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탕] 친구 (0명) 中
※ 캐해는 잘 모르겠고 보고 싶은 걸 씁니다. ※
※※ 본문은 펜슬 내에서만 감상해주세요 🫶 ※※
새로고침을 하자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디저트 사진이 떴다. 며칠 전 새로 문을 연 카페의 마카롱이었다. 가서 맛있는 디저트도 먹고, 인스타 용 사진도 찍어야지. 김태영 데리고 가야겠다. 걔가 그래도 사진은 제법 나쁘지 않게 찍으니까. 생각난 김에 물어보려고 메신저를 열었다.
김태영 너 새로 생긴 카페 Cheese 알아? <
> 거기 재현이랑 갔는데
> 맛있더라 니가 좋아할 거 같은데?
답 없이 핸드폰을 끄고 책상에 내려놓았다. 내가 또 괜한 짓을 했네. 크게 숨을 들이키고 내쉬었다. 그 날 이후로 울지 않았다. 기껏 쌓아온 그 기록을 무슨 일이 생긴데도 깨기 싫었다. 각오까지 한 참이었다. 더 이상 내 인생에 김 모 씨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없어.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순간 울컥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이런 적이 처음도 아닌데 요즘따라 왜 이렇게 감정적인지 모를 일이었다. 김태영이 여자 애랑 사귈 때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 했는데 말이다.
난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김태영도 인정한... 아, 또 김태영 생각. 아무튼 나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사람, 슬프기로 유명한 영화를 보러 가도 남들 다 울 때 뽀송한 얼굴로 팝콘이나 먹는 사람이었다. 이런 날 별 것도 아닌 걸로 몇 번이고 울리는 유일이 김태영이라니. 정말 싫다...
난 끝내 울지 않았다. 이까짓 게 뭐라고. 비록 새 카페 생기면 늘 같이 가주던 김태영이 날 버리고 홀랑 그 애와 먼저 갔지만. 비록 우리 둘의 대화에 재현이가- 재현이는- 처럼 자리에 있지도 않은 그 애를 언급해댔지만. 비록 비 오는 날 우산을 안 가져왔다는 그 애와 같이 한 우산을 쓰고 갔지만. 나한테 먼저 물어보긴 했어도 결론은 우리 말하는데 끼어든 그 애랑 쓰고 갔잖아. 물론 난 우산 챙겨왔긴 한데...
알지. 나는 친구의 위치고, 그 애는 애인의 위치. 그럴 수도 있지가 아닌 당연히 그래야지. 알긴 아는데... 어느 순간부터 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생겼다. 김태영이 그 애 얘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김태영이 그 애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다정하게 대해주는 모습을 옆에서 엑스트라마냥 지켜보고 있자면 마음이 안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야, 안 좋아하면 잘 해주지 마. 뭘 그렇게까지 애인의 의무를 다하는 거야? 내가 질투나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거 걔한테도 안 좋아.
나를 더 괴롭게 하는 건, 진심이 아니어도 이렇게 굴 수가 있구나 싶은 김태영의 행동이었다. 혹여나 진심이 된 거라면 어떡하지. 어떡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맹신할 수 없는 가정에 불안이 급속도로 증폭했다. 아무런 방안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지금까지와 같이 김태영 연애하는 거 먼 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입술이나 깨물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방과 후가 되기 전, 청소 시간. 내가 맡은 곳은 모든 아이들이 탐내는 구역이었다. 치울 게 별로 없는데다 공간도 좁아서 몇 번 쓸고 닦으면 끝이었다. 시간이 많이 남은 내 발걸음은 김유신 장군의 애마처럼 익숙하게 음악실로 향했다. 김태영의 청소 구역이었다. 잠을 못 잤다고 하루종일 졸려하던데 내가 대신 청소해줄 테니까 좀 자라고 할까? 그 대신 다음엔 내 구역도 청소 해달라고 해야지. 푹 자게는 하고 싶은데 그런 마음 들키기는 싫어서 다음엔 내 구역 대타 해달라는 핑계를 대기로 했다.
모처럼 잘 대해 줄 생각으로 찾아왔는데 말이다. 그냥 나는 어딜 돌아다니지 말아야 하나 보다. 꼭 쓸데없는 짓을 해서 일을 만들어요. 깜짝 놀래키려고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음악실 문을 열었다. 그러지 말걸. 세상 요란하게 박찰 걸.
한뼘 정도 연 문틈 사이로 살며시 얼굴을 들이밀자 보이는 건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었다. 무려 눈을 감고 있는 김태영과, 김태영에게 키스하려는 그 남자 애. 순간 내가 한 행동은 뇌를 거치지 않은 짓이었다. 오직 막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돌고래 뺨치는 고음을 내질렀다. 비명 같은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남자 애와 1초 정도 눈이 마주쳤고, 난 그대로 도망갔다. 요즘 김태영 때문에 달리기 실력이 늘었을 게 분명했다.
터덜터덜 정처없이 걷다가 어디에라도 앉고 싶어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돌계단에 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옷이 더러워질까봐 뭐라도 깔고 앉았을 텐데 그런 생각 할 겨를도 없었다. 어째 매번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목격하고 도망가고 목격하고 도망가고. 정말 나한테 왜 이래? 그냥 종일 내 자리에 발 붙이고 있어야 하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자꾸만 그 장면이 리플레이 되다 못해 상상력이 뛰어나지도 않는 주제에 그 다음 장면까지 이어지려는 걸 고개를 흔들어 멈췄다.
사실 이번에야 소리쳐서 막았다지만, 내가 도망간 이후에 다시 한다면?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면? 아니, 그건 그럴 수 있긴 하지. 너무 싫지만 그 애는 김태영과 사귀는 사이니까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현장을 보니 확실히 충격이 셌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키스하기 직전의 상황을 목격한다? 누구도 하기 싫은 경험일 게 당연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일이 또 하나 생겨버렸다. 어째 죄다 김태영과 관련된 일이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그냥 지우개로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좋겠을 그 장면은 김태영을 볼 때마다 떠올랐다. 아니, 사실은 김태영을 보지 않아도. 나름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었나 보다. 친구가 다른 사람과 키스하는 걸 보기도 어려운 일인데 그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이 어려운 걸 제가 해냅니다.
현실을 깨달은 느낌이었다. 김태영은 사귀는 사람이 있고, 나는 고백할 일이 없다는 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짐했다. 김태영을 피해다니기로. 그냥 그만 하자. 혼자 좋아하기만 하면 상관 없다지만 결국 애인 있는 사람 좋아하는 거고... 고백할 용기도 없으면서 구질구질하게 구는 것도 그만하고 싶었다. 그게 마음대로 됐으면 내가 지금껏 김태영을 좋아하지도 않았겠지만.
***
반이 갈려 아쉬웠던 반배정은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었다. 김태영을 피해 다니기 더 수월했다. 김태영이 앞문으로 들어올 때마다 뒷문으로 도망가는 건 조금 귀찮긴 했지만 지금 심정으론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늘 같이 하던 하교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미루고, 원래 잘 안 보긴 했지만 하루 안엔 보던 연락을 며칠씩 안 보기 시작하자 눈치 빠른 김태영은 내가 피해 다니는 걸 알아챈 듯 했다. 피해 다니는 게 능사는 아닌 걸 알지만 내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는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었다. 그게 김태영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점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서둘러 교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복도 창틀에 삐딱하게 기대어 있는 김태영과 마주했다. 모두가 4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투우소마냥 달려나가는 수요일인데, 누구보다 빠르게 뛰어갔어야 할 녀석이 급식실이 아닌 우리 반 앞에 있었다. 내가 하도 잽싸게 피해 다니니까 종이 치기도 전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했다. 설마 수업을 쨌나 싶었는데 체육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이전 교시가 체육 시간이었나 보다. 하긴, 생긴 건 양아치 같이 생겨도 학교 교칙은 잘 지키는 애니까.
"안성민."
무표정한 얼굴의 김태영이 내 이름 석 자를 불렀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뛰쳐나가는 반 애들에게 비키라는 말을 듣고서야 발을 뗐다. 이리저리 둘러 봤지만 도망갈 수도 없을 것 같고, 도망치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가만히 서 있자 여전히 얼굴을 굳힌 김태영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오늘 방과 후에 잠깐 보자."
"나, 약속 있어."
"할 말 있어. 잠깐이면 돼."
약속 있다는 내 말에 '네가?'라는 물음이 나왔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항상 청유형이었던 문장이 명령형이었다. 차갑게 느껴지는 딱딱한 말투. 굳은 표정. 김태영, 얘 지금 화났구나. 가끔 툴툴대긴 해도 나한테 진심으로 화내는 걸 본 적은 없었는데. 그게 지금인 건가 싶어서 조금 쫄았다. 결론은, 그냥 고개 끄덕였지 뭐.
다른 때 같았으면 끝까지 응 아니야~ 자세로 밀어붙여도 김태영은 고개 절레절레 젓고 말았을 테지만, 이번엔 진짜 인내심 스위치 건드린 것 같아서 그럴 수 없었다. 조금 꽁하긴 했다. 결국은 김태영 말대로 하게 되는 내가 싫었다. 내가 네 기분을 얼마나 신경쓰는지 너는 모르지. 나도 지금껏 누울 수 있는 곳에 발 뻗어온 거거든. 사실 네 표정 네 말투 하나에 바로 꼬리 내려. 어쩔 수 없이 내가 을일 수밖에 없으니까.
시간은 남의 속도 모르고 속절없이 흘러갔다. 종례를 마치고서도 한참을 미적미적 가방을 쌌다 푸는 짓을 의미없이 반복했다. 미룬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걸 알지만 가기 싫은 걸 어떡해. 수업 시간 내내 김태영이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봤다. 우선 피하는 이유를 물어보겠지. 이건 나 같아도 그럴 것 같다. 그런 거 물어봐도 말 못 할 이유뿐인데... 뭐라고 답해야 하나. 네 피셜 최근에 친해졌다는 남자 애랑 네가 키스하기 직전의 광경을 봤다고 해? 근데 사실 너희 사귀는 거 다 알고, 내가 너 좋아해서 충격을 받아 피해 다녔다고? 진짜 최악인 걸.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래주머니를 차고 걷는 것처럼 무거웠다. 아주 천천히 그 날 이후로 다시는 가지 않았던 그곳으로 향했다. 김태영이 남자 애에게 고백 받는 걸 목격한 곳 말이다. 김태영은 당연하게도 진작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를 거는 건지 받는 건지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대다 나를 발견하고 다시 내렸다. 내가 하도 안 나오니까 나한테 전화를 거는 중이었나 보다. 안 봐도 무음으로 해둔 내 핸드폰에 김태영의 부재중 연락이 남았을 거다. 이것까진 예전과 다를 게 없는데 지금 내 앞에 닥친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
"어, 안녕..."
"너 왜 나 피해?"
어색하게 인사하자 받아주기는커녕 서론 다 집어치운 채 본론부터 들어오는 걸 보니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그 때, 겨우 한마디 꺼낸 그 새를 못 참고 누군가 방해를 했다. 범인은 김태영의 핸드폰이었다. 김태영이 추천해 준 노래를 같이 듣다가 내가 좋다고 했던 노래. 그 노래가 전화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김태영은 전화가 걸려온 화면을 힐긋 보더니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무시할 생각인 건가.
"...얘기할 테니까 전화 먼저 받아."
조금이라도 이야기 할 시간을 미루고 싶었다. 여전히 울리고 있는 핸드폰에 김태영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더니 전화를 받았다. 음량을 크게 해놓은 모양인지 조그맣게 내용이 들렸다. 전화 속 상대가 김태영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전화는 그 남자 애한테서 온 거라는 걸.
[그.. 전에 청소 시간에 음악실에서, 네가 자다가 큰 소리에 깼을 때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었잖아.]
"응."
[사실 그때 네 얼굴에 뭐 묻어 있어서 떼주려고 했었는데, 네 친구가 보고 소리 지르면서 도망가더라고. 지금 생각해보니 각도상으로 키스하는 줄 안 거 같아서-]
김태영은 더 듣는 대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잘했다.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다. 하, 웃기는 소리. 도둑 키스 하려던 거 뻔히 다 봤는데 거짓말을 하네. 내가 속으로 비웃고 있는 사이 김태영은 생각도 못한 이야기를 들어서 당황한 듯 죄 없는 머리만 연신 쓸어올리고 헝클이고 난리부르쓰를 떨었다. 이내 초조한 것처럼 정신 사납게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더니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지 조금 지루해서 긴장에 꼿꼿하던 자세가 풀릴 때쯤 김태영이 말했다.
"너... 청소 시간에 음악실에서 나랑 재현이 봤어?"
"...응."
"그거 오해야. 뭐 묻은 거 떼주는 거라고,"
"근데 사귀는 건 맞잖아. 나 알고 있었어."
내 말에 김태영은 입을 벌린 채 굳었다. 놀란 얼굴이 바보 같았다. 진짜 바보 아니야? 이런 반응이면 그냥 떠본 거여도 들켰겠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김태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김태영을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단단히 화난 것처럼 보였겠지만 난 이 표정이 당황해서라는 걸 알았다. 머릿속이 복잡한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아니, 미리 말 못 한 건 미안해. 너도 알다시피.. 걔는 남자잖아."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너.. 걔 좋아해?"
"......"
나도 남자인데 널 좋아해. 누구한테 말 못 하는 거 당연히 이해해. 근데, 너 그 애를 좋아해? 처음엔 아니더라도 좋아하게 됐어? 나한텐 제일 중요한 그 질문에 김태영은 대답하지 못 했다.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이며 곤란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무어라 형용 못할 여러가지 감정들이 한 번에 몰려왔다. 다행이면서도 절망스러웠다. 어차피 김태영은 그 애 안 좋아해. 한때는 날 가장 안도하게 했던 사실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가슴에 꽂혔다.
내가 비참할 정도로 그 애에게 잘 해주면서 마음은 못 줬구나. 김태영이 남자를 좋아할 일은 없다는 걸 확인 사살 받은 기분. 그 생각이 들자 정말 울고 싶었다. 차라리 그 애를 좋아한다고 하면 고백이라도 해볼 걸 하고 조금 후회는 하겠지만 동시에 혹시 모를 가능성도 생기는 건데. 그래도, 성별을 떠나서 매력이 없었을 수도... 다 죽어가던 희망회로에 간신히 다시 불이 붙었다.
"남자라서? 아니면 네 취향이 아니라서?"
"뭐.. 그냥 별 생각 없어. 근데 네가 이런 게 왜 궁금,"
"근데 왜 안 헤어져?"
"......불쌍해서..?"
"...넌 진짜 최악이야."
내 물음에 입을 꾹 다물더니 한참을 머뭇거리다 꺼낸 김태영의 말에, 막 타오르려던 게 찬물이 한가득 들이부어진 것마냥 단숨에 꺼졌다. 많고 많은 대답 가운데 최악 중의 최악을 골라 답하는 너는 정말... 만약 내가 그 애처럼 고백했다면 김태영은 날 불쌍해 했겠지. 역시 고백 안 하길 잘 했다. 불쌍해서 사귀어 준다는 것만큼 사람 바보 만드는 게 있을까.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얼굴을 잔뜩 찌푸려 겨우 참았다. 그리고 더한 말 없이 김태영을 그 자리에 내버려둔 채 그곳을 떠났다. 주저없이 김태영을 지나친 나는 잡힐 새라 필사적으로 뛰었다. 뒤에서 당황한 김태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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