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티

기억의 형상 上

허티 기억상실물

3000_PPS by 삼천
101
7
1

*개연성 제로. 퇴고 없음


어떤 사람이 21년을 살았다고 치자. 그 사람이 살아온 21년에 대한 기억을 송두리째 잊어버렸을 때 과연 그 사람을 기억을 잃기 전과 동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생김새도 같고, 습관도 같으며, 목소리도, 눈빛도 똑같으나 오롯이 기억만을 소실했다면.

유전자적으로는 변질된 것이 없으니 동일한 건가?

글쎄.

적어도 도은호가 생각하기에는 아니었다. 사람과의 관계를 정의할 땐 유전자만 따져 보는 것이 아니니. 그 사람의 성격, 그와 보낸 시간, 함께 했던 기억들 그 사이에서 쌓아온 서로간의 유대감 등 여러 복합적인 것들이 결합되어야만 비로소 한 가지 관계를 정의하기에 충분한 요소가 된다. 한마디로 관계는 단순한 개인과 개인이 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소리다.

애초에 사람이란 게 단수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니 더욱 그랬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 우리가 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형성된 시간이야말로 관계의 모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 보았을 때 과연 저 채봉구는 자신이 알던 그 채봉구일까?

지난 21년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려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기 이름이 채봉구인지도 모르고, 제가 뭘 잘했는지, 뭘 좋아했는지도 잊어버린 저 사람이 과연 자신이 사랑한 그 남자일까?

그에겐 저와 함께 데뷔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억도 없고, 시리도록 추운 겨울 날 찬바람 맞아가며 공을 찼던 기억도 없으며, 함께 뮤지컬을 보러 갔다가 손을 잡고, 사우나에서 제 고백에 대한 답을 들려주고 했던 기억도 없는데.

과연 그가 제가 사랑하는 채봉구가 맞는가?

질문이 거듭될수록 대답은 명료해진다.

아니.

그렇다면 이번엔 질문의 궤도를 조금 바꾸어 보자.

저 채봉구가 자신이 사랑하던 채봉구가 아니라면 자신은 그를 그냥 둘 수 있는가?

포기할 수 있나?

뜨끈뜨끈. 다가오는 여름의 더위를 증명하듯 뜨거워진 오월의 햇살이 목덜미에 쏟아졌다. 고개를 돌려 커튼을 친 도은호는 완연한 병자의 모습으로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남자를 복잡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포기할 수 있을까? 대답하지 못한 질문은 속에서 끈질기게 되풀이된다. 서둘러 그 엉성한 답이라도 내놓으라는 듯이.

굳이 따지자면 아니에 가깝나….

미간을 꾸깃꾸깃하게 구기며 고민하던 도은호가 이내 발라당 뒤로 엎어졌다.

“하아아…, 존나 모르겠다….”

병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천장을 바라봤다. 펄럭이던 커튼이 가볍게 콧대와 턱을 스치며 커튼 사이로 창문 너머 풍경이 엿보인다. 제 마음이 우중충하건 말건 하늘은 쓸데없이 쾌청하기만 했다.

정말이지, 야속하도록.

기억의 형상

 

 

 

 

2중 추돌 교통사고에서 기적적으로 팔꿈치 하나 부러지고 살아났던 채봉구가 기억을 잃었다. 감격을 맛보기도 전에 찾아온 소식에 도은호가 처음으로 보인 반응은 ‘그게 뭔 소리야?’ 였다. 심한 부상을 입은 건 아니건만 정신적인 충격이 심했던 건지, 다른 뭔 일이 일어났던 건지 3월부터 코마 상태였던 채봉구의 몸은 그가 누워 있던 기간 동안 얼추 회복되었는데 깨어나 보니 대가리 속 기억이 날아갔단다. 정말로 이게 뭔 소리냐고.

교통사고에서 팔 하나 부러지고 살아난 대가인가? 채봉구는 정말로 기억을 통째로 잊어버렸다. 의사도 이렇게까지 전부 잃는 건 처음 본다며 당황했다. 의사인 자기가 당황하면 어떡하라고. 그래도 천만다행인 게 일시적인 현상일 테니 그리 오래는 가지 않을 거라 했다. 그 말만 믿고 석 달을 기다렸는데 채봉구의 상태는 여전했다. 여전히 그 속에 다른 영혼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멍했고, 마지막 잎새라도 셀 기세로 기력 없이 병실에 누워 있었으며, 퇴원할 생각을 안 했다. 그때쯤 되자 의사는 슬그머니 말을 바꾸었다. 괜히 기억을 돌려준다고 자극하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고, 환자분은 특히 스트레스에 취약한 편인 것 같으니 이렇게 된 거 그냥 앞으로도 평생 기억 못한다고 생각하고 조심히 챙겨 주라고. 은근슬쩍 병상 차지 그만하고 퇴원하라 권유하는 건 덤이었다.

“채봉구 환자 상태는 그래도 양호합니다. 부러졌던 팔꿈치 뼈도 잘 붙었고요. 워낙 움직이질 않으셔서 체력이 떨어진 것 빼곤 괜찮으니 재활 센터에서 한 달 정도 꾸준히 치료받아 보세요.”

바쁜 일이 있어 올 수 없던 환자의 부모님을 대신해서 보호자 역할을 맡게 된 도은호는 의사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농땡이 피우느라 돌아간 붉은 시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무감한 눈의 분홍 머리 형을 향해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다시 봐도 낯설다.

같은 얼굴인데 왜 이렇게까지 낯설지.

기억이 사람을 형성한다는데 그 말에 틀림이 없나 보다. 몇 년을 보고 지내왔던 얼굴이건만 저 순하고 귀여웠던 얼굴이 이렇게까지 차갑고 무기질적으로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그것이 채봉구와의 거리감을 자꾸 소원하게 만들었다. 기억을 잃은 건 그이지 제가 아닌데 괜히 거리를 두게 한다. 남들에게도 왜 그러냐는 소리를 들을 만큼.

사실 의사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기억을 살려 보겠답시고 억지스러울 만큼 과하게 치근덕거리기도 해 봤다. 자기 이름도 모르게 된 사람을 번번이 채봉구, 봉구 형, 우리 밤비 같은 것으로 불러주며 친한 척을 해댔고, 함께 찍은 사진 같은 걸 보여주며 우리 되게 친했다고 설명도 해줬다. 사귀는 사이라곤 얘기하지 않았다. 처음 사귀게 되었을 때도 제가 호모가 되었다는 사실에 피곤할 정도로 혼란스러워했던 사람이다. 그 불안정하고 걱정 많은 형 꼬셔다 사귄다고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 막 기억을 잃어 당황스러운 사람에게 이실직고 하겠는가.

가뜩이나 모든 게 낯설 사람한텐 동성 애인의 존재가 퍽이나 크게 느껴질 테니 그냥 숨겼다. 그 상태로 무려 한 달을 붙어 다녔건만 지난 노력이 죄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니 이젠 뭐 어떻게 설득해서 달래고 꼬셔 볼 의욕도 나지 않았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기억을 잃은 채봉구가 아무런 의지가 없으니 더 그랬다.

깨어난 채봉구는 정말이지 산송장이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말도 잘 안 하고, 의사 표현도 눈을 깜빡이거나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는 것 정도가 전부다. 왜 그러나 싶어 붙잡고 따져 봤더니 돌아온 대답은 황당했다.

‘네가 어느 날 눈을 떴는데 주변이 다 모르는 사람이고, 모르는 세계면 어떨 것 같아. 넌 내 상황에서 태연할 수 있어?’

애정과 정감이라곤 쌀알 한 톨만큼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그리 얘기하니 도은호도 김이 샜다. 당사자부터가 기억을 찾을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왜 타인인 자신이 이렇게 노력해야 하는가. 어쩌면 평생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데 정말로 왜.

그렇지만 채봉구가 하루아침에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그를 좋아하는 자신의 감정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므로 도은호는 할 수 있는 최대한 노력했다. 그렇게 노력했고, 노력했고 또 노력한 결과 아무런 변화 없이 석 달이 지났고 도은호도 이제 백기를 들었다.

같은 얼굴을 하고 정떨어지는 행동만 하는 남자를 석 달이나 보고 있었더니 제가 환상을 좋아했나 싶어진 까닭이다. 남아있는 감정마저 전부 흐려지기 전에 그냥 애틋하게 저 혼자 끌어안고 추억하고 말련다. 모처럼 풋풋하고 거대했던 제 첫사랑이 최악으로 끝나길 바라지 않아 내린 최선의 조치였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퇴원할 짐을 가득 안고서 의사의 말을 듣는 채봉구는 여전히 인형 같은 얼굴이었다. 이만 나가 보라는 말과 함께 병실을 빠져나왔다. 그대로 석 달을 눌러앉아 살았던 병원을 나오자, 석방이라도 된 양 해방감까지 들었다.

이 지긋지긋한 병원, 내가 두 번 다신 오나 봐라.

도은호는 거대한 병원 건물을 향해 속으로 야유를 퍼붓고 채봉구를 돌아보았다. 이제 막 퇴원해 제 집으로 가는 길을 모르는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저만 보고 있었다. 또 저 눈이다. 네가 알아서 할 거지? 하고 묻는 듯한 눈. 지난 석 달 동안 질리도록 봐 이젠 속이 매스꺼워지기까지 하는 눈.

저 눈을 하고 제게 책임을 떠넘기는 짓엔 이제 신물이 났다.

내가 등신 호구도 아니고 언제까지 도와줘.

도은호는 이제 마음을 정리했다. 기억을 잃은 채봉구는 제가 알던 형이 아니고, 제 애인이 아니었으며, 석 달이면 많이 기다려 주었다. 그 시간 동안 채봉구가 먼저 다가올 낌새라도 보였다면 모르겠는데, 흥미조차 없어 보이니 다시 사귀는 건 텄다. 애초에 자신이 그를 다시 좋아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 원….

봉구 형 보고 싶다.

같은 얼굴의 사람을 코앞에 두고도 도은호는 그 생각을 자주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삼백 번도 넘게 한 생각을 속으로 이어나가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택시 불러줄 테니까 그거 타고 가요. 주소는 알죠?”

“…같이 안 가게?”

“제가 거길 왜 같이 가요.”

“…….”

…말투가 너무 차가웠나.

무심코 내뱉었는데 분홍 눈동자가 차가운 말씨에 즉각 반응해 평소보다 커졌다. 하도 같은 얼굴만 보고 지냈더니 그 사소한 변화조차 크게 보여 움찔거린 도은호가 머리를 털었다. 또 얼마나 잡혀 사려고 겨우 저거에 유난을 떨어. 정신 차리자, 도은호. 너 그만둔다며.

채봉구는 눈을 크게 뜨면 다람쥐 같다. 딱히 애인 자랑이나 염장 떠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리고 그 얼굴은 도은호가 그를 좋아하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 그런 걸 무척 오랜만에 보게 되니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한다. 괜히 심장이 뛰어 혀를 차고 있자 그 행동을 무엇으로 해석한 건지 조금 흐린 낯을 한 채봉구가 도로변으로 나갔다.

“나도 택시 정도는 부를 줄 알아.”

가족이고 뭐고 사람에 대한 건 다 까먹었으면서 생활 방식 등 생존에 필요한 건 다 기억하는 야속한 채봉구는 그리 말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 타고 부웅-! 가버렸다. 언제 부른 건지 택시 오는 속도가 무슨 쿠X 로켓배송 급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순간 다가왔다가 제 어깨를 퍽 치고 가버린 이별에 황당해한 도은호는 얼이 빠진 얼굴로 택시 꽁무니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날 비가 온 까닭에 바닥에 맺혀 있는 물웅덩이에서 제 모습이 비친다.

“와… 꼴사나워.”

형편없는 얼굴이라 풍덩, 공연히 잘 있는 물웅덩이를 짓밟자 구정물이 흰색 운동화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윽 차가워. 즉각 행동을 후회하며 물웅덩이에서 빠져 나와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고 있으니 제 모습이 한 번 더 우습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웃음보가 터졌다.

하하하! 때아닌 웃음을 혼자서 터트려 대고 있으니 주변을 걷던 사람들이 자신을 미친놈 보듯 하며 멀찍이 돌아갔다. 하하하, 하하, 하… 하…. 호쾌한 웃음은 뒤로 갈수록 탄식에 가까워졌다.

“진짜….”

뭐가 억울한 건지 저도 상세히 읊어대진 못하겠는데 억울하다.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병원에 3개월을 살 듯이 머물렀음에도 짐이라곤 수건 몇 개와 옷 몇 개가 전부인 백팩을 고쳐 매고 나니 실감이 난다.

썸인지 쌈인지 모를 것을 3년 정도 타다가 작년 겨울에서야 겨우 만나게 돼 반 년을 사귄 채봉구와 헤어졌다.

채봉구가 기억 상실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을 때도, 생판 타인을 보는 눈으로 저를 볼 때도, 은호야 라고 불러주지 않은 지 3개월이 지났어도 인정하지 않았던 사실을 이제야 인정하게 된다. 구질구질하고 지지부진했던 관계를 제가 놓았더니 끝이 났다. 채봉구는 붙잡지도 않고 택시나 타고 가버렸다.

“아니, 내가 같이 안 간다고 했으면 한 번은 같이 가줄 수 있냐고 물어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니면 집에 초대하든가. 내가 자길 3개월이나 도와줬는데 인성이 진짜 왜 그래?”

툴툴.

전 애인을 향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 전 애인. 전 남자친구….

그 단어들이 가슴에 콕콕 쑤셔 박혀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몇 번 찬 도은호는 병원에서 집까지, 도보로 3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생각 정리한답시고 걸어 돌아오면서 결심했다.

그래. 어차피 나도 너 좋아한 거 아니었다, 뭐….

너 말고 예전의 채봉구를 좋아한 거야.

그런 말들을 연거푸 반복하며 제 지난했던 감정들을 끝맺기로.

이제 채봉구와 자신은 남이다.

아, 아니지. 남은 아니지.

도은호는 다급히 핸드폰을 켰다.

 

[형. 연습은 와요. 우리 휴식기긴 하지만 그래도 형 아이돌이잖아요.]

 

남은 아니고 같은 그룹 멤버다. 헤어졌다는 사실이 하도 충격적이었던지라 그 사실도 잊을 뻔해 문자를 보내자 읽음 표시만 뜨고 답장이 없었다. 허이구. 도은호는 기분 나쁜 눈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다 이불을 뒤집어썼다. 신경질적인 타자로 연습실 주소를 찍어 보내고 잠을 청했다. 계속 이렇게 열불이 나 있을 바엔 잠이라도 시원하게 자자 싶어서. 첫 이별의 후폭풍은 다음 날 아침부터 찾아왔다.

“…얼굴 대박.”

거울을 봤더니 잘생긴 늑대 도은호는 어디 가고 웬 퉁퉁 부은 찐빵이 들어 있었다. 특히 벌겋게 부은 눈가는 눈 뜨고 못 봐줄 수준이라 다급히 찬물을 쏟아부었는데 그러고 있으니 이상하게 또 눈물이 나왔다. 닦는데도 계속 나온다. 천년의 사랑을 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그 형이 생각나서 진짜 계속…. 결국 세수로 해결이 안 되길래 그냥 세면대 잡고 펑펑 울었다. 와, 진짜 찌질해. 힙합 씬에서 실력 없는 것들이 헤어졌다고 연애 시절 썰 과장해서 가사로 쓰고, 곡 내며 울고불고 술 마시는 거 정말 이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짧은 순간이지만 그러던 이들이 왜 그따위로 살았는지 이해가 되어 비참했다.

한참을 울고 나오니 두 배로 못생겨진 찐빵이 있어 얼음찜질부터 했다. 봉지에 얼음 몇 개 대충 담아 넣고 눈 위에 올려둔 채 숨을 골랐다. 원래 첫 사랑은 안 이루어지는 거라잖아. 근데 난 사귀기까지 했으니 운이 좋지. 근데 끝이 이 모양이라 그렇지.

자위인지 자학인지 모를 것을 중얼거리고 있으니 징징, 리더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연습 1시간만 당기자는 얘기에 어어, 대충 대답하던 도은호는 문득 든 생각에 입을 열었다.

“봉구 형한테는 얘기 했어?”

-채봉구 이야기가 왜 나와? 걔 퇴원했어?

“어제 퇴원했는데 관심 좀 갖지.”

-아… 걔 연습은 할 거래? 안 할 것 같은데. 알아서 하라 해. 넌 일단 오고.

리더라는 사람이 무슨 이렇게 무책임하지. 시니컬한 말투를 듣고 있으면 켁 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사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채봉구는 그가 깨어난 첫날 멤버들이 다 같이 찾아가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할 때도 무표정한 얼굴로 딴 곳을 보고 있었으니. 심지어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는 귀찮으니 자꾸 찾아오지 말라고 한바탕 하기도 했다. 그 일로 빈정이 상한 멤버들이 몇몇 있었다. 정확히 얘기하면 7인조인데 저와 채봉구 빼고 다 빈정이 상한 상태였다. 덕분에 넌 아직도 걔 병실 다니냐? 너도 참 지독하다. 무슨 사귀냐? 등 멤버들로부터 독하다는 소리를 데뷔하기 전보다 더 많이 들었던 도은호는 일단 알겠다 답하며 통화를 끊었다.

이거 채봉구는 모르는 것 같은데.

어쩌다 멤버들과의 관계가 서먹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데뷔 4년 차로 계약 기간이 3년이나 더 남은 팀이었다. 어떻게 이번에 연습을 함께하면서 조금씩 풀어 보긴 해야 할 거라 전화를 걸까 고민하다가 그냥 문자만 남겼다. 전화를 걸어서 멀쩡한 목소리를 낼 자신이 없던 탓에.

 

[형. 오늘 연습 1시간 당긴대요. 1시간 더 일찍 준비하세요.]

 

보낸 문자에는 곧바로 읽음 확인이 떴으나 역시나 답이 없었다. 이 형 그냥 안 오는 거 아니야? 넘실거리는 불안감에 입술을 콱콱 씹던 도은호는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이고 허공에 으아악! 답답한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 그래도 안 오진 않겠지.

채봉구 성격이 빈말로도 유순하고 다루기 쉽다고 말할 순 없었으나, 사람이 그렇게 무책임하진 않았다. 비록 기억을 잃은 뒤엔 본인이 해야 할 모든 걸 제게 떠넘기곤 했지만 설마 연습까지 그러겠는가.

그의 얄팍한 책임감을 믿어보기로 하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조금 느긋하게 출발하고 싶었는데 머릿속을 채운 생각이 너무 많아서 몸 좀 움직이고자 약속된 시간보다 1시간이나 먼저 도착하게 되었다. 일찍 온 김에 춤이나 좀 연습해 볼까. 가뜩이나 팀 내에서 춤 실력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는데 채봉구 챙긴다고 몇 달간 제대로 연습하지 못했으니 폼이 많이 무너졌을 게 분명했다. 1시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단번에 나아지거나 하진 않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야 나을 거란 마음에 망설임 없이 연습실 문을 연 순간이었다.

탁, 탁, 타닥.

운동화가 바닥을 찍을 때 들리는 특유의 발소리가 연습실을 울렸다. 이런 박자감은 보통 춤 출 때나 나는 건데. 사실을 인지한 도은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벌써 왔다고?

누군진 몰라도 기적 같은 일이다. 우리 그룹에서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있었다니. 어쩌면 멤버가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 속에서 안으로 들어가니 조금까지 했던 가정을 모조리 깨부수는 이가 연습실 구석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게 보였다. 노래에 맞춰 분홍색 머리카락이 봄꽃처럼 살랑거린다. 도은호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뭐야. 저 형이 왜 여기 있어?

제가 시간을 착각했나 싶어 우선 손목에 찬 시계부터 확인했다. 아닌데. 1시간 이른 거 맞는데. 고장 난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핸드폰으로도 확인했다. 맞는데. 이쯤 되자 세상이 절 속이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연습실 벽에 걸린 시계까지 확인해 본 도은호는 하릴없이 1시간 이른 시각을 눈에 담고서 입을 달싹였다.

“…왜.”

거울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분명히 시선이 얽혔음에도 채봉구는 별다른 말없이 다시 노래를 틀고 춤을 추길 반복했다. 뭘 추나 싶었는데 자신들의 데뷔곡 춤이었다.

…춤 선은 여전하네.

가볍고 하늘거리는, 현대무용과 나왔다 해도 믿을 법한 저 여린 춤 선은 기억 그대로였다. 웨이브를 칠 때의 유연함도, 위험하다 싶을 만큼 부드럽게 휘어지는 허리도….

‘야, 좀… 적당히 좀 밀어 붙―, 아!’

미친.

대뜸 원치 않은 기억이 떠올라 아래로 피가 몰렸다. 황급히 두 손으로 제 뺨을 소리나게 세 번 연달아 때리니 노랫소리가 뚝 하고 멈추었다. 발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미친, 진짜 식겁했네. 도은호는 가까스로 기상하지 않은 아래를 힐끔거리며 얼얼한 볼을 문질렀다. 느닷없는 자진 폭력 쇼를 눈앞에서 본 채봉구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이상하단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어색한 정적이 이어진다. 조금 부끄러워 큼큼 목을 가다듬은 도은호가 가방을 내려두었다.

“…일찍 오셨네요.”

“…….”

“언제부터 와 있었어요?”

이번에도 대답 안 하겠지. 그걸 알면서도 정적이라도 채우고자 질문하며 후드티를 벗은 찰나였다.

“…2시간 전에.”

“…네?”

뭐지. 내가 환청을 들었나.

후드티를 벗던 순간에 자그맣게 들린 말이라 충분히 헛것을 들은 가능성이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사람 말소리처럼 들릴 때가 종종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그런 것일 거라 생각하며 반문했는데 착각이 아니었다.

“2시간 전에 왔다고.”

채봉구는 정말로 대답했다. 제 질문에. 세상 다 산 사람 같은 얼굴로 너도 내 처치가 되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느니 뭐니 같은 말을 늘어놓았을 때와는 달리 조금 더 온건한 목소리로 말이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눈동자의 움직임이 느릿해졌다. 숨소리도 덩달아 평소보다 둔해진다. 맥박이 아주 천천히 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쯤 현실감이 밀려왔다.

“…아. 그래요? 되게 일찍 왔네.”

말을 내뱉으면서도 제가 뭐라고 말하는 중인지 의식되지 않았다. 온 신경이 직전에 대답에 쏠린 탓이었다.

뭐야? 왜 대답했지? 오늘은 기분이 좀 좋나? 아니면 뭐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건가… 하긴 저 형도 이제 컴백 준비에 뛰어들 때가 됐긴 했지. 밥줄이 걸려 있어서 위기감이 느껴졌나? 아 그런 거라면 별론데. 그런 것보단 그냥….

나 때문에 대답해 준 거면 좋을 텐데.

거기까지 이어진 생각에 머리가 홧홧해진다. 당장이라도 어디 벽에 처박고 싶은 심정이 돼 거울에 기댄 채 멍하게 있으니 사람 마음에 불을 질러 넣고도 태연히 연습을 시작한 이가 입을 뗐다.

“네가 연습 좀 해 두라며.”

“…제가요?”

“병원에 있을 때.”

“아.”

그러고 보니 한 달 전인가,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 하고 빈둥거리며 누워 있는 채봉구한테 잔소리를 한가득 퍼붓긴 했었다.

‘형 그렇게 있다가 진짜 소 돼요. 누워 있는 거 그닥 좋아하는 편도 아니면서 왜 이래? 차라리 게임을 하자고 하든가. 좀 움직여요. 형 움직이는 거 잘하고 좋아하잖아요. 나랑 축구도 했으면서. 그보다 메댄이라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안 움직여도 돼요? 장점이었던 유연함 다 사라지겠네. 형 기억 찾고 돌아가면 연습 좀 해서 굳은 몸 끌어올려야 할 텐데 형이 이러고 있으면 그 시간도 더 길어져요. 나중엔 형만 힘든 길이라고요.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아요? 대답이라도 좀 하지. 형, 야야. 채봉구…!’

정말로 한가득 쏟아부었고 귀담아들을 거란 기대도 안 했는데 그걸 들었다는 건가? 거듭되는 의외성에 할 말이 뚝 떨어진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가장 어색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이걸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하나? 아니면 당연한 건데 왜 이제 하냐고 받아쳐야 하나. 뭐가 제일… 뭐가 제일 평범한 거였지.

썸 탄 기억이 하도 길어서 그 이전에는 서로를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머리를 긁적이던 도은호가 멋쩍은 얼굴로 엄지를 들었다.

“멋지네요. 굿. 역시 메댄.”

“…….”

“…계속 연습해요. 저도 옆에서 봐줄게요.”

“너 춤 못 추던데.”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기억도 없으면서.”

“여기 있잖아.”

쪼그려 앉은 채봉구가 핸드폰을 가리켰다. 아, 그거로 그새 봤구나. 하긴 생각해 보면 데뷔곡 연습한다고 데뷔곡 안무 영상부터 봤겠네. 와, 나 그때 진짜 춤 못 췄는데.

원치 않게 까발려진 과거에 민망함은 제 몫이 되었다. 어째서인지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평소보다 한심해하는 기색이 더 짙어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벌떡 몸을 일으킨 도은호가 채봉구 옆으로 걸어갔다. 거울을 앞두고 나란히 선 채 바로 최근 컴백의 타이틀 곡을 틀었다.

“그건 진짜 옛날이고요. 이젠 잘하거든요.”

투덜거리며 흘러나오는 곡에 맞춰 채봉구에게 하도 얻어 맞고 꾸중당하면서 배워 뇌리에 아로새겨진 듯한 안무를 추자 채봉구의 눈이 평소보다 이채롭게 빛났다. 기억을 잃어도 춤이 좋은 건 여전한가 보다. 무슨 본능에 각인되어 있기라도 한 건가? 신기한 눈으로 그를 힐끔거리며 완곡하고 나니 조금 숨이 찼다.

“…어때요?”

이게 무슨 사내 월말 평가도 아니고 오디션 현장도 아닌데 긴장이 됐다. 지금의 채봉구는 제게 아무런 사감도 없으니 어쩌면 이번에 받는 평가야말로 애정이나 배려 같은 게 들어가지 않은 정확한 감상일 거란 생각에 더 입이 말랐다. 기껏 물어봤는데도 대답이 없으니 불안하다. 못 췄나? 바짝바짝 타는 속을 애써 숨기고 있자 마침내 심사자의 입술이 떨어졌다.

“…잘하네.”

굳었던 몸에 긴장이 풀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 그쵸? 늘었죠? 이거 다 제가 피 땀 눈물 흘리면서 얻어낸 성과라고요.”

칭찬해 주니 텐션이 올라가는 건 불가항력이다. 도은호는 저도 모르게 와락, 채봉구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가 놀란 눈을 마주하고 덩달아 굳었다. 딸꾹. 먼저 어깨동무했으면서 당황스러운 딸꾹질이 제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양 오랜 정적이 이어진다. 눈은 여전히 서로를 향한 채였다.

“아… 죄송, 죄송해요.”

굳은 채봉구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도은호였다. 3개월 만에 처음으로 기껏 부드러워졌던 분위기를 제가 망친 기분이 들어 속이 쓰렸다. 그러게 왜 거기서 팔을 걸쳐 가지고. 니가 아직도 채봉구랑 사귀는 사이 같아? 여전히 저 형이랑 몇 년 지기 친구야? 스스로를 나무라며 황급히 팔을 거두고 거리를 벌렸다. 손이 닿은 어깨를 가볍게 털어낸 채봉구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노래를 틀었다. 곡이 바뀐다. 데뷔곡이 아닌 최근 컴백 곡으로. 채봉구의 몸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탁, 타닥. 끽.

발소리가 연습실을 울리며 동작이 이어진다. 도은호는 평소보다 멍청하게 춤 추는 채봉구를 바라보았다. 넋이 나간 듯 있으니 3분의 시간이 흐르고 곡이 멈췄다. 채봉구의 춤도 같이 끝나 솔직한 감탄이 터졌다.

“벌써 안무 다 딴 거예요?”

숨기지 못한 동경심이 표정으로 표출됐다. 채봉구가 부담스러우리만치 눈을 빛내는 한 살 연하에게서 슬그머니 물러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보여줬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빠르잖아요. 뭐 챌린지처럼 간단한 몇 동작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곡이 짧은 것도 아닌데. 이걸 한 번 보고 따는 거면 천재 아닌가? 아니면 내제된 기억력이 힘을 발휘한 건가? 아니, 그보다 내 춤 보고 땄는데 느낌이 왜 이렇게 다르지….”

진지한 고찰 끝에 열거한 의문들에 채봉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내가 너보다 잘 추니까 그렇겠지.”

“…형 안무도 몰랐으면서 그런 말 하니 진짜 재수 없는 거 알아요?”

“억울해할 시간에 연습이나 더 해.”

“와 그 말 그립다. 예전에 진짜 지겹게 들었는데.”

익숙한 어투에 관성적으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도은호는 그제야 위화감을 느끼고 대화를 멈추었다.

“방금 우리, 뭔가 되게 편했지 않아요?”

“뭐가.”

“형 기억 잃고 나서 처음으로 대화 길게 했잖아요.”

“이게 뭐 별거라고.”

“그 별거 아닌 걸 형이 3개월이나 안 해줬거든요?”

기가 막혀 따지자 채봉구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땐 나도 머릿속이 복잡했으니까.”

“…이걸 해명해 줄 줄은 몰랐는데.”

이러다 아주 사과까지 듣겠다 싶어 저도 모르게 호들갑을 떨게 됐다.

“형 오늘 뭐예요? 갑자기 왜 이러지. 뭐 잘못 먹었나?”

첨언하며 손을 뻗어 채봉구의 이마를 매만졌다. 너무 평소와 다른 짓을 하길래 열이 있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그런 건 또 아니었다. 닿았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전보다 조금 굳은 표정이 시선 끝에 놓였다.

아차, 또….

분위기가 풀어져버리니 이런 부작용이 있다. 자꾸만 옛 생각이 나 몸에 배인 태도로 그를 대하게 된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스킨십 별로 안 좋아할 텐데. 데뷔 전 연습생 초기 시절의 채봉구는 데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극도로 불안정하고 예민했다. 그때가 생각나 다시 거리를 두려 하자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든 채봉구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너 되게 유난스럽다.”

“…오, 그것도 형이 맨날 하던 말이었는데.”

“네가 매일 유난스러웠나 보지.”

안 봐도 훤하다는 듯 지친 숨을 내쉰 그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러고선 다시 연습을 시작해 도은호도 약속했던 대로 채봉구의 춤을 봐주었다. 어디가 틀렸는지, 전에 형이 췄던 춤과는 어떻게 다른지 등을 짚어주고 있으니 어느 순간부턴 춤을 완전히 익히는 데 성공한 채봉구가 역으로 도은호의 춤을 봐주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그가 요구한 대로 춤을 추고 있었고 또 정신이 번쩍 들고 나면 그의 구령에 맞춰 움직이는 자신이 있었다. 그 사실이 우스워 연습하다 말고 웃음기가 터졌다. 하필이면 몸을 아래로 쓰러트리는 통작에서 그 웃음이 터진 바람에 균형이 무너져 바닥에 엎어지게 됐다.

“…왜 그래?”

미쳤어?

그런 뒷말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듯했다.

“형, 형은 진짜 아이돌 해야 할 팔자인가 봐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춤 추니까 사람이 갑자기 선해지잖아. 까칠하게 굴지도 않고.”

“헛소리할 거면 나가라.”

“봐봐. 분위기도 자연스러워지고.”

대하기 한결 편해졌다고, 다른 멤버들 와도 지금처럼만 해달라고 부탁하자 채봉구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몸을 돌렸다. 무신경한 몸짓과 다르게 벌게진 귓등이 도은호의 시선을 채갔다.

부끄럽나 본데.

말로 하지 않아도 눈빛이나 몸으로 다 보이는 게 채봉구다. 적어도 제가 아는 채봉구는 그랬다. 그래서 최근 들어 표정이 읽히지 않았던 채봉구가 더 낯설게 느껴지고 초조해졌는지도 모른다. 이제야 좀 제가 아는 분위기로, 그리워했던 시기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에 숨을 쉬기가 편해졌다.

역시 채봉구는 채봉구네….

기억이 없어졌어도 아예 다른 사림이 된 건 아니었다. 모든 기대감을 내려놓고 나서야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게 우습다. 조금 자조하듯 몇 번 웃던 도은호는 등에 땀이 맺힐 정도로 연습을 이어나가는 남자를 눈에 담다가 짧은 반성을 했다.

그동안은 나도 너무하긴 했었지.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자꾸 자신이 알던 형상을 끼워 넣으려고 했으니 그도 그 나름대로 무척 스트레스를 받을 터였다.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서야 채봉구가 보인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특정 모습을 강요하지 않았을 때 비로소 채봉구 특유의 행동들이 보인다는 뜻이다. 제 욕심이 그걸 덮어두고 가린 것 같아 후회됐다. 관계가 자꾸 삐걱거렸던 데는 비단 채봉구의 책임만 있던 게 아니었다.

그를 입맛대로 교정하려 했던 제게도, 시간을 주지 않고 아닌 척 몰아붙였던 제게도 명실한 책임이 있었다.

고찰을 통해 알게 된 사실에 한숨을 내쉬며 반성을 마쳤다.

그때는 자신이 초조해서 그랬던 거니 이젠 괜찮을 거다. 서로 마음을 정리했으니까. 이제 자신은 그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 거고, 채봉구는 그런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을 터였다. 비로소 첫 단추를 제대로 맞춰 간 느낌에 속이 후련하다.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했다.

기억을 잃기 전인 채봉구와 잃은 후의 채봉구는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렇게까지 서로 속을 앓을 일 없었을 텐데.

‘야, 은호야. 똑바로 좀 해라!’

‘은호야, 끝나고 점심 먹으러 가자.’

‘도은호 씨? 밥 드시고 얘기 좀 하죠?’

‘아! 그걸 거기다 왜 놓는데!’

‘내가 널 좋아하긴 무슨. 알고 보면 네가 날 더 좋아하는 거 같아.’

‘…진짜라고?’

‘…도은호. 점심 먹으러 갈래?’

‘내가 어색하게 대하긴 뭘 어색하게 대해….’

‘…야, 은호야. 전에 네가 말한 거, 나도 비슷하다고 말하면 어떡할래.’

‘좋다고 한 거.’

‘아, 사귀자고!’

‘…사랑한다.’

‘머리 예쁘게 하고 왔네.’

“…….”

정말이지, 이렇게 다른데.

폐부 가득 공기를 들이마시고서 천천히 내쉬었다. 속에서부터 달아오른 열을 식히듯이, 도은호는 오랜 심호흡으로 지난 3개월간 애가 타다 못해 재가 된 제 마음을 달랬다.

앞으로 특별한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저와 채봉구 사이는 꽤 괜찮아질 거다. 타인 이상 친구 미만, 뭐 그 정도로. 원래 우린 여기서부터 시작했으니까.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드는 의문에 머리를 긁적인 도은호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다시 시작은 못할 것 같다. 그랬다가 지금 거리까지 멀어지면 어쩌려고. 원래 이렇게 겁이 많지 않았는데 채봉구만 엮이면 이렇게 되는 제가 이젠 싫기까지 하다.

…떠오르는 기억들을 타임캡슐처럼 땅에 묻어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포기하겠다 마음 먹었으면서도 습관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 괜히 기술을 탓했다. 그래도 많이 양호해졌다. 이젠 그 형 탓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괜찮아졌으니까.

이렇게 조금씩 괜찮아지다 보면 언젠가는 저도, 채봉구도 모두 괜찮아질 날이 올 거다.

그걸 믿음으로 삼고 도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신 같은 타이밍에 멤버들이 와 연습이 시작된다. 그날의 연습은 꽤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

 

“너 요즘 채봉구랑 안 붙어 다니는 것 같다?”

“…뭐, 이제 그 형도 퇴원했으니까.”

“꼭 전엔 아픈 사람 살피러만 간 것처럼 얘기하네.”

“…….”

정곡이 찔리는 말이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태연하게 폰 게임을 계속하자 그룹의 메인보컬을 담당하고 있던 이가 피식 웃었다.

“속상하냐? 네가 사랑하는 형이 너 잊어서?”

“뭘 또 사랑까지야.”

“예전엔 죽고 못 살았잖아, 서로.”

서로.

그가 덧붙인 말이 역린을 건든다. 어느덧 화면 속 게임 캐릭터는 패배 표시를 띄우며 죽어 있었다. 뭐, 예전이랑 지금이랑 같나.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이어폰을 꼈다. 평소보다 침울한 도은호의 표정을 한참 관찰하던 이가 니들끼리 싸운 거면 잘 해결해 보라며 연습실을 나갔다.

싸우기는 무슨.

오히려 교통사고 이래 이렇게까지 사이 좋은 적이 없어서 탈이다. 바람 잘 날 없던 예전과 비교하면 충격적일 정도로 양호했다. 그런데도 남들 눈엔 싸운 것처럼 보인다면 과거의 저와 채봉구가 어지간히 붙어다니고 친하긴 했나 보다. 인정 받은 기분이라 그런지 괜히 뱃속이 간지러워진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어 제 배를 툭툭 치고 있을 때였다.

“뭐야, 밥 먹고 왔으면서 배고프냐?”

채봉구가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또 그렇게 누워 있네, 도은호. 너 그러다 허리 다 휜다. 오자마자 잔소리를 쏟아대는 걸 보아하니 그간 제가 편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일찍 온다더니 왜 이렇게 늦었어요?”

“재활이 좀 늦어졌어.”

“아, 맞다. 재활은 좀 어때요? 형 춤추는 거 보니까 몸 자체는 괜찮아 보이던데. 역시 체력 문제?”

“뭐, 그렇지.”

“흐음, 다음에 제가 가서 응원해 줄까요?”

“됐다. 내가 뭐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뭐 하러 구경 오냐.”

저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래서 도은호도 먼저 가서 도와주겠다는 소리는 안 했다. 애초에 재활 도우러 가는 것 자체가 거리감을 무너트리는 행동일까 봐 경계한 것도 있었다. 도은호는 에이, 뭔 구경이에요. 응원이지. 하며 너스레를 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봉구가 퇴원하고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그의 상태가 차츰차츰 회복되어 가는 게 눈에 보이니 회사에서도 채봉구의 상태를 고려해 미루었던 컴백 준비를 다시 시작하자는 의견이 나온 참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작곡을 한다고 갈리는 동안, 채봉구는 제게 춤을 가르쳐 준다고 갈렸다. 대표님이 다음 곡은 공백기 길게 가진 만큼 퍼포먼스로 가득 채워 보여주자는 의욕을 보인 탓이다.

덕분에 도은호는 채봉구가 없을 땐 작업실에서 감금 당하듯 살았고 채봉구가 있을 땐 연습실에 갇힌 듯 살았다. 말만 컴백이고 기실 도은호 갈아넣기 프로젝트가 따로 없었다.

“곡 탑라인은 다 땄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요. 형도 같이 갈려야 내가 안 억울하겠어.”

“나는 너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여기서 어떻게 더 갈려.”

“우리 안무 형이 짜잖아요.”

“아.”

전에 말해 주었는데 그사이 잊어버린 것 같은 사실을 콕 짚어주자 채봉구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진짜 최악이라는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팬들 사이에서 표정 잘 쓴다는 말이 수천 번이고 나온 멤버다운 반응에 도은호가 낄낄 웃었다. 실컷 놀리고 있으니 젓가락 같은 종아리에 의해 엉덩이가 한 번 걷어차였다.

“그만 처 웃어.”

“와, 좀 놀렸다고 입 바로 험해지는 것 좀 봐. 형 변했어요. 예전에는 매번 우리 은호 착하다, 역시 은호가 최고네, 멋지다, 뭐 그렇게 얘기하며 계속 쓰다듬어 줬는데.”

“뭐래, 팬들 영상 찾아봐도 내가 너한테 그런 말 한 적은 없던데?”

“들켰네. 근데 우리 영상 찾아서 봤어요?”

누가 권유한 것도 아니고 형이 직접?

기억 잃은 채봉구 치고 상당히 적극적인 태도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은 눈으로 쳐다보니 저도 모르게 제 노력을 발설하게 된 이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곧 민망하게 목덜미를 주무른 채봉구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 상실인 거 안 밝혔으니까 나도 티 안 내야 할 거 아니야.”

“오, 정성이 좀 갸륵한데…. 어떻게, 제가 좀 도와드려?”

억!

능청맞게 굴었다가 한 대 더 차였다. 아씨, 진짜 아파. 무슨 다리가 뼈밖에 없는 사람 같아서 더 날카롭게 아프다. 저런 다리로 춤은 어떻게 추는 거야? 눈물이 핑 돌 것 같아 징징거리니 채봉구가 질색하며 제게 붙어 오는 도은호의 머리를 밀어냈다. 그만 좀 치대. 하루에 한 번 듣는 그 소리를 기어이 오늘도 적립한 도은호가 실실 웃자, 도은호 행복한 모습 못 보는 채봉구가 결이 좋은 은발을 한 움큼 잡아 쥐었다.

“아아, 형! 또 왜요!”

“너 재수 없다.”

“아니, 재수 없다고 사람 머리를 이렇게 막 잡아도 되는 거예요?”

붙잡힌 채 으아악! 득음하고 있으니 연습실에 들어오던 멤버 한 명이 세상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 젓고 도로 나갔다.

“야, 어디 가! 나 도와줘야지!”

“쟤도 널 포기했나 보지, 연습이나 하자.”

사람이 버림받는 모습이 그렇게 좋나. 같은 팀원이 매정하게 돌아서자 오히려 더 만족한 듯 웃은 채봉구가 연습을 종용했다.

어?

도은호는 제가 잘못 봤나 싶어 분홍 머리 형의 얼굴을 다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제가 민첩했던 건지, 아니면 나간 멤버가 가져다 준 웃음의 여운이 조금 진득했던 건지 채봉구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있었다. 끔뻑끔뻑. 붉은 눈이 멍청하게 슴벅거렸다.

“…형 웃었네요. 네 달 만에.”

사막에서 오아시스 신기루라도 본 기분이다. 믿기지 않아 중얼거리자 채봉구가 어이없어 했다.

“나도 사람인데 그럼 안 웃냐.”

“안 웃고 살았잖아요, 계속.”

“웃을 일이 없어서 그랬나 보지.”

“치, 그럼 지금은 많고요?”

“지금은 뭐….”

뜸을 들이던 채봉구가 돌연 도은호를 빤히 응시했다. 도은호는 갑작스러운 시선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분홍 머리통이 따라 모로 기울어진다.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해 손이 올라갈 무렵이었다.

“…너 덕분에 재밌지.”

눈이 마주친 채로 픽, 하고 웃은 채봉구가 이제 정말 연습해야 한다며 음악을 틀었다. 바로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쑤욱, 쿵… 도은호? 뭐 해? 대뜸 폭탄 발언 던져 사람을 뒤흔들어 놓은 주제 저 혼자 멀쩡해진 채봉구가 춤을 가르치다 말고 멍한 도은호를 돌아보았다.

“뭐 하냐니까?”

거듭된 질문에도 도은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너 덕분에 재밌지.

말과 함께 싱긋 휘어졌던 눈매가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도 무한히 되풀이되는 채봉구의 목소리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못했다. 너 덕분에 재밌지, 너 덕분에 재밌지… 너 덕분에…. 벙찐 얼굴로 가만히 있던 도은호는 이내 와락, 달아오르는 얼굴에 황급히 팔을 들었다.

“야, 너 울어?”

그 기행에 채봉구가 다가와 팔을 잡아 내리려 든다. 꼴사나운 얼굴을 들킬 수가 없어 이 악물고 버틴 도은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필사적일수록 직전에 웃는 얼굴이 자꾸만 더 선명해져갔다.

이게 뭐야 진짜. 왜 갑자기 이렇게 훅 다가와?

도은호가 좋아하는 채봉구 특유의 눈웃음이 있었다. 그 귀여운 얼굴로 눈매 휘어 찢어지게 웃어 보일 때면 한 번씩 지나치게 남자다울 때가 있었는데, 이번 웃음이 그랬다. 보고 있으면 괜히 멋지고, 설레고 기분이 들뜬다. 심장의 맥박이 빨라졌다. 꼭 첫사랑을 처음 자각한 17살 연습생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사귀어 줄 거 아니면 꼬시지를 말든가.

취약한 부분을 파고 들어오는 게 비겁하다. 정작 채봉구는 제가 저 웃음에 약한 줄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얄밉고 비겁했다.

“으아….”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어 결국 쪼그려 앉고 양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 살 동생이 왜 저렇게 유난을 떠는지 알 턱이 없는 채봉구가 볼을 긁적이며 민망해했다.

“야, 괜찮아?”

어색해하며 던지는 물음에 불쑥 입이 열린 건 심술이었다.

“은호야.”

“뭐?”

“야, 말고 은호야, 라고 좀 불러줘요. 정 없게, 진짜….”

얼굴을 죄 파묻고 얘기한다고 내뱉는 발음이 옹알이 수준이다. 도은호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불만을 토로했다. 기억을 잃고 나서 채봉구는 저를 계속 야, 아니면 도은호. 둘 중 하나로 불렀다. 그게 도은호는 무척 정 없게 들렸다. 기억이 사라졌으니 정이 없어진 것도 당연하긴 하지만 이젠 좀 다르지 않은가.

서로 마주 보고 웃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는데 호칭 정도는 조금 바뀌어도 괜찮잖아.

딱히 기억을 잃기 전으로 돌아왔으면 해서 꺼낸 부탁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냥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심에 가까웠다. 전에는 그 욕심을 속으로만 품고 입 밖으로 내진 않았는데, 오늘은 담아두기가 힘들었다. 형이 먼저 한 거라며 속으로 항변하고 있으니 유치한 불만을 들은 채봉구가 도은호의 머리를 잡아챘다.

“그거 때문에 이런다고?”

“제가 너무 속상했나 보죠.”

“거짓말은.”

“아, 빨리요.”

“허… 그래, 은호야. 빨리 일어나서 연습 좀 해라.”

“무슨 말투가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듯 그래요?”

“네가 미운 놈이긴 하잖아. 떡 하나 더 주면 좋다고 받아먹을 성격이긴 하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라고 반박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서 반박할 여지가 빈곤해졌다. 자존심 상해 꿍얼거린 말에 채봉구가 키득거렸다. 연하 속도 모르고 좋다고 웃는다. 저 웃음 때문에 제 속은 이렇게까지 심란해졌는데 혼자 아무렇지 않아 하고. 진짜 얄밉다. 확 키스해 버릴 수도 없고.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생각이 혼잡한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한다. 그 탓에 벌떡 일어나 제 뺨을 한 대 내리친 도은호가 웃는 얼굴로 채봉구를 돌아보았다.

“…이제 정신 차렸으니 됐어요. 연습해요.”

“너 자학이 취미냐…?”

“아니었는데 요새 일이 있어서 좀….”

“차라리 나한테 때려달라고 해.”

“아, 싫어요. 형 진짜 개 세게 때릴 거잖아요.”

“원래 아파야 청춘인 거다.”

“뭐래.”

시답지 않은 대화를 주고받으니 어색했던 분위기도 풀렸다. 그래, 이래야지. 도은호는 제 실수로 인해 빚어진 묘한 낌새가 흐트러졌음을 자각하고 안도를 삼켰다. 분명 안심되긴 하는데 약간 아쉽기도 하다. 이중적인 마음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어 반쯤 정신 놓고 춤을 따라 추고 있으니 한 곡을 끝낸 채봉구가 새삼스러운 눈을 했다.

“야, 근데 너 요즘 춤 추는 거 보니까 확실히 내 춤 선이 보이긴 한다.”

춤을 가르친 자기한테 감탄하는 건지, 아니면 그 춤 선을 빼다박도록 열심히 배운 제게 감탄하는 건지 모를 말이었다. 도은호는 시큰둥한 얼굴로 채봉구를 바라보았다. 대답도 없고 반응도 없는 그에 어리둥절해하던 채봉구가 설마 싶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은호야.”

“춤 선이 닮은 게 당연하죠, 제가 누구 제자겠어요.”

“허, 이것 봐라.”

호칭을 바꾸자 냉큼 대답하는 꼬락서니에 채봉구가 눈살을 구겼다. 노골적인 질타에도 도은호가 실실 웃자 유치하다고 평한 그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래도 은호야, 라고 불러줬잖아요.”

“넌 그게 중요하냐?”

“그럼 뭐 다른 게 중요한가.”

시시덕거리니 채봉구가 체념하고 돌아섰다. 형에게서 백기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즐거워졌다. 은근히 다 받아줘, 채봉구? 알고 보면 막 은호야라고 부르고 싶었던 거 아니야? 이 형 안 그런 척 했으면서 역시 나 좋아하네. 한 번 받아준 거로 끝도 없이 위로 솟구친 자신감에 놀리는 말도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 기어이 머리채와 엉덩이를 한 대씩 더 잡히고 얻어맞았다. 그러고도 채봉구는 속이 안 풀렸는지 한 대 더 때리겠다고 달려들어, 도은호는 저를 잡으러 오는 이를 피해 연습실을 뛰어다녔다. 두 남자가 먼지 나도록 우당탕탕 소란을 일으키며 돌아다니자 연습실로 들어오려 했던 네 명의 멤버들이 저것들 또 저런다는 얼굴로 쳐다보다가 도로 나갔다.

“아, 연습실 지들만 쓰나….”

자유 연습인데 정작 연습실을 쓸 수 있는 건 두 사람뿐이었다. 멤버 한 명이 나가면서 뱉은 볼멘소리를 들은 후에야 추격전을 멈춘 채봉구와 도은호가 서로를 힐끔거렸다. 몸은 얌전해졌어도 시선은 아니었다. 한 놈은 놀리고 한 놈은 눈을 부라렸다. 그렇게 한참 형과 눈싸움하던 도은호는 채봉구와 이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워져 결국 빵 터졌다.

숨도 못 쉬고 쓰러져 웃고 있으니 채봉구가 한심해하며 도은호를 모르는 사람 취급했다. 처음 3개월의 갈등이 거짓말 같은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이런 즐거운 시간이 언제까지고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가, 우리에게 여상한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희망을 품고서 물을 마시는 채봉구를 주시한 도은호가 웃었다. 모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그 상태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왜 인생의 굴곡은 항상 행복도가 최고점일 때 찾아오는 걸까?

 

좆됐네.

싸늘한 침묵 속에서 도은호는 결론을 내렸다. 사건의 발단은 어쩌다 보니 생각보다 더 친해진 채봉구가 도은호의 집에 놀러 오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한 달이란 시간이 추가로 흐르면서 꽤 많은 것이 변했는데 그중 하나가 채봉구와 도은호의 사이였다. 도은호는 이제 채봉구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반말과 존댓말을 내키는 대로 섞어가며 그를 대했고, 그만큼 채봉구도 도은호를 편하게 여겼다. 어느 정도냐 하면 연습하다가 도은호가 드러누워 있으면 그 위에 채봉구가 같이 엎드릴 때가 있을 정도였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자연스럽게 함께 보내는 시간도 많아졌다. 연습실에서 뿐만 아니라 이젠 점심 먹으러, 저녁 먹으러 같이 가고 최근엔 영화까지 함께 보러 갔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친해진 그 속도가 경계심을 허물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빠르게 친해지다니. 역시 형이랑 나는 죽이 잘 맞긴 한가 봐.

그런 생각으로 안일하게 채봉구를 집에 들다가 이 사달이 났으니까.

도은호는 사람이 둘이나 있으면서도 쥐 죽은 듯 고요해진 방 안에서 제 발아래를 살폈다.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같이 그 사진을 내려다보고 있는 채봉구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했다.

“으으음….”

으음…. 음….

분홍 머리 형 눈치 좀 본다고 앓는 소리가 자꾸 길어졌다. 이내 머리를 박박 긁은 도은호가 떨어진 사진을 주워 들었다. 문제의 사진 속엔 채봉구와 입을 맞추고 있는 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사귄 지 100일째 되던 날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사귀었을 때 주고받았던 물건은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진이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딱 하나 있는 사진이 이렇게 발각될 줄은 더더욱 몰랐고.

사실 제 탓이긴 하다. 버리겠다 호언장담해 놓고 그 모든 물건을 상자에 담아둔 게 고작이었으니까. 하지만 분명 다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진을 빠트렸을 줄 저라고 알았겠는가. 이게 책장 사이에 끼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친해져 보겠답시고 졸업 앨범 보여주겠다 설치지 말걸. 괜히 들떠서 사고를 쳤다.

이렇게 보니 진짜 연인 같은데.

사귄 지 100일. 얼마나 열렬하고 풋풋한 시절인지 아직도 기억이 났다. 그 탓에 그 시절의 감정이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에도 빼곡하게 담겨 있어 눈치가 보였다.

하… 초대하지 말걸.

후회가 밀려왔지만 어떡하리. 이미 사진은 공개됐고 채봉구의 얼굴은 백설기 떡보다 새하얗게 굳어 있었다. 깊게 깔린 정적은 중력이 되어 도은호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긴 해 힘겹게 입이 열렸다.

“…이거 우리가 장난으로 찍은 건데.”

“누가 장난으로 이런 사진을 찍어.”

“…….”

안 믿네.

거짓말로 스리슬쩍 넘어가 보려고 했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채봉구가 흔들리는 눈으로 도은호가 쥔 사진을 가져갔다. 안 뺏기려고 힘을 주면 사진이 찢어질까 싶어 순순히 내어준 도은호가 한숨을 삼켰다. 경악한 분홍색 눈동자가 충격적인 사진을 면밀히 뜯어 보았다.

“…진짜네.”

“…….”

“합성 이런 거 아니고 진짜 너랑 나네.”

“형 이게….”

“너랑 내가 왜 뽀…, 하. …왜 이러고 있어?”

차마 뽀뽀라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한 채봉구가 물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질색할 일인가…. 자기도 나 좋아했으면서…. 헤어진 마당에, 상대가 기억도 잃은 마당에 이런 마음이나 든다. 갈 곳 없는 원망이 입안을 맴돌아 화를 삼키듯 천천히 눈을 꾹 감았다가 뜬 도은호가 채봉구 손에 들린 사진을 도로 가져갔다. 도은호가 그랬듯, 채봉구 역시 별다른 힘을 주지 않고 순순히 사진을 빼앗겼다.

“도은호.”

기껏 바꾼 호칭이 은호야에서 도로 도은호로 돌아갔다.

“…이거 뭐야.”

그가 다시 한번 캐묻는다. 어영부영 넘어가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사 표현이었다.

알아서 좋을 것도 없을 텐데.

눈을 가늘게 떠 강단 있는 ‘척’을 하는 얼굴을 확인한 도은호가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옛날 사진이에요. 형이랑 나 사귀었을 때 찍은.”

“뭐?”

“신경 쓰지 마요. 어차피 헤어진 사이니까.”

최대한 덤덤히 얘기하려 했는데 그게 잘 됐는지 모르겠다. 평소라면 다시 제 귀로 돌아와 들렸을 목소리가 이번에는 채봉구에게만 오롯이 안겨든 건지 잘 들리지 않는다. 결과를 알려면 채봉구의 반응을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어 고개를 바로 들고 그를 응시하자 당황하여 갈피를 못 잡고 떨리는 눈이 보였다. 겁 먹은 사슴 같다. 고작 사진 하나가 뭐라고. 이거 하나가 뭐라고.

자칫 잘못하면 손에 힘이 들어갈 것만 같다. 하나 있는 사진 구겨질까 싶어 입 안쪽 살을 씹고 있으니 채봉구가 입을 뗐다.

“헤어졌다면서 사진은 왜 갖고 있는데.”

“정리하는 걸 까먹었나 보죠. 형도 봤잖아요, 책장 사이에 박혀 있던 거.”

“…왜 말 안 했어?”

채봉구가 책망하듯 얘기했다. 사진을 들킨 이후부터 계속, 아니 어쩌면 그가 기억을 잃었을 때부터 줄곧 태연한 척하던 도은호를 무너트리기엔 충분한 말이었다. 도은호는 기막힌 눈으로 연상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 말을 안 했냐니.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자기가 5개월 전에 어떤 상태였는지 기억은 하나? 먼저 아무런 말도 못 하게 군 건 자기면서 그때 일은 새까맣게 잊어 놓고…. 아니, 그때뿐만이 아니지. 내 동의도 없이 전부 잊어 놓고 그렇게 물어보면 나보고 뭐 어떡하라고.

울컥한 심경에 솟구치는 말들이 많았다. 단 한 번만 실수해도 그 모든 말이 채봉구를 상처입힐 것 같다. 그러지 않으려면 이성을 붙들어야 하는데, 당장은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왜 하필 지금이야.

지난 한 달간 채봉구에게선 어렴풋이 사귀던 시절의 채봉구가 몇 번 보였다. 그 까닭에 몇 번이고 실수할 뻔하고, 옛 생각에 힘들어 하고, 그런데도 아예 남이 되는 건 싫어서 거리를 가깝게 유지하려 노력하고. 그렇게 고군분투하며 어떻게 하면 채봉구 곁에 오래 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는데, 어떻게 하면 옛 기억 다 잊고 그를 대할 수 있을까 발버둥 쳤는데 왜 하필이면 위태로운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채봉구에게 일어난 2중 추돌 사고는 그에게만 재난이 아니었다. 첫사랑에 성공해 매일이 행복하던 도은호에게도 때아닌 재난이었다. 채봉구에게 닥친 것보다 더한 재난이다. 하룻밤 사이 연인을 잃었고, 그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누설할 수 없는 과거가 되었으니.

장난기로 가장해 왔던 비통함이 터져 나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말하면 뭐 달라져요? 어차피 기억도 못 하면서.”

“…….”

“형 상태가 정상이었으면 저도 말 했어요. 근데 아니었잖아. 거기다 대고 내가 뭘 어떻게 말해.”

자조적인 투에 채봉구가 입을 달싹였다. 그가 제 눈치를 본다.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 모습을 보는 게 싫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미안.”

“뭘 사과해요. 사과할 것도 아닌데. 어차피 헤어졌던 사이니까 신경 쓸 거 없어요. 우리 진짜 잠깐 사귀었어.”

진짜 잠깐….

도은호는 작게 덧붙이며 그러니 이런 사진 보고 괜히 신경 쓰지 말라 얘기했다. 손에 쥔 사진은 험악할 정도로 꼬깃꼬깃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생각해 보니 헤어진 거로 타협하기로 했으면서 이런 사진 구겨질까 전전긍긍하는 자신도 못난 놈이었다. 애초부터 미련을 갖지 않고 정리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보여주기 식 퍼포먼스에 채봉구가 움찔거렸다. 그의 시선이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걸 확인한 도은호가 쓰레기통을 가리듯 서서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2시. 이러고 서 있은 지 벌써 1시간이 지났다.

“…밥은 못 먹고 가겠죠? 형 체하겠네.”

원래 제 집에 와서 점심 먹고 좀 놀다가 술집에 가기로 했는데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애써 웃으며 그리 묻자 채봉구가 무어라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으로 저를 뻔히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괜한 객기를 부릴 형편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데려다 줄까요?”

“아니.”

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평소보다 경직된 목소리에 아차 싶어졌다.

저 사진 때문에 이 말도 연인처럼 들렸으려나.

실수한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으니 묵묵히 현관으로 걸어간 이가 신발을 신고 몸을 폈다.

“…내일 보자, 도은호.”

그래도 이름은 불러주네.

자존심도, 옛 추억도, 하나 찍은 사진도 다 잃은 마당에 그거 하난 지킨 게 다행이었다. 픽 웃으며 벽에 기댄 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충격받은 것치고 채봉구는 꽤 멀쩡히 돌아서 문을 열었다.

“내일 봐요, 형.”

그렇기에 도은호도 그리 인사할 수 있었다. 이깟 사진 같은 거 아무래도 좋으니 지금 우리 관계가 더 나빠지진 말자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응수한 채봉구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진다. 갈라지는 문이 닫히고 나서야 자리에 주저앉은 도은호가 머리를 헝클였다.

“…괜찮겠지?”

당장은 채봉구와의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겨우 좁혀 놨던 거리가 도로 멀어질까 봐 걱정이 됐다. 불안함을 삼키던 도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롱 문을 열고 커다란 박스를 꺼냈다. 채봉구가 사준 옷이며 신발 따위가 거기에 가득 들어 있었다. 쓰레기통을 뒤져 구겨진 편지를 찾아 상자에 넣어두었다.

“…버려야지.”

헛된 미련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번 일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으니 이젠 유치한 짓거리 그만할 생각이었다. 결심을 마친 도은호는 박스를 들고 분리수거장으로 내려갔다.

괜찮을 거야.

형도 내일 보자고 했으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드는 걱정을 채봉구의 인사말로 달랬다. 그러나 그 노력들이 무색하게 바로 다음 날부터 채봉구가 이상해졌다.

카테고리
#기타
페어
#BL
1
  • ..+ 4

댓글 1


  • 달리는 물범

    다시 정독하고 왔습니다..... 제발 다음편 언제오나요.....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는중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