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탕] 친구 (0명) 上
※ 캐해는 잘 모르겠고 보고 싶은 걸 씁니다. ※
※※ 본문은 펜슬 내에서만 감상해주세요 🫶 ※※
약 3년 전, 나는 내 유일한 친구를 잃었다. 그냥 같은 반 친구라서 친구인 거 말고, 등교 전부터 하교 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는 진짜 친한 소꿉친구 말이다. 유치원 때부터 시작된 인연은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 인연에 약간의 변화가 찾아온 것은 앞서 말했듯 3년 전,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나는 그 친구, 김태영을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그렇잖아도 친구라고는 김태영밖에 없는데 그 하나뿐인 친구마저 친구로 보지 못하게 됐다. 나는 졸지에 친구 하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그렇게 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왜 하필 김태영이야 하고 누구한테인지 모를 원망도 하긴 했지만 실은 조금 짐작하고 있긴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예를 들면 김태영이 빼빼로데이에 우정 빼빼로라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크런키랑 누드 줬을 때? 책상 서랍이고 사물함이고 미어터질 정도로 받은 걸 적선하듯 나눠준 게 아니라 날 주려고 일부러 사온 것에 한 번, 빼빼로를 주면서 일부러 네가 좋아하는 거 사왔다는 생색을 냈으니 내가 평소에 무슨 빼빼로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는 거에 또 한 번.
사실 친구 사이에도 가능한 이런 일에 반한 건 아니고, 그냥 어느 순간부터 내가 김태영만 보고 있고 김태영을 자꾸 신경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말에 동성 친구 만나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미고 가는 남중딩? 내가 알기로 그런 남자애들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김태영과 나는 외양부터 성격까지 죄다 정반대여서, 그런만큼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나와 너무 다른 모습에 끌렸던 거 같기도 하다. 왜 그런 것도 있지 않은가. 반대가 끌리는 이유. 활발하고 밝고 운동장에서 뛰어놀기 좋아하는 김태영과 조용하고 침착하고 가만히 앉아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나는 그렇게 싸울거면 절교하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붙어다녔다.
싸우는 이유는 주로 더럽게 안 맞는 성격 탓이 컸고, 가끔은 김태영이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라며 징징거려서라거나 내가 김태영이 연달아 건 전화 아홉 통을 죄다 씹어서인 것도 있었다. 솔직히 관심사가 너무 달라서 공감을 해주기가 어려웠고 쟤가 왜 저럴까 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붙어다니는 이유는 글쎄, 현실적으로 말해보면 너무 어렸을 때부터 함께여서 옆에 없는 건 상상이 안 가서일까.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조금 서운한 이유이지만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을 것 같았다.
이걸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김태영은 내가 고민이 있을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늘 먼저 와서 말 걸어주고 산책하러 가자고 하며 전교생이 친구인 것처럼 굴면서도 꼭 나를 우선으로 챙겼고, 나도 솔직하지 못해서 김태영이 툭툭 건드는 걸 늘상 무시했지만 실은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서 아꼈기 때문이었으려나. 내가 김태영 욕은 해도 누가 김태영 욕하는 건 못 참겠더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을 깨닫기 전에도 생각보다 내가 김태영을 되게 좋아한 것 같았다.
나한테 없는 걸 김태영은 가지고 있고, 내가 못 하는 걸 김태영은 했다. 김태영은 자신감만으로 세계 정복도 가능해 보였고 잘하든 못하든 승부욕을 불태우며 뭐든 도전했다. 그 모습이 무모해보이면서도 가끔은 부럽기도 한 거 같다. 언제는 배드민턴에 빠져서 새벽 6시부터 학교 운동장에서 배드민턴을 하고는 수업 시간 내내 조느라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고 대단하다 싶었다. 다른 애들 다 지나다니는 학교 복도에서 틱톡 찍기? 대화 도중 그게 뭔데 싶은 밈으로 치고 들어오기? 나한테 시키는 건 질색이지만 텐션 높고 밝은 모습은 좋았다. 이렇게나 다른데 왜 좋아하게 된 건지 나도 의문이었다.
김태영에게 갖게 된 낯선 감정 꼭꼭 잘도 감추고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반이 갈린 건 좀 아쉬웠지만 우리는 여전히 친했고, 자주 투닥거리긴 했지만 김태영 피셜 '제일 친한 친구'의 위치에 있는 건 나였다. 말했듯 김태영은 나와 다르게 친구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내가 먼저였다. 내가 문제집 사러 서점 같이 가자고 했더니 그 많은 친구들의 피시방 가자는 꼬심을 다 물렸으니까. 서점보다는 피시방이 훨씬 재미있을 텐데도 말이다. 나는 그걸로 만족했다. 고백할 생각 같은 건 없었고, 그저 김태영과 친구로서 가장 가까운 그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보다 더 가까운 자리가 될 가능성도 있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가장 원하지만 함부로 바라보지도 못한 자리.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는 너무도 쉽게 침범했고 김태영은 너무도 쉽게 내주었다. 지금까지 김태영은 열 손가락 조금 못 되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첫 여자친구를 소개시켜 줬을 때는 내가 김태영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꺼내는 헤어졌다는 말과 새로운 사람 만난다는 소식을 듣는 게 몇 번 반복되면서 이제 그런 건 아무렇지 않아졌다. 그런 내가 벌어진 입도 못 다물만큼 충격을 받은 건 김태영의 새 애인이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 날 그 시간 학교 뒷편에 간 것이 잘못이었나. 그냥 얌전히 도서관이나 갈 걸.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까. 딱히 김태영을 찾기 위해 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시끄러운 학교 안을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쉬고 싶었을 뿐. 교문 밖을 나설 것까지야 없고 그럴 깡은 있지만 그럴 생각은 없어서 그나마 제일 조용해 보이는 건물 뒷편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어디를 가도 인적 드문 곳을 찾기는 힘들어서 책을 읽을 건 아니지만 차라리 도서관이 나으려나 하는 생각을 하던 참에 드디어 사람 없는 곳을 찾아냈다. 아니, 그런가 싶었는데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내 눈에 두 사람이 들어왔다. 등을 돌리고 있어도 알아볼 수 있는 익숙한 뒷모습, 김태영이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발견한 김태영은 한 귀엽장한 남자애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진 몰라도 느껴지는 분위기가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애가 손을 모으고 우물쭈물하는 게 그럴 리는 없지만 설마 김태영이 삥을 뜯는 건가 싶었다. 소꿉친구의 이중생활 뭐 이런 거. 아니면 김태영이 좀 세게 생겨서 혼자 겁 먹었나. 내가 끼어들어서 말려야 하는 건가 하다 낯선 남자애가 하는 예상치 못한 말에 나도 모르게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태영아, 갑자기 모르는 애가 이런 말 하면 기분 나쁠 거 아는데..."
"어, 나 너 아는데. 4반 박재현 아닌가?"
"어... 아는구나, 그... 그러니까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뭔데?"
"...네가 좋은 거 같아! 나.. 너 좋아해. 우리 사귈래?"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가 들킬까 얼른 입을 막았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김태영이 다른 남자애에게 고백을 받다니. 나라고 고백하면 어떨까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상상 속 고백을 들은 김태영의 표정은 늘 무서울 정도로 굳어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현실일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두려움을 깨고 용기있게 고백한 남자애가 나타난 것이다.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김태영을 짝사랑하는 입장에서 김태영의 반응이 너무 두렵고도 궁금했다. 김태영은 같은 남자가 고백했는데 뭐라고 말할까. 더럽다고 욕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김태영은 적잖이 당황했는지 어? 하며 되묻고만 있었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남자애의 앞에서 한참 안절부절 하던 김태영은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 그래. 근데 나 남자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아, 차였다. 엄청 용기 낸 걸 텐데. 저 고백을 받아줬으면 나한테 안 좋은 일이라는 건 알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라 조금 안타까웠다. 그래도 김태영의 대답이 생각해왔던만큼 최악은 아니었고, 남자애의 고백도 안 받아들였으니 나로서는 좋은 수확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들은 남자애가 눈물을 터뜨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남자애 눈에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는데.. 그냥 니가 좋아서.. 미안해."
"야, 야 울지 마..."
훌쩍이며 연신 눈가를 닦는 남자애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손을 올렸다 내렸다 부산스럽게 굴던 김태영이 한숨과 함께 자신의 머리를 헝클였다. 원래 같은 성별이 고백해와도 김태영처럼 저렇게 착하게 반응해? 얼굴 팍 찌푸리고 욕하는 게 아니라? 늘 최악만 생각해와서 이럴 거면 내가 먼저 고백할 걸 그랬나 하는 미친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래도 괜찮으면 사귈래?"
그리고 이어진 김태영의 말에 내 심장은 쿵 떨어지다 못해 저 지구 내핵까지 추락했다. 그리고 넘어질 각오를 하고 힘풀린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전속력으로 도망. 다음으로 이어질 말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아도 뻔하지 않은가. 어디서 나온 말이더라,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그 말이 딱 맞았다. 나는 김태영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두려워서 지금까지 몇 년을 말도 못 하고 혼자 짝사랑 했는데. 저렇게 단순하게 남자도 되는 거였나. 아니면 귀여운 게 취향이어서 남자지만 귀여우니까 괜찮을지도 한 건가. 나는 예쁜 쪽인데. 쌍방도 아니면서 이게 맞는 감정인가 싶은데 엄청난 배신감이 느껴졌다.
근데 쟤는 친분도 원래 없어 보이던데 나는 절친이잖아. 관계의 변화에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거잖아. 생각해보니 김태영이 남자도 된다고 했어도 나는 고백 같은 거 못 했을 거 같아서 자조적 웃음이 샜다. 얼굴에 열이 확 올라서 화끈거렸다. 짜증나게 눈물샘이 말을 안 들었다. 겨우 이깟 일 때문에, 김태영 때문에 울고 싶지 않아서 괜한 앞머리만 연신 쓸어올렸다. 울어서 빨개진 눈 같은 거 보여주고 싶지 않단 말이야. 내 애인도 아니면서 보면 또 호들갑 떨게 뻔하니까. 그게 더 울고 싶게 만드는 줄도 모르고. 크게 한숨 내쉰 뒤 결국 흘러내린 한줄기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짜증과 한심함, 원망 따위의 부정적 감정들이 솟아오르려는 것도 눈물과 함께 꾹 눌러냈다. 그렇게 잘 참아냈는데.
김태영과 함께하는 하교길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별다른 일이 있지 않는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김태영의 친구가 낀 적도 있긴 하지만 김태영은 새로운 사람을 불편해 하는 날 알아 늘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낄끼빠빠 하라며 처리해줬었다. 그런데 눈치도 빠른 녀석이, 하굣길에 그 남자애를 데려온 거다. 누구냐고? 누구긴 누구야. 오늘부터 김태영과 1일인 그 남자애. 나는 멋쩍게 웃는 김태영 앞에 멍하니 서서 멀뚱멀뚱 이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성민아, 그.. 얘가 같이 하교하고 싶다는데 괜찮아? 내 친구인데 너랑 친해지고 싶대서..."
친구는 개뿔, 친해지고 싶긴 개뿔.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나한테는 관심도 없어 보이는데. 내 뇌피셜이지만 남친의 친구를 소개 받아 부끄러운 듯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남자애의 얼굴을 보자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솔직한 게 장점이라 거짓말도 잘 못하는 김태영이 내 눈치를 봤다. 내가 싫어하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본인도 아는 모양이었다. 그런 김태영 면전에다 대고 나쁜 말은 못 하겠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표정이 펴진 게 내가 순순히 허락하니 마음이 놓인 모양이었다. 그럴 거면 눈치 볼 일을 안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괜히 밖으론 하지도 못할 말 속으로 툴툴거렸다. 사실 할 수는 있지만 그러면 진짜 분위기 사망할 거 같아서 착한 내가 참았다.
하교 내내 김태영이 그 애를 챙기는 걸 볼 때마다 얘는 연애할 때 이랬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지난 상대들이 부럽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했다. 마음이 있든 없든 사귀는 사람한테 잘 하는 거 알고는 있었는데 직접 보는 건 또 달랐다. 아무리 늘 붙어다니는 소꿉친구래도 내가 데이트까지 따라다닐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나야 당연히 보려고 하지 않았고, 김태영도 유난히 연애하는 걸 자랑하거나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김태영은 티를 내기보다는 티가 나는 사람이라, 같이 오락실에서 정신없이 놀다가도 문득 보면 누군가한테 연락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봐서 눈치로 짐작한 적은 있긴 했지만.
그래서 이렇게 대놓고 셋이 걷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나, 내가 좋아하는 김태영,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김태영의 애인 이렇게 셋이 걷는 거. 남자애라서 내가 둘이 무슨 사이인지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근데 거의 달래듯 사귀게 된 거 아니었어? 왜 이렇게 잘 해줘? 남자는 처음일 거 아니야. 김태영이 저렇게 거부감 없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결론이 안 섰다. 오히려 내가 너무 부정적이고 꽉 막힌 건가.
지금도 내가 불청객이 된 느낌이 들어 도저히 이 사이에 있고 싶지 않았다. 엄청난 애정행각을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내가 죽도록 불편했다. 입술 꾹 깨물어가며 애써 참아낸 눈물이 이제는 진짜로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았다. 그건 진짜 안 돼. 진짜 미친 짓이다.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춰섰다. 그리고 그 남자애가 하는 말에 대답하느라 나를 두고 앞서간 김태영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야, 나 놓고 온 거 생각나서, 먼저 가!
김태영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돌아보기도 전에 전속력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그 와중에 누가 볼까봐 학교 운동장 구석진 곳에 도착해서야 눈물을 터뜨렸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게 우는 것밖에 없는 내가 멍청이 같이 느껴졌다.
진짜 이렇게 후회할 줄 알았으면 고백이라도 해볼걸. 쟤가 저렇게 열려있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아니다, 아니야. 그럼 내 처지가 그 남자애와 같아질 테니까.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귀어주는 희망고문 말이다. 결국 나만 괴로워지고 관계도 파탄날. 지금 내 상황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김태영이 그 남자애한테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 그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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