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K

[탱송] 김다정 下

※ 캐해는 잘 모르겠고 보고 싶은 걸 씁니다. ※

※※ 본문은 펜슬 내에서만 감상해주세요 🫶 ※※

  

  아무래도 형준이 형이 눈치챈 것 같았다. 내가 형을 좋아하는 걸.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한순간에 티 나게 나를 피할 이유가 없으니까. 나름 숨긴다고 했는데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말이 제 값 한 모양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닌 척 조금 자제해야 하나? 아니면 이왕 들킨 거 확 들이대버려? 차라리 눈치 챘냐고 돌직구로 물어보고 싶긴 한데 그러다 괜히 사이만 어색해질까봐 망설여졌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 목소리만 들려도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상황에 더 나빠질 게 있을까 싶기도 하고. 살짝 떠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익숙하게 한 층 더 올라가 2학년 2반 뒷문을 열었다. 오늘은 요 며칠과 다르게 책상에 엎드려 있지 않은 형준이 형이 보였다. 내가 하도 자주 찾아오니까 아예 자는 척을 하더니 웬일로 일어나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동그란 입이 허망하게 벌어졌다. 뭐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엎드리는 걸 잊은 모양이었다. 

  이미 눈 마주친 거 이제 와서 다시 엎드리기도 뭐 할 거고. 데구르르 굴러가는 눈동자가 내 시선을 피해 달아났다. 머리 굴릴 틈 주지 않고 다가가 형 옆에 쭈그려 앉았다. 꽃받침 스킬, 플러스 일명 장화신은 고양이 스킬. 내 장점인 큰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형을 바라봤다. 안 쓰는 척 신경 쓰던 형이 결국 내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마주했을 때 불쑥 말했다.

  "내가 형 좋아하는 거 알죠?"

  살짝 떠본다면서 너무 돌직구였나. 내가 말하고도 놀라서 아차 싶었다. 저번에도 이랬다가 당황시켰으면서. 형준이 형은 이렇게 훅 들이대는 거 안 좋아한댔는데. 그 탓인지 내 예상보다 지나치게 당황한 형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뜨였다. 어찌나 크게 떴는지 동공이 지진을 일으키는 게 다 보였다. 

  이런 반응이라면 역시 알고 있던 모양이네. 전이라면 같은 반응을 보고도 됐다 뭘 바래 싶었을 텐데 지금은 형이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직진 할지 후진 할지 결정은 미뤄두고 오늘은 이쯤 할까. 더 가면 형준이 형 성격에 진짜 친한 형동생 사이도 못할 거 같아서 내 짐작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받음에 만족하고 노선을 변경했다. 

  "진짜 형들 중에 형이 제일 좋음. 강민희 형? 아이 상대가 안 되지."

  "...아! 그, 그치~! 형이 최고지?"

  아무렇게나 덧붙이자 금세 안도한 형이 어색하게 대꾸했다. 작전상 한 걸음 물러났다. 세 보 전진을 위한 한 보 후퇴. 그 계획에 뜻밖의 변수가 나타난 건 아마도 행운. 짝사랑하는 사람의 특기는 상대의 바뀐 외양이나 감정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것이다. 그게 비록 1cm 짧아진 앞머리라거나 미묘한 표정 변화라고 해도 말이다. 하루종일 상대만 보고 있는데 모를 수가 없지. 

  여태껏 내 마음을 들킨 게 맞는 건지 확인하느라 신경쓰지 못했는데 말이다. 날 피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형준이 형은 조금 이상했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나를 은근히 피하는 건 여전했다. 근데 피하면 피하는 거지 볼은 왜 붉혀? 내가 어깨에 손 올리는 거 하루이틀도 아닌데 손가락만 스쳐도 화들짝 놀라며 안절부절 못 하기 일쑤고. 무거워 보여서 대신 들어준 것뿐인데 왜 자꾸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보는 거야. 

  이 반응은 모 아니면 도. 나를 싫어하거나, 나를 좋아하거나. 처음에는 내가 싫어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형을 좋아한다는 걸 아니까 선을 긋는 거라고. 짝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사고였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형의 행동은 어딘가 익숙했다. 내가 형이 좋아서 하는 표정, 행동, 반응. 그 모든 걸 형도 하고 있었다. 물론 성격 차이인지 형이 조금 더 조심스럽긴 했지만. 

  그리하여 내가 세운 가설은, 형은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좋아한다는 것. 당장이라도 이 가설의 확답을 받고 싶어서 조급해졌다. 수업 시간 내내 정신 사납게 연필만 돌려대다 종이 치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향하는 곳은 당연하게도 이제는 내 교실마냥 익숙해진 형준이 형 교실이었다. 

  민희 형은 형준이 형을 붙잡고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썸타는 듯한 썰을 풀고 있었다. 덕분에 형준이 형이 도망 못 가고 자리에 있게 된 건 조금 고마웠다. 가까이 다가가자 반사적으로 올려다 본 형준이 형이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들고 있던 립톤에 시선을 내렸다. 민희 형은 내가 오든 말든 손 한 번 들어올리고 하던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이거 완전 나한테 마음 있는 거 맞지?"

  "그거 태영이한테 물어봐. 태영이 여친 있잖아."

  "네...?"

  "태영이 너 이 녀석, 언제 나 몰래 여친을!"

  아니, 형 몰래가 아니라 진짜 나 몰래인데요? 나도 모르는 여친이 갑자기 어디서 생겨난 거란 말인가. 그것도 형준이 형이 그런 말 하니까 더 어이없고 속상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지금 누군데. 내 마음도 모르고 형준이 형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다 먹은 빵 봉지를 부시럭대며 구기고 있었다. 

  "태영이 여자친구한테 잘 해줄 거 같아. 막 가방도 들어주고."

  "아니.. 저 여자친구 없는데 무슨 소리예요? 애초에 사귈 생각도 없는데."

  "너 며칠 전에 어떤 여자분 겉옷 지퍼 올려주는 거 내가 봤는데 아니라고? 세영 누나도 아니던데."

  성난 토이푸들처럼 공격적으로 쏘아붙이는 형준이 형에 조금 당황했다. 웅냥거리던 말투 어디가고 발음이 왜 이렇게 정확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여자 겉옷 지퍼를 올려줬을 리가 없는데. 내가 언제 그랬냐고 대답하려는 순간 한 줄기 섬광이 뒤통수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혹시 그 때인가? 사촌 누나가 남친 선물 고르는 거 도와달라고 했을 때. 그게 틀림없었다.

  "제가 언... 아, 사촌 누나? 사촌 누나 남친 선물 같이 골라줄 때 본 거 아니에요?"

  "넌 사촌 누나 겉옷 지퍼를 올려줘?"

  "아니, 내가 쇼핑백을 들어주면 되는데 둘 다 그 생각을 못 하고 누나가 손이 없으니까 올려줬죠..."

  "아... 너 사촌 누나 있었구나..."

  금방이라도 아르릉거릴 것 같은 기세에 나도 모르게 애인한테 잘못한 걸 변명하는 것마냥 쭈굴거리며 대답했다. 내 말을 곱씹던 형준이 형의 입꼬리 끝이 살며시 올라갔다. 눈 한 번 안 마주치고 빵 봉지만 보더니 헛웃음을 내뱉었다. 느닷없이 손에 얼굴을 파묻은 형준이 형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갑자기 뭐야? 귀여워! 내가 형을 좋아하는 걸 알면서 여자친구 있으면 잘해줄 것 같다는 이야길 꺼내길래 은근히 거절하는 건줄 알았는데. 이런 반응을 보이면 내 가설에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니, 진짜... 이 형도 나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나 여자친구 있는 줄 오해하고 피해다닌 거 아니야? 그렇게 결론 내리면 내가 할 건 정해져 있었다. 내가 형을 좋아하고 형도 나를 좋아하는데 망설일 게 뭐 있어. 직진이지.

  "근데 형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요?"

  "어, 어.."

  아.. 진짜? 하긴, 나 좋아하니까 있는 게 맞지.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 대답을 해줄 거란 기대가 없어서 내가 물어봐놓고 고분히 돌아온 긍정의 답에 살짝 놀랐다. 형이 이런 거 솔직하게 말할 사람은 아닌데 당황해서 그냥 대답해버린 건가. 내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나는 옆에서 덩달아 놀란 민희 형이 충격 받은 걸 무시하고 계속 형준이 형에게 물었다.

  "우리 학교? 이름이 뭔데요?"

  "어, 그 우리 학교는 아니고, 기, 김다정이라고..!"

  내가 집요하게 캐묻자 당황한 듯한 형의 입에서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 나왔다. 내 이름 석 자 솔직하게 말해줄 거라고 생각 안 하긴 했지만 비밀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전제부터 틀린 채 다른 사람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네. 내가 착각한 거야? 순식간에 기분이 안 좋아졌다. 얜 또 누구야. 김다정... 나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걸 형이 듣지 못했길 바라며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형이 눈치 채지 못 하게 다시 목소리 톤 올려야지. 밝게.

  "아- 나 발 넓은데 누군지 모르겠다."

  "어.. 너 절대 모를 걸."

  어색하게 웃는 형의 얼굴에 또 열이 올랐다. 그냥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확신할 건 또 뭐야? 절대 모를 거라는 거 보면 형준이 형이랑 같은 학원 사람인 건가. 아, 안 그래도 다음주부터 나도 그 학원 다니려고 했는데 조금만 더 빨리 다닐 걸. 아니면 등굣길 버스에서 매번 보는 사람? 우리 집 쪽 정류장 안 들리는 버스인 거 형이 알아서 자제하고 있었는데 등교도 같이 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길 걷다가 지나가는 누가 맘에 들었나? 아,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쌓아가는 것 같은 형을 보니 기특하면서도 싫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우정도 아니고 사랑이라니. 질투가 없진 않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좀 많이 짜증나는데. 지금 상황에 질투도 짜증도 자격 없는 거 알지만 그런 감정이 드는 걸 어떡하라고.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내 얼굴을 살피는 형의 시선에 간지러워서 긁는 척 미간을 꾹 눌러 폈다.  

  "그 김다정이라는 애, 왜 좋아요?"

  "어? 어.. 그냥 밝고.. 잘 웃고.. 잘 하는 것도 많고. 그리고, 제일 좋은 건 다정해. ...그게 제일 싫기도 하지만."

  "아... 그렇구나."

  밝고 잘 웃고 다정한 형 또래의 여학생. 단서가 너무 적은데다 지나치게 주관적이었다. 외양을 알려달라고 하는 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 한마디 말도 없이 입 꾹 다물고 표정 굳히고 있자 형준이 형이 내 눈치를 봤다. 아니, 형 눈치 보게 하기 싫은데. 짜증이 머리 끝까지 올라온 건 사실이지만 그 감정을 형 앞에서 드러낼 생각은 없어서 억지로 싱긋 웃어보였다.

  "...너 화났어?"

  "아뇨. 화날 일도 없는데 갑자기?"

  "아 글킨 하지.."

  의도보다 날카롭게 나간 내 말에 내가 놀랐다. 형이 생각보다 작은 감정 변화도 잘 캐치하고 세심한 거 알면서. 조심하지 못한 내 자신을 스스로 꾸짖으며 감정을 다스리느라고 형준이 형을 살피지 못했다. 그 시무룩해진 표정을 봤더라면 서운해하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았을 텐데. 서운한 이유가 내 날선 말투 뿐만이 아니라는 것도.

***

  발 넓은 걸 이런 식으로 쓸 줄은 몰랐네. 내가 하다하다 형준이 형 때문에 이런 걸 다 해보고. 그 때 어쩌다 만났는지 물어볼 걸 그랬다. 머리가 잘 안 돌아갈 상황이긴 했지만. 이제 와서 다시 얘기 꺼내긴 조금 이상해서 그냥 인맥 팔아서 우리 지역에 있는 세 학교를 모두 뒤졌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여러 다리 걸쳐 찾아낸 김다정이라는 여학생은 모두 3명이었다. 이 사람이 내가 찾는 김다정이라면 도무지가 어떻게 형준이 형이 알게 됐는지 모를만큼 먼 학교 학생 2명과, 바로 옆 학교 1명. 옆 학교에 다니는 누나는 심지어 형준이 형과 같은 학원이어서 아무래도 이 누나가 가장 유력해보였다. 근데 설마, 형이 좋아한다는 김다정이 대학생은 아니겠지?

  찾아서 뭐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고(사실 그럴 위치도 안 된다) 그냥 어떤 사람인지나 보려고 했다. 주제에 안 맞게 형준이 형이랑 사귈만한 사람인가 확인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형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그게 궁금해서. 형한테 물어보면 늘 두리뭉술하게 대답하니까.

  그렇게 형준이 형과 그 누나가 다니는 학원에 다짜고짜 찾아갔다. 어차피 다음주부터 다닐 건데 미리 견학한다 치지 뭐. 학원 이름이 붙어있는 투명한 유리 문을 열자마자 정수기 앞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하얗고 작은 여학생이 보였다. 수업 중에 잠시 물 마시러 나온 건지 로비에는 여학생 외의 사람은 없었다.

  "저 혹시, 송형준 아세요?"

  "송형준? 모르겠는데. 근데 잘생겼다. 번호 좀 알려줘요."

  "네?"

  "난 김다정인데,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어이없네. 본인이 4미닛이야 뭐야. 형준이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이 사람은 절대 아니길. 더 볼 것도 없었다. 그렇게 허탕만 치고 수확 없이 하루가 지났다. 이제는 너무 당연하게도 형준이 형의 반으로 향했다. 오늘의 형은 엎드려 있는 대신 옆자리 민희 형과 얘기 중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형준이 형의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무슨 일 있는 건가. 설마 또 어디 아픈 거 아니야? 걱정하며 다가가자 민희 형이 손을 번쩍 들고 맞아줬다. 

  "어이, 김태영이 또 왔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형준이 형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안 좋아보이는데."

  "너 좋아하는 사람 있다며?" 

  "아... 어떻게 알았어요?"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다가 생각도 못한 주제에 당황해 아니라고 모른 척할 새도 없이 긍정해버렸다. 형준이 형도 이런 심정이었으려나. 아니, 왜 내 얘기를 하고 있어? 그것도 이런 얘기를. 자연스럽게 형준이 형의 표정을 살피게 됐다. 형은 아무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지만 입술이 작게 움찔거렸다. 속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형준이 형이 내 마음을 아는데 그 얘기를 눈치없게 여기서 꺼내냐. 물론 민희 형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거겠지만 괜히 미웠다.

  "네 번호 따려다 까인 김다정이랑 아는 사이인데, 너 걔한테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했다며?"

  "아... 형도 형준이 형이랑 같은 학원이었지."

  "근데 번호는 아니더래도 이름은 좀 알려주지 그랬냐."

  "그러고보니 그 사람 제 이름 모르던데 난 줄 어떻게 알았어요?"

  "설명하는 게 딱 너 같아서 사진 보여주니까 맞다던데?"

  "아니 형이 내 사진을 왜 맘대로 보여줘요?"

  나한테 허락 받지도 않고 내 사진을 다른 사람한테 보여줬다는 민희 형에 어이가 없었다. 이미 보여준 거 뭐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냥 대충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고 대꾸하는데 형준이 형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꼭 화난 것처럼. 어? 왜지..? 진짜 화난 거 같은데. 나름 사납게 치켜뜬 큰 눈이 나를 째려봤다. 나한테 화난 거야? 왜? 힘주어 꼭 다물어져 있던 형의 입술이 벌어졌다.

  "너 저번엔 여자친구 사귈 생각 없다며?"

  "...형, 화났어요?"

  "......대답부터 해."

  "왜? 내가 여자친구 사귈 생각 없다고 한 게 거짓말이라서, 서운해요?"

  형의 날선 말투. 형이 화내는 이유.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좋아하는 거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그럼 김다정은 뭐야? 몰라, 그냥 질러. 정말 오랜만에 똑바로 마주한 형준이 형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입만 달싹이며 뭐라 말도 못 하고 침묵하던 형은 별안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갔다. 나는 그런 형을 놓칠세라 곧바로 따라갔다. 예고 없이 닥친 심각해 보이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민희 형이 벙찌는 건 알 바 아니었다.

  사람 없는 구관, 막다른 복도. 얼마 되지 않아 형을 잡을 수 있었다. 내 손을 뿌리친 형은 탈출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도망가는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 앞에 서서 형이 숨을 고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숨소리가 잦아들고 형이 조금 진정된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조금 갑작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솔직하게. 지금 아니면 또 도망갈 것 같으니까.

  "형, 나 지금 좀 이해가 안 되는데. 형은 김다정이라는 애 좋아한다면서요. 근데 왜 날 좋아하는 것처럼 굴어요?"

  "...!"

  "사람 착각하게."

  내 말에 번쩍 고개를 든 형준이 형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날 똑바로 노려보는 눈가가 붉었다. 물기 어린 눈동자가 일렁였다. 꼭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에 잠깐 내가 실수한 건가 싶었다. 하지만 내가 잘못 말한 부분이 어디 있어. 형이 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사실, 형이 김다정이라는 애 좋아한다고 한 것도 사실. 사람 착각하게 나 좋아하는 것처럼 군 건... 내가 느끼기엔 사실인데.

  "...야, 착각은 네가 하게 했지. 네가 먼저 다정했잖아, 나한테."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진짜 짜증나... 쪽팔려... 김다정, 그거 너라고! 네가 자꾸 나한테 다정하게 구니까 나 혼자 그렇게 불렀다, 왜!"

  형준이 형의 눈에 가득 고이던 눈물이 결국 흘러내렸다. 귀로 들어온 말을 머리가 이해하는 동안 반사적으로 눈물을 닦아줬다. 형이 울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혹시라도 울리는 놈한테 가지 말고 백날 웃겨주는 놈한테 가라고, 그리고 그 백날 웃겨주는 놈이 나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울려버렸다. 이건 내가 잘못한 게 맞았다. 

  젖은 눈가와 볼을 쓸어주다가 형의 말을 뒤늦게 깨달았다. 잠깐만, 김다정이... 나라고? 그것까진 이해했는데, 그렇다면..? 어떠한 결론을 향해 달려가느라 복잡해진 머릿속에 잠시 일시 정지를 눌러뒀다.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형이니까 일단 형부터 달래는 게 먼저였다.

  "아니, 울리려고 한 건 아닌데 미안해요. 울지 마요..."

  "...나 달래지 마. 이 와중에도 다정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형 말대로라면, 형이 날 좋아한다는 뜻 같은데."

  당장의 과부하를 막으려던 거지 일시 정지 상태로 오래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시간 끌어봤자 다시 말 꺼내기만 어려워질 뿐 지금이 시작하기 최적의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끝까지 내달린 결론은 완벽했고, 그대로 보고했다. 내가 내린 결론이 맞았는지 달래는 도중 언젠가부터 잡고 있었던 손을 쳐내려는 형을 힘주어 당겼다. 딸려오는 자그만 몸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처럼 품에 딱 들어맞았다. 이 반응 진짜, 진짜로 나 좋아하는 거 맞지? 더 이상 착각 아닌 거잖아.

  "형, 근데 나 남자친구 사귈 생각은 있어요." 

  "뭐..?" 

  "내가 형 좋아해요. 내가 먼저, 2년 동안 좋아했어요."

  "......진짜야?"

  "진짜야."

  내 어깨를 밀어내려던 손에 힘이 빠졌다. 쟁반만해진 눈으로 날 바라보는 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와, 나도 눈 크기로는 어디가서 뒤지지 않는데 형은 못 이기겠네. 얼굴부터 눈코입까지 온통 동글동글한 게 너무 귀여워서 충동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눈물 젖은 뺨에 가볍게 입 맞추자 화들짝 놀란 형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새빨개졌다. 눈이 다 접히도록 웃다가 형의 키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뭐, 뭐야?"

  "억울하면 형도 하던가."

  "...내가 못할 줄 알아?"

  아니, 형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한다고 마음 먹을 줄 몰랐네. 솔직히 아예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이걸 진짜로 해줄 줄이야. 내 볼에 쵹 소리가 나도록 뽀뽀하고 도망간 형준이 형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형 못지 않게 붉어진 얼굴로 실실 나오는 웃음을 주체 못 하고 애꿎은 머리만 쓸어넘겼다. 아, 가을인데 왜 이렇게 더워. 저번에 형준이 형이 그러던데. 요즘 지구온난화로 북극곰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고. 

  괜히 다른 생각을 해봐도 머릿속은 온통 한 사람뿐이라, 그냥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지 않아도 빠르게 쿵쿵 울리는 박동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내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가려봤자 손틈 새로 올라간 입꼬리가 다 보이겠지만 별로 중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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