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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트민호] 비망록備忘錄

201503 뉴트x민호 개인지

Archive of TREE by 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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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3 【In the maze】에서 판매한 회지를 웹 발행합니다.
감정 동기화 세계관 기반 현대AU. PS 뉴트와 LS 민호의 이야기입니다.

※감정 동기화 세계관 요약

  • 감정이 폭주하는 쪽을 PS, 결핍된 쪽을 LS라고 하며, 양쪽 모두 그 증상이 심해지면 죽는다.

  • PS는 LS에게 감정을 나누어주고, LS는 PS에게서 결핍된 감정을 받으며 살아간다.

  • 감정을 주고받는 행위는 주로 신체접촉을 통해 이루어진다.

  • 각성은 주로 청소년 시기에 일어나며 발작을 동반한다.

  • [PS의 경우] (※작중 뉴트)

    • 급격하게 예민해지고 화를 주체할 수 없게 되거나 눈물이 많아진다.

    •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거나 고열이 날 수 있고, 주변 환경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 [LS의 경우] (※작중 민호)

    • 점차 말수가 줄어들고 자주 넋을 놓게 되며,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기 힘들어진다.

    • 기억력이 저하되고 증상이 심해지면 체온이 점점 떨어지게 된다.

  • PS와 LS의 증상 정도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어서, 간단한 접촉으로도 몇 개월을 평범히 지낼 수 있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자도 있다.

  • 정부의 도움으로 임시 파트너를 구하거나 양측의 동의하에 직접 파트너를 등록할 수도 있다.


교집합

 

강의가 채 끝나기도 전에 민호는 조용히 강의실을 빠져나와야 했다. 부재중 전화 6건. 모두 토마스에게서 온 전화였다. 메시지는 20건이 넘었다. 메시지에는 민호 어디야, 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지금 어디고 뉴트가 어떤 상태인지까지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마지막쯤에 가서는 거의 울부짖는 형태가 됐다.

[빨리 좀 와줘.]

마지막 줄을 읽은 민호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틈날 때마다 휴대폰을 확인했겠지만 어제 잠을 설친 탓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잠을 설친 것도 모두 이 도련님이 질리지도 않고 일장연설을 늘어놔서였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도련님이다. 민호는 그저 큰 일이 없길 바라면서 토마스가 알려준 장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근처에 채 다다르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북적이는 인파가 보였다. 쉴 새 없이 큰 소리가 나고 있음에도 그사이 경찰까지 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민호는 속으로 안도하며 서서히 걸음을 늦췄다. 사건의 중심을 둘러싼 무리 중 몇몇이 그를 보더니 표정을 바꿔 자리를 트기 시작했다. 그게 신호라도 된 양, 하나 둘 길을 연다. 몇 년째 겪는 일이지만 익숙하지 않은 대우라 민호가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그들이 터준 길 사이로 뉴트가 보였다.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비 입에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은 채다. 어딘가를 내려다보는 얼굴은 노골적인 화가 걸려있다 못해 금방이라도 입에 문 담배를 씹어먹을 것 같았다.

“뉴트.”

이름을 부르자 돌아보는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다. 민호가 다가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가 눈을 맞춰온다. 뉴트는 붙잡힌 손목을 빼내고 다시 민호의 손을 잡았다. 나, 불 좀 줘.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그가 말했다. 민호는 그만큼이나 익숙하게 그가 문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컨디션 안 좋아?”

“몰라.”

“…어제 새벽에 내내 같이 있었잖아.”

“…몰라.”

“왜 미리 이야기 안 했어.”

“……머리 아파, 민호.”

뉴트는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뉴트의 뒤에 서 있던 토마스가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그가 슬쩍 눈짓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시선 끝에 얼굴이 엉망이 된 채 기절한 사람 하나가 걸렸다. 민호가 그쪽으로 다가가려 하자 뉴트가 그를 붙잡아 세웠다. 다 타들어 간 담배를 손에 쥔 채 민호의 어깨에 고개를 묻는 행동이 스스럼없이 이어진다. 깊은 한숨이 들린다. 미안해. 그동안 수없이 들었던 사과가 함께였다.

“집에 연락 좀 해줘.”

팔을 들어 그의 등을 쓸어내리던 민호가 토마스에게 말했다.


보통은 청소년기에나 각성한다는 그것이, 어째서 그 어린아이에게 나타난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뉴트는 그런 아이였다. 일찍부터 PS로 각성해서 잠시라도 LS가 곁에 없으면 간헐적으로 발작을 일으켰다. 여러 사람을 만나봤지만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뉴트의 상태에 큰 진전은 없었다. 어린 그는 항상 불안해 보였고, 예민했고, LS를 통해 간신히 생만 유지해 나갔다.

수많은 의사들이 그의 부모에게 말했다. 아이가 어려서, 개개인의 차이가, 인내심을 갖고. 이 의미 없는 말들에 지쳐가던 도중 오랜 수소문 끝에 그들이 찾아낸 게 민호였다. 민호는 뉴트와 비슷한 시기에 LS로 각성했지만 간단한 치료로 금세 호전될 수 있었다. 아마 그들은 민호가 뉴트의 또래라는 것에 희망을 걸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호는 팔려가듯 뉴트의 부모에게 맡겨졌다. 민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고리타분한 표현이 어울릴 만큼 형편이 어려웠기에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낯선 땅에 도착하자마자 민호는 뉴트를 만나야 했다. 여기저기 물건이 널브러져 있는 어지러운 방 안에 발을 디딜 때에, 아직은 낯선 목소리들이 읊조리는 기도 비슷한 것까지 들어가면서. 아니, 그건 기도가 맞았다. 누군가를 살려달라는 말을 그토록 간절히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으니까.  

방에 들어섰을 때 가장 처음 느낀 건 매서운 시선이었다. 그 시선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민호는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법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입을 다문 채 거친 호흡을 삼키는 아이가 보였다. 무언가를 참는 것 같기도 했고, 오히려 내뱉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한 얼굴. 민호는 난생처음 마주하는 표정이 눈앞에 있었다.

머리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감싸던 뉴트는 한참 후에나 무어라 말을 했다. 작은 소리였지만 대부분이 욕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얼핏 본 손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다. 드문드문 맞는 시선을 보며 민호는 언뜻 그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누가 들으면 말도 안 된다 할 법한 감상이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도 그랬던 때가 있었으니까. 그때가 지난 이후로도 가끔, 치료가 늦어질 때면 같은 표정을 걸고는 했다.

민호는 뒤늦게 그의 부모가 자신에게 늘어놨던 설명을 떠올렸다. 그는 꽤 오래 앓아왔고, 아무런 해결책도 찾을 수 없었다고. 민호가 느꼈던 건 시간이 느려지는 감각이었다. 혀와 표정이 굳고 생각이 멈춰가는, 사고가 죽어가는 감각. 아마 눈앞에 있는 제 또래의 아이가 겪는 것은 이것과는 다른 성질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지옥이라는 것은 변함없었다.

이건 불치병이야. 민호는 속으로 한마디를 삼키고 주먹을 쥐었다. 사람들은 PS와 LS를 새로운 인종이라도 되는 듯 구분했지만, 민호는 이것을 병이라 여겼다.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병. 이건, 일종의 병이다.

어느새 날아온 물건들이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몇 가지는 몸을 때렸다. 그중 노트 하나가 민호의 앞에 툭 떨어졌다. 무언가가 빼곡히 적혀있어 무심코 그것을 집어 들었을 때, 민호는 한눈에 그것이 ‘글’임을 깨달았다. 어떤 것의 기록.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의 기록. 의미 없이 연결되는 문장들이 오로지 감정의 배출구로서 나열된 듯한 모습이었다.

이건 병이야. 

문장 하나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민호가 고개를 들었다. 뉴트는 손에 들었던 물건을 떨어뜨리더니 화를 가라앉히려는 것처럼 숨을 죽였다. 민호의 시선이 노트와 뉴트 사이를 돌아다닌다. 민호가 물었다.

─이거 네가 쓴 거지?

─…….

─왜 글을 써?

─죽을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서 죽을 것 같으니까.

민호는 다시 시선을 돌려 노트를 주워들었다. 페이지를 뒤로 넘길수록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더 많았다. 중간중간 찢겨 나간 잔해들을 보자 목구멍에 열이 들어차는 듯했다.

이것은 드문 일이 아니라 말했다. 그렇다면 왜,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 돼야만 했을까. 가난한 집도, 자신을 미련없이 이곳에 보낸 부모님도, 민호는 모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디든 살아갈 수만 있으면 된 거라고. 떠나올 때만 해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괜찮아.

민호는 무언가를 억누르며 최대한 덤덤히 말했다. 그 말을 내뱉고 한참 후에 발걸음을 뗐다. 침대 근처에 병자처럼 서 있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뉴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여전히 호흡은 거칠다. 숨을 힘겹게 몰아쉬던 그는 몇 번을 망설이다 손을 잡았다. 민호는 그 순간 어떠한 예감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밀려오는 감각들이, 모든 감정들이 낯설어 자신이 여태 어떤 상태였는지를 실감했다.

아이는 그제야 울음을 터트렸다. 손을 마주 잡은 아이도 조용히 울음을 삼켰다. 어지러운 방안에, 덩그러니 소년 둘이 남았다.

 


고래는 땅 위에 설 수 없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어딘가로 떠날 채비를 했다.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민호는 아무 말 없이 벽에 기대어 짐을 챙기는 그의 등만 바라봤다. 뉴트의 표정은 여느 때와 같았다. 그러니까, PS 특유의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민호를 만나고 뉴트는 눈에 띄게 상태가 좋아졌다. 내내 붙어 다니지 않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다만 아주 가끔, 그는 불규칙적으로 상태가 불안해졌다. 그때 민호가 곁에 없으면 꼭 사고가 터졌다. 그 후에는 당연한 수순처럼 항상 어딘가로 떠나길 바랐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다. 그 나름의 치료 방식이라고 생각해서 민호는 언제나 묵묵히 따랐을 뿐이다.

“바다 가자.”

“이 겨울에?”

“바다는 겨울에 가야 돼.”

짐을 다 챙겨 든 그가 자연스럽게 민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민호는 무어라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방구석에 빼곡히 쌓인 노트들이 눈에 밟힌 탓이다. 못 본 사이 더 늘어났다. 색이 다른 노트를 일정한 순서대로 쓰고 있어서 기억하고 있다. 세 권. 이틀 전보다 세 권이나 늘었다. 그래서 어젯밤에 잠도 안 자고 내내 옆에 붙어있었던 건가.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조금 더 오래 손을 잡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뉴트가 왜 저 지경이 될 때까지 자신에게 말하지 않는지, 민호는 알 수 없었다. 끝도 없이 무언가를 써내려가지 않으면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이면서 그는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는 것 이상은 요구해오지 않았다.

왜 아직도 글을 써? 정식으로 파트너 신고를 한 후에-뉴트의 부모가 대부분을 준비했지만- 민호가 그렇게 물었을 때, 뉴트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 후로는 민호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듯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지만 그것들을 버리거나 하지는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오면 민호가 모르는 척 넘어가는 식으로 지내왔다.

붙잡힌 손이 뜨끈해져 오는 것 같다. 민호는 숨을 삼켜가며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을 느꼈다. 비워졌던 것이 채워지는 감각. 조금만 있으면 넘쳐흐를 것 같이 그와 맞닿은 부분에서부터 전해져온다. 뉴트가 확인하듯 손을 다시 꽉 쥐었다. 얼핏 그가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몇 시간을 내리 달려 그들은 해가 다 지고 나서야 바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뉴트의 부모가 고등학교 입학 선물이라며 줬던 별장 근처였다. 부자는 좋겠네. 민호가 툭 내뱉은 말에 갖고 싶으면 줄게, 라고 뉴트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는 바닷가 근처를 걷지도 않고 바다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물건이 얼마 들어 있지도 않은 짐을 침대 위로 던져버린 후, 테라스로 간이테이블과 의자를 옮겼다. 그는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문가에 서 있는 민호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는 손짓이 가볍다. 약간은 과장된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민호는 픽 웃고 나서야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빛이 없는 바다는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겨울바람이 품은 한기에 손끝이 얼어갔다. 민호는 이 감각이 싫었다. 마치 LS로 각성할 때 느꼈던 것들을 일깨우는 것 같아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하지만 뉴트는 이런 곳에 내던져진 듯한 상황을 좋아했다. 검은 바다가 하늘과 만나 어디가 수평선인지도 모를 풍경을 좋아했고, 온몸이 식다 못해 굳어버릴 것 같은 겨울바람을 좋아했다. 어느새 담배를 입에 문 뉴트가 민호 쪽을 바라본다. 민호는 자연스럽게 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뉴트는 한참 후에나 첫 숨을 뱉어냈다. 뿌연 연기가 바닷바람에 금세 모습을 감췄다. 바다내음와 담배 냄새가 섞였다. 민호가 표정을 구긴다. 그걸 봤는지 소리 없이 웃던 뉴트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민호 쪽으로 내밀었다. 민호는 별 망설임 없이 담배를 받아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뉴트의 입이 열렸다.

“그거 알아 민호? 고래는 포유류야.”

민호가 뉴트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다. 뭐라는 거야. 생각하는 것이 다 드러난다. 민호의 표정이 이상해질수록 뉴트는 뭐가 좋은지 헤실헤실 웃음을 걸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포유류지만 바다에 살지.”

바닷바람이 뺨을 쓸고 지나간다. 민호는 그의 얼굴에서 생각을 읽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바다를 바라봤다. 모든 게 어두워서 끝도 없이 바다가 펼쳐져 있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만이 이곳에도 하늘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대변했다.

“고래는 바다가 그리워서 돌아간 거야. 진화해서 드디어 육지를 밟게 됐는데도, 바다가 생각나서. 바다가 그리워서 힘들어도 바다에서 사는 포유류가 된 거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뉴트가 덧붙인다.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글쎄.”

민호는 솔직한 대답을 했다. 고민해도 그가 생각하는 답을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뉴트는 가끔 그런 말을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말들을 쉽게 내뱉었다. PS들은 다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민호도 뉴트도 PS나 LS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은 서로에게밖에 향하지 않는단 걸 알기에 관두었다.

그러고 보면 간간이 봤던 그의 글도, 처음 봤던 글도 그랬다. 늘어선 활자 사이에서 딱 한 가지 보이는 게 있었다. 나 좀 도와줘. 그 하나. 글자들이 흩어져 새로 만들어낸 한마디. 누군가에게, 읽는 사람에게, 적어도 민호에게 전달됐던 단 하나였다. 답답하고 복잡한 것들을 어딘가에 쏟아내기 위해 그가 선택한 숨구멍이 그곳에 있었다.

“나도 고래 같은 놈이야, 민호.”

그가 새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민호, 하는 발음이 뭉개졌다. 마치 꾹꾹 눌러 담은 것 같다. 그는 민호 쪽을 돌아보지 않고 주머니 어딘가에서 성냥을 꺼내 들어 불을 붙였다. 모호한 답만큼이나 불분명한 형체를 띤 희끄무레한 연기가 바람을 따라 등 뒤로 흩어졌다.

“언제든지 떠나서 돌아가야지, 생각하는.”

눈이 마주친다.

“아직은 땅을 밟고 고민하는 고래.”

그가 웃고 있었다.

 


기록되지 않은 비망록

감정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싫었다. 온몸에서 열이 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주변이 흔들린다. 귀를 틀어막아도 사라지지 않는 이명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민호는 그 속에서 만난 구원이었다. 어린 뉴트는 그의 손을 잡았을 때 알았다.

아, 나는, 평생 여기서 벗어날 수 없겠구나.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던 것들이 그의 손을 맞잡은 것 하나로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그게 우스워서 눈물을 삼켜야 했다.

민호가 먼저 다가오는 경우는 없었다. 항상 접촉이 필요했던 건 뉴트였다. 그것은 어느 순간 예고 없이 그를 덮쳐왔다. 머릿속에 있는 것들이 무겁게 내려앉는 감각. 그 후에는 주체할 수 없이 무언가가 밀려 들어온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숨 쉬는 과정을 하나하나 짚어야 할 정도로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뉴트는 언제나 그것을 ‘알 수 없다’고 정의했다. 애초부터 이렇게 될 사람이었다면 왜 태어날 때부터 그렇지 않았는지.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죽어있는 것이 나은 게 아닌지. 민호의 손을 붙잡고, 그의 물건을 만지고, 생각을 토해내는 날들이 반복됐다.

지쳤다. 이마저도 자신이 PS라 느끼는 우울의 일부인지 판단할 수 없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다.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음에도 그것은 나아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주기가 비정상적으로 짧아져가는 것을 느꼈다. 뉴트는 복잡하게 떠다니는 잡념들을 제어하는 것을 포기했다. 써내려가던 것에 마침표를 찍는다.

참고로 이것은, 기록되지 않을 말들이다.


Period

휴대폰에 쌓인 메시지들을 보며 민호는 기시감을 느꼈다. 그날로부터 벌써 네 번째 사건이 터졌다. 차라리 잠시 쉬자는 말에도 뉴트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는데, 그때의 얼굴이 너무도 평온해서 민호는 그의 말에 그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설득해야 했다. 한동안 쉬다 보면 그래도 하루가 멀다 하고 일을 벌이고 다니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모퉁이를 돌았다.

시야가 트이자마자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뉴트가 보였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민호를 한번 돌아보더니 주위를 에워싼 인파를 빠져나와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피를 흘리는 이 하나가 그런 뉴트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보나 마나 이번에 시비가 붙었던 상대일 터다. 한숨이 먼저 입술 새를 빠져나온다. 뒤처리는 익숙하다지만 그가 말도 없이 자리를 뜬 경우는 처음이라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뒷수습을 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민호는 뉴트의 뒤를 쫓을 수 있었다. 그를 발견한 것은 인적이 드문 본관 뒤편이었다.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뉴트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여러 번 이름을 불렀음에도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민호가 뛰어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이 붙잡히고도 빠른 걸음으로 걷는 그를 여전히 뛰다시피 하며 따랐다. 뉴트. 대답은 없다. 뉴트, 야, 뉴트 들려? 풀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 표정을 바라보던 민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이번에는 좀 쉬다 오자. 지금까지 괜찮았잖아. 일주일 사이에 벌써 네 번째야.”

뉴트의 걸음이 빨라진다. 민호는 슬슬 밀려오는 화를 억누르며 최대한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 말 좀 들어, 이 멍청아. 도대체 왜 그러는…,”

“왜 그러냐고?”

그가 걸음을 멈추고 민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예상보다 억센 힘에 민호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실려있다. 금방이라도 손목이 으스러질 것 같다. 눈이 마주쳤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가 마치 처음 만난 날의 그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민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왜라는 물음이 의미 있는 문제야? 너는 모르겠지. 내가 얼마나 불안에 떨면서 사는지 모를 거야. 너는 좋은 치료제야, 민호. 그 어떤 LS보다도 좋은 치료제. 그래, 그랬었어.”

그랬었다는 말에 힘이 실려있다. 가쁜 숨이, 떨리는 목소리가, 일그러진 표정이 모두 불안했다. 맞닿은 피부를 통해 스멀스멀 이상한 감각들이 올라온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같은 상태가 이어졌음에도 뉴트는 여전히 불안해했다.

침묵이 질려갈 즈음, 민호는 자유로운 다른 쪽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한자 한자 내뱉듯 말하는 목소리가 차분하다.

“말해, 뉴트.”

그가 고개를 젓는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손목을 붙잡은 손끝에만 힘을 줬다.

“말하지 않으면 난 몰라.”

그의 눈이 감겼다. 세게, 다시는 눈을 뜨지 않을 것처럼. 미간이 엉망으로 구겨진다. 호흡이 희미하게 이어졌다. 문득 민호는 그의 방 한구석에 놓인 글들을 떠올렸다. 감정을 제어할 수 없을 때면 그가 써내려가던 것들을. 읽어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의 입으로 들어도 이해할 수 없을 감정에 대해. 그를 만난 이후로 수도 없이 비슷한 상황과 마주했다. 그때마다 그는 화를 내다 가라앉히고, 우울감에 잠길 것 같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웃었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생각했던 적은 없다. 민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가 바라는 최소한의 것들을 내어주며 그가 먼저 ‘이해를 바라는 말’을 해오기를. 그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민호는 항상 그런 방식으로 뉴트의 곁을 지켰다. 그러고자 했다. 그러고 싶었다.

“네 말대로 난 치료제야. 십 년 가까이 이렇게 살아왔어. 이 정도면 활용법을 터득할 때도 되지 않았냐? 언제까지 그 노트들을 내 위에 두고 살건데?”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쉰다.

“…그때부터 난 갈 곳도 없었어. 도대체 뭐가 불안한 거야. 이건 아주 잠깐일 뿐이잖아. 나랑 있으면 금방 나아지잖아.”

한참을 시선을 맞추던 뉴트가 무너지듯 민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손목을 붙든 힘이 사라졌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민호. 작은 목소리가 꺼질 듯 이어진다. 네가 옆에 있는데, 네 손을 잡는데 그것만으로는 안 돼. 목 위로 숨이 스친다. 앓는 것 같은 목소리가 길게 잔음을 남겼다.

민호는 팔을 들어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온기라고 하기에는 뜨거운 기운이 전해져왔다. 내가 왜 그 긴 시간을 너랑 붙어있었는지는 생각 안 해봤냐. 민호가 툭 내뱉은 말에 뉴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느릿느릿 눈꺼풀이 닫혔다 열린다. 그 짧은 순간에, 민호가 그의 입가에 입술을 떨어트렸다 멀어졌다.

뉴트는 닿았던 자리를 확인하듯 혀로 입술을 핥았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눈높이를 맞춰온다. 얼굴이 가깝다. 그러나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다. 그가 손을 뻗어 민호의 목덜미를 감쌌다. 머리카락을 파고드는 손끝이 조심스럽다. 여전히 그 손은 뜨거웠지만, 표정은 한층 풀어져 있었다. 민호. 평소보다 느린 박자로 그가 이름을 부른다. 눈을 감고 무언가를 확인하듯 입을 맞춘다. 미지근한 숨이 이어졌다. 익숙지 않은 소리가 이어지기도 잠시, 서서히 멀어진 고개가 이내 다시 민호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허리를 감싸듯 끌어안은 그가 불만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다 지랄 맞아. 이게 병이 아니면 뭔데.”

“그중에서 네가 제일 지랄 맞은 것 같다.”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뉴트의 입가에서 흩어진다. 민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실렸다. 넌 내 바다야. 속삭임 같은 말에 민호가 무심코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열 있냐.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

고마워, 민호. 아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아이를 어르듯 민호는 조심스레 그를 떼어내고 눈을 맞췄다. 누그러든 표정 위로 여전히 희미한 불안이 보여서 민호는 작은 소리로도 웃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었다. 질리도록 잡아 온 손을 다시 붙잡고, 다가가, 입술을 맞댔다.

 


2021.06
당시 책이 3권 정도 남았던 걸로 기억해서 혹시나 하고 찾아봤는데 역시 없었다는 tmi가 있어요. 시간이 상당히 흘러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은 글이지만 최대한 사담은 줄여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부끄러움이 앞서지만, 오래된 회지이다 보니 후기 외의 전문을 공개해 둡니다. 하단은 소장용 결제선입니다. 행복하세요. (2024.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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