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방

초안재하_볕뉘

창문을 밀어 닫았다. 창틀에서 부드럽게도 미끄러졌다. 잘 닦은 덕이었다. 비누가 손바닥에서 미끄러지는 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땟물이 수챗구멍으로 흘러들어갔다. 세면대도 새시처럼 하옜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심상을 뒤로 하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따로 문이나 벽이 없으나 들어왔다. 전기 주전자에 물을 받아 단추를 눌렀다.

이런 이야길 하면 남편이 웃었다. 결혼 전이랑 똑같다며. 서류에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고, 웨딩 아치를 넘기야 했다만. 신혼집 문을 열고 들어오기야 했지만 결혼에도 무슨 문이나 벽이 없었다 여전히 서류에 이름을 쓴 그 사람이었다. 한두 해 알던 사람도 아니고, 내게 특별하지 유별난 사람도 아니었다. 멸치볶음을 좋아했다. 초록색을 좋아해서 옷장을 열면 그 색이 자주 보였다. 잘 어울리기도 하고. 다툴 때면 비아냥대며 성질을 긁었다. 지금은 베란다에서 빨래를 걷었다. 거실 바닥에 늘어두더니 그대로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댔다. 티셔츠를 탁탁 털었다. 물이 끓어 주전자가 요란을 떨었다. 한 번 쳐다볼 법한데 재하는 관심이 없는지. 막상 커피를 내밀면 잘 마셨다.

마시고 해.

옆에 잔을 내려두고 소파에 앉았다. 남편이 목을 젖히고 올려봤다. 주말이라고 면도를 안 한 모양이다. 밤새 자란 수염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본인도 모르는 사이 변하는 게 있긴 하구나.

의사가 커피, 술 이런 거 조심하라며.

설탕 조금만 넣었어. 당신 거는 한 숟가락 다 넣었네요.

재하는 첫 모금을 홀짝거렸다. 반 모금은 되나. 이후론 평범했다. 내 잔에 들어갔어야 할 설탕과 커피가루를 저 잔에 더 넣었다. 물도 그만큼 따랐으나 늘상 마시던대로는 아니었다. 병원에 다녀오고서 달라진 커피맛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신에 세탁소 얘길 꺼냈다. 아프다던 아저씨가 어제 보니 다시 나왔다고. 아주머니 얼굴에 그늘이 좀 지워졌다고.

처음엔 세탁소 문을 닫을 줄 알았다. 아주머니도 곧 쓰러질 얼굴이었다. 옮는 병인가 수근대던 소리는 사라졌다. 부부 마음 일심동체라 얼굴이 안 좋았나보다, 그런 미담이 되어 있었다. 세탁소는 그대로고 호프집이 실내포차가 됐다. 겉보기엔 별 변화도 아니다만 주인 달랐다. 거실 창문에서도 실내포차가 보였다. 그 외에도 간판이 바뀌는 경우야 많으니 결국 대수롭지 않았다. 단층건물이 헐린 자리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풍경이 달라졌다.

재하야, 저기 가서 마실래?

나는 식탁을 가리켰다. 남편은 귀찮다며 등으로 소파를 뭉갰다.

잠깐 커피 마신다고 마른 옷에 물 안 떨어져. 잠깐 빨래 갠다고 커피는 다 식겠지만.

무슨.

툴툴대면서 일어섰다. 나는 주방에 들어와 창문이 보이는 쪽에 앉았다. 아파트 단지에 심은 나무가 보였다. 정확히는 가지였다. 다 자라 매년 이파리만 돋았다 떨어졌다. 지금은 잎이 한창이었다. 역시, 재하는 초록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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