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방

하무열_회식回食

한겨르 생일 축전(이었던 것)

오후가 되면 눈이 슬슬 책상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배가 고프거나 달리 먹고 싶은 게 없어도 입이 근질거렸다. 민 소장은 능률이란 걸 알아서 사무소 사람들이 산책 몇 번 나가는 것쯤 아무렇지 않아 했다. 비용에도 빠삭해 탐정사무소로 간판이며 상호를 바꿔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인근 공원에 나갔지만 나는 멀지 않은 곳에 머물렀다. 담배를 물고 길을 걷는 시대는 지나갔다. 건물 사이, 사람들이 알아서 피해 가는 실외기가 밀집한 곳을 골랐다. 좁은 그늘을 찾아 섰다. 고개 숙이고 불을 붙이면 음지에 꽉 찬 두 발이 보였다. 날숨이 무엇으로 비칠라 머리를 들고 첫 김을 뱉었다. 날도 더운데 끊으시죠. 태현이는 교통과를 나오면서 담배를 끊었다. 맨숭맨숭하니 수제비 반죽 같은 녀석에게는 담배보단 음료수가 어울렸다. 그러나 금연이란 무난하다든지 심심한 일이 아니었다. 이십 년 가까이 달고 살았는데 그게 될 리가. 이십 년이 넘었던가. 따져보려다 그만두었다. 이미 늦어서 언제가 시작이었는지 퍼뜩 기억났지만 지금까지 온 시간을 세지 않았다. 그 양반도 참 독하지.

나보다 훨씬 먼저 담배를 피웠으니 힘들었을 테다. 지금도 내게 밴 냄새를 맡곤 딴청을 피우면서 물었다. 무열아, 담배 있냐. 그러면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환자가 병실에서 할 말이 있지. 그는 굴하지 않고 인사처럼 말했다. 유난히 떠오르는 날이 없는 날에도 잘 물었다. 담배 외의 것들을 요구하면 잘 들어주었다. 지난겨울엔 목이 썰렁해 춥다기에 목도리를 사 갔다. 밝은색은 안 하려 할 테고, 어두운색을 고르자니 낯빛이 더 어두워 보일 것 같았다. 밝은 밤색에 흰색이 희끗희끗 들어간 목도리로 했다. 털실을 바꿔가며 떴나 했는데 원래 그런 실이 있단다. 두 색이 번갈아 이어진다고.

담배는 별일 없으면 한 갑을 다 태워도 똑같은 것으로 이어졌다. 할인이나 적립 같은 어떤 혜택이 없고 어딜 가도 같은 가격이었다. 가까운 편의점 아무 데나 들어갔다. 가깝다는 것도 행동반경이니 외근을 나서지 않고서야 거기서 거기였다. 달리하려면 무얼 더 사야 했다. 땀을 식힐 겸 매장을 슥 돌았다. 편의점은 별별 물건이 많았다. 같은 라면이라도 마트에 없는 무슨 무슨 맛이 편의점 로고를 달고 놓였다. 그 양반도 병원 주변을 돌다가 편의점이 보이면 들어갔다. 아저씨 둘이 과자 봉지에 쌍심지를 켜고 당류가 얼마나 들었는지, 너무 짜진 않은지 살폈다. 나중엔 귀찮아졌는지 앞에 박힌 사진 구경만 실컷 하곤 늘 먹던 계란과자와 내 음료수만 사서 나왔다.

아예 성분표를 볼 생각도 안 하던 초코아이스크림을 집었다. 안에 또 시럽이 들었고 위에 갖은 견과류를 뿌렸다고 단면도를 그려 넣었다. 멜론맛만 있었는데 하나둘 늘어나더니 이젠 거의 과일마다 나온 것도 하나. 파르페처럼 소프트아이스크림과 작은 베리, 과자가 든 플라스틱 컵도 있었다. 가격을 보아하니 소장님이 드셔야겠구먼. 분명 과자로 있는데 냉장고에 버젓이 들어간 아이스크림까지 골라 나왔다. 회식마다 꼭 벌건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파했다. 식사도 외근을 나간 인원을 빼고 같이 들었으니 먹성은 꿰게 되었다. 

배달 음식을 시키면 둘러앉는 탁자에 봉투를 내려놓았다. 사무소에서 좀처럼 들리지 않는 비닐 소리에 안승범이 고개를 불쑥 들었다. 시키지 않아도 아이스크림을 탁자에 펼쳐놨다. 아저씨들은 팥 들은 거 사 온다던데? 역시나 초코릿 맛을 들고 키득거렸다. 다음으로 태현이가 왔다. 민 소장은 어딜 갔지.

아이스크림… 사 오셨네요, 형.

웃긴 웃는데 억지로 지어 떨떠름했다.

길이 엇갈렸나 봐요. 소장님도 사러 나갔는데.

두 개씩 먹으면 좋은 거 아냐?

싱글벙글한 목소리에 문소리가 따랐다. 민 소장이 든 종이가방을 보니 두 개씩 먹을 수가 없었다. 저 아이스크림 가게는 얼마 전에 건물 1층에 들어왔다며 인사를 왔었다. 쇼윈도에 그릇에 견줄 컵을 들고 퍼먹는 그림이 걸렸다.

아이스크림도 오는 순서만 있고 가는 순서는 없지.

아, 이야기하고 갈 걸 그랬어요.

소장님이 직원 담배 피우는 데까지 쫓아와야겠나.

부러 툴툴댄 말투에 그도 피식 웃었다. 봉투에 다시 아이스크림을 넣었다. 안승범이 갸웃하다가 꾹꾹 눌러 담은 아이스크림 통을 보곤 봉투를 냉큼 가져갔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숟가락을 챙겨와 돌렸다. 쿠키 조각이 들어간 게 맛있었다. 서비스로 줬다는 얇은 과자엔 역시 아무것도 안 든 바닐라가 궁합이 좋았다. 민 소장이 얼마 전부터 푹 빠졌다는 요거트맛은 새콤달콤하고 박힌 건과일이 쫄깃했다.

날이 더우니 더 맛있군.

아이스크림은 겨울에 먹어야 제맛이죠.

아이스크림은 겨울이 제맛이지.

사내연애가 눈꼴 시려도 소장님께서 하시는데 어쩌겠나.

동시에 터진 대답에 놀리듯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만 어쩔 줄 모르는 것도 똑같았다. 당연하지만 아이스크림 가게가 새로 들어오려면 먼저 있던 가게가 나가야 했다. 음식장사는 안되는 것 같아도 버티고, 잘 되는 듯 보여도 어느 날 사라지는 법이었다. 이번 아이스크림 가게는 오래갔으면 바란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주욱 여름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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