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여왕이 다스리고 왕족과 귀족이 활보하던 한 가상의 국가에서.......

페이 올슨은 퉁퉁 부은 입술을 톡톡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까마귀는 짜증스럽게 그러면 상처가 덧날 뿐이라고 얘기했다. 까마귀를 배웅해주는 길에, 페이 올슨은 맞고 있었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검은 옷을 입은 그 사람들은……. 여러모로 봐도 장례식 문객들이었다. 크로우 박사. 까마귀는 페이 올슨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에녹은 눈을 가늘게 뜨고 까마귀에게 말했다.

저 여자는 꼭 필요한 존재요.

까마귀가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왕국의 첫째 왕자라면 뭔가 수가 있겠지. 에녹은 그를 시험해보고자 했다. 까마귀는 경찰이나 들고다니는 왕실의 인장을 꺼내 문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사람은 용의자이기 때문에 경찰에서 관리해야합니다. 법원에서 적법한 판결이 나올 것이고, 사적인 처벌은 엄금입니다.

까마귀는 페이 올슨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세웠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는 켁켁거리며 웃고 있었다. 코피가 흐르고, 눈가엔 멍이 들고, 입술은 퉁퉁 부어있어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의 생도복도 엉망이 되어있었다.

에녹 경위, 갑시다.

까마귀가 에녹을 자연스럽게 불렀다. 에녹은 해군처럼 경례를 올려붙였다. 경례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에녹이 경례를 하고 멈칫하는 그 순간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페이 올슨이 잠긴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경위 양반,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수?

건들거리며 페이가 말했다.

건방지다, 죄인 주제에.

에녹은 페이 올슨의 뺨을 후려갈겼다. 한번쯤 해보고 싶던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속마음이 당황스럽게 튀어나왔다.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에녹은 페이 올슨을 쳐다보았다. 다행이 문객들 쪽에선 얼굴이 안 보이겠지만 페이는 그를 완전히 보고 있지 않은가.

얌전히 따라오기나 해.

까마귀가 앞섰고, 에녹이 뒤에 서서 페이 올슨을 감싼 모습으로 걸었다. 페이 올슨은 스스로 수갑을 찬 척 팔을 뒤로 돌리고 걸었다. 경찰서 쪽으로 한참 걸었고 문객들은 보이지 않았다. 페이가 기지개를 켰다.

아이구, 아이구……. 오랫만에 맞았더니 온 몸이 쑤시네.

문객들이 어디서 나올지 모르니, 여기서부터 조금 돌아서 걸어가도록 하지.

또 걸어? 나 그냥 저기 갖다 처박으려는 게 아니었나?

페이 올슨.

네네 대선배님. 저를 존대하지 않고 하대하는 것 보기 좋습니다. 물론 여자는 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없죠, 네. 그래서 말인데. 저 인간의 권위를 이용해 경찰서 마차를 빌리는 것은 어떨지……?

페이 올슨은 답지 않게 괜찮은 의견을 냈다. 에녹은 그 사실이 불쾌해서 시선을 살짝 돌렸다. 까마귀는 더듬거리며 말을 했다.

날, 어떻게 알……. 알지?

어떻게 아냐니? 프레이야 올슨의 배신자 아닌가.

불편한 침묵이 있었다. 어리둥절한 까마귀와 그걸 보면서 비스듬하게 웃는 페이 올슨,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는 에녹……. 에녹은 결론을 내렸다. 걸어서 집에 가는 것으로. 까마귀의 권위는 너무 크기 때문에 함부로 남용하면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세 사람은 빙 돌아 집으로 갔다. 까마귀는 페이가 뭘 아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치료를 시작했다.

페이 올슨. 프레이야 올슨의 배신자라는 말이 뭐지? 프레이야가 네 본명 아니었나?

저번에 말했다시피 프레이야는 나와 달라. 물론 한 몸을 갖고 경쟁하는 사이이긴 하지만…….

연적인가?

아. 남자 몸을 가져봐야 뭐 하겠어? 재미도 없는 거. 이 몸,

페이 올슨은 자기 가슴을 쿡쿡 가리켰다.

올슨의 몸을 차지하기 위한 나의 쌍둥이이자, 쓸모없는 언니, 또 다른 나야.

그런 궤변 늘어놓지 마라.

까마귀가 인상을 찌푸렸다. 에녹은 그 말을 심각하게 들었다. 정신병원에서 들은 적 있었다. 한 몸에 두 개의 자아가 있는 사람. 이중인격이라고 부른댔나. 페이와 프레이야는 이중인격자인가?

프레이야는 어디있지? 어떻게 불러내냐고 물어야하나?

멍청한 자식.

페이 올슨이 까마귀를 옆으로 치우고 일어나려고 했다. 에녹과 까마귀가 프레이야를 억지로 앉혔다.

멍청한 자식들, 소위 까마귀라는 새끼는 우리 프레이야를 배신했고, 에녹 너라는 작자는 프레이야를 타겟으로 제거하지 않았나? 프레이야는 죽었어.

몸은 살아있지 않나. 그렇다면 프레이야도-,

그래. 몸만 살아있다면 자아는 남아있겠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프레이야가 죽어버렸다고. 프레이야가!

페이가 으르렁거렸다. 에녹은 그에게서 손을 떼고 잠시 까마귀를 불렀다. 두 사람은 프레이야와 페이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진위를 판별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다. 페이가 비명처럼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까마귀와 에녹은 서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에녹은 프레이야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그 한 달 동안의 기억이 사라졌다. 머리를 단정하게 머리망에 넣은 여자와 총을 겨누고 있는 것, 이것이 유일한 기억이었다. 까마귀는……. 그는 뭘 기억하지 못하는가?

일단, 믿어보도록 하죠.

노래부르듯이 소리치는 페이를 슬쩍 가리키며 에녹이 제안했다. 까마귀는 미덥지 못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세 사람은 아무도 원치 않는 협약을 맺게 되었다.

그럼 페이 올슨.

치료가 다 끝나고, 에녹이 페이 올슨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왜 맞고 있었던건가? 그들은 크로우 박사의 문객인가?

대선배님, 질문이 잘못되지 않았나요?

페이 올슨이 키득거렸다.

내가 왜 맞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크로우 박사의 문객이 왜 그 곳에 있었는지를 물었어야지.

문객들이 있던 곳은 에녹의 집에서 두 블럭 떨어진 곳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곳에는 장지가 없다. 교회는 반대쪽으로 네 블록은 가야 나온다.

남장여자라고 맞고 있었지.

거짓말 마라,

왜요 대선배님. 당신께서도 저를 남장혐의로 종종 감방에 때려넣고 싶어 하잖습니까.

그건 네가 먼저,

당신은 세상이 망하게 생겼는데, 여자가 해군 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는건 안 믿어집니까?

에녹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알고, 알고 있었나? 하지만 프레이야가-…….

그래, 프레이야 프레이야 프레이야, 억울하지만 난 그 새끼보다 아는게 없다. 그러나 세상이 망한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지.

페이 올슨.

까마귀가 끼어들었다.

프레이야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나?

페이 올슨은 생각에 빠졌다. 그가 말을 꺼내기 전,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왔다. 곧 고용인이 와 에녹에게 보고했다.

주인 나리, 밖에 수도사 한 분께서 부탁이 있다고 물건을 배달해달라고 하는군요. 쫓아낼까요?

직감했다. 뭔가 이상하다.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에녹은 자기가 직접 보겠다고 했다. 혹시 모르니 다른 두 사람도 대동했다. 구부정한 늙은 수사였다. 커다란 십자가 펜던트를 차고,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굽슬굽슬한 수염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가 공손하게 들고 있는 것은 오동나무 상자였다. 에녹은 그게 뭔지 알아차렸다. 자신의 편지함이다. 프레이야 올슨과의 편지가 보관되어있는 편지함. 하지만 두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페이는 다행이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까마귀는 저게 뭔지 조차 모를 것이고.

안녕하십니까.

낮고 느린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쥴 수사입니다. 일이 꼬여 이 상자를 필요한 곳으로 보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왜 하필 우리입니까, 수사님.

에녹이 물었다. 따지는 말이었지만 말투는 존중심이 듬뿍 묻어났다.

이 집은 크니, 하인들이 있을거라 판단했죠. 직접 가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인 등을 시켜 이 주소로…….

수사가 편지함을 내려놓고 주소가 적힌 쪽지를 꺼냈다. 고풍스러운 글씨체였다. 뒤에 있는 빈민가 시작 지점의 한 가게였다. 에녹이 의심을 표하기 전, 수사가 말했다.

이전에 저희에게 큰 적선을 베풀어주신 자였습니다. 수도사들이 감사의 편지와 소정의 선물을 드리기 위해 이렇게 준비했는데…….

평소라면 거절했을까? 에녹은 이제 교회에 나가지 않으니까? 아니다. 에녹은 그래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더더욱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수도사다. 개신교적 신앙을 주입받은 에녹은, 이제 교회에 다니지 않더라도, 종교인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라는 것이 있다.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까마귀는 반발하듯 에녹을 쳐다보았고, 페이는 예상했다는 듯이 온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수도사는 사라지고 에녹과 페이, 까마귀, 그리고 편지함과 주소만 남았다.

마치 인육공장 같네.

페이 올슨이 말했다. 비아냥거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흘려듣기엔 상당히 껄끄러운 말이었다.

왜, 자기 문맹이라고 편지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남자 괴담. 착한 신사가 그 편지를 가져다주다 이상해 읽어보니 거기에 이 고기가 마지막이라고 적혀있었다지?

어린 애들 이야기다. 별 것 아니니, 일단 가도록 하자.

에녹이 문을 열 때 까마귀가 편지함, 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제발 아무 일이 아니기를 바라며 에녹은 문 밖으로 한 발 내딛었다. 빈민가 입구까지는 멀었다. 걸어서 30분 정도. 걸어가는 동안 불길한 고함소리, 함성소리,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빈민들의 집에서 아내를 패고 술병을 집어던지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다. 마치 군인들의 고함소리, 상관의 명령하는 함성소리, 진격하여 유리창으로 된 바리케이드를 깨부수는 것 같은 소리였다. 세 사람은 걸음을 빨리 했고, 사람들이 점점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저 가게다.

에녹이 주소를 힐끗 보았다.

왜 사람들이 저렇게 몰려있지?

까마귀의 질문에 페이 올슨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폭동이야!

에녹과 까마귀도 페이의 뒤를 따라 뛰었다. 곧 그들은 거대한 인파에 휩쓸렸다. 까마귀가 뭐라 울어댔으나 그는 사람들에 휩싸여 왼쪽 방향으로 사라졌다. 페이 올슨은 스스로 인파에 뛰어들어간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에녹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썼지만 곧 이 편지함에 프레이야와 종말에 대해 논한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잔뜩 들어가있다는걸 생각해냈다. 그도 그 안에 있는 내용은 모른다. 단 한 통의 편지만 읽었을 뿐이다. 가게를 털려고 이렇게 우우 몰려든 사람들에게, 글을 읽을 수 있는 누군가가 소리친다고 생각해보자.

여러분, 세상이 망한대요!

에녹은 편지함을 꽉 안았다. 그리고 그게 보이지 않도록 몸을 구부린 채 조금씩 조금씩 인파 밖으로 움직였다.

이 새끼!

인파에서 손이 나와 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가게에서 벌써 뭘 훔친거야? 우리랑 나눠야지!

성난 손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 에녹의 얼굴을 할퀴고, 편지함을 가져가려고 했다. 에녹이 소리쳤다.

진정하세요! 이건 그냥 편지함입니다!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에녹은 상자를 활짝 열었다. 떨어진건 편지가 아니었다. 폭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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