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不在)
시베라이트 평전 - 인간의 나이로.......
그들이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시베라이트는 자신을 추적하는 우주선을 포착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우주선을 따돌릴 실력은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목적지를 바꿔 황금기의 잔해물에 우주선을 들이박는 것이었다. 적어도 당황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친구, 동무, 동지를 보겠다는 그 강렬한 열망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건, 비이성적이고, 지고하며, 아름다운 것이었다. 시베라이트는 한밤중 핀 꽃과 같은 요염함으로 위험한 봉화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뮬. 피낙. 다른 “회원”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친숙한 사람들이 머릿 속을 지나갔다. 하티. 리아흐스.
그들이 제시한 낙원.
우주선은 거의 추락하듯 착륙했고, 약속된 장소에서 숨어있던 피낙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시베라이트에요, 시베가 왔어! 피낙은 은신처에서 튀어나와 시베라이트를 우주선에서 꺼냈다.
무슨…….
피낙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시베라이트를 보고 특유의 감각으로 일이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피낙이 통신기에 대고 소리쳤다.
함정이에요!
미안해. 너희가 너무 보고 싶었어. 시베라이트는 입을 가늘게 움직였지만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신음소리만 가늘게 흘러나왔을 뿐이다. 피낙은 시베를 포기하지 않았다. 시베 자체가 그들을 추적하는 기기일 수 있었지만, 피낙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은신처 문을 닫으려하자, 어설프게 위장한 문 틈으로 군화가 들어왔다. 뮬은 온 힘을 다해 문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힘이 문을 열어젖혔다. 뮬은 갸냘프게 문에 맞고 튕겨나갔다.
뮬!
그가 첫번째 희생자였다. 피낙은 윗팔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곧 자기가 아랫팔로 시베를 안고 있다는걸 기억해냈다.
당신은 살아야해요.
피낙이 비명처럼 말하며 시베를 꼭 껴안았다. 으스러진 곳이 눌려 아팠지만, 피낙이 아니었으면 다음 타자는 시베라이트였을 것이다. 피낙은 딱딱한 갑각을 믿고 시베를 보호했다. 하지만 갑각과 갑각 사이에는 여린 곳이 있었고, 그들의 은신처에 쳐들어온 까마귀들은 그걸 잘 알았다. 시베라이트는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얼굴에 떨어지는 푸른 피를 삼켰다. 피낙의 숨이, 에테르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죽기 전에 사과할 수 있어서…….
시베는 미약하게 몸부림쳤다. 피낙에 가로막혀 동무들이 죽는 장면을 볼 수 없었다. 나의 잘못이다. 거부할 수 없는 감정을, 어떻게든 거부해야만했다.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도망가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어린 까마귀가 이빨을 부숴놓았고, 갈비뼈를 으스러뜨렸다. 발음은 뭉개지고 숨을 쉴 때 마다 폐를 부러진 뼈가 찔러대는 것 같았다. 피낙의 시체가 내동댕이쳐졌다. 피낙이 안고있던 시베라이트도 덩달아 내팽겨쳐졌다. 까마귀들의 주인, 리프의 대공, 울드렌 소프가 빈한한 후작인 시베라이트를 깔보고 있었다. 시베라이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없는 이빨을 깍 깨물었다. 남은 이빨들이 맞물리며 으득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래서 시베는 기어 문으로 갔다. 문까지 간다면 그 너머에 새로운 공간이 펼쳐질 것 처럼. 울드렌은 자신의 수하들을 멈춰세웠다. 시베라이트의 손이 문간에 닿았을 때, 울드렌 소프는 그의 목을 뒤로 잡아 채 날렵한 단검으로 곧고 반듯한 선을 그었다. 피가 뿜어져나왔다.
어린 수호자가 크게 숨을 들이키며 놀란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목에 손을 댔다. 가느다란 실이 걸려있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몇 분 뒤에 사라졌다. 수호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곧 작은 드론을 봤다.
당신이……. 날 살렸나요?
어린 수호자가 물었다.
맞아요. 나는 고스트, 아직 이름은 없습니다. 아! 저와 함께 이동할까요? 저를 여기까지 데려와준 다른 노련한 수호자들이 당신을 도와줄거에요. 그 수호자들의-,
왜 저 사람들은 살리지 않은거죠?
수호자가 주변에 있는 백골들을 가리켰다. 훼손된 엘릭스니의 갑각, 희게 남아버린 누군가의 뼈……. 수호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저들과 같은 존재였음을 깨달았다. 고스트는 고민하는 척 했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속에 그 이유가 있을거에요. 저들과 다를 수 밖에 없는 그런, 특별한 이유요.
살아야했고, 살고싶었다. 수호자는 불편한 귀걸이를 빼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주머니에 넣으려고 했다. 고스트가 귀걸이의 보석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아름다운 보석이네요. 당신의 눈 색과 똑같으니, 그걸로 당신을 부르도록 해요. 그러니까 이름을 짓자는 말이죠.
보석…….
수호자는 집어넣으려던 보석을 다시 꺼내보았다.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이 준 것이었을까? 나는 누군가 사랑했기 때문에 다시 부활할 수 있었던 걸까?
보석의 이름은 파라이바네요. 파라이바 투어멀린……. 이걸 모두 부르기엔 너무 기니까, 당신을 파라이바라고 부를래요.
다른 압력과 다른 온도 아래서 같은 보석은 다르게 발화한다. 파라이바는 이 장소를 벗어나 낡아빠진 문을 넘어서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뒤엉킨 해안의 흐린 대기가 그를 반겨주었다. 왜인지 자신의 뒤에 있는 시신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해야할 것 같았다. 저 너머에서 한 수호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고스트가 말한 노련한 수호자일 것이다.
결국 찾아냈구나?
노련한 수호자가 파라이바의 고스트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노련한 수호자가 말했다.
나는 로젠. 로젠바움 브레히트다. 너는 이름이 있니?
파라이바가 아직은 어색한 자신의 이름을 고했다. 그는 나중에 파라이바 루가 되지만, 그건 가까운 미래의 일이다. 고스트에게는 파파라챠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지만, 그것도 얼마 뒤의 일이다. 그들이 까마귀를 만나게 되는 것도, 훗날의 일이다.
그는 결국 리프를 벗어났고, 지구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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