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K

[텽들] 좋아한다고 上

짝사랑공 배우 X 밴드맨 For 익명님

※ 캐해는 잘 모르겠고 보고 싶은 걸 씁니다. ※

※※ 본문은 펜슬 내에서만 감상해주세요 🫶 ※※

  헌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는 남자는 웹툰 원작 웹드라마 일명 '연삭', 풀네임 '연락처를 삭제하시겠습니까?'로 데뷔해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꽤 주목을 끈 태영이었다. 인기가 실감이 안 나는 건지 신경을 안 쓰는 건지 모자도 마스크도 없었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꾸민 옷차림은 그렇잖아도 눈에 띄는 태영을 더 빛나게 했다. 태영을 알아본 이들의 시선도, 모르는 이들의 시선도 한 번에 끌었다. 내내 촬영한다고 바쁘게 지내던 태영이 간만의 휴일에 향한 곳은 민희가 속한 레디올낫 밴드의 연습실이었다. 간식이 든 쇼핑백이 묵직했다. 다 민희 형 지인들인데 잘 보여야지.

  태영과 민희는 고등학교 밴드부에서 드럼-베이스로 만나 각자의 길을 가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태영의 비밀을 하나 말해보자면, 고등학생 시절부터 민희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왜였냐고 묻는다면 당사자도 확실하게는 몰랐다. 잠깐의 슬럼프가 왔을 때 민희가 말없이 머리 툭툭 쓰다듬던 그 손길 때문이었나. 투박하기 짝이 없는 손짓에 담긴 의미가 꼭 난 네 편이라는 것만 같아서. 아마 그래서 민희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짧았던 토닥임이 지나자마자 뚝 떨어지는 눈물에 당황해 왜 우냐며 어쩔 줄 모르고 등만 쓸어내리던 그 모습도. 바보 같지만 별 거 아닌 다정함이 간절했던 때라서. 원래 힘들 때 옆에 있어주는 사람에게 사랑에 빠질 확률이 높다고 어디서 들은 것도 같았다.

  이제 2년 반쯤 진행된 짝사랑에 태영은 조금쯤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민희가 구내염 때문에 입안에 구멍이 났다고 징징거리면 눈도 깜짝 안 하고 잔소리 할 수 있는 정도. 아, 다시 생각하니까 또 짜증나네. 아니 그니까, 알보칠을 바르라고. 아니면 매니저형 죽염 있던데 그거로 가글 하면 빨리 낫는다고. 그러니까 그걸로 했다간 기억을 잃을 정도로 아플 것 같아서 싫다던 민희를 떠올린 태영은 이마를 짚었다. 애가 따로 없어. 강 애 (22, 레디올낫 밴드). 하나도 안 아프다고 세 번도 더 말했는데 말을 드럽게 안 처먹어. 

  꼭 미운 일곱 살처럼 구는 민희에 이럴 때면 내가 이런 형을 왜...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 태영이었다. 그 때 귀신에 홀린 건가. 아니면 그렇게 다정하게 군 민희 형이 귀신에 홀렸던 걸 수도. 그럼에도 결국은 좋다는 결론이지만. 찰나에 씌워진 깍지가 2년이 지나도록 안 벗겨지는 건 태영이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그저 계속 좋아하는 수밖에.

  웹드라마가 예상보다 훨씬 잘 돼서 다음 작품도 바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번엔 무려 케이블 드라마 조연이었다. 드물지 않은 기회. 이번 아니면 꽤 오래 볼 시간이 없을 지도 몰랐다. 똑똑. 노크를 하고 연습실 문을 여니 두 쌍의 눈들과 마주쳤다. 민희와 처음 보는 여성분. 그들의 가까운 거리와 세 사람 사이에 감도는 어색한 공기. 태영은 빠른 눈치로 상황 판단을 마쳤고, 그대로 뒤를 돌아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괜히 배우로 진로를 정한 게 아니었다. 순식간에 놀라서 튀어나온 눈 집어넣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으며 말했다. 민희 형 오랜만.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성큼성큼 들어와 들고 있던 쇼핑백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뒤늦게 왔냐는 당황 섞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의 높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머, 혹시 김태영 아니에요? 연삭 나오신!" 

  "아, 맞습니다."

  "웬일이야. 민희랑 아는 사이세요?" 

  "네. 예전에 같이 밴드 했어서..."

  태영의 멋쩍은 말에 지나가 민희를 휙 돌아봤다. 먼산을 보고 있던 민희가 그 눈빛이 느껴지는 듯 흠칫 몸을 떨었다. 괜히 소파에 널려있던 리락쿠마 담요를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척을 하는 민희의 옆구리가 네일아트로 화려한 손톱에 쿡 찔렸다. 누르면 알러뷰가 흘러나오는 곰돌이마냥 찔리자마자 튀어나온 외마디 비명을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야 강민희 넌 내가 요즘 빠져있는 거 알면서 왜 말 안 해줬어. 혹시 사인 좀.." 

  "아, 물론이죠. 마침 종이랑 있네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지나요. 유지나."

  태영은 책상에 대충 굴러다니던 종이와 펜을 끌어왔다. 종이에는 굵은 글씨로 <입밴 신청서>가 써 있었다. 아마 입부 신청서처럼 신입 밴드원 들어오면 적는 인적사항일 텐데 입밴이란 말이 있나? 입뺀도 아니고 뭔. 익숙하게 무시하고 뒷면의 백지에 'To. 지나'까지 썼다가 펜을 멈췄다.

  "지나 누나라고 써드리면 될까요?"

  "저 누나 같아요?"

  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 태영이 아이돌 팬싸 뛰는 친누나한테 후기로 들은 적이 있는 상황이었다. 이걸 실제로 겪을 줄이야. 저 말은 곧 나이 많아 보이냐는 속뜻이 숨어있어서 잘못 말하면 진짜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수 있었다. 이럴 땐 어떻게 대답해야 한다고 했더라.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빨리 대답 안 하면 더 큰일날 상황, 태영은 뛰어난 순발력과 빠른 두뇌회전으로 나쁘지 않은 답을 생각해냈다.

  "민희 형한테 반말 하시길래. 어려 보여서 긴가민가 했는데 역시 동생인가?"

  "아뇨 누나 맞아요..."

  지나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태영은 그게 자신 때문인지, 아님 이전의 상황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당장 위기를 잘 넘긴 것이 다행일 뿐이었다. 이어서 쉴 틈 없이 민희의 여자친구로 짐작되는 지나에게 (태영의 얼굴이 더 크게 나오는)투샷을 제공하느라 여유가 없는 게 조금은 다행이었다. '민희의 여자친구'라는 존재에 대해 깊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포토그래퍼 강이 찍은 사진을 불만족스럽게 보던 지나는 시계를 보더니 아 나 약속! 하며 민희와 태영에게 손을 흔들고 가버렸다. 잠깐 남자친구에서 사진사로 전락했던 민희가 훠이훠이 손을 내둘렀다. 빨리 가라고. 태영은 정신없는 게릴라 팬사인회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숨을 돌렸다. 민희 형 보러 온다고 꾸안꾸로 와서 다행이었다. 대충 왔으면 후줄근한 채로 사진 찍을 뻔. 

  지나가 지나간 연습실. 둘만 남은 공간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조용히 있던 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제일 중요한 것부터.

  "여자친구?"

  "그치 뭐... 너 아까 대처 잘 하더라. 내가 배워야겠던데?"

  "확실히 형은 좀 배워야 될 듯... 안 봐도 눈치 없는 발언만 할 거 같아."

  "뭬야?"

  "암튼 내 팬이신 것 같은데 왜 말 안 해줬어?"

  "말해서 뭐해. 귀찮아지기만 하겄지."

  그새 소파에 드러누운 민희가 축 늘어졌다. 역시 '누울 수 있으면 누워라'라는 명언을 탄생시킨 강 선생 다웠다. 태영이 민희의 말에 동의한단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머뭇거리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민희를 슬쩍 보고 말했다.

  "...나 형이 여자친구 사귀는 거 처음 봐."

  "남중-남고였잖냐."

  "어디가 좋아서 사귄 거야?"

  "그냥 이뻐서." 

  "뭐야.. 그건 나돈데." 

  "너는 이쁜 게 아니라 잘생긴 거지." 

  "아니 근데 나 눈 이쁘다는 말 많이 들었어." 

  뻔뻔하게 내놓은 말에 질색하는 반응 대신 기분 좋은 반박이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한 태영이 괜히 박박 우겼다. 어떻게든 이쁘다는 말을 듣고 싶어 안달난 것처럼 답정너를 바라는 태영의 말투에 민희가 헛웃음을 지었다. 얘가 왜 이래?

  "어어 그래 너 이뻐. 이쁘다는 소리 듣고 싶었구만?"

  "근데 아까 그 누나 우리 누나 닮은 거 같애."

  "니네 누나? 어떻게 생기셨는데?"

  "음... 약간 내 여자 버전?" 

  "그래? 근데 너 그거 뭐 사온 거여?" 

  "아, 이거 그냥 간식이랑 음료. 멤버들이랑 먹으라고 사왔는데 강민희밖에 없네." 

  막상 이쁘다고 해주니 태영은 부끄러운지 말을 돌렸다. 기꺼이 넘어가 준 민희는 이내 태영이 들고 온 쇼핑백으로 관심을 돌렸다. 사실은 아까부터 궁금하던 참이었다. 쇼핑백을 열어보니 샌드위치와 음료가 있었다. 시커먼 아메리카노들 사이 유독 튀는 분홍빛. 민희는 주저없이 그걸 집어들었다. 당연하다는 듯 '딸기 딜라이트 요거트 블렌디드'에 꽂힌 빨대가 민희의 입에 물렸다. 옆에 앉은 태영이 야채라곤 조금도 없는 햄치즈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민희, 내 웹드라마 안 봤지."

  "봤지." 

  "안 봤을 줄 알았어." 

  "아 봤다니까? 그 뭐야 네가 여주랑 놀이터에서 얘기하고 그랬잖냐."

  "결말 알아?" 

  "어......"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처럼 태영이 아닌 사이드만 힐긋거리는 두 눈. 누가 봐도 모르는 눈치였다. 끝난지가 언젠데... 살짝 서운해지려던 태영은 생각을 바꿨다. 짝사랑하는 사람이 제 로맨스 연기를 보는 게 별로 좋을 것 같진 않았다. 조금은 보고 질투 해주면 좋겠다 싶다가도 상대는 강민희였다. 강민희가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질투를 할 이유가 없는데 뭐... 봐서 뭐 해. 놀림밖에 더 당하겠어.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았다.

  "에휴... 뭘 바래. 됐어. 이거나 먹어." 

  "아이 꼭 볼게! 이 핫가이는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어!"

  "그러시던가. 나 이번에 바로 후속작 들어간다."

  "그럼 또 한동안 못 보겠구만."

  "그치. 형도 공연 있지 않아?"

  태영이 별 생각 없이 가볍게 던진 질문에 답이 한참 늦었다. 의아한 눈으로 민희를 보니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듯 양 관자놀이에 검지손가락을 댄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설마..? 먹던 샌드위치도 내려놓은 태영의 표정이 어이없음으로 바뀌었다.

  "있는데 언제더라. 다다음주였나..?"

  "다음주 아니야? 형이 그저께 일주일도 안 남았다고 한 거 같은데."

  "아 그러네." 

  "정신 좀 차려. 어떻게 공연 일정을 까먹어?" 

  말 해봤자 귓등으로도 안 들을 거 알지만 태영은 누구라도 민희에게 잔소리를 참기란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그냥 강쪽이가 다름없어 강쪽이. 하여간에 키는 태영보다도 큰 주제에 매번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굴어서 시선을 온통 빼앗았다. 분명 태영이 민희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애 같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는데. 이런 형이라는 걸 모르지도 않았는데 정말 어쩌다 내가 이 형을... 오늘도 다시 한 번 고찰해보는 태영이었다. 누구든 귀신에 홀렸던 거라는 설이 다시 한 번 부상했다.

  "네가 게스트로 드럼 치고 가면 우리 밴드도 뜰 텐데." 

  "말이라고 해, 형? 그리고 나 그 정돈 아냐."

  "장난이지. 이제 너 바빠질 텐데 오랜만에 합주 콜? 실력 안 죽었나 보자."

  "무슨 청춘영화도 아니고 갑자기... 근데 콜."

  거의 반년만에 드럼 칠 생각에 신이 난 태영이 손을 풀며 드럼으로 향하려다 노선을 틀었다. 먼저 합주 하자고 해놓고 꼼짝도 않는 민희를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등을 떠밀어 베이스 앞까지 민희를 안전 이송한 태영이 자리에 앉아 드럼 스틱을 쥐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립감이 새삼스러웠다. 의자 높이가 안 맞나 싶었지만 결국 처음이 제일 나을 걸 알아서 그냥 앉았다. 민희가 손을 푸는 소리가 들렸다. 낮게 울리는 베이스의 떨림이 태영에게까지 느껴졌다.

  스타트는 언제나 태영의 드럼으로. 착 착 착 착. 하이햇 치는 소리가 울리고 눈빛이 오고 갔다. 함께 연주해 온 지난 날들처럼 여전히 타이밍이 완벽했다. 민희가 사랑하는 순간이었다.

***

  케이블 드라마가 말 그대로 대박이 터졌다. 태영은 한순간에 급부상한 라이징 스타가 됐다. 조연이라 비중이 크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주인공들과 같은 반의 서브 커플 중 남학생 역할. 한마디로 남주 친구. 뜨기 쉽지 않은 위치에서 흔치 않은 얼굴과 실력으로 온라인을 달궜다. 태영은 막연하게 아마 야구부라는 캐릭터 설정이 플러스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설레는 요즘 고딩 고백 방법. 유튜브에 김태영을 치면 쇼츠 제목이 죄다 그런 식이었다.

  민희는 길을 걷다가도 불쑥 들리는 익숙한 이름에 작게 감탄했다. 저 김태영이 내가 아는 그 김태영이지? 어디 길거리뿐이겠나. 낯간지러워서 검색해본 적도 없는데 유튜브에 들어가면 어쩐 일인지 '[#고백부터GO] 2화 하이라이트 | 서온주-김태영 영화같은 첫만남' 같은 영상들이 떴다. 몇 달 전만해도 민희와 연습실에서 떠들던 태영의 이름이 각종 매체와 여러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리니 신기했다. 이래서 사람 일 아무도 모른다고. 김태영이 이렇게 뜰 줄이야. 

  하긴, 잘나긴 했지. 누구 아는 동생인데 암 그렇고 말고. 연락을 해볼까 싶다가도 촬영 때문에 바빠서 잠도 잘 못 잤다던 마지막 문자가 3주 전이라, 바쁘겠지 싶어서 그만 뒀다. 태영 씨랑 언제 안 보냐는 지나의 은근한 보챔은 안읽씹했다. 피곤할 텐데 만나더라도 눈치없이 다른 사람 달고 만나기 싫었다. 

  시간 나면 먼저 하겠지. 그런 생각으로 지정석과 다름없는 연습실 소파에 널브러진 민희가 막 울린 핸드폰 알림을 확인했다. 레디올낫 밴드의 작곡을 도맏은 형이 단체방에 올린 신곡이었다. 제목이 Vibration? 막 파일을 누르려는데 새로운 알림이 떴다.

영래이

혐은무슨 내갗먼저안ㅅ나며ㄴ 엱락이업ㄴ어??.?서운햐

  무슨 일인지 오타 가득한 태영의 문자였다. 술 마신 건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름 해석해 보건데 연락이 없다고 서운해하는 것 같았다. 참나.. 나는 네 생각해서 안 한 건데 오해를 해버리고 내가 더 서운하다 야. 민희는 몸을 일으켜 앉고는 곧바로 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락이 없어서 서운하다면 연락을 해주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신호음은 꽤 길게 이어졌다. 민희는 방금 문자 보냈으면서 왜 이렇게 안 받는 거냐며 궁시렁거렸다. 그 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전화가 연결됐다. 태영의 목소리 대신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현장음이 들려왔다. 민희는 태영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른 후에야 겨우 말꼬리가 긴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너 어디야?]

  [으음... 어디야아..?]

  [응 어디냐고 태영아.]

  [...어디냐고오.]

  [아니 나 따라하지 말고... 옆에 아무나 바꿔 봐. 매니저형 안 계시냐?]

  [...매니저 형~~~!!!]

  대화도 안 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취한 것 같은데 어떻게 그 소리는 캐치했는지, 태영이 크게 외치는 소리에 귀청이 떨어질 뻔한 민희가 잠깐 핸드폰을 귀에서 멀찍이 뗐다가 다시 붙였다. 드라마 종방연이라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잔뜩 마셨다는 매니저님의 설명에 민희는 대뜸 말했다. 제가 데리고 가도 될까요? 주소 좀 보내주세요. 주소를 받은 민희가 곧장 향한 곳은 한 돼지고기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려다 가드에게 막힌 민희는 당황하다가 상황을 설명했다.

  "어 안녕하세요? 저 태영이 친군데요, 그니까 배우 김태영이요. 태영이한테 데리러 와 달라고 전화가 와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아니, 진짠데 이거 참... 태영이 매니저 형한테 강민희라 하면 알 겁니다. 한 번 물어보시죠."  

  간절해 보이는 민희의 눈빛에 어딘가로 무전을 건 가드가 사실을 확인 했는지 길을 비켰다. 민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조금 쫄아서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쭈뼛쭈뼛 들어간 돼지고기집엔 많은 사람들의 소음으로 시끌벅적했다. 멀리 가지 않아 발견한 매니저 형이 민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채비를 해두었는지 태영의 짐-지갑과 핸드폰, 에어팟-을 들고 손짓했다. 민희는 그 짐을 태영의 주머니에 우겨넣은 후 눈을 거의 감고 있는 태영을 부축했다. 태영이 민희를 알아봤는지 민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앞문으로 나가기엔 태영이 너무 취해서 흑역사가 생성될 듯 했다. 민희는 자신의 뛰어난 배려심을 셀프 칭찬하며 뒷문으로 나갔다. 아, 택시 미리 예약해 둘 걸. 뒤늦게서야 택시를 부르고 기다리는데 잠든 줄 알았던 태영이 민희를 불렀다.

 

  "혀엉... 강미니..."

  "왜."

  "우리 집에서 베이스 치고 갈래..?"

  "뭔 소리여 이 밤에."

  "드럼도 있는데..."

  "난 드럼 못 쳐."

  시무룩해진 꽐라를 달래줄 틈도 없이 택시가 도착했다. 자꾸만 민희에게 늘어지는 몸뚱이를 구겨넣고 태영의 집 주소를 불렀다. 다행히 택시를 타고 오는 내내 얌전히 있어준 태영은 기특하게도 비밀번호까지 순순히 불었다. 무사히 태영을 침대에 던져놓은 민희는 선선한 가을 날씨에도 땀범벅이 된 상의를 펄럭거렸다. 어느새 시계의 짧은 바늘이 11과 12의 사이였다. 시간을 확인한 순간 민희는 결심했다.

  "야, 나 자고 간다."

  태영이 듣고 있든 말든 한마디 남긴 민희는 겉옷을 벗으며 욕실로 직행했다. 그 말에 왜 던지냐고 찡얼거리던 태영의 얼굴이 서서히 빨개졌다. 몸은 여전히 축 늘어지는데 각성한 것처럼 심장이 마구 뛰었다. 민희가 들어간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자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 

  태영이 어쩔 줄 모르는 사이, 여벌옷을 안 들고 가는 바람에 아래에 수건만 두른 민희가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수증기와 함께 등장했다. 청각적 자극에 이어 과다한 시각적 자극에 본능적으로 코를 틀어막은 태영이 맹한 목소리로 횡설수설 말했다. 

  "형 난 아직 준비가... 나 그것도 안 사놨는데..."

  "뭔 소리여."

  취한 사람의 헛소리라 생각하고 가볍게 태영의 말을 무시한 민희가 태영의 옷장을 마음대로 열었다. 뜯지 않은 속옷을 발견한 민희가 나이스를 외쳤다. 편해 보이는 옷을 주워입고 다가오는 민희에 태영은 눈을 꼭 감았다. 분명 옷을 입었는데 제 눈엔 방금 전의 살색이 지워지지 않았다. 

  태영의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태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취기가 덜 가셔 나른하게 뜨인 눈이 민희의 눈과 마주쳤다. 가까워진 얼굴에 놀랄 새도 없이 이마에 가해지는 충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은 술기운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왜 멜로 눈깔을 나한테 떠? 씻고 자라."

  태영의 이마에 딱밤을 날린 민희가 아파하는 태영을 일으켜 욕실에 집어넣었다. 다급하게 갈아입을 옷을 안 챙겼다고 외친 태영이 튀어나와 옷을 챙겨갔다. 정신 좀 차리고 나오라는 말과 함께 욕실 문을 닫아준 민희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었다. 물론 아래에 두르고 있던 흰색 수건이 아닌 머리에 얹고 나온 분홍색 수건이었다. 머리가 뒷목을 다 덮는 길이인 게 이럴 때 불편했다. 수건으로만 말리려니 한참 걸렸다. 

  물이 안 떨어질 정도로만 대충 말린 민희가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민희는 곧 척추 수술 비용 1700만원이 필요해질 자세로 헤드에 반쯤 기댔다. 자기 전 유튜브 못 참지. 막 핸드폰을 집어들자 욕실 문이 열렸다. 민희와 다르게 옷을 다 입고, 민희와 마찬가지로 머리에 수건을 얹은 태영이 머리를 털다 그대로 굳었다. 욕실 앞에 가만히 서 있는 태영의 이상행동에 나오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던 민희가 화면에 고정되어 있던 고개를 들었다.

  "뭐해? 빨리 와."

  "나 소파에서 잘래."

  "네 집에 소파가 어딨냐. 아직도 술이 덜 깼냐?"

  "아니 나 더워서..."

  "아 빨랑 누워!"

  자신의 옆을 탕탕 두들기며 소릴 높히는 민희에 수건으로 머리를 마구 헤집은 태영이 알겠으니 머리 좀 말리겠다고 진정시켰다. 세월아 네월아 답지 않게 꼼꼼히 머리를 말린 태영이 누가 봐도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침대에 누운 태영이 민희와 최대한 몸을 떨어뜨렸다. 옆에서 민희가 뒤척이는 소리와 온기가 느껴졌다. 질끈 눈을 감은 태영이 민희를 등졌다. 포근한 이불이 태영을 감쌌다. 분명 밤이 길겠다 싶었는데 눈을 감기 무섭게 잠에 빠져들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