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방

하무열, 여강휘_봄자리, 휴가

조각글 둘

봄자리

신수 훤한 날이었다. 길에 사람이 없거늘 그런 날이었다. 양지는 물론이고 그림자 진 응달도 깨끗하고 환했다. 어제 내린 비 덕분이었다. 구름의 결마저 뚜렷이 보였고, 담배 연기까지도 분명한 경계를 가졌다. 보고 있는데도 언제인지 모르게 연기의 끄트머리가 사라졌다. 그러니 기화보다는 승화였다. 개화 소식은 아직이니 향기가 덮이진 않았다. 집에서 입는 반팔 옷도 원래서부터 담배냄새가 났다. 몇 해를 입었다. 아주 하얗지 않고 슬슬 목둘레가 우글우글했다. 남에게 보일 차림이 아닌지라 신경쓰지 않았다. 내게도 거울 앞에 서야만 보였다. 거울은 또, 아침에 면도를 하면서나 보았다. 손을 씻다 설핏 보이기야 했다만 의도로 보는 게 아니었다.

꽁초를 분지르고 들어왔다. 세탁기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탈수 단계인만큼 시끄러웠다. 십여분이면 담배 냄새도 온데간데 없을 테다. 주중에 밀린 설거지를 해치워도 그 소리에 묻혔다. 소리가 털려 나가니 온도가 더 차게 올까 싶었지만 고무장갑으로 막았다. 쏟아지는 감각도 뭉툭했다. 수도꼭지를 끝까지 젖히면 둔탁해졌다. 장맛비에 우산이 흔들리고 바짓단에 물이 튀듯. 그 장대비는 여름이건만 선명했다. 날은 어제가 춘분이었다. 그날이 어제 같다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어제가 춘분이었다.

가만보면 소한이니 입하만 못했다. 피부로 오는 추위도, 여름이다 싶은 막연한 기분도 없이 낮밤의길이가 같았다. 겨울과 봄의 경계도 시간마다 달랐다. 밤과 아침이라 해서 분명할 리 없었다. 해가 형광등처럼 켜고 꺼지던가. 일기예보에서 일출이며 일몰을 알린들 육안엔 소용 없었다. 눈동자가 둥글고 촘촘한 주름이 있을 뿐 그를 가리킬 바늘일랑 달리지 않았다. 세탁기가 울리지 않았더라면 이 생각에 몇 분을 할애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근방의 골목은 오래된 간판이 하나씩은 있었다. 한꺼풀 벗으면 사람은 다 똑같이 생겼단 말처럼 어느 색이라도 푸르게 타버렸다. 다만 흰옷은 누렇게 변했다. 워낙 천천히 일어나는 일이니 어느 단계인지 가늠이 안되었다. 실내에서 말리는 빨래와 다르게 빳빳하고 해에 표백된 냄새만이 분명했다. 학자라면 화학반응을 늘어놓으며 특정 지었을까. 예전부터 탐구와는 거리를 두었다. 어떻게, 를 알아도 그래서 어쩌겠어, 하고 돌아서기 마련이었다. 최선은 그를 줄여 그래서, 로 남는 일이었다.

날아가려는 옷을 쥐고 빨래집게를 찾았다. 마른 옷도 자국이 남는데 젖은 옷이라면 깊게 팼다. 겨드랑이 들어가는 구석을 등과 같이 집었다. 겉옷을 벗지만 않으면 되었고 아직 춘분이었다. 충분했다.


휴가

텔레비전을 음소거하고 뉴스를 틀어두었다. 기다리는 소식은 없었다. 혹여나 나올까 싶은 스캔들이라면…. 화재, 횡령, 절도. 연관이라곤 전혀 없는 사안이 지나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리눌렀다. 타인의 불행으로 덮고서 안도라니. 안 되었다. 스포츠뉴스에서 소리를 되돌렸다. 모르는 이름들의 활약상이 잔뜩이었다. 익숙한 이름이 지나가기도 했으나 단순히 귀에 익은 소리였다. 포지션은커녕 종목도 긴가민가했다.

일기예보에 나오는 이름이라곤 지명뿐이었다. 볼륨을 한 칸 더 올렸다. 환절기인 만큼 일교차가 크니- 벌써 계절이 갈음하는 와중이었다. 경칩도 지났으니 절기 상으론 봄이 온 지 오래였다. 나는 여전히 뜨겁게 내린 커피를 마셨다. 저녁거리로 김이 나는 국물이 생각났다. 이불도 두툼했다. 내의를 서랍에서 마지막으로 꺼낸 게 언제더라. 말 그대로 피부에 와닿는 변화건만 곰곰히 생각하고서야 기억이 났다. 타앙. 그것이 신호총이었다. 가만 있던 밤이 바람이 수사를 가져다 썼다. 봄밤, 봄바람, 생동. 나는 이제 부끄러울 줄 모르는지. 일어나 요에 누웠다. 턱끝까지 이불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조용한 사위에 눈앞까지 검었다. 마땅히 들어야 할 생각이 눈꺼풀 아래를 지났다. 눈가에 주름이 홱 구겨질 정도로 질끈 감은들 어디 하나 구김 없는 기억이었다.

당연하게도 아침은 눈부셨다. 커튼으론 감히 해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봄이라 해서 태양이 누그러들 리 없었으므로. 천의 색으로 투과해 들어온 빛이 벽이며 사물을 물들였다. 전능의 장막이고 과시였다. 차락, 커튼을 걷었다. 유리병에 든 물 마저도 그림자가 기울었다. 밝히기 위해 조명을 여럿 달아 그림자가 네댓 개로 갈라지는 왜곡일랑 일으키지 않았다.

물병을 둔 식탁에는 의자도 있었다. 네댓 개나 되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는가 하면 사선으로 보는 위치도 있었다. 병을 치울 수도 있고 개수대에 서거나, 도로 방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했다. 쟁반에 아침상을 차렸다. 소파에 앉아 무릎 위에 올렸다. 나는 정직停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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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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