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K

[탱송] 김다정 上

※ 캐해는 잘 모르겠고 보고 싶은 걸 씁니다. ※

※※ 본문은 펜슬 내에서만 감상해주세요 🫶 ※※

  나에겐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흑역사가 있다. 나는 내가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했다. 그 빠른 눈치로 깨달은 것은 무엇이냐, 바로 1살, 아니 2개월 어린 친한 동생 김태영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봐온 김태영은 누군가를 좋아하면 자신의 마음을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불도저처럼 들이대 상대의 마음을 쟁취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김태영은 마음을 감추지 않는 게 아니라 감추지 못 하는 거였고 김태영의 마음은 말만 안 할뿐 모든 비언어적 표현으로 드러났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저 모르는 척 해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김태영은 친한 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내가 객관적으로 귀엽게 생기긴 했지만 인기도 많은 애가 세상의 반인 여자들 놔두고 왜 남자인 나를? 하는 도끼병 같은 생각도 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쪽팔리는 흑역사가 될 줄도 모르고 나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자꾸 신경쓰게 됐다. 김태영의 입으로 직접 들은 것도 아닌데 아주 단단히도 믿고 있었다. 김태영은 나보다 어린 주제에 형인 나를 은근히 잘 챙겨줘서 더 그랬다. 

  그런데, 그 믿음에 아주 약간의 금이 갔다. 신경 쓸수록 몰랐던 김태영이 더 잘 보였다. 김태영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걸 보다 보면 나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태생이 다정한 애 같아서 헷갈리기 시작한 거다. 문을 잡아주거나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대신 내려주는 기본 매너는 물론이고 얼굴에 붙은 무언가를 손수 떼주기도 하고, 젓가락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본인 몫으로 온 나무젓가락을 주기도 하고, 사람 구별 없이 무엇을 좋아한다 말했던 사소한 것들을 기억했다. 쉬워 보이지만 다정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들.

  김태영이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정한 사람이라면? 그치만 유독 나한테 유별난 건 맞는데.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 받았단 말이다. 왜 형준이만 편애하냐고. 너보다 형을 뭐 그렇게 귀여워 하냐고. 김태영은 누구와 있을 때도 잘 웃었지만 특히 나를 바라보며 웃을 때 그 눈빛은 햇살 조각이 담겼다고 착각할 만큼 따뜻했다. 사실 유아들 보는 펭귄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여우 캐릭터 눈처럼 잔뜩 접혀서 눈빛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 정도로 다정하게, 좋아 죽겠다는 듯이 날 바라 봤다는 뜻이다. 

  그리고 친구도 많은 애가 집에 데려온 첫 친구가-아니라 한 살 형이지만- 나라고 했고... 하나밖에 없는 돈가스 도시락 내가 먹고 싶어하니까 양보해주고... 누가 입 댄 음료는 목이 말라도 안 마시는 앤데, 목구멍 사막화 될 지경이면 입에 닿지도 않을 음료 주둥이 빡빡 닦아서 먹는 앤데 내가 입 댄 건 아무렇지 않게 마시고... 내가 가는 척하니까 장난인 거 알면서도 한치의 망설임 없이 붙잡고...... 등등등. 

  그러니까 만약 김태영이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더라도 다정함에 속수무책인 나 같은 사람은, 애초에 김태영이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답시고 그 애한테 시선을 줬을 때부터, 김태영의 다정을 깨달아버린 순간부터 게임 오버 되어버렸다. #최종_진짜최종_진짜최최종적으로 무슨 말이냐 하면, 김태영이 날 좋아하는 것 같아서 지켜보다가 되려 내가 김태영을 좋아하게 됐다는 말이다. 심지어 김태영이 날 좋아하는지는 이제 확신보다 혼란이 더 큰데.

김다정

w. Dehlia

  보충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총알처럼 튀어나가던 내 손목이 그보다 더 빠른 빛의 속도로 잡혔다. 어지간히도 급했는지 꽉 잡힌 손목이 아팠다. 반사적으로 아픈 소리를 내자 바로 힘이 풀리는 것에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다시 튀려고 했으나 이번엔 아프지 않게 허리가 잡혔다. 아니, 잡혔다기보단 백허그로 안겼다는 말이 더 맞았다. 미친 건가.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애초에 이 시간에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학원 안 갔어? 

  내 허리에 둘러져 있는 이 팔의 주인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예상이 잘 가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햇빛의 사랑을 잔뜩 받은 구릿빛 피부, 적당한 운동으로 다져진 너무 마르지도 너무 두껍지도 않은 팔뚝, 새로 샀다는 바디 스프레이의 상큼한 사과향과 은은하게 남는 장미향. 누가 봐도 김태영이었다. 턱 막힌 숨 조심스레 내쉬다가 죄 없는 입술만 깨물었다.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는 별 것도 아닌 말에 심장이 뛰었다. 귀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아서 조금 소름이 돋았다. 어떡해. 나 얘 진짜 좋아하나 봐... 이 와중에 자세가 마음에 걸렸다. 아, 제발. 심장 미친듯이 뛰는 거 들키면 어떡하지. 

  김태영이 이토록 날 다급히 붙잡는 이유는 뻔했다. 내가 김태영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이후로 김태영을 계속 피해다녔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는 쪽팔려서 그런 것도 있고, 낯설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김태영이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해놓고 어이없게도 내가 좋아하게 된 게 쪽팔려서. 또 내 눈에 비춰지는 김태영의 모든 모습들이 온통 좋아하는 이유로 보이는 게 낯설어서. 

   마음을 자각한 순간 김태영을 전과 같이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딱 목마를 때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 아이스티 사와서 좋고, 내가 봐도 바보 같이 짤뚱하게 잘린 앞머리 예쁘다고 해줘서 좋고, 새 옷 입었다고 나한테 사진 찍어달라고 해서 좋고, 작은 실수로 놀림 받을 때 같이 놀리다가도 결국은 달래줘서 좋고, 나한테 같이 틱톡 찍자고 해줘서 좋고. 그냥 김태영의 모든 게 내가 김태영을 좋아하는 이유가 됐다. 답도 없이 좋아하게 되어버린 거다. 그 감정이 너무 낯설었다.

  연예인에게 입덕할 때도 부정기가 있듯, 나한테도 김태영을 좋아하는 것에 대한 부정기가 왔다. 말이 부정기지, 그냥 김태영을 너무 의식해서 몸이 제멋대로 뚝딱이는 바람에 피해다니는 거였다. 김태영을 볼 때마다 유연함으론 1등을 따다 놓은 내 몸이 목각처럼 움직이는데, 그럴수록 내가 김태영을 좋아하는 게 실감이 나서 더 피해다녔다. 확신이 없는 도박은 하고 싶지 않은데. 

  조금 망설이다가 김태영의 품에서 벗어났다. 마음을 접든 익숙해지든 내겐 시간이 필요했다. 눈치 빠른 김태영이 눈치 채지 못하길 바라며 애써 장난스레 웃어보였다.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애들 많은데서 이러는 건 좀..." 

  "내가 형 좋아하는 거 아네? 근데 왜 나 피해요?"

  "뭐...?"

  "아니면 그래서 피한 건가."

  김태영의 브레이크 없는 직진은 내게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머리는 이미 김태영도 날 좋아한다고 법봉 탕탕 두드리다 못해 에로스가 나팔을 불었고, 심장은 아까는 새발의 피였다는 듯 가열차게 펌프질을 해댔다. 차마 놀란 티를 숨기지 못해 그렇잖아도 왕방울 같은 눈이 더 크게 뜨였다. 

  김태영은 당황함에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웅냥거리는 날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도 모르게 그 눈을 피하자 진지하게 얼굴 굳히고 있던 김태영이 뭔가 체념한 듯한 한숨과 함께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뭐야, 이 반응은 꼭...

  "아냐, 장난이에요.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요?"

  "으음..."

  "설마 이것도 거절?"

  "아니! 뭐, 먹을래?"

  이후로 김태영이 저녁 메뉴에 대해 조잘조잘 떠드는 소리는 모두 한 귀로 들어오고 한 귀로 흘러나갔다. 내가 지금 메뉴가 중요하겠니. 네가 날 좋아하는 게 맞았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실실 웃으며 걸어가다가 문득 깨달았다. 어느 순간 도로 쪽에 서 있던 나와 안쪽에 있던 김태영의 자리가 바뀌어 있다는 걸. 이거 봐. 역시 내가 맞았어. 

  의기양양하게 쳐다보자 김태영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머리에 뭘 붙이고 있냐며 웃었다. 내 머리에 붙은 무언가를 조심스레 떼어주는 김태영의 손이 답지 않게 떨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수전증이냐며 놀려댔을 텐데, 왜인지 알 것 같아 귀여워서 봐줬다. 나 좋아하는 거 다 알아 이 녀석아. 김태영 진짜 나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앞으로 김태영이 이럴 때마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나를 과소평가한 게 틀림없었다. 김태영이 날 은근슬쩍 챙길 때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김태영이 없을 때마저도 계속 떠올리며 웃는 바람에 옆자리 강민희한테 조증이냐는 말을 들었다. 너 같으면 내 상황에 웃음이 안 나오겠니. 혼자 음흉하게 킥킥거리는 게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는 말에도 상큼하게 미소 지어줬다. 질겁하는 표정도 아무런 타격이 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웃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무적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나 스스로도 내가 조금 미친 것 같았다. 

  그게 3분, 아니 3일 천하여서 문제가 됐다. 아는 게 약인지 모르는 게 약인지 백분토론 할 때 나는 모르는 게 약을 골랐었다. 진짜 내 말이 맞다니까. 이런 거 알고 싶지 않았는데. 아닌가. 지금이라도 내가 쪽팔린 짓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서 다행인 건가. 그 때도 이렇게 줏대 없이 의견이 왔다갔다 했던 것 같다. 아무튼 결론은 하나였다. 난 지금까지 확실하지도 않은 말에 혼자 착각해서 뻘짓을 했고, 현재 죽도록 쪽팔리다는 거. 진짜 장난이었던 거야? 이럴 거면 너 나한테 왜 그랬어?

  나는 초록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차마 건너지 못한 채 잔뜩 빨개진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선선한 바람 부는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에 달아오른 얼굴이 뜨거웠다. 분명 확신했는데, 너무 성급했나 봐. 덕분에 흑역사 하나 더 적립이요. 길 건너편에서 걸어가고 있는 김태영의 얼굴이 왜 그렇게 유난히도 선명하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일어나자마자 당연한 루틴처럼 눈에 끼워넣은 렌즈가 괜히 원망스러웠다. 

  김태영은 처음 보는 여자와 함께 있었다. 차라리 뻔하더라도 김태영 친누나를 오해하는 클리셰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 바람은 여자가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이는 순간 곧바로 집어던져졌다. 내가 누나 얼굴을 아는데 여자는 세영 누나가 아니었으니까. 둘의 거리감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친하고 가까워 보였다. 그래, 여기까진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김태영이 그 길쭉한 몸을 굽혀서 여자의 겉옷 지퍼를 올려주는 게 아니겠는가. 

  물론 여자의 양손 가득 쇼핑백이 들려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보통은, 상식적으로 쇼핑백을 들어주고 스스로 지퍼를 올리게 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여자친구가 아니라면 말이다. 김태영이 타고나길 다정한 사람인 것 같긴 한데 애인 아닌 사람한테 저래놓고 별 생각 없었으며 그저 다정의 일환일 뿐이었다고 하면 어디 가서 뭇매 맞을 거다.

  무슨 말을 주고 받더니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활짝 웃은 태영이 이내 여자의 쇼핑백을 대신 들었다. 내게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뒤에서만 봐도 선남선녀였다. 쿵 내려앉은 가슴이 아렸다. 나는 김태영도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지. 썸 좀 타본답시고 고백 안 하길 잘 했다. 고백하면 받아줄 의향 있는 티 내지 않길 잘 했다. 그냥 이 길바닥에서 당장 기절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다 내 착각이었다는 거잖아. 그야말로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라이브 쇼. 그 어떤 사물놀이패보다 더 신명나 보였을 듯. 이제 북채와 장구채는 해고 당하고 다시는 취업하지 못 할 테다. 가을 날씨가 이렇게 더운 게 맞아? 아무튼 요즘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 문제 심각해. 그러니까 북극 빙하 다 녹아서 북극해가 진흙탕 되는 거잖아. 북극곰은 어디서 살란 말이야. 

  준 사람은 준 줄도 모르는 좌절감에 열도 오르고 가슴이 답답해져 목 끝까지 잠가놓았던 단추 죄다 풀어헤쳤다. 사실 누굴 탓해. 김태영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나 혼자 좋을 대로 오해한 건데. 아니 근데 네가 오해하게 했잖아. 그렇게 다정하지 말았어야지! 마음속으로 혼자 아수라 백작 1130편 찍으며 집으로 달려갔다. 저녁이라 더 서늘해진 바람을 뚫고 전속력으로.

 

***

  지각을 겨우 면했다. 어제부터 진짜 재수 옴붙었다. 자기 전이라 함은 사람이 하루를 돌아보며 감수성에 절여지기 딱 좋은 타이밍이 아닌가. 매일 밤 가지는 감수성 타임에 잠깐, 흘렸다 하기도 민망하게 진짜 찔끔 했는데 눈을 비롯한 얼굴이 퉁퉁 부어서 제대로 들고 다니기 창피했다. 아무래도 잠을 잘못 잔 것 같았다. 라면 먹고 잤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짐작이 될 거다. 조금 과장하면 등교하기 싫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고등학생은 온갖 천재지변에도 등교해야 하는 극한직업이었다. 아무리 심각하대도 전염병이 아닌 이상 겨우 얼굴 부은 걸로는 만우절 장난이면 몰라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날의 결석 사유가 될 수 없었다. 그런 김에 개근상을 노리는 난 오늘도 착실히 교문에 들어섰다. 내가 노려볼 수 있는 유일한 상. 이거라도 받아야지.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는 물론이고 쉬는 시간이 될 때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종 치기가 무섭게 바로 책상에 엎드렸다. 

  오늘 같은 날 최악의 시나리오는 김태영을 마주하는 거였다. 어젯밤 침대에서 혼자 난리 난리 생난리 피운 꼬라지가 이제 와서야 조금 나잇값 못 했다 싶기도 하고, 부어서 못생겨진 얼굴 같은 거 좋아하는 사람한테 보여주고 싶을리 없으니까. 억울하게도 여전히 김태영이 좋았다.

  "형, 지각할 뻔 했다면서요."

  그런데 김태영 너는 왜 하필 이럴 때 내 앞에 나타나냐고. 김태영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엎드려 있는 내 머리통 위에서 들려왔다. 쉬는 시간이면 말 그대로 쉬어야지. 친구도 많은 녀석이 왜 십분밖에 안 되는 이 귀한 시간에 한 학년 윗반에 와 있는 건데? 내가 자는 척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비어있던 앞자리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면 십중팔구 김태영과 눈이 마주칠 것 같았다. 그럼 더 고개 못 들지. 이 얼굴을 어떻게 보여줘.

  "안 자는 거 다 아는데. 늦게 잤어요?"

  하여간 눈치 빠른 녀석. 아하하. 그랬구나. 알았구나... 머쓱하게 억지 웃음소리 내며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너 때문이잖아 이 멍청아..! 라고 말은 못 하고 그냥 맞다고 웅냥거리고 말았다. 발음 안 좋은 게 이럴 때 장점이 될 줄이야. 태영이가 못생긴 거 보면 토할까봐 손으로 최대한 내 얼굴을 가리고 말하는데 내가 느끼기에도 로봇처럼 어색했다. 나는 아무래도 연기는 아닌 듯 했다.

  "나.. 나 피곤한데 가주라.."

  손틈 사이로 김태영을 슬쩍 훔쳐보다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흠칫한 몸뚱이가 원망스러웠다. 아주 티를 내라, 티를! 내가 왜 이러는진 모르겠지만 매우 의심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보는 김태영을 애써 무시하고 다시 엎드렸다. 

  "......알았어요. 조금이라도 자요."

  한 발 물러나는가 싶더니 말은 그렇게 해놓고 가는 기색이 없었다. 안 자는 걸 들킬까봐 내쉬는 숨 때문에 책상에 물기 고일 때까지 한참을 엎드려 있다가 진짜 잠들어버렸다. 얼굴을 파묻고 있었더니 더운데다 자세도 불편해서 깨자 김태영은 없고 여전히 쉬는 시간이었다. 짧은 선잠이었나 싶어 시계를 보니 이미 다음 교시 수업이 끝난 후의 쉬는 시간이었다. 어떻게 선생님부터 짝꿍까지 단 한 명도 날 안 깨워줄 수가 있어? 어차피 깨어 있었대도 제대로 수업을 들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괜히 서러워졌다.

  가을이라고 선풍기를 틀어주지 않아 손을 파닥거리며 바람을 일으켰지만 역부족이었다. 덥고 목마른 그때 눈에 들어온 건 옆자리 쳐자고 있는 강민희 몫으로 나온 흰 우유였다. 겉면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걸 보니 배급 받은지 얼마 안 된 것 같았고, 결론적으로 차가워보였다. 평소라면 우유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 학년 위 우유 러버인 어떤 형한테나 던져줬을 테지만 오늘따라 왠지 맛있어 보였다. 죄책감 따위는 병아리콩만도 없이 시원하게 남의 우유 꿀꺽꿀꺽 들이켰다. 어차피 우유 주인은 키 더 안 커도 돼. 우유 급식을 왜 신청했는지 모르겠어.

  마시고 반절 남은 우유는 다시 강민희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아뒀다. 아무리 그래도 다 먹는 건 예의가 아니지. 절대 내가 갈증 해소 완료해서가 아니었다. 다음 교시 과목을 확인하려고 시간표가 붙어있는 책상 모서리쪽을 보자 그곳에는 시간표 대신 웬 약 무더기들과 매점에서 파는 간식, 그리고 하트 모양 포스트잇이 있었다.

형준이형! 혹시 어디 아픈 거면 

참지 말고 꼭 약 먹어요 알았죠??!

걱정되니까! 🤨

보건실에서 타왔어요 

아프지 마요 ♡

- 태영 - 🌱

  감기약부터 두통약까지 대체 보건 선생님께 무슨 말을 한 건지 각종 약이 즐비했다. 연고랑 밴드는 왜 가져온 거야? 내가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넘어져 다쳐서 속상한 마음에 엎드려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가. 귀엽기도 하고 날 생각해준 태영이의 마음이 고마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이름 옆에는 김태영이 예전부터 미는 캐릭터인 '새싹이'가 씩씩하게 파이팅을 하고 있었다. 아니 글쎄, 네가 이렇게 다정하게 구니까 내가 착각하지. 그리고 이 자그마한 하트. 하트는 또 왜 그린 거야. 괜히 의미부여 하게 되잖아. 애초에 김태영이 절대 안 들고 다닐 것 같은 이 진분홍색 하트 모양 포스트잇은 대체 어디서 난 건지. 

  게다가 간식은 죄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어떻게 감동 안 받냐고. 좋아한다는 이유가 아니라 본투비 다정해서라는 이유로 이렇게 굴 수 있는 거야? 또 속절없이 폴인럽 해버릴 뻔했다. 착각의 늪으로 다이빙 하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김태영 얘 나한테만 다정한 거 아니잖아. 내가 아니라.. 그래, 강민희가 엎드려 있었어도 이랬을 걸. 그리고 여자 친구도 있고...... 아니 그러면서 나한테 이래도 돼? 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다정하게 구는 거 그거 범죄야. 무슨무슨 법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아 어이없어. 눈물 날 것 같애. 군대 가면 지겹도록 할 삽질 벌써부터 몇십 번이고 했다. 앉은 자리에서 지구 내핵에게 안부 전했다. 잘 지내시나요. 전 다정해서 미안해야 하는 누구 때문에 잘 못 지내요.

  이럴 거면 그냥 이름을 김다정으로 바꾸지 그래. 허락 받을 생각은 없어. 김태영 너는 이제부터 김다정이야. 비실비실한 누구 별명이 구비실인 것처럼 너는 다정하니까 김다정. 네 앞에서 이 이름으로 널 부를 수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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