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건

길짐승을 함부로 집에 들이지 마시오


스탬 WV 현대AU 

고등학생 울프우드 × 카페 사장 밧슈


* 현대인데 묘하게 한국 같음 당연함 나는 한국인임

* 사투리를 잘 몰라 울프우드가 표준어를 사용합니다

* 나이브스가 간접등장(?)합니다….

* 초반 몽정 묘사가 있으나 정말 절대로 전혀 굉장히 야하지 않습니다 

* 여러모로 주의!!!



🍩



밧슈의 집은 꽤 넓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다. 

때문에 니콜라스는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그가 아는 밧슈의 아기자기한 성정을 생각하면 실내 인테리어에도 꽤 공을 쓸 것 같았는데, 막상 현관을 넘으니 보인 건 휑뎅그렁한 집안 뿐이어서. 기본적인 가구들은 있지만 그게 다였다. 소파, 낮은 서랍, 테이블과 냉장고……. 사용감은 한 톨도 묻어나지 않는 주제에 강박적으로 정리된 모습이 도리어 기묘하게 느껴질 정도다. 

니콜라스의 기색을 눈치챈 밧슈가 바보처럼 헤실댔다. 약간의 미안함이 묻어나는 게 꼭 무언가를 무마하려는 듯한 목소리였다. 

“에헤헤, 미안해. 형이 늘 멋대로 청소해두거든…….”

“아무 말도 안 했거든요?”

“알아, 알아.”

알긴 뭘 안단 말인가. 니콜라스는 작게 혀를 찼다. 그 소리에 또 밧슈가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웃는다. 마냥 천진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속이 끓는 건 오로지 니콜라스 뿐이다. 짜증나기 그지없는 루프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완전히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그친 줄 알았던 장대비가 멘션 어귀에서부터 시원하게 쏟아진 탓이다. 가뜩이나 짐도 많은데 팔은 세 개라 둘은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고 세찬 빗줄기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니콜라스도 니콜라스이거니와, 밧슈도…….

늘 삐죽거리던 밧슈의 머리칼이 차분하게 젖어있었다. 반듯하고 흰 이마에 달라붙은 금발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곤란함을 담은 채 휘어진다. 

“니콜라스.”

분명 밧슈는 눈 앞에서 웃고 있는데, 목소리는 꼭 귓가에 속삭인 것처럼 크게 울렸다. 적어도 니콜라스에게는 그랬다. 스스로도 모르게 쥔 주먹 아래로 짧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밧슈와 똑같이 젖은 뒷덜미에서 아지랑이처럼 열꽃이 피어 심장께를 덮고 아랫배에 고인다. 뭐라고 대꾸라도 해야할 것 같은데, 니콜라스는 목소리를 내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그저 멍하니 밧슈만 바라보았다. 어지러웠다. 

밧슈는 낑낑대며 니트를 벗었다. 잔뜩 젖어 무거워진 니트가 바닥에 툭 떨어졌을 때, 우습게도 니콜라스의 심장도 함께 쿵, 떨어지고 말았다. 휴우, 숨돌리는 소리에 맞춰 고개를 든 밧슈의 목선을 타고 채 닦이지 않은 빗방울이 흘러내린다. 니콜라스의 시선도 따라 흘러내렸다. 누가 시선을 그 빗방울에 못박아 놓은 것마냥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가 너무 내린 탓에 밧슈는 한 겹 벗었어도 여전히 젖은 채였다. 니트 안에 받쳐입었던 흰 셔츠가 밧슈의 몸에 인정사정없이 달라붙는다. 니콜라스의 시선은 어느새 밧슈의 날갯죽지 아래로 떨어졌다. 바깥에는 비가 멈출 생각을 않았고, 둘밖에 없는 집은 어두컴컴했다. 들이치는 달빛 아래, 젖은 옷가지로 몸을 겨우 감싼 밧슈는 니콜라스에게서 뒤돌아 서있었다. 얇은 천 아래로 드러난 곧은 등과 탄탄한 허리, 뽀얀 살결과 대비되는 흉측한 상흔들이 차례차례 니콜라스의 눈에 와 박힌다. 한 쪽밖에 없는 팔로 어정쩡하게 가리려는 몸짓이나, 상처들을 보이는 게 다소 민망한 듯한 눈짓까지도.

그건 마치― 수업자료에서나 보았던 부식된 천사상 같았다. 희고 아름답게 세공되었으나 인간의 산성비를 이기지 못해 여기저기 바래고 상처 입은. 

그럼에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툭, 툭 단추를 푸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다음 순간, 밧슈가 니콜라스를 돌아보았다. 

“저기, 나 팔이 이래서…….”

벗는 것 좀 도와주지 않을래?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는 눈가가 붉었다. 아마 비를 맞았기 때문일 거라고, 니콜라스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래, 빗 속에 있다 와서 저렇게 열이 오른 것이라고. 젖은 볼도, 셔츠 끝에 걸린 손가락도, 입술이나 똑바르게 떨어지는 어깨가 불그스름한 것도 다― 

생각이 점점 익숙한 방향으로 튀었다. 합리화와 납득의 어드메 즈음에서, 니콜라스는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외면하고 있었다. 입 밖으로 고함 대신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이를 악 물 정도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생각도 조심성도 모자란 사람에게 기꺼이 그 두 가지를 때려박아줄 것 같았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러다, 별안간, 밧슈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와 니콜라스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달큰한 미소다. 

그 쯤 되니 참는 스스로가 바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미 니콜라스는 패배자였다. 

“미안해.”

응? 

그 소극적인 도움 요청에 불가항력으로 손을 뻗은 순간, 


“아.”


니콜라스는 비로소 잠에서 깨어났다. 


🍩



열 아홉이 된 니콜라스에게 있어, 주기적으로 찾아와 꿈자리와 이부자리 전부를 뒤집어 엎고 사라지는 밧슈는 이제 이슈조차도 아니었다. 그 날, 비가 기록적으로 쏟아졌던 가을날, 어영부영 밧슈의 집에 들렀던 이후로 니콜라스는 종종 밧슈의 꿈을 꿨다. 주제는 늘 기억의 되새김질이었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상황, 똑같이 사랑스러운 인물과 똑같은 상처의 배치. 그리고 똑같은 감정까지. 처음에는 놀라다 못해 세상이 저주스러워서 카페에 일주일 정도 못 갔었는데……. 인간더러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제 니콜라스는 눈 감고도 그의 상처를 어림할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지같았다. 

“일찍 일어났네.”

“뭐…….”

“오늘도 가? 카페.”

“가야지 그럼 안 가냐.”

아침 운동을 하고 온 리비오는 다 젖은 수건을 목에 대충 걸고 있었다. 가뜩이나 꾸고 싶지 않은 꿈을 꾼 니콜라스는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배알이 다 뒤틀렸다. 진짜, 아무런 연관점도 없고 그냥 축축해졌다는 것 하나만 같은데도! 듬직하지만 성질 더러운 형의 미간이 한데 모이는 걸 본 리비오는 슬금슬금 그에게서 물러섰다. 근 일 년 간의 경험으로 다져진 생존본능이다. 

“어, 어어…… 몇 시 쯤에 와?”

“몰라.”

“그으래애…….” 

늦게 오면 아주머니한테는 전화 한 번만 해드려. 걱정하시더라! 그 말을 끝으로 리비오는 후다닥 사라졌다. 니콜라스만 아침 햇살이 비추는 복도에 덩그러니 남았다. 아직 다른 아이들이 깨어나기엔 이른 시간이라 보육원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부러 햇살을 피해 그림자를 비집고 큰 몸을 숨겼다. 이럴 때 맞는 햇빛은 따사로운 만큼 사람을 초라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탓이다. 


🍩



니콜라스가 열 아홉이 되며 바뀐 것들이 몇 개 있었다. 

“아, 어서 와~ 오늘 날씨 좋지!”

“예, 뭐.”

저녁이 되어도 따뜻할 거래. 밧슈의 천진한 이야기에 예에, 속으로만 대충 대답한 니콜라스는 모르는 척 블라인드를 걷어냈다. 창 옆에 조로록 놓아둔 제라늄들이 하얀 햇살을 받고 반짝반짝 빛났다. 

바뀐 것 중 하나는, 니콜라스가 정식으로 카페 제라늄의 알바생이 되었다는 것. 

그래봤자 정해진 근무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는 일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미안하다는 밧슈의 사정 아닌 사정에 니콜라스가 무참히 침몰한 결과였다. 사실 꽤 좋았다. 밧슈는 여타 다른 사장들처럼 니콜라스를 홀대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뿐더러 시급도 두둑히 챙겨주었기 때문에. 

오늘은 모처럼의 휴일이었다. 카페 제라늄 또한 평소보다 느지막히 문을 열었다. 둘이 손을 맞추니 오픈 준비는 금세 끝났고, 니콜라스는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창가의 테이블에 자리잡았다. 밧슈가 말했던 대로 날씨 하나는 끝내주게 좋았다. 찬란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휴일이라 더욱 한산한 거리는 평소와는 다른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 이유 없이 모든 게 막막하기만 한 건 분명 니콜라스만의 감정이리라. 생각이 꼭 녹아 눌러붙은 사탕처럼 이리저리 늘어진다. 더 이어지기 전에 잘라내려는 순간, 밧슈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쉬는 날인데 불러서 미안해.”

“저 오늘 알반데요.”

“그래도.”

배시시 웃는 낯을 가만히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그 햇살처럼 빛나는 얼굴보다 차라리 정면으로 햇볕 맞기를 택했다. 이 편이 눈이 부시단 핑계가 더 잘 먹힐테니까. 꾹 감은 눈꺼풀 안쪽이 온통 붉었다. 지금도 문가에서 살랑이는 붉은 제라늄처럼. 니콜라스가 무슨 소용돌이 속에 있든 알 길 없는 밧슈는 계속해서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애들은 잘 지내? 저번에 가져간 파운드 케이크 있잖아, 아주머니가 마음에 들어하셨음 했는데 어땠어?”

“괜찮다던데요. 애들도, 뭐…… 잘 지내요.”

“그렇구나아~ 너, 너는 요즘 어때?”

“예?”

또 뭐라는 거야, 이 망할 인간이? 퍼뜩 눈을 뜬 니콜라스가 밧슈를 매섭게 쏘아본다. 그 흉흉한 얼굴에 화들짝 놀란 밧슈는 오해 말라는 듯 쩔쩔매며 두 손을 내저었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가 마냥 무구해보여서 니콜라스의 미간만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너는 널 드러내는 걸 좀 꺼리니까, 으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묻게 된다고 해야하나…….”

“…….”

“……무, 물론 내가 못미더운 건 알지만!”

그래도 말이지, 아무래도 우린 자주 보잖아? 늘 보다보면 궁금하고, 걱정도 되고, 괜히 신경도 쓰이고, 네가 잘 지냈으면 하고 바라게 되고……. 그러다 내가 널 위해,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아서……. 

밧슈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듣다 못한 니콜라스는 그냥…… 그냥, 조용히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내가 또 말을 잘못했냐고 굳이 물어오는 밧슈는 애써 무시했다. 대꾸가 없으니 또 혼자 주눅이 들어 상상의 어쩌구를 펼치고 있겠지만, 니콜라스의 심란함에 비하면 별 거 아닐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바뀐 것들 중 하나다. 니콜라스가 드디어, 그의 널을 뛰는 감정에 이름표를 붙였다는 것. 

사실 잊을 만 하면 팬티 하나씩은 꼭 손빨래하게 만드는 상황에 안 붙이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여하간에, 막상 인정하고나니 별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니콜라스는 도리어 가벼운 탈력감을 느꼈다. 그대로 김이 새버렸으면 좋았을텐데, 그렇게 끝날 감정이었다면 애초에 이름 붙이지도 않았을 것을 니콜라스는 잘 알고 있었다. 

밧슈는 어느 순간부터 아주 조금 누그러진 니콜라스의 태도에 굉장히 감명받은 듯 했다. 이유야 당연히 모르고, 그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게 훤히 보였다. 니콜라스로 말할 것 같으면, 그냥 어이가 없었다. 뭐가 그렇게 좋냐고 꼬치꼬치 캐물으려다 입 안만 씹는 건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니콜라스는 밧슈가, 그보다 몇 살은 어릴 (사실 니콜라스는 아직까지도 밧슈가 정확히 몇 살인지 몰랐다.) 소년에게 마음 한 자락을 내어줄 것처럼 대하는 게 좋으면서도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니콜라스의 원인은 밧슈 하나인데, 밧슈의 다정함은 도통 사람을 가리지 않아서.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어떻게 니콜라스만의 잘못이겠냐는 거다.

작년 가을 그에게 먼저 손을 뻗은 건 다름 아닌 밧슈였는데! 

하……. 한숨을 삼킨 니콜라스는 슬쩍 밧슈를 곁눈질했다. 아니나다를까, 나잇값 못하는 성인 남성 하나가 축 늘어진 눈망울로 이쪽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게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면 순간 동그래졌다가, 멋쩍은 듯 눈꼬리를 접어 웃는다. 밧슈가 이럴 때마다 니콜라스는 종종 합리적인 의심에 시달렸다. 이 미친 어른, 사실은 다 알고 있는 거 아냐? 저럴 거면 왜 매번 이렇게 구는 거지. 홧병으로 뒤지라는 건가.

“잘 지내요.”

“그, 그래? 다행이네……. 근데 혹시,”

“화났냐고 좀 물어보지 말고요. 들으면 화날 것 같으니까.”

“알았어! 안 물어볼게!”

정말 있는 힘을 다해 안 물어볼 기세라 오히려 더 열이 뻗쳤다. 아오, 차라리 리비오나 다른 애였으면 머리통을 후리고도 남았을텐데! 결국 니콜라스는 참았던 한숨을 대차게 내쉬었다. 대놓고 짜증난 티를 내는데도 밧슈는 아랑곳않고 언제나처럼 기쁨을 가득 담아 웃는다. 그렇다면 다행이라면서. 여전히 카페 문가에 조로록 늘어놓은 화분들은 하늘하늘 춤을 추었고, 밧슈는 꼭 햇빛을 머금은 제라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아, 젠장. 니콜라스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일단 날씨가 좋아서 다행인 건 알겠네, 옘병…….

딸랑, 타이밍 좋게 도어벨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활기찬 인사와 함께 밧슈가 먼저 일어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휘적휘적 걸어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커피 제조는 니콜라스의 역할이었다. 


🍩



사실, 카페 일은 예상 외로 즐거웠다. 밧슈의 뒤치다꺼리(를 빙자한 애보기)에도 슬슬 익숙해지고, 커피 맛이 좋아졌다는 단골들의 칭찬 하나하나에 민들레 솜털마냥 풀어지는 밧슈를 바라보는 것도, 간간히 니콜라스가 있어 다행이라는 말을 듣는 것도 은근히 기분 좋았다. 스스로 돈을 벌어야겠다 다짐한 이래 가장 풍족한 지갑 사정도, 알바생 사정을 심히 잘 봐주는 사장 덕에 공부를 놓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도. 

그럼에도 니콜라스는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전화 한 통만요.”

“응, 다녀와~”

한차례 손님들이 빠져나가 한가한 시간대였다. 낮까지 높게 떠있던 해도 어느덧 주홍빛을 머금고 서서히 기울어질 즈음. 니콜라스는 대략 이 시간마다 전화를 하러 슬그머니 사라지곤 했다. 밧슈는 굳이 말하고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몇 번이고 얘기했지만, 알겠다고 하면서 늘 통보하듯 말하고 마는 건 니콜라스 나름의 선긋기임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 특별한 일은? 

“……딱히.”

- 저번처럼 이상한 사람은 있었나?

“아뇨.”

전화기 너머 상대의 목소리는 대단히 사무적이었다. 차라리 이 편이 더 대하기는 쉬웠다. 서로간의 패가 명확하니 가릴 것도, 깊이 생각할 것도 없지 않은가. 통화를 이어가는 니콜라스의 목소리 또한 고저없이 가라앉았다. 말은 거침없는 와중에도 목구멍에 꼭 무언가가 걸린 것처럼 꺼끌거렸다. 니콜라스에게는 어찌할 방도 없는 짝사랑, 그의 밤을 훼방놓는 밧슈만큼이나 익숙한 무력감이다. 

마지막으로 바뀐 게 이거였다. 니콜라스가 밧슈 몰래 시작한 겸업. 

정확히 말하자면, 시작하도록 강요당한 겸업이다. 

밧슈는 늘 ‘네가 걱정 돼, 너를 알고 싶어’라는 말을 책임감 없이 지껄였지만, 까놓고 보자면 밧슈 또한 스스로를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다.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스가 밧슈에 대해 아는 게 이름과 연락처 뿐인 현실이 그 증거였다. 그러니 밧슈는 아마, 니콜라스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니콜라스는 그의 생각보다 더 그의 가족관계에 대해, 특별히― 그의 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쓸모없는 겸업 또한 그것의 연장선이었다. 

밧슈에게 ‘아 알았어요 알바 할게요’ 하고 역정을 낸 후 황급히 보육원으로 도망쳤던 어느 날, 니콜라스를 반긴 건 멜라니 아주머니나 다른 아이들이 아니라 으리으리한 정장차림의 웬 푸른머리 남자였다. 자신을 레가토라고 소개한 그는 ‘내 주인이자 밧슈의 형 되시는 분께서 이 보육원을 후원해주시려고 한다’며 대뜸 핸드폰 하나를 내밀었다. 

편히 이야기하라며 아주머니가 비워준 원장실에는 단 둘 뿐이었다. 그 사이 어떠한 욕설이나 불쾌한 언사도 오가지 않았지만, 니콜라스는 기민하게 그것이 협박의 일종임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왜 그 날 밧슈가 웃으며 말을 돌렸는지도. 왜 그 웃음에 평소와는 다른 수심이 스몄는지까지. 

마음 같아서는 어린 애 붙들고 이딴 협박을 하면 느이 주인이 즐겁다시냐, 딴 데 가서 알아봐라, 하며 잔뜩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니콜라스는 어리면서 어리지 못했고, 밧슈의 형이라는 사람은 그와는 완벽히 정반대인 인간 같았으며, 보육원엔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레가토는 재촉하지 않았다. 어차피 길은 하나 뿐이니까.

전화는 늘 금방 끊겼다. 할 말이 많은 것도 아니거니와, 애초에 레가토는 밧슈를 그리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 일을 맡은 데에도 그의 의지는 딱히 들어있지 않으리라고 니콜라스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럼에도 레가토가 이 보고를 하루도 빼먹지 않는 건 그 형이라는 사람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내가 이걸 하루도 빼먹지 않는 이유는 뭘까. 분명 핸드폰을 처음 쥘 때는 머릿속에 보육원만 가득했는데, 막상 보고가 끝나면 미처 말하지 못한, 혹은 영영 못할 말들이 입 안에 텁텁하게 남았다. 누구에게도 꺼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더더욱 혀 끝이 씁쓸했다. 

가령 이런 말들이다. 오늘, 첫 손님에게 좋은 하루 되길 바란다며 웃어주던 밧슈의 입꼬리가 야속했다던가. 자기에게 헤드락을 걸고 뻥뻥 차대는 꼬마애들에게까지 사탕을 건네는 손 끝이 이유도 모르고 간지러웠다던가. 니콜라스가 만든 커피를 거절하며 한다는 말이 ‘네 커피는 맛있어서 잠이 못 들 정도로 마시게 되니 곤란하다’ 따위였다던가. 그 말을 듣고 또 머저리처럼 설렜다던가 하는. 

결국 니콜라스는 카페 건물을 등진 채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지금 가봤자 밧슈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어차피 늦어도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을 테다. 해봤자 또 사람 속이 뒤집어지도록 예쁘게 웃는 게 다일 것 아닌가. 들어가서 괜히 유치한 화풀이나 할 바엔 머리라도 좀 식히는 게 백 번 낫다, 싶었다. 

 주변을 맴도는 공기는 밧슈가 말한대로 따스했지만, 후미진 골목에는 노을 한 점도 닿지 않아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니콜라스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잡생각을 없애기에는 차갑고 무정한 쪽이 훨씬 나았다. 쓸 데 없이 다정하면 신경쓸 것만 늘었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렇게 다정한 이유는 뭔지, 그 때 뻗은 손이나 했던 말의 의미는 뭐였는지,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지, 어디까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등등. 

그러다 보면 결국 다정하지 않을 때를 대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괜히 속내를 보였다가 입을 상처가 오롯이 니콜라스의 책임이 되는 것처럼. 

하지만 밧슈도 무정할 때가 있을까. 무정할 수 있는 인간인가, 그 바보가? 

……아예 잘라낼 속셈이었는데, 어째 머리가 더 복잡해지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새 시간이 꽤 지났는지 니콜라스가 기대고 있던 시멘트 벽도 이미 뜨뜻미지근해졌다. 오래 등을 대고 있었으니 체온이 옮겨가는 것 정도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니콜라스는 순간 분을 이기지 못하고 냅다 벽을 걷어찼다. 퍼억! 꽤 둔탁한 소리가 골목을 울리자 찡한 아픔이 찌르르 정강이를 타고 올랐다. 

“우왓, 괜찮아!?”

잔뜩 놀라 갈라진 목소리 또한.

니콜라스의 눈이 커졌다. 황급히 고개를 드니 골목 초입에 서있는 길쭉한 실루엣이 보였다. 밧슈였다. 니콜라스만큼이나 당황한 얼굴을 한 밧슈는, 노을이 융단처럼 깔린 아스팔트를 후다닥 달려와 니콜라스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걱정 가득한 손길이 니콜라스의 욱한 마음을 사르라니 녹였다. 

“다친 데는 없어? 아프거나 이상한 곳은?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니콜라스?”

“언제부터 있었어요?”

응? 밧슈가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고민하는 듯 하던 시선이 이내 소담스레 접힌다. 니콜라스가 익히 아는 웃음, 흩어질 것처럼 사랑스럽다고 느꼈던 웃음으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니콜라스에게 밧슈가 재차 손을 뻗었다. 

“있지, 날씨도 좋은데 좀 걷지 않을래? 기분도 좀 나아질 거구.”

“…….”

“응?”


🍩


“오늘 날씨 진짜 좋다~ 바람도 선선하고!”

“네…….”

“하늘도 예쁘고!”

“그렇네요.”

저녁바람이 살랑이며 너른 잔디밭을 헤집고 도망간다. 지는 노을에 알맞게 물든 공원은 휴일의 마지막을 보내기 위한 사람들이 간간히 지나다닐 뿐,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밧슈가 웬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챙겨온 도넛 포장을 뜯는 동안, 니콜라스는 감청색이 번진 하늘 끄트머리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시간이 빨리 지나길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상냥하게 다가와서 반대로 신경이 곤두섰다. 한참 미간만 구기고 있으니, 옆에서 말똥거리던 밧슈가 니콜라스를 조심스레 불렀다. 

“아직도 기분이 별로야?”

“……그런 거 아니에요.”

밧슈는 한 입 크게 문 도넛을 우물우물거리더니, 무릎 위로 손을 내렸다. 니콜라스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제스처 같았다. 여전히 밧슈는 니콜라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결국 니콜라스는 또다시 진 기분에 사로잡혔다. 먼 곳을 쏘아보던 시선이 어느새 밧슈에게로 향한다. 그렇게 눈이 마주쳐도, 밧슈는 딱 그가 아는 만큼 맹하고 다정하게 웃어줄 뿐이다. 평소와 같은 웃음 하나하나가 특별히 찬란하게 빛났다. 쓸 데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서, 니콜라스는……. 그래, 속상했다. 

또다시 미숙한 반항심이 고개를 들이밀려는 찰나, 이번엔 밧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억 나? 우리 처음 만난 날 있잖아.”

“아…….”

“그 때도 이렇게 밤이 되기 직전이었는데.”

그렇네요. 또 모난 성격이 다 망칠까봐, 니콜라스는 말도 못 꺼내고 입 안으로만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밧슈의 눈길이 니콜라스를 넘어 넓게 펼쳐진 노을을 가득 담는다. 붉은 빛이 그의 말간 눈동자 위에서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걸, 니콜라스는 은밀히 바라보았다. 

“사실 말야, 처음엔 내가 또 괜히 참견하는 건가, 네가 싫어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고민이 정말 많았거든. 너도 나랑 같이 지내왔으니 알겠지만― 나는 지나치는 걸 잘 못하니까.”

“그래보여요.”

“아하하…… 그래서 네게 늘 고마워.”

“뭔.”

“그냐앙. 부끄럽지만 이렇게 오래 누구랑 알고 지낸 건 처음이어서.”

그야 그렇겠지. 니콜라스는 핸드폰을 넣어둔 주머니가 문득 무겁다고 느꼈다. 레가토가 지금까지 몇 명의 사람들에게 그걸 건네주었을까. 싫어하는 것 치고 꽤나 익숙해 보였으니 아마 한 두번은 아니리라. ……지금까지 계속 반복된 일이었다면, 밧슈는 그걸 알고 있을까. 안다면 그 때마다 무슨 반응을 보였을까. 슬퍼했을까, 체념했을까, 이해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뻗었을까. 

“그래서 네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도, 사실 무지 좋았어.”

“뭐요?”

이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약간 누그러지는 듯 했던 니콜라스의 눈매가 순식간에 뾰족해졌다. 지금 이 미친 빗자루머리 어른이 뭔 말을 하는 거지? 사람 마음을 그렇게, 어? 그렇게 만들어놓고 좋았다고. 누구는 오늘도 축축하고 눅눅한 아랫도리로 하루를 시작했는데 좋았었다고. 

니콜라스의 고뇌가 깊어지는 와중에도 밧슈는 헤헤거리며 말을 이었다. 

“얼렁뚱땅 그렇게 되긴 했지만, 누군가를 초대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거든. 좀 더 준비해서 정식으로 말하고 싶었는데 말야, 그건 좀 아쉬워~”

“…….”

“날씨만 좋았으면 그래도 괜찮았을텐데! 안 그래?”

“……하아.”

“……아, 안 그래……?”

그, 너는 별로였어……? 물론 그 때 내 꼴이 좀 별로긴 했는데. 그래도 저녁은 꽤 맛있지 않, 았나……. 신나게 말하던 밧슈의 목소리가 점점 조그맣게 사그라든다. 이렇게 주눅들 때마다 손가락 끝을 마주 꾹꾹이는 건 진짜 못된 습관이라고, 니콜라스는 짜증스러운 가운데 생각했다. 이번엔 한숨 대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화를 내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이 쯤 되면 그냥 배까고 폭력적인 어리광이나 부리고 싶어진다. 어디까지 받아줄 거냐고 마구 내리치며 묻고 싶어진다. 

자각이 이렇게까지 없을 수 있는 건가. 그도 아니라면 회로가 합선돼서 그쪽으로는 영 생각이 돌아가질 않는 건가. 니콜라스는 욕 대신 입술을 짓씹으며 밧슈에게 가까이 붙었다. 주머니의 핸드폰이 덜그럭거리며 존재를 주장한다. 니콜라스는 그걸 빼서 대충 뒷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있잖아요.”

“어, 어?”

“그러면 오늘 나랑 가요, 당신 집.”

“오, 오, 오늘?”

“초대하고 싶다면서요. 좋았다면서. 가자고요.”

“아니, 그으…….”

너는, 괜찮아……? 그렇게 묻는 밧슈와 니콜라스는 이제 제법 가까이 붙어있었다. 니콜라스의 큰 손이 밧슈의 의수 사이사이로 파고든다. 여러 합금의 조화로 이루어진 인공물인데도 불구하고, 니콜라스는 그 순간 밧슈의 손이 뜨겁다고 느꼈다. 밧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니콜라스는 그 멍청한 질문에 대답해주는 대신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눈 하나 마주친 게 다인데, 밧슈는 시선이 겹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더니만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갈피를 못 잡는 눈가가 살포시 붉었다. 마침 노을이 사그라들고, 언제부턴가 하늘은 남청빛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익숙하냐고.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또 갑자기 싫어요?”

“아니, 아니! 전혀! 그런 거 아냐. 그냥,”

“그럼 왜 그러는데요.”

“그냥…….”

너무 좋아서……? 

스스로 생각해봐도 굉장히 애매모호한 답이었는지, 밧슈는 말해놓고도 쑥쓰러운 듯 웃기만 했다.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은, 눈 앞의 니콜라스 D. 울프우드라는 애는 그런 밧슈의 평소까지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니콜라스의 눈에 비친 밧슈의 모습이 어땠는지, 니콜라스 본인이 말해주기 전까지는 영영 모를 것이라는 것. 

니콜라스는 한참 말이 없었다. 밧슈는 어리숙한 낯으로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떨려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내가 또 말을 잘못했나봐, 어떡하지? 사과를 해야할 것 같은데, 그러면 싫어하잖아……. 화났겠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온전히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하지만 좋은 건 거짓이 아닌데. 뭐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무는 찰나, 그것들을 한 데 묶는 따스한 체온이 도장처럼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렁그렁하던 밧슈의 눈이 커졌다.

“어, 에,”

“왜요.”

“아니, 지금―”

“그래서, 초대 안 해주려고요?”

그제서야 밧슈는 니콜라스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검푸른 밤하늘을 머금은 것처럼 까만 머리칼 사이로 가라앉은 눈동자가 얼핏 비췄다. 마냥 어린 줄 알았는데, 그 안에서는 가로등 빛조차 흔들리지를 않아서 밧슈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어른스러운 무표정 사이로 그나잇대 소년다운 삐쭉함이 간간히 보여서, 밧슈는 니콜라스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안 해주면 그대로 토라질 것 같았다. (토라진다는 말이 니콜라스에게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단어인 건 차치하고.) 

어쩐지 눈가에 붉은 색이 살포시 번져있더라고. 자그맣게 웃음을 터뜨린 밧슈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니콜라스의 턱을 살살 간지럽혔다. 한쪽 눈썹이 휙 올라가자, 웃음이 더더욱 커진다.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니콜라스, 수염 정리 해야겠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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