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방

초안재하_관성慣性, 상기想起

단편 둘

상기想起

산 사람은 살아야지.

사람들은 그런 말로 내 사별을 상기시켰다. 왜 이렇게 얼이 빠졌는지 묻기도 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겠다며 다독였다. 그네들 말대로라면 편했을 테다. 빠졌다면 채우고 무너졌다면 세울 것이 있으니. 홀로 사별을 인식할 수 없었다. 계속 같은 자리에 걸린 아내의 옷,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멸치볶음, 내 빨래로만 가득 찬 세탁기. 그런 것들이야 아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도 똑같았다. 죽어 사라졌을 때에만 보이는 광경이 무언지. 슬픔이 너무나 커서 채 느끼지 못 하는가. 이미 내 속을 모르는 나는 머리를 굴린 들 판가름을 못 했다.

이것 하나 못하는 내게, 그 사람은 몇 단계를 건너뛴 제안을 했다. 복수라니. 막연한 위로나 어설픈 공감은 하지 않았다. 혹여 마음이 동한다면 연락을 달라고, 무슨 방문 판매원처럼 말했다. 초상난 집에 복수를 팔러 온 잡상인이라. 기자한테 소설을 짓게 하는군. 소설가는 현실에서 허구를 짜내는 직조사지만 나는 재단사였다. 사실을 이리저리 오리고 저쪽에서 가져온 것과 같이 꿰매기도 했다. 옷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리고, 꼭 시장에 팔지도 않았다. 수많은 사실을 만졌다. 나 같은 범인은 재단사들의 범인이 되기 일쑤다.

그 사람이 달변가이긴 한지 며칠째 복수란 말을 떠올렸다. 복수는 어떤 사람이 하는지 아십니까. 알려줄 것처럼 운을 떼고 자리를 떴다. 간단한 판가름도 못 한 나는 그 말에 궁리를 했다. 복수 외에는 일이 없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처벌이니 완벽범죄니 관심 밖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뒤탈 없이 귀가한다면 무엇을 할까. 아내의 양말을 네 켤레 골라, 어제 입은 옷과 함께 세탁기에 넣었다. 손수건을 잘 빨아서 널고 싶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널어서 하늘거리는 모습이 보고 싶다. 아내는 내가 청승을 떨거나 나서기를 바랄 심성이 아니었다. 나도 그리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고. 연하늘색 손수건을 쓰는 걸 한 번도 보지 못 했다. 연애시절, 제대로 알지도 못하니 마음에 드는 선물도 생각나지 않았다. 푸른색을 좋아한다기에 하늘색 손수건을 주고 싶었다고, 말도 투박하게 했다. 준비한 마음이야 고마워했지만 기쁘기까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그런데도 나는 선물을 해서 기뻤다. 이번에도 손수건의 경우다.


관성慣性

금요일 밤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기란 유쾌하지 못했다. 내린다던 비는 입을 씻고 붉은 점이 점멸했다. 저 즈음 고층 건물이라도 있나 보지. 한낮에 창을 바라보는 일이 줄었다. 멀리 북한산까지 보이는 맑은 풍경 같은, 일상에서 작은 즐거움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에서 멀어졌다. 처음엔 습관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아내가. 아내가. 사물을 보거든 입속말을 했다. 주문은 효용이 좋았다. 절로 고개가 내려갔다. 아, 내가.

밤공기는 제법 개운했다. 굳이 없는 일을 만들어 야근해도 만류는 없었다. 어떻게 하든 사별 앞에선 실례가 되는 법이므로. 같이 하든가. 웃는 빛을 하면 마음껏 싫은 티를 내고 흩어졌다. 잘했어, 잘했어. 분할 즈음 등을 토닥이는 소릴 들은 것 같다. 나는 잘하고 있었다.

형광등 불이 너무 환했다. 커피 테이블 위에 리모컨과 책자가 바로 놓인 게 보였다. 집어서 티브이 대고 버튼을 눌렀다. 고무를 파고들듯 해도 켜지지 않았다. 생긴 건 멀쩡했건만 건전지가 닳은 모양이었다. 소파에 살짝,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두었다. 지난주에 부숴진 걸 대체할 리모컨을 찾아 온 집안을 뒤졌다. 갖은 살림을 보고 만졌다. 일전에 받은 명함까지 제 위치로 돌려놓고 지쳐 소파에 떨어졌다. 손이… 그러니까 몸이 떨려 눈물을 찾았다. 어깨가 흔들리고 턱이 덜덜거렸다. 세게 쥔 주먹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 주말처럼 되기 전에 주방으로 건너갔다. 이제는 가스불을 쓸 수 있었다. 잠깐 자릴 비운 동안 착오로 화장을 했다고. 불에서 떨어져 벽을 짚고 섰다. 불 앞에서 휘청거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았다. 조심 좀 하지! 정원이는 소리를 지르거든 머쓱하게 등을 쓰다듬었다. 어떤 식이었더라. 벽지에 댄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둥글게였던가. 그건 술병이 났을 때였던가. 이런 식으로 헷갈렸다. 흠뻑 그리워하다 갑자기 기억나지 않았다. 곧 떠오르는 날도 있다마는. 감정이며 생각이 너무 많거든 뇌가 멈춰버린대. 아내의 목소리를 빌어 떠올렸으나 기시감은 없었다. 외에도 나란히 앉아 있는 기억이 있었다. 가본 적 없는 분수대에서 비눗방울을 구경했다. 터무니없는 풍경이건만 초여름이었고 습한 풀냄새가 났다. 아내가 없어도 아는 것들이 뒤죽박죽 섞였다.

정말로 있었던 일은. 온점처럼 젓가락으로 식탁을 찍었다. 정원이는 첫술을 꼭 숟가락으로 먹었다. 밥을 물고 건더기 없이 국물만 뜨는 게 버릇인지 징크스인지. 그를 따라하려 숟가락을 흰 밥에 꽂았다. 당장 내려놓았다. 눈앞에 검은 띠를 두른 아내가 앉아 있었다. 눈을 한 번 끔뻑이는 잠깐 시야를 비운 동안 사라졌다. 댕그렁 식탁에 떨어진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밥그릇에 물을 부어 말았다. 후룩 말아먹을 작정이었건만 생각이 짧았다. 제를 올리는 순서가 아닌가. 그 사람이 내민 복수는 두서가 없었다. 차례茶禮에도 벌벌 떠는 치가 무슨.

액자 유리에 얼룩이 묻었다. 방금의 야단법석에 튄 모양이었다. 마침 있던 천을 집어 닦았다. 핑계가 있으니 천을 사이에 두고 아내의 볼을 지나갔다. 구실 없는 여행이었다. 고가철도 아래를 지나는 타이밍이 좋았다. 막히는 도로에서 차창 밖을 볼 짬이 났다. 마침 노을이 졌고 열차가 매끄럽게 흘러갔다. 검푸른 구름에 기다란 열차는 증기기관차라도 되어 보였다.

기차 타고 싶다.

아내도 비슷한 생각을 했나보다. 차를 버리고 달려가는 건 소설에서나 가능했다. 민폐와 체면, 벌금과 벌점을 알았다. 모를 나이엔 면허가 없었다. 중간지점을 상기하는 건 손쉬웠다. 연애할 때 생각난다. 아아 그랬지. 신호가 걸린 틈에 조수석을 쳐다봤다. 정원이는 아예 유리창에 이마를 대었다. 손가락으로 풍경을 두드리다 풋 웃었다.

헤어지기 싫다고 순환선을 타고. 어려서 좋았지.

헤어지기 싫다고 결혼도 했지.

정원이 바로 앉아 제 손을 봤다. 잠을 자거나 욕실에 들어가면 반지를 뺐다. 집에선 주로 끼지 않는 다는 것인데, 평시 내 옆에선 맨손이라는 말도 되었다. 그러니 밖에 나오거든 틈이 나는 대로 손을 봤다. 때가 타 은색이 탁했다. 내 왼손도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인 손을 잡으려거든 악수 외 방도가 없었다. 그건 새삼스러웠으니 이따금씩 오른손에 옮겨 끼우고 깍짓손을 했다. 지금은 핸들만 힘주어 잡았다. 정체구간이라도 운전 중엔 곤란했다.

밤기차라도 알아볼까.

오늘?

나도 기차 타고 싶어.

그런 구실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칫솔에 담요만 들고 나왔다. 다시 올라가 카메라를 챙긴건 여행과 카메라라는 도식 덕이었다. 목적지는 기차 시간에 맞추어 춘천행이었다. 밤기차는 소음이라고 이따금씩 덜컹이는 소리와 하품만 들려주었다. 간간히 끊어지는 고요에선 당도한 후를 도모할 수 없었다. 닭갈비 2인분에 소주 세 병으로 마감이 끝나도록 앉아 있었다. 정처 없이 길을 걷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간 여행이었다. 그래도 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겠냐며 카메라를 꺼냈다. 내내 어둡던지라 생각도 않았다. 역 근처에서 사진이라니. 찍어주던 행인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아침해에 얼굴을 찡그렸다. 입은 웃고 있었으니 괜찮은 여행으로 삼았다. 사이가 좋아보인다, 부럽다. 인화하러 들른 사진관에서 빈말을 들었다. 내부에 걸린 사진은 전부 웃고 있었다. 나도 정원이도 사진사 앞에선 뻣뻣했다. 생각난 차에 웃는 연습을 했다. 손에 쥔 감각이 배는 부드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손수건이었다. 손수건 만큼은 부드러워야 했다. 닦아낸다는 쓸모를 생각하면 그래야 했다. 서러울 적에 이런 촉감을 쥐면, 북받쳐서라도 게워내지 않던가. 하지만 이런 얼룩은 고려하지 않았다. 세게 쥐자 손 안의 감각이 뻣뻣해졌다. 통상적으로 염두하지 않은 일이 왜 우리의 식탁까지 올라왔지. 얼룩을 문지를수록 세를 키웠다. 거실로 나와 명함을 찾았다. 복수는 어떤 사람이 하는지 아십니까. 잡동사니를 집어들어 옮기면 될 것을 탁자 밖으로 밀쳐냈다. 어디가 깨졌는지 검은 플라스틱이 산개했다. 앞은 멀쩡했다. 손에 들고 머리 뒤로 팔을 당겼다. 빠르게 휘두르며 가장 높이 들어올렸을 때,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유리창이 깨지는 역시 날카로운 소리, 팽팽하던 근육이 돌아오는 느낌, 제법 개운한 밤공기. 나는 완벽한 처벌 후에 이를 상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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