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밧울이 밥을 먹는 세계관

[밧울] 오믈렛은 언제나 그리운 맛

이렇게까지 밥만 먹고 행복하기만 해도 되는 걸까요

*이 글은 2023년 8월 20일 개최되는 <SUPER COMIC CITY 칸사이 29> 내

VW 쁘띠 온리 『台風の眼に君を見る』 의 WEB 기획 중 '6월 12일 연인의 날'을 기념하여 작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늦는다고?”

“어어. 얼마나 늦을지는 모르겠다만 일찍 갈 것 같지는 않다.”

“요즘 매일 고생이네……. 알았어, 집안일은 내가 해둘게.”

“고맙다. 집 들어갈 때 도넛이라도 사서 갈까?”

 

니 단 것 좀 줄여라. 그치만 울프우드가 자꾸 사오잖아. 잘 먹길래. 시시한 투닥거림 뒤로 전화 소리가 잦아든다. “돌아오면 푹 쉬어.” 그 말을 기점으로 밧슈가 전화를 끊는다. 중견기업에서 주임을 맡고 있는 울프우드는 근 한 달여 도무지 정시에 퇴근하는 일이 없었다. 일이 바쁘기로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밧슈도 덜하지는 않았으나 어제자로 의뢰가 마무리된 그와 달리 담당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들어가 여전히 이만저만 바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전화를 끊은 밧슈가 걱정 어린 한숨을 내쉬며 집안을 둘러본다. 부엌 식탁에는 바빴던 기간 동안 먹고 남은 샌드위치나 버거의 포장지며 도시락 용기가 널려 있고 싱크대에는 커피 얼룩이 얼룩덜룩한 머그잔이 가득하다. 거실이며 침실에는 곳곳에 빨랫감이 널린 데다가 물때 낀 욕실도 얼른 청소해야 한다. 밧슈가 끙 소리를 내며 조금 자란 뒷머리를 끈 하나로 질끈 동여맨다. 피로를 풀겠답시고 어제는 하루 종일 잠만 잤었지. 도와줄 사람이 딱 한 명만 있으면 좋겠는데, 그 한 사람의 빈자리가 참 크다.

오래 지체하지는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밧슈가 금방 일어서서는 바닥이며 테이블에 널린 쓰레기부터 정리하기 시작한다. 늦게 돌아올 울프우드가 잔뜩 어질러진 집을 보면 더 피곤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그가 돌아오기 전에 집을 대충이라도 치워놔야 한다. 그리고 함께 울프우드가 사 온 도넛을 먹어야지. 푹 잤으면 좋겠으니까 커피 대신 데운 우유로 하자. 그리 생각하면 막막한 집안일도 해치울 각오가 든다. 그런 밧슈를 응원하듯 정오의 따스한 햇살이 거실 안으로 비쳐든다.

 

결국 저녁 6시 전까지 집안일을 끝낸 밧슈가 둘이 앉기엔 조금 좁은 소파에 그대로 널브러져 있다. 쿠션을 베고서 발을 까딱거리는 모양새가 꽤나 편안해 보이고, 커피 테이블에는 빵부스러기만 남은 접시와 빈 오렌지주스 병만 남았다. 쉴 틈 없이 몸을 움직이고 나니 오히려 배가 고프지 않아 얇은 식빵에 잼과 버터만 바른 간단한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운 참이다. 게다가 울프우드가 도넛을 사오겠다고 했으니까. 도넛은 배가 불러도 들어가지만 할 수 있다면 마주앉아 함께하는 식사 시간을 갖고 싶은 밧슈였다.

때문에 밧슈는 배불리 먹는 대신 허기만 조금 달래고서 울프우드를 기다리기로 한다. 그는 참으로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하며 눈을 감는다. 조금 늦는다고 했으니 잠깐 눈 좀 붙였다가 일어나면 되겠지. 혹시 일어나지 못하더라도 그가 집에 돌아오면 깨워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밧슈는 울프우드가 퇴근하기보다 먼저 눈을 뜬다. 거실 벽에 걸린 시계는 짧은 바늘이 숫자 8을 가리키고 있다. 잠에서 덜 깬 밧슈가 아무리 눈을 비벼도 바늘 위치는 움직이지 않는다. 즉, 울프우드는 이 시간까지 아직 퇴근하지 못했고, 밀린 집안일을 마치고 긴장이 탁 풀린 밧슈는 3시간이나 내리 낮잠을 자버린 것이다. 밧슈는 상당히 얼떨떨한 얼굴로 잔뜩 헝클어진 뒷머리를 긁적인다. 생각보다 더 늦는 동거인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동거인을 기다리며 집을 조금 더 닦고 쓸었더니 시곗바늘은 다시 10과 11 사이에 슬금슬금 자리를 잡았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가고 밧슈의 동거인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식탁에 턱을 괴고 앉은 밧슈가 하릴없이 눈동자만 굴려 집안을 둘러본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는 어쩌다 울프우드와 살게 되었을까.

 

혼자 살기에 조금 넓은 집은 둘이서 지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침대가 충분히 컸기에 둘이 자기에도 괜찮은 크기였건만 애당초 울프우드는 어째서 혼자 살면서 저런 큰 침대를 들인 것일까 궁금해진다. 단순히 비좁은 침대에서 자는 것을 싫어한다기에는 이유가 안 되는 것이, 울프우드는 그와 침대를 공유하며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밧슈가 다시 눈동자를 굴려 침실에서 벗어난다. 그는 이제 거실을 보고 있다. 두툼한 팔걸이가 붙은 소파는 분명 이인용이지만 건장한 성인 남성 둘에게는 조금 작다. 직접 요리해먹는 걸 좋아하는 울프우드의 성격상 부엌이 넓은 것은 이상하지 않다. 식탁 의자가 두 개인 것도 친구며 지인이 많은 교우관계를 생각해 보면 말이 된다. 그런데도 밧슈는 거기에 꽂혀 상념을 늘어놓고 있다. 정말 왜일까. 어째서일까.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두 사람의 일상에까지 이어진다. 집안일의 역할분담은 확실하다. 청소는 평소에도 성실한 성격의 울프우드가, 빨래는 보기보다 섬세한 작업이 특기인 밧슈가, 설거지는 가위 바위 보로 정한다. 어디서 특급 세일을 하는 게 아닌 이상 두 사람이 사는 동네의 마켓에서 일주일에 한 번 함께 장을 보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사 온 식재료는 보통 요리에 능숙한 울프우드가 솜씨를 발휘해 집에서 식사를 한다. 가끔 기분 내고 싶은 날이나 유독 귀찮음이 앞서는 날이면 울프우드의 퇴근 시간에 맞춰 밧슈가 마중을 나가서는 밖에서 먹고 들어오기도 한다. 샴푸나 바디워시 같은 소모품은 두 사람의 취향 타협점을 찾을 때까지 입씨름을 벌인다. 그리고 생활비는 전용 통장을 개설해 두 사람이 매달 일정액을 입금한 돈으로 충당한다.

이 소꿉놀이 같은 일상이 벌써 세 달이나 이어져 오고 있다. 느닷없이 동거 제안을 받았을 때는 상당히 저돌적인 자세의 울프우드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가늠하느라 일주일이나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의외로 그 쪽에서 먼저 다가오는 일은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밧슈도 신경을 풀었지만, 때가 되자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는 또 어쩐 이유로 울프우드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나. 애석하게도 이 의문은 두 달째 풀리지 않은 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오늘도 의문의 답을 찾던 밧슈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거실 벽의 시계를 올려다본다. 시곗바늘은 이제 명실상부하게 11을 가리키고 있다. 밧슈는 울프우드가 어제도, 그저께도, 또 엊그저께도 이와 비슷한 시간에 돌아온 것을 기억해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 집에서 요리는 대체로 울프우드의 몫이다. 어려서부터 제 끼니를 스스로 해결해온 울프우드는 요리라는 행위 자체를 편안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늦게 돌아온 사람에게 직접 저녁을 요리해먹으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밧슈가 비장한 얼굴로 앞치마를 집어 들며 부엌에 선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오랜만에 에이프런 보이가 나설 때인가…….”

 

달칵.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가 경쾌하다. 기세 좋게 냉장고를 연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결과까지 좋지는 않다. 냉랭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냉장고에는 얼마 안 남은 달걀과 말라비틀어지기 직전인 만가닥버섯,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는 우유와 밧슈가 저녁에 빵에 바르고 남은 버터가 각각 한 통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서늘한 곳에 보관해둔 식재료 상자를 탈탈 털어봐도 항상 구비해두는 당근이며 감자, 양파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뿔싸! 밧슈가 허리를 짚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그러고 보니 최근 둘 다 너무 바빴던 나머지 이 주가 넘도록 장을 보러 가지 못한 것을 그제야 생각해낸다.

정오에 전화가 걸려온 걸 고려했을 때 울프우드는 점심시간을 맞아 겨우 담배를 피우러 나오며 겸사겸사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울프우드는 일이 급할 때면 쉽게 끼니를 거르는 나쁜 버릇이 있어 밧슈가 억지로라도 회사에서 끌고 나와 꼭 저녁을 먹이고 돌려보내곤 했는데, 오늘도 점심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시간이 이렇게 늦어지니 식당은 전부 문을 닫았겠고 울프우드는 기껏해야 편의점 도시락이나 사갖고 돌아올 텐데. 밧슈는 지친 울프우드에게 전자레인지에 데운 도시락 대신 따뜻한 요리를 먹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뭐라도 요리해서 그를 먹여야 한다. 뜨끈한 각오가 밧슈의 눈가에 어린다. 있는 식재료를 죄다 꺼내놓고 딱 알맞은 쓰임새를 스스로 털어놓도록 노려보던 세이브렘 형사의 귀에 열쇠로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동거인이라는 사람은 어째서 그동안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다가 뭣 좀 하려고 하면 그제야 돌아오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밧슈는 그런 걸 고민할 틈이 없다. 겨우 집에 돌아왔는데 맞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슬퍼하겠지. 그 일념으로 현관까지 달려간다. 절대 아직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걸 숨기려고 이러는 게 아니다. 절대로.

현관까지 한달음에 달려가자 두 눈 아래가 퀭한 울프우드가 느릿한 움직임으로 구두를 벗고 있다. 역시나 손에는 편의점 비닐 봉투를 든 채다. 밧슈가 가방과 함께 봉투를 얼른 건네받는다. 봉투가 생각했던 것보다 가볍다는 점에서 불안이 싹을 틔운다.

 

“왔구나! 좀 괜찮아? 피곤하진 않고?”

“괜찮다. 내 늦는 게 어디 하루이틀이가.”

 

짧은 대답이 밧슈를 더욱 초조하게 만든다. 흐느적거리는 그의 동거인은 지칠 대로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피곤하지? 얼른 씻자. 내가 온수 틀어놨어.”

“됐다, 그냥 잠이나 잘란다. 음……. 냄새는 안 난다만 싫으면 내는 그냥 거실 소파에서 자고.”

“무~~~슨 소리야! 자자, 욕실로 들어가. 너 지금 지쳐서 그래. 그러고 나서 천천히 생각하자.”

“어, 어어, 빗자루 니 와 이라노. 내 됐다니까…….”

 

밧슈가 드러누울 수만 있다면 바닥에서라도 잘 것 같은 울프우드를 억지로 욕실에 밀어 넣는다. 울프우드는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순순히 욕실로 밀려들어간다. 너무 피곤해서 저항하는 것 자체가 고역인 모양이다. 욕실에 들어간 울프우드가 잠시 뒤 고개만 내밀고 말한다.

 

“거 니 도넛 있다. 같이 있는 건 내일 내 아침이니까 냉장고에 넣어도.”

“내일 아침이라니, 설마 이 주먹밥 말이야? 이, 일단 씻고 나와, 응!”

 

어째 가볍다 싶더니 봉투 안에 든 것이라곤 편의점에서 파는 도넛 한 상자와 주먹밥 세 개가 전부다. 이건 아주 좋지 않은 전개다. 점심을 걸렀으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설마하니 저녁도 거를 줄이야. 이래서는 안 된다. 먹여야 한다. 씻기고 잘 먹인 다음에 코야코야 재워야 한다. 밧슈는 어떤 거대한 사명감이 식은땀처럼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걸 느낀다. 어찌됐던 울프우드가 씻고 나올 때까지 그럭저럭 괜찮은 식사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밧슈는 마치 개선하는 장군처럼 비장하게 주먹을 쥐고 부엌에 선 것이다.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초능력을 발휘한다고들 한다. 아이가 소형 트럭 아래 깔릴 위기에 처하자 트럭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린 어머니 일화가 유명하지 않은가. 그와 비슷하게, 밧슈의 두뇌가 슈퍼컴퓨터의 그것처럼 풀로 가동해 지금 있는 식재료로 최선의 메뉴를 궁리해낸다. 궁리 끝에 밧슈가 꺼내든 것은 바로 커다란 스테인리스 볼이다.

 

스테인리스 볼에 달걀을 무려 세 개나 까 넣되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한다. 점성 있는 흰자를 거품기로 빠르고 세게 휘저으면 오래지 않아 거품이 올라온다. 오래 알고 지낸 두 사람이지만 지금도 종종 울프우드는 섬세하게 잘 생긴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밧슈의 악력에 놀라곤 한다. 달걀흰자로 낸 거품이 더 이상 투명하지 않게 되면 분리해둔 노른자와 함께 잘게 다진 당근과 감자, 양파를 함께 넣어 잘 풀어준다. 이 과정이 쉬워 보여도 달걀물이 곤죽이 되지 않게끔 적절한 힘 조절이 필요하다.

달걀이 고르게 풀어지고 재료가 잘 섞여들면 넓적한 팬을 꺼내 센 불에 달군다. 적당히 달궈진 팬에 남은 버터를 몽땅 털어 넣으면 고소한 향기가 부엌 전체를 감돈다. 밧슈는 부디 울프우드가 내친 김에 좋아하는 입욕제를 풀었기를, 이 버터향이 욕실에 있는 그에게 닿지 않기를 간절히 빈다. 버터가 다 녹고 팬이 버터로 코팅되면 달걀물을 일시에 팬 위로 투하한다. 팬의 코팅이 벗겨지지 않도록 끝이 뭉툭한 튀김용 젓가락으로 빠르게 달걀물을 저어준다. 이것만으로도 폭신폭신한 스크램블드에그가 완성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식감 좋은 달걀이 몽글몽글하게 덩어리져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팬을 가볍게 흔들어 다져넣은 채소가 골고루 위치하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달걀이 어느 정도 덩어리를 이루지만 아직 다 구워지지 않은 지금, 바로 지금이 마지막 재료가 들어가는 차례다. 여열로도 쉽게 익는 버섯의 향을 유지하려면 바로 지금이다. 가늘게 찢은 만가닥버섯을 달걀물 위로 뿌린다. 요리에 심취한 밧슈의 모습이 마치 피자라도 굽는 것 같다.

자, 이제 정말로 심혈을 기울일 시간이다. 밧슈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또 내쉬더니 팬을 들어올린다. 호잇! 하는 소리를 내며 팬을 쥔 손목을 가볍게 통 치자 잘 구워지고 있던 달걀 덩어리가 허공에 떠올라 다시 팬에 안착한다. 그 형태는 달걀물을 처음 팬에 둘렀을 때처럼 납작하지 않고 반이 접힌 입체적인 모양이다. 밧슈가 제법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몇 번이고 통 통 통 손목을 쳐가며 달걀을 띄우고 굴리기를 반복한다. 그걸 네다섯 번 반복하다보면 달걀이 예쁜 원추형으로 모양 잡힌다. 모든 면에 버터를 입히고 그것들이 고르게 구워져 황금색을 띠면, 짜잔! 근사한 오믈렛이 완성된다.

요리 전반이라면 어떨지 몰라도 양식이라면 울프우드만큼, 특정 메뉴에 있어서는 울프우드보다 더 자신 있는 밧슈다. 따지자면 저녁-정확히는 야식이 되겠지만- 식사보다는 아침 식사로 더 어울릴 메뉴이지만 어떻게든 지금 당장 따뜻한 밥을 먹여주고픈 것이 그의 마음이다. 밧슈가 완성된 오믈렛을 오목한 긴 접시에 담아내고 찬장을 이 잡듯 뒤져 겨우 찾아낸 파슬리를 뿌리자 욕실 문이 열리고 울프우드가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채 비척비척 걸어 나온다. 그리고는 번뜩 고개를 들고 코를 킁킁거린다. 밧슈가 뿌듯한 얼굴로 울프우드의 손을 잡고 식탁으로 끌고 오다시피 해서는 의자에 앉힌다. 그걸 굳이 뿌리치지 않는 울프우드도 참 울프우드다.

 

“너 이게 대체 무슨…….”

“뭐긴 뭐야, 네 저녁 식사지. 아직 밥 안 먹었지? 자자, 식기 전에 어서 들어.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을 것 같아서 참고로 말해주자면, 내가 너를 어디 하루이틀 보겠어?”

 

방금 한 말을 고대로 돌려주는 걸 보면 꽤나 마음에 두었나 보다, 울프우드는 그리 생각하며 숟가락을 들고 오믈렛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향긋한 버터 향을 솔솔 풍기며 예쁜 황금색으로, 또 완벽한 모양으로 갓 구워진 오믈렛은 편의점에서 사 온 팔다 남은 오므라이스와는 궤가 다르다. 울프우드는 어째서인지 그 모양을 망치기 싫었으나……. 그 이상으로 배가 고팠던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다.

 

머뭇거리며 한 입을 크게 떠먹은 울프우드가 말이 없다. 밧슈가 아무리 “어때, 맛있어? 입에 맞아?” 하고 물어봐도 묵묵부답으로 오믈렛을 내려다볼 뿐이다. 그리고 또 한 입을 크게 떠먹는다. 한 입, 또 한 입. 밧슈는 말이 없는 동거인의 상태가 신경 쓰여 울프우드를 면밀히 관찰했지만 곧 마음을 놓는다. 노곤노곤하게 몽롱한 표정으로 오믈렛을 떠먹는 울프우드의 손이 점점 빨라진 것이다. 목욕을 하고 나오고서도 파리하게 질려있던 울프우드의 뺨에 점점 핏기가 돌아 발그레한 색이 난다. 눈에 겨우 빛이 어리고 오믈렛을 우물거리는 입에도 속도가 붙는다. 그렇게 유독 조용한 식사 시간이 이어진다.

 

오믈렛을 부스러기 한 점 남기지 않고 다 먹은 울프우드가 밧슈가 건네준 물을 마신다. 빈 컵을 두 손으로 쥐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린 울프우드는 여즉 말이 없다. 그런 울프우드에게 더없이 기쁜 표정의 밧슈가 살갑게 말을 붙인다.

 

“다 먹었네.”

“어.”

“한 입도 안 남기고 다 먹었어.”

“그러게.”

“맛있었어?”

 

짧은 침묵. 그리고 간결한 대답.

 

“기뻤어.”

 

이어진 울프우드의 대답에 턱을 괴고 싱글벙글 그를 바라보던 밧슈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울프우드는 여전히 시선을 빈 그릇에 고정한 채 말을 이어나간다.

차분히, 조용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니도 알겠지만 내는 퇴근이 늦은 편이다. 혼자 사니까 돌아와도 집에 불이 꺼져 있고. 내가 요리를 한다는 건 괜히 청승맞게 굴기 싫어서도 있다. 시커멓게 다 큰 남자가 혼자 살면서 궁상맞게 남은 밥이나 먹고 있으면 무슨 꼴이고 그게.”

 

울프우드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톡 떨어져 그의 뺨을 타고 흐른다. 그 모습은 흡사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그럴 리 없는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울프우드의 말이 이어진다. 그런 것쯤은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요리를 하면 불을 쓰고, 칼을 쓰제. 주방 조명은 따뜻한 색이고. 그 빛과 온기와 소리 사이에 서 있으면 ‘아, 내가 오늘도 하루를 보냈다’ 싶데. 니 알고 있나? 사실 내는 예나 지금이나 사실 불 조절이 어려워가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금방 태워버리거든. 그러니 쓸데없이 잡생각에 잡아먹힐 일도 없고 좋은 기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나?”

 

그리 말하며 드디어 고개를 든 울프우드의 얼굴에는,

몹시도 작고 고요해 거의 알아보기 힘든, 그러나 밧슈로서는 알아보지 않을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다.

 

“고맙다, 빗자루. 맛있었다. 그리고 기다려줘서 기뻤다.”

 

잠시간, 아주 잠시간.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흐른 것도 같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적막을 몹시도 달가이 받아들인다. 말을 통하지 않은 어떤 암시가 무리를 이루어 두 사람의 발치에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조잘거린다. 지금이야, 바로 지금이야, 망설이지 마! 적막 사이를 채운 것은 고작 아날로그 시계의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뿐이건만 어쩐지 잔소리를 듣는 것처럼 귀가 간지러운 두 사람이다.

달콤한 사탕을 와작 깨물어 씹은 듯 밧슈의 입속이 달다. 이런 말들에 무어라 대답할 수 있을까. 밧슈는 성급하게 입을 여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티슈로 울프우드의 입가에 묻은 버터를 닦아준다. 울프우드 역시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임이란 분명 무언가를 느낀 거겠지.

다정히, 조심스럽게, 그리고 상냥하게.

 

“있지, 울프우드. 나 뭐 하나 말해도 돼?”

“어디 들어나 줄까.”

“조금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몰라.”

“그건 어쩔 수 없지. 니 말 많은 것도 하루이틀이 아니니까.”

 

주고받는 대화 끝에 식탁 위로 작은 웃음소리가 섞인다. 밧슈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나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자는 거 좋아해. 그 온기에 안심되거든. 자고 일어나서도 누군가와 함께라는 건 정말 기쁜 일이야. 그렇지? 집안일 나누는 것도 좋아해. 사실 나 청소 되게 못하거든. 그냥 빨래만 하고 싶어. 내가 청소 당번인 다음날은 네가 처음부터 싹 다시 청소하는 거 모를 줄 알았지? 장 볼 때 둘이서 가면 재밌어. 놀러 가는 기분이야. 그리고 말이야, 이건 비밀인데, 내가 사자고 했던 그 바디워시 향이 너무 별로더라. 다음에는 네가 사려고 했던 걸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슬슬 여름 이불 사야 하지? 그럼 이번에는 네 취향에 맡길게. 어쩐지 네가 고르는 이불이면 내 마음에도 쏙 들 것 같아. 아, 커튼도 바꾸자. 암막 커튼으로. 넌 어차피 알람 소리 잘 듣잖아. 주말 정도는 한껏 게으름 부리며 푹 자는 게 좋을 것 같아. 구두도 한 켤레 새로 살까? 나도 새 것 하나 필요하던 참이었거든. 이참에 둘이서 맞추러 가도 좋겠다. 나이가 추천해주는 제화점은 비싸지만 질이 좋더라고. 아,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런 거 하나쯤은 있는 게 좋다니까. 응. 그게 좋겠다. 그리고 다음에는 정장도 한 벌 새로 맞추는 거야. 너 마중 나갈 때마다 잘 생각해봤는데 지금 입는 거 역시 낡은 것 같아. 승진한 지 얼마 안 됐잖아. 그 정도는 괜찮아. 또 뭘 할까. 우리 또 뭘 하면 좋을까, 울프우드.”

 

정제된 언어는 한참을 생각해온 것이 분명하다. 가만히 들어주던 울프우드가 피곤하되 웃음과 기쁨과 또 다른 무언가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일갈한다.

 

“바보야, 그거 다 하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 건데.”

“그, 그건 상관없어! 나 열심히 벌 예정이거든. 그러는 너도 당분간 일 쉴 생각 없잖아.”

 

밧슈의 얼굴이 새빨개진 것은 비단 울프우드의 말 때문만은 아닐 테다. 밧슈는 이제 울프우드의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본다. 울프우드가 오믈렛을 내려다보던 것처럼 가만히, 가만히. 그리고 나직하게 울프우드의 이름을 부른다. “있잖아, 울프우드.” 그러면 울프우드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내가 네 말을 듣고 있다고 대답하듯이.

 

“나는 너랑 하고 싶은 게 참 많아.”

“그리고 너도 나랑 하고 싶은 게 많았으면 좋겠어.”

“나의 일상에 네가 녹아든 것처럼 너의 일상에도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밧슈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을 끝맺는다.

 

“너의 일상을 내가 갖고 싶어. 나만 갖고 싶어.”

 

울프우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밧슈를 바라본다. 얼굴처럼 벌개진 귀 끝부터 꾹 다물린 얇은 입술, 긴 속눈썹과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맑고 푸른 눈동자. 얼굴 곳곳을 찬찬히 뜯어본 울프우드가 식탁 위에 놓인 담배와 라이터를 들어 한 개비 꼬나물고 불을 붙인다. 한 모금 크게 들이쉬고, 연기를 내뱉는다. 그 모습은 처음부터 끝까지 끝부터 처음까지 밧슈가 그랬던 것처럼 울프우드 역시 닮아 있었으며 그 사실은 밧슈도 울프우드도 알지 못한 채 서로가 서로의 말과 행동을 되풀이하듯 반복하는 것은 기실 서로를 얼마나 깊이 관찰해왔는지 그리고 서로에게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지를 반영하는데 그래서 지금 울프우드의 상태를 서술하자면

 

“내를 연인의 날에 편의점 도넛이나 주는 사람으로 만들면 어쩌는데.”

 

밧슈만큼이나, 또는 밧슈 이상으로 얼굴이 붉어진 고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아아, 明轉.

 

이후로 밧슈가 그를 동거인이 아닌 애인으로서 상념에 그리게 된 것은 전혀 비밀스럽지 않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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