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탈출 계획 3
시베라이트 평전 - 인간의 나이로, 40대 초중반.......
이렇게 하티와 같은 운명을 맞는 것인가. 시베라이트는 간신히 한쪽 눈을 떴다. 그 앞에는 한 청년이 서서 초조하게 좁은 우주선을 오가고 있었다. 시베라이트보다 한참 어린 사람이었다, 이제 갓 사회에 나온……. 그런데…….
리아흐스를 통해, 들은,
시베가 더듬거렸다. 청년은 자리에 우뚝 섰다. 칼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시베라이트를 쳐다보았다. 섬뜩한 자태였다. 그래서 말했다. 리아흐스를 통해 들은 정보다. 스콜라스의 계획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나, 그의 수하 중 하나를 얘기해줄 수 있다. 하티는 무슨 심정으로 자신에게 그 정보를 건네주었을까. 그리고 시베라이트 자신은 무슨 심정으로 어린 까마귀에게 정보를 건네는가?
당신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왕립 학회에도 마음껏 들어갈 수 있으면서,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겁니까?
청년이 시베의 멱살을 잡았다.
왜 이딴 테러범이 되어 개죽음을 당하는 길을 택한거냐고? 당신은, 그 지위로 뭐든 바꿀 수 있을건데?
그래. 나는 저 청년에게 지위를 내릴 것이다. 시베는 가늘게 웃었다. 나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고작, 뮬과 피낙 그리고 조국을 떠나기를 희망하는 리프 엘릭스니들 몇몇을 떠나보내는게 전부였다. 뮬과 피낙은 도망가자고 말했다. 오랫동안 계획을 세웠다. 다른 이들도 그러했지만, 정작 그 때가 다가오니 대부분이 떠나지 못했다.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며 핑계를 찾았다. 자신들이 쌓아온 것을 모두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은 힘들다. 시베는 그들의 이유가 되었다.
사실대로 말해줘. 우리 우주선은 누가 마련해준거야? 네 전 남친? 운수회사를 한다고? 웃기지 마.
뮬이 시베의 어깨를 꽉 잡고 물었다. 마치 시베라이트가 어디로 도망갈 것 처럼. 시베는 생긋 웃었다.
울드렌 소프 대공이 나에게 선물해준거에요.
그 뒤로 뮬은 한동안 시베를 쪼아댔다. 운수회사를 하는 전 남자친구는 못 믿으면서, 까마득히 높은 울드렌 소프 대공이 선물로 줬다는 얘기는 믿는다니. 뮬도 불안했던 것이다. 그 뮬이.
그 우주선들이 불안하다면 쓰지 않으면 돼요.
뮬은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불안하긴 했지만, 그것들은 뮬의 계획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뮬은 “회원“들에게 알리기는 해야겠다고 말했다. 당연히 비난의 화살이 날아왔고, 왕족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시베라이트를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회원”의 절반이 떨어져나갔다. 피낙은 그들을 막으려 시베라이트가 이 곳에 남는다고 말했다. 시베는 정부의 눈을 돌리기 위해 남는 것이었다. 그 사실마저도 왕족과 연관이 있다는 점 하나 때문에, 시베라이트가 “뭔가 석연찮은 점을 눈치 채” 그들을 “버리려는 것” 처럼 “회원”들은 취급했다. 그렇게 나머지 절반도 떨어져나갔고, 울드렌이 기껏 마련해준 우주선은 대부분 쓸모가 없어졌다.
시베. 많은 진실을 말했지만, 다들 불안해하고 있어요. 그러니 마지막으로 말해주세요.
피낙이 애원했다.
당신은 어떻게 리프의 눈을 돌린다는 것이죠?
그건…….
말하기를 망설였다. 피낙은 반대할 것이다. 뮬도. 그리고 여기 남은 절박한 “회원”들도. 그러나 시베는 깨끗하게 자신을 비추기로 했다. 그는 다음 날, 폭탄을 가져와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저는 각오했습니다. 후작위를 받았을 때 부터 작위를 이용해 그들이 나에게 했던 것을, 그들에게 그대로 돌려주겠다고.
좌중이 조용해졌다. 의도한 것과 다르게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시베라이트는 조심스럽게 폭탄을 치워두고 눈물을 닦았다. 외롭다. 세상에는 나 밖에 없다.
왕립 학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됩니다. 실제로도 자주 드나들어서 구조도 잘 알고 있고요. 동무들, 아……. 아, 동무들, 저는 제가 태어난 가정환경이나 제가 받은 후작위를 항상 부끄러워했습니다. 이걸 여러분들을 위해 쓸 수 있게 해주세요.
우리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개인적인 원한을 푸는 것이 아니라요?
그 질문은 뮬이 한 게 아니었다. 피낙이었다. 피낙은 시베의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 피낙은 분노했다. 푸른 눈빛은 물처럼 타올랐다. 찰랑였다. 곧 쏟아질 것 처럼 타올랐다. 시베라이트는 부정하지 않았다.
배신자.
피낙이 으르릉거렸다.
당신은 하티에게 묶여있는 망령인거죠?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시베는 눈을 감고 온 몸에 힘을 주었다. 그 말은 부정했다. 미약하게.
하티는 나를 배신했고……. 그의 죽음은 저와 관계가 없습니다.
피낙. 잠시 나와. 나 좀 보자.
시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뮬이 말했다. 시베라이트를 변호하려는 것이었다. 그래. 아주 관계는 없지 않을 것이다. 시베라이트는 그제서야 털썩 앉을 수 있었다. 물론 남아있는 “회원”들이 있었지만 신경 쓸 수 없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지친 채 앉아있는 시베에게 “회원”들은 감히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의 귀에서 파라이바 귀걸이가 반짝였다.
왜, 곧 거사를 치르실거잖나, 래디언트 후작 나으리?
울드렌이 잔뜩 비꼬며 귀걸이를 하나 내밀었다. 쌍을 이루어야 할 귀걸이었는데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베라이트는 그 귀걸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자신이 태어날 때 어머니들은 아름다운 보석의 이름을 따 자신을 “시베라이트” 라고 불렀다. 그리고 시베라이트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시베라이트 보석을 돋보이게 배치한 귀걸이를 만들었다. 그것은 하티와 자신의 우정 귀걸이가 되었고……. 입을 가려야했을까? 눈물을 흘려야했을까? 뺨을 때려야했을까? 귀걸이의 시베라이트 보석은 파라이바 보석으로 바껴있었다.
네 눈 색과 같은 보석이라면, 어디서든 널 지켜줄 것 같아서 말이지.
시베라이트는 그 귀걸이를 집지 않았다. 심장은 얼음이 된지 오래였다.
그래서요?
그게 최선이었을까? 울드렌은 씩 웃고는 한 발 다가왔다. 시베라이트는 가만히 있었다. 그가 자신의 귀에 귀걸이를 걸도록 두었다. 어머니들은 이 귀걸이를 언제 자신에게 물려주려고 했을까? 모두 끝나자, 시베는 가볍게 예를 표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휘청이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냥 오랫동안 귀걸이를 걸지 않은 귓바퀴에 구멍이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귀가 묵직해서 불편했다.
시베, 괜찮아?
잠시 뒤 돌아온 뮬이 시베라이트에게 물었다. 시베라이트는 안색이 잿빛으로 질려 풀린 눈으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시베가 중얼거렸다. 속이 안 좋다고. 피낙은 머쓱하게 뒤에 서있기만 했다. 뮬은 피낙을 노려보고는 시베라이트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주었다. 모두 게워내고 싶었지만 헛구역질도 안 났다. 시베는 가만히 쪼그려있다가 화장실 문을 열었다. 뮬은 그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힘든거 알아. 하티가 터미널을 테러 했을 때 부터 너 때문이라고 손가락질만 받았잖아. 네 탓인건 아무것도 없는데.
아뇨. 전 그냥…….
그냥, 뭐? 어쩌면 시베라이트는 죽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냥 죽고, 다시 태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리프라는 국가가 사라지고 모든 이들이 평등한 새 사회에서. 어쩌면 시베라이트는 하티처럼 자신의 악다구니를 표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티는 결국 터미널에서 자신을 불살랐다. 그를 이끌고 자신이 데려간 터미널이었다. 추억 때문은 아니었겠지. 그 곳은 큰 허브였다. 사람들이 이동하는 것에 타격을 주고 무언가를 이루려 했다. 그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하기 전에 까마귀들이 그를 제압했고, 개머리판으로 머리가 터질 때 까지 맞아 죽고 말았다.
그래. 그만 할게. 하지만 나에게 맡겨줘. 더 이상의 분열은 없어. 내가 저들을 그물에 넣어서라도 데리고 떠나, 낙원을 만들겠어.
뮬은 전에 없이 힘차게 말했다. 좋은 방향이든 좋지 않은 방향이든 남은 이들을 결집시켜 꽁꽁 묶어놓는 것.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 부터 뮬이 잘 하던 것이었다. 시베는 학창 시절 동아리가 떠올라 가늘게 웃었다. 좋지 않은 기억이었지만 감정은 다 퇴색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우리를 위해 폭탄을 터뜨리던, 터뜨리지 않던, 이 좌표로 와. 뒤엉킨 해안이야. 거기서 재정비하고 완전히 가버릴거니까.
시베라이트는 그 행렬에 끼고 싶었다. 죽어도 폭탄을 터뜨리기는 싫었다. 하티의 테러와 엘릭스니들의 불순한 움직임 때문에 치안이 강화되었다. 왕성 근처의 경계는 더더욱 강화됐다. 폭탄을 짊어지고 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죽기 싫었다. 전 날 밤, 시베라이트는 울었다.
누가 봐도 거동 수상하게 굴면 어떡합니까.
젊은 까마귀는 자신의 상관에게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상관은 자신이 나머지를 처리할테니 직접 보고하라고 명을 내렸고, 청년은 날 듯 기뻐하며 물질전송으로 자리를 떴다. 아무도 없자 상관은 시베라이트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고문으로 다친 곳을 살펴주고 치료가 급한 곳은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그러지 말고,
시베라이트가 속삭였다.
지금 죽여주세요.
무슨 소리를. 당신은 가야할 곳이 있지 않습니까?
시베라이트의 한쪽 눈이 파들거렸다. 상관은 시베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저는 당신들의 편입니다. 비록 까마귀라는 신분에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지만 당신을 구출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뮬, 피낙, 끝까지 자기를 믿어준 “회원”들. 시베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베라이트는 가면 안된다. 여기서 죽어야한다. 하지만 가고 싶다. 살고 싶고, 미치도록 낙원을 보고 싶었다. 그건 본능이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 거절할 수도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시베는 뻔히 보이는 함정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갔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
손 끝의 온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