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현실이 아니었으나, 꿈 또는 허상이라 할 수도 없었다. 바람이 스치되 새가 울지 않고 햇살이 비추되 향기가 없었다. 그러나 생멸이 본디 하나이며, 이승조차 실존하지 아니한다는 일설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다. 그저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백날 삼청동과 종로만 오가던 터에 진고개로는 걸음 할 일이 없었다. 토질이 질고 경사가
유독 달만이 밝은 밤이었다. 보름도 아니거니와 한밤중은 더더욱 아닌, 그저 모호한 때였다. 별빛도 등불도 늦겨울 바람 앞에 파리하게 떨고 있던 차라, 수면에는 오직 둥그런 빛무리가 삼베 얽힌 모양으로 차분히 일렁이고 있었다. 그 광경은 머잖아 다가올 그믐과 무관해 보였다. 임금이 아관俄館으로 거처를 옮긴 지 달포가 지났다. 내 나라를 두고 어디를 가냐던
임금은 댓돌 위에 걸터앉아 기가 찬 광경을 응망하였다. 직전까지 소리 지르며 몸부림치던 내관 유재현이 차가운 돌바닥에 축 늘어진 채로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뿐인가.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와 뜨거운 김이 뒤섞였다. 궁인들은 입과 코를 틀어막은 채 사방으로 달음박질쳤다. 고인 웅덩이에서 피어오르는 비린내가 지독하다. 그보다 더 지독한 것은 한 식경 째 미동
온몸이 내리쬐는 일광日光에 절절이 빛바랬다. 썩지 못한 피부가 늦여름 열기 아래에서 펄펄 끓는다. 의식에 오감이 빌붙었다. 뒤범벅된 통증이 눈꺼풀에 추를 얹어 인내의 무게를 어림잡았다. 몸 누인 돗자리에 말라붙은 피가 뒤척임마다 쩍쩍 울부짖으며 갈라졌다. 제깟 것도 몸에서 나온 거라고 여태 생인 줄 아나 보다. 근원에서 유리되어 떠도는 흔적이 꼭 제 모
한정훈은 살았다. 이것을 '살았다'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생각을 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을 죽었다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그것은 연장선이라기보다 되풀이에 가까웠으므로, 다 꺼진 양초를 바라보며 익숙한 온기를 강박적으로 떠올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정훈에게는 '삶'이라는 글자가 어색했다. 희끄무레한 전등 아래 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