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텽] 잘생긴 애인이 생기는 방법
※ 캐해는 잘 모르겠고 보고 싶은 걸 씁니다. ※
※※ 본문은 펜슬 내에서만 감상해주세요 🫶 ※※
고대하던 신입생 MT 날. 갓 대학교 입학한 새내기 태영은 잔뜩 들떠있는 상태였다. 입학한지 얼마나 됐다고 자랑이라 할 수 있는 엄청난 친화력으로 웬만한 동기들은 물론이고 일부 선배님들과도 친해졌기 때문에 거리낄 것 없이 기대감만 올랐다. 누구보다 빠르게 버스에 올라탄 태영은 성민에게 한 연락이 읽씹 당한 걸 확인하고 킥킥거렸다. 나는 같이 앉을 친구가 많지만 너는 내가 하나뿐인 친구니까 옆에 앉게 해주겠다고 했으니 이런 반응쯤은 예상했다.
한 번 더 건들어볼까 생각하는 도중 앞자리에 앉은 여자 동기들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대충 잘생기기로 유명한 구정모 선배를 드디어 보게 된다니- 라는 내용이었다. 며칠 전부터 사람들, 특히 여자 동기들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이름을 통계내어 보면 '구정모'라는 이름일 듯 했다. 태영과는 별 상관 없었지만 뭐 얼마나 잘생겼길래 다들 호들갑을 떠는지 궁금하긴 했다. 듣기로는 MT에 참여하는 게 처음이라던데 그래서 더 화제가 됐나 싶기도 하고.
버스가 출발한다는데도 오지 않은 성민에 급하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도 않고 돌아온 건 배은망덕한 한 줄. 나 형준이 형이랑 앞에 탐.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선배 및 동기들의 옆자리 앉아도 되냐는 물음을 기분 나쁘지 않게 잘 거절했는데! 억울한 마음 담아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문자 여러 개 보내봐도 이젠 1마저 사라지지 않았다.
생전 놀러가는 버스 옆자리가 비어본 적이 없는데 엠티 가는 버스 옆자리가 빌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 선배 앉으라고 할 걸. 허망한 마음에 괜히 성민과의 채팅창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데 누군가 태영의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 보니 처음 보는 얼굴. 그럼에도 누구인지 단번에 알 것 같았다. 이 사람이 말로만 듣던 그 구정모 선배구나.
떠들어 대던 동기들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샤프하게 잘 빠진 눈과 그 아래 사람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눈물점. 곧게 뻗은 코와 옆으로 길게 벌어지는 얇은 입술은 누가 봐도 미남이라고 할 만 했다. 누군가 말했던 '이 얼굴을 모르고 지냈던 지난 시간이 아쉬웠다'라는 후기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말도 없이 한참을 뜯어보고 있자 정모의 귀가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사람 귀가 이 정도로 빨개질 수 있는 건가. 신기하네. 우물쭈물하던 정모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자리가 여기밖에 없어서, 옆에 앉아도 될까요."
"아, 네. 앉으세요."
태영은 옆에 뒀던 가방을 무릎 위로 옮겼다. 정모가 가방을 정리하고 안전벨트를 매는 순간에도 태영의 눈은 힐끔힐끔 정모에게 향했다. 진짜 잘생겼네. 예의를 알던 눈짓이 어느 순간 조금 무례하다 느낄만큼 고정됐다. 저도 모르게 정모를 빤히 보고 있던 태영은 정모와 눈이 마주치자 놀라 황급히 눈을 창문 너머로 돌렸다. 평소 하던 것처럼 웃으면서 적극적으로 통성명 하면 되는데 왜 그런 건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귀가 화끈거리는 게 자신도 정모처럼 귀가 토마토 색일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잘생겼어? 짜증나. 확실히 취향까지는 아니어도 한번쯤 사귀어 보고 싶게 생겼네. 사귀었다 헤어져도 흑역사 안 될 얼굴이야. 얼빠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정모는 오직 첫인상, 즉 얼굴만으로 태영의 호감도를 높였다. 태영은 혼자만의 내적 호감일 뿐이지만 마음 속으로 구정모 선배의 위치를 정모 선배로 올렸다. 자신의 문자를 씹은 성민의 일은 이미 잊은지 오래인 태영이었다.
태영의 정모를 향한 호감도 상승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엠티 내내 무심한 듯 다정하게 자신을 챙겨주는 정모 덕이었다. 어떤 누구들처럼 여자 애들만 티나게 챙기는 게 아니라 남자인 저까지 챙겨주는 것에 사소한 감동을 받은 태영이었다. 사실 많은 남자 애들 중 저한테만 그런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왜인지 신입생 삼분의 일은 될 만큼 많이 온 선배들 탓에 어이, 거기, 신입생 등으로 불리는 게 익숙해진 태영은 이름은 또 언제 안 건지 태영아- 하고 저를 부르는 정모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느껴졌다.
잘생기고 키도 큰데 다정하기까지. 어쩌면... 나 이 선배랑 사귀고 싶을 지도. 자신의 성향을 깨달은 건 일년 정도 됐지만, 금사빠라는 ENFP가 보기에도 마음이 갈만한 남자는 세 손가락도 안 됐기에 잘생기기로 유명한 사람이래도 별 기대 없던 참이었다. 그 생각이 무색하게 정모에게 인간적 이상의 호감을 갖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짝사랑만 잠깐 해봤지 고백이나 연애를 해본 적은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생각에 잠긴 채 아무 생각 없이 처음 보는 선배가 따라주는 액체를 원샷하자 소주 특유의 쓴 맛이 입안을 채웠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잔뜩 찡그린 태영은 서둘러 안주를 주워먹었다. 술이란 게 마셔보니 생각보다 맛도 없고, 새해가 되자마자 확인해본 결과 실망스럽게도 주량이 세지는 않아서 안주가 필수였다. 사실 술자리에 가도 부어라 마셔라 보다는 특유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기려고 가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엠티를 왔는데 술이 빠질 수야 있나. 아슬아슬 주량의 경계선까지 받아마신 태영은 간신히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쌓아온 인맥들이 독이 되어 쏟아지는 권유들을 몇 차례고 자연스럽게 거절했지만 운 나쁘게 지독한 선배놈한테 걸린 탓이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주당인 형준이 형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미 만취해서 무슨 주사를 부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누가 봐도 취한 티가 났지만 객관적인 자신의 모습을 알 리 없는 태영은 취한 걸 티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미 잔뜩 풀린 눈 억지로 치켜뜨고 안주를 깨작였다. 얘... 왜 자꾸 도망가지...
옆에 앉은 여자 동기들과 선배들이 나누는 얘기가 내내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려오다 구정모 소리가 귀에 박혔다. 정모 선배 얘긴가 싶어 귀가 쫑긋해진 태영은 관심 있는 티는 안 내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여자 동기들이 정모 선배 잘생겼다고 꺅꺅거리자 선배가 하는 말이란 너네 얼굴만 보고 들이댔다가 큰코 다친다는 말이었다.
무슨 소리냐 되묻는 말에 돌아오는 말은 이랬다. 일단 철벽이 굉장히 심하고, 그걸 뚫은 사람이 군대 포함 3년 동안 딱 2명 있는데 둘 다 얼마 못 견디고 헤어졌대. 그럼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뭘 못 견뎠는데요? 구정모 선배의 인기? 철벽? 군대? 들려오는 대답은 믿기 어려웠다. 아니. 집착.
집착이라니. 상대가 집착하면 집착했지 그런 거 전혀 안 하게 생겼는데. 여자랑 사귀다 못해 집착까지 하는 걸 보니 고백도 안 했는데 차인 거 같아 좀 슬프지만 집착하는 사람은 태영도 사절이었다. 태영은 유독 집착하고 구속하는 걸 싫어했다. 어느 정도의 질투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선을 넘어서 끝이 좋은 걸 본 적이 없었다. 마이 라이프 이즈 마인. 그게 삶의 모토였다. 그렇게 태영은 이제 막 펼쳐진 마음을 고이 접어 날렸다.
아직 마음이 깊어진 게 아닌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얼굴을 떠올리면 좀 아깝긴 했다. 그래도, 집착은 진짜 아니지. 그리고 그 생각 하느라 무지성으로 한 잔 더 받아 마신 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마지막 잔을 넘기면서 제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정모 선배와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접어 날렸던 마음, 술김에 그걸 부메랑 모양으로 접어 날렸나......
***
정신이 든 것은 늦은 점심이었다. 태영이 퉁퉁 부은 눈을 억지로 뜨고 주변을 보니 방에 혼자 누워있었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흐... 신음 같은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지난 밤의 기억은 누가 잘라낸 듯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무슨 일 친 건 아니겠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머리와 배를 부여잡았다. 잔뜩 구겨진 얼굴이 펴질 줄 몰랐다. 그 망할 선배놈 탓에 과음한 태영의 안색이 창백했다.
숙취로 괴로워하는 도중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무언가 담긴 컵을 들고 있는 정모였다. 태영은 끙끙 앓던 걸 멈추고 어색하게 인사한 뒤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 얼굴은 엉망인데 왜 저 선배는 술 마신 다음날도 저렇게 잘생긴 거지. 부은 얼굴이 창피해 고개를 못 드는 태영의 속도 모르고 정모는 가까이 다가와 들고 있던 컵을 건넸다. 내용물은 꿀물이었다.
"일어났어? 속은 어때. 많이 안 좋아?"
"아... 네, 감사합니다..."
속은 말도 못 하게 처참했지만 어제 처음 본 데다 내적 호감만 가득할 뿐 그다지 친하지 않은 선배에게 투정부릴 수는 없어 그냥 얼버무렸다. 옆자리에 앉은 정모가 태영이 꿀물 마시는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약간의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물만 잘못 마셔도 체하는데 꿀물이라고 체하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태영은 정모가 기껏 타 준 꿀물을 잘못 삼킬 것 같아 애써 시선을 무시했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적당한 온도의 꿀물에 조금 살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쳤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여전히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정모의 눈에서 방금 마신 꿀물이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처음 본 후배를 성 떼고 이름만 불러주면서 챙겨줄 때부터 다정한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왠지 어제보다 더한 것 같았다. 아니, 그러고보니 철벽도 그런 철벽이 없다면서요. 근데 왜 이러시지. 그나저나 이 선배가 나한테 말을 놨었나..?
"완전 부었네."
딴 생각 하는 사이 정모의 손이 불쑥 다가와 태영의 부은 눈가를 톡톡 건들였다. 반사적으로 찡그렸다가 그 손길에 놀란 태영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런 태영을 본 정모는 어, 다시 커졌다 하고 웃었다. 무표정일 땐 고양이처럼 차갑고 도도해보이던 얼굴이 웃으니까 강아지 같았다. 역시 잘생겼... 아니 이게 아니라,
"아, 아 선배, 네. 좀 많이 부었죠..?"
"선배... 너 어제, 아니 오늘 새벽 기억 안 나?"
"네...?"
선배라는 말을 곱씹더니 청천벽력 같은 질문을 하는 정모에 태영의 사고회로가 순간 정지됐다. 술 마시고 난 다음날 듣기 제일 두려운 말 1위. 너 기억 안 나? 부은 눈이 부은 거 맞나 싶게 잔뜩 커져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 모습이 제법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정모가 싱긋 웃었다.
"우리 사귀기로 했잖아, 태영아. 네가 나 잘생겨서 좋다며."
"네...?"
"말도 놓기로 했는데. 어제는 정모 형이라고 했으면서."
...제가요? 진짜요?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집착한다는 소리 듣고 마음 접었는데. 지난 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가로세로 1mm의 한 조각도 빠짐없이 날렸어야 했는데 어딘가 아쉬운 감정의 마음조각이 남아있었나. 취해서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기억에 없는 과오로 인해 뒤통수에 부메랑 아주 거하게 처맞은 태영이 황망하게 눈을 깜박였다.
MT 같은 거 인생에서 갈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곧 타야 할 버스 앞에 선 정모는 승차도 전에 집에 가고 싶었다. 정모는 사람 많은 곳이 싫어서 자신이 신입생일 때에도 엠티를 간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 후로도 100%의 엠티 불참률을 자랑했는데, 어쩌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지.
모든 것이 제 불찰이었다. 조금만 더 현명하게 굴었다면 학회장에게 빚 따윈 지지 않았을 텐데. 차라리 그 빚이 금전 거래였으면 진작에 갚고도 남았을 터였다. 애초에 빚을 질 일이 없었을 거고. 답지 않게 저지른 실수에 칠칠치 못하게 도움을 받은 대가가 이것이었다. 엠티 참여하기.
울며 겨자먹기로 가겠다고 대답하자 한 단톡방에 초대되었는데, 정모가 들어오고 난 후로 몇 십명은 더 들어온 것 같았다. 임기 중 최대 참석률이라고 신난 학회장의 말에 벌써 기가 빨렸다. 왜 하필이면 내가 갈 때. 정모는 그게 자신이 엠티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퍼졌기 때문이라는 건 몰랐다.
발바닥에 본드를 붙인 듯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버스에 올라탔다. 정모가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모든 시선이 정모에게 집중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맨 처음에 탈 걸. 설상가상으로 앞자리가 꽉 차 있어 그 무수한 시선들을 견디고 안으로 들어가야했다.
거의 끝자락에 가서야 빈 자리를 발견한 정모가 동앗줄 부여잡듯 급하게 자리 앞에 섰다. 약 두 시간 동안 옆자리가 될 남자가 핸드폰을 보고 있다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큰 눈과 마주친 순간 정모는 방금 전까지도 속으로 욕하던 학회장을 찬양했다. 아, 엠티 오기 잘 했다. 소문난 파워내향형 집돌이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하다니. 아무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이 집요했다. 투명하고 예쁜 눈동자가 제 얼굴을 훑는 것이 느껴지자 정모의 귀가 의지와 상관없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몸을 작게 달싹인 정모가 정신을 다잡고 말을 걸었다.
"그, 자리가 여기밖에 없어서, 옆에 앉아도 될까요."
"아, 네. 앉으세요."
자리에 앉아 짐을 정리하고 안전벨트를 매는 와중에도 자꾸만 와닿는 시선에 참지 못한 정모가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 피하는 모습이, 그래, 꼭 못된 짓 하다 들킨 애쉬-가끔 밥 주는 길고양이- 같았다. 이 고양이 닮은 애를 꼬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든 옆자리 남자를 꼬실 생각에 머리 굴리다 보니 어느새 도착이었다. 엠티 장소에 도착해서도 다가오는 여자 애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정모의 눈에는 짐을 옮기는 태영만 보였다. 처음 뵙겠다며 자기소개를 하는 후배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어깨를 살짝 두드려 깨우자 투정부리듯 웅얼거리던 태영의 모습만 되새겼다. 잠기운 완연한 모습에 조금 욕심내어 학회장 찬스로 알아낸 이름을 작게 부르자 졸음이 내려앉은 눈꺼풀을 반쯤 뜬 채 동그란 발음 가득한 말투로 넹? 하고 대답하던 태영을 떠올리자 웃어버렸다. 역시, 오길 잘 했다.
정모는 일부러 보려고 보는 것도, 챙기려고 챙기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태영을 특별취급 하게 되는 자신을 깨달았다. 이러다 누군가 차별하는 걸 눈치챌까 싶어 뒤늦게나마 다른 남자 애들 몇 명도 챙겨주긴 했지만 진심이 담기지 않은 행동은 오래 갈 수 없었다. 조금 챙겨주는 척 하다가 태영이 안 보고 있는 틈을 타 은근슬쩍 자리를 피했다.
이어지는 술자리에 사람 가득한 대형버스를 타고 오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친 몸은 휴식을 원했다. 주량이 센 편이라 취한 건 아니지만 광란의 파티가 이어지는 분위기에 정모는 침대가 간절했다. 집에는 가지 못 하니 침대라도. 하지만 태영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잠깐 화장실이라도 갔다 올까. 나름 즐거워 보이는 태영을 슬쩍 본 정모가 화장실로 향했다. 미적거리며 손을 씻고 거울을 봤다. 이 건물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흐트러지지 않은 단정한 모습을 한 사람이 거울 속에 있었다. 정리할 것도 없는 머리 괜히 정리해보며 시간을 끌다가 슬슬 문을 열고 나왔다.
그 시간이 얼마나 됐다고 태영은 이미 얼굴은 물론이고 목까지 빨개진 채 취해있었다. 좀 더 빨리 나올걸, 아니, 화장실 가지 말고 계속 보고 있을걸 하는 후회와 동시에 누가 저렇게 먹인 건지 화가 나려는 찰나 비틀대며 일어선 태영이 현관으로 향했다. 몇 번이나 헛발질을 하면서도 기어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슬리퍼를 대충 발에 끼워넣고 나가는 뒷모습을 얼른 따라나섰다. 밖은 시끌벅적한 펜션과 다르게 한적하고 조용했다. 비틀거리면서 걷는 태영이 걱정되는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는데 아니나다를까 넘어질 뻔한 태영의 팔을 아슬하게 잡아냈다.
"괜찮아요?"
"어.. 정모 선배..? 형 너무 잘생겼어요.. 형 얼굴 좋아.."
눈앞이 아른거리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던 태영이 정모를 알아보고 헤실헤실 웃었다. 그 웃음에 타격 받은 심장 쉴 틈도 없이 곧바로 태영의 고백이 이어졌다. 정모가 순식간에 더블킬을 맞은 심장 위로 손을 올렸다. 술을 마신 사람의 심장이 으레 그렇듯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술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두근대며 존재를 알리는 걸 무시하고 태영을 가까이 있는 벤치에 앉혔다.
지금까지 몰래 훔쳐보기나 했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사적인 대화는 못 나눠본 사이였다. 지극히 사적인 첫 대화가 잘생겼다 얼굴 좋다는 말이라니. 하지만 당황한 것도 잠시뿐이었다. 태영이 이렇게 나오면 정모에게는 오히려 좋았다. 이런 상황은 생각지 못해서 벙쪄있다가 웃음이 터졌다. 정모가 감추지 못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고 물어봤다.
"내 얼굴 좋아요?"
"네... 그래서 사귀고 싶었는데... 형 집착한다면서요..? 난 집착이 너무 싫어..."
불분명한 발음과 늘어지는 말투가 꼴보기 싫기는커녕 귀엽기만 했다. 꼬박꼬박 부르던 선배라는 호칭은 펜션에 두고 왔는지 형이라고 부르는 게 듣기 좋았다. 얼씨구, 반말까지? 한숨과 함께 고개 푹 숙이는 게 어지간히 싫어보였다.
태영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린 정모가 중얼거렸다. 나랑 사귀고 싶었어? 태영은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정모의 어깨를 밀어내려했다. 닿지 않고 허우적거리는 팔을 잡은 정모가 그대로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태영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자신이 해놓고도 너무 가까워서 살짝 놀랐는데 태영은 놀라지도 않고 그저 눈앞의 얼굴을 더 잘 보려는 듯 풀린 눈을 또렷하게 뜨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 덕에 눈과 덩달아 살짝 풀려있던 쌍커풀이 평소보다 더 진해졌다. 정모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왕자병 같을 수도 있지만, 얘도 내 얼굴만 좋아하는 건가? 음... 다른 사람이라면 싫었을 텐데 태영은 그 이유라서 다행이기만 했다. 그 좋아하는 얼굴로 꼬셔야지.
"내가 좋아?"
"얼굴.. 좋아."
"나도 너 좋아해. 사귈래?"
"집착 싫어.."
취한 와중에도 줏대있게 주관이 뚜렷한 태영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 떨궜다. 아, 어디서 들은 거야... 어떡하지, 집착 안 할 자신 없는데. 감겨있어도 예쁜 눈, 볼터치 한 것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볼, 끝이 동그란 코와 말랑해보이는 붉은 입술까지. 태영의 얼굴을 한군데도 빠짐없이 훑어보던 정모의 목울대가 저도 모르게 꿀렁였다. 살짝 고민하던 정모가 살풋 웃으며 태영의 턱을 아프지 않게 잡아 올렸다. 술기운이 더 올랐는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린 태영의 초점 흐린 눈동자에 시선을 맞춘 정모가 입을 열었다.
"집착... 참아볼게."
"......"
"내 얼굴 좋다며. 나랑 사귀면 네 거야."
"......그럼 이제 이거 내 거."
눈동자를 느릿하게 굴리며 한참을 대답없이 정모의 얼굴만 뜯어보던 태영이 냅다 그 얼굴을 품에 안아버렸다. 나 이제 네 거야? 바라던 바야. 정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래. 기억 못 해도 못 물러?"
머리에 기대어진 태영의 얼굴이 부비듯 끄덕이더니 차츰 움직임이 멎고,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태영의 품에서 고개를 든 정모가 잠든 태영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공주님 안기는... 무리라는 판단에 등에 업고서 나온 곳과 다른 펜션으로 들어간 정모는 태영을 제가 배정받은 6인실 침대에 눕혔다. 하나뿐인 침대는 성인 남성 두 명이 누워도 될 법한 크기였지만 태영과 동침하는 것은 너무 이른 것 같아 정모가 바닥에 여분의 이부자리를 깔았다.
옆 펜션에선 아직 술자리가 한창이라 방에는 누군가 찾아올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태영이 편안히 잘 수 있도록 옷차림을 편하게 해주고 서둘러 씻은 정모는 도착하자마자 찾아뒀던 이 방의 유일한 비상 열쇠를 가지고 들어왔다. 다음으로 정모가 한 일은 아무도 이 방에 들어오지 못 하게 문을 잠가놓는 것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이 새벽까지 달리고 굳이 방에 돌아와 잘 확률은 희박했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정모의 별명은 J모였다. 여러가지 상황에 대비한 계획이 철저했다.
<잘생긴 애인이 생기는 방법>
1. 잘생긴 사람이 첫눈에 반하게 생긴다.
2. 잘생긴 사람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술 마시고 필름 끊긴다.
3. 자고 일어난다.
4. 🌟 거짓말 같이 잘생긴 애인 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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