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러시아 멘베 그 사이 이야기

아델이 마차를 타고 떠나자 루이 엑토르가 스르르 차가운 눈밭에 눕는다. 누가 보면 진짜 허벅지 같이 중요한 데라도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일어나요. 그 정도로 안 아프잖아.”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피식 웃으며 루이 엑토르 곁에 앉는다. 손가락에 벌레만 물려도 반차내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사람이었으니 예상 못할 일은 아니었다.

“감기가 그것보다 힘들겠다.”

“총 맞아 본 적 있어? 없으면 말하지 마.”

그건 또 맞는 말이어서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입을 닫고 그를 가만 내려다본다.

“환자를 이렇게 바닥에 가만히 눕혀 놓을 거야?”

“당신이 누운 거잖아요.”

“멀쩡한 다리가 있으면 베개라도 제공해줘봐.”

“허?”

뻔뻔스러워라. 당신 용서했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소원이라 생각하고…”

“바보같은 소리 말아요. 그 정도 상처 가지고 죽네 마네… 죽기는 뭘 죽어.”

그래도 거절할 마음도 없었다. 루이 엑토르가 손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을 네 발로 기어 제 허벅지에 머리를 올려놓을 때도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별 말을 하지 않는다.

“결투는 어떻게 된 거예요? 상대는 꽤나 중상인 모양이던데.”

“내가 이겼어.”

“그래, 어딜 쐈길래 바로 실려갔나 궁금하네요. 자세히 좀 이야기해줘요.”

루이 엑토르는 차갑게 식은 피스톨을 펠릭스 아브라모비치의 손에 건넨다. 장식용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호화스러운 금속을 손에 들어 본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제게는 필요없는 무기라 생각하며 총을 반대편 눈밭에 내려놓는다.

“유리 알렉산드로비치가 먼저 쐈어. 어깨를 맞았지만 쏘려고 한 건 어깨가 아닌 느낌이더라고. 죽일 생각으로 쏜 게 분명했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분명했어. 나한테 결투 신청 당한 뒤로 씩씩거리고 있었거든, 감히…”

“감히? 당신 집안이 ‘감히’ 소리 들을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좀 이따가 마저 이야기해줄게. 군인 새끼가 되어가지고 문관인 나보다 총을 못 쏘면 어떡하냐 진짜? 그딴 군인들이 다른 나라 군대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나라 앞날이 깜깜하기가 그지없더라.”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린다. 루이 엑토르의 벌건 머리카락에서 흰 눈발을 털어준 뒤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계속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본때를 보여줘야겠다 싶더라고. 내가 이대로 포기하면 내가 잘못 결투를 신청했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거든. 이번만은 물러날 수가 없어서.”

“웬일로.”

루이 엑토르의 상처를 틀어막고 있는 제 크라바트를 꾹 누르며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피를 멎게 하려고 한다. 쫄아서 튀지 않았다는 게 의외였다.

“그 새끼가 모욕을 했으니까 나도 모욕을 되돌려주겠다 하고, 제대로 모욕을 줄 방법을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불알을 쏘는 게 최고겠더라고. 잘은 몰라도 제대로 터뜨린 것 같던데, 피가 떨어지던 모양새를 보면 허벅지를 잘못 쏜 게 아닌 이상 불알을 쏜 게 맞을걸? 그 새끼는 대를 거기서 끊어줘야 해, 그런 비천한 새끼의 피는.”

“유리 알렉산드로비치네는 남작가 아니던가요?”

“비천한 사람의 피가 비천하지 뭐 비천한 피가 따로 있나.”

“프랑스인답다, 다워.”

프랑스 빨아주는 사대주의자라고 욕할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은 그의 말이 밉지가 않았다. 유리 알렉산드로비치는 소문나게 재수없는 놈이었다.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그에게 대놓고 무시당했으니까 직접 관련되는 일은 없지만 듣기로는 한두사람을 표적삼아 소문을 퍼뜨리고 따돌리며 자기 입지를 강화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루이 엑토르의 망토를 다시 여며준다. 루이 엑토르가 요즘도 이런 소리 아무데서나 하고 다니나 걱정스러웠다. 평민 출신인 본인에게는 듣기 좋은 말이지만 개나소나 다 대공인 여기서는 따돌림당하기 딱 좋은 발언들이었다.

“그래서 유리 알렉산드로비치는? 실려갔어요?”

“어, 의사 한 명이 자긴 이런 결투 안 한다면서 노쇼했거든. 남은 의사 하나는 유리 알렉산드로비치 보고 놀라가지고 거기 치료하느라 바빠서 난 버려두고… 세컨드들도 다 유리 알렉산드로비치 이송하러 가고.”

루이 엑토르는 제가 말해놓고도 이 상황이 웃긴지 킬킬거린다. 웃을 기력이 있는 거 보니까 확실히 괜찮은 거 맞다.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상처를 다시 한 번 꾹 눌러 지혈한다.

“아아아! 아파아아아!”

굳이 그런 그의 말에 대꾸도 해주지 않고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또 상처를 꾹 누른다.

“나 죽어어어어어! 널 위해서 목숨까지 건 사람한테 이게 할 짓이냐! 이거 학대야!”

“뭐래…거기서 내 이야기가 왜 나와요.”

루이 엑토르의 성향상 아마 지금까지는 여자 건드리다가 결투 신청받아서 튄 거고, 이번에는 본인의 자존심을 긁어서 명예를 차리려 한 것이라는 추론이 가장 논리적이어 보였다. 배알 없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명예의 개념은 아는 사람이구나 싶기도 했고, 그리고 설마 그럴까 싶긴 하지만…

“눈치챘잖아. 아야야, 아파라.”

루이 엑토르는 팔꿈치를 대고 몸을 일으키려고 한다.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그런 그를 그냥 다시 눕힌다. 아프다고 하면서 움직이는 건 또 무슨 심사인지 모르겠다.

“편지도 보냈고.”

“미완성된 편지였겠지. 당신 여동생이 가지고 왔었어요. 쓰다가 까먹었어요?”

“아 그렇네. 쓰고 있다가 결투할 시간이 다 되어가지고 완성을 못 했었지.”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 섞인 탄식을 내뱉는다.

“당신 이게 인생 마지막 순간이었으면 어떡할 생각이었어요? 나한테 할 말이 있는데 그것도 못 하고 죽었으면 어쩌려 그래?”

“마무리할 시간이 없었어, 급하게 결정된 결투였어서.”

“보통 일주일 한달 이 정도 시간은 두고 잡지 않아요? 정말 죽일 생각이었어요?”

“죽일 생각은 아니었어. 그냥 딱 불알만 터뜨릴 정도로 괴롭게 하고 모욕을 줄 생각이었다-진짜로.”

“배타면서 기러기도 쏘아 맞혔다, 그거 뻥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나 보네요.”

“그건 뻥이긴 했어. 갑판에서 백미터 거리두고 애들이랑 비스킷 맞추기 놀이에선 늘 적중했지만.”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또 웃음을 터뜨린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웃음이 많이 나왔다. 안도감으로 인해서 모든 경계가 풀려 버린 걸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다시 루이 엑토르를 내려다보자 루이 엑토르가 손등으로 펠릭스 아브라모비치의 뺨을 쓸어내린다.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냐 너.”

“어제 야근하다 간신히 잠들었는데 새벽에 당신 여동생이 찾아오는 바람에 세 시간밖에 못 자고 깼거든요.”

아니면 일 년 동안 마음이 편했던 날이 없어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지. 매일 당신을 직장에서 마주치면서 말 한 마디도 안 하고 지나칠 때마다 피곤이 쌓였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만.

“아델 걔가 아직 열여섯이라서 겁대가리가 없나 보네… 해도 안 떴는데 외간 남자 집에 혼자 불쑥불쑥 쳐들어가고.”

“당신이랑은 많이 다르던데요. 당신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타입은 아닌 것 같았어요.”

“내가 좀 간이 크긴 하지. 내가 거위였더라면 푸아그라 백 접시는 나왔을 거야.”

잠깐 침묵이 흐른다. 차가운 눈이 녹아 옷자락과 망토에 스며들어 온몸이 시려왔지만 딱히 움직일 마음도 들지 않았다. 눈이 소리를 흡수해 유달리 주위가 적막하게 느껴졌다. 소란스러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흔적은 조금도 남지 않은 호숫가는 소설 속에나 나올 풍경처럼 느껴졌다.

“유리 알렉산드로비치가 무슨 말을 했던 거예요?”

“그냥…별로 듣기 좋을 말은 아냐. 간단히 말하자면 네가 재수없고 음흉하다 그랬었어.”

그 말 뒤에는 더 많은 모욕이 숨어 있다. 아마 출신 성분이나 유대인이라는 이야기가 나왔겠지. 펠릭스는 늘 듣는 말들이었다.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걸 가지고 결투를 했어요?”

“심한 말인데? 그걸 심하다고 안 생각하는 네가 더 문제야 지금.”

“그래서 그 사람한테 그 말 틀렸다, 그거 하나 전하려고 결투를 신청했단 거예요?”

“원래 결투는 그런 말 하나 때문에 하는 거 아닌가?”

“당신을 모욕한 것도 아니었잖아.”

“그건 그렇지.”

“그런데도?”

“넌 그놈이 남작이라서 결투 신청 못하니까.”

그 말에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버벅거린다. 신분상으로도 사회적 위치로도 그가 모욕을 당했다고 결투를 청할 일은 별로 없었다.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그런 것을 언제나 웃어넘겨야만 했으니까. 고맙다고 말해야 할지, 바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고맙다고 하는 것은 마치 루이 엑토르가 자신을 위해서 또 결투를 해 주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들릴 것 같아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후자를 택한다.

“내가 무슨 보호받아야 하는 숙녀인 것처럼 말을 하네.”

“좀 그러면 어때. 너 군대 싫어하잖아? 총도 제대로 못 다루는데 너보다는 내가 결투를 하는 편이 생존확률이 높지.”

“그런 바보같은 용기는…나중에 당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한테 추근덕대다가 결투신청 당했을 때나 발휘하게 아껴둬요.”

“알았어. 근데 이거 어깨에 맞은 것만으로도 너무 아파서 두 번은 못 하겠다.”

“당신이 결투에서 도망친 게 신의 없는 사람이라서, 명예를 모르는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닌 건 이제 온 러시아가 알았으니까 더 할 필요도 없어요.”

“러시아? 그건 상관없어. 네가 알아줬잖아.”

펠릭스 아브리모비치는 미소를 짓고 엑토르의 오른손을 잡아 들어올린다. 한 시간쯤 전에 총을 쥐고 있었을 얇은 가죽장갑 낀 오른손을 잠시 만지다가,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허리를 숙여 베를리오즈 가문이 인장이 새겨진 엑토르의 반지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차가운 금속이었지만 이미 찬 공기에 한참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조금도 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루이 엑토르가 환하게 웃었다.

“나 지금 용서받은 건가?”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그 대답을 미소로 대신했다. 멀리서 어렴풋이 아델의 마차가 의사를 데리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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