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하늘, 다른 당신에게

명일방주 아이린 드림

뭔가 by 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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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퍼레이터 아이린은 다소 이른 새벽에 일어나 숨을 내몰아 쉬며 일어났다. 막 동이 트고 있었다. 간접적으로 느낀 것들이 불투명하고 생생하게, 세계를 흔들며 기억에 침입해 왔다. …이래서는 안 된다. 쓸데도 없는 잡념에 흔들려서야. 아이린은 현실과 꿈 정도는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똑 부러진 사람이었다. 붕괴한 이베리아와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는 시테러들, 그런 건 꿈속의 장면이면 충분했다. 쓰러져가는 병사들, 울부짖는 바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등불을 앞으로 하여 어둠을 헤쳐 나가는 재판관. 그들은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가, 그들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는가. 그런 건 꿈이 아닌 지금이라도 당연하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쌀쌀했다. 분명, 창틀은 닫혀있었는데. 차라리 이른 아침을 준비하는 게 훨씬 나아보였다. 그래, 이것 또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크고 작은 시련 중 하나일 뿐이다. 경각심을 가지는 데 이만한 게 더 없겠지……. 방 밖으로 막 나서기 위해 문을 열은 참이었다. 눈앞에 커다랗고 시커먼 인영이 멀겋게 서 있었다.

“워.”

“와악!”

뒤로 펄쩍 걸음을 물린 아이린을 보고 박사가 이걸 기다렸다는 듯 큭큭 웃었다.

“박사님, 진짜 장난이 심하시네요!”

“재미있을 것 같아서 기다린 보람이 있네.”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취미는 자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5분밖에 안 기다렸어.” 거짓말이다. 전력 점검을 좀 하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달려왔을 뿐이다. 실제로는 3분 기다렸다.

“아아,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아이린은, 이다음에 박사를 마주하면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도, 방금 꿨던 이상한 꿈의 내용조차 커다란 충격 덕분에 홀랑 잊어버리고 오히려 박사에게 화를 내기까지 했다. 이런 시간에 좀 더 유의미한 일을 하라거나, 혹은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게 더 나을 것이라거나. 물론 박사는 이 중에서 진심으로 마음에 깊게 담아둔 말이 하나도 없었다.

“난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잠깐 기다렸을 뿐인데 자꾸 성만 내고, 너무하지 않아?”

이 말을 듣고 나서야 다급하게 다시 숨을 되삼킬 수 있었다.

‘그래, 박사님은 그저 날 생각해서 잠깐 기다렸을 뿐인데…….“

“싫으면 간다?”

“그,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저도 말이 심했다면 사과할게요.”

아이린은 자신의 옷자락을 꼭 힘주어 잡는다. 지금, 자신의 앞에서 박사가 떠나는 건 싫었다.

“저기, 박사님……. 지금 이베리아와 시테러의 관계는, 안정적으로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왜 그래.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표정이 크게 변한 아이린을 보며, 박사가 아이린의 옆으로 훌쩍 다가와 귀에 속삭였다.

“내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재능이 좀 있거든.”

쓸데없는 허세다. 이런 시간에 일찍 일어나 생뚱맞은 질문을 하는 사람의 반절 이상은 대부분 나쁜 꿈을 꾸고 이른 기상을 맞이한 자다. 아이린은 자신 옆에 달라붙은 박사를 떼어내기 위해 애써 휘적였다. 완력으로 떼어낼 수야 있겠지만 끈질기게 달라붙어 와서 이내 포기한다.

“사람도 좀 많이 죽었나 봐?”

“아, 네……. 참혹한 광경을 마주했어요. 비록 꿈이지만, 쉽게 잊히지 않을 정도로.”

“호오.”

박사가 아이린의 눈을 깊게 쳐다본다. 이 작은 리베리인의 모든 걸 파훼하고 있다는 듯이, 모든 현재와 미래를 알고 있다는 듯이. 정작 아이린은 박사가 생각하는 걸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거 알아? 꿈은 다른 세계의 자신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현상이라는 거. 단지 허상이나 마주할 일 없는 사건이 아닌…… 정말로 이 많은 세계 속 어딘가에 있는 또 다른 너는 그걸 겪는 중일지도 몰라.”

박사의 텅 빈 목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혹시, 더 이상 들지 못하게 된 등불마저도 전부 어딘가에선 현실일 수도 있단 말인가? 박사가 아무런 의미 없이 지어내는 말일 수도 있다는 건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걸 지적하기 위해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나오는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럼, 박사님도 꿈을 꾸시나요.”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지. 박사님도 결국 평범한 사람인데, 꿈을 꾸지 않을 리가 없는데.

“난 항상 네가 꾸는 것과 같은 꿈을 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박사님. 그럼, 박사님은 이 세계, 어딘가에서…….

“꿈만큼 현실 속에서 비현실을 느끼기 쉬운 게 없거든.”

왜 저에게 유언 같지도 않은 가벼운 말만 남기고 죽으러 가신 건가요?

아이린이 죽일 듯이 박사를 쏘아본다. 그가 말한, 또 다른 세계에서는 생명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픽픽 스러져만 갔다. 박사의 시신도, 유실물도, 어떠한 흔적도 찾아낼 수 없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점점 흐트러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이 사람의 얼굴조차 잊어버리고, 바다를 베어내기 위해 레이피어를 끝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한 공허가, 지금 자신에게 너무나도 크게 다가와 버려서 뒤틀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차마 ‘제발 저에게, 당신을 지킬 기회를 주세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이봐.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마. 지금 이곳을 살아가고 있는 건 너야. 내 앞에 있는 너라고. 걱정하고 있는 건 지금 여기엔 없어.”

“하지만, 박사님은 여기에 있잖아요.”

“하?”

요즘 연하 당돌하네. 박사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어…… 재미있을 것 같으니 내버려두기로 했다.

“무슨 꿈인진 몰라도 네가 날 그렇게까지 생각해 줘서 기뻐.”

이건 진심이다. 박사를 좀 지켜본지 시간이 좀 되어서 잘 알 수 있었다. 그 감정을 갖고 제대로 된 호응은커녕 쓸데없는 장난을 치는 데 쓸 거라는 게 문제다. 그제야 아이린은 자신이 이 사람과 대화하며 지나치게 효율적이지 못하게 시간을 썼다는 걸 깨달았다. 무의미하진 않더라도, 버린 시간이 더 많다니. 이 사람과 대화하면 항상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 마무리된다.

일방적으로 박사에게 짧은 작별 인사를 건네고 갑판 위로 향했다. 해가 뜨고 있었다. 난간에 몸을 기대어 점점 밝아져 오는 하늘을 본다. 모든 게 그저 운이 좋은 것이었다면…… 지금의 자신에겐 그들에 의해 변형된 신체가 없고, 구름 끼고 어두운 눈과 하늘도 없었다. 새롭게 생긴 작은 맹세만 버젓이 그곳에 남아있었다.

바람이 쐐액 불었다. 어느 곳에서 몸 전체를 가린 겉옷을 두른 전 재판관이 똑같이 하늘에 뜬 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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