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쩌면 만약에
1부
어쩌다보니, 나도 모르게
1
모든 것을 얼릴 것 같은 추위가 한 풀 꺾이자 우체통에 두툼한 서류가 채워졌다. 민호는 예상하고 있던 것이 들어있는 걸 확인하고 길게 숨을 쉬었다. 일단 약속 시간에 맞춰 나가는 것이 중요하니, 그것을 가방에 쑤셔 넣고 다시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목에 두른 머플러를 끌어올려 입가를 가린 뒤 페달을 밟았다.
약속 장소는 집에서 오래 걸리지 않아 있는 작은 식당이었다. 유달리 맛이 있다거나, 다른 곳에선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메뉴가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습관처럼 그곳에서 약속을 잡았는데, 처음의 경우엔 근처에 괜찮은 북카페가 있단 이유에서였다. 토마스는 주말에도 훈련 일정이 있다 보니 연습을 하다 바로 오는 일이 잦았고, 그러다보면 식사를 거르고 오는 경우가 많아 카페서 한 블록 떨어진 식당을 약속 장소로 삼게 된 것이었다. 그러길 두 해가 넘어가니 이제는 카페에 갈 일이 있지 않아도 자연히 그곳에서 만남을 가졌고, 오늘도 그런 경우였다.
민호는 식당 앞마당 한 쪽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섰다. 카운터를 보는 여사장이 익숙하게 민호를 반겼다.
“오늘은 네가 늦었구나.”
그녀가 안쪽을 가리켰고, 그 끝에 토마스가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엎드리고 있어 민호가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직 물기가 덜 마른 머리칼이 마구 헝클어진 채 정수리를 내보이는 걸 보며 민호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몇 년을 말해도 안 고치지. 가방에서 챙겨온 수건을 꺼내들고 자리로 향했다.
“어?”
설핏 잠이 들었던 모양인지 수건을 머리에 덮어씌우고 꾹꾹 누르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수건에서 벗어나려는 듯 고개를 휘저어 민호는 손에 좀 더 힘을 실어 고정시켰다.
“뭐가 어? 야. 너 머리 좀 잘 털고 다니라니까.”
“오늘은 털고 나왔어.”
“전에도 말했지만 머리에 수건을 삼초쯤 덮었다가 도로 세탁물 함에 던져놓는 걸 턴다고 말하진 않아.”
더 이상 항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는지 토마스는 가만히 있었다. 민호는 좀 더 빠르게 손을 놀려 수건과 머리카락을 마찰시켰고 어느 정도 수건이 축축해지자 머리를 덮은 것을 거두고 토마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곤 대충 머리를 손으로 빗겨준 후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토마스는 제 손에 쥔 수건으로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끝만 조금씩 수건에 부볐다.
“고마워.”
“고맙다고 하지 말고 나오기 전에 잘 털고 나와, 좀. 감기 걸린다니까.”
“나 면역력 좋아서 안 걸린대도. 게다가 어차피 네가 이렇게 해주잖아.”
토마스는 농담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덩달아 광대를 볼록하게 만들며 실실 웃었다. 그에 민호는 입맛이 쓰게 올라오는 걸 느꼈다. 당장이라도 한숨을 터트리고 싶은 마음이 턱 바로 아래까지 차올랐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 앞이라 쉽게 그럴 순 없었다.
“나 손 좀 씻고 올게.”
“엉. 주문은 평소에 먹던 걸로 하면 되는 거지?”
“그래.”
그래서 자리를 떴다. 앉은 지 채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일어난 것이 우스웠지만 당장은 숨을 좀 돌리고 싶었다. 나오는 길에 서류를 본 탓도 있을 것이다.
토마스에게 말한 대로 손을 씻었다. 딱히 더러운 것이 묻은 것도 아니었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물에 씻겨져 내려갈 것을 생각하며 괜히 초조한 제 마음도 같이 씻겨 내려가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능할 리 없는 일이었다. 사실 민호는 제가 왜 이렇게 초조한 건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걸 왜 아직까지 말하고 있지 않은 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꼭 시한부 선고를 내리는 것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막상 그 얘길 하면 토마스는 아, 그래? 그렇구나. 하고 말 것이라 예상하면서도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지나가듯 한 마디 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임이 분명한데도. 하지만 점점 말을 해야 하는 때가 오고 있었다. 기실 말하지 않고 학교를 졸업하게 된 대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2년을 넘게 단 둘이 알아왔는데 단 번에 모르는 사람처럼 헤어지고 싶진 않았다. 물론 조금의 욕심도 있었다. 이후에도 간간히 연락은 하고 지냈으면 하는 욕심이.
민호는 물을 잠그고 거울을 바라보며 세 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오늘은 정말로 말하자. 거울 속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냥 밥을 먹으면서 아, 나 갈 곳 정했어. 하고 가볍게 말하면 된다고 한 번 더 중얼거리고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자리로 돌아가보니 토마스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엔 휴대폰을 보고 있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는 서류 봉투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민호의 가방에 들어 있어야 할 것이었다. 민호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토마스가 한 발 더 빨랐다. 달리 국가대표 선수가 아니라서, 빠르게 테이블 위의 서류 봉투를 낚아채 들곤 민호에게 흔들어 보였다.
“이거 뭐야?”
토마스의 목소리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너 설마 여기 가려는 건 아니지? 그냥 원서만 넣었던 거지?”
민호는 답 대신 한숨을 크게 쉬었다. 토마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정말 여기 갈 생각이야? 너 동부에 있기로 한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서부야? 가족도 다 동부에 사는데!”
“엄밀히 말하면 갑자기가 아니야.”
민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원래부터 거기로 갈 생각이었어. 거기에 잘 아는 교수님이 계셔서. 학비도 더 저렴하고 장학금도 나와.”
“더 좋은 학교 놔두고 왜 멀리 반대편까지 가는데? 장학금 때문이야? 고등학교도 비싼 돈 내고 다니면서 갑자기 왜?”
“미안한데, 토마스. 이 학교는 아주 좋은 학교고, 동부에 있다고 해서 더 좋은 학교인 것도 아니야. 그리고 장학금은 아주 중요하고. 나는 세 살 어린 동생도 있고, 부모님은 평범한 직장인에, 자녀의 교육을 우선시하는 분들이라 제법 무리해서 좋은 학교에 보내고 계신 거야.”
너야 그런 거 생각 안 해도 되겠지만, 하고 덧붙이려던 것은 말았다. 민호는 조금씩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야 제가 말하려고 준비하던 것을 토마스가 먼저 알게 되었단 것에 당황했지만, 그가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화를 내며 따져 묻는 것을 듣고 있으니 마치 꼭 제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잘못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이런 묘한 기분을 받을 이유도, 그의 화를 받아줄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가방 안에 있던 것을 들고 있단 건, 그가 제 가방을 뒤졌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보니 민호는 토마스의 행동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건데? 의문을 감추지 않고 바로 행동했다.
“그보다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건데?”
미간을 좁힌 채 말한 목소리에는 살짝 짜증스러움이 묻어나 있었다. 토마스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토마스의 얼굴이 더욱 심각하게 변했다.
“왜 화를 내냐고?”
“그래. 꼭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그러고 있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뭘 그렇게 생각하냐 묻는 건데? 네가 왜 화내는 건지 모르겠단 걸 말하는 거면 정말로 모르겠다, 난. 오히려 내가 화내야 할 상황 아니야? 멋대로 남의 가방을 뒤져놓고 미안하단 말은커녕 나한테 화만 내고 있잖아, 너.”
토마스는 입을 꾹 다물고 민호를 노려보듯 쳐다만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민호에게 던지듯 서류를 안기고 성큼성큼 자리에서 벗어났다.
2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일 년 하고 두 달 즈음이 되었을 때, 민호는 수학 선생인 미스터 스콧으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았다. 스콧은 말 주변이 썩 좋은 남자는 아니어서 조금 정신이 없을 정도로 이 말, 저 말을 했는데 요는 동급생 한 명의 개인 지도를 해주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민호가 확인하듯 그것을 물으니 스콧은 한숨을 푹 쉬고는 미안하다 말했다. 정작 민호는 아무렇지도 않았기에 뭐가 미안하느냐 묻고 싶었지만 그 이후 스콧이 중얼중얼 한참 제 말을 늘어놓는 바람에 뭘 더 물을 수 있는 상황이 되질 못 했다. 해서 그의 말이 거진 끝나고 났을 때엔 이미 민호가 제안을 수락한 분위기가 되어버렸고 세부적인 정보도 알지 못 한 채 당일부터 떠넘겨진 일거리를 맡아야 했다.
도서관 한 쪽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스터디룸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도움을 얻기로 한 학생이 올 것이란 말에 민호는 멀뚱멀뚱 앉아있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누군가가 들어올 기색이 없었다. 심지어 도서관 전체적으로도 사람이 없었다. 하교 시간 이후이니 사람이 많을 리 없는 게 당연했지만 무거운 침묵이 시간을 더디 흐르게 만드는 것 같아 괜히 신경이 쓰였다. 민호는 별 수 없다 생각하고 가방에서 cd플레이어와 헤드폰을 꺼냈다. 듣고 있으면 누가 오는 줄 모를 테지만 어째 올 것 같지도 않은 인물을 기다리며 지루히 보내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민호는 아예 의자까지 문을 등지는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창을 조금 열어 쌀쌀해진 바람을 맞으며 음악을 켰다. 귀를 포근히 감싸오는 쿠션이 사방의 자잘한 소리를 차단해 시끄러운 수준에 가까운 노랫소리만 들렸다. 눈은 책을 내려다보았다. 117페이지 세 번째 단락부터 읽기 시작했다.
무언가 다르다고 느낀 때는 200페이지를 막 넘기고 있을 때였다. 귀에는 계속 드럼소리와 둥둥대는 베이스 소리, 그리고 목청이 터지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큰 노랫소리만 들렸기에 인기척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범인은 냄새였다. 찬바람 특유의 건조한 냄새와 다른 것이 맡아졌다. 이를 테면, 땀 냄새 같은 것. 민호는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그 바로 앞에 유명인이 호흡을 고르며 서 있었다. 안녕?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민호는 음악을 끄고 헤드폰을 벗었다.
-미안, 내가 좀 늦었지?
그는 미간을 좁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힐끗 시계를 확인했고 이어 눈을 크게 뜨며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조금이 아니네. 한 시간이나 늦었으니까…
그러더니 이내 하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와 달리 민호는 아무 표정 변화 없이 그 모든 것을 바라보기만 했는데, 그걸 화가 났다 오인을 한 모양인지 그는 눈썹을 축 내려뜨려 정말 미안한 얼굴을 해보이며 손을 마주 잡아왔다. 민호는 맞잡은 손을 통해 뜨끈뜨끈한 열기를 단단함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정말 미안해. 아마 선생님이 말씀하셨겠지만 내가 훈련이 많아서. 오늘따라 좀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이렇게 늦어버렸어. 기다리느라 많이 지루했지? 다시 한 번 미안해. 이렇게 도와주기로 한 것도 미안한데 첫날부터 기다리게 해버렸네.
그의 말을 듣고서야 민호는 스콧이 두서없이 말하던 말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유명한 녀석, 국가대표, 훈련, 시간이 부족해…….
-괜찮아, 토마스 에디슨.
-나 알아?
금세 도로 둥그렇게 뜨이는 눈이 정말 놀란 눈치였다. 민호는 여전히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묵묵히 답했다.
-이 학교에 다니면서 널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를 걸. 그런 애가 존재하는 지도 모르겠지만.
-그거 칭찬이지?
물음에 민호는 잠시 말을 골랐다. 칭찬이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칭찬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말이었다. 뭐라 답해야 할까 멀뚱멀뚱 생각하는데 정작 물어본 사람이 먼저 답을 내렸다. 그는 눈을 휘어 웃으면서 민호의 손을 붕붕 흔들었고 고맙다고 연달아 말했다.
-너 정말 좋은 애구나. 어쨌든 오늘 늦은 건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안 늦도록 조심할게. 아니면 연락을 미리 하거나. 아, 말이 나온 김에 휴대폰 번호 좀 알려줄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져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순발력과 민첩성을 요하는 스포츠를 업으로 삼아 이렇게 행동이 빠른 걸까, 하고 민호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어 내밀어진 그의 전화기를 받아들었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가 짐짓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새로운 전화번호를 등록하는 화면의 첫 번째 칸에 minho라고 글자가 입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너 내 이름 알고 있었어?
-당연히 알고 있었지. 미스터 스콧이 그 얘기 안 했어? 내가 꼭 너였으면 한다고 부탁드린 거였는데.
그 말에 민호는 다시 한 번 스콧이 한 말을 되짚었다. 그러나 워낙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그 혼자 떠들은 말이었기에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조각난 것마저도 떠오르지 않았다. 민호가 고개를 저어 답을 대신했다.
-아무렴 어때. 그렇게 된 거였어. 그럼 혹시 억지로 하는 건 아니지? 물론 네가 날 도와주는 거니까 적당한 사례 같은 건 할테지만, 내가 네 시간을 너무 뺏거나 하는 거면 지금이라도 거절해도 괜찮아.
-아니, 그건 괜찮은데. 대체 날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민호가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도 날 아는데 나도 널 알 수도 있는 거 아냐?
-아니, 너하고 나는 다르지. 나는 그냥 학생이고 너는 국가대표 선수잖아.
-그치만 나는 주니어 국가대표인 거고, 종목도 그렇게 인기 많은 종목도 아니잖아. 아이스 하키는 저 위쪽 나라에서 더 인기니까.
여상한 말투가 정말로 차이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것 말고도 그가 유명인사인 이유는 여럿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고, 원체 민호의 성격이 수다스럽지 않아서 민호는 굳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체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는 걸까 하는 물음은 여전해서 전화번호를 저장하는데 뜸을 들였다. 느릿느릿하게 입력하고 전화기를 넘겨주니 그는 다시 한 번 고맙다고 말하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럼 우리 이제 공부하면 되는 거야? 나 책 가져왔는데.
그는 다시 또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세 권의 교과서를 꺼낸 뒤 측면에 딸린 주머니에서 샤프펜슬과 너덜너덜한 지우개를 꺼냈다. 그러고서 자리에 앉아 아직 그대로 서 있는 민호를 올려다보았다. 민호는 어쩐지 그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꼭 강아지 같이. 무언가 나눠야 할 말이 많은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민호는 그저 의자를 끌어다 그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가방에서 필통과 빳빳한 노트를 꺼냈다. 매주 세 번. 평일에 두 번, 주말에 한 번의 개인 지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3
스콧에게 제대로 전달받지 못 했던 사안은 토마스와 만나는 횟수가 다섯 번 즈음 되면서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왜 공부를 도와줄 사람을 구하게 되었는지, 어느 과목이 부족한지, 목표가 어느 정도인지 등등. 이미 본격적으로 하고 있던 운동이긴 했지만,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 더욱 본격적이 되어 수업을 자주 놓치다보니 따라갈 수가 없게 되었다고 토마스는 말했다. 문제는 이 나라의 대학들이 운동을 업으로 삼는 애들한테도 최소한의 성적을 요구하는 것에 있었다. 그것도 수학 성적을. 영어 수업 같은 것은 혼자 보아도 따라갈 수 있겠는데, 수학이나 과학은 앞을 제대로 배우지 못 하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특히 수학이 그러했다. 여기서 민호는 토마스가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너 학교 신문에 세 번 실렸잖아. 경시대회 나가서 상 탄 걸로.
민호는 그의 말에 놀랐는데, 첫째로 그가 학교 신문을 읽은 적이 있어서였고, 둘째로 뒷면에 토막으로 실린 제 수상 소식을 횟수까지 세면서 기억해서였다. 그러나 표정으로도 목소리로도 놀란 기색은 조금도 내보이지 않고 태연히 그에게 되물을 뿐이었다.
-그걸 봤어?
토마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걸 읽는 사람이 있었네.
-왜? 넌 안 읽어?
-보통은 다들 그렇지.
-왜?
-재미없으니까?
그러자 토마스의 미간이 좁혀지면서 눈이 잘게 깜박였다. 민호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라는 의미의 표정임을 잘 알았다. 수학을 설명해 줄 때마다 숱하게 지은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그러면 뭐가 문제인지 금세 찾아내 다시 설명을 해주곤 했지만 이번에는 도통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민호는 아무 말 없이 그 눈을 빤히 바라만 보았다. 숱 많은 속눈썹이 연신 팔랑이다 멈췄다.
-그게 재미없어? 재밌던데? 아니 글자가 어떻게 재미가 없을 수가 있어?
토마스는 마치 항변하듯 물었다. 일견 억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민호는 쉽사리 답할 수가 없었다. 보통 대부분 글자에 재미를 느끼진 못 할 걸, 하고. 그러나 토마스는 민호가 말을 망설이는 것에서 저와 반대되는 입장을 가졌단 걸 빠르게 눈치 챘는지 정말로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호 너는 책도 많이 읽잖아. 이게 이해가 안 돼?
-나 별로 책 안 읽는데.
-무슨 소리야. 매번 볼 때마다 책 읽고 있었는데! 첫날에도 나 오기 전까지 책 읽고 있었잖아.
그렇게 말을 하니 민호는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첫날. 그 날은 토마스의 말대로 책을 읽긴 했다. 과제 때문에 읽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몇 번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책을 읽은 기억이 없었다. 대체 얜 뭘 보고 날 그렇게 생각한 거야?
사실 민호는 책을 읽는 일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가 읽는 책은 학교 교과서와 과제로 나온 책, 그리고 오로지 공부를 위해서 참고용으로 읽는 책뿐이었다. 사실상 독서와는 거의 담 쌓고 지내는 편이나 다름없었다. 단지 학교의 교육방침과 대입준비로 인해 읽어야 하는 양이 많아 별 수 없이 꾸준히 읽고 있는 것일 뿐 책 읽기, 그 중에서도 소설 같은 문학 작품을 읽는 건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니 자신에 대해 크게 착각을 하고 있는 눈앞의 존재에게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보다 앞서, 운동만 하고 사는 놈이 왜 제게 이런 식으로 구는 지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그가 굉장한 문학청년이란 것뿐이었지만 민호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로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대체 왜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난 책 잘 안 읽어.
-진짜?
토마스가 민호의 양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붙잡힌 손목에 민호는 살짝 당황스러워 하며 제 손을 내려다보았지만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이 더 부담스러워 밀어낼 생각은 못하고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말도 안돼.
민호는 그렇게 토마스의 생각을 총 세 번 부정한 셈이었다. 확고하게 아님을 판정받으니, 토마스는 축 늘어졌다. 표정은 꼭 세상을 잃은 사람의 그것 같았다.
-이게 그렇게 실망할 일이야?
민호가 순수히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토마스는 맥없이 아니,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기운이 없냐?
-그냥 요새 사람들 책 읽는 거 진짜 안 좋아하는 구나 싶어서……. 사실 나는 네가 책 자주 읽는 거 같길래 오랜만에 취미 같은 애를 만났구나 하고 있었는데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거라니.
민호는 괜한 미안함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렇다고 너한테 실망했다거나 그런 건 아냐. 그냥 아쉬운 거지.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토마스가 말했다.
-같이 책 읽고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엄마밖에 없다보니 좀 외로웠다고 해야 하나, 그랬거든. 다들 영화나 드라마나 많이 보지 책은 잘 안 읽으니까. 물론 나도 영화 좋아하지만, 책은 같이 얘기할 상대가 거의 없으니까 더 애착이 생기는 거 같아.
그는 이제 책상 위에 엎드린 채로 중얼중얼 말했다. 민호는 시무룩해 떠드는 소릴 들으며 풍성한 머리숱으로 뒤덮인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터무니없다 생각했던 좀 전의 가설은 사실이었다. 같이 얘기할 상대가 없다고 축 늘어져 신세한탄을 할 정도로 그는 문학청년이었다. 그게 신기해서 민호는 엎드린 그를 바라본 채 가만히 그의 말을 들어주었고 그러다 한 마디 툭 하고 던지게 되었다.
-그냥 붙잡고 떠들면 되잖아.
-뭘?
-네가 좋아하는 책 얘기.
-상대방이 지루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 말이 나오려다가도 말아.
토마스가 고개를 살레살레 저으며 말했다.
-그럼 나한테 지금 해봐.
-안 좋아한다며.
-안 좋아하긴 하지만 지루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은 안 할게.
민호가 그렇게 말하니 토마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민호를 바라보았다.
-뭐부터 말하면 되지? 작가? 무슨 작가 좋아해?
-정말 괜찮겠어? 말 못 멈출지도 몰라.
-집에 너무 늦게 돌아가지만 않게 해주면 돼.
토마스는 소리 없이 입을 달싹였다. 민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무슨 작가 좋아해? 토마스가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가 내뱉고 음, 하고 비음을 내었다. 이어 입이 벌어지고 말이 시작되었다. 웃길 지도 모르는데 나는 제인 오스틴이 좋아. 그 간질간질한 이야기들 말이야…
4
토마스에 대해 알아가는 일은 그 이후로도 계속 되었다.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는 걸 시작으로 그가 로맨스 영화를 좋아한단 것도 알 수 있었고-제일 싫어하는 영화 장르는 호러라고 덧붙였다.- 클래식을 좋아하고, 대중음악 쪽은 싫어하진 않아도 그렇게 썩 가까이 지내진 않는단 것도 그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민호가 이 모든 걸 다 알게 된 후 든 생각은 자신과 토마스는 요만큼도 닮은 구석이 없단 것이었다. 원래 그와는 마주할 일이 없기도 했지만, 이렇게 연이 닿지 않았다면 영영 모르는 사이로 지냈을 것이 뻔하다 싶을 정도였다. 우연으로도 만나기 힘들었을 법한 존재.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편, 토마스가 제가 여태 생각해왔던 인물과는 꽤 다르단 생각도 들었다. 그를 어떤 사람이라 생각할 정도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자주 들리는 말들이나 보이는 모습들에선 활자 중독 수준의 독서광이란 흔적을 일체 찾을 수 없었고, 보통 인기가 많은 또래 남자애들이 그러하듯 파티에서 들을 수 있는 떠들썩한 노래들을 좋아할 거란 막연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편견에 가까우니 차치하더라도, 전자는 정말로 의외였다. 훈련받느라 바빠서 헐레벌떡 뛰어오느라 몸도 채 씻지 못하고 오는 애가 가만히 앉아서 제 손바닥 보다 작은 책을 받쳐 들고 몇 시간이고 읽는 모습을 그 누가 쉽게 떠올릴 수 있을까. 이것도 편견의 일환이라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토마스를 껍데기만 보고 평가했기에 그런 것은 아니라고 민호는 자신의 생각에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많은 만큼 시간도 흘러 어느 덧 기말고사 기간이 되어있었다. 시험 때만큼은 훈련을 줄일 수도 있고 당장 닥친 것을 제대로 해내야 해서 같이 공부하는 시간을 두 배로 늘리게 되었다. 책 읽는 걸 좋아한단 것이 확실히 드러나는 게 토마스는 집중력이 좋았다. 거기에 원체 체력도 좋은 편이라 그는 급격히 늘어난 공부 시간을 그리 힘들어 하지 않았다. 외려 민호가 조금 힘들었다. 딱히 에너지를 많이 소비한단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니고, 그저 정신이 조금 산만했다. 토마스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나면 이런 것들을 풀어보라 지시한 후 저의 할 일을 하곤 했는데 어쩐지 점점 할 일은 않고 두 손을 가만히 둔 채 멍하니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면 항상 시선은 바로 눈앞에 있는 토마스를 향했다. 그 날도 다르지 않아서 민호는 제가 집어준 수학문제를 풀고 있는 토마스를 내내 지켜보았다. 문제가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인지 그는 제 머리칼에 왼 손을 파묻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짧게 삐져나온 머리칼을 보면서 민호는 얘 머리가 원래 이런 길이였던가, 하고 생각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아주 짧은 머리였는데. 그렇게 그의 머리 길이에 대한 기억을 되짚으면서 여전히 그 머리를 바라보았고 그러다 머리가 젖은 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억은 다시 튀어 올라 그의 머리카락이 언제부터 젖어 있었는 지에 대해 파헤쳤다. 분명 2주 전까진 이렇게 물에 젖어있지 않았다. 땀을 수건으로 다 닦아낸 것은 분명하지만 오랜 훈련으로 배어난 체취는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서 그에게선 늘 약간의 땀냄새가 났고 분명 2주 전에도 그 냄새를 맡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길면 3주간 이렇게 젖은 머리를 하고 훈련장을 빠져나와 십 분을 넘게 걸어 도서관까지 온 셈이었다. 민호는 저도 모르게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꽤 문제인 일이었다. 아무리 초겨울이어도 겨울은 겨울이고, 수업이 끝난 오후엔 해가 떨어지기 시작할 때라 낮보다는 한참 온도가 낮았다. 운동선수고, 시즌이 시즌인 만큼 몸 관리를 더 철저히 해야 할 때인데 감기 들기 십상인 행동을 하고 다녔단 게 민호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 말이야.
-응?
민호가 조용히 운을 떼자 토마스가 책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왼손은 제 머리칼을 휘젓고 있는 채였다.
-머리 말이야.
-머리?
-젖었잖아.
토마스는 두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영 모르겠단 얼굴을 했다. 민호의 미간에는 좀 더 힘이 실렸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토마스는 이제 아예 샤프를 내려놓고 몸을 세워 바로 앉았다. 계속 헤집었던 머리는 잔뜩 헝클어진 채였다. 민호가 손을 뻗어 그것을 손끝으로 살짝 빗었다. 손에 많지는 않은 물기가 묻어났다.
-아무도 뭐라고 안 해?
-뭘?
-이렇게 젖은 채로 돌아다니면 감기 들잖아. 너 이제 리그 경기도 있을 텐데 컨디션 신경 써야 하지 않아?
토마스의 눈이 다시 또 빠르게 깜박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은 아니었고, 약간 당황한 기색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다 이내 토마스가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리며 웃었고, 민호는 조금 더 인상을 쓰게 되었다.
-걱정해주는 거야?
헤헤헤 소리를 내며 토마스가 웃었다. 민호는 답하지 않았다.
-컨디션 신경 써야 하는 건 맞는데, 이건 그 범주 안에 있진 않아. 도서관 따뜻하고 습도유지도 잘 되어 있잖아. 환풍도 잘 되고. 이런 걸론 감기 안 걸려.
-되게 허세부리는 말 같은데, 그거.
-오, 아냐. 진짜야. 난 운동도 꾸준히 하고 면역력도 좋고 체온도 높은 편이라 감기 잘 안 걸리거든. 게다가 머리 안 말리는 것도 아니야. 수건으로 물기 털고 나온다고.
토마스의 말에 민호는 손을 뻗어 다시 그의 머리를 쓸었다. 그리고 그 손을 그의 눈 바로 앞에 들이밀며 말했다.
-네가 여기 온 지 삼십분은 넘었는데 아직까지 이만큼 물기가 묻어나는 거 보면 딱히 제대로 물기 빼고 나오는 거 같진 않은데.
-어…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야?
-절대 아니지. 혹시 네가 말하는 물기를 제대로 턴다는 게 수건으로 머리를 한 번 감쌌다 푸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지?
헤헤헤… 토마스는 괜한 웃음 소리를 냈다.
-됐고, 수건이나 줘봐.
-수건? 없는데.
-없어? 왜 안 갖고 다녀.
-학교에 다 있으니까? 굳이 내가 들고 다니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민호는 다시 또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런 채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잠시 숨을 멈추더니 다시 코로 길게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마스의 고개가 따라 들렸고 민호는 손을 까딱여 일어나란 신호를 보냈다. 토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민호는 발걸음을 옮겼다. 토마스도 뒤를 따랐다.
민호가 발을 멈춘 곳은 화장실이었다. 토마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민호를 바라보았고 그러다 시선이 마주했다. 민호는 아무 말 없이 토마스의 팔을 붙잡아 세면대 벽쪽으로 끌었다.
-숙여봐.
-응?
-숙여야 머릴 말릴 거 아냐.
-잠깐만, 민호. 지금 핸드드라이어기로 머리 말리겠단 거야?
-응. 그러니까 빨리 숙여봐. 얼른 말리고 다시 가서 공부해야지.
하지만 토마스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얼빠진 얼굴로 민호를 계속 바라보기만 했고 결국 민호가 직접 그의 뒷목을 잡고 고개를 숙이게 했다. 뻣뻣하게 있긴 했지만 민호의 그런 행동에 토마스는 반항하지 않았고, 그 덕에 그의 머리통이 핸드드라이어기 아래에 놓이는, 남들이 보면 웃음을 터트릴 광경이 만들어졌다. 그걸 연출한 장본인인 민호는 으레 감독들이 그러하듯 웃음기 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의 머리와 기계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따뜻한 바람이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불어나왔고, 그 온기가 고루 퍼지고, 또 계속 지속될 수 있도록 민호는 토마스의 머리를 헤집고 쓰다듬었다.
5
화장실의 핸드드라이어기로 머리 말리기를 몇 번 반복한 이후, 민호는 아침마다 씻고 나오면서 수건을 하나씩 챙겼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토마스의 머리를 말리는데 쓰였다. 민호는 토마스의 머리를 털어줄 때마다 제대로 말리고 다니라고 한소리를 했지만 토마스는 응응 하고 대답만 할 뿐,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더 축축한 머리를 하고 다니는 것 같아 민호는 얕게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하기 전 토마스의 머리를 말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갔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네.
가만히 머리를 맡기고 있던 토마스가 여상히 말했다.
-곧 방학이란 소리기도 하지. 2주밖에 안 되지만.
-방학이 우선순위인거야? 크리스마스 보다?
-방학이 우선이지. 크리스마스는 그냥 쉬는 날이 일종이고.
민호가 심드렁하니 답하자 토마스는 민호의 손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 시선을 잠시 손을 멈춘 채 받아내던 민호는 도로 토마스의 머리통을 끌어와 다시 머리의 물기를 털었다.
-크리스마스 안 좋아해?
-좋아해야해?
-보통은 좋아하잖아.
-글쎄다. 쉬는 거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건 확실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얼마 없는 거 같은데.
토마스는 다시 수건을 쥔 민호의 손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제 양손으로 민호의 손목까지 꼭 감싸 쥐었다. 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느슨하지도 않은 적당한 압력이 손목을 둘러쌌다. 체격에 비해 손이 상당히 크다고, 민호는 뜬금없는 생각을 떠올렸고, 그러고 있는 동안 토마스는 민호를 연신 바라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나하고 놀러 갈래?
-뭐?
갑작스러운 물음에 정신이 돌아온 민호가 짐짓 놀라며 되물었다. 토마스는 다시 한 번 제 물음을 반복했다. 나하고 크리스마스날 놀래?
-왜?
-왜긴. 혼자 재미없이 보내는 거 같아서 그렇지.
-아니 그다지 재미없이 보내는 건 아닌데.
-별로 안 좋아한다며?
-그게 싫어한단 말은 아니잖아.
-그래? 그래도 나하고 같이 놀자.
민호는 토마스가 꼭 떼를 쓰는 어린애 같았다. 아니, 딱 그랬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든 이게 완곡한 거절이란 걸 알아들을 법 한데, 토마스는 직접적인 표현을 써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어린애마냥 굴고 있었다. 그렇다고 토마스가 그걸 진짜 못 알아들은 것처럼 보이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토마스는 말을 잘 알아듣는 편이었다. 한 달 하고 몇 주 더 그의 공부를 도우면서 느낀 것은 기본적으로 토마스가 머리가 좋은 편이란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습득력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는 센스가 있었다. 무엇이 핵심인지 본능적으로 알아내는 능력이 있단 걸 민호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사실 이 모든 걸 차치해도 토마스가 민호의 말을 부러 모르는 체 하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표정이 문제였다. 민호는 한 번도 개를 키워본 적이 없지만, 어릴 때 사촌네 집에서 키우는 개와 몇 번 놀아본 적은 있었다. 그 개는 활동성이 좋은 종답게 항상 산책을 나가고 싶어했는데, 비가 오거나 기타 여러 이유로 나갈 수 없을 때면 항상 사촌의 다리맡을 졸졸 좇아다니며 고개가 빠져라 제 주인을 올려다보곤 했다. 지금 절 향한 토마스의 얼굴이 딱 그 얼굴임을 민호는 알 수 있었다. 산책 나갈 수 없단 말을 아무리 해도 나가자고 조르던 개의 얼굴. 민호는 괜시리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곤 여전히 붙잡힌 손목을 비틀었지만 빠져나오지는 못 했다.
-이거 좀 놓으면 안 되냐. 머리 말려야지.
-영화 볼래? 그 왜 우리 주말에 공부하러 만나는 식당 말야, 거기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영화관 있는데.
민호는 얘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하고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당최 잡히는 구석이 없었다. 그냥 크리스마스가 그냥 그렇다 답한 것뿐인데, 그게 눈앞에 있는 또래의 버튼을 잘못 누른 것 같았다. 심지어 손목을 붙잡고 있는 압력도 조금씩 세지고 있었다. 한 달 좀 넘게 알고 지낸 애가 크리스마스에 혼자 있는 게 싫은 건가, 하고 생각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무슨 친한 친구 사이인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걸로… 라는 게 민호의 생각이었다.
-너 훈련 없어?
-없어.
-1월 되면 시즌시작이잖아.
-원래 크리스마스엔 늘 놀았어.
토마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눈은 여전히 민호를 빤히 올려다보는 채였다.
-크리스마스에 영화관이면 사람 많지 않아?
-많겠지, 아마도.
-미안한데 나는 사람 많은 곳을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럼 우리집 올래?
-뭐?
-우리집에 스크린 설치해놨거든. 나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렇고 영화 보는 거 좋아해서.
토마스의 갈색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민호는 잠시 말을 고르려 시도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쩐지 입술이 마르는 것 같아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가족들 있잖아.
-괜찮아. 부모님은 아마 뭐 모임이니 뭐니 하고 나가실 거라. 올래? 아니, 와. 내가 좋아하는 영화 틀어줄게.
그는 이제 쥐고 있는 손목을 붙들고 잘게 흔들기까지 했다. 민호는 계속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꺼내볼까 하고 입을 벌렸지만 다시 닫았다. 그러다 이내 다시 입을 여는데 너… 하고 한 마디만 내뱉을 뿐 뒤를 잇지는 못 했다. 토마스가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민호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짧은 한숨을 쉬었다.
-됐고, 빨리 머리 말리게 이거 좀 놔.
-답해주면 놓을게.
-안 가. 됐지?
민호가 다시 손목을 비틀었지만 토마스는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눈을 더 크게 뜨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놀러 와, 응?
-답하면 놓는다며.
-긍정의 답을 하면 놓아줄게.
민호는 더 인상을 썼다. 토마스는 정반대였다. 그는 아까보다 더 길게 입꼬리를 늘려 웃었다. 가지런한 이를 살짝 내보이며 웃는 얼굴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고왔지만, 민호의 주관 하에서는 그다지 곱게만 보이진 않았다.
6
결과적으로 민호는 크리스마스를 토마스와 함께 보내게 되었다. 그것도 토마스의 집에서.
너는 나하고 안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서슴없어?
그때 이 말을 해야 했다고, 민호는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었고, 당장 그의 발은 토마스 집 바로 앞을 디디고 있었다. 딱 생각만큼 커다란 집이었다. 교내 유명인사답게 그의 집안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저기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야기였고, 민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주 상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대강 사는 지역만으로도 유추할 수 있었기에 규모가 있으면서 한적한 집에 새삼 놀랄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부담스러운 것은 별 수 없어 민호는 초인종을 누르는 것마저 머뭇대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집의 문제는 아니긴 했다. 토마스가 연신 집에 부모님은 계시지 않을 거라 말은 했지만,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크리스마스란 걸 민호는 겪어본 적이 없다보니 그 말이 쉬이 믿기지 않았다. 그게 묵직한 부담감을 만들어냈는데, 거기에 딱 예상한 정도의 커다란 집이 반기니 더욱 무거운 마음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 있는 노릇도 아니었다. 기실 무슨 거짓말을 해서라도 도망이야 칠 수는 있겠지만, 민호는 굳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자리를 피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민호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부터 거짓말이 그의 취미가 아닌 탓이었다. 토마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민호는 크게 숨을 쉬었다. 이어 검지를 쭈욱 내밀어 초인종을 눌렀다. 단음으로 된 벨소리가 울리다 이내 그쳤다.
-[민호!]
인터폰을 통해 토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서부터 민호가 오길 내내 기다렸다는 것이 줄줄 묻어났다. 민호는 괜히 머쓱해져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래, 나 왔으니까 문 좀 열어줄래?
-[잠깐만 기다려!]
뒤이어 무언가 쾅하고 넘어가는 소리가 나더니 쿵쿵 하는 발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점점 커진다 싶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토마스가 환히 웃으며 또 “민호!” 하고 튀어나왔다.
-어서와. 밖에 많이 춥지?
토마스가 민호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생각보다 강한 힘에 끌려 집 안으로 발을 디디자 곧장 문이 닫혔다. 도어락이 전자음을 내어 자동으로 문이 잠겼음을 알렸고 토마스는 여전히 민호의 팔을 잡은 채 집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점심 먹었어?
-아침 늦게 먹었어.
-그럼 아직 안 먹은 거네? 점심 먹을래? 오븐에 데우기만 하면 되는데.
-너 안 먹었으면.
-그럼 먹자.
토마스는 곧장 방향을 틀어 부엌 쪽으로 안내했다. 반쯤 질질 끌려 민호는 다이닝룸에 다다랐다. 발을 멈추자마자 토마스는 의자를 빼내어 민호를 앉혔다.
-데워 올테니까 잠깐 여기서 기다려.
-어, 아니. 같이 해.
민호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러자 토마스가 민호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눌러 도로 자리에 앉혔다.
-앉아있어. 별 거 아니니까.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인데 어쩐지 힘이 실려 있는 것 같다고 민호는 생각했다. 토마스는 민호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에 시선을 두다 이내 민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부는 전반적으로 따뜻한 색감으로 꾸며져 있어 내부가 넓음에도 풍족히 채워진 느낌이 들었다. 식탁은 전체적인 집 규모에 비하면 작은 편이었다. 대신에 보는 것만으로도 묵직한 무게감이 들었다. 식탁 정 중앙에는 꽃병이 놓여있었다. 민호는 잠시 그것에 시선을 두다 팔을 뻗어 잎을 쓸어보았다. 꽃잎 특유의 부들부들한 감촉이 손가락 끝에 감겼다. 손가락 끝과 끝을 마주하고 비비다 민호는 다시 팔을 뻗었다. 이번에는 꽃병을 잡아 제 앞으로 끌었다. 은은한 꽃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고개를 숙여 좀 더 코를 가까이에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꽃 좋아해?
목소리에 민호는 꽃에 묻고 있던 고개를 황급히 들었다. 향을 맡는다고 눈을 감고 있던 차에 토마스가 다이닝룸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물병과 컵을 든 채로 문 쪽에 서 있던 토마스는 성큼성큼 걸어왔고 민호는 꽃을 도로 식탁 중앙으로 밀었다.
-왜?
토마스가 물컵을 놓으며 물었다.
-그냥 생환가 하고 본 거야.
-아, 그래?
-보통은 조화 놓으니까.
물을 따르며 토마스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고 고개를 가볍게 한 번 끄덕여 민호의 답을 들었다는 표시를 했다. 그 얼굴에 미소가 띄어있어서 그런 것인지, 민호는 어쩐지 제 답이 변명처럼 들린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토마스는 물병을 내려놓자마자 꽃병을 들어 민호 앞에 놓았다.
-글쎄,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그래그래. 난 그냥 기다리는 동안 지루할까봐. 좀 가지고 놀고 있으라고.
이제 토마스는 아예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명백히 절 놀리는 꼴이라 민호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래도 여전히 토마스는 웃는 얼굴로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불편한 심사에 민호가 토마스의 등을 힘을 줘 떠밀며 한 마디 했다.
-밥이나 가져와.
* * *
황설탕 글레이즈를 바른 오븐 구이 햄과 야채 스튜가 차려졌다. 토마스는 친절하게도 민호의 접시와 그릇에 햄과 스튜를 담아 건넨 뒤 제 몫을 챙겼다. 민호가 잘 먹겠다고 인사를 하는 것으로 약간 늦은 점심이 시작되었다.
음식들은 하나 같이 따뜻하고 풍미가 깊었다. 오븐에서 데운 덕에 햄은 기름과 글레이즈가 겉돌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햄 자체의 맛도 좋았다. 민호는 어쩐지 제가 점심이 아닌 저녁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 기름지고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먹긴 하지만, 제가 먹고 있는 것들의 분위기가 점심보다는 저녁에 가까운 맛이라 생각했다. 명절이라도 세끼를 다 무겁게 먹는 편이 아닌 집안에서 자란 탓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가족에 미쳤다. 부모님은 모임에 가신다고 했던가. 그럼 혼자 있을 토마스를 위해 이 음식을 해주고 가신 걸까. 민호는 음식을 잘게 씹으며 생각도 곱씹었다.
-이건 부모님이 해주신 거야?
목 아래로 음식을 내려 보낸 뒤 물었다. 그러자 토마스는 씹던 것을 꿀떡 한꺼번에 삼켰다.
-아니, 우리 엄마는 요리엔 영 소질이 없으셔서. 해주시는 분이 따로 계셔.
-그럼 그분은 오늘 쉬시는 거고?
-응. 크리스마스니까. 집안 여기 저기 봐주시는 분들도 다 쉬셔야지. 어차피 우리 집은 명절에 집에 남아있는 편이 아니거든. 여행 갈 때도 있고, 오늘처럼 부모님 사교 모임에 가기도 하니까.
-아, 그래.
어쩐지 머쓱해서 민호는 어색한 웃음을 짧게 입가에 띄다 이내 지웠다. 그리곤 고개를 다시 접시에 박고 입에 음식물을 넣었다. 토마스도 다를 바 없는 모양인지 그가 있는 방향으로 포크가 접시에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다시 식사에만 집중하다가, 문득 민호는 이 식사 자리가 굉장히 조용하다 느꼈다. 부담스러울 만큼. 토마스와 단 둘이 밥을 먹는 게 처음이 아님에도 그랬다. 민호는 왠지 무슨 말이라도 해서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연이어지는 것을 막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바깥에서 만나는 주말마다 밥을 함께 먹을 때엔 한 번도 느끼지 못 했던 것이다. 그럼 그때는 자연스럽게 무슨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었나, 하고 기억을 되짚어보면 딱히 그러했다고 걸리는 구석은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기억이 도통 나지 않았다. 조금의 어색함이나 불편함을 느낄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호는 벌컥 물을 들이켰다. 절반을 조금 넘게 차있던 물이 한꺼번에 바닥이 났다. 컵이 다시 식탁 위에 올려 지자, 토마스가 곧바로 물을 따라 채웠다. 민호가 그를 바라보니 시선이 마주쳤다. 토마스는 광대가 볼록 튀어나오게 웃었다.
7
밥을 먹고 난 후, 토마스는 곧장 스크린이 설치된 곳으로 민호를 이끌었다. 그곳엔 다리까지 받칠 수 있는 긴 카우치가 세 개 놓여있었다. 토마스는 민호에게 정 가운데 자리에 앉으라 말하고 플레이어를 잠시 조작한 뒤, 리모컨을 들어 프로젝터의 전원을 켰다.
-이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야.
토마스가 민호의 왼쪽 카우치에 자리 잡으며 말했다. 앞의 스크린에는 영화 제목이 띄워져 있었다.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이 영화 장르가 뭐야?
-로맨스.
-아하.
-왜? 별로야? 다른 거 볼래?
-아니, 그럴 필욘 없고. 어차피 영화 잘 몰라서. 너 좋아하는 걸로 보자.
그저 예상한 대로라 작게 감탄사를 낸 것인데, 토마스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괜찮다 답했지만 선뜻 플레이를 하지 않는 것에 민호는 그가 쥐고 있는 리모컨을 빼앗아 들고 재생버튼으로 보이는 것을 눌렀다. 토마스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민호는 아랑곳 않고 리모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스크린만 바라보았다. 화면은 전환되어 까맣게 변했고 점차 밝아지면서 제작사의 로고가 전면을 채웠다. 곁눈으로 토마스가 잠시 굳었던 몸을 풀고 편한 자세를 취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반쯤 누웠던 몸을 도로 일으켰다. 그러곤 리모컨을 빠르게 쥐더니 정지버튼을 눌렀다. 화면엔 짐 캐리가 자고 있는 모습이 가득했다.
-왜 그래?
-잠깐만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토마스는 다급히 방을 벗어났다. 당최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마땅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민호는 토마스의 말대로 그를 기다릴 뿐이었다. 편안히 의자에 기대어서. 적당한 쿠션감에 몸이 금세 노곤해졌다. 그 기분 좋은 감각이 전신에 퍼지는 것을 느끼며 민호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그러길 몇 분 지나자 토마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곽 티슈가 들려 있었다.
-이게 필요할 것 같아서.
토마스가 들고 있던 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휴지가?
-나 이 영화 처음 봤을 때 엄청 울었거든. 요샌 안 울지만 넌 처음 보는 거니까.
-그러니까 내가 울 것 같단 소리네?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럴 수도 있으니까.
토마스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장난끼를 담은 것이 아닌, 순수히 웃는 얼굴이었다. 민호는 그에게 자신이 영화 보다 울 것처럼 생겼느냐고 물으려 했지만, 토마스가 자리에 앉자마자 영화를 재생시키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민호는 토마스를 보던 고개를 돌려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제 짐 캐리는 잠에서 깨어났고,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토마스의 예상은 보기 좋게 엇나갔다. 민호는 울지 않았다. 대신 울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잠든 탓이었다. 민호는 눈을 뜨고 다섯 번 즈음 눈을 깜박였을 때에야 자신이 잠들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깨닫자마자 분명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너무 당황하면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고, 몸조차 움직여지질 않는단 것을 이렇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선 자신이 아무 소리도 내지 못 했단 것에 안도했다. 토마스가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토마스는 카우치 위가 아닌 바닥에 앉아 있었다. 등을 민호가 누워 있는 카우치 한 쪽에 기댄 채, 책 한 페이지를 겨우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약한 불빛이 나오는 북라이트를 책 아래에 받쳐 모아서 세운 무릎 위쪽에 놓은 뒤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며 글자를 곱씹었다. 북라이트의 불빛에 그의 속눈썹이 길게 그림자 졌다.
민호는 이제 몸을 일으킬 수 있단 걸 느꼈음에도 움직이지 않고 잠시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독서를 좋아한단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일이지만 직접 목격을 하니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그리고 보다 더 이상한 감각이 일렁였다. 민호는 이게 어떤 감각이고,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정의 내릴 수 없었다. 그저 무언가 불편하고 들뜨고, 동시에 가려운 느낌이었다. 점심을 먹으며 느꼈던 불편함과 비슷했다. 잠들어 버렸다는 낭패감일까? 아니면 미안한 마음? 그러기엔 무언가 조금 더 초조했다. 무엇보다 그런 느낌은 이미 한 쪽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다. 민호는 여전히 토마스에게 시선을 둔 채 눈을 깜박이며 연신 머리를 굴렸다. 그 때 토마스가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쳤다.
-일어났네?
-어, 어. 깨우지 그랬냐.
-곤히 자길래. 피곤했던 거 같아서.
토마스는 책을 내려놓았고 민호는 몸을 일으켰다. 가슴을 덮고 있던 담요 끝자락이 흘러 내려가 무릎 위를 한 번 더 덮었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춥지 않았던 게 난방 때문이 아니라 담요 덕분이란 것을 민호는 뒤늦게 깨달았다. 고갤 숙여 담요를 보고 있을 때, 토마스가 말을 꺼냈다.
-시간이 좀 오래 지난 거 같은데, 집에 가야 하지 않아? 저녁은 집에서 먹어야 할 거 아냐.
-그렇지, 아무래도.
나오기 전 언제 올 거냐고 엄마가 물었던 걸 떠올리며 민호가 답했다. 토마스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민호가 뒤 따랐다.
-미안해.
방을 나서면서 민호가 말했다.
-뭐가?
민호를 돌아보는 토마스의 얼굴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민호는 거기서 한 번 더 잠든 것에 대한 미안함을 느꼈고, 동시에 계속 되는 불편한 감각이 좀 더 강하게 울렁이는 걸 느꼈다. 미간이 저절로 좁아들었다.
-보다 잔 거 말이야.
-아냐, 잘 수도 있지 뭐. 사실 저기가 자기 좋거든. 나도 자주 저기서 낮잠 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민호의 낯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토마스는 민호를 빤히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못 본 건 나중에 보면 되잖아? 그러니까 다음에 또 와. 이거 말고 다른 거 재밌는 것도 많으니까, 다른 것들도 보고 그러자.
민호가 바로 대답을 하지 않자, 토마스는 학교에서 그랬듯이 민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곤 그때처럼 답을 재촉했다. 올거지? 민호는 결국 그래, 하고 대답했고 토마스는 대답에 만족했단 듯이 입술을 길게 끌어올리며 웃었다. 잡고 있는 손목은 조금 뒤에 놓았다.
몇 발자국 더 걸으니 현관 앞이었다. 토마스는 벽에 걸어놓은 민호의 외투를 집어 건넸다. 그것을 받아들고 곧장 입은 민호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밝혔다. 어느덧 시간은 7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나 이제 가봐야겠다. 명절 잘 보내.
-그래. 너도.
민호는 바로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바깥의 어둡고 찬바람이 틈새를 타고 집안으로 번졌다. 갑작스러운 찬 기운에 목을 움츠린 찰나 손목이 도로 잡혔다. 민호가 돌아보자 토마스는 목울대를 움직여 마른 침을 삼켰다.
-왜?
-…배웅해줄까? 요 앞까지만.
-뭔…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잘만 온 길을 모르려고? 됐어, 추운데 따뜻하게 집에 있어.
-그래. 그렇지. 맞아.
손목을 놓고 양 손을 들어 보이며 토마스가 말했다. 의아함에 민호는 눈썹을 치켜뜨고 그를 바라보았지만 두 손을 흔드는 것에 다시 한 번 잘 있으라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등쪽에서 무거운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닫혔고, 이어 기계음과 함께 문이 자동으로 잠겼다. 민호는 발을 내딛다 다시 뒤를 돌아 커다란 집을 잠시 바라보았다. 찬바람이 볼을 에워쌌지만 속은 춥지 않았다. 여전히 계속 되는 불안하고, 간지럽고, 들뜬 감각이 만든 잔잔한 열 때문이었다.
8
민호가 집에 도착하자 가족들은 왔어? 하고 여상히 인사를 건넸다. 별 다를 것 없는 인사였지만 어쩐지 그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부엌에 있던 엄마의 모습을 봤을 때는 더 심했다. 민호는 제 기분에 사로잡혀 넋을 놓고 엄마를 바라보다 무슨 할말이라도 있는 거냔 물음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토마스와 함께 있는 내내 느꼈던 불편함이 무엇인지 정의내릴 수 있었다. 마음이 쓰였던 것이었다. 종일 큰 집에서 혼자 있었을, 그리고 제가 돌아가고 나면 또 혼자 있게 될 토마스가. 다 큰 제 또래가 집에 혼자 있는 게 마음 쓰일 게 뭐 있느냐 싶지만, 크리스마스라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분명 크리스마스가 지루하다 말한 건 민호 자신이었지만, 어째 그 말을 해야 했을 사람은 토마스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니면, 사실 그 얘기에 동감해서 동지와 같이 보내며 조금이나마 지루함을 달래고 싶었다거나. 일련의 생각들을 떠올리게 되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정성스럽게 마련된 크리스마스 디너가 뱃속을 채울수록 배보다 마음이 부풀었다. 꼭 음식물이 가슴에 얹히는 것 같았다. 머리엔 온통 토마스의 모습이 자리잡았다. 자고 있는 제 옆에서 작은 불빛에 의존해 책장을 넘기던 그 모습으로. 저녁은 먹었을까. 대충 아무거나 먹은 건 아닐까. 염려가 저녁 내내 민호의 손끝을 간지럽혔다. 결국 민호는 간지러움을 이기지 못 했고, 밤 10시가 다 되어갈 때 즈음 휴대전화의 메시지 창을 열어 자판을 두드렸다. 뭐 하냐? 토마스 이름으로 달린 메시지함에 그렇게 첫 메시지가 기록되었다.
메시지함은 그 후 차곡차곡 쌓였다. 내용은 대부분 시답잖았는데, 가령 뭐해?, 밥 먹었어?, 뭐 먹었어?, 잘 자, 잘 잤어? 같은 내용들이 주를 이뤘다. 메시지의 시작은 주로 토마스였고, 민호는 그에 답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가끔 민호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 경우는 보통 이런 내용이었다. 62페이지부터 65페이지까지 문제 풀어놔. 그러면 토마스는 우는 모양의 이모티콘을 최소 10개씩 찍어 보냈다. 그 답으로 검사할 거야, 라는 말을 보내면 그는 고분고분하게 열심히 할게, 라고 답했다.
짧은 방학은 금세 끝나, 다시 도서관에서 방과 후 학습이 진행되었다. 여전히 둘은 매일 같이 메일을 주고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토마스가 보내는 내용의 레퍼토리가 하나 더 늘었다. 나 오늘 훈련이 좀 늦어질 것 같아. 본격적으로 리그가 시작되면서 훈련양이 늘은 탓이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토마스는 여전히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은 채로 한 시간 늦게 도서관에 나타났다. 그가 자리 앉자마자 민호는 그의 뒤에 서서 가지고 다니는 수건으로 물기를 털었다. 이젠 털고 다니란 주의를 주지는 않았다. 그저 말없이 오 분 정도를 손만 움직였다. 물기가 거의 다 털린 것을 확인한 후, 민호는 대강 토마스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맞은 편 제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고 수건을 가방에 쑤셔넣었다.
-자냐?
책을 펼치고 앞을 바라보니 토마스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이 없었다. 그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러보지만 여전히 답은 없었다. 민호는 손을 뻗어 토마스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다. 그제야 토마스가 고개를 퍼뜩 들고 반응했다.
-졸려?
-아니야, 안 졸려.
토마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봐도 졸려 죽을 것 같은 얼굴인데.
-아냐, 금방 깰거야. 빨리 하자. 해오란 것도 다 해왔어.
토마스는 책과 노트를 펼쳐 보였다. 특유의 단정치 못한 필체로 문제 풀이가 줄줄이 씌어져 있었다. 민호가 눈짐작으로 확인하자 토마스는 자세를 꼿꼿이 하곤 턱을 치켜들었다. 저렇게 한사코 졸리지 않다고 부정을 하며 재촉을 하니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민호는 눈썹을 한 차례 들썩였다가 목을 다듬었다.
-저번에 타원을 끝냈으니까, 오늘은 쌍곡선 하자. 쌍곡선의 모양은 알지?
가운데에 놓여진 노트 위에 좌표평면이 그려지고 그 위에 대충 쌍곡선이 그려졌다. 토마스는 민호의 물음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눈을 치켜 떠 대답을 확인한 민호는 다시 노트 위에 샤프를 대고 움직였다.
* * *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토마스는 금세 잠들었다. 그래도 앞부분엔 어떻게 졸지 않고 잘 버티는가 싶더니 문제를 풀어보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잠으로 몸의 힘이 저절로 빠진 탓에 늘 꼿꼿했던 어깨와 등이 풀린 채였다. 거기에 문제를 푸느라 숙였던 고개는 더 숙여져 금방이라도 책상에 이마를 박을 기세였는데, 반면에 손엔 샤프가 여전히 꼭 쥐어진 채였다. 민호는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훈련이 많아진 건 알지만 이렇게 피곤할 정도로 많아진 줄은 몰랐다. 워낙에 토마스가 제 입으로 체력이 좋다 떠든 탓이었다. 안 그래도 민호는 방학이 끝나면서 일주일에 두 번만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었다. 토마스의 스케쥴을 고려해서. 토마스가 생각보다 빨리 진도를 따라오기도 해서 조금 천천히 진행해도 무리가 없을 거란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반대했다. 결코 그럴 수 없다면서. 체력 자랑도 그 때부터였다. 이런 줄 알았으면 숙제라도 적게 내주는 거였는데. 작은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민호는 잠시 토마스를 더 바라보다 몸을 움직였다. 일단 여전히 쥐어져 있는 샤프를 빼내어 책상 한켠에 놓고, 토마스의 앞에 제 책들을 적당한 높이로 쌓아 올린 후 토마스의 이마를 괴었다. 팔은 편하게 앞으로 느슨히 뻗게 했다. 자세가 그럭저럭 괜찮은 지 토마스의 숨소리가 보다 편안하게 들렸다. 민호는 제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을 제 자리에 앉아서 반쯤 흡족하게 바라보다 이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방이 잘 이뤄지고 있긴 하지만 자는 중엔 체온이 떨어지기 마련이라, 무언가 담요를 대체할 것이 필요했다. 민호가 찾아낸 것은 그의 교복 자켓이었다. 잠시 코트를 덮어줄까도 생각했지만 너무 무거울 것 같아 자켓을 택했다. 그것까지 덮어주고 나니 할 일은 다 한 것 같았다. 민호는 다시 제 자리에 앉았다. 이제는 다 마른 까만 머리칼이 덮인 정수리를 흘끗 바라보다 가방에서 파일을 꺼내 펼쳤다.
답신으로 받은 쉬운 페이퍼는 정말로 쉬웠지만 그만큼 또 어렵기도 했다. 하나 둘 떠오르는 의문점들을 줄을 치고 한 쪽에 번호를 매겨 적어놓고 보니 일곱 개를 훌쩍 넘어갔다. 이어 여덟 번째 의문점을 적은 민호는 어느덧 뻐근해진 목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깼네?
토마스가 고개를 들고 눈을 느리게 깜박이고 있었다. 민호의 물음 아닌 물음에 토마스는 답하지 않고 여전히 눈을 깜박였다. 풀린 얼굴을 보아 깬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더 자.
민호가 도닥이듯 작게 말했다. 토마스는 여전히 답은 하지 않았지만 말은 알아 들은 모양인지 고개를 다시 책더미 위에 묻었다. 그러곤 살짝 흘러내린 민호의 교복 재킷을 목끝까지 끌어올리더니 뭐라뭐라 작게 중얼거렸다.
-뭐?
단순히 잠꼬대를 하는 게 아닌, 제게 하는 말인 것 같아 민호는 되물었다. 그게 맞다는 듯 토마스는 다시 중얼거렸다.
-민호… 좋아…….
민호, 냄새, 좋아. 되새기듯 토마스는 한 번 더 중얼대곤 곧장 잠이 들었다.
9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으려 수건에 푹 고개를 묻었다. 잘 세탁되어 고이 말려진 수건은 올이 하나하나 살아있는 듯이 얼굴을 감쌌다. 폭신폭신한 감촉을 의미 없이 느끼며 얼굴을 닦아내다 문득 코에 포근한 냄새가 닿았다. 민호는 수건에서 고개를 떼다 도로 박고 킁킁댔다. 제대로 맡으니 온몸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애초에 들뜬 것도, 긴장한 것도 없지만 적당히 달달한 향이 안정감을 주었다. 민호는 이 향이 어디서 시작된 향인지 알고 있었다. 세탁실 선반에 놓여있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담긴 핑크색 섬유유연제였다.
얼마 전에도 제가 사다놓은 그것을 떠올리자 곧장 익숙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민호 냄새 좋아. 잠에 취해 평소보다 훨씬 낮고, 불분명한 발음이었지만 의미만은 더할 것 없이 분명히 닿아와 이렇게 불쑥불쑥 다시 들리곤 했다. 그 냄새가 혹시 이 냄새를 말하는 걸까. 민호는 지난 한 주 내내 궁리했던 문제에 대한 답을 한 번 더 추측해보았다. 하지만 섬유유연제 냄새가 교복 재킷에서까지 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물세탁을 하는 옷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다른 걸 떠올려 봐야 떠오를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민호는 향수를 쓰지 않았고, 당연히 샤워코롱 같은 것도 쓰지 않았다. 여름이라면 엄마의 극성에 데오드란트를 종종 뿌리니 그 냄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토마스를 처음 만난 건 겨울이었고, 여전히 그 겨울이었다. 그러니 그럴싸한 답은 줄곧 생각해보아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토마스에게 직접 물어볼 수야 있겠지만 막상 얘길 하려 하면 멋쩍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민호는 계속 그래왔듯이 답을 추론해내는 걸 포기하고 떠오르는 생각을 지웠다. 나쁘다고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깊게 생각할게 뭐가 있어. 이젠 정말로 다시 생각하지 않겠다고, 작은 다짐을 속으로 되뇌며 욕실을 빠져나왔다.
* * *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민호.
-너 왜 여기 있어?
수학 수업을 마치고 나오기 무섭게 토마스가 달려들었다. 학교에서 만나는 일이야 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방과 후 도서관에서 만나는 게 전부였기에 이런 식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놀란 마음에 대뜸 물음이 튀어나왔지만 토마스가 답하기도 전에 용건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휴대전화 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토마스는 화면을 밝히고 그것을 민호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수학 수업에 들어가기 전, 민호가 보낸 문자가 화면 제일 밑에 띄워져 있었다.
오늘 수업 없음. 앞으로 일 주일에 두 번만 한다.
-나하고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
토마스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나름 험악하게 인상을 쓴 모양새 같았지만, 어쩐지 어린 애가 심통이 난 얼굴 같다고 민호는 생각했다. 딱딱하다기 보단 징징대는 듯한 말투 때문일 지도 몰랐다.
-뭐가 한 마디도 없어. 지난번에 물어봤잖아, 줄이는 게 어떻겠냐고.
-그래서 내가 안 된다고 말했잖아. 민호 너도 수긍했고.
-그랬지.
-근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지난주에 누가 계속 주무셔서.
순식간에 토마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건 전날에 원정 경기 다녀와서 그런 거라니까.
한참만에 깨어나서 사정을 털어놓았던 그때와 같은 말을 했지만 지난주엔 이해를 구하는 투였던 반면, 이번엔 순 툴툴대는 투였다.
-그래, 그러니까 횟수를 줄이자고. 다음번 원정경기 이후에 또 그럴 거 아냐.
민호는 말을 잇기에 앞서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지난번엔 미처 말하지 못 했는데, 너 꽤 잘 하고 있어. 굳이 일주일에 세 번씩 만나서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수학이야 아직 조금 부족하지만 과학은 이제 진도도 거의 다 따라잡았고 네가 습득하는 속도를 보면 앞으로 나가야 할 내용을 못 따라갈 것 같지도 않아. 게다가 시험도 아직까지 꽤 시간이 남았고. 그리고 하다가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다른 날에 시간을 좀 더 늘려서 하는 방법도 있어. 꼭 일주일에 3일씩 시간을 낼 필요까진 없다고. 무엇보다 토요일에 경기 있을 때도 있을 거 아냐. 주말에 공부하는 거야 토요일이나 일요일 둘 중 하루 되는 때로 하기로 했던 거지만 토요일에 경기하고 나면 일요일엔 쉬는 게 낫기도 하니까.
민호가 토마스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가볍게 토닥이곤 마저 말을 이었다.
-대학들이 요구하는 성적이 까다로워서 이러고 있긴 하지만 원래 너는 운동선수잖아. 아무리 그래도 공부 보다야 운동이 먼저 아니야? 4월까지는 리그 있으니까 공부는 조금 쉬엄쉬엄하고 운동에만 집중해. 쭉쭉 이겨서 우승해야 할 거 아냐.
말이 통한 모양인지 토마스의 표정은 한결 풀려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온전히 풀린 건 아닌지 여전히 미간에는 깊이 주름이 패여 있고 턱은 볼록하니 살이 올라온 채였다. 토마스는 몇 번 숨을 크게 쉬더니 입을 열었다.
-꼭 성적 때문만은 아니란 말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민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뭐가?
민호가 물었다. 토마스는 답하지 않았다. 외려 입술을 더 굳게 다물곤 민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민호는 또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아냐, 아무것도.
잠시 후 토마스가 입을 열어 답했지만 납득이 되는 답은 아니었다. 그런 답은 입을 닫고 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민호는 토마스에게 뭐가 아니냐며 다시 물으려 했다. 하지만 토마스가 먼저였다.
-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 상황 봐가면서 일주일에 두 번만 하자.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토마스의 눈이 민호의 눈과 일직선으로 마주했다. 민호는 순간 그의 눈이 참 깊단 생각을 했다.
-나하고 점심 같이 먹어.
-뭐?
-점심 같이 먹자고. 매일매일.
10
수학 수업은 혼자 듣지만, 나머지 수업은 두세 명과 같이 듣는 편이었다. 그들은 신입생 때부터 민호와 같은 클럽 활동을 통해 친해지게 된 아이들로, 민호와 비슷한 부류였다. 상위권 성적에 벌써부터 대학 진학을 진지하게 준비하고 있는 다소 보수적인 중산층 집안 출신. 굳이 밥을 누구와 함께 먹을 필요는 없긴 하지만 친하게 지내는 만큼 민호는 그들과 자주 밥을 먹는 편이었다. 정확히는 매일 그러했다. 다만 종종 한 명씩 빠지곤 했는데, 대부분 여자친구와 같이 밥을 먹겠단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빠져나갔던 인물들은 결별 이후엔 다시 점심을 함께 했기에 일년 하고 반 정도의 시간 동안 민호가 혼자 밥을 먹는 일은 없었다. 민호를 포함해 총 네 명인 무리에서 두 명은 여자친구와 함께였다. 해서 민호가 토마스에게 소개하고, 동시에 토마스를 소개해야 할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이쪽은 자트. 자트, 이쪽은 토마스.
한 손에 음식을 든 채로 다른 한 손으로 맞은편과 제 옆을 가리키며 민호가 말했다. 토마스는 곧장 안녕, 하고 크게 인사하곤 빈손을 내밀었지만 상대방은 얼기설기 헝클어진 금발머리처럼 갈피를 못 잡고 민호와 토마스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짧은 한숨이 작게 민호의 입에서 새어나오자 자트는 그제야 정신이 든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곤 내밀어진 토마스의 손을 잡고 위 아래로 흔들었다.
-안, 안녕.
자트의 인사에 토마스가 빙그레 웃고 손을 거두었다.
-오늘부터 토마스도 같이 밥 먹을 거야.
-엉?
음식이 든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민호가 말하자 자트가 되물었다. 어찌저찌 인사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벌어진 상황이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민호는 의자를 빼며 그렇게 되었어, 하고 말을 덧붙였다. 옆에서 토마스도 마찬가지로 의자를 빼었다. 그러다 자리에 앉으려는 민호의 팔을 급하게 붙잡았다.
-네가 여기 앉아.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토마스를 보자 그가 답을 이었다.
-왼손잡이잖아. 왼쪽에 앉아야 편하지.
-아, 그렇네.
민호는 순순히 토마스의 말을 따랐다. 이미 테이블 위에 올려놨던 제 음식을 왼쪽으로 밀고 토마스와 위치를 바꿔 이미 빼어져 있는 의자에 앉았다. 민호가 앉고 나서야 토마스도 음식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감도는 채였다.
-왜, 뭐가, 아니 어떻게 된 거야?
자트는 다시 한 번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시선도 여전히 민호와 토마스를 오고 가며 갈팡질팡 초점을 맞추지 못 했다. 민호가 씹던 것을 넘기고 답하려던 찰나 토마스가 선수쳤다.
-내가 같이 먹자고 했어.
-왜?
-그냥? 그냥 그러고 싶어서?
말꼬리를 올려 묻는 듯한 어조로 토마스가 대답했다. 그는 계속 웃는 낯이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어둡게 변하더니 미간에 살짝 주름이 패였다.
-혹시 내가 불편해?
자트는 펄쩍 뛰었다. 그리고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황급히 저었다. 고개도 함께 양옆으로 흔들렸다.
-아니, 그건 절대 아니야. 전혀 안 불편해.
-그럼 다행이네.
확실한 대답에 토마스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난 그냥 좀 당황스러워서… 이렇게 둘이 친한 줄 몰랐거든.
토마스가 먼저 대답을 하는 바람에 도로 음식에만 집중하던 민호가 고개를 들고 자트를 바라보았다. 눈치 없는 소릴 할 것 같다는 직감이 불현듯 떠올랐다. 하지만 반응이 빠르진 못했다. 민호가 먼저 무어라 말하거나 손을 내젓기 전에 토마스가 눈썹을 치켜 올려 자트에게 더 말을 해달란 무언의 신호를 보냈고, 자트는 곧장 그에 답했다.
-민호가 너에 대해서 얘길 한 게 거의 없어서. 처음 공부 시작한다고 했을 때 얘기한 거 외엔 아마 없을 걸.
-뭔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어.
애써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며 급히 끼어들었지만 이미 제 오른쪽 얼굴에 미묘한 시선이 닿고 있단 걸 민호는 느낄 수 있었다. 민호는 애써 토마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곁눈질을 하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아 또렷하지 않은 시야에 잡힌 토마스의 얼굴은 그다지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나에 대해서 별로 얘길 안 했구나.
정리하는 것처럼 자트의 말을 되풀이한 말에서도 유감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민호는 여전히 토마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질 못했다. 대신에 눈에 힘을 실어 자트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민호의 시선을 자트가 눈치챈 건 다시 말을 이으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는 벌린 입을 다물었다가 민호의 눈짓에 다시 입을 벌려야 했다.
-아니, 그, 근데 뭐, 남, 남자애들끼리 뭔 할 말, 말이 많겠어. 우린 원래 별로 얘길 잘 안 해서…
자트는 또다시 말을 더듬었다.
-그래? 나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라서. 하긴 민호가 말이 없긴 해. 크리스마스 때 민호가 우리집에 왔었는데 말은 거의 안 하고 밥만 먹더라고. 그러고보니 주말에 밖에서 공부하면서 밥 먹을 때도 나만 떠들었네. 민호가 제일 많이 말할 때는 공부 도와줄 때 뿐일 걸. 생각해보면 나하고 민호 사이에 오고가는 말 중 80프로는 내가 하는 것 같아.
하하하 소릴 내며 말끝에 토마스가 웃었고 그러자 자트는 반쯤 굳은 얼굴로 민호의 눈치를 살피며 애매한 웃음소릴 냈다.
다행히 자트의 말로 토마스의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았다. 민호는 이제야 토마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까처럼 웃는 낯으로 토마스는 절 바라보는 민호와 시선을 마주하더니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얇은 입술이 보다 더 얇아졌다. 민호는 도로 음식에 고개를 박았다. 그 뒤를 이어 자트도 음식에 집중했다. 토마스 역시 다시 포크를 놀려 음식을 쿡쿡 찔렀다. 그의 그릇 위는 여전히 음식물이 수북했다.
-그런데 원래부터 둘이서만 밥 먹었어?
몇 입 음식을 먹는 것 같더니 토마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아, 그건 아니고. 같이 먹는 애들이 둘 더 있는데 그 놈들이 지금 연애사업 중이라.
자트가 물음에 대답했다. 토마스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업 중일 땐 밥 먹는 시간도 상대한테 투자해야 하는 법이긴 하지. 그렇지, 민호?
-응? 어, 뭐 그렇지.
갑작스런 물음에 민호는 더듬더듬 수긍했다. 그러자 토마스의 입술이 다시 또 얇아졌다. 민호는 그 입가에 음식물의 흔적이 요만큼도 남지 않았단 것을 눈치챘다. 이어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려 그의 여전히 수북한 접시를 보았고 다시 토마스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아직도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제 그만 말하고 밥이나 먹어.
왼손에 들린 포크로 토마스의 그릇을 가리키며 민호가 말했다. 토마스는 다시 또 웃어 보였다. 그러곤 곧 고개를 살짝 숙여 음식을 한 입씩 넣기 시작했다. 민호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제 몫에 집중했다.
11
이번 주말엔 시간 많아, 라고 월요일부터 토마스가 호언장담을 한만큼 민호는 제가 해야 할 공부거리들을 한가득 안고 나왔다. 그에 반해 토마스는 꽤나 가벼운 가방을 들고 나타났는데, 그 안에 든 것은 공부하기로 한 수학책과 노트, 그리고 소설책 한 권이 전부였다.
토마스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배운 것들을 노트 정리하곤 바로 이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막 읽기 시작한 책인지 거의 앞부분부터였다. 그 모습들을 민호는 제가 들고 있는 프린트물 너머로 바라보다 다시 제 몫의 것에 집중했다.
민호는 원체 집중력이 좋은 편이다. 하나에 집중을 하기 시작하면 그와 관련되지 않은 부분에 대한 감각이 모두 차단될 정도였다. 쉽게 집중할 수 있는 편이기도 했다. 그런 성질이 토마스 앞이라고, 또 밖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어서 삽시간에 낱장으로 된 종잇장과 두껍게 엮여진 책을 번갈아 오고가는 것에 오로지 정신이 쏠렸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 했다. 문득 집중이 깨어졌을 때엔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마치 제 세계 어딘가에서 중력이 급격히 세어져 시간이 남들보다 빨리 지나가 버린 것처럼. 그마저도 목이 뻐근해 고개를 드는 바람에 깨달을 수 있었다. 보통 때라면 목 뒤의 근육을 이완하며 짧은 휴식을 취하다 도로 하던 것을 마저 잡았을 것이지만, 이번엔 그러지 못 했다. 민호는 근육을 주무를 새도 없이 고개를 휘휘 저어 사방을 살펴야 했다. 제 건너편에 있어야 할 토마스가 없어서였다. 그의 자리엔 잘 겹쳐 놓은 수학책과 노트, 그리고 보던 곳까지 펼쳐 엎어놓은 소설책만 놓여있었다. 제법 두꺼운 소설책이었는데 어느 새 절반가량을 읽었는지 양옆으로 펼쳐진 책의 두께가 비슷했다.
-나 찾아?
불쑥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민호가 고개를 돌릴 새 없이 토마스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없길래.
-화장실 좀 다녀왔어.
그리고 이것도 사느라고, 하며 토마스는 주머니에 있는 것들을 꺼냈다. 초콜릿 바 네 개. 같은 브랜드였지만, 포장지의 색과 그림이 조금씩 다른 것을 보아 각기 다른 맛인 듯했다. 토마스가 그 중 하나를 들어 민호에게 건넸다. 민호는 아무 생각없이 제게 주어진 것을 받았고 이어 토마스는 제 빈손으로 다른 한 개를 쥐어 들었다.
-뭐가 좀 먹고 싶어서. 단 거 좋아하지?
초콜릿 바 포장을 뜯으며 토마스가 물었다. 묻는 투이긴 했지만 확신에 찬 것이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모양인 것도 같았다. 민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 저도 마찬가지로 포장을 뜯었다. 포장지와 같은 하얀색의 초콜릿으로 코팅된 두꺼운 캐러멜 바가 드러났다. 민호는 트이지 않은 아래쪽을 밀어 초콜릿 바의 머리만 불쑥 올라오게끔 했다. 그리고 그 끝을 베어 물고 입안에서 굴리며 씹었다. 분유맛과 흡사한 단맛이 금세 입안에 가득 퍼졌다.
-맛 어때? 먹어 본 적 없는 거라서.
-맛있네.
각종 견과류와 그 사이사이 엉긴 건과일을 씹으며 민호가 답했다. 저도 모르게 고개도 잘게 끄덕였다. 토마스가 제 검지를 펼쳐 보이며 한 입만, 하고 말했다. 민호는 곧장 포장지 안에 든 나머지 초콜릿 바를 다 꺼내곤 반절을 뚝 잘랐다. 체온으로 인해 손끝에 초콜릿이 조금 묻었다. 그걸 토마스에게 곧장 내밀자 토마스는 의자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상체를 접어 쭈욱 뻗었다. 그는 입으로 민호가 내민 것을 받아먹었다. 초콜릿이 묻은 손가락 끝을 입술과 혀끝이 훑고 지나갔다.
어떻게 반응할 것도 없이 짧은 순간이었다. 민호가 손끝을 움츠리고, 어깨에 저절로 힘이 실렸을 때에 토마스는 이미 민호가 준 초콜릿 바를 꼭꼭 씹으며 우물대고 있었다. 절 뚫어져라 응시하는 민호를 보고도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로, 토마스는 그저 맛있다, 하고 환히 말하며 마저 우물댈 뿐이었다.
-이거 먹어 볼래?
-아니, 난 됐어.
토마스의 권유에 민호는 여전히 힘이 실린 목과 어깨로 고개를 저었다. 토마스는 마저 입안의 것을 씹어 넘기고 제가 들고 있는 것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민호는 이내 고개를 저어 정신을 차리곤 말없이 남은 제 하얀 초콜릿 바를 입안에 밀어넣었다. 토마스의 입술이 닿았던 손끝이 어쩐지 화끈대는 것 같아 손끝과 손끝을 맞대어 문질렀다.
다시 하던 공부를 하려고 민호는 두 손을 책 위로 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글을 읽어 내려가도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손 때문일지도 몰랐다. 여전히 뜨거운 기운이 남아있는 손끝은 이제는 톡톡 튀는 무언가가 그 끝을 두드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집중을 돕기 위해 민호는 손을 움켜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숨을 한 번 몰아 쉬어보았다. 정신을 산만하게 하던 것이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다시 토마스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조금씩 읽히던 글자가 도로 뿔뿔이 흩어졌다. 민호는 미간에 살짝 힘을 준 채 고개를 들었다.
-음악은 통 듣질 않네. 시디 플레이어는 무겁기까지 한데. 기껏 가져와놓고선 안 듣는 거야?
책 더미 옆에 둔 시디 플레이어를 가리키며 토마스가 물었다.
-집중 안 되거나, 잠깐 쉴 때 들으려고 가지고 온 거라서.
민호의 답에 토마스는 작게 그렇구나, 하고 중얼 거렸다. 그러더니 다시 물었다.
-근데 무슨 음악을 주로 듣길래 늘 시디로 듣는 거야? 나도 자주 그러긴 하지만 그야 클래식 음반 들을 때고. 전에 잘 모른다고 했던 거 같은데.
토마스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민호는 종알종알 토마스가 늘어놓는 그가 좋아하는 것들 에 대해 듣곤 했었다. 그 때 뿐만 아니라 항상 민호는 토마스의 말을 들어주는 편이었고, 그런 만큼 그에 대한 많은 것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 마냥 듣고 있기만 하는 것은 민망하다보니 종종 화제와 맞는 말을 붙여주곤 했다. 토마스가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얘기할 때에도 그랬다. 그쪽은 잘 모르는데, 한 번 해봐. 그렇게 지나가듯 말했던 것을 토마스는 쉽게 떠올리고 있었다.
-퀸(Queen) 노래.
-퀸? 프레디 머큐리?
-응. CD로 듣는 건 그냥 늘 그렇게 듣다보니 그게 익숙해서 그렇고.
-오, 그렇구나.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토마스는 플레이어와 민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신기하단 듯이 쳐다봐.
-아니, 신기한 건 아니고. 내 기억에 그렇게 집중이 잘 되게끔 하는 노래가 아니었어서. 조금 의아한 거 뿐이야. 원래 락 좋아해?
-좋아한다기 보단 그냥 어릴 때부터 자주 들어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 영향.
-그거면 이해되지, 충분히. 확실히 애들은 부모님 보고 자란단 말이야.
토마스는 제가 한 말에 푸스스 소릴 내며 웃었다.
-그럼 이거 들어도 집중이 잘 된단 말이지?
민호는 토마스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거슬린 적은 없는데. 어차피 시간 지나면 하던 거에 집중하게 되어서 안 들려.
-그래? 그럼 나 이거 들어봐도 돼?
그래라, 하고 답하며 민호는 플레이어를 들어 건넸다. 그러자 토마스는 고개와 함께 양 손을 저어 보이더니 대뜸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민호 오른편의 빈자리에 앉았다. 다시 또 민호의 어깨에 민호의 의지와 상관없이 힘이 실렸다.
토마스는 플레이어에 연결된 민호의 헤드폰 잭을 뽑더니 자신의 웃옷 주머니에서 조금 엉킨 이어폰을 꺼냈다. 그는 능숙하게 엉킨 것을 풀어내 잭을 플레이어에 꽂곤 제 왼쪽 귀에 이어폰 한쪽을 끼었다. 그리고는 나머지 하나를 민호에게 건넸다.
-몇 번 들어보긴 했지만 퀸 노래는 잘 몰라서. 네가 자주 듣는 걸로 같이 듣자. 너는 하던 공부 하고, 나는 책 읽고.
긴 팔을 길게 뻗어 엎어 놓았던 책을 집어 들며 토마스가 말했다. 민호는 토마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기도 했고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운 이유도 있었다. 그는 별 수 없이 토마스가 건넨 것을 받아 오른쪽 귀에 끼었다. 그리고 플레이어의 리모컨을 이용해 트랙 넘버를 조정한 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전주를 들으며 토마스는 고개를 리듬에 맞춰 끄덕였다. 그러더니 책을 펼쳐 글자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민호는 힐끗 그가 읽는 것을 따라 읽었다. 하지만 글씨가 작아서 그런지 잘 보이지 않았고, 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거두고 제 앞의 것에 시선을 맞췄다. 그러나 여전히 글씨는 잘 보이지 않았다. 민호는 이제야 토마스가 한 말이 이해가 되었다. 집중이 잘 되게끔 하는 노래가 아닌. 그 말대로 였다. 왜 그걸 여태 몰랐는지 모르겠지만, 조금도 집중이 되지 않단 것만은, 그리고 도움이 되지도 않단 것만은 분명했다.
12
-오늘부터는 우리 둘 뿐이야.
교실을 나오자마자 대뜸 나타나 앞뒤 설명 없이 하는 말에 민호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자 토마스는 빙그레 웃어 보이며 말없이 전해진 물음에 답했다.
-자트는 오늘부터 따로 밥 먹는대.
-왜?
-연애 사업 시작했거든.
-걔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토마스가 수긍했다. 이렇게까지 긍정하는 것을 보아 거짓말을 하거나, 장난을 치는 것 같진 않았다. 토마스가 그런 농담을 할 성격도 아닌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민호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너무 뜬금없는 소식이기 때문이었다. 기실 자트는 연애 쪽으론 소질이 없는 편이었다. 워낙 숫기가 없어 또래 남자애들을 만나더래도 낯선 사람을 만나면 긴장을 하곤 했기에 관심이 있는 여자 앞에선 더더욱 자신의 긴장 상태를 컨트롤 하지 못 했다. 그런 탓에 같이 어울리는 무리의 다른 아이들이 몇 명의 여자친구를 사귀고 헤어질 동안 자트만은 아무런 일이 없었고, 그랬기에 민호는 그와 점심을 같이 하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자트가 갑자기 연애사업을 시작했다니. 그것도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다 토마스에게 처음으로 관련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 민호는 더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무언가 알려면 토마스보다 자트를 훨씬 오래 알아온 제가 더 알아야 할텐데, 알고 지낸 지 이제 겨우 한 달된 토마스만 전후사정을 다 아는 듯한 상황이니 정보를 이해하기 이전에 상황이 접수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민호가 밀려오는 의아함에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 토마스는 민호가 어떻든지 제멋대로 민호에게 어깨동무를 하곤 걸음을 내딛었다. 그 덕에 민호가 토마스보다 키도, 덩치도 조금 더 컸음에도 토마스에게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민호가 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토마스와 함께 학교를 벗어나고 있었다. 교문을 지나쳤다는 걸 깨닫자마자 민호는 곧장 걸음을 멈췄다. 토마스도 따라서 멈췄다.
-뭐야?
-밖에서 밥먹자.
다소 퉁명스러운 물음이었지만 토마스는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한편으론 눈치가 없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학교에 급식비 내놓고 뭔 밖에서 밥을 먹어.
-매일 학교 밥만 먹기 질리잖아. 가끔 밖에 나가서 먹고 후식도 사먹고 하면서 기분도 푸는 거지.
-점심시간이 몇 시간씩 되는 것도 아닌데 뭔 소릴 하는 거야.
-몇 시간 아니어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어떻게?
-궁금하면 일단 밥 먹으러 가자.
민호는 토마스가 순 억지를 부린다 생각했다. 하지만 몸은 생각과 별개로 토마스를 따라 움직였다. 얼마 걷지 않아 토마스가 걸음을 멈췄다. 민호도 따라 멈췄다.
-중국요리?
-이런 건 빨리 나오니까.
토마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말을 덧붙였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시간이 넉넉하지 않을 때 좋은 곳이었다. 배달과 테이크아웃을 메인으로 하는 터라 조리 시간이 짧은 편에, 그렇다고 내부에 테이블이 없는 것은 또 아니라서 빠르게 먹고 치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근방에 있는 오피스 단지 대부분은 아직 점심시간이 아니라서 훨씬 짧은 대기시간에 한적하게 점심을 즐길 수도 있었다.
-여기에 이런 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자주 와?
음식점 안으로 들어서며 민호가 물었다. 토마스는 고개를 한 번 저었다.
-그건 아니고 오가다 보여서. 넌?
-여기 말고 집 근처는 꽤 자주.
-그럼 잘 됐다. 나 맛있는 메뉴 좀 추천해줘. 중국 요린 몇 번 안 먹어봐서 하나도 몰라.
-당당하게 끌고 오더니 하나도 몰라?
약간의 힐난조로 말하자 토마스는 뒷목을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누구나 처음은 있기 마련인 걸. 이번에 도전하고 다음번에 또 오려고 했지.
-말은 참 잘 한다.
어이가 없단 듯이 민호가 웃자 토마스는 다시 또 따라 웃었다. 카운터의 점원이 그걸 지켜보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로 하실 겁니까?
-새우 먹어?
-딱히 못 먹는 거 없어.
민호는 토마스의 답을 듣고 잠시 메뉴를 살피다 점원에게 말했다. 라지 사이즈 두 개로, 둘 다 볶음밥으로 해주시고요, 하나는 칠리 새우 하고 상하이 비프, 다른 하나는 오렌지 치킨에 브로콜리 비프로 주세요. 민호가 말하는 동안 점원은 빠르게 기계를 두드렸고 계산된 총 금액이 기계 옆에 딸린 작은 창에 떴다. 토마스가 번쩍 팔을 뻗어 내밀었다. 손에 카드를 쥐고 있는 채였다.
-이걸로 계산 해주세요.
-뭐야, 왜 네가 계산해.
토마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민호가 물었다.
-빨리 계산해 주세요.
토마스의 재촉에 점원이 빠르게 카드를 가져가 결제를 마쳤다. 그 과정을 민호는 살짝 이맛살을 구긴 채 지켜보았다.
-저기 창가에서 먹을까?
점원이 건네는 카드와 영수증을 받고 토마스는 애써 민호의 시선을 피하면서 자리를 살폈다. 그러더니 민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곧장 자신이 가리켰던 자리로 향했다. 민호는 학교를 나올 때처럼 말을 달지 않고 토마스의 뒤를 따랐다. 대신 자리에 앉자마자 지갑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토마스가 황급히 민호의 손을 붙잡았다.
-돈 안 줘도 되는데.
-난 공짜 음식 안 먹는데.
-주말에 만날 땐 항상 내가 내잖아.
-그거야 내가 공부 가르쳐주니까 그런 거고.
-그럼 다음번에 네가 사면 되잖아.
민호는 잠시 말없이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색이 옅은 갈색 눈이 꽤나 간절해 보인다고, 민호는 생각했다. 다음번. 다시 또 나와서 밥 먹자는 걸까. 민호는 조금 더 토마스의 두 눈을 들여다 보다 토마스의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그의 어깨가 바짝 긴장하듯 살짝 들썩였던 거 같지만 민호는 잘못 봤다 생각하며 지갑을 주머니에 넣었다.
-왜 그렇게 칼 같아.
잔뜩 불만인 목소리로 토마스가 구시렁댔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하나 계산해야 할 사이야?
입을 삐죽 내민 채로 중얼 대는 게 금방이라도 울음보가 터질 어린 애 같아 보였다. 그렇다고 정말로 토마스의 눈에 눈물이라도 맺혔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저 민호가 느끼기에 그의 불만스러운 얼굴 한 편에 서운함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뭐가 서운해서? 하고 민호는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대신에 묘한 죄책감이 들어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후로 둘 사이에 말이 없었다. 밥이 나왔단 소리에 민호가 먼저 일어나기 전에 토마스가 재빨리 움직여 날랐고,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치킨이 든 것을 말없이 민호에게 건네기만 했다. 음식의 절반 가량이 없어졌을 때에야 민호는 제가 먼저 말을 하지 않는 이상 토마스가 입을 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건넬 말이 없었다. 떠오르지 않는다에 가깝기도 했다. 민호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화두를 먼저 던지는 경우가 없었고 그랬기에 자신이 말을 먼저 꺼내야 하는 상황에선 더욱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민호는 밥을 먹던 것도 멈추고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거의 고개를 처박다시피 숙이고 밥만 먹어대고 있었다. 볼이 빵빵하게 차오른 것에 민호는 잠시 시선을 두다, 제 몫의 음식을 토마스의 그릇에 덜었다. 그러자 토마스가 고개를 들었다.
-…다른 것도 먹어보라고.
마주한 시선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 제 귀에도 변명 같이 들렸다. 하지만 정작 토마스로부터 이렇다 할 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빵빵한 볼을 한 채로 입안의 것을 꼭꼭 씹으며 민호를 건너다볼 뿐이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숙이곤 제 반찬의 일부를 민호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계속 밥만 먹었다. 별 수 없이 민호도 토마스처럼 밥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그릇의 바닥이 다 드러났을 때에야 토마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민호는 고개를 들고 토마스를 보았다가 이어 토마스가 시선을 둔 곳을 바라보았다. 토마스가 밥을 받아올 때 같이 들고 온 물컵 옆에 반으로 접힌 종잇장이 놓여 있었다. 티켓이었다.
-다음 주말에 우리 지역에서 경기야.
토마스의 말을 들으며 민호는 반으로 접힌 티켓을 펼쳤다. 근처에 있는 경기장의 이름과 경기 시간, 그리고 좌석 번호 하나가 인쇄되어 있었다.
-혹시 그날 바쁜 일 있어?
-없어, 아마도.
-없는 거야 있는 거야?
-없어.
-그럼 거기서 볼 수 있는 거지?
-그래.
민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토마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하고 들어올렸다 내리면서 숨을 조금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러더니 민호에게 다 먹은 거 맞지? 하고 묻곤 제 그릇과 민호의 그릇을 한데 겹쳐 정리를 하더니 음식을 가져올 때처럼 빠르게 일어나 카운터에 반납했다. 민호는 토마스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다시 티켓을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그걸 외투 주머니에 넣었을 때 토마스가 고개를 들이밀고 말했다. 후식 먹으러 가자. 보통 때처럼 다시 환한 얼굴이었다.
13
링크장에 도착해 처음 놀란 것은 토마스가 준 좌석이 꽤 좋은 좌석이란 것이었고, 두 번째로 놀란 것은 홈팀보다 어웨이팀의 응원단 규모가 더 큰 것이었다. 경기 시작 전부터 열기가 뜨거운 상대팀 응원단을 보면서 민호는 불현듯 토마스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토마스 말대로 더 인기 있는 건 위쪽 동네인 모양이었다.
경기 시작까지 시간이 넉넉히 남아 민호는 휴대폰에 넣어둔 아이스하키 경기규칙을 다시 한 번 읽었다. 토마스를 이전부터 알고 있기야 했지만 사실 민호는 그가 국가대표 주니어 선수이자 유망주고 학교 아이스하키팀의 에이스란 것만 알았을 뿐, 아이스하키에 대해 아는 것은 조금도 없었다. 그렇다고 민호가 스포츠 경기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팬이라 말할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여느 미국인들처럼 민호도 야구와 농구, 미식축구 경기를 보곤 했다. 다만 아이스하키는 예외였다. 지금 사는 지역이야 관심도가 높은 편이긴 하지만 민호가 원래 나고 자란 지역은 좀 더 아래에 있는 동부지역이었고, 그곳은 아이스하키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민호에게 아이스하키는 생소한 무언가였다. 더욱이나 크면서 메이저 스포츠 관람에 더 큰 관심을 두지 않게 된 민호여서 그가 가까워지기엔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토마스의 포지션도 이번에서야 알았다. 라이트 윙. 공격력이 좋아 보통 1, 2라인에 포함되었다.
한 주 내내 보던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더 읽은 민호는 시계를 확인했다. 경기 시작 전까지 십 분 전. 경기 잘 하라고 메시지 하나를 넣을까, 하고 앱을 켰다가 이내 도로 껐다. 민호는 아예 홀드키를 눌러 화면마저 끄고 외투 주머니에 넣은 뒤 가방에서 시디플레이어를 꺼냈다. 주변이 시끄럽긴 하지만 헤드폰을 챙겨왔으니 거슬리진 않을 것 같았다.
이틀 전, 밤중에 토마스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자?, 하고 묻는 말에 민호가 이제 곧, 이라 답하면서 시작된 이야기는 짧게 끝났다. 토마스는 간략하게 말할게, 라고 하면서 경기날에 민호가 해야 할 행동을 지시했다. 경기를 봐줄 것, 경기가 끝난 뒤에 선수 대기실 쪽으로 올 것, 혹 막는 스탭이 있다면 이 메시지를 보여주면 될 것. 혹시 오래 걸리더라도 기다려줘, 라고 토마스가 말했다. 민호는 왜?, 하고 묻고 싶었지만 알겠어, 라 답하고 화면의 불을 껐다. 조금 뒤 휴대폰이 진동했고 화면이 자동으로 밝혀지면서 메시지 하나가 더 떴다. 잘 자. 그게 마지막이었다.
두 곡이 끝나기 무섭게 링크장의 불이 한층 더 환해졌다. 민호는 플레이어를 끄고 서둘러 헤드폰을 벗었다. 차단되었던 주변의 소음이 환호성으로 인해 배가 되어 귀를 두드렸다. 링크 위로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 * *
경기는 접전 끝에 홈팀의 승으로 끝났다. 스코어는 2-1. 선취골은 홈팀에서 터졌다. 1피리어드 후반부 트리핑으로 어웨이팀의 레프트 디펜스가 2분간 페널티 박스로 퇴장당하면서 홈팀이 파워플레이 유닛으로 전환, 동시에 어웨이팀은 페널티 킬링 유닛으로 전환하여 맞선 가운데 홈팀의 라이트 디펜스를 기점으로 토마스의 어시스트를 통해 레프트 윙이 득점에 성공했다. 득점 이후 4분간 양 팀은 체킹 유닛으로 게임을 진행하며 1피리어드를 마무리 했고, 15분 뒤 2피리어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체킹 유닛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2피리어드에서는 득점이 나지 않았다. 양 팀 모두 페널티는 자주 주어져 유닛의 전환이 잦았으나 어느 한 쪽도 득점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러다 3피리어드가 시작된 지 1분만에 어웨이팀의 골이 터졌다. 파워 플레이 골이었다. 동점 상황이 되면서 경기는 격해졌다. 2피리어드에서도 많은 페널티가 주어졌지만 3피리어드에서는 그 이상으로 페널티가 주어져 홈팀과 어웨이팀 모두 각각 3명의 선수들로만 경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다 3피리어드가 2분 남았을 때, 홈팀의 센터가 골텐더 인터피런스로 페널티 박스로 퇴장당했다. 하지만 명백히 따지면 센터에게 주어질 게 아니라 어웨이팀의 디펜스에게 주어져야 할 페널티였다. 디펜스가 자기 팀의 골리와 홈팀의 센터가 부딪치도록 센터를 민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홈팀의 주장은 즉각 항의 했으나 심판은 완고했다. 2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홈팀은 2분간 수적 열세인 상황으로 경기에 임해야 했다. 유닛은 곧바로 페널티 킬링 유닛으로 전환되었다. 다만 이번에는 수비에 주력을 두기보다 공격에 주력을 두어 토마스가 투입되었다. 이미 토마스는 20분 가량 뛴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단순 공격을 넘어 수비에 일조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링크 전후방을 빠르게 누비며 골을 노렸다. 경기 종료 27초 전. 홈팀 감독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라이트 윙, 즉 토마스의 쇼트 핸디드 골이 터진 것이었다. 토마스는 상대 팀 수비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비집고 들어가 빠르게 골로 연결해냈다. 그 뒤 홈팀은 최대한 경기의 진행을 느리게 유도하면서 시간을 끌었고 남아있는 짧은 시간이 버저 소리와 함께 끝나면서 경기가 종료되었다.
민호는 경기 시작 전, 선수들이 입장할 때만 해도 토마스를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경기가 진행되는 중엔 좀처럼 토마스를 찾아낼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토마스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익숙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낯설고 생소했다. 처음에는 보호 장비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토마스가 선수 치고 작은 편이기도 했지만, 민호가 체격이 좋은 편이다보니 실제 토마스의 체격보다 그를 조금 더 작게 느끼곤 했기 때문이다. 커다란 장비는 민호가 항상 보던 토마스의 몸을 배로 부풀렸고, 거기에 헬멧까지 쓰니 영락없이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했으니 그가 낯설게 느껴지는 게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부분이 다른 것 같았다. 토마스의 유니폼 뒤에 새겨진 그의 이름마저 낯선 것은 외양적인 면에서의 차이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내가 알던 토마스는 어땠지? 민호는 대기실 바깥 로비에 앉아서 속으로 자문했다.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웃는 얼굴이었다. 토마스는 언제나 미미한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거기에 민호가 무슨 말을 하면 금방 활짝 웃으며 답을 하고 말을 이었다. 자기의 얘길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어린 애가 신이 나서 재잘재잘 떠드는 것처럼 그는 얼굴을 환히 밝히며 술술 떠들었다. 때때로 장난을 칠 때에도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민호는 곰곰이 기억을 되짚다가 지난 크리스마스 때를 떠올렸다.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꽃을 매만지던 절 발견하곤 토마스는 능청스럽게 민호를 놀렸다. 그리고 그는 제일 좋아한다는, 로맨스 영화를 틀어주었고 우는 걸 대비하기 위해 휴지까지 챙겨다 놓았다. 그러다 민호가 중간에 잠들었을 때, 사방을 조용히 하고 불을 밝히지도 않은 채 북라이트의 가장 약한 빛에 의존해 조용히 책을 읽었다. 차분하지만 다정하고, 동시에 따뜻한. 그때의 토마스는 그랬다.
-무슨 생각해?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민호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나온 건지 토마스가 코앞에 서 있었다. 미미하게 미소를 띤 얼굴. 스스로에게 한 물음에 바로 떠올렸던 모습이 다시 눈앞에 있었다.
-아무것도 아냐.
말의 앞머리를 살짝 더듬었지만 민호는 애써 태연하게 행동했다.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웃느라고 요기가 이렇게 패였었다고.
토마스는 제 입가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말했다. 민호는 제 얼굴이 대강 어땠을 지 떠올릴 수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내가 언제 그렇게 웃었다고? 그렇게 되묻고 싶었지만 말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는 계속 토마스를 올려볼 뿐이었고 그 시선에 토마스는 영문을 알 수 없단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탓에 물에 젖어 내려앉은 머리카락 끝에서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떨어졌다.
-오늘은 수건 있지?
-응? 아, 응. 있는데.
-줘봐. 그리고 여기 옆에 좀 앉고.
제 옆을 가리키며 민호가 말하자 토마스는 순순히 따랐다. 그가 가방의 앞주머니를 열자마자 잘 개켜진 수건이 나왔다. 그걸 건네받자마자 민호는 크게 펼쳐 토마스의 머리를 덮었다. 뽀송뽀송했던 수건에 금세 물기가 올랐다.
-수건이 젖은 것도 아닌데 왜 머리를 제대로 안 털고 나와.
-빨리 보고 싶어서?
말해놓고 자신도 웃긴지 토마스가 키득댔다. 하지만 민호는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그는 외려 손끝까지 괜한 긴장이 차올라 손이 멈추는 걸 막으려 애썼다. 그런 민호의 속은 모르고 토마스는 연신 웃었다.
-배고프다. 빨리 해줘. 밥 먹으러 가자.
여전히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토마스가 말했다. 민호는 대답하지 않는 대신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14
교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던 토마스가 보이지 않았다. 수업이 늦어지는 걸까 하고 그쪽으로 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뒤늦게 한 가지가 떠올랐다. 토마스가 지금 듣는 수업이 무엇인지 모른단 것이었다. 민호는 가방을 앞으로 둘러매고 안쪽 깊숙한 곳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수업 듣는 동안에는 아예 켜놓질 않아서 화면에 온전히 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그는 로고가 사라질 때까지 빤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홈화면이 뜨기 무섭게 메시지 창을 띄웠다. 그러자 부르르 휴대폰이 진동하더니 화면 최상단에 새로 들어온 메시지가 떴다.
민호, 미안한데 나 일이 있어서. 로비 게시판 앞에서 좀만 기다려 줄래?
수신시간이 20분 전이었다. 민호는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답을 썼다.
알겠어.
발송이 된 걸 확인하고 민호는 휴대폰의 무음설정을 풀고 화면을 껐다. 그리고 그것을 교복 자켓 주머니에 넣고 발걸음을 떼었다. 행선지는 로비였다.
본관의 로비에는 커다란 게시판이 붙여져 있다. 물론 게시판은 학교 전반에 곳곳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개중 가장 크고 소식이 제일 많이 붙는 것은 단연 로비에 있는 것이었다. 민호는 1학년 때만 해도 매일 같이 그 게시판을 확인했다. 클럽 활동이나 경시대회 관련 소식, 가령 같이 준비할 스터디 모집 같은 것들에 대한 소식을 알기 위해서였다. 한 학년 올라가면서 부터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기에 살피지 않았지만 때때로 지나가다 흘끗 보곤 했다.
그곳엔 항상 토마스의 이름이 있었다. 매일 살폈던 1학년 때에도, 종종 스치듯 보던 몇 개월 전에도. 오랜만에 찾았음에도 여전히 그의 이름이 있었다. 이틀 전 있었던 경기 소식이었다. 종료를 코앞에 두고 토마스의 득점으로 경기에 승리하였고, 이로써 우승을 놓고 네 개의 학교가 벌이는 챔피언 결정전에 올랐다는 내용이 그와 다른 몇 선수들의 단독사진과 단체사진 밑에 쓰여 있었다. 그 날 밥을 먹으면서 앞으로 한 달간은 경기가 없다고 한 말이 이 뜻인가 싶었다.
민호는 한 번 더 그 게시물을 읽고 토마스의 사진을 살피다 다른 게시물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다지 흥미가 돋지는 않아서 얼마 보지 않아 몸을 돌려 벽에 등을 기댔다. 언제쯤 올까. 민호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오전 내 들었던 수업 내용을 떠올렸다.
-너 여기서 뭐하냐?
그럼에도 시간이 잘 가지 않는 것 같다 느끼고 있을 때, 불쑥 나타난 목소리가 민호의 시선을 끌었다. 자트였다. 그의 옆에는 아직 낯선 동급생 여자애가 한 명 있었다. 자트와 비슷한 환한 금발 머리를 차분하게 하나로 묶은 여자애는 명랑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지난주에서야 자트가 처음 소개 해주었기에, 심지어 그마저도 아주 짧은 찰나였기에 민호는 어색함을 느꼈지만 못 본 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뻣뻣하게 손을 흔들었다.
-토마스 때문에.
짧게 자트의 물음에 답했다.
-토마스 뭐? 아까 오면서 토마스 봤는데.
불과 한 달 여 전에 처음 토마스를 소개했을 때의 자트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말투였다. 얘네 정말 언제 이렇게 친해졌지. 몇 번이나 떠올렸던 의문이 다시 생각났다. 그리고 뒤따라 지난주에 자트에게 물었던 것도 떠올랐다.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학교의 규모가 아주 큰 것은 아니라 충분히 알 수도 있지만 자트는 워낙 숫기가 없어 주변에 사람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민호가 알기에 그녀는 자트가 기존에 알던 사람이 아니었고 그 점이 민호가 평소라면 묻지 않았을 질문을 하게 했다. 자트는 갓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늘 그렇듯 환한 얼굴을 숨기지 못 한 채 민호에게 답했다. 토마스 덕분에. 사실 줄곧 혼자 바라보던 애인데 토마스가 도와줬어. 자트의 답에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말이 생각났지만 민호는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정말로 답을 듣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해결되지 않은 물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토마스가 자기 일 있다고 잠깐 여기서 기다리랬거든.
-일? 그 다른 학교 교복 입은 여자애가 그 일인가?
민호가 설명을 요구하듯 조금 미간을 좁히자 자트는 이어 답했다.
-교실 앞문 복도에서 웬 여자애랑 얘기하더라고. 잘 아는 사이 같았어, 여자애가 팔짱까지 끼고 있었으니까.
여자친구일까? 자트가 제 한쪽 손을 붙잡고 있는 여자애에게 속닥였다. 그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럴지도 모르겠다, 라며 웃었고 자트도 따라 웃었다. 민호는 벽에서 등을 떼고 똑바로 섰다.
-교실 어디였는데?
-거기로 가려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서관 2층 가운데 계단 옆이었어.
자트 대신에 여자친구가 답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흔들며 나중에 또 봐, 하고 인사했다. 민호는 대답 없이 바로 걸음을 옮겼다.
* * *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부터 토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호는 조금 더 발을 빨리 해 층계를 올랐고, 2층에 다다르자 눈앞에 토마스의 뒷통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트의 말대로 낯선 교복을 입은 검은 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토마스의 손을 꼭 붙잡고 자기 얼굴 가까이 끌어 당겼다.
-어떻게 이렇게 매몰찰 수 있어? 나 정말 슬프다, 토마스. 너랑 나랑 이런 사이였어?
조그만 얼굴이 토마스의 손에 폭 파묻혀선 장난스럽게 엉엉 우는 소릴 냈다.
-내가 계속 얘기 했잖아. 점심 약속 있다고.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예쁜 내가 몸소 와줬는데. 케익도 주고 선물도 줬는데.
-그래서 내가 케익 먹었잖아. 두 조각이나 먹었다고.
토마스의 목소리에는 난감한 기색이 섞여있었다. 하지만 손을 뺀다거나 여자를 밀어내는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민호는 얼굴이 궁금했다. 토마스의 얼굴이. 어떤 얼굴로 손을 내주고 달래듯이 말을 건네고 있을까. 떠오르는 게 없진 않았다. 이틀 전처럼 민호의 머릿속에서 토마스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다 입술이 좀 더 얇아지면서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고, 밝지만 동시에 너무 밝지 않은 갈색 눈이 따뜻하게 빛났다.
-밥 좀 사달라니까 그게 뭐가 어려워서 그래. 생일 때 경기 보러 가겠다니까 오지도 말라고 하고.
-경기 별로 좋아하지도 않잖아, 너. 오늘도 수업 듣기 싫어서 온 거잖아.
-아니거든? 너 말 진짜 함부로 한다.
여자는 고개를 들고 사뭇 차가운 얼굴로 토마스를 흘기며 그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내리쳤다. 그녀의 손을 토마스는 큭큭 대며 가볍게 잡아챘다. 그리고 그 때 여자의 두 눈이 민호와 마주쳤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더니 토마스에게 시선을 던져 눈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어쩐지 도망을 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민호가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보다 토마스가 고개를 돌리는 게 더 빨랐다.
-민호?
그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여자가 물었다. 친구야? 토마스는 대답하지 않고 민호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뒤를 여자가 따랐다.
-나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놀라서 그런 지 평소 보다 목소리 톤이 조금 더 높았다.
-자트가 여기서 봤대서.
-아, 아아. 자트 만났어?
-어, 로비에서.
-그랬구나. 미안, 내가 너무 많이 기다리게 했지?
-그건 딱히 아니고 내가 오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랬는데… 누구야?
민호가 눈짓하며 묻자 토마스의 시선이 그에 맞춰 옆을 향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것 마냥. 마치 언제부터 여기 있었냐는 듯이.
-이쪽은 내 친구 트리사야. 그리고 트리사, 여기는 민호.
토마스가 트리사라 소개한 여자는 손끝을 팔랑이듯 흔들며 안녕, 하고 인사했다. 그리고 대뜸 물었다.
-혹시 네가 토마스랑 점심 먹기로 한 친구야?
-맞아.
-그래? 그럼 잘 됐다. 오늘 하루는 내가 토마스랑 먹으면 안 될까?
-야, 너 무슨 소리를!
-아니면 너도 같이 먹자.
입을 막으려는 토마스의 손을 요리 조리 피하며 트리사가 외쳤다. 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해 토마스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는데 성공해 막힌 소리로 읍읍 하고 소리를 지르며 바동대야 했다. 그녀는 몸을 뒤틀며 주먹을 휘둘렀는데 아까와는 달리 퍽퍽 소리가 났다. 그럼에도 토마스는 꿈쩍도 않고 난감한 미소를 지은 얼굴로 민호에게 사과했다.
-미안, 민호. 내가 잘 돌려보낼게, 조금만 기다… 악!
비명과 함께 토마스의 손이 불에 덴 듯 트리사에게서 떨어졌다. 깨물린 모양이었다. 트리사는 후 하고 숨을 내쉬며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한 번 쓸더니, 물린 손을 쥐고 아파하는 토마스를 밀어내고 민호의 앞에 섰다. 누가 보아도 예쁜 얼굴이 방글방글 웃었다.
-같이 먹자, 응? 엊그제 생일 축하해주려고 만나자 했더니 경기 있다고 안 만나줘서 기껏 오늘 학교까지 찾아온 건데 밥도 같이 안 먹는 건 너무하잖아. 나한테 토마스가 이렇게 해줬으면 난 수업 안 듣고 토마스랑 놀러 갈 거라고.
웃던 얼굴은 금세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러더니 도로 환하게 웃으면서 민호의 두 손을 마주 잡아왔다. 그리고 그 위로 토마스의 손이 들어왔다. 토마스가 입을 열었다.
-토마스.
하지만 토마스가 무슨 말을 꺼내려던 찰나 민호가 먼저 토마스의 이름을 불렀다. 토마스는 입을 벌린 채 트리사에게 두었던 시선을 민호에게 돌렸다.
-너 생일이었어?
-어? 어, 뭐… 그랬지…….
두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머쓱하게 토마스가 답했다.
-왜 말 안 했어?
-아니, 그게 뭐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고 그냥 대뜸 내 생일 말하는 것도 민망하니까… 경기가 있어서 정신이 없기도 했고…….
토마스의 목소리는 점차 기어들어갔다. 일견 말끝을 얼버무리는 것 같기도 했다. 민호에게 맞췄던 시선을 점차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것도 있었다. 민호는 그 모든 걸 파악하듯 빤히 바라보다 트리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 말대로 해.
아직 트리사에게 잡혀 있는 손을 가볍게 빼내며 민호가 말했다. 토마스가 소리쳤다.
-아니, 민호, 그럴 필요 없어. 트리사 돌려 보내면 돼.
그는 민호의 어깨께를 붙잡았다. 하지만 곧바로 민호가 어깨를 들어올려 두 손을 떨쳐내었다. 토마스는 다시 민호의 어깨를 잡지 못 했다. 그렇다고 손을 거두지도 못 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황망한 얼굴을 한 채 민호를 바라보았다.
-둘이 먹어. 난 괜찮으니까.
단호하게 말하며 민호가 격려하듯 토마스의 어깨를 조금 두드렸다. 트리사가그런 민호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민호는 별 응답 없이 그 미소를 보다 돌아서 왔던 길을 따랐다. 아랫입술을 깨물어 입을 닫고 주먹을 쥔 채였다. 그리고 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15
트리사가 토마스를 찾았던 그 날 오후, 여느 때처럼 민호는 토마스와 도서관 스터디룸에서 다시 만났다. 토마스는 사과부터 했다. 너무 미안해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오늘 점심일은 정말 미안해, 다음엔 이런 일 없을 거야, 하고 말했다. 그에 대한 민호의 대답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뭘 사과를 하고 그래, 그런 거 가지고. 공부나 하자. 그 말을 끝으로 내내 공부에 대한 이야기만 오고갔다. 즉 민호는 평소보다 말이 많았고, 토마스는 반대로 없었다. 그러다 학교를 빠져나오면서 토마스가 겨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민호, 혹시 화난 거 아니지? 시계가 잠깐 멈췄던 것처럼 민호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짧게 실소했다. 뭘 그런 거 가지고. 그게 그 날의 인사를 제외한 마지막 대화였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민호는 화가 난 게 맞았다. 토마스에게는 아닌 척 했지만 민호는 이미 그때 자신이 화가 났단 걸 자각하고 있었다. 다만 이유만큼은 민호도 알지 못 했다. 며칠이 지나서 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며칠의 시간이 이유를 알 수 없는 화를 가라앉혔고, 또 그 이유에 대한 후보군을 꼽게 해주었다. 일단은, 토마스가 제게 생일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간 별별 이야기를 다 했으면서, 정작 그런 것은 알려주지 않은 걸 민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점심시간이 뜻하지 않게 파토가 난 것이었다. 물론 기존에 같이 밥을 먹던 친구들과도 이런 일이 종종 있긴 했고 때마다 별 문제없이 혼자 잘 먹고 넘어가긴 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혼자 먹는 일 자체가 문제가 있진 않았다. 그러나 약속이 어그러졌단 게 유쾌한 일은 아니니 화가 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마지막은 토마스와 정말 친한 친구를 보아서 일시적으로 질투가 난 것이었다. 살아오면서 이런 이유로 화가 난 적이 있느냐 하면, 결단코 단 한 시도 없었지만 때때로 그런 식으로 질투가 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듣곤 했다. 고작 만난 지 4개월 조금 넘은 토마스에게 생전 느끼지 못 했던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제 생각으로도 그다지 개연성 있진 않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앞선 두 가지의 이유도 마찬가지라 민호는 이것도 후보군에 꼽았다. 문제는 그 개연성이었다. 세 가지 다 그다지 납득이 가는 가설이 아니라서 민호는 어떤 것 하나라고 확정 지을 수 없었다. 혹은, 이것과 저것의 복합이라고도 결론 내릴 수도 없었다. 그래도 화가 났던 감정이 일시적으로 끝났단 것은 다행이었다. 토마스가 화가 났느냐, 물었단 것은 분명 티가 났단 것일 텐데, 매일 한 끼 식사를 같이 해야 하는 상황에 연신 화가 나있다면 그 기색이 조금씩 티가 났을 테고, 그것은 곧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유를 여직 알지 못 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민호는 괜찮은 종결이라 생각했다. 심지어 민호는 토마스의 생일 선물을 고민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였다. 토마스를 알아온 지난 시간 동안 민호는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게 분명 그의 선물을 고르는데 도움이 되긴 했다. 다만 민호가 그 분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책, 영화, 클래식. 어느 하나도 민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나마 그에 대해 알고 있는 부분도 토마스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무난한 것이 영화가 아닐까 하고 영화 dvd를 선물하겠다 마음을 먹었지만 제가 본 영화는 이미 다 알고 있고, 또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 민호는 금세 생각을 접어야 했다. 클래식은 셋 중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이라 처음부터 기각이었고,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책이었다.
오래 전 토마스에게 책을 잘 안 읽는다 하긴 했지만, 그래도 민호는 한 분야에 있어선 여러 책을 읽긴 했다. 순수 과학. 특히 그 중에서도 우주와 관련된 책들은 웬만한 것들은 섭렵했다 보아도 무방했다. 공부를 위해 읽은 것이니 토마스처럼 취미생활의 일환으로 생각할 수는 없긴 하지만 그래도 민호는 그걸 꽤 좋아했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우주물리를 연구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토마스가 이쪽 분야의 책은 그리 많이 읽지 않는 것 같았단 것이었다. 책 이야기를 할 때마다 토마스는 주로 소설에 대해 얘기했고 간간히 인문학 쪽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또 민호가 여태껏 본, 토마스가 읽고 있는 책은 다 문학이기도 했다. 토마스가 좋아하지만, 동시에 익숙하지는 않은 부분. 여기에까지 생각이 이르자 민호는 주저하지 않고 집 근처 자주 가는 서점으로 향했다. 고른 것은 5년 전에 처음 읽은 코스모스였다. 다소 두껍긴 하지만 내용이 그다지 어렵지 않고, 칼 세이건의 문장은 문학적인 면이 있으니 독해력도 좋고 이해력도 빠른 토마스라면 문제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계산을 치렀다. 생일 카드값까지 포함한 값이었다. 카드를 떠올린 것은 계산을 기다리며 주변을 살피면서였다. 각종 책갈피와 함께 진열되어 있는 작고 아기자기한 카드 몇 개가 바로 눈에 들어왔고 민호는 제 차례가 올 때까지 그것을 눈으로 연신 살피다 가장 가운데에 있던, 제일 무난해 보이는 하나를 꺼내 같이 계산했다.
호기롭게 구입은 했지만 막상 카드를 쓰려고 펜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말이 별로 없었다.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작은 카드 하나 쓰는 게 어렵진 않을 텐데 이상하게도 글이 써지지 않았다. 결국 하루 내내 고민하다 학교에 도착하고서야 한 문장을 썼다. 생일 축하해. 카드 겉면에 쓰인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그 아래 민호가, 라고 덧붙이고 민호는 카드를 책 사이에 끼어 두었다.
그 선물은 점심 이후에야 토마스에게 줄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토마스의 사물함에 둘 수 있었다. 처음 선물에 대해 고민할 때만 해도 점심을 먹으면서 직접 건네줄 요량이었으나 막상 그때가 되니 민호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 뭐가 내키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난 번 화가 난 이유를 모르던 것처럼. 하지만 그걸 건네주고 밥을 먹을 생각을 하니 지레 속이 울렁이는 것은 확실했다. 그 울렁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전 수업 내내 집중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물함에 갖다 두자, 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서야 속이 가라앉았고 민호는 그 결심대로 아무 일 없이 점심을 먹은 뒤 한 팔에 책을 끼고 토마스의 사물함 쪽으로 향했다.
사물함은 중앙 건물에 모여 있었고, 같은 학년의 것은 같은 층에 놓여있었다. 그 중 토마스의 사물함은 가장 서쪽에 있었다. 민호의 것은 동쪽 끝에 있었기에 두 거리는 멀지 않지만, 그렇다고 또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이런 식이었으니 토마스를 실제로 볼 일이 없었던 거구나, 하는 새삼스런 생각이 들어 민호는 혼자 살풋 웃었다.
토마스의 사물함은 다른 것들과 다를 게 없었다. 남들과 같은 사이즈에 남들과 같은 색, 그리고 모두와 마찬가지로 약간이 스크래치가 나 있었다. 민호는 손잡이 바로 옆에 길게 나 있는 흠집을 손끝으로 매만지다 문을 열었다.
내부는 깔끔했다. 그렇다고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지런히 잘 꽂힌 책들과 한 쪽에 엎어놓은 머그컵, 안쪽 벽에 잘 붙어있는 칫솔 같이 있어야 할 것들이 딱딱 제 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런 만큼 제 자리가 아닌 것 같은 게 눈에 띄었다. 가장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편지 봉투가 바로 그것이었다. 민호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집어 들었다. 핑크빛으로 귀엽게 무늬가 새겨진 봉투 뒷면엔 빨간색 하트 모양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민호는 불에 데인 듯 화들짝 놀라며 편지를 떨어뜨렸다. 그것은 사물함 안으로 안착하지 못 하고 민호의 발치에 떨어졌다.
민호는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어쩌면 문을 열었을 때부터 알았을 지도 몰랐다. 그래서 눈에 띄었고, 제대로 확인하겠단 본능이 이성을 앞서 나가 손을 뻗게 만들었던 것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호는 발치에 떨어진 그것을 주워야 한단 것을 알았다. 그러나 다시 본능이 튀어나와 말했다. 줍지 말라고. 그걸 주우면 후회할 거라고. 왜? 민호가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자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귀가 다 시끄러울 정도로 빨랐다. 그리고 두 볼에는 열이 올랐다. 그러나 몸은 움직일 수 없었다. 대신에 생각이 빠르게 움직였다. 여태껏 이보다 더 빨리 움직여 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과거로, 더 과거로 기억과 생각이 되돌아갔다. 그러다 일순 멈췄다. 멈춘 그곳은 트리사를 만났던 며칠 전 그 날이었다. 토마스가 트리사에게 손을 내주고 있었고, 민호는 다시 화가 났다. 그 때와 똑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가 달랐다. 이제 그 이유를 안단 것이었다.
16
-…호. 민호!
-예?
손등을 따갑게 찌르는 펜촉에 민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절 부르는 소릴 듣자마자 그는 황급히 대답을 하고 허리를 세워 앞을 바라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한숨소리뿐이었다. 미스터 스콧이 갖은 상을 찌푸렸다.
-내 수업이 그렇게 재미가 없습니까? 다 아는 내용을 내가 되풀이 하고 있는 거예요?
-아뇨, 아닙니다.
-그럼 뭐가 문젠가요?
스콧의 물음에 민호는 아무런 답을 하지 못 했다. 할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말없이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자 스콧이 더욱 인상을 썼다.
-나가세요, 민호. 아무리 민호여도 지난 삼 주 내내 집중하지 못하는 걸 보니 여기에 있게 할 수 없군요.
-죄송합니다, 그치만 이제 수업에 집중할테니…
-아니요. 나가세요, 민호. 적어도 이번 주에는 우리 수업시간에 얼굴을 보지 않는 게 좋겠어요.
민호는 스콧이 평소에는 물러도 수업에 있어선 얼마나 단호하고 까다로운 사람인지 잘 알았다. 입학했을 때부터 스콧의 수업을 들었고, 경시대회 준비도 그의 지도하에 있었으니 모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변명을 하려 했단 게 우습고 어리석었다. 민호는 부끄러움에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애써 숨기며 빠르게 짐을 챙겼다.
-끝나고 나한테 잠깐 와요.
문을 열고 막 나서려던 차에 스콧이 차갑게 지시했다. 민호는 작게 그러겠습니다, 라고 답하고 교실을 나왔다.
* * *
갑자기 생긴 시간에 민호는 하릴없이 교정을 서성였다. 제가 수업을 빼먹는 일은 없었지만, 가끔 수업이 취소될 때가 있어 뜻밖에 시간이 생기는 일은 몇 번 있긴 했다. 그때마다 민호는 교실에 남거나 도서관에 가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거나 때로는 잠깐 잠을 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교실에 있을 수 없었고, 도서관도 갈 수 없었다. 아니, 어딜 가도 이전처럼 공부를 하거나 낮잠을 잘 수 없었다. 스콧의 말대로 민호는 벌써 3주 째 제대로 생활하지 못 했다. 책을 읽어도, 잠을 자려고 누워도, 심지어는 씻으려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바라볼 때마저 토마스 생각이 났다. 빛이 있으면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림자처럼 그는 민호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존재했다. 어쩌면 숨을 뱉고 삼키는, 그 하나에도.
돌이켜보면 민호가 토마스를 생각하는 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가늠할 순 없지만 토마스가 한 말과 행동, 모든 것들을 민호는 줄곧 생각하고 되새기며 기억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이 이래서 무서운 것이었다. 깨닫고 나는 순간부터 세상이 변한다. 그것에 맞게 모든 게 재정립 되는 것이었고, 민호의 경우엔 모든 것에 토마스가 녹아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게 많은 것이 급변하는데 후유증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을 보면서 민호는 겉잡을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 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걸 멈출 수도 없었고 대처할 수도 없었다. 죄다 멈춰버린 제 일상도 그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자신이 끔찍하게도 싫고 한심한데, 민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뭘 해야 좋을지 도통 알 수 없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장 큰 것은 두려움이 퐁퐁 솟고 있단 것이었다.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 일이야 그간 늘 있었다. 항상 또래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 자발적으로 많은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는 애들이야 많았지만, 민호의 경우 누구의 도움 없이 진행해야 했기에 남들보다 더 많은 어려움에 부딪쳤고 대부분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가로막히는 경험은 민호에게 익숙했다. 비록 때마다 괴롭기는 했지만 익숙함이란 것은 점차 고통을 경감시켰고 나름의 해결 루트를 가지도록 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엔 아무 효용이 없었다. 그게 민호를 더욱 괴롭게 하고 겁을 먹게 했다. 항상 통제 가능했던 영역이 통제가 되지 않을 때에 겪는 감정이란 늘 그런 식이기 마련이지만, 민호가 그걸 알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거나 넋을 놓아 자기 안에 가득 찬 그것들을 티내지 않으려 애쓰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민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무것도 없는 맨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다 아예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다리를 길게 뻗어 널부러졌다. 이러면 교복이 잔뜩 엉망이 되었다고 집에서 한 소리 들을 게 뻔했지만 당장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심지어 이제 그는 항상 단정히 세운 머리를 헝클어뜨리기까지 했다. 그러다 길게 한숨을 내쉬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 끝엔 커다란 체육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지하에는 나름 규모가 큰 링크장이 있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수업을 듣고 있을까, 아니면 저 체육관 안에 있을까. 토마스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누구나 쉽게 알법한 것들에 대해선 알지 못 했다. 물어본 적이 없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뭘 좀 많이 말을 걸고 물었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민호는 고개를 저었다. 알아봤자 뭘 하려고? 쫓아다니기라도 하게? 결코 안 될 소리였다. 설사 알았다고 해서 진짜로 쫓아다녔을 리야 없겠지만 모르는 게 낫다고 민호는 생각했다. 트리사, 그 애를 모르는 게 나았다 생각한 것처럼.
일시적인 화라 생각했던 것이 질투라는 단어로 명백히 정의된 이후로 민호는 끊임없이 그 감정과도 맞서야 했다. 갑자기 뒤바뀐 세상에 힘든 것이야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래도 가장 힘든 건 질투를 견디는 거였다. 특히 토마스의 앞에 있을 때 가장 힘들었다. 민호는 애써 이전의 그를 가장한 채 들어오지도 않는 책에 코를 박고서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물음을 억눌러야 했다. 그렇다고 거창하고 동시에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그 애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냐, 정도로만 묻고 싶을 뿐이었는데 민호는 그마저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우선은 말을 하고 나면 조금이라도 의아하게 생각할 토마스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의아함이 혹시라도 제가 토마스를 두고 갖고 있는 마음을 눈치 채게 하는 실마리가 될까봐 무서웠다. 또, 그 말을 시작으로 자신이 더 내밀한 속내가 담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자신이 없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걸 다 합쳐도 한 가지를 이길 수는 없었다. 바로 토마스가 어떤 답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토마스는 민호에게 자신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특히 무엇이 좋고, 무엇은 싫은지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 그는 숨기는 게 없었다. 그러니 트리사에 대해 조금만 물어도 그녀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술술 말할 것은 보나마나 뻔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트리사에 대해 특별한 말을 한다면 견딜 수 없을 거란 것도 마찬가지였다.
-미치겠네.
민호가 짓씹듯 말했다. 결국 또 토마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당장 수업에 쫓겨난 이유가 그거였고, 그 때문에 답답해하고 있었는데. 혹시 사고 회로 어딘가에 토마스라는 키워드가 무조건 들어가게 만드는 장치가 자신도 모르게 부착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떼어내 버리고 싶었다.
-죽겠다.
정말 죽겠어, 이러다가. 민호는 고개를 제 두 손에 파묻었다.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 * *
-교복이 엉망인데…….
오피스로 들어선 민호를 보자마자 스콧이 한 첫말이었다. 민호는 그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고, 어떠한 설명을 덧붙이지도 않았다. 그저 늘 그랬듯 무표정한 얼굴로 스콧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스콧은 연신 민호의 꼴을 아래위로 훑으면서도 말을 잇지는 않았다.
-어쨌든 여기로 부른 건 이거 때문에 그래.
겨우 민호에게서 눈을 뗀 스콧이 파일철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겉면에는 USAMO 예상 문제 및 솔루션 이라 적혀있었다.
-알고 있겠지만 올해도 4월 마지막 주 토요일이야. 이제 한 달하고 조금 남았는데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지? 이런 말을 하기엔 좀 미안하지만 학교에서 늘 기대가 많아. 내 친구 중 하나가 AMC에 있는데 걔도 그러더군. 이번에도 민호 널 MOSP에서 볼 수 있길 바란다고. 작년에 네가 심사위원들에게 많은 인상을 심어준 모양이야. 아무래도 TJ 애들 보다 성적이 좋았다보니 그런가봐. 내 친구 녀석이 지난 겨울 부터 얼마나 너에 대해 얘길 했는지… 아마 민호 넌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벌써부터 어디로 진학할 거냐고 얼마나 난린지. 어제도 나한테 연락을 해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라던 것 있지. 누가 보면 아마 걔가 담당 선생인 줄 알거야.
수업 시간 때 냉정하게 일갈했던 것이나 조금 전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던 것과 달리 스콧은 두서없이 말을 하더니 혼자 하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민호는 웃지 않았다. 그 대신 스콧이 내민 파일의 표지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특별히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수업을 제외했을 때, 스콧은 언제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민호는 그가 하는 말의 요점을 짚기 위해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있으면 스콧은 조금 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고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지금 그러하듯이.
-내가 너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지? 아무튼 기대가 많단 말이었어. 잘 하고 있을 것 같지만.
스콧은 민호의 어깨를 두 번 다독이며 말했다.
-아니요.
-응?
민호가 파일에 두었던 눈길을 들어올려 스콧에게 맞췄다. 그리고 짧게 던진 자신의 말을 풀어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번엔 기대하시면 안 될 것 같아요. 제가 준비가 하나도 안 되었거든요. 가장 낮은 순위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요.
올림피아드는 이제 일정을 확인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민호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기억의 일부분이 사라진 사람처럼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하다가 스콧이 보여준 실마리에 몇 달 전 자신이 계획해둔 관련 일정들이 물밀듯이 떠올랐다. 민호는 이제 자신에게 화가 날 정도였다. 이렇게나 한심한 인간이었을까 하는 자책도 들었다. 그런 감정이 다 뭐라고.
-이걸 주시지 않았다면 당일이 될 때까지 몰랐을 거예요.
아무리 좋아해봤자 이뤄지지도, 말하지도 못 할 텐데.
-죄송합니다, 미스터 스콧.
그럼에도 민호는 제가 가진 감정을 쉽사리 버릴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착각일 거라고 자신을 설득하려 시도했지만 더욱 강한 확신으로 되돌아 왔다. 토마스가 너무 좋아서, 민호는 그를 볼 때마다 괴롭고 두려우면서도 만나는 걸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민호는 제 앞에 앉은 스콧이 배신당한 사람처럼 믿기지 않는 눈을 하고 있는 걸 보았다.
-그럼 여태까지 수업 시간에 정신이 딴 곳에 있던 게 올림피아드 탓이 아니라고?
-네.
단호한 민호의 대답에 스콧은 이마를 짚고 앓는 소리를 냈다.
-믿을 수가 없군. 혹시 집안에 일이라도 생긴 거야?
민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혹시 그 하키 선수 그 친구 때문인가? 네가 방과 후에 공부 봐주는 그 학생 말이야. 그 일 때문이야?
이번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육성으로 답하지도 않았다. 굳이 답한다면 반쯤은 그렇고, 반쯤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민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선택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스콧은 달랐다. 그는 그것을 긍정의 답으로 듣고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짧게 욕설을 뱉었다.
-내가 그러니까 그런 건 개인적으로 알아서 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당장이라도 중단할까? 아니, 중단하자. 한 달 시간이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집중해야지. 그런 거에 얽매일 수 없어. 있어봐, 내가 그 학생 지도 선생님한테 연락을 해야지…….
바로 전화를 집어 드는 스콧을 민호는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양반된 생각을 놓고 치열하게 저울질을 하는 중이었다. 지금이라도 그런 게 아니라며 스콧을 말려야 할까 아니면, 그냥 이대로 그만둬 버릴까. 만나야 할 일이 없어진다면 지금의 혼란스러움도 가라앉고 스스로 알아서 정리해낼 수 있지 않을까. 지난 3주 동안 자신이 끊어버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 했던 일을 스콧에게 맡기면 가능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토마스를 좋아하는 걸 포기할 수 있으리란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보지 않으면 점차 멀어질 수 있지 않을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단 말도 있듯이.
민호는 번호를 찾아 헤매는 스콧에게 말했다.
-그렇게 해주세요.
-그래, 알겠어. 내가 바로 그쪽에 연락할게.
여전히 번호를 뒤지는 것에 집중하면서 스콧이 답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번쩍 들곤 여전히 자신에게 있는 파일을 민호에게 건넸다.
-이거 가지고 얼른 돌아가.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지금부터라도 하는 거야. 알겠지?
민호는 천천히 스콧이 내민 것을 받아 쥐었다. 손에 힘이 저절로 가득 실렸다. 목에도 마찬가지였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고, 고개도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민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습니다, 하고 답했다.
17
교문을 나서려던 찰나 무언가가 뒤에서 잡아끌었다. 강한 힘에 강제로 몸이 돌려져서 굳이 나서지 않아서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확인하기 이전에 민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역시나 토마스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언젠가 들은 말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교문 앞이 아니라 교실 문 앞이었고 지금 보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토마스가 잔뜩 찌푸린 낯으로 따져 묻는 것만큼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질 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민호는 예상할 수 있었다.
-어떻게 나하고 한 마디도 얘기 않고 우리 시간을 취소할 수 있어.
-미안, 그렇게 됐어.
이 또한 역시나 였다. 너무 예상되었던 패턴이라 민호는 크게 애쓰지 않고자신을 가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걸로 끝이야? 나도 이유를 알아야 하잖아.
토마스는 숫제 찡그린 낯을 풀 줄 몰랐다. 이게 이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할 일인가 싶었지만 토마스라면 충분히 그럴 법했다. 그는 알게 된 지 고작 한 달 된 친구가 줄곧 관심을 갖고 있던 여자에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정도로 다정했으니. 그런 만큼 줄곧 문제없이 이어져왔던 시간이 갑자기 사라지는 게 몹시 아쉬울 법도 했다. 무엇보다 그 시간은 토마스가 대학을 진학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기도 했으니 자신과 조금도 상의 없이 취소가 된다면 조금은 화가 날 법도 했다. 그 모든 걸 민호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선택을 거둘 생각은 없었다.
-나 다음 달에 수학 경시 대회 있어.
-그거 준비하느라 그러는 거야?
-그래, 이제 한 달 밖에 안 남았으니까. 그리고 너도 다음달 중순부터 챔피언 결정전 있잖아. 다시 강하게 훈련 돌입할 텐데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게 맞아.
-맞아? 그러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게 맞는 거야?
토마스가 대뜸 말끝을 붙잡고 물었다. 민호는 조금의 지체 없이 단답했다.
-맞아.
-아니야. 거기에 내 생각은 하나도 안 들어가 있잖아. 그건 맞는 게 아니야.
민호의 양팔을 토마스가 강하게 붙잡았다.
-제발, 민호. 내 시간을 민호 생각대로 단정짓지 마. 나 그렇게 시간 없는 거 아냐. 리그전 치룰 때도 두 번씩 했잖아.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하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아니면 한 번이라도 좋아. 난 그렇게라도 할 수 있다고.
설득이라기 보단 애원에 가까웠다. 이게 뭐라고 애원까지 하느냐며 민호는 자신의 느낌을 비웃었지만 미간을 찌푸린 채로 크게 뜬 눈을 보면, 계속 토마스의 말이 애원처럼 들렸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면,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흔들려선 안 되었다. 민호는 절 붙잡고 있는 토마스의 손을 떨어뜨렸다.
-그럴 바엔 안 하는 게 나아, 토마스.
-나는 하는 게 나아. 절대로 하는 게 낫다고. 왜 민호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는 거야? 나는 이게 낫단 말이야. 나 공부 가르치는 동안 민호도 공부할 수 있잖아. 그런데 왜 안 하는 게 낫다고 하는 거야. 내가 안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 거면 결코 아니야. 난 정말로 괜찮아. 괜찮으니까 계속 하자. 응?
하지만 떨어뜨리기 무섭게 다시 잡아오는 토마스였다. 여전히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와 눈빛에 민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다시 한 번 토마스의 손을 떼어냈다. 아까보다 훨씬 더 거칠고 무심하게.
-내가 안 괜찮아. 내가 안 괜찮다고. 넌 내가 그 자리에서 공부를 하면 집중이 잘 될 거라고 생각했어? 너 신경 쓰면서 하나하나 봐주면 집중하고 있다가도 금방 깨져서 한참 붙잡아야 해. 그러는 너야 말로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고 있으면서 왜 나한테 그래?
차분하게 말하려 했지만 하다 보니 어느새 토마스를 힐난하고 있었다. 민호는 이래선 안 된단 걸 알았다. 지난 시간 동안 쌓여왔던 감정들이 다른 방향으로 터트리는 짓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일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민호는 다시 차갑게 일갈했다.
-어차피 이건 내가 하겠다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없었을 일이야. 그런 이상 내가 못 하겠는 지금 끝내는 게 맞지. 안 그래?
토마스로부터 답은 없었다. 민호의 말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토마스는 민호를 바라보기는 했다. 그 눈으로. 민호는 끝까지 마주 바라보려 했다. 그러나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먼저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틀고 허공에 눈을 두었다. 그리고 해야 하는 한 가지를 마저 입에 담았다.
-그리고 이제 점심도 같이 먹기 힘들 거야.
-왜?
-해야 할 게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어.
-그래도 먹어야지. 몸 상하면 어떡하려고.
꼭 엄마가 할 것 같은 소리에 민호는 웃음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그와 다른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도 같았다. 그게 짜증인지, 슬픔인지, 혹은 본심인지 알 순 없었다. 무엇이든 간에 중요한 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래 입술을 꾸욱 눌러 입을 다물고 잠시 숨을 참았다.
-나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해, 토마스.
겨우 태연을 가장하고 맺음말을 지었다. 그걸 알았는지 토마스는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계속 그랬듯이 같은 눈으로 민호를 응시할 뿐이었다.
민호는 가겠단 말도 하지 않고 곧장 뒤를 돌아서 교문을 나섰다. 내일 아침에 다시 또 넘어올 문이었지만 어제와 같지 않을 거란 걸 발이 바깥의 땅을 딛자마자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 * *
한 달이란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거기에 보름까지 더. 눈 깜작할 새에 날이 더워졌고, 방학이 시작될 태세였다. 물론 아직 시간은 남아 계속 학교에 나오고 있었지만 이것도 며칠이면 끝날 일이었다. 그 말은 점심을 건너뛰는 일도 며칠만 있으면 끝이란 의미였다.
이틀 전, 올림피아드 결과가 나왔다. 민호의 순위는 14위. 30명이 출전하였으니 중간 이상은 되었지만 MOSP에 참가할 수는 없었다. 미스터 스콧은 크게 실망했지만 정작 민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14위나 했다는 게 놀라웠다. 한 달 내 준비하면서 내내 생각한 결과는 30위, 혹은 29위인 탓이었다. 시험이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보낸 시간에 불안해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보단 계속 생각의 끝에 매달려 있던 토마스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경험해보니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질 거란 말은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토마스는 그를 볼 수 없는 만큼 계속 해서 생각 속에 튀어나왔지만 혼란스럽던 마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트리사와 함께 있던 토마스를 떠올려도 이제는 화가 나지 않는단 게 그 증거였다. 그래도 토마스가 떠오르는 게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생활 속 어느 곳에나 나타나는 그의 존재는 부담스러웠다. 가령 막 빨래를 널은 뒤 집안 온통 가득한 섬유유연제 향기에 토마스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것 같은 것들. 민호 냄새 좋아. 그 냄새가 어떤 냄새냐고 이제 묻지 못 할 거란 게 목 아래를 쓰리게 했다.
어쨌든 이제 일상을 통제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벗어났단 점에서 민호는 제 선택이 현명했다고 결론지었다. 비록 올림피아드 성적은 주변의 기대와 예년의 것에 한참 못 미쳤지만, 그래도 자신의 예상보다는 높게 나왔지 않은가. 그리고 기말고사 만큼은 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 보다 훨씬 어려운 난이도였음에도 점수가 더 높았다. 아무래도 점심시간마저 공부에 투자한 덕인 것 같았다.
민호는 로비 게시판에 붙은 성적 우수자 수상자 리스트를 눈으로 읽었다. 박 민호. 제 이름이 게시판에 붙은 적이야 몇 번이나 있겠지만 직접 보는 것은 거의 처음이라 어쩐지 낯설었다. 분명 자신의 이름이지만, 자신의 것 같지가 않은 기분이었다. 그에 반해 그 옆에 붙은 커다란 자보에 쓰인 이름은 너무도 익숙해서 금방이라도 이름의 주인이 눈앞에 나타날 것 같았다.
토마스 에디슨. MVP 선정.
너나 잘해, 라고 했던 것은 나름대로 마지막으로 보인 제 마음이었다. 그 어투가 심히 불량스러워 토마스는 비아냥대는 걸로 들었을 것 같지만, 말의 사전적 의미에 진심을 둔 것은 맞았다. 그리고 그 바람대로 그는 정말로 잘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학교의 하키팀이 우승했고, 우승의 주역은 토마스였다. 단 하나의 경기도 직접 보러 갈 수는 없었지만 결승전 경기가 어땠는지는 자보에 실린 내용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리그전 마지막 경기의 소식이 붙었던 그때처럼 자보에는 토마스의 사진도 인쇄되어 있었다. 자신의 기억 속이 아닌 토마스는 실로 오랜만이라서 민호는 손으로 짚어가며 사진 하나하나 눈에 새길 듯이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토마스의 단독 사진과 경기 진행 중인 사진, 그리고 팀원들의 단체 사진, 마지막으로 팀원들 모두와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이 모두 모여 찍힌 사진. 사람이 많을수록 토마스는 작게 담겨있었지만 민호는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의 옆에 있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단 의미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토마스와 트리사. 단 한 번 보았지만 기억 속에선 여러 번 보았던 얼굴이었기에 가능했던 걸 수도 있었다.
민호는 사진에 대고 있던 손가락을 떼었다. 검지였다. 그가 뻗고 있던 손가락은. 그리고 그 손가락은 오래 전 우연히 토마스의 입술과 혀끝에 닿았던 것이기도 했다. 지난 한 달 동안 한 번도 떠오른 적이 없는 기억인데, 왜 갑자기 떠오르는 것인지 민호는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흉곽 아래에서부터 차오르는 것이 울음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금세 눈이 뜨거워져 민호는 제 두 손에 고개를 묻었다.
마음은 사실 한 번도 가라앉은 적이 없었다. 그저 그래야 했기에 알아서 가장했을 뿐이었다. 그 날, 이제 그만할 거라고 토마스에게 말하던 그 날, 자신이 그에게 가장했던 것처럼. 그러니 현명했다고 판단한 선택은 사실은 전혀 현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민호는 이제야 자각할 수 있었다. 어차피 계속 이럴 것이라면, 차라리 절대 아니라고 부인해서 토마스와의 시간을 계속 가졌을 것을. 그랬다면 친구로라도 저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 텐데. 눈이 계속 뜨겁고 목 아래가 아팠다.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 없다고 머리로 생각했지만 그 뜨거움과 고통에 민호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민호?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기억에서 기인한 것일까, 하고 의심하자
-민호, 민호.
하고 빠른 발걸음과 함께 들렸다.
-민호,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커다란 손이 손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목소리는 이제 바로 코앞에서 들리고 있었다.
-민호…, 혹시 우는 거야?
그가 그렇게 묻는 순간 민호는 숨을 들이켰다. 영락없이 우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맙소사, 민호. 무슨 일이야.
잡힌 손목이 풀리면서 허리가 팔에 감싸지고 따뜻한 체온이 몸에 닿았다. 뒷머리에는 손목을 붙잡고 있던 그 손이 올려졌다. 등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때렸어? 아니, 여긴 초등학교가 아니지. 그럼, 음, 뭐 벌레에 물리기라도 한 거야? 아니, 아니야. 다 상관없어. 말하지 않아도 돼.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울어, 민호.
그 말에 민호는 손에 묻었던 고개를 그의 어깨에 묻었다. 머리와 등을 감싼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얼마든지 마음 놓으란 듯이. 그래서 민호는 계속 눈을 비집고 나오는 울음을 참지도 삼키지도 않았다.
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 될 줄 알았던 점심 거르기는 조기 종료되었다. 다시 토마스와 함께 점심을 했고 그 중 대부분을 나가서 해결했다. 그리고 방과 후의 만남과 주말 집 근처 카페에서의 만남도 모두 다시 시작되었다. 한 달 하고 보름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민호는 여전히 토마스를 좋아했고, 그를 떠오르면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없이 바닥을 구르기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트리사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아마도 평생 묻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면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그 때까지라도 민호는 토마스에게 그저 친구로 옆에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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