰던 소총. 그 녀석은 분명 탈영병이었지. 그렇다면 이건 군대의 것일 테고…. 내가 거두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세상을 구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소총을 장전한다.

그리고 발포.

탕.

하나.

탕.

그리고 둘.

머리가 날아간 채 쓰러지는 몸뚱아리는 이 곳에 있는 모두가 목격했다. 혼란에 빠진 모두를 위해, 나는 시체를 밟아 뭉개며 한 마디를 거든다.

“의외로 나는 내 정의도 있거든.”

“작전대로만 하도록 해라. 서두르지만 않으면 성공할 수 있어.”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일방적으로 투닥대는 소리와 함께 크림슨 프로덕션의 본거지에 쳐들어간다. 이미 누군가 다녀간 듯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고 인기척없는 복도였다. 사람은커녕 시체나 괴물도 없다. 그야말로 폐건물이다. 넘어진 철제 수납장을 넘으면 그 끝에는 작은 문이 있다. 미세하게 남아있는 핏자국이, 이 곳이 어디인지 다시금 되새겨준다. 치아키는 긴장한 자신을 숨기려 한다. 적어도 후배의 앞에서 만큼은 그러고 싶었다. 그걸 보는 후배는 영 곱지 않은 시선이었지만.

“그러니까…. 겁을 먹었으면 차라리 숨어있으라고요. 어른이 이게 뭠까, 도대체.”

“미안하다….”

한숨을 쉬며 재차 묻는다.

“여기 문만 열면 되는거죠?”

“으, 응! 그렇다.”

무거운 마찰음과 함께 최후의 장벽을 깨트린다. 밀어젗힌 문 뒤에는 짓이겨진 핏덩이, 어쩌면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는 인간이었던 것들이 방을 장식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치아키의 동네에 벽보가 붙은 현상 수배범, 뉴스를 불태우기까지 했던 대규모 인질극을 벌인 강도…. 어떤 말을 가져다 꾸며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붉고 검은 사체의 한 가운데에, 오직 한 사람만이 소총을 들고 서있었다. 틀림없는 크림슨 프로덕션의 대장. 그렇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건 그야말로 참극이다. 짙은 피비린내를 껴입고 홀로 살아남은 살인범. 그 녀석이 눈빛을 번득이며 우리 유성대를 노려본다.

“모리사와 선배, 잠깐만…. 진짜 안돼요, 이거…!”

“… 그래, 넌 나가있도록.”

정신적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후배를 대신해 나 혼자만이 이 방에 남는다. 다른 셋은 전부 바깥에 있으니까, 이 작전을 실행시키는건 나여야 해. 치아키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두려움을 외면하고 첫 발을 내딛는다.

“여기까지다, 크림슨 프로덕션.”

“…”

그것은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나를 노려봤다. 그 짧은 순간에도 치아키는 공포를 느꼈다. 금방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공기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정말로 죽음 의외의 길은 없다고, 둔한 나 조차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는다. 이대로 계속 혼자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겠구나….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허무하게도, 어쩌면 정해진 운명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질문 뿐이었다.

“왜 이런 짓을 벌인건가. 무고한 시민에게 손을 댔다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걸 알고 있을텐데.”

분명 그늘진 폐건물에서도 녀석의 눈은 황금빛을 내보이며 빛나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마지막 증명.

녀석은 천천히 나에게 다가온다. 맨정신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하게 찢겨진 시체를 밟으며, 녀석은 소총을 내던지고 피범벅인 그대로 내 소매를 잡았다.

“당신이라면 이해해줄 것 같았어.”

“… 무슨 이유에서도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다.”

녀석은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이런 상황속에 유일한 웃음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하하하…. 아냐, 모르면 무시해. 지금 말한다고 해서 당신이 이해해줄 것 같지도 않아. 자 그럼.”

녀석은 순순히 양 손을 내민다. 검은 장갑 위로 붉은 피가, 어쩌면 유성 레드인 나 보다도 더 붉은 그것이 말라붙어있었다. 허리춤의 총을 만지작거린다. 만약 이 녀석의 머리를 지금 당장 날린다면 코멧쇼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겠지. 나는 성공의 길을 걸을테고….

그렇지만, 녀석의 눈이 너무나도 간절해보였다. 미처 전하지 못할 말이라도 있는건가.

고민 끝에, 나는 가볍게 녀석의 손목만을 묶은 채 밖으로 빼내어 앉혔다.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예?”

녀석은 당황스럽게 나를 올려다본다. 그런 시선도 부담스러워, 나도 녀석을 따라 옆에 앉는다. 벨벳 카펫 따위는 없는 콘크리트였다. 오래전 불에 타기라도 했는지 코트에 묻어나오는 검은 잿가루를 털어내며 이유를 설명한다.

“어차피 잡힌 목숨 아닌가. 이야기나 한 번 들어보도록 하지.”

“… 나구모, 테토라. 편하게 부르면 됨다.”

“나이는? 그리 많아보이진 않지만.”

“따지고 보면 열 아홉. 당신보다 두 살 어림다.”

“그건 어떻게 알고 있는건가…!?”

“그런게 있어여.”

“… 큼. 그럼, 주변인 관계는.”

“……”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아뇨, 그냥…. 없어, 하나도. 친구도 가족도, 하나도 없슴다.”

“그런가…. 조사하면 금방 드러날 사실일테고. 마지막으로 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있는가?”

“있긴 하지만….”

조용히 내 시선을 피한다. 하고 싶은 말을 숨기는 모습.

나는 어린 아이를 대해주듯이 시선을 낮춰주었다.

“무엇이든 말해보아라. 괜찮다.”

“… 그러면, 잠깐 실례.”

어느샌가 풀려있는 손목의 구속이 나에게로 욺겨왔다. 내 수법에 내 자신이 당한다. 여기서 끝장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 뭘 그리 겁을 먹으심까. 하여간 멍청한건 여전하군여.”

녀석은 내 얼굴에 손을 댄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따뜻했다. 수십 명을 죽인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온기가 느껴졌고, 빛이 비추고….

알 수 없는 기억이 흘러 들어온다.

처음에는 몇 년 전의 기억. 좁은 골목길 구석진 곳의 괴물.

그 다음에는 이웃 사업가의 집에 처들어가는 괴물.

그 다음에는 괴물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 다음에는 손님에게 소문을 듣고, 그것을 말리는 나구모.

그 다음에는 산길을 안내하다 뒤통수를 맞은 나 자신.

그 다음에는 겨우 정신을 차린 내 옆으로 저멀리 떨어지는 사업가.

그 다음에는 순백색의 흰 천장을 쳐다보며 누워있는 나.

그 다음에는.

그 다음은.

다음은.

다음.

“내가 나구모에게 한 소리다. 잊지 말고 기억해라.”

“네…. 당신이야말로.”

아.

뻥 뚫려있던 머리속 한 자리가 채워진다.

“됐다. 당신, 나 기억나지? 모를 리가 없을걸.”

“… 나구모.”

하탈하게 웃는다. 잊지 않겠다고 해놓고선.

여전히 바보였구나.

“내가 널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다행이네여. 당신은 바보였으니까. 내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아여? 당신은 분명 히어로가 될거라 믿었어. 그날만 해도 신나서 돌아오는 길에 붕변을 당한거였잖아. 그래서, 내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뿐이었어. 내가 아주아주 나쁜 사람이 되면, 아무리 기억나지 않더라도 당신이 찾아와줄 것 같았어. 그렇게 해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었다고. 나, 당신을 믿고 있었어. 히어로라면 악당을 처리하러 올거라고 믿었다고.”

나구모는 손의 구속을 풀어준다. 내가 없던 사이에 제법 인간다운 면모가 늘었다.

굳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됐는데.

조심히 나구모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내가 히어로로서 악당에게 전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다.

“조금 더 일찍 찾아와야 했는데. 미안하다, 나구모. 내 탓이었군…. 하하, 아직 미숙한 탓에 첫 임무부터 이런 실수를 범해버리다니. 히어로 실격이다.”

“… 아뇨, 당신 잘못은 없슴다. 이쪽이야말로 죄송함다. 주절주절 말이 많았네…. 저 없는 사이에 무슨 일 없었슴까?”

“하하, 그렇게 넘어가지는건가…. 우선, 미케지마 씨와 계약을 맺었다.”

“네?”

“아니아니, 그런게 아니라! 네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효력이 있는 계약이다!”

“…”

“정말이다, 믿어줘라….”

“뭐. 네.”

“뭔가, 그 무미건조한 대답은….”

나구모가 걷던 길을 멈춘다. 고뇌가 담긴 얼굴을 푹 숙이고 있다.

“…”

“나구모.”

“모리사와 씨.”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온정따위 없다. 그러나 맹세는 있었다. 오랜 약속은 기필코 지키리라, 그런 말을 할법한 표정으로 예상 의외의 말을 한다.

“혹시. 저같은 사람도 히어로가 될 수 있슴까.”

그런 나구모의 표정은 복잡했다. 감정을 알 수 없이 뒤섞인 하나의 표정. 굳이 정의하자면, 체념.

그러고 보니 나구모가 이런 일을 벌인건….

“안될게 뭐 있나?”

어찌됐던 상관없다. 나구모는 본래 정의로운 녀석이다. 악마였던 녀석에게 이런 말을 붙혀도 되나…. 그렇지만. 마계에서 쫓겨난 것이 그 증거다.

일생의 도박을 할 때가 왔군.

“내가 전부 책임지겠다, 그러니까 나구모. 너도 우리 유성대로 오는건 어떤가?”

“유성… 네?”

“유성대! 스타프로의 신생 히어로다! 아직 인원이 조금 부족한 탓에 첫 임무가 이런 모양이지만…. 나구모가 와준다면 해결될거다!”

“… 당신은 여전히 똑같군여.”

“너도 마찬가지군.”

되돌아온 기억 속에 남은 나구모와 같은 얼굴이었다. 지금의 나구모는 웃고 있었다는게 그 차이다. 어쩌면 히어로 실격은 너무 서두른 판결이었나. 그래서, 나도 바보같이 웃었다. 나구모가 무안해지지 않게, 그보다 더 큰 웃음소리로 보답했다. 내 나름의 응답이다. 그래야 나구모가 안심할 것 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나구모는 내 걱정 뿐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록 크림슨 프로덕션을 재건해냈다. 단지 내가 찾아오기를 고대하면서, 그런 죄악의 소굴에 제 발로 뒤어들었다.

“있잖아여, 제가 없어진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여?”

기나긴 설명을 전부듣는다. 지루함 따위는 없었다. 나구모의 감정이 너무나도 잘 전해져 왔으니까.

요컨대, 나구모가 한 ‘크림슨 재건 계획’이란 이거다.

먼저 범죄자들을 전부 크림슨 프로덕션으로 끌어들인다. 설득은 쉬웠을거다. 악마는 절박한 사람을 상대로 최고의 힘을 보이니까. 경범죄, 중범죄를 다지지 않고 전부 한 건물에 몰아넣는다. 그 곳은 오래전 자신이 직접 제 손으로 파괴시킨 크림슨 프로덕션이다. 나구모는 그 곳에서 새로운 크림슨 프로덕션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 크림슨 프로덕션은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나가며 악명을 떨쳤다. 각종 범죄자들을 모아놓은 더러운 곳. 나구모는 크림슨 프로덕션을 조사하던 한 경찰에게 가서 이렇게 말한다. ‘크림슨 프로덕션은 오래전 연쇄살인범에 의해 파괴된 조직이다. 그것을 누군가가 다시 부활시켰다.’라고. 유능한 경찰은 그것의 말뜻을 알아차렸고, 크림슨 프로덕션은 주요의 대상이 된다. 그에 따라 스타프로에도 이야기가 들어온다.

오래전 나 하나로 선보엿던 ‘코멧쇼’ 작전을 다시 실행시키기 위해 유성대의 사람을 전부 갈아치웠다. 통칭 유성대M. 물론 내 이름의 약자다. 신 유성대는 만반의 준비를 한다. 그러는 와중에, 나구모는 사람을 보내 우리 유성대의 진척을 살핀다. 유성대의 준비가 끝나야만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수 있으니까. 자신의 부하들에게는 유성대가 처들어오면 한번에 일망탕진을 한다고 전한다. 부하는 나구모를 충실히 따른다. 그래서 우리가 들어오기 직전만 해도 멍청하게 나구모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유성대가 가까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자 나구모는 계획을 실행에 욺긴다. 부하들에겐 대기 명령을 내린 채 소총을 들고 학살한다. 그리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시간이 흘러 내가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항복한다.

… 여기까지가 나구모가 그때의 심정은 알 수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지금 중요한건 과거가 아니다. 오늘은 오늘의 나구모가 있는거고, 내일은 내일의 나구모가 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그대로의 나구모를 바라보면 되는 일이다. 오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였다.

“그래…. 포기하지 않아주어서 고맙다, 유성 블랙.”

유성대의 멤버는 전부 내가 데려왔다. 나구모 또한 다를 것 없다. 무슨 짓을 했는지 뻠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스카웃 제의를 할 수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나구모에게 한 번 더 말해주었다.

“왜 그러는가. 설마 멋대로 유성대를 빠져나갈 생각은 아니겠지?”

나구모는 희미하게 웃는다.

바깥은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다른 유성대의 동료들이 나와 나구모를 배웅하고 있었고, 나는 그 인사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태양이 지기 전에 새로운 별을 발견해서 다행이군.

극복해낸 미래에서, 이렇게 웃으며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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