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라이트 평전 - 낙원

낙원 탈출 계획 2

시베라이트 평전 - 인간의 나이로, 40대 초중반.......

시베라이트는 죽을 각오를 하고 하티를 집으로 들였다.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늦게, 하티는 도착했다. 그가 보낸 메시지는 형식적인 안부 인사와, 하룻밤만 재워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형식적인 안부에 비해 지나칠정도로 절절한 그 메시지가 시베라이트를 움직였을까. 죽는다면 친구의 손에 죽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시베라이트의 집을 감시하고 있는 까마귀들에게 하티에 대한 정보를 넘기고 그를 확실히 끝내려고 해서일까.

안녕.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티가 힘겹게 말했다. 그의 왼쪽 눈은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베라이트도, 이 방도 아닌 어딘가 알 수 없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시베라이트의 숨김 없는 시선을 느꼈는지 하티는 눈에 대해 변명을 하려다가……. 둘 다 그만두었다. 둘 다.

네가 묵을 곳은 저쪽 방이야. 침대를 써.

시베가 무뚝뚝하게 말하며 하티를 작은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하티가 왔었어요.

시베는 뮬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걔……. 하……. 아니다, 됐다. 너 멀쩡한거 맞지?

뮬은 학생 때 처럼 인상을 구기고 물었다. 마치 엄청 화가 난 사람 같았다. 나름의 애정 표현인 것을 이젠 시베도 알았다. 피낙이 살금살금 뮬 뒤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확 잡았다. 뮬은 왁 소리를 질렀고. 피낙은 뮬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피낙은 엘릭스니 중에서도 작은 편이었기에, 뮬과 머리 하나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엿들으려던건 아닌데, 죄송해요.

뮬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피낙이 사과부터 했다.

하티와 리아흐스와 관계가 있다는건 알고 있는데, 집에 그런 사사로운 일로 찾아올 정도로 가까우실 줄은 몰랐어요. 뮬을 불렀다 함은, 우리 “여행 동호회” 에 관련된 정보를 받아냈단 뜻이겠죠?

피낙은 정확히 짚었다. 시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빨을 깨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하티는 소꿉친구였지만, 그걸 다 뛰어넘는 혐오감이 있었다. 하티는 이제 얼마 살지 못할 것이었다. 잘 모르는 자신이 보아도 하티는 중병 환자였다. 병세는 이미 깊었고, 무엇을 하다 그렇게 되었는진 알고 싶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편하게 하루를 보내고 가버리면 이제 볼 수 없을 것이다. 볼 수 없다. 이 사실이 너무나도 안도감이 들어 시베라이트는 하티를 견딜 수 있었다.

시베.

하티가 간단히 방을 설명하는 시베의 손을 잡았다. 그의 귀에서 우정 귀걸이가 반짝였다. 시베라이트가 래디언트 컷으로 세공되어 있었고 다른 여러 보석들이 시베라이트를 돋보이게 배치되었다. 어머니들은 시베가 태어나던 날에 맞춰 그 귀걸이를 맞췄다. 리프의 사람들은 큰 일이 있기 전, 올바른 보석을 부적처럼 지니곤 하는데.

네 착각이야.

시베는 차갑게 말하곤 하티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거의 하티를 뿌려치다시피 빼냈다.

물론 그건 내 계획이 아니었고,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네 행동에 동의했을거라고 생각하지 마. 난 널 찾아내서 고발하려고 했어.

하티는 오른쪽 눈으로 시베라이트를 쳐다보았다.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차츰 시선이 내려갔다. 하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아흐스가 우릴 배신하고 새로운 켈을 섬기기 시작했어.

하티는 시베라이트 뿐만이 아니라 리아흐스에게도 버림받았다. 두 번.

네가 뭘 계획하는지 알아. 단념하거나,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해.

하티는 고개를 다시 들었다.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왼쪽 눈에게 까지는 미치지 않은 모양이다. 시베라이트는 생각했다. 피낙이 데려온 “주변인” 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전원 각성자 정체성을 가진 엘릭스니들이었다. 피낙처럼 각성자 사회에도, 엘릭스니 사회에도 섞이지 못하고 “주변” 을 맴돌고 있었다. 그들은 리프에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고 싶어했다. 이 태양계에는 그들을 위한 중립국 따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숨어서 포격을 피하면 되는 일이다. 일단 리프를 떠나자. 그러나 그 곳에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따랐다. 뮬과 시베를 포함한 “여행 동호회” 회원들은 열 명 남짓. 이들을 데려가려면 우주선이 여러대 필요하다. 아니면 중형 우주선 한 대……. 그럴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뮬과 시베라이트 뿐이었다. 피낙도 직장이 있긴 했지만, 월급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 수준이었다. 빠른 시일 내에 우주선을 어떻게 해결하지?

우린 새로운 켈과 리프 사이의 전쟁에 껴서 갈팡질팡 하다가 다 죽을거야.

뮬이 부정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아뇨.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탈출은 더 편할지도 몰라요. 우리같은 잔챙이들에게 누가 신경을 쓰겠어요?

피낙은 긍정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우주선들을 구했어.

시베라이트가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은 일제히 시베라이트를 쳐다보았다.

뮬, 최대한 빨리 사람들을 집합시켜서 우주선을 타고 어떻게 떠날지 계획을 세워주세요.

하지만 어떻게 한거야, 시베?

피낙. 연료 보급을 부탁해요.

어떻게 한거냐고 묻잖아!

뮬……. 하지만 이건 정말 말하면 안되요.

아니, 제발, 범죄 조직에 연루된거라고만 말하지 마.

그건 아니에요. 제 힘으로 얻어낸 깨끗한 우주선이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뮬은 뭐라고 더 쏘아붙이려다 시베라이트의 독촉에 부루퉁한 표정만 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피낙은 쫓아가지 않았다. 시베라이트의 어깨를 우악스러울 정도로 꽉 붙잡았다. 걱정어린 말을 하기 전에는 항상 그랬다. 시베라이트는 짧게 비틀거렸다.

시베. 당신도 갈거죠?

뮬이 놓치고 있던 것이었다. 시베라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윗손을 떼고 아랫손들로 시베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시베도 피낙을 안아주었다.

행복을 찾아요. 사상도, 학위도 뭣도 아니라,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 그것을 맹목적으로 쫓아요.

피낙은 현명했다. 그는 시베라이트를 놓아주고 그제서야 뮬을 쫓아갔다.

나에게도 행복이 있어.

시베는 슬프게 중얼거렸다. 하티가 자는 동안 시베라이트는 식탁에 앉아 피가 날 때 까지 손톱을 물어뜯고, 또 물어뜯었다. 피가 나도 당연히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지쳐 잠이 들었고 다시 일어나자 하티는 사라져있었다. 베개는 없어졌다. 이불깃 끝부분에 살짝 묻은 핏자국을 보고 왜 베개가 사라졌는지 추론하고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폭탄이 하나 있었다. 데이터패드 만한 폭탄이었다. 그 옆에는 상세하게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지가 적혀있었다.

바보.

시베는 그걸 그냥 두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가려다 문고리를 잡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시베라이트의 “행복” 은 안타깝게 이게 아니다. 이건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되어버린 사람의 달콤씁쓸한 회한 같은 것이다. 시베라이트는 하티의 경고를 듣고 현실적인 부분을 어떻게 해결해야하는지 고민을 했다. 그는 서서히 지쳐갔다. 그런 피로감이 몇 일 째 쌓였고, 그런 시베에게 오랜 공포가 찾아왔다. 그런, 일은 언제나 사람이 지쳤을 때 찾아오니까.

하티는 집에 없어.

시베라이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울드렌은 마치 자기 집 처럼 거리낌없이 걸어들어와 책상에 앉았다. 폭탄을 보고는 놀랐다는 듯이 시베를 한번 보고, 그것의 구조를 뜯어보는 듯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했다.

하티는 집에 없대두.

시켜서 찾아봤지. 덤으로 어질러진 것들을 다 치워놓기까지 했다. 집 청소도 겸해서.

그건 가져가. 어떻게 해체해야할지 몰라서 뒀으니까.

매뉴얼까지 있네? 왜 우리 까마귀들은 이걸 못 찾았을까?

안 가져간 것이겠지. 시베라이트는 침대에 누웠다. 울드렌이 거기 있는 것이 너무 편하다는 듯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 꼼지락거리기까지 했다. 시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는 편이 낫겠다.

사제 폭탄을 만지는 울드렌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다 들리게 콧웃음을 쳤다.

성인 군자 납셨구만.

아니, 당신을 용서하는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려고 한다.

나에 대한 감정이 없는데도.

우린 서로 증오하잖아.

울드렌은 웃었다. 손에 들고 있던 폭탄을 내려놓았다. 침대에 누워있는 시베라이트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시베라이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노란색 호박석 눈이 청록색 파라이바 눈을 쳐다본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서로의 뒤통수를 움켜잡고 머리털을 뽑을 것 처럼 움켜잡고 그들은 입을 맞추었다. 혀가 섞이고, 숨이 거칠어지고,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입맞춤이었다. 혀를 깨무는 일도 없었다. 목을 조르는 일도 없었다. 그냥, 키스였다.

우주선이 필요해.

시베라이트가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그걸 구해줄거라 믿는건가?

누가 더 상대방을 증오하는지 알고 싶지 않아?

알고 싶어서 미칠 것 같군.

울드렌이 낮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시베의 방문을 닫아주었다. 폭탄은 그대로였고,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시베는 작게 중얼거렸다.

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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