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탕] 친구 (0명) 下
※ 캐해는 잘 모르겠고 보고 싶은 걸 씁니다. ※
※※ 본문은 펜슬 내에서만 감상해주세요 🫶 ※※
따지고 보면 불쌍하다는 말이 날 향한 말은 아니라지만 이 정도면 좀 포기도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나는 여전히 김태영을 좋아하는 거야. 가망도 용기도 없는 짝사랑 아무리 생각해도 포기가 답인데 왜 그만 둬지지가 않는 건데. 김태영을 좋아하는 마음을 통째로 뜯어내고 싶었다. 갈기갈기 찢어 불에 태워버리고 싶었다. 타고 남은 재는 깊은 바다에 뿌려버리고 싶었다. 흔적도 남지 않도록.
나는 김태영을 피하는 걸 그만 두었다. 피하는 게 아니라, 무시했다. 김태영이 말을 걸든 전화를 걸든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김태영은 이럴 때만 눈치 없이 헛다리를 짚어대며 계속 달라붙었다. 내가 최악이라고 소리치고 난 후로 무시해서 그런가 자신이 화내려던 건 잊고 나를 살살 달래려고 했다. 그런 행동이 내게는 더 보기 싫을 뿐이었다.
더 싫은 건 그 행동에 마음이 약해지는 나였다. 나한테 그런 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과잉반응하는 거 아닌가 싶고. 그러다가도 김태영 얼굴을 보면 불쌍하다는 말과 그 말을 하는 표정이 떠올라서 다시 얼굴이 굳었다. 김태영이 원망스러웠다. 너는 왜 그런 말을 해서. 난 아직 그만두는 법을 모르는데.
야, 그냥 내 눈에 안 띄는 게 너한테 더 좋을 걸. 네가 그럴 때마다 미워져. 어차피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 그만 둘 수도 없을 거 같은데, 잠깐은 미워해도 되잖아. 그러니까 나 좀 놔둬주라. 남자인 내가 하필 남자인 널 좋아하는 게 불쌍하지도 않니? 하지만 속으로 백 번 말해봤자 김태영에게 닿을 리는 없었다. 김태영은 이런 말이나 지껄였으니까.
"야아 성민아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
"남자랑 사귀는 건 역시 좀 그런가..? 그냥 미안하다고 할까?"
김태영의 말에 온몸에 핏기가 가신 듯 싸해졌다가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아, 진짜 짜증나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넌 이게 장난이야?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아- 남자랑 사귀는 게 좀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면 진작 그렇게 말하고 받아주지 말지 그랬어. 마음 없이 받아주고 마음 없이 잘 해줘 놓고 이제와서 마음 없으니까 미안? 와, 넌 정말 나쁜 놈이야. 이대로 남의 연애에 욕을 쏟아내면 이상해 보일 게 분명해 가만히 서서 심호흡하며 분노를 다스렸다. 화가 치밀수록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네 애인이 남자인 건 아무래도 상관 없댔지."
"그럼 왜 그래..."
"하......"
"아니, 말을 해줘야 알지."
영문 모르고 눈치만 보던 김태영이 슬슬 짜증이 나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끝까지 모르는구나. 그래, 내 마음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란 건 아닌데, 네 태도 잘못된 건 알아야지. 너 그런 애 아니잖아. 그냥 다 그만하고 싶어졌다. 처음부터 잘못된, 이 모든 상황의 시발점부터. 머리가 빙글빙글 어지러이 돌았다. 이 지겨운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더 이상 실랑이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참고 참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던 감정이 결국 폭발해버렸다. 김태영 눈 똑바로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단번에 끝내버릴 수 있는 파격적인 문장들을.
"야. 나 너 좋아해. 불쌍해 할 필요는 없어. 그냥 우리 이제 친구도 하지 말자."
"......?"
해버렸다. 말해버렸어. 이제 진짜 다 끝이야. 내 마지막 필살기를 날려버렸다. 더는 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꿈에도 생각 못 했던 울화 섞인 고백이었다. 김태영이 최악으로 군 것처럼 나도 김태영에게 최악의 고백을 했다. 상황파악 못하고 벙쪄있는 김태영이 입을 떡 벌린 채 멍청하게 서 있는 모습을 뒤로하고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될 거였다고,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애써 자기 위로하며 교무실로 직행했다. 선생님, 저 아파요. 병원 가야 할 것 같아요. 창백한 얼굴과 물기 가득 머금은 빨간 눈에 놀란 선생님이 조퇴증을 써주셨다. 그 길로 가방도 안 들고 집으로 향했다.
***
김태영과 생판 남인 척 지낸지 반달이 흘렀다. 그동안 김태영과 아예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주쳐도 내가 먼저 눈을 돌리거나 자리를 피했고 김태영도 그런 나를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 다만 그 표정은, 내가 싫어서라기 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나름 며칠 밤 좀 샜는지 늘 밝던 얼굴에 퀭하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근데 뭐, 어쩌라고. 이제 내 알 바 아닌데. 솔직히 내 말 때문에 샌 건지 열중하던 드래곤빌리지인지 어쩌고인지 하는 게임 때문에 샌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사실 김태영이 먼저 말 걸어왔다면 나는 대꾸해줬을지도 몰랐다. 그럼 장난이었는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냐는 다 티 나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없던 일로 할 텐데. 그때 당시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너무 별 것도 아닌 것처럼 쉽게 생각하는 김태영의 태도에 화가 나서, 가져왔던 내 마음도 그런 취급 당할 것 같은 마음에 상처 받을까봐 먼저 쳐낸 거였는데.
머리가 식고 나니 후련하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고백하지 말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썰물과 밀물마냥 밀려왔다 멀어지길 반복했다. 지금까지 잘 참아왔는데, 조금만 더 참을 걸 그랬나...
하지만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밍이 별로였을 뿐. 까고 말해 성인이 됐을 때 실수로 취중고백 날리고 후회할 바엔 이게 나을지도... 아, 잠깐만. 우리 이제 친구도 안 하기로 했잖아. 성인이 된 미래에도 당연하게 김태영 옆에 있으려고 생각한 것부터 그른 것 같아서 또 절망했다. 이젠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다 제발... 투 성민 프롬 성민.
지금도 김태영이 나빴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이렇게 끝인 건가, 우리는. 이제야말로 김태영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몇 년이고 작심일일도 성공하지 못한 걸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어코 해내야 할 시간. 더 이상의 연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늘 해왔던 대로 나를 떠나는 인연에 미련두지 않으려고 했다. 그 인연이 단순히 스쳐지나간 인연이 아니라 십몇 년간 이어져왔던 인연, 그리고 몇 년 간 가져온 첫 마음이라서 조금 시간이 걸릴 뿐이었다.
그렇게 김태영을 내 삶에서 조금씩 지워내려는 노력이 빛을 발하려 하기도 전에, 언제나처럼 먼저 내게 손을 뻗은 김태영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성민아."
김태영이 내 이름을 부른 건 집에 가기 위해 하교하는 길 위에서였다. 김태영의 목소리로 듣는 내 이름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여전히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가 너무 좋다는 작고 단순한 이유만으로 억지로 짓밟히고 있던 불씨가 살아나는 감각.
한심하면서도 설레고 괴로웠다. 나는 언제까지 스스로 아파해야 하지. 도대체 가망없는 마음 어떻게 해야 놓을 수 있는 거야. 복받치는 감정을 토해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핏기가 가시도록 꾹 깨물었다. 언제부턴가 많아진 눈물의 이유가 전부 김태영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비참했다.
미치도록 억울했다. 어떻게 내 이름 부르는 목소리 하나에 지금까지 아파온 모든 걸 잊고 웃으며 돌아보고 싶어지는 건지. 내가 생각해도 지독한 짝사랑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친구 하고 싶다는 거 취소. 난 이제 짝사랑에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김태영이 날 쳐냈으면 좋겠어. 내가 지금 다시 고백할 테니까 꼭 뻥 차버려 줘. 그리고 정말 다시는 아는 척 하지 말자. 눈길도 관심도 주지 말고. 돌아보기 전 그렇게 다짐했는데.
말없이 돌아보자 김태영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차가워 보이는 인상과 달리 생각보다 눈물 많은 애란 걸 알았다. 그 표정을 보자 나도 참았던 눈물이 흐를 뻔했다. 그래, 네가 왜 이런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지 들어나 보자고.
난 눈물에 약하지도 않고 오히려 질색에 가차없는 사람인데. 또 한 번의 유예 기간을 주는 내가 지겨웠지만 이건 오랜 짝사랑의 관성이었다. 혹시, 어쩌면, 뭐 그런 생각들. 없던 일로 하자. 장난이야. 거짓말이야. 나랑... 계속 친구하자. 껌처럼 달라붙은 미련이 나를 자꾸만 불구덩이로 밀어넣었다. 솔직히 차인다고 단번에 끝낼 수 있는 마음도 아니고... 취소라고 했지만 다 끊어낼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 다시 한 번만 네 옆에 있을 수 있게 된다면 이제는 정말 친구라는 이름에 만족할 거라는 간절한 염원.
마음이 급해졌다. 들어보자고 했지만 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김태영의 말을 기다리기엔 내 성격이 느긋하지 못 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김태영. 미안해."
"어..?"
"그 때 한 말, 다 거짓말이야. 네가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치는 가벼운 애 같아서 화가 났어."
"...무슨 소리야."
"좋아한다는 것도, 친구 하지 말자고 한 것도 다 거짓말이라고. 미안해. 그래도 다시 친구 해주라. 나 뻔뻔한 거 너도 알잖아."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염치없기 짝이 없는 내 말에, 김태영은 툭 건들면 떨어질 듯 가득 찬 눈물을 소매로 거칠게 닦아냈다. 젖은 눈가에 오후의 햇살이 비쳤다. 내가 좋아하는 김태영의 진갈빛 눈동자가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 눈동자에 홀린 사이, 김태영의 입에서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친구, 못 하겠는데."
"뭐?"
"너 뻔뻔한 거 잘 알지. 지금도 나 좋아하는 거 맞으면서 뻔뻔하게 아닌 척 하고 있잖아."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뭐 하자는 거야?"
"친구 말고, 애인 하자는 거야. 이번엔 내가 기다릴게."
김태영의 말에 모든 사고가 마비됐다. 어떤 말도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건지 믿을 수 없었으니까. 쟤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김태영의 입에서 나온 모든 문장이, 단어가 외계어처럼 해석이 되지 않았다. 그 문장이 뜻하는 건 하나였는데 그럴 리가 없으니까. 나는 화나려던 것도 잊고 멍하게 입을 벌렸다. 김태영에게 말로 져본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말문이 턱 막혔다.
"너 지금..."
"내 마음 몰랐어서 미안하고, 네 마음 몰라줘서 미안해."
"야, 김태영."
"나 너 좋아해. 네 말 듣고 되돌아봤는데 그래."
몇 년이나 마음 깊은 곳 묻어두고 꺼내지 못했던 말. 늦은 새벽까지 김태영을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려보던 말. 그 말을 김태영에게서 들었다. 문장의 수신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주마등처럼 김태영을 좋아해온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회상에 불현듯 불청객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 남자 애, 걔는 어쩌고?
"너 박재현이랑 사귀잖아."
"헤어졌어. 내 마음을 알았는데 계속 사귈 순 없잖아."
"너 그렇게,"
"다른 사람 마음 가볍게 생각한 것도, 불..쌍하다고 한 것도 내 잘못이야. 반성하고 있어."
"......"
"불쌍해서 고백하는 거 아니고, 나 정말 너 좋아해. 진심이야."
현실적인 성향으로 인해 상상해 보기도 어렵던 그 말이 네 입에서 나왔다. 믿어져? 잠시 머리가 핑 돌았다. 그 탓인지 눈물샘이 고장난 것 같았다. 내 통제 밖이었다. 이제 네 앞에서 우는 건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김태영이 나를 좋아한다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어? 거짓말......
"못 믿겠어."
"믿게 해줄게."
"......기다려."
"응."
김태영이 의연한 표정으로 양 주먹을 꽉 쥐었다. 믿기지 않지만 믿고 싶었다. 그리고 언제나 을이었던 버릇은 김태영이 단호하게 한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호구 같다는 거 인정.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엔 네 말대로 네가 나 기다려. 아니 기다려줘. 날 좋아한다는 네 말이 믿어질 때까지. 내가 네 팔 꼬집으면 아파해야 해. 안 그럼 그냥 꿈이라고 생각해버릴 거니까. 네가 아파하면 그 땐 나도 실감이 나겠지. 아, 김태영이 날 좋아하는 게 현실이구나. 정말 김태영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내가 좋아하는 김태영이, 나를. 사실 이건 그냥 하는 말이고- 겨우 팔 꼬집는 거 말고 네가 무슨 방법으로 네 말을 믿게 해줄지 궁금해. 네가 좋아하는 날 위해 넌 뭘 해줄 수 있어?
"근데 어떻게 믿게 해줄 건데?"
"뽀뽀해도 돼?"
"...안 돼."
"응..."
서, 성급하네 김태영... 두 볼에 입술 대신 큰 손이 닿았다. 김태영이 그새 마른 눈물자국 달고 내 눈물을 닦아줬다. 갑자기 현실감이 확 들어 얼굴에 열이 올랐다. 눈물을 보인 게 뒤늦게 창피해 괜히 손을 뻗어 다 마른 김태영 눈물자국을 마구 문질렀다. 갑작스런 손짓에 김태영이 허우적거리더니 내 손목을 잡아 멈추게 했다.
마주친 눈이 어이없어 하다가 눈동자도 보이지 않게 호선으로 접혔다. 동시에 왼쪽 뺨에 보조개가 포옥 파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태영의 표정. 그 탓에 얼굴도 마음도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어버렸다.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내려와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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