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건

길짐승에게 함부로 손 내밀지 마시오


스탬 WV 현대AU 

고등학생 울프우드 × 카페 사장 밧슈

* 현대인데 묘하게 한국 같음 당연함 나는 한국인임

* 사투리를 잘 몰라 울프우드가 표준어를 사용합니다

* 이게 진짜 뭐지? 여러모로 주의


🍩


알바 짤렸다. 질리지도 않고, 또! 

니콜라스의 분노 가득한 발길질에 찌그러진 콜라캔이 휙 날아가 벽을 때리곤 데굴데굴 굴렀다. 한참을 씨근덕대던 니콜라스는 뒤돌아 서서 골목 끝 패스트푸드점을 향해 중지를 쌍으로 날려주었다. 안에서 점장이 보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흘러내리는 가방 끈을 거칠게 올려 맨 니콜라스는 그대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입에 물고 있던 사탕만 처참하게 우그러졌다. 

이번이…… 몇번째 더라? 사실 니콜라스도 오래 버틸 거라는 생각은 딱히 하지 않았다. 보육원 아주머니가 걱정했듯이, 니콜라스는 일을 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싹싹함과는 일억 광년 정도 떨어진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이 나잇대 학생이 할 수 있을 만한 알바란 대충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점 정도가 아닌가. 온갖 진상들이 난무하는 전쟁터같은 곳에서 버티기에 니콜라스는 너무나도 어렸다. 보육원에서는 듬직한 맏형이지만, 세상에 있어서는 그저 등쳐먹기 좋은 어린 아이일 뿐이다. 

어찌됐건, 알바는 또 구해야했다. 열 여덟이나 되어놓고 문제집 살 돈까지 타갈 수는 없다는 맏형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아주머니가 알면 그런 건 제발 타가라며 등짝을 갈기겠지만, 보육원 사정이 어떤지 아는 입장에선 그조차도 어리광처럼 느껴질 뿐이다. 오늘은 이미 알바 갔다가 들어간다고 하고 나왔으니……. 적어도 11시까지는 있을 곳을 찾아야 했다. 

낡은 핸드폰으로 확인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이젠 한숨 쉬는 것도 귀찮았다.

있을 곳을 찾아야 한다고는 했지만, 알바가 없으면 당장 눈 앞이 캄캄해지는 지갑사정으로는 갈 곳이 지극히 한정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니콜라스는 딱히 고민하지 않고 사거리 앞 슈퍼에서 사탕 한 봉지를 샀다. 조그마한 봉지 안에 든 사탕은 꼭 여섯 개였다. 한 시간에 하나씩, 차근차근 녹여먹으면 11시 쯤이야 금방 오지 않을까, 하는 안일하고도 눅눅한 심정으로― 니콜라스는 그저 걸었다. 

초가을의 밤거리는 상당히 추운데다가, 또래들보다 한 뼘은 더 큰 니콜라스가 고개를 꺾어야할 정도로 높은 빌딩숲은 도시풍이 유난히 심했다. 낮은 곳에서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니콜라스에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걸음이 점점 빨라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니콜라스가 그렇게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다가, 전화부스 안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거리를 다섯 번 쯤 도는 동안 원래 계획과는 다르게 사탕을 세 개나 먹어버려 당황했을 무렵. 

“저기, 너 말이야.”

계절에 맞지 않는 봄 내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니콜라스의 뒷덜미를 간질였다. 

“……저요?”

“응, 미안해. 갑자기 불러서.”

놀랐지, 하며 사과하는 모습에 진심만이 가득해보여서 니콜라스는 눈을 부릅 떴다. 짧은 경험상, 이런 식으로 사근사근하게 접근하는 사람 중 제대로 된 인간을 통 못 본 탓이다. 자연스럽게 말끝이 뾰족하게 튀었다. 

“뭐요.”

“아니, 저어……. 아까부터 계속 돌아다니길래 신경 쓰여서. 방해했다면 미안해. 그치만 오늘 밤엔 기온도 내려간댔고……” 

혹시 괜찮으면, 내 카페에 잠시 있다가 가지 않겠니? 

예? 니콜라스가 무심코 고개를 들자 주황색 안경알 너머의 동그란 눈이 사르르 휘어지는 게 보였다. 녹아내리는 달콤함 같은 게 꼭 방금까지 입에 물고 있던 사탕맛이랑 비슷하게 느껴져서, 니콜라스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남자는 제법 화려한 생김새였다. 금발 투블럭에 피어싱, 색이 들어간 안경은 꼭 옛날 영화에나 나올 법한 호스트 깡패 같은데, 또 그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애기들 모아놓고 보여주던 만화 속 밤비마냥 순해빠진 게 신기했다. 얇은 가디건 위로 걸친 갈색 앞치마에는 ‘Cafe Geranium’ 이라는 필기체가 멋드러지게 쓰여 있었다. 아는 카페였다. 사거리 맞은 편에 새로 생긴. 

잠시 남자를 가늠하던 니콜라스는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러던가요. 승낙같지도 않은 승낙이었는데, 남자는 뭔 선물이라도 받은 것마냥 환하게 웃어 니콜라스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고맙댄다. 아니, 대체 뭐가. 남자는 카페로 안내하는 와중에도 순수한 기쁨을 숨기지 않아 니콜라스는 내내 당황해야만 했다. 진짜로 뭐가 그렇게.

하여간에, 그게 니콜라스와 순해빠지다 못해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머저리― 밧슈와의 첫 만남이었다. 


🍩


그 후, 니콜라스는 거의 매일같이 카페 제라늄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이유는 의외로 여러 개였다. 첫째는 사장이라는 밧슈가 돈도 없고 갈 데도 없는 청소년을 위해 기꺼이 테이블 하나를 내주었기 때문이고, (덕분에 예습복습은 까먹지 않고 할 수 있었다.) 둘째는 저녁 시간마다 그와 나누어 먹는 샌드위치가 꽤 맛있었기 때문이며, 셋째는…….

“아니!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어, 이게 아냐?!”

어쩌지, 또 망해버렸네……. 그래도 괜찮아, 내가 다 마실테니까! 밧슈의 아무 문제 없다는 듯 밝은 어조와 정반대로, 니콜라스의 얼굴은 시시각각 꺼멓게 죽어갔다. 그 사이 커피머신은 푸쉬식 소리를 내며 죽어가는 죄인마냥 샷을 뱉어내곤 멈췄다. 짜증나 미칠 것 같다는 니콜라스의 눈초리에 콕콕 찔린 밧슈가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배시시 웃는다. 괘, 괜찮지……? 

하아……. 결국 먼저 항복한 건 니콜라스였다. 밧슈의 가당찮은 말에 한숨만 푹푹 쉬던 니콜라스는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마를 짚었다. 아니, 이 멍청이는 오늘 하루 들이킨 망한 커피가 다섯 잔을 넘어가면서 뭘 더 마신다는 건가. 위장 뒤집을 일 있나. 게다가, 그건 둘째치고, 니콜라스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게 딱 하나 있었다. 

“이 실력으로 어떻게 카페 열 생각을 다 하지? 진짜 미쳤어요?”

“그치마안, 단골 분들은 늘 잘 마셨다고 해주시니까…….”

그건 그냥 니 멍청하고 말랑한 면상을 보고 그런 게 아닐까요. 니콜라스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와중에 이유 모를 답답함이 부글부글 끓어 탬퍼 쥔 손만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 대망의 셋째. 눈 앞의 칠칠맞은 카페 사장은 놀랍게도― 커피를 더럽게 못 만들었다! 

충격적이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는 발견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니콜라스가 알기로 ‘카페 제라늄’은 동네에서 꽤 유명했기 때문이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카페는 세련되고 깔끔한 인테리어와 편안한 공간, 굉장히 합리적인 가격으로 금세 입소문을 탔다. 사이로 ‘사장이 정말 훤칠하다더라’ 하는 이야기도 얼핏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니콜라스는 어림도 없다는 듯 밧슈의 손에서 유리잔을 뺏어 싱크대에 그대로 부어버렸다. 까만 원액이 고인 수돗물과 한데 섞였다가 잉크 퍼지듯 사라졌다. 

“원두 아까우니까 그만하죠?”

“그, 그래도…….”

“또 망치고 싶음 내일 하시던가.”

아, 내일도 올 거야? 한참 어린 애의 눈치를 보느라 축 처져있던 밧슈의 얼굴이 순식간에 꽃피듯 환해졌다. 아! 또다. 밧슈가 이렇게 한 번씩 만개할 때마다 니콜라스는 방어기제처럼 눈가를 찌푸려야 했다. 조명은 그대로인데 짜증나게 눈이 부셨다. 그러면 네가 좋아하는 치아바타 샌드위치 또 해줄까, 묻는 낯이 기대로 몽글몽글 빛난다. 그 대책 없이 밝은 얼굴 앞에서 다신 안 올거라는 말도 못하고 니콜라스는 가방에 교과서만 쑤셔 넣었다. 그러니까 그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염병할! 

니콜라스가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몇 시에 올테니까 연습이나 잘 해둬라, 이딴 말이나 갈기곤 카페를 나선 후였다. 아니, 진짜 뭐냐고. 근데 걷다 대고 안 온다고 하기도…… 아오, 망할! 니콜라스의 커다란 손에 들린 플라스틱 컵이 우그러진다. 요즘 계속 이랬다. 


🍩



사실 밧슈가 커피를 잘 타든 말든 니콜라스에게는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깊은 관계도 아니고. 그런데도 자꾸 그 점이 눈에 밟혔다. 그게 문제였다. 하나가 신경쓰이기 시작하니 온갖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진상 손님 앞에서도 헤실헤실 웃기만 하는 밧슈, 꽃병의 물을 갈아주다 와장창 깨뜨려 허둥거리는 밧슈, 가게 앞을 정리하다가 동네 꼬마들에게 관절기나 걸리는 밧슈, 샌드위치를 양 볼 가득 물고 이쪽을 보는 밧슈, 스팀에 왼손이 데였는데도 가만히 있다가 저에게 혼나는 밧슈, 망한 커피를 마시고 오만상을 찌푸리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또 바보같이 웃는 밧슈. 

그 쯤 되니 그냥 밧슈가 거슬렸다. 

실수해서 다치고도 웃는 게, 톡 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구는 게,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른다는 듯 사람을 대하는 게. 정작 그 범주 안에 밧슈 자신은 들어가 있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이.

차라리 그냥 내버려둘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니콜라스는 그런 걸 간단히 쳐낼 정도로 모진 인간이 못 되었다. 니콜라스가 생각하기에 이것도 좀 문제인 것 같았다. 그 순진하고 덧없는 웃음을 외면하지 못해서 그보다 나이 많은 성인 남성을 계속해서 챙기고, 살피고, 타박하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됐다. 

“그거 그냥, 형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 아냐?”

“미쳤냐?”

“아니…….”

그렇게 들리는데. 니콜라스 옆에서 감자 깎던 리비오가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노오란 눈동자가 소리 없이 굴렀다. 니콜라스는 무언가 대답을 바라는 것 같은 동그란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쯧, 혀를 차버리곤 일없는 냄비만 뒤적거렸다. 

달마다 셋째 주,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은 보육원에 특식이 나오는 날이다. 특식이라고 해봤자 경양식이나 피자 정도였지만 자라나는 애기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신이 나 하루종일 굴러다녔다. 오늘은 경양식이었다. 그것도 아주머니가 직접 만든 수제 햄버그. 최근 후원이 늘어 전체적인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고 전해들었다. 다행이지 뭐. 덕분에 니콜라스는 카페로 가는 대신 부엌에서 수프나 젓게 되었지만. 

리비오는 여전히 니콜라스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저 딴엔 자기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사각사각 감자칼이 움직이는 소리 사이로, 아니 진짜 좋아하는 거 아닌가 참내 하는 소리만 꿍시렁대는 게 아주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니콜라스는 스프 간을 보려고 꺼낸 숟가락으로 냅다 리비오의 뒷통수를 후려갈겼다. 깡!

“악!”

“여엄병, 사춘기냐? 신경 쓰이면 다 사랑놀음이게?”

“아씨, 그런 거 아니라니까!”

“씨? 씨 뭐. 너 그 사람 몇 살인진 알어? 짜증나게 굴지 말고 가서 아주머니나 불러와라.”

맏형의 무신경한 투에 입이 아주 오리 부리가 된 리비오가 발을 쿵쿵 구르며 일어났다. 아주머니를 부르러 멀어지는 발소리가 아주 심통이 덕지덕지 묻은 것 같았지만, 알 바인가. 좋아한다느니 뭐니 되도 않는 소리를 한 리비오가 잘못한 거다. 니콜라스는 빠르게 리비오의 뒤통수에 난 혹을 잊어버렸다. 대신 다른 생각이 슬그머니 그 자리를 채웠다.

이를 테면, 저녁의 커피향 같은 것. 

카페 제라늄은 가격이 싼 것에 비해 ―그리고 밧슈가 늘 커피를 잘못 내리는 것에 비해― 굉장히 좋은 재료를 썼다. 비단 원두 뿐만이 아니라 빵, 크림, 샐러드도 그랬고, 하다 못해 코스터 하나에서까지 상큼한 세련미가 묻어났다. 언젠가 니콜라스가 이렇게 장사하면 뭐가 남긴 하냐고 닦달했을 때 밧슈는 말없이 웃기만 했었다. 그 때 잠시, 이런 멍청이가 세상을 잘 살아내고 있는 게 다행인 건지 아닌지 생각했던 것도 같다. 

하여간에 그래서, 밧슈가 원두 봉투를 뜯을 때마다 그 속에 고여있던 커피 특유의 쌉싸름한 고동색 향이 카페 가득 퍼졌었다. 밧슈는 그 순간을 꽤 좋아하는 듯 했다. 만드는 커피마다 원두 향은 커녕 탄 맛 밖에 안 나는 주제에, 늘 봉투 뜯는 건 자기가 하겠다며 가져갔으니까. 

하긴. 꽃 향기도 으레 그런 식으로 퍼지지 않는가. 

니콜라스는 문득 이 시간의 밧슈가 궁금해졌다. 

다른 때였으면 그와 함께 있었을 텐데, 오늘은 혼자일테니까. 아니, 물론 니콜라스가 없었을 때는 혼자인 게 당연했겠지만! 어찌됐든 어영부영 같이 보낸 시간이 꽤 길어졌으니 말이다. 늘 함께 먹던 샌드위치도 혼자 먹을 것이고, 커피 망쳐도 망했다 아니다 판별해줄 사람도 없을테고, 손님 없을 때 이야기 상대 해줄 사람도 없고, 짓궂은 꼬마나 진상들을 쫓아줄 사람도 없고, 늘 뭔가를 흘리고 다니는 그를 도와 마감 청소 도와줄 사람도…….


―니콜라스!

아, 또다.

염병할! 

“어머, 니콜라스. 이 시간에 어딜 가니? 저녁도 안 먹고.”

“잠깐요. 갔다 와서 먹을게요.”

“안 남을 지도 모르는데?”

“괜찮아요.”

니콜라스는 리비오가 돌아오자마자 국자를 넘겨주고는 벗어두었던 신발에 도로 발을 꿰었다. 접시를 나르던 아주머니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잡아세웠지만, 니콜라스는 뚱한 낯으로 대충 대꾸한 뒤 보육원을 빠져나왔다. 옆에서 리비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건 애써 모른 척 했다. 망할, 니는 아는 것도 없으면서 뭘 아는 척이냐. 

생각해보면 아는 게 없는 건 니콜라스도 똑같았다. 기본적인 나이도, 가족사항도, 좋아하는 음식이나 색도, 취향이 어떤지도, 과거에 뭘 했는지도, 어쩌다 카페를 열게 됐는지도, 맨날 호구처럼 사는 이유도, 질리지 않고 그런 웃음을 짓는 까닭도, 하물며 풀네임조차도. 

그래서 더, 니콜라스는 조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스스로가 조급하다는 걸 알아채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



카페 제라늄의 불이 환하게 켜져있다. 

밤 9시 즈음. 시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데, 니콜라스는 모퉁이를 꺾자마자 보이는 그 익숙한 조명에 도리어 안심해버리고 말았다. 직후 안심해버린 스스로에게 짜증이 치밀었지만, 이미 뛰다시피 빨라진 걸음을 늦출 마음은 들지 않아 그대로 카페까지 내달렸다. 아스팔트 사이로 고인 빗물이 갈팡질팡 튀었다.

오는 길에 짧게 비가 내렸다. 언젠가 손 끝으로 툭 치듯 만져봤던 밧슈의 머리칼만큼 보슬거리는 얇은 비였다. 급하게 나오느라 하늘 볼 생각도 못했던 니콜라스는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었다. 대충 걸친 셔츠깃이 차츰 젖어들어갈 때마다 니콜라스는 밧슈를 떠올렸다. 많은 시간을 보낸 데에 비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러나 왜인지 곁에 있어주어야 할 것처럼 마냥 유약한 어른에 대해서. 

마침내 카페 앞에 도착한 니콜라스가 문을 열어 젖혔을 때, 

“아.”

“아, 니콜라스!”

오늘 좀 늦었네~ 비 맞고 왔어? 잠시만, 수건 가져올게! 손님이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조심조심 의자를 끌며 일어난 밧슈가 총총 카운터 안쪽으로 사라졌다. 슬쩍 시선을 흘려 확인한 밧슈의 옆얼굴은 변함 없이 화사했고, 그제서야 니콜라스는 자신이 숨을 몰아쉬고 있음을 자각했다. 밧슈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사이 니콜라스는 카페 안을 돌아보았다. 

카페는…… 니콜라스의 어줍잖은 예상과는 한참 달랐다. 그냥 깔끔했다. 깨진 것도, 흘린 것도, 하다못해 바닥에 쓰레기도 하나 없이. 아직 마감 시간이 아니라곤 해도 꽤 늦은 저녁인데, 평소라면 이리저리 흘리고 다녔을 밧슈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라고― 니콜라스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문득, 니콜라스는 스스로가 한심해지고 말았다. 

그랬다. 밧슈가 아무리 멍청해도, 얼마든지 호구처럼 퍼주고 살아도, 이따금씩 흩어질 것처럼 웃어도― 나보다는 어른일텐데. 나와는 결이 다른 경험을 한, 오래 산 만큼 터득한,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채워지지 않을 간극이 있을. 이름과 얼굴밖에 모르는 남자애 한 명 쯤 없어도 혼자 모든 걸 해낼 수 있을 어른인데, 왜 나는. 쥐고 있던 것도 몰랐던 주먹이 잘게 떨려 손톱이 손바닥 사이로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부끄러웠다, 그냥. 

푹 숙인 시야로 하얀 수건이 내밀어진 건 그 때였다. 

“니콜라스, 괜찮아?”

조금 떠는 것 같은데, 혹시 아직 춥니. 온도를 좀 더 올릴까.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밧슈의 손등이 빗물과 추위에 언 니콜라스의 볼에 와닿았다. 닿은 부분부터 봄인 느낌이 들어서, 밑바닥에 고였던 무언가가 마구 울컥이며 목구멍을 타고 흐를 것 같았다. 니콜라스는 욕지기인지, 수치심인지,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사랑스러움인지 모를 이걸 적어도 이 사람 앞에서 게워내면 안될 것이라 직감했다. 방어기제였다. 

니콜라스는 밧슈의 손이 닿자마자 그 손등을 매섭게 쳐냈다. 짝,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밧슈의, 안 그래도 커다랗게 푸른 눈동자가 더욱 동그랗게 뜨였다. 

“아, 그, 미안해……. 함부로 만지는 건 불편하지, 아무래도.”

“아니,”

왜 또 당신이 사과하는데? 어린 부아가 치밀었다. 그 쯤 되니 아까부터 속에서 아우성치던 건 역시 욕이었구나 싶었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좋겠다고 니콜라스는 생각했다. 그렇게 짜증나게 웃지만 말고 갑자기 왜 그러냐고 큰 소리라도 내는 게 낫다고, 그래야 내 마음이 좀 편하겠다고.

참고 참았던 것을 토해낼 생각으로 입을 열었을 때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그!”

“으응?”

“파, 파, 팔 한짝 어디 갔어요!”

어, 어어? 밧슈의 심각하도록 멍청한 반응에 니콜라스만 속이 다 터졌다. 그도 그럴 게, 여느 때처럼 단정히 차려 입은 니트 베스트 바깥으로 비죽 튀어나왔어야 할 왼팔…… 이 어깨 아래부터 온 데 간 데 없이 뚝 사라진 거다. 황당함이 도를 넘어서 기가 막혔다. 부끄러운 것을 들켰다는 반응이기까지 해서 바라보는 니콜라스만 또 속이, 

“저어……, 니콜라스. 괜찮아.”

예?

“이거 의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예에?



🍩



혼자 연습하다가 엎지른 것이 운 나쁘게 의수 접합부 틈으로 흘러들어갔다고 했다. 삐걱거리기만 하고 도무지 만족스럽게 움직여지지 않는 게 장사는 무리일 것 같아, 우선 클로즈를 걸어 놓긴 했는데 혹시라도 그가 올까봐 문은 열어놓았다고 했다. 그게 대충 5시쯤 이었다고도. 

조곤조곤 쏟아지는 이야기를 전부 들은 니콜라스는 다른 것보다 먼저 저, 쓸 데 없이 해맑기만 한 얼굴을 한 대 후려 갈기고 싶었다. 

“왜 일찍 말 안 했어요.”

“어? 그냥,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고…….” 

누구한테 하기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오……. 의수라니, 듣기 조금 그렇잖아. 자연스럽게 말 끝을 흐리는 밧슈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부드러웠지만, 니콜라스는 잔뜩 찌푸린 미간을 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번에 스팀에 손 데였을 때도 아무 반응이 없었던 거구나, 따위의 생각만 쓸 데 없이 머리를 스쳤다. 

아는 게 없어서 분하고 초조했던 게 바로 직전인데, 막상 하나를 알고 나니 기쁨이나 만족감보다 답답함 비슷한 것이 니콜라스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질문만 배로 늘어난 기분이 들었다. 속아 넘어간 것 같은 야속함도. 정작 눈 앞의 머저리같은 어른은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아니, 했다면 했다. 

최근 니콜라스는 커피 향만 맡으면 자연스럽게 붉은 제라늄이 떠올랐다. 

“그래서 수리가 끝나기 전까지 문을 닫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그러면 너를 못 만나니까. 같이 의논하려고 쭉 기다렸어.”

“왜 그렇게까지 해요?”

“응?”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요.”

“아하하……. 그러게……?”

니콜라스의 날 선 반응에도 불구하고, 밧슈가 내놓은 답은 그 한 문장이 전부였다. 심지어 그렇게 말하는 낯빛에는 그 모든 것에 대한 익숙함과 일말의 체념이 얼핏 흐르기까지 해서, 먼저 찌르고 든 니콜라스가 도리어 이를 악물어야 했다. 

“처음부터 생각한 건데.”

“응응.”

“당신 진짜 짜증나요.”

미, 미안해애……. 진심을 다해 사과하면서도 이 답이 맞는지 끊임 없이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눈에 박혔다. 결국 니콜라스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쯧, 혀차는 소리와 밧슈의 멋쩍은 웃음이 테이블 하나 사이를 채운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은 사이, 니콜라스의 갈 데 잃은 시선이 테이블 위로 향했다. 그의 닦달을 이기지 못한 밧슈가 마지못해 올려놓은 의수가 거기 있었다. 

의수는 그 쪽으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니콜라스가 보기에도 굉장히 정교한 기술의 집합체였다. 지금까지 니콜라스가 봐왔던 밧슈는 늘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확실히 그렇게 넘긴다면 위화감이 없을 것처럼 그저 수려한 모양이었다. 처음 목격한 밧슈의 왼손 손톱은 청록색이었다. 

저도 모르게 뻗은 니콜라스의 손 끝에 그 뭉툭한 끄트머리가 톡 닿았다. 당연하게도 차가웠는데, 니콜라스는 방금 쳐냈던 손등보다 그 인공 손이 더 뜨겁다고 느꼈다. 관절이 도드라지게 나뉜 손가락 사이로 니콜라스의 커다랗지만, 아직 솜털이 남아있는 어린 손이 억세게 얽혀들었다. 

이렇게나 쉬운데 어째서, 닿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건지. 

바깥에는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쏴아아, 하는 소리가 두꺼운 유리 하나를 두고 막막하게 주변을 감싸며 울렸다. 생각에 잠긴 니콜라스보다 먼저 먹구름 낀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밧슈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니콜라스. 내 생각보다 내가 널 좋아하나봐.”

“……갑자기요.”

“응. 갑자기.”

그야, 누군가의 앞에서 의수 얘기 해본 적은 없는걸. 

소스라치게 놀란 니콜라스가 밧슈 쪽을 바라보던 바로 그 순간, 팟, 하고 전구불이 일시에 사그라들었다. 이어 먼 하늘에서부터 뒤늦은 천둥이 잔향처럼 울렸다. 어라라. 어둠 속에서 한쪽 팔만 휘적이던 밧슈가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새 어둠에 익숙해진 니콜라스의 시야에는 바깥의 네온사인과 채 꺼지지 않은 야경에 물든 밧슈만 선명했다. 눈이 마주치면 안경 너머의 눈꼬리가 곤란하다는 듯 휘어진다. 어느새 테이블 위로 턱을 괸 밧슈가 니콜라스를 바라본다. 변함 없이 흩어질 것처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니콜라스는 숨이 턱 막혔다. 먹은 것도 없는데 토할 것 같았다. 

“저녁은 먹었어?”

“……아직요.”

여기 오느라 걸렀다고는 죽어도 말 못한다.

“그렇구나, 미안해. 아까 실수하지만 않았어도 만들어 줬을텐데…….”

“그러니까,”

당신이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아니, 사과해야 할 건 그게 아니라고. 그보다는 두 눈 똑바로 뜨고 당신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좀 보라고 악을 쓰며 소리치고 싶었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당신 말마따나 나는 오늘 특식도 못 먹고 당신 걱정에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당신은 내가 없는 게 당연한 것처럼 멀쩡하기나 하고 주고받은 것 없이 패한 기분이 드는 이 상황이 가당키나 하냐고. 

열 여덟의 니콜라스가 말로 표현하기엔 그 안에 뿌리내린 게 너무나도 장황하고 묵직했다. 

그런데도 니콜라스의 눈 안에서, 밧슈는 여전히 한 떨기 꽃처럼 웃기만 했다. 

“있지, 그러면― 비가 그칠 것 같지도 않고, 시간도 늦었고, 너도 저녁이 아직이고.”

“…….”

“괜찮으면, 우리 집에 들렀다 가지 않을래? 쌀쌀하니까 몸 녹였다 가. 아, 밥도 줄게!”

팔이 이래도 간단한 요리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사실 고장낸 게 한 두 번이 아니어서 익숙하거든……. 뒷말은 니콜라스의 귀엔 닿지도 못했다. 어, 저, 그,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이 미친 어른이. 

“혹시 싫어……?”

“……하.”

이번에도 먼저 이마를 짚은 건 니콜라스였다. 여기까지 오니 아까부터 목구멍 아래로 차오른 건 분노도, 욕도 아니고 그냥 허탈한 웃음이었나 싶었다. 그렇게 싫었냐며 잔뜩 주눅 든 밧슈가 여전히 멍청하고 답답한 게 딱 호구의 정석처럼 여겨지면서도, 도저히 이겨 먹을 생각이 들지 않은 탓이다.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던 니콜라스가 일어난 건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난 후였다. 그가 일어서기까지 기다린 건 밧슈인데도 니콜라스는 빨리 안 일어나고 뭐하냐며 그가 앉은 의자 다리를 냅다 걷어찼다. 그리고는 왜인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카운터 안쪽으로 사라졌다. 

휘청이다 겨우 고개를 든 밧슈의 눈에 그를 대신해 짐을 챙기는 니콜라스가 보였다. 가로등 빛이 얼핏 스친 귀 끝이 꼭 붉은 제라늄처럼 붉었다. 밧슈는 그 색이 무슨 뜻인지 가늠하다가, 고개를 젓고는 그냥 웃어버렸다. 생각해봤자 모를 일이고, 그럴 리 없기 때문에.

여전히 바깥에선 비가 그칠 생각을 않았다. 니콜라스에겐 야속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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