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방

검얘_전에 쓴 단문들 (2019~2020년)

검은방 시리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샜다. 돌아보지 않아도 물방울이 떨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리로 적막을 알아채다니 영 생경했다.

강성중, 어때. 만족했어?

둘은 오랜 친구였다. 이단의 간부와 악마라고는 하나 세간에 떠도는 영혼의 거래라느니, 거창한 일은 없었다. 일화며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흡사 친우 같았다. 교리며 배교자란 단어를 쓰지 않았더라면 마냥 그렇게 보였을 테다. 발화는 거진 강성중의 몫이었다. 악마 앞이라고 달라진 것 없이 평소대로였다. 악마 쪽도 그의 일과가 퍽 마음에 들었으니 신경쓰지 않았다.

싫어. 이 몸을 즐겁게 할 것들은 남겼어야지.

그 여자 있잖아. 이름이… 장혜진?

괴물이 빠졌지.

강성중이 다리를 꼬고 입꼬리를 올렸다. 이죽대는 얼굴을 보아 꽤나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었다.


갑판으로 올라와 처음 본 색은 검정이었다. 갈매기며 파도가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바다란 걸 알았다. 수평선 위로 해가 반 즈음 드러났다. 밤과 낮의 경계라도 되어 보였다. 이른 아침일까, 새벽의 말미일까. 바닷바람은 피부로만 맞는 게 아니었다. 냄새. 입을 벌리면 소라의 맛이라도 날 법한 냄새가 났다. 그런들 촉각이 우선인지라 눈이 시렸다. 머리카락까지 날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망망대해에서 앞을 따지려니 우스웠다. 앞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해를 바로 응시했다. 맨눈으로 하루에 두 번 마주할 수 있는 해였다. 석양이 질 때 다시 볼 수 있을는지. 예전에는 둘이 보낼 봄을 헤아렸다. 발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몸의 일부를 보고 있자니 올라오는 생각이 많았다. 벌써 손톱까지 차오른 것 같다. 주먹을 오므리자 금새 따라왔다.

이젠… 지쳤어요.

바닷바람을 온전히 맞을 형편이 못되었다. 파도가 귓전을 때렸다. 스쳤다고 해야겠다. 눈을 감으니 앞과 봄 대신에 검정이 다시 보였고, 그 위로 얼굴이 하나. 둘.


물은 발목까지 왔다. 이 얕은 물이 검은 걸 보아 바닥이 그런 모양이었다. 얼마 걸어 봤지만 깊이는 바뀌지 않았다. 구두 안에 물이 찼다. 걸을 때마다 발에서 양말이 붕 뜨는 감각이 생각났다. 하늘은 온통 구름이었다. 앞의 남자도 검은 정장에 흰 셔츠였다. 내 라이더 자켓과 반팔티도 그랬다. 이거, 꿈인 게 너무 표가 났다.

남자는 스물아홉 살에 직업은 경찰이다. 이제 막 발령을 받은 신참이지만 직위는 경위, 경찰대 출신이니 가능하다. 분명하다. 고지식하다느니 애늙은이라느니 하는 평이 있지만 다들 덕을 봤다. 말은 목까지 올라왔다. 입 밖에 내놓지는 않았다. 그런들 달라지는 일이 없는지라. 그러면 말은 입을 지나쳐 머리로 갔다.

이렇게 업신여김을 받고 착취 당하는 내가.

꿈인 덕에 남자가 말을 했다. 굳이 그 점을 꼬집지는 않았다. 그런들 달라지는 일이 없는지라. 남자도 아니까 말을 했겠지. 챗바퀴 같다. 가족관계는… 어느 시점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옷깃을 젖혀 멍이며 상처가 선명한지 아닌지로 기점을 나눌 수는 있었다. 무의식이 어느 때를 바라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죽였습니다.

알아내려 하지 않으면 모르고 넘어가리라 생각했건만. 내가 일을 저지른 직후였다. 남자는 십 년 전의 나였다. 무얼 바라 이를 보여주는지 알 길이 없었다.

몇 명인가?

나는 내가 죽인 사람의 숫자를 세지 못 했다. 물리적으로 한 일은 없었다. 간접살인이었다. 사람들이 그리 말했다. 이미 죽은 인질을 가지고 자형을 몰아세우고, 그로 하여금 누나를 총살하도록 했다며. 그를 문장으로 상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몇 년 간 숱하게 들은 사실이므로. 내가 한 질문의 답을 궁리했다. 확실한 건 한 명이었다. 다음으로, 확실한 한 명이 누구인지 가려내야 했다.

누나. 누나가 보고 싶습니다.

뒤는 거짓말이다. 조사를 받는 내내 미신을 믿지 않으려 애를 썼다. 물건이 혼자 떨어지거든 그 경위를 따졌다. 귀신이 된 누나가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다면, 그만한 두려움도 공포도 없었다. 자형에 대한 복수며,  누나와 행복하려 했단 의도가 맞는지도 가려내지 못했다. 남자는 거짓말을 할지언정 연기는 하지 않았다. 무표정으로 가만히 섰다. 표정하나 바뀌지 않는 게 무섭다며 수근거리던 소릴 들은 적이 있었다.

몇 명인가 물었네.

그렇잖아도 아까부터 눈을 마주하지 않더니 이제 눈을 내리깔았다. 셈을 하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답을 않겠다는 의도였다. 남자는 무언가를 제시하거나 찾아내려 등장하지 않았다. 추궁이지.


식당의 사람들은 둘이나 혼자였다. 세 명이 앉은 테이블은 한 테이블 뿐이었다. 특출나게 꾸미지 않은 차림들이었다. 평범한 화요일 점심시간이었다. 메뉴도 마찬가지였다. 순두부찌개나 김치찌개를 먹는 게 대부분이었다. 메뉴판에는 가짓수가 많았다. 돈까스에 무얼 올리는지에 따라 불어난 이름이었지만.

승범은 제육덮밥을 골랐다. 국물에 밥을 말았다간 후루룩 삼켜버려 탈이 날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오며 망가진 식습관을 잘 알았다. 덮밥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체하진 않겠다 싶었다. 오늘은 걸을 일이 많았다. 사야 할 옷이며 생필품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옷과 생필품이란 카테고리부터 문제였다. 반팔티, 주방용품 정도로 잡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본래도 그랬지만 출소 후 제 몸 하나 건사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예전에는 건사 같은 건 생각도 않았던가. 승범은 테이블에 수저를 놓았다. 생각은 놓이지 않아 물품을 적은 메모를 꺼냈다. 당장 필요한 것만 적은 게 맞나. 다시 읽었다. 지은이 도와준, 도와주기는 무슨 지은이 혼자 적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메모는 정확했다. 모두 오늘내일 안으로 필요했다. 생필품, 생필품. 중얼거리며 물을 따랐다. 지은이 따라가줄까 물었다. 물가도 길도 세상물정에도 빠삭한 그라면 천군만마였다. 승범이 그를 거절하고 혼자 나선 건 나름대로 거창한 이유였다. 제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걸 궁리하고 들여다 보고 싶었다. 목록을 혼자 적지 못한 게 켕겼지만.

식사도 생필품과 닿는 면이 있었다. 사는 데에 필요한 수준은 따라올 바가 없고. 매번 채워야 했다. 혼자가 아니라면 더 많은 양이 필요하고 소모가 빠르단 일차원적인 점부터, 식사를 하는 사람들끼리 조율이 필요하단 점까지. 처음으로 그럴 사람이 누구일까. 보나마나 사무소 사람들이었다. 사무실 식구들? 승범이 첫 출근을 하고 다 같이 먹는 식사라며 누군가 소장인 하무열을 부추길 테다. 인심쓰는 척 짜장면 곱빼기에 탕수육. 승범이 기억하는 하무열 형사는 그랬다. 소장이지. 물을 마시면서 생각을 고쳤다.

밖에서 마지막으로 본 하무열은 형사였고, 종종 면회를 오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밀실에서처럼 무언갈 꿰뚫어보는 눈이며 진실을 알면서도 굳게 다문 입이며. 전에는 그 눈이 싫었다. 통찰이니 하는 것들이. 제 사정을 수박 겉핥기로 알고 넘겨 짚는 게 싫었다. 선입견으로 목록을 만들고 가능성을 따져 내놓는 일을 추리라고 한다니 불쾌했다. 도출한 바가 사실이란 점이 불쾌했다. 다시 생각을 바꾸고는 물을 마셨다.

쟁반 같은 접시 위로 밥, 그 위로 제육볶음이 얹혔다. 승범은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집었다. 다행히 달지 않았다. 식당마다 어디는 달고 어디는 너무 맵고 더러는 맛이 없었다. 무난한 메뉴라 고르는데 편차가 있다니. 밥을 숟가락으로 비볐다. 국물이 많아 밥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몇 번 씹지 않고 삼킬 뻔했다. 당근은 혀와 입천장 사이에서 뭉개졌지만 고기와 밥은 아니었다. 혀가 음식을 섞고 이가 씹는 것을 하나하나 느꼈다. 혼자 있을 때면 그날 하루나 몇 년 간의 일을 곱씹었다. 내일부터는 그런 시간이 줄겠지. 태현은 밀실에서 모두를 구하려 들었다.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와서는 범인인 저를 구하러 놨노라 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 그 덕에 지금까지도 목소리를 분명하게 기억했다. 물을 마시고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식사는 오롯이 내 소관이었다. 찌개며 반찬이 식재료 상태에 따라가기도 하지마는. 내킨다면 맨밥만 씹어도 되었다. 오늘은 김치찌개를 끓였다. 까두고 잊어버린 햄이 떠오른 타이밍이 나빴다. 오늘 마트서 사온 돼지고기가 반쯤 익은 다음이었다. 구워서 내놓기엔 숟가락의 타이밍도 좋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평소보다 사람이 두 배였다. 혼자 먹던 저녁을 둘이 먹으려니 그랬다. 남은 햄이 반의 반이 고작이니 혼자라도 민망할 양이었다. 술안주로 두자는 그의 말은 제쳐두고 부엌칼을 들었다. 손바닥 위에 두고 썰어 도마는 쓰지 않았지만 칼은 다시 씻어야 했다. 두부에 고기에 햄에 다른 반찬은 꺼내나 마나겠다. 밥은 넉넉하니 둘이서 두 공기씩 먹어도 괜찮을 테다. 셋에서 혼자가 되었건만 밥솥은 여전히 셋이었다. 그 중 하나가 밥을 많이 먹었었다. 그러니 밥통도 컸고, 지금의 나는 삼분의 일도 안 될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접이식 상을 펴고 앉았다.

찌개에 상다리 부러질라 반찬이 없는 겐가. 골고루 먹어야지, 자네 나이에 편식하나.

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러십니까.

그가 얼른 두부를 건졌다. 김을 뿜으면서 뜨겁다 호들갑을 떨었다. 저 호들갑은 분명 나이였다. 둘이 밥을 먹으니 온전히 내 소관이 아니었다. 그가 김을 집은 동안 기다리거나 오징어젓을 골랐다. 다음으로 나도 두부를 먹었다. 손으로 가리고 입을 헤 벌렸다. 손바닥이 후덥지근하다. 이후 젓가락질 부터는 먹기 전에 후후 불었다. 그도 그렇고 지금껏 본 사람들은 대부분 후후, 두 번 불었다. 계속 두부만 건지면 머리가 띵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한 대로 반찬은 얼마 안 줄고 김치찌개만 눈에 보이게 줄었다. 밥도 두 공기씩 줄여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나도 까먹은 이쑤시개를 찾아 꺼냈다. 그의 용도는 이름에 없었다. 이는 쑤시지 않고 입에 물기만 했다. 담배 대용인 것 쯤은 알았다. 나도 이따금씩 피우니. 식후에 꼭 피우는 그에 비하면 나는 삼분의 일이었다.

피우고 오시죠. 설거지는 제가 하면 됩니다.

식사대접 고맙네.

그가 괜히 웃으면서 안주머니를 뒤졌다. 라이터가 잘 있나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한테 빌려도 되고, 그가 두고 간 라이터도 여럿 있었다. 아니면 다른 라이터를 쓰거나. 밥을 많이 먹던 그 치도 담배를 피웠다. 신발장에 딸린 서랍에 많은 걸로 기억한다. 이사나 청소를 하면 더 나오겠지. 햄이며 이쑤시개처럼 또 무언가 나올까 이사를 못 했다. 집세 보다도 식탁 위의 저 유리잔이 벅찼다.

설거지를 하다 부딪치는 소리는 식사 때와 달랐다. 어릴 적엔 깨작깨작 먹는단 말이 젓가락이 밥그릇에 부딪치는 소리인 줄 알았다. 설거지는 그릇끼리 소리가 나니 다른 게 당연한가. 누나는 내가 설거지를 하면 그릇이 깨지는 줄 알았단다. 물소리 보다 그릇 소리가 크다고. 그릇이 더 높은 소리가 나니 귀에 잘 들릴 수밖에 없었다. 찌개가 끓는 틈틈이 저녁 설거지를 했는데도 금방 끝내지 못했다. 어젯밤부터 그릇을 쌓아둔 탓이었다. 옷에도 물이 튀어 배가 찝찝했다. 수저를 혼자 쓰고도 남아도니 미루는 일이 잦았다.

텔레비전을 보는 줄 알았더니 그는 아직도 베란다에 서 있었다. 문 소리도 묻힐 정도로 내 소리가 큰 줄 넘겨짚었다. 그제야 드륵, 탁, 하고 그가 들어왔다.

뜨신 밥을 먹으니 늘어지는구만.

방석에 앉아 기지개를 켜고 만족스럽단 듯 웃었다. 설거지는 끝냈고 상을 닦기만 하면 됐다. 보통 식탁을 먼저 닦겠으나 개수대 앞에 서야 베란다가 안 보였다. 고개를 숙이면 텔레비전 쪽이 당연 보이지 않았다. 매일 같이 하던 일이니 잘 알았다. 저 사람 울었구나. 알 수밖에 없었다. 나도 저리 운 적이 있고, 담배를 피워보았고, 기꺼이 식사를 하는 사이였다. 담배를 처음 피웠을 때 부푸는 목구멍을 상상했다. 핏줄이 실금처럼 이어져 붉지만 살은 하얗게 질린다든지. 울고서는 곪아버린 살점을 생각했다. 그새 김칫국물이 상에 굳어서 행주를 문댔다. 끼끽 소리는 행주와 상에서 나지 김칫국물이 아니었다. 거품이 흘러내리는 소리며 물소리가 그릇보다 조용하다 다시 떠올려본다. 나도 딸꾹질이 훨씬 요란하다.


영화 속 형사들은 서에서 주로 숙식을 해결했다. 양치질을 하고 나와 늘어진 티셔츠에 입가를 닦기도 했다. 몸으로 뛰는 그들 뒤에서 로비를 하는 검사가 내 행색에 가까웠다. 흰 셔츠를 검은 슬랙스에 넣어 입었다. 조폭도 그러던가. 집에 들어가면 틀어두고 잠든 텔레비전을 껐다. 어제의 영화는 형사와 조폭이 분간이 안 됐다. 비슷한 대사를 들어본 것 같다. 늦은 귀가도 내 일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업무를 나한테 돌렸다. 그걸 쉬쉬하는 건 영화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게 쌓이다보면 이렇게 남아있는 날이 생겼다. 부러 일을 밀어놨다 떠넘기는지도 모르겠다. 스물여덟 살 11월 23일 3시 17분. 분할 시기도 시간도 지났다. 그냥 허기가 들었다. 나는 영화 속 형사가 아니니 쟁여둔 간식이나, 같이 배를 달랠 동료가 없었다. 그러고보면 공복감이 든단 말도 우스웠다. 배가 비어서 그런 기분이 들어온다니. 빈곳에 들어오는 것들을 생각하기 전에 서둘러 찬바람을 맞았다.

이 시간에 열린 가게는 당연 눈에 띄었다. 죄 똑같이 24시라고 써놓아도 괜찮은 이유겠다. 25시라 쓴 가게도 더러 있었다. 편의점은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컵라면을 먹자니 배가 불러 잠이 올 것 같았다. 막대과자를 집었다. 깨가 박힌 비스킷을 길게 늘인 맛이 아닐까. 어릴 적엔 빼빼로나 초콜릿이 같이 붙어서 찍어먹는 걸로 골랐다. 당을 핑계로 초코바도 하나 골랐다. 계산대에 오니 과자가 원플러스원이었다. 편의점에서 나오자마자 과자를 뜯었다. 남는 하나는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편의점이 서에서 코앞인지라 오는 동안 다 먹지는 않았다. 가루가 날리지 않고 맛도 그저그랬다. 맛있다면 신경이 쏠리니 서류나 읽으면서 먹긴 좋았다. 그래서 이 맛없는 과자가 계속 매대에 있나. 유년시절 누나는 부모님께 늘 맛있는 걸 먹고 싶다 했다. 몇 살이었는지 유추하려면 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사고를 당한 시기를 따져보면… 급하게 서류를 한자한자 읽는다. ‘급하게’와 ‘꼼꼼히’의 어폐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껏 일을 끝냈건만 곧 출근 시간이었다. 마음 놓고 배를 채우고 돌아오는 게 나았다. 돌아올 곳, 돌아갈 곳, 중얼거리다 국밥 생각이 났다. 아까 간판을 봐두었다. 그걸 봐서 생각이 났나 보다. 국밥은 아침이 대목인지 사람이 많았다. 그래봤자 국밥이라 금방 나왔다. 휘휘 저어도 팔팔 끓는 게 잦아들기만 하지 뜨거운 건 마찬가지였다. 순대국도 머리도 식히자고 창밖을 봤다. 해가 뜨는지 슬슬 하늘 색이 하늘색이 돌았다. 몸이 으슬으슬했다. 내가 먹기에 너무 뜨거운 음식이었다. 후후 불어 머리가 멍해져서야 먹을 수 있었다.

값을 치루고 나오자 다들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주욱 지나쳐 뒤를 한 번 돌아보고 과자를 꺼냈다. 이 맛없는 과자는 별 생각 없이 씹기 좋으니 팔리는 게 맞겠다. 남자가 딱 지나는 길목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담배를 들고 양손이 바빴다. 라이더자켓을 걸친 남자는 나보다 훨씬 그 형사들 같았다.

자네 국밥도 먹던가.

머리가 띵해지도록 불면 먹습니다.

과자도?

하 형사님 구름과자랑 비슷하죠.

남자가 담배를 주욱 빨았다. 담배 끝이 벌개지는 게, 뒤쪽에서 뜨고 있는 해 같았다. 빨아들인 만큼 뱉는 연기도 길었다.

담배 그렇게 피우면 머리 안 아프십니까.

한숨만 뻑뻑 쉬느니 이게 낫다네. 금방 피워버리기는 한데.

남자가 말한 대로 금방 담배가 다됐다. 나는 아직 과자가 남았다. 내밀자 웃으면서 하나를 빼갔다. 모양새가 담배와 크게 다르지 않단다. 남자가 피우는 시늉을 하다 먹다가를 반복했다.


최고의 연기였어 장혜진!

강성중이 손뼉을 쳤다. 쌍수가 부딪치는 소리에 속도가 붙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무얼하든 극적이었다. 그 앞에서 눈썹하나 꿈틀해선 안됐다. 그렇다고 웃지도 않는 건 제법 어려운 일이었다. 십수가 넘는 해가 지나도록 그랬다. 강성중이 말한 연기는 쉬운 편이었다. 보통 사람처럼 화를 내고, 따지고, 웃으면 됐다. 간단하게 말하면 보통 사람 흉내이니 달갑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다음엔 뭘하고 싶어? 응?

이번엔 강성중이 의견을 묻는 지문을 이행했다. 다음에 이어져야 할 말을 떠올렸다. 보통이라면 여길 박차고 나갔다. 나는 허강민의 안부를 물었다. 강성중은 입꼬리만 주욱 울렸다. 번들거리는 눈만 아니면 요란한 구석이 없었다. 이번엔 따라 웃을 차례였다. 허강민, 허강민. 중얼거리더니 두 손으로 단상을 내리쳤다. 마음에 쏙 드는 소리만 한다니까, 어른들 장난감은. 굳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며 상기 시켰다. 지금까지 오며 외워둔 대사와 지문을 떠올렸다. 어깨를 작게 으쓱했다. 좋은 생각이 났다며 퇴장하는 강성중으로 장이 끝났다.


화투짝에 우산을 쓴 사람이 섰다. 옆으로 개구리가 사지를 벌리고 뛰어갔다. 비, 12월 이었다. 창밖에는 사람이 없었다. 보도블럭 위에 망가진 우산이 버려지긴 했다. 저 우산이며 비며 벌써 며칠째였다. 겨울장마라니 말만 들어도 스산했다. 그렇건만 창가에 서서 들어보면 딴판이었다. 글로 받아적는다면 토닥토닥 정도 되었다. 다독이는 소리 같아 창에서 떨어진 자리를 찾았다. 옆에 화분을 낀 자리였다. 제법 큰지라 유리벽 너머 풍광을 가렸다. 비 내리는 날 카페여서일까 옆 테이블도 비었다. 거기서 또 옆 테이블에나 사람이 둘 앉아 있었다. 옷차림이며 스스럼 없이 웃는 게 직장동료로 보였다. 보였다. 소매와 다리로 시선을 돌렸다. 대학가에서 산 스웨터와 바지였다. 유달리 말할 구석이 없는 옷에, 꽤나 공을 들였다. 지나가는 대학생들을 낱낱이 살피어 흐리게 남는 인상을 골랐다. 수수함을 쫓은 건 아니었다. 수수하단 것도 특징으로 잡혔다.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인상을 꾸며내 휴학생이 되었다. 2년 전에는 안약을 넣는 시늉도 했다. 수많은 백돌 틈바구니에 아래가 깨진 알 같았다. 나를 바둑알로 쓰느냐 하면 잘 모르겠지만. 바둑알은 그 사람이었다. 흑돌이겠다. 검은 옷을 입었지만 행색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속이 검단 말도 아니었다. 제가 느끼는 감정을 한 통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거무죽죽한 것을 뒤집어썼다. 무어라 부르는질 모르니 단방에 뒤섞었는지. 진동벨이 울렸다. 회사원의 뒷목에 목걸이가 보였다. 팔찌나 목걸이도 고려해 봄직했다. 몇 년 후에, 회사원으로 나를 꾸며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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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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