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W/밧울] 모래먼지 휘날리는 밤에도 감정은 피어난다.

밧울 게스트북 원고 웹공개본

*2024년 1월 디페 밧울 쁘띠존 기념으로 발행된 “A to VW - 너와의 첫번째”에 파베님과 함께 기고한 원고 중 개인 파트를 공개합니다. 정말 멋진 책이었어요! 실물의 감격이 엄청납니다! 멋진 행사에 멋진 책에 멋진 참여진분들에 멋진 원고들… 거기에 제 이름 올린 게 동인생의 영광이에요….

*말 그대로 ‘너와의 첫번째’를 주제로 합니다. 저는 첫 야영을 소주제로 잡았어요! 용진성 에피소드 이후 시점입니다.

*파베님께서 그려주신 최고의 삽화는 이쪽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행복해요….

(파베님 삽화 업로드 게시물 링크 삽입 예정)


A.M.10:27, Last Grab. 

쿠과과광 ━ !!!

 

“우와아아악!”

“으갸갸갸악!”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날리는 모래먼지를 헤치고 길쭉하게 잘 빠진 장신의 실루엣이 두 개나 튀어나왔다. 마치 오 미터가 넘는 바위 절벽을 뛰어넘기라도 하듯이 근사한 자세로-동시에 몹시 모양 빠지는 자세로- 뛰쳐나온 두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땅을 박차고 달렸다. 자욱한 모래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무려 일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 목에 600억 더블달러라는 거금이 달린, 노맨즈랜드의 길지 않은 역사상 전례 없는 현상범, 인간태풍이라고도 불리는 밧슈 더 스탬피드가 현상금 사냥꾼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달아나는 것만큼은 이 혹성의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인간태풍의 뒤로 검은 정장을 입고 거대한 십자가를 짊어진 건장한 사내가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자칭 방랑목사임에도 일명 가짜목사라고도 불리는 니콜라스 D.울프우드가 부지런히 다리를 놀렸다. 인간태풍의 안내인을 자처하려면 적어도 그를 쫓아갈 각오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고 웅변하기라도 하듯이 살기등등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검은 선글라스의 색유리 너머로 울프우드의 눈이 번뜩였다. 그 색은 전혀 성직자답지 않았다.

“이……. 시체파리 같은 놈들! 이 기회에 죄다 쓸어버려주마!”

“안-돼! 절대 안 돼 울프우드! 어허, 그 퍼니셔 집어넣으라 했다!”

“니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울프우드가 십자가를 쥔 손에 힘을 주는 걸 어떻게 안 것인지 앞서 달리던 밧슈가 고개를 백팔십도로 꺾어가며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저기압이던 울프우드를 말릴 수는 없었다. 울프우드가 몸을 돌려 멈췄다. 방금까지 가공할 만한 속도로 움직이던 몸뚱이가 멈춰서니 뿌옇게 모래먼지가 일었다. 기세 좋게 달리는 바이크에 브레이크를 걸면 꼭 이런 모양새이지 않을까.

울프우드가 어깨의 반동을 이용해 등에 짊어지고 있던 십자가를 크게 휘둘렀다. 쿵! 마치 바위가 내려앉는 듯한 묵직한 소리에 쫓아오던 현상금 사냥꾼들에 앞서 달리던 밧슈까지 모두가 그 자리에 멈췄다. 그들이 자세를 다잡는 것보다 울프우드의 손이 빨랐다. 울프우드의 손짓 단 한 번으로 십자가를 동여맨 벨트가 풀리고 낡은 천이 풀렸다. 영락없이 십자가로만 보였던 그것은 무게를 쉬이 짐작할 수도 없는 거대한 병기 그 자체였다.

울프우드는 쇠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중화기를 가뿐히 들어 올려 한 바퀴 크게 돌렸다. 그 옛날 가시면류관이 내걸렸을 십자가의 머리 부분을 현상금 사냥꾼 일당에게 돌린 울프우드가 자세를 낮추자 십자가의 머리가 세로로 길게 갈라지며 철제 외골격에 가려져 있던 로켓 런처가 드러났다. 그걸 본 밧슈가 새된 소리를 지르며 울프우드에게로 달려왔다.

 

“아 맞다, 울프우드 잠깐만!”

최강의 개인병장, 퍼니셔가 불을 뿜었다. 날름이는 혀보다 물줄기에 더 가까운 불꽃이 런처의 뒤와 울프우드의 어깻죽지를 쓸고 지나갔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평사포는 시선의 끝과 끝에서 겨우 좇을 수 있을 만큼 재빠르게 날아서…….

현상금 사냥꾼들을 볼링핀처럼 쳐서 쓰러트렸다. 볼링공이 그러는 것처럼. 그러고는 폭발하지도 않은 채 땅바닥을 굴러다녔다. 불발탄인가! 재빨리 연격을 위한 자세로 넘어가는 울프우드의 허리를 밧슈가 붙잡고 늘어졌다.

 

“미안, 미안해! 내가 포탄의 뇌관을 미리 빼놨어. 안 터지는 게 정상이야. 저번에 퍼니셔를 잠깐 빌리고 돌려놓다가 불발탄 빼놓는 걸 깜빡해서…….”

“이 자식이……. 빗자루, 인마! 내가 퍼니셔에 손대지 말라고 했나 안 했나! 이건 니가 갖고 놀 장난감이 아니라고!”

“우와앗! 이렇게 화낼 줄 알고 조용히 하려 했던 건데……. 자, 자. 이럴 게 아니라 얼른 도망치자. 저 놈들이 나동그라진 지금이 기회라고! 잔소리라면 나중에 실컷 들어줄게.”

“그 잔소리가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노!”

 

황당함과 당황함의 협공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울프우드는 퍼니셔를 들고 밧슈의 머리를 숫제 후려칠 기세였다. 히이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밧슈가 바닥에 떨어진 퍼니셔의 벨트를 몇 개 주워들고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계속 꾸물거려봤자 주먹만한 혹이 세 개는 생길 것이 분명했다. 분에 못 이겨 쾅쾅 발을 굴러봤자 도리가 없었다. 울프우드도 흙바닥에 널브러진 천과 벨트 몇 개를 주워들고 밧슈의 뒤를 따랐다. 밧슈는 현상금 사냥꾼들에게 쫓길 때보다 절박하게 도망쳤고 울프우드는 그런 밧슈를 따라 도망치기보다는 쫓아가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어느새 현상금 사냥꾼은 뒷전이었다. 두 사람은 그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내 생존에 위협이 된다면 그걸 없애는 것 또한 생존에의 투쟁이지 않겠는가. 그 순간 울프우드는 안내인이 아닌, 그저 생존을 도모하는 한 마리 짐승에 불과했으며 또한 밧슈는 살고 싶을 뿐이었다.

한 편의 촌극 같은 두 사람을 배웅하는 작은 인파가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 빨래를 널던 아낙들이 꽁무니 빠져라 도망치는 둘을 보며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마을을 습격한 도적떼를 물리쳐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밧슈와 울프우드에게 숙식을 제공해준 라스트그랩의 주민들이었다.

 

“먹고 갈 것 같아서 점심 미리 차려놨는데…….”

 

기꺼운 아쉬움이 그득그득 묻어나는 목소리가 그들의 뒷꽁무니 뒤로 길게 남았다.

 

 

 

 

 

 

 

A.M.11:03, Grand Sand.

 

밧슈와 울프우드가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버섯바위 그늘에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 현상금 사냥꾼 따위는 이미 뒷전이었다. 그들은 버섯바위를 빙빙 돌며 쫓고 쫓기다가 탈수로 쓰러지기 직전에 극적인 타협을 거쳐 꿈결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낮의 열기를 피해 대자로 누워 입을 크게 벌리고 땀이 식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며 아무리 생각해봐도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얼마나 멀리 달렸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먼저 자세를 가다듬은 것은 울프우드였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이제껏 쥐고 있던 벨트와 천을 갈무리했다. 퍼니셔에 묻은 모래를 털고, 천으로 감싸고, 벨트로 동여매자 중화기는 다시금 십자가가 되었다. 밧슈는 턱을 괴고 엎드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리고는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너 그걸 상당히 아끼는구나.”

“또 실없는 소리.”

“애인이라도 다루듯한 손짓이네. 은근한 게 야시시해~.”

“나불거릴 힘 있으면 거 가방이나 던져봐라. 뭐 들었나 좀 보자. 물자를 보급하기도 전에 쫓겨났으니 별 거 없을 것 같긴 하다만.”

“늘 생각하는 거지만 너는 은근히 나한테 모든 짐을 떠맡기는 경향이 있다니까. 애인님 모시느라 손이 남아나질 않으십니까?”

“내 손이 비었는지 안 비었는지 몸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을 긴데. 그 현란한 대가리 딱 대라.”

“옙. 가방 여기 있습니다.”

 

밧슈가 과장된 자세로 내민 가방을 울프우드는 낚아채듯 받아갔다.

식량과 물이 아주 없지는 않아 아껴서 섭취한다면 며칠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성 싶었다. 여러 종류의 통조림과 비스킷, 말린 고기, 식수 세 통, 취사용품이 종류별로 하나씩. 흔한 상비약 하나 없는 것이 그들답다면 그들다웠다. 그것들을 전부 모래에 늘어놓고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울프우드의 옆에서는 밧슈가 구시렁거리며 몇 벌 없는 속옷과 잠옷, 세면도구 따위 개인 물건을 가방에 쑤셔넣었다. 가방 안을 헤집고 헤집고 또 헤집어도 손에 잡히는 것이라곤 줄무늬 속옷밖에 없게 될 때까지 신나게 밧슈의 짐을 털어댄 울프우드의 탓이었다.

처량하게 가방을 꾸리는 밧슈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울프우드가 영 곤란한 낯으로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식량과 물이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지도가 없었다.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 마침 그들이 다이닝에서 지도를 보며 행선지를 정할 때에 현상금 사냥꾼들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손에 집히는 것은 죄다 쥐고서 도망치긴 했으나 테이블 가장 아래에 깔려있던 지도는 미처 챙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울프우드의 어깨 너머를 기웃거리는 밧슈에게 그가 역정을 냈다.

 

“니는 지도 한 장도 못 챙기나?”

“그러는 울프우드는 뭐라도 챙긴 것처럼 말하네.”

“내는 퍼니셔만 들어도 두 손이 가득이다. 조막만한 장난감이나 들고 다니는 니하고는 다르지.”

“조용히 좀 해, 피스브링어가 듣겠어! 우쭈쭈- 애기야, 넌 아무것도 못 들은 거야~.”

애총의 양 측면을 손바닥으로-한쪽은 비록 의수였지만- 가리고 속삭이는 밧슈를 바라보는 울프우드의 속이 펑펑 터져나갔다.

그들이 지나온 마을 라스트그랩은 그랜드샌드라고 불리는 대사막의 어귀에 있는 곳으로 사막을 건너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러서 물자며 태세를 재정비해야만 하는 마지막 마을이었다. 그런 곳이니 도적떼의 표적이 되기 쉬운 것도 당연지사. 연이은 습격에 미처 대비할 여력이 없던 마을 사람들을 도와준 것까지는 좋았으나, 마을 사람들의 호의도 받아들일 겸 쌓인 피로를 풀겠답시고 진탕 마시고 뻗어버리느라 보급도 정비도 그 무엇도 하지 못한 채 귀한 하루를 낭비해버린 것이었다.

고민 끝에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울프우드가 뒤로 손을 뻗어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자.”

“응?”

“그 마을로 다시 돌아가자고.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적고 지도도 없다이가. 이러고 사막을 횡단하려 해봤자 높은 확률로 헤매기만 할 거다. 그러느니 차라리 왔던 길을 돌아가서라도 재정비하는 게 낫지.”

“음~. 그러지는 말고. 우리 그냥 이대로 출발하자.”

“뭐?”

 

울프우드의 앞에 엉덩이를 끌고 와 앉은 밧슈가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 거리가 먼 원이 두 개, 그 사이에 작은 점이 두 개. 출발지와 도착지 그리고 그 사이의 두 사람을 그린 밧슈가 울프우드가 늘어놓은 물건 중 나침반을 집어 들었다. 두 개의 태양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오른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모래 그림을 계속 그려가며 밧슈가 말을 이었다.

 

“그랜드샌드는 라스트그랩과 스파이크힐의 사이에 있는 사막이지. 그리고 우리가 도망쳐 나온 마을의 출입구는 북쪽이었고. 대사막이라고는 하지만 너와 나는 걷는 속도도 체력도 평균 이상이니까……. 북동쪽으로 곧장 가면 이틀이면 도착할 거야. 응, 분명히. 물론 내 기억이 정확하다는 전제 하에 말이야. 아하하핫!”

“방향만 안다고 다가 아이다. 심지어는 바람이 세니 사구도 계속 형태와 위치가 변하지 않겠나. 그랜드샌드를 무사히 지나려면 지도는 꼭 있어야 할 거다. 왜 굳이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노?”

“하하, 그야 뭐…….”

 

일순, 선글라스의 짙은 색유리 너머 울프우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마을 주민들 때문이가.”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리려던 밧슈가 눈동자를 굴리며 시선을 돌려보지만 울프우드는 집요하게 그 시선의 끝을 따라갔다. 결국 두 손을 들어 올린 밧슈가 속내를 털어놨다.

 

“너도 봤잖아. 라스트그랩은 연이은 약탈로 그러잖아도 힘든 상황이었어. 게다가 그 현상금 사냥꾼들은 우리를 따라온 거잖아. 우리가 마을로 돌아가면 분명 그 녀석들도 다시 올 거야. 차라리 그랜드샌드로 향하면 우릴 쫓는 걸 포기할지도 모르지. 한 몫 잡아보겠답시고 대사막에 뛰어들 만큼 멍청하지 않다면 말이야.”

“그럼 굳이 대사막을 가로지르는 우리는 뭐고.”

“뭐긴 뭐야, 천하의 바보들이지.”

 

말을 마친 밧슈가 말쑥한 낯으로 웃었다.

 

“이런 이유인데……. 역시 좀 그런가?”

“난 또 뭐라고. 그런 이유면 빨리 말을 하지 그랬노.”

“응? 이, 이렇게 순순히 수긍한다고? 너 울프우드 아니지! 정체를 밝혀라 이 녀석, 울프우드를 어떻게 한 거냐!”

“시끄럽다 인마!”

 

밧슈의 정수리를 쾅 내려친 울프우드가 늘어놓은 물건들을 전부 그러모아 가방에 집어넣으며 투덜거렸다.

 

“내사 그런 사정을 알고도 모른 척할 만큼 냉혈한은 아니다. 아주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생각해봐라. 굳이 누군가가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한다면 차라리 우리가 그러는 게 낫지 않겠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니랑 내 아이가.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말을 마친 울프우드는 꾸린 가방을 밧슈를 향해 밀어냈다. 밧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울프우드를 바라봤다. 내밀어진 가방과 울프우드를 번갈아보던 밧슈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 행위에는 분명히 세 가지 이상의 의미가 섞여 있었다.

“너 정말 자연스럽게 나한테 짐을 떠넘기네!”

“그게 정 불만이면 내랑 바꿀래? 아나. 퍼니셔 니가 들어라.”

“됐네요. 애인을 그렇게 쉽게 다른 남자 손에 맡기는 거 아냐.”

 

구시렁구시렁, 궁시렁궁시렁.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방을 둘러메고 나침반을 든 밧슈가 먼저 걸음을 옮겼고 울프우드가 그 뒤를 따랐다. 태양은 지나치게 따사롭고 여행길은 지나치게 광활했다. 문제의 대사막은 여느 황무지보다도 두터운 모래로 덮여 있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의 고운 모래 위를 성큼성큼 걷는 것은 쉽지 않았다. 혹시라도 무어라 한마디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밧슈가 제 어깨 너머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울프우드는 묵묵히 밧슈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비록 가끔 가다 멈춰 서서 구두에 가득한 모래를 털어내야 했지만.

그들의 여정이 얼마나 오래 걸릴는지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지만 본인들이 선택한 고생길에 불평불만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렇듯 충분히 어른인 동시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랑 나. 낯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에 한해 한없이 유치한 아이들이었다.

 

 

 

 

 

 

P.M.18:35, Grand Sand.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두 개의 태양 중 작은 것까지 완전히 서녘으로 넘어가고서야 걸음을 멈췄다. 물 세 통 중 한 통을 다 마신 뒤로는 물을 아껴야 한다며 말 한마디 없이 그저 걸었다. 그들은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으나 아무렴 대사막을 하루만에 횡단하는 건 불가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바람도 강했던 탓에 머리며 옷이며 모래바람에 거의 뒤덮이다시피 한 그 모습은 스러져가는 노을빛의 분위기 보정을 받아도 가히 우스꽝스러웠다.

마침 거대한 암석지대를 발견한 것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바람이 강한 곳에서 겁도 없이 노숙을 강행했다가는 다음날 햇빛을 보기도 전에 모래에 묻힐 것이 뻔했다.

그들은 바위가 비스듬히 등을 맞대고 선 틈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공간은 좁고 바닥이 딱딱했지만 어떻게든 두 사람이 발 뻗고 몸 뉘일 정도는 됐다. 밧슈가 가방을 뒤져 몇 없는 음식과 취사용품을 꺼내는 사이 울프우드는 바지런히 모래밭에서 암석지대까지 고운 모래를 퍼 날랐다. 딱딱한데다가 울퉁불퉁하기까지 한 바윗돌 위에 누워서야 숙면을 취해봤자 다음날 몸 이곳저곳이 쑤시고 결려 오래 걷지 못할 게 분명했다.

볼품없지만 안전한 잠자리가 얼추 아늑해질 때에 밧슈가 울프우드를 소리쳐 불렀다. 식탁보를 대신해 펼친 비스킷 포장지 위에 버너에 끓인 콩 통조림과 말린 토마 고기 한 줌, 비스킷 세 덩이, 몸을 데워줄 감주 조금이 놓였다. 그들의 저녁 식사였다. 이 유치한 아이들은 한 명은 너무 나이가 많고 또 한 명은 너무 나이가 적었지만 빠듯한 형편에 반찬투정하지 않을 만큼은 철이 들었다.

기껏 불로 조리하기까지 한 귀한 음식들이 시시각각 식어갔지만 밧슈는 다리를 모으고 앉아 얌전히 기다렸다. 울프우드가 반드시 식전기도를 올린다는 걸 존중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울프우드가 신앙 없는 사람이 제 몫의 음식을 먼저 먹는 것에 핏대를 세우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러니까, 그냥,

울프우드가 스스로 타협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밧슈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던 고로.

빗자루, 하고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에 밧슈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기도를 올리는 목소리가 꽤나 듣기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 정신이 팔렸던 모양이다. 밧슈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어 가볍게 흔들었다. 울프우드는 그런 밧슈를 의아하게 바라보면서도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밧슈는 가끔씩 이렇게 혼자만의 상념에 빠지곤 했다. 울프우드는 그런 사소한 버릇에 대해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것은 울프우드의 작은 배려인 한편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울프우드가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하느냐 묻는다면…….

대사막에서의 1일차 저녁, 메뉴는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두 사람은 제법 괜찮은 식사 시간을 가졌다. 달큼하면서도 짭조름한 콩 통조림의 자작한 국물에 적셔 먹으니 표면이 말라 딱딱한 비스킷도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달콤짭짤 자극적인 통조림에 퍽퍽한 비스킷을 곁들이니 목이 말랐기에 감주를 조금씩 홀짝이기도 했다. 라스트그랩의 어느 영감에게서 받은 감주는 향이 달콤하고 색이 뽀얀 것에 비해 의외로 도수가 높았다. 술이 그다지 강하지는 않은 밧슈는 물론이고 평소 같았으면 웬만한 독주도 끄떡없었을 울프우드마저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오전부터 꽤나 다이나믹한 하루를 보낸 탓이었다.

술이 조금 들어가니 하루 종일 험악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졌다. 사막을 건너며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충분한 이야기를 나눴다. 도망칠 때 서로가 얼마나 꼴사나웠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그럼에도 잡히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의 사이와 사이에는 웃음소리가 꼈다.

수분을 너무 날린 나머지 단단함을 넘어 딱딱해진 토마 고기를 나이프로 베어내면서도 웃었다. 네 힘이 약하네, 너는 팔에 힘이 안 들어가네 하는 시덥잖은 소리나 늘어놓는 것이 즐거웠다. 콩 통조림 국물을 끼얹어 부드러워진 비스킷에 말린 토마 고기의 쫄깃한 속살을 올려 한 입에 베어 무니 그 맛이 그리도 각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한나절 햇볕으로 데운 감주까지 곁들이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느 대저택의 만찬장조차 부럽지 않았다.

달이 유독 밝았다. 칙칙한 황적색 사암으로 이루어진 암석지대에도 창백한 달빛이 나리었다. 팔뚝만한 감주 병은 진작 비워버렸다. 밤이 깊어져갈수록 그들의 술기운이, 우정이, 감정이 깊어졌다.

 

 

 

 

 

 

 

 

 

 

P.M.21:00, Grand Sand.

 

태양이 완전히 서녘으로 저물고 다섯 개의 달이 다섯 개의 얼굴을 내밀었으며 하늘을 버터처럼 가르던 솔개도 제 둥지를 찾아갔다.

밤에도 불을 밝힐 수 있는 인간들은 아직 활동시간일 터. 그러나 내일도 동이 트자마자 고된 여행길에 나설 두 사람에게는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충분히 늦은 시간이었다. 고개를 멀리 내빼도 민가의 전깃불 한 점 보이지 않을 만큼 주변이 어두운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그들은 대사막 한가운데 생뚱맞은 이 암석지대처럼 광활한 사막에 뚝 떨어진 돌멩이 두 개와 다를 것이 없었다.

예의 ‘바위가 비스듬히 등을 맞대고 선 틈 사이’는 무척 조용해 적막만이 흘렀다. 그러잖아도 좁은 곳에 노맨즈랜드의 평균을 훨씬 웃도는 성인 남성 두 명이 누우려니 어깨며 팔이며 맞닿지 않은 신체부위가 없었다. 제아무리 서로 못 볼 꼴 다 본 사이라고 할지언정 숨결이 직접적으로 닿는 거리에서 상대의 얼굴을 보며 잠들기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두 사람의 의견이 완벽하게 일치해, 결국 그들은 목 뒤부터 등허리에 걸쳐 엉덩이까지 딱 붙여 누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위가 조용했고 간간히 세찬 바람이 모래손으로 바위를 질책하는 소리만 들렸다. 바닥에 모래를 두껍게 깔고 그 위에 보온포를 깔아 완성한 잠자리는 제법 누울만했다. 바닥에 깐 보온포 귀퉁이를 끌어당겨 덮으니 두 사람의 온기를 모으니 불이 없어도 얼어 죽지 않을 정도는 됐다. 특히나 체온이 높은 울프우드의 덕이 컸다.

그 적막 속에서, 밧슈는 그저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배가 가득 찬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주린 배를 부여잡고 깨어날 일은 없을 성 싶었다. 적당히 오른 취기에 눈이 가물거리고 피로에 노곤하게 절여져 이쯤에서 눕지 않겠느냐고 먼저 제안한 것도 밧슈였다. 그런데도 어째서일까, 밧슈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대신 잡생각이 끝없이 이어졌다. 피로가 극에 달하면 오히려 쉬이 잘 수 없다고 말한 누군가가 기억이 났다. 애매한 취기는 도리어 잠기운을 쫓아낼 뿐이라고, 몇 시간이나 긴장 상태가 이어지면 신경이 곤두선다고. 그러나 밧슈의 흔적 없는 웅성거림은 비단 그 탓만은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말해볼까. 이를테면 지금 이렇게 사막 한가운데에서, 그래…….

 

대사막 그랜드샌드의 한가운데.

전후좌우를 분간할 수 없는 무한한 모래바다.

어떤 인적도 찾아볼 수 없는 무심한 적막의 가장 깊은 뱃속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랑 나, 단둘이.’

 

일견 별것아닌 그러나 명확한 소란이 바로 그것이었다. 밧슈와 울프우드가 함께 보낸 밤들이란 두 손에 두 발을 써도 꼽지 못할 만큼 많았으나 그중 대부분은 허름한 여인숙의, 그것도 완벽히 분리된 각각의 침대 위에서였지. 이토록 먼 길을 바이크도 없이 걸어서 횡단하려 시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 사람이 몸을 맞대고 누운 것도, 두 사람이 서로의 온기에 의존해 밤을 지새우는 것도, 두 사람이 가장 무방비한 순간을 선뜻 상대에게 내보이는 것도.

처음, 처음, 처음.

“울프우드, 자?”

 

먼저 잠든 것인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울프우드, 나 잠이 안 와.”

 

그럼에도 밧슈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울프우드, 있잖아…….”

 

받는 이 없는 어떤 건넴은 끝을 맺지 못했다.

“너는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는 녀석이야.”라며 건네는 것을 받은 이가 있었으므로.

울프우드가 등 돌려 누운 자세 그대로 팔을 뻗어 밧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울프우드의 손은 그의 체온만큼이나 따스했다. 크고 두터운, 길고 날렵한, 뜨겁고 따뜻한 손이 밧슈의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박힌 모래를 털어내고 두피를 뭉근히 문지르는 손가락이 밧슈는 꽤나, 꽤나…….

꽤나 기분 좋았다.

놀라움으로 번뜩 뜨인 눈꺼풀이 아래로 살살 내려감겼다. 밧슈는 두 사람이 깔기에는 그럭저럭, 덮기까지 하기에는 조금 작은 보온포의 끄트머리를 바투 쥐고 당겨 고개를 묻었다. 저 멀리 밀어두었던 잠이 조금씩 밀려오기 시작했다.

밧슈의 입술이 보온포와 코트 옷깃에 덮여 웅얼웅얼 졸린 목소리를 자아냈다.

“울프우드, 나 거기로 가도 돼?”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울프우드는 밧슈를 쓰다듬던 손을 물렸다. 그 대신 손을 몇 번인가 두 사람 사이의 허공에서 까닥였다. 마치 이리 와, 라고 말하듯이.

울프우드를 향해 몸을 돌린 밧슈가 그대로 그를 파고들었다. 그의 셔츠 옷깃은 늘 과할 정도로 젖혀져 있었는데 오늘만큼은 그것이 탓이 아닌 덕분으로 작용했다. 그러니 밧슈가 보다 수월히 울프우드의 목덜미를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발갛게 될 만큼 차가운 밧슈의 코가 울프우드의 목선을 훑고 내려갔다. 뜨거운 피부에 차가운 것이 닿아 몸을 움츠리기는 해도 울프우드는 밧슈를 밀어내지 않았다.

온기에 온기를 더하니 더욱 큰 온기가 되었다. 그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밧슈가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에 커다란 하늘구멍이 뚫린 듯 동공을 시작점으로 삼아 머리끝과 발끝까지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온몸을 맡겼다.

 

‘너도 나처럼 이렇게 잠들기를’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 그의 다정함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번갈아 내어주고 파고들기를 반복해

찾아낸 긴밀한 접점의 깊은 곳으로부터

조금쯤 특별한 온기가 피어나는 밤에.

 

 

A.M.00:15, Dreamland.

 

 

 

 

 

 

 

 

 

 

 

첫 야영, 첫 동침, 첫 허락

너와의 첫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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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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