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건

개와 늑대의 시간

맥시멈 W × 스탬 V 

3번함에 떨어진 맥시멈의 니코소년


* 사투리를 잘 몰라 니콜라스가 표준어를 씁니다

* 맥시멈 미카눈에 대한 자체 설정이 있?음

* 여러모로 주의…


🏜️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어느 정도 맞았다. 눈을 떴을 때, 니콜라스를 반긴 건 구불구불한 호스들이 교차되어 마치 미로에 잠긴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참회병동’이 아니라― 그냥 방이었다. 니콜라스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정말로, 평범한 방이다. 침대와 창, 스탠드, 한 켠에 마련된 서랍 위에는 친절하게 물 한 잔까지 올라가 있었다. 창 밖으로는 햇빛과 더불어 모래먼지가 커튼처럼 일렁이고……. 무엇보다 묘하게 가벼웠다, 몸이. 

그 모든 게 니콜라스에게는 전부 이상했다.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리고서야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이건 좀 평소같네. 구속을 위한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스는 그 절그럭거리는 소리에서 안정을 되찾았다. 생김새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대충 쓰임새는 같으리라. 

묘하게 로스트 테크놀로지 범벅인 듯한 공간에는 이상한 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트랩이 있는 것도, 비밀통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놓여있는 물도 그냥…… 물이었다. 독 따위 들어있지 않은 그냥 물. 니콜라스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어있으나 그 정도 되는 암살자를 막기엔 역부족인 것들 뿐이다. 그런데도 이 지경이 될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난 지금 어디 있는 거지?

니콜라스의 머리를 물음표가 점령하는 동안 복도 너머에서부터 발소리 하나가 점점 가까워졌다. 통통 뛰는 리듬이 묘하게 가벼워서, 당장 눈 감기 직전까지 ‘그런’ 훈련을 받은 니콜라스로서는 굳이 모습을 보지 않아도 발소리의 주인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아마도 그와 비슷한 나잇대, 비슷한 체형의 소년이다. 

근데 이제, 신기할 정도로 신이 난 것만 같은.

연신 팔랑거리던 걸음은 니콜라스가 감금된 문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그 사이 니콜라스는 재빨리 침대로 올라가 처음 눈을 떴던 자세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 든 척 하며 상황을 살필 생각이었다. 문 밖의 상대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만, 이내 스르륵 문을 열었다. 

그건 열었다기보다 열렸다고 하는 쪽이 더 알맞을지도 몰랐다. 누군진 모르겠으나 한참 머뭇대던 걸로 보아 여는 것도 그럴 것이라는 니콜라스의 예상과는 다르게 문 자체는 시원스럽게 옆으로 밀렸으니까. (그게 자동문이라는 건 나중에서야 알았다.) 문턱을 넘어서며 타박거리는 발소리, 갓 담은 것 같은 음식의 냄새와 함께― 햇빛 머금은 밝은 금발이 니콜라스의 가느다란 시야에서 포슬포슬 흔들렸다. 

“아직 못 일어났구나.”

앳된 목소리에선 약간의 웃음기가 묻어났다. 달그락, 침대 옆에 식판 놓는 소리가 나더니 끼기긱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먹을 거 줬으면 제깍제깍 나가기나 할 것이지, 눈치 없는 소년이 구석에 박혀있던 의자를 기어코 가지고 와 니콜라스의 침대맡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볼에 와닿는 시선이 꼭 언뜻 보았던 머리색 만큼이나 따뜻한 것 같았다. 노을이 지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헤헤,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건 그거다. 

니콜라스는 저런 눈을 한 채 사람을 찢어발기는 부류를 짧은 시간, 너무나도 많이 경험해왔다. 

어쨌거나 소년은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이러한 인내에 면역이 있는 니콜라스로서도 ‘지루하지 않나?’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래. 소년은 이따금씩 허밍으로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숨죽여 웃으며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니콜라스가 대충 덮은 담요를 굳이 위로 끌어올려 토닥여주질 않나, 혼자 수갑을 풀려고 낑낑대며 힘을 줘보질 않나……. 도리어 니콜라스 쪽에서 먼저 자는 척을 그만둬야 하는 건가, 고민할 정도였다. 

그만두지 않은 건 순전히, 그 긴 시간이 소년뿐만 아니라 니콜라스에게도 똑같이 편안했기 때문이리라. 노맨즈랜드의 해는 늘 뜨겁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니콜라스는 소년의 눈짓 하나, 손짓 하나가 조금씩 아쉬워졌다. 그건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이미 극한의 훈련에 길들여진 자아는 그런 자그마한 다정에 경계심이 흐트러진 것이 분하다 못해 자존심 상했지만, 그와 동시에, 애써 묻어두었던 옛 기억의 향수를 불러일으켜서. 

어느새 창 너머로 사르라니 노을이 내렸다. 

잠시 시간을 가늠하는 듯 하던 소년이 별안간 몸을 일으켰다. 지던 노을이 기가 막히게 창틀을 타고 흘러 니콜라스의 옆얼굴을 덮은 탓이다. 감은 눈꺼풀 안쪽이 붉게 물들어도 니콜라스의 자는 척은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오히려 소년 쪽이 더 호들갑이었다. 

“가, 가려주는 게 낫겠지……?”

눈부시면 깊은 잠을 못 잔다고 렘이 그랬었으니까. 소년이 중얼거렸다.

렘은 또 누구야……. 그런 건 됐으니 다시 앉든지, 그도 아니라면 나가든지 했으면 좋겠다고 니콜라스는 생각했다. 앉으면 앉는대로 소년의 이유 모를 상냥함에 잠길 수 있을 것 같았고, 나가면 나가는대로 이곳이 정말 어디인지, 아니면 그저 니콜라스가 남몰래 염원하던 꿈의 한 종류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감은 시야가 훅, 하고 어두워진 건 그 순간이었다. 

동시에 니콜라스의 차가운 자아도 되돌아왔다. 

그러면 그렇지. 속으로 조소가 들끓었다. 눈 앞의 속 모를 소년을 향한 게 아닌, 그러면 지금까지 다 연기였던 건가, 싶은 찰나 실망보다 냉정이 앞선 스스로를 향한 조소였다. 그렇다면 진짜로 납치 당한 건가? 언제, 어쩌다가? 우선 눈 앞의 이 녀석을 신문해서 알아보는 게 빠르겠다 싶었다. 

니콜라스가 익숙한 동작으로 소년의 손목을 거머쥐며 벼려진 눈을 뜬 순간, 

“아, 일어났다!”

잘 잤어? 몸은 좀 어때? 

옅은 기쁨이 어린 목소리가 물었다. 엉거주춤 뻗은 손 틈 사이로 넘친 노을빛과 함께, 소년의 푸른색 눈동자가 사르르 휘어지며 유순한 곡선을 그리는 게 보였다. 니콜라스는 그런 눈을 생전 처음 보았다. 고아원 아이들조차 그렇게까지 투명하리만치 속내를 내보이진 않았었는데, 눈 앞의 소년은 그냥, 정말로 순수하게 니콜라스가 깨어난 것만을……. 

그럴 리가 있냐! 

“네가 일어나면……, 우왓!”

순식간에 둘의 위치가 뒤집혔다. 수갑 같은 걸로 니콜라스를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그 체펠마저 인정한 재능있는 암살자 아닌가. 매트리스가 한차례 크게 출렁이고, 당황한 듯한 소년이 눈을 꾹 감았다 뜨면― 목 아래로 닿는 포크의 뾰족함만이 선연하다. 소년의 커다란 눈이 동그래졌다. 

니콜라스는 아랑곳않고 포크를 고쳐쥐었다. 시선이 사막의 밤처럼 가라앉았다. 

“입 다물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

“아, 어, 우웅…….”

“여긴 어디야? 왜 나를 납치했지?”

아……. 소년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때마침 끝을 달리던 노을빛이 소년의 얼굴을 덮쳐, 강아지마냥 축 늘어진 눈가에 우묵한 음영이 졌다. 이것 보라지. 니콜라스는 그 곤란함과 슬픔이 뒤섞인 얼굴에서 대강의 답을 추려냈다. 미카엘의 눈에 대한 복수, 하극상, 그도 아니라면 인재 회유……. 

“미안해……. 많이 괴로웠지.”

“뭐?”

“사막에 무참히 버려져있던 걸 주워왔다고 들었어. 이상한 실험에도 당한 것 같다고 루이다가― 아, 이, 이건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닌데! 아니, 그으…… 정말 미안해, 함부로 말해서.”

네게는 분명 힘든 경험이었을텐데. 소년이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꼭 무언가를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건 뭐랄까, 분명 처음 보는 게 분명한 타인의 괴로움이 전부 본인의 잘못인 것 마냥,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 마냥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어서……. 니콜라스는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방금까지는 그냥 맹하고 말랑한 애일 거라고 지레짐작했었는데, 지금의 소년은 마치 교회 뒤뜰에 서있던 성상처럼 슬퍼 보였다. 

대체 왜? 기이한 위화감에 포크를 쥔 손에 힘줄이 솟았다. 

소년은 여전히 니콜라스의 손에 얌전히 경동맥을 내어준 채였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너무 아파 이것까지 느낄 겨를이 없는 건지. 

“그래도…… 괜찮아!”

“…….”

“이제 괜찮아.”

수갑 위로 따스한 체온이 조심스레 닿았다.

니콜라스가 눈을 부릅 떴다.

“내가 같이 있을게. 외톨이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말하는 소년은 도리어 신기루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노을의 잔영이 소년의 애틋한 웃음에 걸려 붉게 빛났다. 니콜라스로서는 그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미소였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웃어준단 말인가, 내가 이 포크로 네 목을 못 찢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로? 

그리하여 먼저 백기를 든 건 니콜라스였다. 습관처럼 포크를 빙 돌려 포켓에 넣으려다가 애먼 허벅지만 쿡 찔러버린 니콜라스는 입 안쪽을 꾹 씹곤 뒤로 물러섰다. 소년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까까지 보여줬던 감정은 어디론가 사라진 것처럼. 

“그, 저기이.”

“……뭐.”

“수갑 답답하지 않아? 브래드한테 말하고 올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응?”

저것도 좀 식었지만 맛있을 거야. 소년의 하얀 손가락이 식판을 가리켰다. 빈 말로도 푸짐하다고는 못하겠으나 하나같이 포로에게 주긴 아까울 음식들이 조금씩 담겨있었다. 이쪽을 보는 소년의 시선이 부담스러우리만치 반짝여서, 니콜라스는 못이기는 척 병아리콩을 푹 찍어 입에 넣었다. 확실히, 맛은 있었다. 

소년은 니콜라스가 먹기 시작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 부근에 빨간 자국이 남아 있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방을 나서기 전, 소년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니콜라스를 불렀다. 저, 저기. 

“그냥, 나는…… 너랑 만나게 되어서 기뻐. 이, 이상한 말을 하려는 건 아니고! 여기 3번함에는 내 또래가 없어서 조금, 아주 조오금 외로웠거든. 심심하기도 했고…….”

너도 여기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니 분명 괜찮을 거야. 나긋나긋 쏟아지는 소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니콜라스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너는,”

“응?!”

“이름이…… 뭐냐?”

그러자, 소년이 확 피어나듯 웃었다. 

“나는, 밧슈!”

“……니콜라스.”

“잘 부탁해, 니콜라스!”

헤헤, 하는 뿌듯한 낯이 꼭 막 햇볕에 말린 아기이불 같았다. 이런 거 처음 해보나. 덩달아 쑥쓰러움이 몰려와서 니콜라스는 모른 척 식판에 코를 박았다. 왜인지 지금 쟤랑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안될 것 같았다. 

아무튼 밧슈…… 는, 조금만 기다리라는 당부와 함께 부리나케 사라졌다. 타닥타닥 뛰어가는 걸음 사이로 소년다운 웃음이 간간이 섞여 들렸다. 밧슈가 나가고 얼마 안 있어 노을도 함께 사그라들었다. 느지막히 찾아온 어둠 속에서 니콜라스만이 포크를 꾹 쥔 채 멈춰있었다. 

사막의 밤처럼 가라앉은 시선이 혼란스럽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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