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

여왕이 다스리고 왕족과 귀족이 활보하던 한 가상의 국가에서........

세 사람은 다시 머리를 맞댔다. 페이 올슨이 장례식 문객들에게 얻어맞은 일 때문이었다. 왜 거기에 장례식 문객들이 있었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페이 올슨이 제시한 대로였다. 이 근처엔 장지가 없었고, 교회조차도 한참을 가야했다. 에녹은 그 핑계를 대고 교회에 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왜 맞고 있었지? 남장혐의라는 되도 않는 핑계를 댄다면…….

까마귀가 흉흉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전혀 협박이 되지 않았다. 일단, 페이 올슨이 육탄전에서 질 것 같지 않았고, 둘째, 까마귀는 총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며, 셋째, 페이 올슨이 그런데에 눈을 깜빡하면 그것이야 말로 기이한 현상일 것이었다.

크로우 박사의 장례에 참여한 문상객들이라 그렇지, 뭐.

페이 올슨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까마귀는 자기를 말하는 줄 알았는지 페이를 빤히 쳐다봤다. 에녹은 까마귀를 믿지 않는 쪽으로 금화를 하나 더 얹었다. 에녹이 정신병원에서 그 사건을 일으킨 것은 왕세자 저하의 명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크로우 박사에 대해 얼마나 아나, 페이.

에녹이 물었다. 페이는 되물었다.

근데 왜 가짜로 미친 척 할 때 내 외관을 들먹이면서 가상의 귀신을 만든거야?

어쩌다보니 네가 생각났다.

사실 전혀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떠벌리고 싶었다. 에녹은 의심의 싹을 억누르고 페이 올슨에게 재차 물었다. 크로우 박사에 대해 아는 것이 뭐가 있냐고. 페이는 몇 가지 사실을 말했다. 에녹이 들어갔던 정신병원의 의사였다는 것과, 결벽에 가까운 청렴한 생활을 했다는 것, 그리고 국교도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는 것. 별 것 아닌 정보였지만 페이 올슨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국교도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는 것, 이 점이 의심스러워.

국민들의 대부분은 국교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 아무리 벗어나봤자 구교나 다른 개신교 종파로 가겠지.

그래, 그 기독교적- 믿음 말이야. 우리에게 무슨 종파인지 모를 수도사가 찾아왔잖아?

머리가 아팠다. 갑작스러운 두통이었다. 에녹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은 채 잠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까마귀가 괜찮냐 묻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에녹은 까마귀의 말을 무시했다.

국교의 수도원이겠지. 수도복이 딱 그렇지 않았나.

페이 올슨의 말이 일리가 있어. 나도 경황이 없어 그냥 넘어갔는데, 그 자의 수도복은 수도회의 규칙에 어긋난 것이었다.

까마귀가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수도복에는 공인된 수도원임을 표시하는 표식이 일반인들은 거의 눈치채지 못하게 새겨져있다. 그건 바로 옷 가장자리, 마감 부분이었다. 마감을 특수한 색을 넣은 실로 하면서, 그들이 이단이 아닌 것과, 더 나아가 무슨 수도회에 소속되어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야한다. 이를테면 순교성인 수도회는 붉은색 실로 마감을 한다, 이런 식이다.

마감이 없었어. 이 자가 어떻게 그걸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까마귀가 페이 올슨을 째려보았다.

나야, 수도회 소속 고아원에서 나고 자랐으니까. 수녀님 수사님 옷은 질리도록 봤다고.

그러면 교회에 독실한 사람과, 이단 사이비일지도 모르는 사람이라. 종교가 공통점이겠군, 그런데 종교가 세상의 멸망엔 왜……?

에녹은 자신이 진실을 비껴나간 질문을 한 것 같아 기분이 불쾌했다. 기이한 쥴 수도사는 그렇다 쳐도, 크로우 박사가 여전히 석연찮았다. 페이 올슨과 까마귀가 자신에게 정보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스러웠다. 크로우 박사는 죽었다. 나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파고들면 안 될 것을 파고들다가, 나 스스로가 그 사람을 살해했다.

일단. 종교와 관련된 곳으로 가자.

강한 이명이 그를 덮쳤다. 에녹은 당황해 탁자에 엎어졌다. 고막을 북채로 둥둥둥 때리는 것 같았다. 그 진동과 떨림이 귓 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 그렇게 골을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상대방 군함으로 포를 쏠 때의 진동과 같았다. 병사들이 말하던 “트라우마" 인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명이 사라지고서야 에녹은 탁자에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벌써 밤이었다. 말도 안 돼. 에녹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보았다. 페이 올슨과 까마귀는 흔적도 없었다. 자신을 두고 어디 간 것 같지는 않았다. 갑자기 오동나무 편지함이 생각났다. 두 사람이 없는 지금이 기회다. 편지를 훑어볼 기회. 잃어버린 시간이 자신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볼 기회. 그러나 편지함은 그 자리에 없었다. 누군가 가져갔다. 에녹은 왠지 그것이 어디있는지 알 것 같았다. 직감일 뿐이지만, 그것을 믿어야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쥴 수사는 어디서 나온거지.

무언가 비어있었다. 책장에서 한 걸음 떨어졌다. 난장판이 된 거리에 고급스러운 책장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골재만 남은 가게가 서있었고, 다친 빈민들이 길거리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경찰들은 그들을 바라보기만 할 뿐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에녹은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빈민에게 갔다. 더러운 코트인지 망토인지를 입고 있었다. 아마 망토일 것이다.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니까.

빈민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죠? 괜찮습니까? 다친 곳을 치료해주고 원하신다면 따듯한 밥이라도 대접해드릴테니 답 해주시죠.

에녹이 내민 손을 빈민은 빤히 쳐다보았다. 그에게서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에녹은 손을 거두고 다른 빈민에게 갔다. 그 사람은 더러운 코트인지 망토를……. 고개를 돌렸다. 옆에 있는 빈민은 코트인지……. 뒤를 돌아 처음 보았던 빈민을 보았다. 빈민은 사라져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나의 행렬이 뒤를 지나가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조용히 훌쩍이며 길을 가고 있었다. 자신의 집 쪽으로였다. 그들은 모두 더러운 코트인지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하나같이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수염은 마치 덩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에녹은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치다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더러운 코트인지 망토를 입은 빈민이었다. 그 빈민은 옆에 오동나무 편지함을 두고 있었다. 질문조차 할 수 없었다. 모두 한 사람인가? 모두 다른 사람인가? 나를 놀리는 것일까? 나는 혹시……. 연극 무대에 떨어져있는 것이 아닐까? 꿈이라는 생각만은 들지 않았다.

진리를 마주한 자 중 거래할 가치가 있는 자만을 남긴다.

빈민이 오동나무 편지함을 열었다. 그 곳에는 편지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이빨이 서로 맞물려있는 듯한 문장이 찍힌 편지지들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하지만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았다. 프레이야 올슨은, 그에게 무언가를 제안했다. 정보를 가지고 있고 협력을 할 수 있을거라고 얘기했다. 에녹은 편지 하나를 꺼냈다. 손가락이 닿은 곳 부터 편지는 바스라져 고운 먼지가 되었다.

안돼.

에녹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시작으로, 다른 편지들도 사르르 내려앉았다.

안돼, 안된다고, 우리 세상이 어떤 꼴인지 알고 있나, 쥴 수사!

에녹이 빈민에게 소리쳤다. 쥴은 기이한 목소리로 낮게 키득였다.

거래할 가치가 있는 자만을 남긴다고? 나와 거래를 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었나?

세상에 진리가 퍼지는 것은 막아야한다. 그것이 우리의 계획.

우리? 너희는 한 단체로군.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우리일 뿐……. 에녹이여, 우리는 이 곳을 벗어날 육신이 필요하다.

남은 자들을 두고 이 침몰하는 배를 탈출하겠다. 형편없는 선장이군.

그들을 용서해라.

쥴 수사가 편지함에 있는 먼지를 한 줌 집어 에녹에게 건넸다.

먼지는 돌아온다.

에녹은 마지못해 먼지를 받았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갔다. 누군가 정보를 독점하고 자기들만 살려고 한다. 공고한 카르텔일까? 귀족들이 불온한 생각을 품은 것인가. 쥴 수사는 나즈막히 웃기 시작했다. 마치 에녹의 속 마음을 들은 것 처럼. 귓가에 쨍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세요, 수호자! 지금 그럴 때가 아닌 거 알잖아요!

에녹은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순간 생각했다. 이건 집냄새다. 포근한 햇살냄새. 정갈하게 다림질한 옷들. 황금기 이전의 책들. 쉴 때 읽을 소설도 그 안에 섞여있었다. 해치워야 할 보고서가 널려있었는데, 자기는 왜인지 손목을 면도날에 깊게 베여 선혈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고 - 그 곳으로 돌아가야하는데, 아냐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에녹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자신은 바닥에 누워있었다. 사제 폭탄이 빈민들을 죽였다. 에녹은 갈가리 찢겼다. 폭탄 속에 쑤셔넣은 쇠못들이 그의 몸을 꿰뚫었다. 에녹은 자신이 찢겨버린 부분부터 공포와 고통을 느꼈다.

불가능 해, 이럴 리…….

수군거리며 그를 쳐다보고 있는 페이 올슨과 까마귀도 마찬가지였다. 이빨을 깍 깨물고 웅크려 환상통에 파들거리는 에녹으로부터 그들은 공포와 고통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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