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건

레터스 투 마이 엔젤


맥시멈 WV

W의 최생 IF


* 사투리를 잘 몰라 울프우드가 표준어를 사용합니다.

* WV인 것 치고 V의 분?량?이?

* 날조와 별 해괴한 설정 다수

* 여러모로 주의


💌


그 편지를 건네받은 건 울프우드가 깨어난지 꼭 3주가 되던 날이었다. 

그간 울프우드는 스스로를 챙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모하나 후회없던 선택, 힘겨웠으나 떳떳했던 싸움. 이유도 모른 채 저린 심장께를 부여잡고 눈을 감았다 뜨니 모든 게 끝나있었다. 병상에서 일어났더니 기억은 군데군데 휘발되어있지를 않나, 시간은 벌써 10년이나 흘렀다지를 않나, 그 사이 울프우드의 몸은 안정되어 오히려 남들보다 수명이 늘어났다는 소리를 다 듣질 않나. 

그리하여 울프우드는 홈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재활을 끝냈다. 무리하면 재활 기간이 더 길어질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조언에도 그는 거침이 없었다. 조급함이 황당함을 앞서는 나날들이었다. 잠깐 눈을 감은 줄로만 알았는데 10년이나 흘렀다니, 그렇다면 고아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멜라니 아주머니와 다른 아이들은? 리비오는? 다들 무사할까? 그리고…….

…….

거기부터의 기억은 백지다. 

그 이전의 기억도, 어쩌면. 

싸그리 날아가 오히려 후련하다는 울프우드의 말을 들은 브래드의 표정은 그의 짧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배웅하러 나와놓고 먼저 들어가버린 그를 대신해 루이다가 울프우드에게 내민 것이, 문제의 편지였다. 

“이게 뭔데.”

“안내서라고 해둘게. 세상은 변했는데 당신은 모르는 것 투성이잖아?”

“누가 쓴 건지는 안 알려줄 모양인가보군.”

“알게 되기를 바라.”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러나 울프우드는 착실히 편지를 챙겼다. 

루이다의 말대로, 그는 아는 게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


안녕, 나는, 으음…… 그래. 엔젤이라고 불러줘! 왜,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수호천사 느낌으로!

네가 변한 세상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가이드 역할이니 대충 비슷하기도 하구, 뭐……. 귀엽기도 하구. 불만은 없을 거라고 믿어. 

아무튼, 기억을 잃은 건 유감이야.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내가 차근차근, 자세히, 상냥하게! 알려줄테니까. 


울프우드는 편지 서두를 읽자마자 헛웃음부터 나왔다. 흘러내릴 듯 유려한 글씨체는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자유로우면서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게 티가 날 정도의 무게감을 가진 채 종이 위에 녹아있었다. 글 따위에 조예를 키우지 않은 울프우드가 봐도 그렇다는 건 상당한 정성을 들였다는 것인데……. 마시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고, 울프우드는 계속해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지난 10년간, 노맨즈랜드는 지구군의 협력을 얻어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어. 워낙에 척박한 별이라 테라포밍(아, 이건 노맨즈랜드 전체를 지오플랜트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돼.)이 제대로 될 것 같진 않다고 하긴 했지만……. 나는 이 정도로도 정말 괜찮다고 봐! 더이상 누군가를 배신하고 해치고 죽이지 않아도 돼, 우리에게는 새로운 차표가 주어졌으니까. 

그건 정말 멋진 일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물음 끝이 자연스러웠다. 날 아는 사람인가. 의문에 가슴이 술렁인다.


치안이 안정되고 범죄가 줄어들면서 사람들의 행동 반경도 넓어졌어. 샌드스팀 운행도 늘어나고, 노선도 확장되고……. 혼자서도 노맨즈랜드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지. 그거 알아? 줄라이 재건 사업이 시작됐다는 거! 그 근방에 밀 경작지가 길게 들어설 예정이래. 인구가 꾸준히 늘어날 전망이라 곧 새 보금자리도 필요할 거라나봐. 

밀이 많이 자라면 그걸로 식빵이랑, 네가 좋아하는 우동이나 맥주, (아, 이건 내가 좋아했던 것 같네. 너는 좀 더 독한 술이 취향이잖아.) 내가 좋아하는 도넛도 많이 만들 수 있겠지? (둘 다 내가 좋아하는 거지만 잉크를 지울 수는 없으니 대충 읽어!) 

아무튼, 그래서 말이야.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한창 준공 중인 그쪽 지역이 굉장히 활발하게 살아났다는 거야. 편지 봉투 안에 샌드스팀 표가 있었지. 그건 내가 널 위해 특별히! 구한 퍼스트클래스 객실표야. 네 귀여운 수호천사를 마음껏 자랑스러워해도 돼. 후후. 


이건 또 뭐라는겨.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울프우드는 그 순간, 그도 모르는 새 분명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깊은 내면에서부터 끌어오를 듯 넘실댔지만 울프우드는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몰랐으므로 금세 사그라들었다. 

어찌됐든 엔젤……의 말대로였다. 그리하여 울프우드는 현재 옛 줄라이 재건 현장 근처, 한창 새로이 일어서고 있는 신도시 ‘리틀 줄라이’의 반질반질한 타일 위에 서있다. 사막 위에 조그맣게 지어진 인공 오아시스는 재건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의 연결을 위해 급조되었다고 했다. 그런 것 치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밝아서, 울프우드는 내색하진 않아도 종종 그들의 이유있는 활기에 놀라곤 했다. 

사실 그를 놀라게 만든 건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울프우드는 그냥, 모든 게 신기했다. 희망이 도처에 흐르는 감각이란 이런 거구나, 하며 새삼스럽게 감탄할 정도로. 과거엔 희망보다 죽음이 흔했다. 생존이 급해지면 허레허식만큼 무용지물인 게 없었고, 사람들의 목에는 저마다 익숙한 사신의 낫이 걸려있었다. 그건 그렇듯 당연한 일로, 어른아이 따질 것이 없었다.

그랬었는데.

울프우드는 마침 제 쪽으로 굴러온 고무공을 붙잡아 아이들 쪽으로 다시 던져주었다. 고맙습니다! 우렁차게 인사한 아이들이 뭐라뭐라 소리치며 반대편으로 달려나갔다. 한차례 바람이 불어, 앉아있던 테라스 카페의 도어벨이 치렁치렁 흔들린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낯설기만 한 짧은 키의 들풀이 동그란 인공호수를 따라 물결처럼 춤추고, 태양빛을 부스러기처럼 흐트러뜨리는 호수 너머로 항해 준비를 마친 샌드스팀이 연신 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울프우드가 승선할 샌드스팀이다. 

모든 게 새삼스럽게 생소했다. 정확히는, 도시를 둘러싼 이 평화로움이 생소했다. 살아남으려는 의지와는 별개로 나아질 거란 기대는 없던 게 울프우드가 아는 노맨즈랜드의 인간상이었다. 그런데 이 자그마한 도시는, 그가 여기까지 오며 보아온 수많은 사람들은 어떠한가. 어떠했는가.

그는 공상에 잠기는 인간이 아니었으나, 이런 류의 생소함은 자연스레 그를 호기심의 영역으로 이끌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분기점이 있다면 어디쯤인지. 그 전후, 무엇이 달랐고 무엇이 개입했길래 이렇게나 바뀌었는지. 그가 기억을 잃은 일이 도처에 감도는 희망과 관련이 있는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잊었는지. 

이 ‘엔젤’이라는 이는 대체 누구인지. 

커피잔으로 대충 눌러둔 탓에 새하얀 편지지 끄트머리에는 동그란 원이 번져있었다. 그 밑으로 보이는 글은 ‘다음 편지부터는 꼭 하루에 한 장씩만 읽어야 한다’, ‘심사숙고해서 썼으니 잘 부탁한다’ 따위의 영문 모를 당부의 말이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숨겨놨다고 이러는 건가. 기껏해야 고작 편지 몇 장에 뭘 그리 중요한 걸……. 

그쯤에서 울프우드는 편지를 덮었다. 기껏이라는 말로 치부할 수 있을 정도의 편지가 아님을 애초부터 알고 있던 탓이다. 

그의 엔젤은 가벼운 문장 사이로 진심을 감추는 데에 도가 튼 이였고, 익살스럽게 올려 쓴 글자 끝을 얕은 비애로 장식할 줄 아는 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프우드는 그 모든 수작질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게 짜증났다. 정황상 그가 알던 사람 같은데, 그것도 아주, 깊이, 알던 사람 같은데…… 아무도 울프우드에게 엔젤이 누구라고 언질 하나 해주지 않는 게.

모든 게 완벽한데 정작 울프우드의 기분은 언짢기만 했다. 대충 접은 편지를 주머니에 쑤셔넣고서, 울프우드는 몸을 일으켰다. 슬슬 샌드스팀 승선시간이었다. 


💌



사실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 있었다. 

그저 가볍게 읽고 고맙다 속으로만 되뇌인 후 잊으면 그만이라는 걸 울프우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안다는 사실이 지금의 울프우드를 막을 이유는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샌드스팀 승선 이틀 째. 그의 엔젤이 엄선한 노선은 총 열흘 간의 일정으로, 노맨즈랜드를 비잉 돌아 과거 보육원이 있었던 도시에 다다르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정이었다. 엔젤의 말마따나, 여기저기서 신도시 개발이니 산업 부흥이니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걸 생각하면 그만큼 거쳐가는 것도 이해는 갔다. 

울프우드에게는 퍽 다행이었다. 그 탓에 승객 계층이 천차만별로 나뉘어서, 그는 옆옆 객실 꼬맹이와 연필 하나에 사탕 여섯 개라는 훌륭한 독박거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편지를 쓰기 위함이다.

수신인은 뻔했다. 그의 엔젤이다.

첫 날, 울프우드는 제에발 하루에 하나씩만 읽어달라는 엔젤의 당부같은 건 저녁과 함께 씹어먹고서 그에게 온 편지들을 죄다 읽어제꼈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을 잘 들었다고. 

그러나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 네가 늘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할게. 앞으로도 너의 엔젤일, 너의 엔젤이. 아래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울프우드 스스로도 왜인지 몰랐다. 

엔젤은, 잘 숨겼다고 생각한다면 유감이지만― 분명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읽혔다. 그런 주제에 울프우드가 무사히 깨어나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고, 그가… ‘싸그리’ 기억을 잃었음에 기뻐하며 그대로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것도 그냥 그렇게 읽혔다. 

별 특색 없는 문장들인데 유독 울프우드에게만 잉크 밑에 감춰진 맥락들이 낱낱이 보였다. 그러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당사자인 울프우드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 그래서일까. 브래드에게는 편지, 루이다에게는 안내서로 받아들여진 모양인데 울프우드의 생각은 달랐다. 당연히, 달랐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건 편지의 형식을 띤 가이드임과 동시에 오로지 울프우드에게만 날려보낸 종이비행기였고, 그에게 헌정하는 사랑시였으며, 아름다운 이별시였다. 

그 쯤 되니 답답함과 연원 모를 분노가 스멀스멀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누구 맘대로? 냅다 편지 쥐어줘놓고 살살 녹여서 충분히 궁금하게 만들더니 기껏 한다는 말이, 뭐?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 앞으로도 잘 지내길 바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다. 정보는 고마운데, 이럴 거면 아예 편지로 쓰지를 말던지. 다른 양식이야 많지 않은가. 감출거면 잘 감추기라도 하던가 이래 칠칠맞게 흘리고 다녀서 사람 신경을 긁고.

아, 내가 너어무 그리워가 참을 수가 없었나. 

안되지, 그럼. 

그리하여 울프우드는 편지를 쓰기로 한 것이다. 

빈 종이는 안내데스크에서 얻어올 땐 안 그랬는데 책상 위에 각잡고 두니 유난히 크게 보였다. 꼬맹이의 어린이용 연필은 울프우드의 손엔 또 유난히 조그매 잡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는 꾸깃꾸깃 고쳐쥐고서 한 문장 딱 적었다. 


엔젤에게.


그리고 또 뭘 적어야하나. 아, 인사를 해야지.


반갑다. 다음 자기소개. 난 니콜라스 D. 울프우드다. 


그러고나니 울프우드는 쓸 말이 바닥나고 말았다. 



💌


승선 사흘 째. 

편지란 되새김질의 일종이라는 걸 울프우드는 속이 쓰릴 정도로 절실히 깨달았다. 입으로 내뱉는 말과는 결 자체가 달랐다. 손으로 쓰려면, 우선 생각을 해야했다. 또 쓰는 움직임과 생각의 시차 사이의 간극에 정신을 빼지 않기 위해서는 그 생각을 적절히 깎아내는 과정이 필요했다. 문장으로, 단어로. 배치에서도 마찬가지로.

문제는 현재의 울프우드에게는 적절히 꺼내 만져볼 만한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게 뭔.

“……후련하다고 할 때가 아니었구만.”

흐어어. 내리 수그리고 있던 허리를 피니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기지개를 쭉 펴고 하품이나 하는 울프우드의 이마를, 더운 바람이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미간을 누르던 손을 치우면 이글거리는 사막과 하늘이 반 뚝 갈라져 트인 시야를 덮는다. 익숙한 지평선이다. 

울프우드가 앉아있는 곳은 샌드스팀의 카페테라스 야외석이었다. 아침을 먹기엔 늦은 시간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드문드문 빈 테이블 중 가장 볕이 안 드는 자리를 울프우드가 막 꿰찬 참이었다. 동그란 테이블 위에는 먹다 만 브런치와 함께 익숙한 종이와 알록달록한 연필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울프우드는 그 이후 종이만 여섯 번 갈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했지만 이름도, 생김새도, 성격도 모르는 채 일방적 교류를 해온 상대에게 편지를 쓰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도 자기 이야기는 한 줄도 적지 않은 상대라면 더더욱. 

게다가, 사실을 말하자면― 울프우드 스스로도 답신을 보내는 것에 대한 마땅한 당위성을 찾지 못했다. 

편지를 쓰자. 왜? 답답하고 짜증나니까. 누가. 이 엔젤이라는 머저리가. 어떤 부분이. 있는 대로 티를 내놓고 자기 맘대로 멀어지려는 그의 꼬라지가. 그러면 안되나? 당연히 안되지! 왜?

그러면 울프우드는 할 말이 없어지는 거다. 왜냐니. 이유 모를 반발심이 심장 고동을 따라 터지는데도 그걸 말로 표현하라고 하면 머리가 엉켰다. 당연히 안되는 거 아닌가? 왜냐하면, 엔젤은…….

토론을 벌이던 울프우드가 입을 다물자 남는 건 침묵 뿐이다. 

웃긴 건, 그 와중에도 편지 쓰기를 그만둘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거다. 첫 질문부터 거기까지 논리나 이성이 들어갈 만한 틈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그러고 싶었을 뿐이다. 바보같다는 건 알고 있지만 별 수 있겠는가. 그래놓고 종이 여섯 장을 구길 동안 휘갈긴 문장이 하나같이 똑같으니 힘이 빠질 만 하다고, 그는 내심 생각했다. 

한숨을 뻑뻑 내쉬며 이마만 짚고 있자니, 맞은편에 누가 깡총 하고 앉았다. 야무지게 머리를 묶어올린 옆옆 객실 꼬맹이는 코를 훌쩍이다 말고 울프우드의 접시로 슬쩍 손을 뻗었다. 어림도 없지. 코웃음을 친 그는 조그마한 손등을 아프지 않게, (그래도 아팠을 거다.) 내리쳤다. 아얏!

“어디 코 묻은 손으로. 가서 씻고 오기라도 해라.”

“저 아침 먹었거든요?”

“뭐 먹었는데.”

“베이컨이랑 모닝빵이랑 스크램블에그!”

“잘 먹었네. 이제 가라.”

훠이. 성가시다는 듯 손을 저어도 꼬맹이는 모르는 척 울프우드의 종이를 넘봤다. 

“뭐 써요? 편지?”

“어.”

“아저씨 편지 쓸 줄 몰라요?”

“왜 시비야, 갑자기.”

그렇잖아요. 꼬맹이는 볼을 잔뜩 부풀리고서 자기 좀 보라는 듯 굴러다니던 연필을 쥐었다. 진지하게 신이 난 아이가 나름 귀여워서, 울프우드는 턱을 괸 채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들어주다 보면 또 다른 재미난 걸 발견하고 금세 가버리겠거니 하는 마음이었다. 내심 빨리 흥미를 잃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가뜩이나 머리 아픈데 말이야. 

한참 심각한 낯으로 편지를 바라보던 꼬맹이가 처억, 첫 문장을 짚는다. 반갑다. 

“이게 뭐예요! 나두 친구한테 이렇게 안 하는데!”

“나는 해.”

“아저씨는 할 얘기도 없어요?”

요 꼬맹이가 자꾸 아픈 곳을 찌르네. 울프우드는 대꾸 대신 담배를 비벼껐다. 짓눌린 담배 끝에서부터 긴 꼬리연기가 바람을 따라 이어지다 곧 사그라들었다. 정작 꼬맹이는 아랑곳 않는 듯 했지만, 아무래도 애 앞 아닌가. 복잡한 속도 모르고 꼬맹이는 발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원래 편지라는 건 말이죠, 자기 얘기만 하는 거랬어요!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쓰고 싶은 게 튀어나온다고.”

“누가 그러디?”

“저희 선생님이요.”

누군지는 몰라도 자신만큼이나 편지 쓰는 게 서툰 작자라고 울프우드는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꼬맹이는 금세 자기 이야기로 반짝반짝 열을 올렸다. 우리 선생님은요 엄청 상냥하고, 예쁘고, 운전은 좀 못하지만… 그래도 저랑 친구들은 선생님을 정말 좋아해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존재인 것처럼 바라봐줘요, 우리 엄마도 그런 적 없는데……. 재잘거리는 와중에도 꼬맹이의 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 종인데 뭘 저리 열심히 쓰는지. 울프우드의 고개가 슬쩍 기운다.  

“엄마는 뭐하시는데.”

“바쁘대요. 그래도 만나러 와주긴 해요. 이번엔 못 온대서 제가 갔지만요, 이제 일곱 살이니까 이 정돈 할 수 있어요.”

“이야……, 다 컸네.”

“그쵸! 빨리 커서 선생님 과수원 일도 도와드리고…….”

선생님 이야기를 할 때의 꼬맹이에게서는 개인 하늘 내음이 났다. 부모는 평범한 노맨즈랜드 인간 같은데, 선생님이란 사람은 또 나름 좋은 인간인가 싶었다. 쪼그마한 아이도 맑은 하늘의 화사함을 알게 만드는 류의. 의식할 새도 없이 생각이 편지의 수신인에게로 튀었다. 네 편지에서도 종종 그런 향이 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이게 아니지. 난 지금 화를 내려는 거란 말이다! 

그런 울프우드를 상념에서 꺼내준 게 꼬맹이가 꼬물거리며 써둔 편지 내용이었다. 

“야, 근데 이게 뭐냐? 오늘은 날씨가 좋습니다, 하늘이 높아서 꼭 날아오를 것 같습니다, 아침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매일매일 이런 걸 먹을 수 있다니 기분이 좋습니다? 너 일기랑 편지 구분 못하지.”

“아니거든요?! 원래 편지는 이렇게 쓰는 거랬다구요!”

“느이 선생님이?”

“네!”

그 순간 울프우드의 머리 속에 그 선생에 대한 인상 한 줄이 추가되었다. 어지간히도 무른 사람이구나, 하는. 뭐 꼬맹이 시선에선 제법 그럴 듯한 작문법으로 들릴 것 같긴 했다. 하여간에 울프우드는 앳저녁에 꼬맹이는 졸업했으므로 대충 코웃음만 쳤다. 그새 드리운 구름 그림자 아래로 꼬맹이의 얼굴이 단번에 부루퉁해졌다. 

“연필 내놔요.”

“……니네 선생님이 줬다 뺏는 게 나쁘다고는 안 했냐.”



💌



승선 닷새 째.

시간은 느린 듯 빠른 듯 흘렀다. 해와 달이 교차되고 이따금씩 터미널에 정차하며 사람들이 오가는 와중, 울프우드는 꼬맹이의 선생에 대한 편견을 (일정 부분) 철회했다. 꼬맹이가, 연필 돌려줄테니 자기 선생님이 말한대로 한 번만 써보라고 방방 뛰길래 속는 셈 치고 휘갈기기 시작한 서두는 의외로 술술 적혔다. 그래도 종이는 몇 번 갈았지만, 장족의 발전이다. 

이다지도 쉬운 건 그가 이미 겪었던 것들을 풀어놓는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울프우드는 확신했다.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것도 일종의 되새김질인 셈이다. 


멍청하고 답답한 머저리같은 엔젤에게.

탈 땐 별 생각 없었는데, 닷새 쯤 되니 드디어 네 실력이 좀 감탄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유 구간에서 숨 돌릴 겸 내렸거든. 표값이 미쳤더라고. 어떻게 구한 거냐? 기억나는 게 없으니 꽤 유복한 집 자식이라고 우선 생각하고 있을게. 아니면 말고. 

그것보다, 네 가이드 말이야. 

잉크 마른 흔적으로 봐서는 쓴지 꽤 됐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적용하려고 보니 놀랄 만큼 정확해서. 그것도…… 놀랐어. 그래, 놀랐다. 의외로 최근에 쓰인 건지, 내 감이 무뎌진 건지, 아니면 그냥 네 감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만. 덕분에 바가지도 덜 쓰고, 재승선도 탈없이 잘 하긴 했어. 그런데 역시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할수록 이렇게나 상세한 가이드는…….

모르겠다. 나라면 아무에게나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을 것 같거든. 그러다보니 또 열불 나더라고. 넌 내가 기억이 없어졌다고 뇌가 아주 빈 줄 알지. 인간성까지 사라진 것도 아닌데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사람이 안 궁금한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게다가 엔젤 너는.

겁쟁이 자식아. 너 나 보고싶잖아. 

발뺌할 생각은 마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알거든. 어떻게 아냐고 물으면, 글쎄다. 나보다는 네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편지, 그래. 이 편지의 목적이 정말 안내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면 읽는 사람 속터지게 하지 말고 솔직해지지 그러냐. 차라리 보고싶다고 쓰는 게 나를 덜 기만하는,


거기까지 쓴 울프우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직 연필 끝이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저 편지의 끝을 짐작할 수 있었던 탓이다. 저러다 이제 의문에 불이 붙고, 움직임이 빨라지고, 가뜩이나 없는 기억이 한 데 뒤엉켜 ‘그래서 넌 날 어떻게 아는 거냐, 왜 이렇게까지 해주냐.’ 정도로 편지지 위에 쏟아지겠지. 알고 있었다. 종이를 갈았던 주된 이유니까. 쓴 게 아까우니 버리지는 않았으나 울프우드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고 마는 편지의 결론이 늘 짜증났다. 

그러니까, 꼬맹이의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울프우드가 하고 싶은 얘기란 결국 그런 것들이라는 소리 아닌가. 네가 누군지 알고 싶다. 실재하는지 확인하고 싶다. 널, 만나고, 싶다…….

이런다고 갑자기 기억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한 밤 중이었다. 발전이 어쩌니 테라포밍이 뭐니 해도 밤만은, 흐린 별 몇 개와 자욱한 어둠에 위와 아래의 분간이 사라진 밤만은 울프우드가 익히 알고 있던 사막의 밤이다. 유독 달이 밝았다. 흰 빛을 머금은 구름이 천천히 유영하는 동안 울프우드는 익숙하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물론 그는 시도때도 없이 태우긴 했지만, (엔젤도 말 끝마다 담배 좀 줄이라고 잔소리에 잔소리를, 아니, 이럴 때까지 그 자식 생각이라니.) 머리 아플 땐 역시 뇌를 연기로 저어주는 게 제일 좋았다. 

이따금씩 샌드 스팀의 엔진이 쿠르릉, 땅을 짓밟는 소리를 내는 걸 빼면 갑판 위는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울프우드에게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편지가 그 따위인데 생각이라고 뭐 다르겠는가. 분산시킬 거리가 없을 때의 무의식은, 금세 그가 아는 방향으로 튀었다. 

사실, 울프우드는 스스로에게 조바심이 나는 상태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조바심은 독이다. 감정에 휘둘리는 순간 그대로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게 그가 아는 암살이고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조금만 더 해보면 뭐가 돼도 될 것 같고, 그 ‘조금’이 대체 얼만큼인지 감조차 안 잡혀도 포기할 생각같은 건 들지 않는, 신경을 니코틴에 절여서라도 돌파구를 찾으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일은 울프우드에게 있어 처음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 빗자루…, 들리냐. 


아닌가?

과연, 처음인가? 내가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한 거지. 

자연스럽게 하늘을 향해 고개가 꺾였다. 시야를 가리는 연기에도 아랑곳않고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들이 꼭 그 때의 희망같았다. 그 때. 턱 밑까지 엄습한 데자뷰를 느끼며, 울프우드는 그가 생각했던 만큼 ‘조금’의 끝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뜬 이래 한 번도 그것이 제 것이라 느껴본 적 없는 울프우드는, 기꺼이 그 어렴풋한 예감― 희박한 희망의 예감을 향해 뛰어들었다. 


- 소리가 좀 크니까,

- 귀를 막고 있어.


코 끝이 화약향으로 후끈하다. 여전히 주위는 적막하기 그지없는데, 그의 고막은 얼얼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울프우드는 샌드스팀의 갑판 위에 서있었고, 동시에 죽음을 뿌리는 함선 위에 서있었다. 그래서, 그 때. ……그 정도의 충격에도 사실 명확하게 기억나는 건 많이 없었다. 언제쯤인지도, 어디인지도, 무슨 상황인지도, 왜 굳이 너에게 걸었는지도.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별은 꼭 희미한 희망처럼 반짝였다. 

그게 너였다.

어떤 정신으로 객실까지 왔는지 울프우드는 알지 못했다. 다만 지금은 그가 깨달은 것을 빨리 쏟아내야만 했다. 기껏 꺼낸 새 종이가 한껏 우그러져도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거기에 쓸 신경이 없었다. 흰 바탕이 그 때의 하늘처럼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그러니까, 그동안 울프우드는 완벽히, 잘못 써오고 있었던 것이다. 전제부터 글러먹었다. 그는, 그의 엔젤은 ‘엔젤’ 같은 게 아니라.


빗자루에게. 


- 이 남자는… 내게 목숨을 걸었어. 누구보다 죽음을 겁내고, 삶에 집착하던 이 남자가….


나야. 


- 넌 틀리지 않았어, 울프우드!!!


울프우드. 



💌


승선 이레 째.

기억은 순 제멋대로였다. 그가 아는 엔젤만큼이나. 한 번 물꼬를 트면 잊고있던 것들이 소설처럼 단번에 쏟아져 내릴 줄 알았건만 전부 울프우드만의 착각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는 결국 엔젤― 빗자루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거센 햇빛에 손을 세워 차양을 만들 때, 편지에서 유난히 언급이 많았던 도넛 체인점을 지나칠 때, 하다못해 그냥 걸을 때조차 기억은 불쑥불쑥 떠올라 울프우드를 멈춰 세우는데, 이름만은 아무리 기를 써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돌아오는 기억들도 그리 온전치는 않았다. 그것들은 강렬한 대신 추상적이었다. 빗자루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나 이따금씩 폐부를 채우는 연원 모를 향, 그를 감싸 안던 날개(근데 이 날개는 좀 의아하다. 환각을 본 건가? 뭐 예쁘긴 하더만.)의 부드러움, 피냄새 나지 않는 붉은 색과 황금을 녹인 듯한 금발…….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들을, 과거의 울프우드는 사랑했던 것 같다고 울프우드는 생각했다. 

사랑. 사랑이라. 

……그 쯤에서 울프우드는 괜히 객실 창문을 열어 슬쩍 밖을 넘봤다. 샌드스팀 바깥에 누가 있겠냐만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기 좀 힘들 것 같아서였다. 뭐가 울컥거리며 목구멍을 넘어오는데, 위가 아니라 심장에서부터 넘친 듯 싶었다. 현재 시간 낮 두 시. 하늘은 높고, 해는 선명하다. 마침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혹여 부러뜨릴까봐 놓아둔 연필을 편지지 위로 도로록, 밀어주었다. 하, 씨. 그는 꼭 엔젤의 편지를 처음 읽었을 때처럼 헛웃음을 흘렸다. 

사랑이라고. 그러면 우린 연인이었을까. 

납득 자체는 쉽게 됐다. 딱 맞는 퍼즐 조각을 찾은 것처럼, 오히려 그게 아니면 말이 안될 것 같았다. 또, 언젠가 스스로에게 던졌던 ‘왜 편지를 쓰는가?’에 대한 답이 나온 셈이기도 하지 않은가. 내가 걔랑 사랑하는 사이였다잖냐. 당연히 그러면 안되지. 사람 사이에 예의가 없으면 쓰나. 곧바로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그거 확실해?’

그러면 울프우드는 또 할 말이 궁색해지고 만다.

확실하고 자시고 지금 빗자루가 나를, 그렇게 그리워하면서 안 궁금한 척 그저 행복하라는데 확실한 게 중요한가? 아무래도 중요하지. 왜? 짝사랑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어느 누가 일방향성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이런 미련 가득한 편지를……. 아니 그럼 이 자식은 지를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이렇게나 절절한 편지를 썼단 말인가. 

하여튼 짜증나도록 사랑스러운 놈이었다. 이쯤 되면 분노의 궤도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이럴 거면 티를 내지를 말던가, 읽는 사람 속은 박박 긁으면서 행복하라느니 뭐니 날 바보로 알고 사람을 놀리고……. 난 다정한 네가 궁금한데.

그리하여 오늘도 울프우드는 거침없이 연필을 든다. 

음…, 네가 단 게 그닥 취향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아는데 말이야. 그래도 여기 도넛은 한 번 먹어보는 게 어때? 오리지널도 괜찮지만! 새로 나온 딸기 커스터드 크림이 정말! 나도 알아, 이 자식아. 안 그래도 지금 속이 더부룩해 뒤질 것 같거든. 뭐라도 떠오를까 싶어서 오며가며 처먹었더니. 맛있긴 하더라. 알고는 있었지만 너 단 거 엄청 좋아하는구나. 

맞아, 선내에서는 흡연 금지인 거 알지! 이참에 담배를 끊어보는 건 어때? 건강에도 안 좋구……. 아니면, 최근엔 덜 독하고 맛은 진…… 한? 것들도 많이 나왔다는데. 헤헤, 사실 잘 몰라. 난 담배랑 안 친하거든. 그래도 네가 피우던 브랜드에서― 속이 터져서 끊을 수가 있어야지. 더 독한 걸로 안 넘어간 걸 다행으로 알아라, 좀. 그만큼 널 알고 싶다는 거잖아. 나도 참 나다. 이딴 놈이 대체 어디가 좋다고 팔자에도 없던 편지나 휘갈기고. 기다리기나 해. 내가 폐병 걸리면 너 찾아서 반드시 책임지게 만들테니까. 어?

디셈버의 샌드스팀 터미널은 굉장히 커! 아예 도시랑 따로 떨어져 있을 정도야. 버스 터미널도 같이 붙어있으니까, 거기서 칼커서스행으로 갈아타면 돼. 터미널, 굉장히 예쁘거든. 가기 전에 한 번 구경해보는 건 어때? 3층에 가면― 그래, 기억해둘게. 내가 최근 기억의 중요성에 대해 뼈저리게 깨닫고 있거든. 그나저나 빗자루, 우리 고아원 가본 적 있지. 리비오나 멜라니 아주머니한테 물어보면 네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 


울프우드의 편지는 슬슬 편지가 아닌 일방적인 문답의 형식으로 바뀌어갔다. 빗자루가 그에게 보낸 편지 한켠에 주석마냥 그의 답을 달아놓는 식이었다. 꼬맹이네 선생의 방법도 나쁘지 않았지만, 울프우드로서는 이쪽이 더 좋았다. 마치, 실제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대화가 계속될수록 편지지의 빈칸은 좁아져만 갔다. 마침내 끄트머리의 끄트머리까지 가득 채우고서야 울프우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산책이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가 탄 샌드스팀은 꽤 컸다. 여러 도시들을 거치며 돌아가서 그런가. 울프우드의 객실은 퍼스트 클래스답게 상층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아래로도 꽤 돌아다닐만 하다고, 어제 펍에서 주워들었다. 뭐가 잘되어있긴 한가보지. 다시 한 번 그의 빗자루의 안목에 감탄하며 울프우드는 휘적휘적 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정말 산책이라도 다녀올 생각으로. 

몇 가지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여전히 틈날 때마다 슬그머니 떠오르는 그의 빗자루와, 으레 그렇듯 하나에 몰두할 때면 걸음이 딴 길로 새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배가 커서 그런가.”

많이도 모셨네. 울프우드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정신 차리니 플랜트실에 들어와있었던 것이다. 일렬로 줄지어 선 커다란 전구 안에서 몸을 웅크린 천사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바깥보다 서늘한 공기와 동그랗게 밝은 푸른 빛, 그것에 감싸인 이형의 존재는 그것만으로도 이곳이 샌드스팀이라는 사실을 한순간 잊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오싹한 아름다움. 

그러나 울프우드를 소름 돋게 만든 건 그게 아니었다. 

“……좀 부담스러운데.”

원래 플랜트라는 존재가 이렇게까지 인간을…… 보나? 사람의 것과는 다른 눈 몇 쌍이 이쪽을 빠안히 쳐다보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의아했다. 박사니 관리인이니 하는 사람들이랑 매일 소통할텐데 뭐가 저리도 신기한 건지. 

마냥 이러고 있다 경비라도 마주치면 골이 아플 터다. 더 생각하지 않고, 울프우드는 그대로 돌아 플랜트실을 빠져나갔다. 걸음마다 새초롬한 시선이 꽂히는 건 애써 무시했다. 정말 뭐냐. 아, 그러고 보니. 

“그 날개가 저 날개였구만.”

빗자루 게 더 예쁘네.


💌


그 만남은 울프우드에게 있어 그저 해프닝이었다. 관리인이 문 단속을 제대로 안 해서 생긴 우연. 

딱, 승선 아흐레까지 그랬다.

오전 열한 시 사십오 분. 지난 새벽, 편지의 마지막 장까지 꽉꽉 채워 답을 쓴 울프우드는 오랜만에 스스로를 풀어놓은 와중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유를 좀 즐기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마지막 날엔 짐 챙기랴 내리랴 시간도 없을텐데. 담배 한 대 피우고,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누울 때까지는 모든 게 썩 괜찮았다. 그러던 순간, 

쿠르릉, 카가각! 쇠가 굽어져 엇나가는 소리가 오전의 평화를 찢어발겼다. 울프우드는 언제 그랬냐는듯 침대를 박차고 무기부터 챙겼다. 습격인가? 이 시대에? 그럼 그렇지.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이 터지고, 선체가 한차례 기우뚱 흔들리더니― 그대로, 샌드스팀이 멈춰섰다. 

다행히 도적단이나 테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랬다면 선내가 그저 웅성거리기만 할 리 없었으니까.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울프우드는 이런 일이 그저 해프닝으로 치부되는 상황 자체가 퍽 괜찮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무리 나아졌대도 작열하는 사막은 여전히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장시간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간이병원이 터져나갈 게 분명했다.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건 연회장에서 만난 꼬맹이에게서였다. 

“아저씨! 괜찮아요?”

“어어, 뭐.”

“저는 괜찮아요! 다 컸으니까요.”

“그러냐.”

오후 열두 시 이십 분. 연회장 안은 안내방송을 듣고 모인 사람들로 발디딜 틈 없었다. 습격이 아니라는 걸 깨닫자마자 긴장을 푼 울프우드는 문가에 대충 기대어 섰고, 꼬맹이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또랑또랑하게 말해도 몸을 떨고 있는 게, 아무래도 많이 놀란 듯 싶었다. 그래서 울프우드도 꼬맹이처럼 쪼그려 앉았다. 조막만한 손을 꼬물대며 꼬맹이가 재잘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이죠, 엄청 큰 일은 아니니까.”

“플랜트가 말썽인 거면 보통 큰 일이 아닌데.”

“괜찮을 거예요! 히, 우리 선생님이 오신댔어요. 요 근방이 과수원이랑 가까워서요. 운전이 좀 걱정되긴 하지만…… 플랜트에 대해 잘 아시기도 하구 그러니까 걱정 놓으세요, 아저씨!”

유명한 사람이라 이미 불렀을 거라고, 오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안 오지는 않을 거라는 꼬맹이의 말에 울프우드는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꼬맹이는 그 선생이 온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말하는 걸 들어보면 여간 말랑한 작자가 아닌데, 그래도 믿음직한 구석이 있나보지. 울프우드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가 요즘 느꼈듯 그런 희망은 전염이 된다. 한참 신난 꼬맹이를 바라보다가, 그는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 그 애에게 물려주었다. 

“자. 이거 먹으면서 여기 얌전히 있어라.”

“아저씨는요? 저 이 맛 안 좋아해요.”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거 그냥 먹어, 너한테 연필 빌릴 때 다 줘서 없으니까.”

“근데 아저씨, 단 거 좋아해요?”

“……아니.”

별 생각 없었는데 요즘엔 좀 진절머리 난다. 꼬맹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담아준 울프우드는 아 진짜 뭐예요 진짜 짜증나! 하고 왁왁대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의 말마따나 그에겐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당장 급하지 않은 일이고, 해결할 사람이 곧 온다면 신경 꺼도 좋을 것 같았다. 

묘한 위화감이 일전에 느꼈던 플랜트들의 시선처럼 진득하게 따라붙었지만, 울프우드는 익숙하게 그걸 끊어냈다. 이러면 그의 엔젤이 정해둔 계획이 어그러질 것 같긴 하네, 뭐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오후 세 시 십오 분. 지평선을 따라 달려온 바이크에서 흑발의 청년이 뛰어내렸다. 먼 거리가 아니라 다행이었다고, 조금만 더 오래 운전했으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사고날 뻔 했다며 너스레를 떨던 청년은 이내 책임자들의 안내를 받아 샌드스팀 위로 올랐다. 플랜트실 특유의 신비로운 빛을 반사하는 눈동자는 꼭 짙푸른 물빛이었다. 


💌



해결은 금방 났다. 밧슈가 플랜트실을 나오고 얼마 뒤 샌드스팀은 다시금 움직일 채비를 끝냈다. 아예 이대로 좀 쉬고 도착 일정 자체를 하루 연기하는 식이었다. 감사의 의미로 비어있던 퍼스트 클래스 객실 하나를 받았지만, 밧슈는 그리 기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당장이라도 이 샌드스팀을 떠나고 싶었다! 

그의 누이들이 보이는 것과 다르게 장난기가 넘친다는 건 잘 알고있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여기서 울프우드를 마주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커다란 샌드스팀을 멈춰 세우는 게 말이 되냐고! 혹시라도 방까지 가다가 마주칠까봐, 밧슈는 이글이글한 갑판 위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몸을 숨기고 있던 그림자도 해가 각도를 바꿀수록 차츰 면적이 좁아져만 갔다. 밧슈는 부루퉁히 바닥 끝, 얼마 남지 않은 그림자 단편만 빤히 바라보았다.

조마조마했다. 동시에 꽤… 두근거리기도 했다. 여기 있구나. 그러면 편지도 읽었겠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안심이 됨과 동시에 너무나도 슬펐다. 마음 가득 행복했지만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여전히 그 때와 똑같은지 알고 싶었고, 그런 걸 알 바엔 처음부터 모르고 싶었다. 

왜냐하면, 밧슈는 그가 이 땅 어딘가에서 숨쉬고만 있어도 좋을 것이기에. 

왜 누이들이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고 있었다. 밧슈의 사랑 방식을 이해해주는 건 이제는 그의 수많은 누이들 뿐이었고, 그런 그들만이 밧슈의 등을 떠밀 수 있을테니까. 세간의 사랑은 복잡했다. 카테고리도 여러 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 밧슈의 사랑에 꼭 들어맞는 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를 사랑해. 허락해준다면 그와 함께 하고 싶어. 욕심이 나지 않는다는 게 아냐. 하지만… 나는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으니 이대로 날 기억하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 왜냐하면 그는 나에게 목숨을 주었으니까.

본디 거래라는 건 천칭 위에 올리는 물건의 값이 맞아야 한다고 배웠다. 감정을 거래에 비유하는 건 꽤 웃긴 일이었지만, 타인에게 그만큼 가치 있는 걸 받아본 기억이 없는 밧슈로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죄를, 길을, 그 모든 것의 무게를 그와 나눌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다. 오직 하나 있는 걸 받았는데 가장 안 좋은 걸 같이 나누자고 줄 필요가 어디 있는가. 나의 죄는 온전히 나의 몫이니 그는, 차라리 다 잊었다면, 그대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충분히 행복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이 타오르는 별에 태어나 밧슈에게 목숨까지 건 사람으로써. 

그리하여 네가 행복하게 살다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좋아하는 것도 생기고, 다시는 살인 따위 하지 않고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안락한 침대에서 ‘참 행복한 삶이었다’ 고 회상하며 눈을 감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나에게 있어 행복일 것이라고. 분명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일 거라고.

“선생님, 객실 답답해요?”

나는 넓고 좋던데! 양산까지 야무지게 쓴 시얼샤는 통통 튀어와 밧슈의 곁에 붙어 앉았다. 고개를 흔들 때마다 아이 혼자 묶은 양갈래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이리 와, 머리 다시 묶어줄게. 밧슈가 손을 뻗자 시얼샤는 꺄르르 웃음 터뜨렸다. 밧슈도 덩달아 미소지었다. 

“어머니는 잘 만나고 왔어? 혼자 가게 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저도 다 컸구. 잘 만나고 왔어요! 안부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감사하대요.”

“아하하, 그새 선생님보다 더 의젓해진 것 같네~”

“그럼요! 열 밤이나 혼자 잤다구요. 이제 진짜 어른이에요.”

시얼샤는 뽐내듯 볼을 치켜들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밧슈는 소리내 웃고 말았다. 

“여기 진짜 재밌어요. 음식도 맛있구, 다들 친절하구. 이상한 사람도 많아요.”

“이, 이, 이상한 사람? 널 해치려는 사람이 있었니?”

“그런 게 아니라요, 진짜 이상한 사람!”

그리고 시얼샤는 옆옆 객실 시커먼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거기 웬 아저씨가 혼자 자는데요, 저한테 사탕 이마안큼이나 주고 연필 하나 빌려갔어요. 그거 새 건데! 그래도 전 착하니까 빌려줬어요. 그 아저씨, 무슨 편지 같은 걸 쓰고 있었거든요? 엄청 못 쓴 거예요! 첫마디부터, 반갑다. 이러는데! 너무 딱딱하잖아요. 내가 틀렸다고 해도 막 코웃음이나 치고! 근데 저번에 선생님이 그랬잖아요, 편지는 자기 할 말을 먼저 하는 거라구. 선생님도 그렇게 썼다구. 그래서 그거 알려줬거든요.

그…… 그으래? 

그 담부턴 바쁘다고 맨날 편지만 써서 잘 못 만났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요. 오늘도 사탕 받았거든요. 히히, 저 잘했죠. 

어, 어어……. 잘했네. 

근데 엔젤이란 건 누굴까요? 그 아저씨는 천사를 만나본 적이 있나봐요. 선생님은 천사 본 적 있어요? 

어, 그러게에……. 하하하. 

그리고 그 순간, 밧슈는 정말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한참 재잘거리는 아이의 어깨를 붙잡고 밧슈가 속삭였다.

“저기, 시얼샤.”

“네에?”

“우, 우리 그냥 선생님 바이크 타고 집 갈까? 운전 잘 할테니까, 응?”

“……진짜요? 여기까지 올 때 괜찮았어요?”

“그러엄! 선생님 믿지!?”

“후웅.”

“미, 믿지……?”


💌


하늘이 슬그머니 노을빛을 끌어오기 시작할 즈음, 울프우드는 객실을 나왔다. 퍼스트 클래스 객실의 도금된 손잡이, 음각이 들어간 문이 새삼스레 눈에 밟힌다. 이제 이것도 끝이겠구나. 탈 땐 별 생각 없었는데 내릴 때가 되니 분에 넘치는 호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젤… 빗자루 만나면 이 돈 다 어디서 났냐고 꼭 물어봐야지 안되겠네 이거.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꼬나문 채 문을 닫기가 무섭게, 옆옆 쪽에서 달칵, 똑같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 아저씨다.” 

아저씨두 나가요? 그새 머리를 새로 묶은 듯한 꼬맹이는 품에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있었다. 울프우드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꼬맹이의 가방을 뺏어 들었다. 꼬맹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뺏어가요!” 

“너 무거운 거 자꾸 들면 키 안 큰다. 근데, 벌써 짐을 쌌어?”

“네. 선생님이 빨리 가자구 하셔서요.”

“그러냐.”

아, 그러고보니 얘네 선생이 왔다고 했었다. 난 선생이란 존재랑 저렇게 친했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그나저나 뭐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암만 하루 지연됐대도 일정 막바지인데, 이렇게 도망치듯 가버리는 이유가 있나. 어찌됐든 내가 신경쓸 일은 아니긴 한데. 

그래, 아니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원래였다면 그 쯤에서 생각을 끝냈을 것이다. 그러나 복도는 길었고, 문에 가까워질수록, 언젠가 울프우드의 등에 달라붙었던 위화감이 발치에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곧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기시감. 무언가 일어나고 있고 곧 또다른 무언가가 터질 것 같은, 폭풍 직전의 고요함과 닮은 그것이 구두 끝을 살며시 감싸안는다. 명확한 이유도 모른 채 울프우드는 초조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야, 내가 또 뭘 놓치고 있지?

별안간 곁에서 걷던 꼬맹이가 울프우드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느새 복도 끝이었다. 놀란 듯한 그를 어리둥절하게 올려다보던 꼬맹이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저씨도 받아가요!”

“뭐를?”

“사과요. 저희 선생님이 과수원 하신다구 했잖아요. 되게 맛있는데 맨날 안 팔구 사람들한테 나눠주시거든요.”

팔아도 될 것 같은데 말이에요! 잔뜩 볼을 부풀린 꼬맹이의 말에도 울프우드는 어, 그러냐……. 얼떨떨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어차피 무료니까 아저씨도 많이 받아가라고, 그동안 자기랑 놀아줘서 고맙다고 전하는 꼬맹이는 똘똘하고 재빨랐다. 어느 정도였냐면, 울프우드가 방금의 기시감에 대해 되짚기보다 꼬맹이가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히는 게 빠를 정도로. 

주홍색 햇볕이 갑작스레 둘의 얼굴을 덮치자, 울프우드는 눈을 찌푸리려다 말고 하늘에 감싸인 그를 보았다.

노을과 함께 오는 하루의 마지막 햇살은 이루 말할 데 없이 황홀한 구석이 있었다. 이른 황혼이 내린 지평선은 꼭 황금을 머금은 것 같은 빛을 냈고, 그 중간에 멈춰있는 샌드스팀은 스스로 불의 물결에 감싸인 듯 했다. 그 모습은 마치 모래의 바다에 빠진 것 같아서…… 그래, 울프우드는 ‘바다’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홈에서 재활할 때 관련 서적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뭐, 가본 적은 없지만. 

책에는, 바다는 태양빛 중 푸른 빛만을 반사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하여 그렇게나 아름답고, 선명하고, 누구나 사랑하고마는 색을 만들어낸다고. 이 먼 별에 추락하면서도 그것을 향한 사랑을 잊지 못해 책이라도 남겨두지 않고서는 못 배길만한 빛깔을.

그의 눈 안에는 바다가 있었다. 

갑판에서부터 저 모래 위로 내린 계단 앞에서, 그는 그의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중이었다. 옆에는 사과박스가 두어 개 쌓여있었고, 그는 연신 ‘즐거운 여행 되시기를 바라요!’ 같은 말을 하며 사람들의 손에 새빨간 사과를 쥐어주었다. 아이들과는 직접 눈을 맞추고, 한 번씩 안아주며 잔뜩 상기된 웃음을 지어주고, 사과를 건넨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만큼 사과는 금세 동났다. 그러면 또 새 박스가 열렸다. 

대충 묶어 흘러내린 그의 흑발이 저녁바람에 너울댄다. 안경알 너머로 배시시 휘어지는 눈꼬리, 그 안에서 춤추는 푸른 물결. 단촐한 차림새 사이로 보이는 팔목에는 상처가 즐비했다. 쪼그려 앉아있지만 키는 꽤 클 것 같았다. 긴 드레스나 롱코트가 더 어울릴 법한 체형인 것 같기도 했다.

그를 이루는 것들 중 눈부시도록 붉거나 황금인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마주친 순간, 울프우드는 불현듯 깨달았다.

아, 저 사람이 나의 천사로구나. 

근데 표정이 왜 저러지? 울프우드가 미간을 찌푸리기가 무섭게, 먼저 이쪽을 알아본 엔젤― 빗자루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솔직히 울프우드는 그것마저도 꽤 예쁘다고 생각했다.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이고서 한 걸음 성큼, 다가가려는데.

“우와아아아아악!!!”

저놈의 빗자루가 냅다 소리지르는 게 아닌가. 울프우드의 눈썹이 휙 치켜올라갔다. 놀란 건 울프우드 뿐만이 아니었는지 주변인과 꼬맹이까지 휘둥그레해져서 무슨 일이에요, 선생님? 묻는 소리가 그가 멈춰선 곳까지 들렸다. 빗자루 스스로도 놀란 듯 싶었다. 사람들 말에 아, 버, 벌레가……. 하며 유순하게 대꾸하는 와중에도 이쪽을 흘끔거리며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는 게, 오호라. 각이 좀 잡혔다. 입가에서 헛웃음이 샌다. 빗자루의 편지를 처음 봤을 때처럼. 

그러니까, 지금부터 도망이라도 치시겠다? 하기사 편지를 그 따위로 써놨으니 알 만은 했다. 근데 내가 놓칠 사람으로 보이나. 그 쯤 되니 좀 알 것 같았다. 너를 붙잡으러 가는 건 결국 나여야만 했다. 넌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멍청이니까.

그저, 저런 멍청한 모습도 좋은 걸 보면 나도 멍청이 다 됐나보다, 하고 울프우드는 생각할 뿐이다. 



💌


울프우드는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처럼 험악한 얼굴을 한 채, 뒤돌아 선내로 사라졌다. 밧슈는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제대로 내쉴 수 있었다. 갑자기 발걸음을 돌린 걸 보니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닌 듯 했지만… 아무래도 빨리 가야할 것 같았다. 뭐가 됐든, 여기서 어그러지는 건 곤란했다. 그러니 지금이 기회였다. 밧슈는 재빨리 시얼샤의 가방을 챙겨들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저희야말로 감사하죠. 연료는 넉넉하시구요?”

“그럼요! 남은 사과는 여기다 두고 가도 괜찮을까요?”

당연히 괜찮다는 말에는 숨기지 못한 아쉬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 여행은 내일이면 끝나겠지만 그래도, 더 머물면서 놀다 가도 좋을텐데, 하는 마음들이 하나같이 상냥해서 급한 와중에도 밧슈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그 또한 그들의 상냥함에 충분히 화답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은 빨리 가야했다. 진짜 미안해요, 여러분! 가능하면 모두의 얼굴을 마주보며 사과를 드리고 싶었는데. 그거 정말 맛있거든요, 제가 열심히 키웠어요! 가지고 오는 길이 험난하긴 했지만 흠집은 바이크에만 났으니까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무언가 촉촉해진 선생님을 익숙하게 제쳐둔 시얼샤가 씩씩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아이가 지상까지 잘 도달한 걸 확인한 밧슈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샌드스팀과, 울프우드가 되돌아가며 닫힌 문과, 결국 그에게 건네지 못한 사과를 차례차례 눈에 담았다. 이게 맞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미련만은 남았다. 

사실, 네게도 사과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뒤돌아 사라진 네 뒷모습에 마음을 놓은 것 또한 사실이니까. 

난 여전히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다행히 밧슈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고, 방금 스치듯 봤던 울프우드의 모습 하나만으로 충분히 안심할 수 있었다. 편지가 제대로 일해줘서 다행일 뿐이었다. 쓸 때는 좀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네 성격에, 수상한 놈이라고 아예 읽지 않을 수도 있었을테니. 

그러니 부디 행복해야해. 

밧슈는 꾹 감았던 눈을 떴다. 정말로, 갈 시간이었다. 지금 출발해야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둘러멘 시얼샤의 가방을 한 번 추켜올린 밧슈는 계단 위로 발 끝을 내렸다. 그리고 영영 가버리려던 그 때.

쾅! 문이 뜯겨나갈 듯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밧슈는 물론이고, 곁에 있던 사람들까지 지레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작게 숨 들이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데도 밧슈는 차마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발소리. 단단한 구두굽이 나무바닥을 사정없이 내리찍는다. 저벅, 저벅. 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밧슈의 어깨가 흠칫흠칫 튀었다. 왜 돌아온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아서, 위급상황에 갇힌 머리가 팽글팽글 돌았다. 

아니, 뭐. 그냥 사과 받으러 오는 걸 수도 있지? 그렇잖아? 상식적으로. 내가 너무 자의식 과잉인 거야. 아까 뒤돌아 간 걸 보면 뭘 놓고 와서 그랬나보지. 아니면 면전에 대고 소리친 게 기분이 나빴거나. 됐고 빨리 내려가기나 하자. 

그러나, 기를 쓴 회피가 무색하게도, 발걸음은 밧슈의 바로 뒤에서 멈췄다. 

“어이.”

“…….”

“대답 안 하냐.”

하게 생겼냐고. 당장이라도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붙잡고, 밧슈는 고개를 돌렸다. 

……진짜 울프우드였다. 밧슈의 기억 속, 늘 그리고 되새겼던 모습과 거의 똑같은 울프우드. 어느새 꼬나문 담배에서부터 길게 자라난 연기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휘어진다. 편지에 그만 피라고도 적었던 것 같은데, 그건 일을 제대로 안 한 모양이네. 어느새 밧슈는 옅게 웃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무마시키기에는 웃는 게 제일인데, 다행히 널 다시 보니 노력하지 않아도 웃음이 나와서 그건 다행이다 싶었다.

근데… 쟤는 표정이 왜 저래? 생각하기가 무섭게, 울프우드의 입꼬리가 사납게 당겨졌다. 

“이거나 받아라.”

“……어? 아,”

품에 무언가 가득 안기자, 채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가 코끝에서 터진다. 아, 설마. 거친 손길에 휘청이는 밧슈를 울프우드가 잡아주는 와중에도, 밧슈는 품 안의 종이 뭉텅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뗄 수가 없었다. 손 끝이 잘게 떨렸다. 그의 성정만큼이나 날렵하게 적힌 글씨들이 도망이나 치려던 밧슈를 기어코 멈춰세웠다.

엔젤에게, 나를 뭔 멍청이로 아는 엔젤에게,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엔젤에게…….

그리고 마침내, 빗자루에게.

믿을 수 없다는 밧슈의 시선이 다시금 울프우드에게 향하고서야, 울프우드는 만족스레 웃음 터뜨렸다. 그래, 널 기다리고 있었어. 이럴 거면서 그냥 날 보내려고 했다니, 넌 진짜. 여즉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의 엔젤의 얼굴에 대고, 울프우드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편지 왔다, 빗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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