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울]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바비큐를
저도 적폐인 거 압니다 그냥 도피하고 싶었어요 잔혹한 현실로부터
최근에 발매된 맥시멈 향수 중 울프우드의 향수가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본인이 그런 향수를 뿌리는 걸까요?
굉장히 달콤한 향이길래 무심코 밧슈의 취향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먼저 가 있을게, 천천히 나와!”
“엉야…….”
잠옷 대신 입는 후줄근한 티셔츠 아래로 아저씨마냥 배를 벅벅 긁으며 울프우드가 밧슈를 배웅했다. 콰당. 문이 닫히고 나서도 한참이나 현관에 서서 하품을 해대던 울프우드가 느린 발걸음으로 슬리퍼를 직직 끌며 침실로 돌아갔다. 빈말로라도 업무 환경이 좋다고는 말 못할 그는 꿈만 같은 금요일 휴가를 따내기 위해 바로 어제까지 며칠에 걸쳐 무리한 업무를 소화해내야만 했다. 결과가 어땠는지는 일단 오늘 늘어져 잠든 그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뿐만이 아니었다. 프리랜서임에도-또는 프리랜서이기에- 기가 막힌 자기관리력을 과시하는 동거인이 새벽같이 일어나서는 평소와 다르게 잔뜩 괴롭혀대니 도통 푹 잠들 수가 없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미지근한 침대 위에 몸을 던지며 울프우드가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아직도 밧슈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울프우드 이거 어때, 색 괜찮아?’
‘아야! 마음에 안 들면 말로 해, 말로. 은근히 손이 맵다니까…….’
‘이 바지 다리 짧아 보이지는 않아? 네가 언제는 길었느냐는 표정 하지 말고!’
‘오늘 강수 확률 낮다더라. 대신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니까 너도 겉옷 챙기는 거 잊지 말고. 아, 기왕 이렇게 된 거 맞춰 입을까? 우리 저번에 같이 산 점퍼 어디 넣어놨더라~.’
“으윽……. 으우에엑……. 생각해 보니까 열 받아서 진짜…….”
잠결에 휩싸이다가도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른 울프우드가 결국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침대 옆 협탁을 더듬어 담뱃갑과 라이터를 찾아내서는 침대에서 상반신만 겨우 일으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바닥에는 누구의 것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옷가지가 널려 있고 언제나 깔끔히 정리되어 있던 거울 앞에는 평소엔 잘 꺼내지도 않는 화장수며 향수가 즐비했다. 전부 꼭두새벽부터 펼쳐진 난데없는 패션쇼의 흔적이었다. 패션쇼의 주범은 제 몸을 치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잘 자고 있던 울프우드를 깨워 오늘의 드레스코드를 브리핑하기까지 했다. 회상할수록 두 대는 더 때려줄 걸 싶어 눈앞이 아찔해지는 울프우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밧슈를 침실에서 내쫓지 못한 것은…….
담배로 침침한 정신을 억지로 끌어 일으킨 울프우드가 잠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눈꺼풀을 끔뻑이며 다시금 침대를 파고들었다. 담배를 쥔 손은 천장을 향해 치켜든 채로. 서서히 졸음이 달아나고 이른 아침 특유의 맑고도 명정한 기운이 팔다리를 타고 내달렸다. 기분 좋은 몽롱함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는데. 혼잣말이 담배 연기와 섞였다.
오늘은 고대하고 고대하던 공식적 첫 데이트. 그 날을 맞아 샤워하고 난 물기를 제대로 말리지도 않은 채, 젖은 머리를 휘날리며 침대에 뛰어드는 애인의 기대감 어린 눈빛을 그저 졸리다는 핑계로 무시하기에 그들은 지나치게 풋풋한 시기였다.
* * *
핑크색 미니스커트도 꽃 모양 머리장식도 없지만 대신 앞머리를 조금 잘랐다. 며칠에 걸친 야근으로 꼴이 말이 아니었던지라. 가위를 들고 욕실 세면대 앞에 선 울프우드는 그간 밧슈가 이런 몰골의 자신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던 것인가, 하는 괜한 고민에 멋쩍게 덥수룩한 뒷목을 쓸어내렸다.
구김 없이 깔끔한 남청색 슬랙스에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쳤다. 안에 받쳐 입은 셔츠는 심플하지만 칼라에 스트라이프 패턴이 들어가 적당히 화려해 보기 좋았다. 이른 아침부터 그를 깨워 이리저리 대어보며 옷을 골라준 밧슈의 안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울프우드는 괜히 꽁한 마음으로 향수병을 집어 들었다. 냄새에 민감한 그였으나 코앞까지 병을 들이밀며 오늘만큼은 제 장단에 맞춰 달라 신신당부하던 애인을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눈 딱 감고 목덜미와 소맷단에 향수를 뿌리자 눅진하고도 달큰한 향취가 진동했다.
거울에 비친 꼴이 썩 괜찮았다. 동시에 밧슈의 취향대로 꾸며진 제 모습에 어쩐지 부아가 치밀어 올라 셔츠 단추를 두셋 정도 시원하게 풀어 내렸다. 우습게도, 그러고 나니 칼라의 패턴이 더욱 돋보였다. 한참이나 거울 속 자신과 눈싸움을 벌이던 울프우드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이래서 밧슈를 얕보면 안 된다. 갑갑한 걸 싫어하는 그가 단추를 풀어낼 것쯤은 진작 예상한 게 분명했다. 울프우드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지갑과 휴대전화만 챙겼다. 현관에는 누가 미리 준비해두기라도 한 듯 밑창 얇은 스니커즈 한 켤레가 단정히 놓여 있었다. 신발에 발을 꿰어 신으며 현관문을 열자 이른 평일 햇살이 그대로 쏟아졌다. 기분이 나쁠 수가 없는 날씨에 눈을 찡그리며 선글라스를 꺼내지만 입 꼬리가 묘하게 위로 올라간 채였다. 그래도 이 향수는 역시 마음에 안 들어. 너무 달다고.
약속 장소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출근과 등교 시간을 지난 대중교통은 딱 쾌적할 만큼 한적했다. 덜컹거리는 차창에 기대어 턱을 괸 울프우드는 느린 속도로 흘러가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숨을 천천히 고르며.
한풀 기세 꺾인 햇살은 더 이상 뜨겁지 않았다. 바람은 적당히 선선했으며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이 대기 중 불쾌한 습도를 죄다 날려버렸다. 꽃잎 널직한 꽃들이 저물고 길가를 따라 손톱만한 코스모스가 봉오리를 틔우기 시작했다. 절로 웃음이 나오는 일상 속 풍경.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이른 봄부터 함께한 두 사람은 지난 계절이 변하는 때에도 함께였다. 국수 말아먹는 국물을 차게 할지 뜨겁게 할지를 갖고 한바탕 입씨름을 벌이던 것이 떠올랐다. 더위에 약한 울프우드와 더위에 강한 밧슈는 함께 살기 위해 많은 것을 서로 양보해야 했다. 그 날도 결국은 국물에 얼음을 넣는 걸로 타협했었지. 울프우드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에도 좀처럼 인정하기가 싫어 괜히 셔츠 깃을 펄럭이자 예의 향수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봄이 지나고 또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겨울도 오겠지. 그 당연한 흐름에서 새로운 기쁨을 본다느니, 내일이 기다려진다느니 하는 근질근질한 소리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울프우드는 내심 미웠던 것이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싶다며 제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서 가버린 애인이라는 놈이.
버스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시민공원이었다. 고작 사 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거리를 걸으며 울프우드는 이런저런 생각을 잔뜩 했는데, 결론으로는 먼저 가버린 이상 어디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만큼 멋지게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면 한 대 쥐어박아주겠다는 다짐만이 남았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됐느냐고?
“아, 울프우드으~! 나 여기야, 여기!”
어떻게 되기는, 바보같이 사르르 녹아버렸지.
이 공원에 저런 게 있던가 싶을 정도로 정석적으로 생긴 시계 조형물 아래에 서 있던 밧슈가 울프우드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정확히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언제나처럼 멋지게 머리를 올리고-사실 그게 멋져 보이는 시점에서 이미 끝났지만- 연청색 청바지를 입고서 아낀다던 목 짧은 워커를 신은 모습은 누가 봐도 데이트를 나오며 각 잡고 꾸민 모습이었다. 심지어 저 노란 니트 조끼의 밑단에는 울프우드가 입은 카디건 소맷부리에 들어간 것과 똑같은 무늬가 박혀 있어 자전거 타고 가며 뒤돌아봐도 페어룩이 분명했다. 세간에서는 이런 걸 두고 커플룩이라고 하겠지. 새삼스레 제 소매를 내려다보던 울프우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달려오는 밧슈를 노려봤다. 이 빗자루 다 생각이 있었구만. 그러거나 말거나 밧슈는 순순히 제가 꾸며준 대로 입고 나온 울프우드를 위아래로 슥 훑어보더니 히죽, 웃어보였다.
“나도 방금 왔어!”
“오래 기다렸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게다가 약속시간 10분 전이잖냐.”
“무드 없긴. 이럴 때는 그냥 ‘오래 기다렸지?’라고 말해주는 거야.”
“내도 방금 왔다.”
“하여튼 말 안 듣는다니까. 뭐어~, 그래도 오늘은 봐줄게.”
밧슈가 한 발짝 더 다가와서는 손은 뒤로 한 채 상체만 숙여 울프우드의 옷깃에 코를 묻었다. 그러고는 얕게 코를 킁킁거렸다. 달콤하고도 농밀한 향이 났다. 새 옷의 섬유와 농도 짙은 향수와 그리고 또 울프우드 특유의 체향이 어우러진 것이 꼭 밧슈의 취향이었다. 평소에는 입지 않는 색과 나지 않는 향. 그것들이 밧슈의 입 꼬리를 간질여 호선을 그리게 했다.
“너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취향으로 꾸며서 끌고 다니고 싶었다고 하면 화낼 거야?”
“그걸 알면서도 당당하게 말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라도 내야지.”
“그럼 역시 비밀로 해야겠다!”
“얼씨구?”
밧슈를 노려보던 울프우드의 눈이 결국 찡글, 못난 모양이 됐다. 한마디 해주려고 입을 여는 순간 손이 잡혔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밧슈는 연신 웃는 얼굴로 울프우드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고 싶은 곳이 많아.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그 말에 입을 꾹 다물고 몸을 맡긴 것은 틀림없이 날씨 탓이었다.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 얼굴이 해사하게 빛나는 것도, 가을꽃과 향수가 어우러진 향으로 머리가 어지러운 것도, 분명 아침 잠결에 보았을 터인 멋지게 차려입은 밧슈의 모습에 지나치게 눈이 부신 것도 다 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의 장난질일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용케 이 녀석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사는구나. 바보 같은 감상이 하릴없이 공중에서 흩어졌다.
밧슈는 울프우드를 이끌고 곧장 공원 근처 영화관으로 향했다. 금요일이라고는 해도 평일, 그것도 정오에 가까운 이른 오전에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로비는 한산했고 매점도 조용했다. 데이트 일정은 전부 제게 맡기라는 밧슈의 말에 그러잖아도 업무로 바쁘겠다, 정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울프우드는 어련히 알아서 티켓을 예매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밧슈는 예매 내역을 확인하기는커녕 주머니에서 지류 티켓을 꺼내지도 않고 로비에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었다. 결국 조바심이 난 울프우드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몇 시 영화고?”
“응~ 앞으로 20분 뒤? 울프우드는 약속시간 잘 지키니까 일부러 타이트하게 잡았는데, 어때?”
“시간 뜨지는 않겠네. 노파심에 물어본다만, 예매는 한 거제?”
“으~음.”
“예매는 한 거제……?”
“음, 흠흠, 흐음~!”
연이은 질문에도 밧슈는 그저 딴청만 피우며 로비를 둘러보기나 할 뿐이었다. 이 자식 설마 티켓도 예매하지 않고 온 건가? 울프우드가 급히 상영 시간표를 찾았다. 어디 보자, 지금부터 20분 뒤에 시작하는 영화가……. 응?
“아, 왔다!” 시간표를 몇 번이고 재확인하는 울프우드의 손을 밧슈가 질질 잡아끌어 향한 곳은 매표소였다. 그것도 직원이 직접 티켓을 뽑아주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곳이 아직 남아있구나 싶었지만 밧슈는 울프우드가 감탄이나 하고 있도록 시간을 주지는 않았다.
“‘가슴부터 가랑이까지 두근두근해’ 두 장, 커플석으로 주세요!”
진짜 그거였냐!!!
다른 관객 하나 없이 한산한 로비에는 입을 쩍 벌리고 경악한 얼굴로 밧슈를 쳐다보는 울프우드와, 연인의 뜨거운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는 밧슈와, 방금까지 재고 정리를 마치고 왔더니 염장 지르는 바보 커플 때문에 퇴근하고 싶은 마음만 커진 직원 세 사람만이 있었다. 그 사람 없고 조용한 로비에 밧슈의 씩씩한 목소리가 얼마나 잘 들렸겠는가.
“몇 열로 하시겠어요?”
“음향이 제일 빵빵한 곳으로요~.”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프로적인 태도로 티켓 발권을 마친 직원은 덤덤히 좌석 안내를 마치고서는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즐거운 관람 되세요.”하고 상투적인 인사말을 건네기까지 했다. 평일 대낮부터 호들갑 떨며 성인 영화 커플석을, 그것도 굳이 유인매표소에서 대면으로 발권하는 커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해 그것만이 울프우드에게 위안이 됐다. 밧슈는 아직 얼이 빠져 있는 울프우드를 끌고 이번엔 매점으로 걸어갔다. 다가오는 바보 커플을 보는 매점 직원의 얼굴에 살짝 질린 표정이 초속으로 스쳐지나갔다. 매표소에서 있었던 일련의 소란을 보고 들은 게 분명했다. 아, 젠장. 얼굴이 홧홧해지는 감각에 울프우드가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그런 울프우드를 뒤에 두고 메뉴판을 훑어보던 밧슈가 이번에도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커플 세트 라지로 한 세트에 라지 사이즈 팝콘 추가요! 너 아침 안 먹고 나왔지? 스낵 더 추가할까? 맛은 버터-캐러멜에 체다치즈-어니언으로 반씩 괜찮아?”
“네 맘대로 해라……. 그리고 내는 사이다.”
“사이다래요! 음료는 콜라 한 잔이랑 사이다 한 잔으로 할게요. 거기에 칠리치즈프라이도 추가요. 아, 울프우드 그거 알아? 이 영화관은 팝콘을 주문하면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튀겨준대. 엄청 맛있겠지!”
할 일 없어 한가해야 했을 황금 같은 낮 시간에 난데없이 주문이 밀려든 건 둘째 치고, 분명히 영화관 매점에서 일하는데 휘핑크림 마니 올려듀려야 하는 기분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던 직원은 묵묵하게 팝콘이나 튀기기로 했다. 손잡고 꽁냥거리는 바보 커플을 카운터에, 등 뒤에 남겨두고서. 선배는 이런 사람들을 잘도 무시했구나 생각하며.
관객은 두 사람을 포함해 예닐곱 명이 전부였다. 전세라도 낸 것처럼 텅 빈 관에서 밧슈와 울프우드는 가장 음향이 좋은 열의 커플석을 독차지했다. 장르가 장르인 만큼 노골적인 베드신이 가히 색정적이었으나 울프우드의 예상-또는 기대-와 달리 밧슈는 꽤나 집중해서 영화를 봤다. 울프우드는 제겐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것이 야속할 지경이었다. 이럴 거면 왜 이런 영화를 보고 왜 이런 좌석을 고집한 거지? 합리적 의심이 점점 커져 갔다.
두 사람이 앉은 커플석은 직원의 안내대로 과연 음향이 좋은 자리였다. 질척이는 효과음과 달콤한 한숨 소리에 자극받은 울프우드가 입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키며 밧슈의 손목 안쪽을 은근하게 쓸어 올리자 밧슈는 오히려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이런 걸 노리고 보자고 한 게 아니었나!? 영화관에서 눈이 마주친 연인들의 시선에 끈적함 대신 버석함이 흘렀다. 당황한 울프우드가 손을 떼자마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죽도록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그 와중에도 손끝에 남은 밧슈의 살결 감촉이 강렬했던 울프우드는 필사적으로 애꿎은 팝콘만 학살했다. 분명 아침을 먹지 않고 나왔음에도 허기를 달래고도 남을 만한 양을 혼자서 해치운 울프우드가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허리를 조금 굽히고 좌석에서 흘러내렸다. 밧슈는 여전히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러닝타임이 끝나갔다. 어쩌면 그들에게 연애 수행은 아직 일렀을는지도 몰랐다.
영화를 보고 나온 두 사람은 영화관 근처 유명한 가게에서 핫도그와 샌드위치, 부리또 따위를 종류별로 사서는 시민공원 벤치에 앉아 반씩 나누어 먹는 것으로 어설프게 아침 겸 점심을 때웠다. 날씨가 워낙 좋아 썩 괜찮은 일정이었다.
마지막 핫도그를 씹어 삼키고 티슈로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낸 뒤로는 밧슈에게 끌려 다니기만 하는 울프우드였다. 새로 개점했다는 쇼핑몰은 규모가 크고 쾌적할 뿐만 아니라 부대시설까지 훌륭했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밧슈를 따라다니며 집어 드는 옷마다 한마디씩 얹었다. 이건 이래서 별로야, 저건 저래서 별로야, 그건 꽤 괜찮아. 그러면 밧슈는 울프우드의 의견을 경청하는 척하며 그의 눈을 피해 결제할 옷가지 사이에 마음에 든-울프우드는 반대한- 옷을 끼워 넣었다. 밧슈는 제 옷만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울프우드의 옷을 골라줬다. 패션에는 관심도 재능도 없는 울프우드였지만 애인이 제게 이런저런 옷을 입히며 즐거워하는 걸 지켜보는 것이 꽤나 재밌었기에 그럭저럭 맞춰줬다. 그러고 나니 쇼핑백이 한가득이었다. 울프우드는 뭘 이렇게까지 사냐, 돈이 남아 도냐며 구박하면서도 밧슈의 짐을 흔쾌히 나눠 들었다. 그마저도 커플 느낌이 물씬 풍겼다는 걸 두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알 법했다.
다음으로는 게임센터에 갔다. 밧슈가 특기인 사격으로 경품을 몇 개씩이나 따내며 짐을 늘리는 걸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울프우드도 결국은 밧슈의 옆에 서서 게임에 열을 올렸다. 이제 그만 가자며 보채는 밧슈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바이크 레이싱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은 아직도 소년 같았다.
한참을 돌아다니느라 목이 마르고 다리가 아팠던지라 카페에도 갔다. 서빙하는 직원이 초콜릿 드리즐이 잔뜩 뿌려진 바닐라 라떼를 밧슈의 앞에, 깔끔한 아인슈페너를 울프우드의 앞에 놓고 갔다. 점원이 간 뒤, 잠시간 시선을 교환하던 두 사람은 낄낄 웃으며 서로의 앞에 놓인 잔을 바꿨다. 생긴 대로 노는 두 사람이었지만 커피 취향만큼은 참 그랬다.
공식적 첫 데이트는 그렇게 무난하고도 슴슴하게 흘러갔다.
대화에 열을 올리던 울프우드가 무릎을 치며 웃다가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꽁한 표정으로 울프우드를 노려보는 밧슈의 옆자리에는 쇼핑백과 게임 경품이 가득했다. 오늘따라 느리게 가는 것만 같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오후 다섯 시를 넘겼다.
울프우드의 시선이 느리게 밧슈를 훑었다. 씩씩거리며 화를 가라앉히는 밧슈가 입은 니트 조끼에는 울프우드의 카디건과 똑같은 무늬가 짜여 있었다. 울프우드는 조금 긴 감이 없잖아 있는 카디건의 소매를 당겨 손끝으로 더듬었다. 누군가와 옷을 맞춰 입은 것도, 좋은 자리 전부 놔두고 굳이 커플석에 앉은 것도, 별다른 합의 없이 당연하게 커플 메뉴를 주문한 것도 이것저것 모든 것이 처음이 아닌 게 없었다.
울프우드가 오늘을 기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막연했던 것이지. 그들이 친구로서 서로를 알아온 시간이 있는 만큼 이제 와서 관계의 형태를 바꾼다 한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이 명명된 두 사람 사이의 유대감이, 그 남들보다 조금 특별한 감정이. 어떤 기대를 걸지 않는다면 관계의 변화를 요구하는 밧슈의 요구를 그토록 흔쾌히 받아들인 것에 오히려 변명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일방적이어서는 변하지 않는다. 시작은 외로울지언정 그 결과는 과정과 이유가 명확할 터였다. 두 손바닥이 맞부딪혀 내는 소리에는 각 손바닥에게 책임이 있었다. 울프우드는 밧슈를 믿었다. 본인만큼이나 그 역시 오늘을 기대했으리라고, 오늘의 데이트를 앞두고 그 역시 설렜으리라고.
두 사람 모두 연애 경험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동정같이 굴 생각은 딱히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쯤은 특별함을 원했던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그래서 울프우드는,
오늘이 아주 특별한 하루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밧슈가 그의 손길을 피하며 당혹스러운 눈빛을 띠기 전까지만 해도.
영화 이후의 일정은 순탄하기 그지없었다. 데이트라기에는 평범하게 휴일에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싶기도 했다. 울프우드는 그것이 못내 불만이었으나 차마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는 모양 빠지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을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데이트를 앞두고 매일같이 야근에 추가근무를 달고 돌아와 잠이나 자기에 바쁜 자신을 두고 밧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절대 기분 좋지는 않았겠지. 그리 생각하면 불평불만이 나오다가도 쑥 들어가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두 사람 모두 연애 경험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울프우드는 어째서 자신이 이토록 ‘처음’ 내지는 ‘특별함’에 신경을 쏟는지 알 수 없었다. 밧슈와는 단지 연인일 뿐임에도 그는 미묘하게 밧슈로부터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것들이 정확하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 자신도 답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애초에 밧슈에게 같이 살자며 운을 뗀 것도 본인이지 않았나. 문득 울프우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건 할 수 있다면 이십대 초반에 졸업하고 싶었다.
식어빠진 바닐라 라떼를 홀짝이며 울프우드는 겨우 잡생각을 떨쳐냈다. 제목은 좀 그래도 영화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계절 한정 버섯 핫도그도 맛있었고, 옷도 잔뜩 샀다. 게임센터에서 신나게 스트레스를 풀고 카페에 와서 지금 이렇게 농담이나 지껄이며 낄낄거리고 있는 것도 꽤 즐거웠다. 어쩌면 우리는 연인의 형태를 따르면서도 이렇게 평범한 친구 사이처럼 지내는 게 맞는지도 몰랐다. 울프우드가 수긍했다. 친구 같이 가까운 연인, 나쁘지 않지. 어쩌면 오히려 이쪽이 오래 가고 편하지 않나? 두 모금, 세 모금, 네 모금. 멈추지 않고 잔을 기울이는 울프우드를 밧슈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결과적으로 멋진 하루를 보냈다. 이틀 전에 장을 봐뒀으니 이제 집에 가서 저녁만 해먹으면 딱 괜찮은 금요일이 될 것 같았다. 가는 길에 맥주도 좀 사야지. 보고 싶던 영화가 슬슬 OTT로 올라올 때가 됐잖아. 술기운에 적당히 입술이나 부비고 잠들면 딱일 거야. 얼음 조각을 입에 물고 잔을 내려놓는 울프우드였다. 그리고 밧슈는 그 모든 과정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도 웃는지 찡그리는지 모를 오묘한 얼굴을 하고서.
“슬슬 가자. 얼른 저녁 만들어야지. 니도 고작 샌드위치 조금 먹은 것 갖고 배 안 찰 거 아이가.”
“어라. 나 저녁 집에서 먹을 생각으로 나온 거 아닌데.”
“아, 사갖고 가게? 그럼 오랜만에 중국 요리나 먹을까.”
“아하하……. 울프우드 오늘 역시 조금 이상하네.”
자리에서 일어난 밧슈가 제 몫의 짐을 들며 곁눈질로 울프우드를 힐끔거렸다.
“자, 그러지 말고 따라와. 식당 예약해뒀어. 설마 여기서 오늘 데이트가 끝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어…….”
“난 오늘 하루를 완벽하게 보낼 계획이거든.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따라오기나 해.”
밧슈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먼저 카페를 나섰다. 뒤에 남은 울프우드는 카페를 나가는 밧슈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아! 소리를 내지르며 주렁주렁 짐을 든 손에 다 마시고 남은 잔을 들었다. 저 자식 그냥 마신 거 치우기 싫어서 먼저 간 거잖아!
밧슈를 따라 카페를 나와 걷기를 7분여, 주변이 조금씩 어둑어둑해지고 서녘 저 멀리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당당하게 길을 나서기는 했지만 밧슈도 목적지가 익숙하지는 않은 것인지 간간히 휴대전화를 꺼내 지도로 위치를 확인하곤 했다. 한구석이 조금씩 물들어가던 하늘은 이제 완연한 붉은색 스펙트럼을 품고 해질녘 특유의 한기를 흩뿌렸다. 밧슈의 등과 하늘을 번갈아보며 걷던 울프우드가 툭, 그 등에 코를 박았다. 도착한 건가? 두 사람이 멈춰선 곳은 컨트리풍으로 잘 꾸며진 갈색 외장벽의 식당 앞이었다.
“다 왔다! 여기야, 여기. 슬슬 배고플 시간이잖아? 이러지 말고 얼른 들어가자.”
밧슈가 문을 열자, 강렬한 향이 열린 문을 타고 흘러나왔다. 아니, 들이닥쳤다. 마치 폭풍우 몰아치는 밤에 창문을 연 것처럼 들이닥쳤다. 눈이 휘둥그레진 울프우드를 보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밧슈가 다시금 울프우드의 조금 긴 소매를 잡아끌었다. 우리 자리는 예약석이야, 속삭이며.
공식적 첫 데이트의 마지막을 장식할 장소로 밧슈가 고른 곳은 스모크하우스였다.
“대체 바비큐가 데이트랑 뭔 상관이고!?”
“하지만 맛있잖아!”
“맛있지! 하지만 데이트 장소로는 아니지!”
“하지만 맛있잖아!!”
두 눈을 빛내며 주먹을 쥐고 흔드는 밧슈는 누가 봐도 신난 꼬마아이 그 자체였다. 울프우드는 어처구니가 없어 미간을 손으로 짚었다. 그렇게 무안줘놓고 기껏 끌고 온 곳이 어디 근사한 프렌치 레스토랑도 아니고 시골 스타일의 스모크하우스라니. 딱히 프렌치를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스모크하우스가 싫은 건 절대 아니지만! 울프우드는 그저 복잡한 심경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여느 연인들과는 다른 온도감의 관계로 고민한 게 바보같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아예 상관이 없는 건지 밧슈는 테이블에 턱까지 괴고서 예의 예쁜 얼굴로 방싯방싯 웃을 뿐이었다. 그 뒤로 얼른 칭찬해달라는 듯이 흔들리는 꼬리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울프우드는 맥이 빠졌다.
예약해뒀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미리 세팅된 테이블에 앉자마자 맥주가 두 잔 나왔다. 진한 황금색에 톡 쏘는 향으로 미루어보아 척 봐도 질 좋은 페일 라거였다.
썩 괜찮은 하루였다. 먹은 것도 다 성에 찰 만큼 맛있었고. 하지만 오늘 낮은 포근할 정도로 무더웠다-선선했다-. 하루 종일 들고 다닌 짐은 무거웠다-가벼웠다-. 어디 털어놓을 수도 없는 고민으로 갈등했다-이건 사실이었다-. 심신 양적으로 압박해오는 그 해소할 수 없는 갈증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한 잔, 이 한 잔만 있다면 반드시 해갈이다! 덥석 잔을 집어 들고 나니 아차 싶었던 울프우드가 눈동자만 굴려 밧슈의 기색을 살폈다. 그런 울프우드와 눈이 마주친 밧슈가 아주 보란 듯이 웃었다.
“오늘의 메뉴도 술도 전~부 내가 직접 고른 거야.”
순식간에 울프우드의 얼굴이 굳었다. 몸 전체가 굳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지된 울프우드에게 밧슈가 상체를 내밀어 속삭였다.
“하나하나, 직접, 너를 생각하면서.”
오, 씨발.
“무슨 맛일지 궁금하지 않아? 울프우드.”
잔을 쥔 울프우드의 손이 밧울밧울 떨렸다. 뒷이야기는 굳이 서술할 필요가 있는가 싶으면서도 노파심에 덧붙인다. 마셨다. 마셨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가 싶을 정도로, 울프우드는 맥주 한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목구멍으로 술을 삼켜내며 목울대가 힘차게 꿀렁였다. 잔이 기울어지는 각도가 완만한 예각을 그렸고 그것이 직각에 도달하기 직전에, 푸하-, 듣기만 해도 시원한 감탄사와 함께 울프우드가 잔을 내려놓았다. 밧슈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감상을 재촉했다.
“어때, 어때?”
“……주네.”
“응? 지금 뭐라고…….”
“이거 죽여주네!”
“그치!!!”
호기롭게 한 잔 더! 를 외친 울프우드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은 밧슈가 조촐하게 박수를 쳤다. 이쯤에서 말하건대, 메뉴를 고른 사람 입장에서 크게 만족해주는 사람만큼 반가운 것이 없다. 밧슈가 누구인가? 누구보다 울프우드와 가까운 곳에서 그의 모든 취향과 선호도를 분석해온 사람이다. 그런 밧슈에게 울프우드의 반응이 기껍지 않을 리가 없었다. 덩달아 제 잔을 쥐고 역시나 단숨에 술을 털어놓은 밧슈가 크으~!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순식간에 텐션 오른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통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한 잔만 마셔도 알겠다. 니 꽤 괜찮은 가게를 찾았구마?”
“그러엄~! 말했잖아? 난 오늘 하루를 완벽하게 보낼 생각이라고. 그래서, 네가 그렇게 좋아 죽는 남자친구에게 칭찬 한마디 해주고 싶지 않아?”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걸지 마♡”
키들거리는 소리가 테이블 위 공기를 가르고 울렸다. 웃음소리가 잦아들 즈음에 두 번째 잔이 도착했다. 아까보다 색이 밝은 것이 척 봐도 같은 맥주는 아닌 모양이었다. 울프우드가 의아한 얼굴로 잔을 들어 올려 들여다보는 것을 보며 밧슈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너 정말 내 말 안 듣는구나. 오늘은 메뉴부터 술까지 전부 내가 직접 골랐다고 하지 않았어? 네가 뭘 외치든 전부 예정된 게 나올 거야.”
고개를 치들고 그렇게 말하는 밧슈는 확신이 있어 보였다. 울프우드에게는 없는 어떤 확신이. 누구는 내내 그걸 불안해하며 갈등했는데도. 그것이 못마땅했던 울프우드가 입을 벌리고 한마디 해주려는 순간 엄청난 것이 들이닥쳤다.
거대한 나무 도마 위에 고기가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 테이블을 침범했다. 아홉 개나 되는 버터롤과 후추와 소금을 잔뜩 뿌린 감자튀김, 양배추와 사과 그리고 배를 넣은 코울슬로, 당근과 할라피뇨 피클, 그레이비소스를 질펀하게 뿌린 으깬 감자가 플레이트의 반을 차지했다. 그럼 나머지 반은 어땠느냐? 흐물흐물하게 캐러멜라이즈된 양파와 겉을 태우듯이 구운 아스파라거스, 눅진하게 익힌 방울 양배추 위로 그야말로 장대한 고기의 산이 펼쳐졌다. 한 짝은 되어 보이는 돼지갈비가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뽐내며 얹혀 있었고 그 주변으로 잘게 찢은 풀드 포크와 훈연 향내를 풍기는 베이컨, 척 봐도 완벽한 색을 내는 브리스킷이 도마가 터져나가도록 자리했다. 그 주위로 두 사람분의 치미추리 소스와 자두 살사, 씨겨자, 갈아낸 통후추 조각이 큼지막하게 살아있는 타마릴로 소스가 놓였다. 사과의 달큼한 향내에 앞서 알싸한 시나몬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애플파이는 파이보다도 케이크에 가까운 질감이었다.
울프우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본격적이었고 어딜 어떻게 봐도 두 사람이 먹기에는 많은 양이었다. 그 어마무시한 광경이 오히려 그의 입맛을 돋웠다. 울프우드의 반응을 살피던 밧슈는 거의 함박웃음을 지었다. 다시 말하지만, 메뉴를 고른 사람 입장에서 크게 반응해주는 사람만큼 기꺼운 것이 없었다. 밧슈가 으스대며 두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가장 먼저 고기를 맛 볼 권한을 줄게.”
플레이트에서 떠날 줄을 모르던 울프우드의 시선이 그제야 밧슈를 향했다. 테이블에 양손을 올리고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잘게 깨문 것이 꼭 후식으로 나온 파인애플 케이크를 앞에 둔 어린아이 같아 밧슈의 입 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꼭 ‘기다려’를 배우는 강아지 같기도 했다. 이런 걸 말하면 플레이트에 고기가 추가될 것이 뻔했으므로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울프우드 앞에 놓인 나이프를 톡톡 건드리기만 했다. 눈썹을 들썩이며 “이러다 식겠어.”라고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촉 아닌 재촉에 울프우드가 포크를 들었다. 날카로운 네 갈래 쇳덩이가 곧장 향한 곳은 브리스킷이었다. 역시 바비큐라고 하면 그것부터 먹고 싶어지는 법이지. 밧슈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푹. 포크가 너무나도 쉽게 육면을 뚫고 들어갔다. 까맣게 색을 입힌 겉면은 기름과 윤기로 반들거렸고 확연한 색깔의 스모크 링이 그 모양새를 뽐냈다. 그것을 오래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길게 자른 고깃점이 그대로 쑤욱 울프우드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그 맛을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환상적이었다. 입 안에서 참나무 훈연 향이 폭탄처럼 퍼지고 감칠맛 나는 차돌양지 지방이 소스와 어우러져 쌉싸름한 표면과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고기 가장 중앙점까지 간이 잘 밴 것을 보면 최소 열두 시간 이상 충분히 염지한 것이 분명했다. 갓 잘려 서브된 육단면은 육즙이 풍부했다. 조리 시간이 적절했다는 증거였다. 오버쿡되거나 덜 익지 않아 부드럽고도 씹는 식감이 풍부해 울프우드는 그것을 오래, 오래 씹었다. 마치 목구멍 너머로 고기를 넘기는 게 아깝기라도 한 듯이. 하지만 고기 한 점을 영원히 되새김질할 수는 없는 법. 첫 한 점을 꿀떡 삼킨 울프우드는 이런저런 감상을 뱉는 대신 맥주를 찾았다. 투명한 황금빛 액체가 입 안에 남은 고기와 소스의 잔향을 지우고 깔끔한 쓴맛을 혀끝에 남겼다. 이 자식. 고기와 함께 마실 첫 맥주로 필스너를 골랐단 말이지. 밧슈의 센스에 내심 감탄하면서도 그걸 순순히 인정하자니 조금 오기가 드는 울프우드였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기에는 지나치게 맛있었다. 젠장. 제기랄.
하지만 그걸 놓칠 밧슈가 아니었다. 저렇게나 눈을 빛내며 한 입, 조금 풀어진 얼굴로 한 모금을 마시는 울프우드를 몇 번이고 봐왔다. 울프우드가 크게 만족하고 있다는 것쯤은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시간과 유대감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순순히 인정하기는 싫을 테지. 밧슈는 이상한 부분에서 고집 센 애인을 녹여먹는 방법을 알았다.
밧슈는 감상을 재촉하는 대신 버터롤을 집어 들었다. 보드라운 흰 빵을 반으로 찢어 그 사이에 코울슬로와 풀드포크, 구운 양파를 가득 얹고 씨겨자를 한 숟갈 듬뿍 발라서는 에잇, 묻지도 않고 울프우드의 입에 밀어 넣었다. 빵빵한 샌드를 입이 터져라 문 울프우드가 당황해 반쯤 베어 문 것을 밧슈가 쏠랑 제 입에 넣었다. 입가에 온통 소스를 묻히고 볼이 터져라 우물거리는 울프우드는 영 황당한 표정이었다. 겨우 삼킨 울프우드가 포크를 들이밀며 왁왁거렸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반으로 가를 것이지 이게 뭐하는 짓이고?”
“엥~ 왜, 부끄러워?”
“야 여기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울프우드는 아직도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하는 거야?”
우리의 디데이가 들으면 애석할 거야~. 장난처럼 남긴 밧슈의 한마디에 울프우드가 그 입을 다물었다. 참 부정할 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 도통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삐걱거린 것은 결국 자신이 타인의 시선과 세간의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한 탓이 아니었겠는가. 그런가 하면 오늘 밧슈의 태도도 충분히 고려 대상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울프우드에 비해 밧슈는 오늘의 데이트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다. 밧슈가 짠 일정은 어딜 어떻게 봐도 울프우드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울프우드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졌다. 혼자서 생각에 골몰할 때면 으레 나오는 그의 나쁜 버릇이었는데, 당연히 밧슈는 그것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울프우드는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는 것에 재능이 없었다. 그럴 만한 성격도 아니었고. 대신 그는 한 모금 겨우 마신 맥주잔을 강하게 쥐고는 들어올렸다. 울프우드 또 혼자서 결론 내리고 이상한 짓 하네. 의자에 바르게 앉은 밧슈가 낄낄 웃으며 똑같이 잔을 들어올렸다. 그가 오늘 보여준 귀여운 반응을 봐서 이 정도는 넘어가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잔과 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남은 술을 전부 비워냈다. 양이 꽤 됐기에 한동안 테이블 위에는 꿀꺽꿀꺽 술 넘기는 소리만이 들렸다.
“푸하~!”
“크어어!!”
동시에 잔을 내려놓은 두 사람의 시선이 고기 위에서 마주쳤다. 상대의 입술이 미묘하게 실룩거리는 것을 보고 먼저 웃음이 터진 쪽은 밧슈였고, 거기에 따라 웃은 쪽이 울프우드였다. 맛있는 술과 고기,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올드 스쿨 포크송, 가게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이야기소리. 금요일 저녁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활기가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더욱 키웠다. 무어가 그리도 웃긴지 테이블까지 두드려가며 한참이나 웃은 두 사람이 겨우 웃음을 그쳤을 때에는 이미 직원이 다음 맥주를 가져다준 뒤였다. 테이블에 턱을 괸 밧슈가 맥주잔을 들고 눈높이에서 찰랑이는 모습을 본 울프우드가 편한 자세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아무렴 남들이 무슨 소용인가, 그에게는 토끼 같은 애인이 있는데. 오늘 하루가 이렇게나 행복했는데. 검지와 중지로 테이블을 톡, 토독 두드리던 울프우드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있잖냐, 빗자루.”
“응?”
“오늘 고마웠다. 재밌었어.”
울프우드는 나름 분위기를 잡았다. 어쩐지 그윽한 표정도 지었고, 테이블에 한 팔을 올려 몸매도 강조했고, 아이컨택도 찐하게 했다. 그럼에도 밧슈는 눈썹을 찡그리며 손을 내저어 울프우드는 그것에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지, 그게 아니지!”
“어, 응?”
그런 짓 잘 않던 사람이 비장의 유혹술을 시전할 때에는 내심 기대하는 것이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놀라서 딸꾹질을 한다거나, 얼굴이 새빨개진다거나, 헤롱헤롱한다거나……. 어쨌든 삿대질까지 해가며 그게 아니라고 소리치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얼빠진 채 술기운이 빠져가는 울프우드를 앞에 두고 밧슈가 말을 이었다.
“지금 네가 해야 할 말은 ‘고맙다’가 아니라고. 그것보다 좋은 말도 많잖아?”
“대체 무슨 소릴 하는…….”
“이럴 때에는 ‘즐거웠다’라고 해야 하는 거라고. 고마움은 집어넣어둬! 지금은 이 순간을 그저 즐기면 되는 거야. 우리 오늘 그러려고 만난 거잖아?”
기껏 멋진 말을 늘어놓은 것치고는 밧슈의 표정이 불퉁했다. 눈썹을 찡그리고 입술을 꾹 다문 것이, 울프우드의 대답이 적잖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가 너무나도 곧았던 탓에, 울프우드는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술로 가득 찬 잔만 두드렸다. 나무 테이블을 두드릴 때와는 다르게 통, 통, 맑으면서도 속이 꽉 찬 소리가 울렸다. 대답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밧슈의 시선이 지나치게 열정적이었던 탓이다.
“즈, 즐거웠...다?”
“더 크게.”
“즐거웠다……!”
“더 자세하게.”
“오늘 빗자루 니랑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즐거웠다!”
“음! 그 감사 받아줄게!”
무안함이 울프우드의 머리끝까지 올랐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업무 과중으로 간이 망가져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던가 이 곳 맥주에 약이라도 섞은 것이 분명했다. 취하지 않고서야 애들 장난 같은 입씨름을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벌일 리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입씨름의 주범은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하나씩 쥐고 울프우드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할 말 다 했어? 많이 고민하는 것 같아서 기다려준 건데.”
울프우드가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어. 와, 니도 뭐 할 말 있나?”
“아니. 식기 전에 얼른 먹으려고.”
“익…… 기껏 사람이 멋지게 한마디 하려니까 막아놓고서 한다는 말이 그거가!?”
“아, 그건 신경 쓰지 마! 너 오늘 전혀 멋지지 않았으니까. 귀엽지 않았느냐 묻는다면 또 모르지만.”
“이 자식이 뭐가 어쩌고 저째???”
“아, 식겠다! 나도 여기 기대하고 왔단 말이야. 울프우드는 할 말 실컷 해. 나는 그동안 먹고 있을게.”
익살스럽게 씩 웃어 보인 밧슈가 그대로 갈비에 손을 뻗었다. 여섯 시간 동안 저온에서 오래 훈연했다는 새끼돼지 갈비는 과연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커다란 갈빗대가 그대로 뽑혀 나왔다. 밧슈가 나이프를 대고 바삭한 겉면을 잘라내자 칼날을 타고 육즙이 자르르 흐르며 날에 닿지도 않은 속살이 갈라졌다. 울프우드의 눈이 휘둥그레질 틈도 없이 밧슈의 포크가 빠르게 움직였다. 잘라내지도 않은 거대한 고깃덩어리를 제 앞의 접시에 올려서는 치미추리 소스와 타마릴로 소스를 반씩 발라 한입에 넣었다. 순식간에 밧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잘 익힌 커스터드처럼 크리미한 지방이 풍미 넘치는 살코기와 어우러져 입 안에서 조화롭게 섞였다. 치미추리와 타마릴로를 반씩 섞은 것이 정답이었다. 강렬한 향이 돼지고기에 임팩트를 더하면서도 끝맛이 상큼해 그 큰 고깃점을 한입에 삼켰음에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울프우드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밧슈의 표정만 봐도 그 맛을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녀석, 저렇게 잘 먹으니 참 보기 좋은데…….
울프우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밧슈가 다시금 손을 뻗었다. 버터롤을 돼지 기름에 충분히 적셔 크게 한 입 베어 물고 두툼한 베이컨을 썰어 잘게 자른 아스파라거스, 소스로 흥건한 감자와 함께 먹었다. 밧슈는 맛있는 것을 먹을수록 먹는 속도가 빨라지는 버릇이 있어 지금 당장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플레이트가 비어 가고 있었다. 그 달콤한 얼굴에 빠져 있던 울프우드가 낮은 비명을 내지르며 포크를 뻗었다. 베이컨도 갈비도 아직 한 입도 먹어보지 못했는데 죄다 밧슈에게 빼앗긴다면 내일 잠을 자면서도 계속 생각날 것이 분명했다. 방금까지의 동글동글 말랑말랑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 거칠게 고기를 뜯는 소리, 술을 꿀떡꿀떡 넘기는 소리만이 남았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뼈와 기름, 빈 술잔 그리고 간간히 들려오는 성난 고함이 가득했다.
* * *
식사를 마치고 나온 울프우드가 홀로 식당 뒤 골목에서 담뱃불을 붙였다. 고작 맥주라도 열몇 잔을 비워내면 알큰하게 술기운이 오르는 법이었다. 꼼꼼히 관리해도 살아남은 몇 포기 잡초를 스니커즈의 얇은 밑창으로 즈려밟으며 울프우드는 오늘 하루를 회상했다. 날씨는 좋았고, 식사는 맛있었고, 영화도 게임도 썩 괜찮았으며 무엇보다 친구도 겸해주는 애인이 귀여웠다. 하루 중 절반 정도는 그와의 관계에 회의감과 더불어 의문을 느낀 것도 같았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런 것쯤 그에게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기실, 밧슈와 한 침대를 쓰게 된 날부터 이미 정해진 일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밧슈 역시 그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은 적 없으리란 것도 이제는 알았다. 무엇 하나 해결된 것 없었으나 그것이 어떤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저 그랬다.
이런 도시에서는 별을 쉽게 볼 수 없었다. 달조차 그 빛이 희미해 눈에 띄지 않는 밝은 밤하늘에는 가끔 인공위성 정도가 불안정하게 깜빡이며 빛을 모방할 뿐이었는데, 그것조차 울프우드에게는 일종의 빛으로 작용했다. 모방해낸 빛일지언정 분명히 검은 하늘의 빛이었다. 아, 술을 웬만큼 마시긴 했나보다. 이런 잡생각을 다 하는 걸 보면. 어느덧 끝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신발 밑창에 비벼 끄고 새 담배를 꺼낼 즈음에,
“울~프우드!”
뒤에서부터 무언가가 울프우드에게 답삭 안겨들었다. 발소리까지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와서는 하는 짓이 놀래키기라니, 세상엔 참 별 토끼가 다 있다고 생각하며 밧슈에게 작게 꿀밤을 먹였다.
“바보야 내 불 든 거 안 보이나.”
“악! 때릴 것까진 없잖아. 그럼 오늘은 한 개비만 피워.”
그리 말하며 울프우드의 통통한 배를 문지르는 밧슈의 손길엔 애정이 가득했다. 잘 먹었어? 덕분에. 집에선 이런 거 못 먹지. 다음에 또 오자. 엉. 간결하면서도 감정만큼은 충분한 대화가 오갔다. 밧슈가 눈을 감고 울프우드의 목덜미에 들러붙어서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배불리 먹고 나온 울프우드에게서는 태운 나무와 고기 그리고 담배 냄새가 났다. 밧슈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울프우드의 살갗을 좀 더 파고들었다. 여러 냄새에 묻혀 거의 지워진 달큰한 향이 울프우드의 살결에 흡착되어 희미하게나마 존재를 과시했다. 뿌린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는 다소 붕 뜨는 것 같아 어울리지 않던 향이 그의 살 내음새와 뒤섞여 완전히 밀착되었다. 아, 이거다. 내가 직접 골라준 향이야. 밧슈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어렸다. 밧슈의 손이 서서히 그 아래를 향했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오늘 일정은 이걸로 끝이가.”
“그럼. 바쁜 너를 푹 쉬게 하는 것까지가 목표였는걸. 그리고..”
울프우드의 목덜미를 입술로 더듬던 밧슈가 목선을 타고 올라가 귓가에 속삭였다.
“영화관에서 했던 것도 계속해야 하잖아.”
울프우드의 손에서 새로 불을 붙인 담배가 툭 떨어졌다. 눈에 띄게 굳은 몸에 설명할 필요 없는 열기가 돌았다. 밧슈는 그의 반응에 눈을 휘어 웃었다.
“놀랐어. 놀려주려고 데려간 곳이었는데 네가 그렇게 대담할 줄은 몰랐거든. 그럴 줄 알았으면 일정을 조금 조정하는 거였는데……. 어라, 혹시 그 일로 삐졌어? 아니지?”
손길도 말도 멈추지 않았다. 마침 이곳은 식당의 뒷골목. 인기척도 없었다. 희롱하듯 한 언사가 몇 번인가 이어지고, 울프우드 역시 화답하여 밧슈의 허벅지를 은근히 쓸어올릴 때에…….
울프우드의 주머니에서 강한 진동음이 울렸다. 휴대전화였다. 한두 번으로 끊이지 않고 세 번, 네 번이나 울리는 걸로 봐서는 아예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순조롭게 분위기 잡아가던 연인들의 시선이 마주치고 어색한 웃음이 흘렀다. 미련 넘치는 몸짓으로 밧슈의 팔에서 빠져나온 울프우드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고 전화를 받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어디 보험이나 카드 개설 권유이기라도 했다가는 끝이 영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여보세요. ... 응? 아, 너냐?”
뜻밖에도 울프우드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고개를 길게 빼는 밧슈에게 손을 흔들어 양해를 구하더니 몇 발짝 걸어 자리를 비켰다. 이거 완전히 ‘너 따라오지 마.’잖아. 불퉁해진 밧슈가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울프우드가 떨어트린 담배의 불을 밟아 껐다. 간간히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대화 전문을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랜…… 너…… 어떻게…….”
“또 무슨…… 갑자기…… 그게 아니라…….”
“됐다. 말을 말…… 그래서 확인해봐야…….”
전화는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평소 용건만 간단히 전하고 끊는 울프우드치고는 별일이라 그것이 또 밧슈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아예 쪼그리고 앉아 그를 기다릴 때에, 겨우 전화를 끊은 울프우드가 걸어와 밧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부터 니가 들으면 크게 슬퍼할 말을 할 건데,”
“미리 말해줘야 할 만큼 슬픈 일이야?”
“어어, 대충 비슷하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하면 말이다…….”
엄습하는 불안감에 쪼그리고 앉은 자세 그대로 울프우드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는 밧슈였다. 어쩌면 듣고 뒤로 넘어갈 수도 있으니까, 그거에 대비해서.
“내 동생이 온단다.”
“어”
“자고 간대.”
“어라”
“이번 주말에.”
어라라. 밧슈의 입이 바싹 말랐다. 이거 정말 안 좋은 일의 서두인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거지. 차오르는 불안을 애써 눌러 담은 밧슈가 희망을 담아 물었다.
“울프우드, 있잖아.”
“엉.”
“우리가 같이 산다는 거 네 동생은 알아?”
“... ... ...”
“너를 끔찍하게 좋아하고 잘 따르는 네 동생이 너 나랑 살고 심지어 사귀기까지 한다는 거 알아?”
“... ... ...”
“울프우드 제발 뭐라고 말 좀 해봐, 나 무서워. 주말이라는 거 일요일이지? 토요일 아니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4시간 뒤는 아닌 거지, 응?”
밧슈의 질문이 갈수록 길어졌다. 울프우드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밧슈의 머리를 도담도담 쓰다듬기만 하니 그게 밧슈를 더 미치게 했다. 왜 모든 걸 받아들인 것처럼 굴지? 설마, 설마…….
밧슈의 불안은 뒤로 하고 울프우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니가 맷집은 좋다이가.”
“너 그게 정말 애인한테 할 소리야!?”
밧슈의 절규가 번화가 식당 뒷골목에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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