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재판

폭풍 후야(後夜)

남녀커플 합작 투고 단문, 역전재판2 에필로그 직후 배경.

220 by 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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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재판 시리즈 통합 남녀커플 합작에 투고한 단문입니다. 역전재판1・2의 전반적인 스포일러를 담고 있으며, 역전재판2의 에필로그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합니다. DL-6 케이스의 완전 종결 이후 미츠루기와 메이의 행보에 관한 언급에 있어서는 인게임 스크립트 상의 공식 설정(역전재판 전기 트릴로지 및 역전검사1)과 동인설정이 2대 8 정도의 비율로 혼재되어 있습니다.


장갑을 벗어 내린 손바닥 위로 물이 쏟아졌다.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기운이 조금이라도 가실세라, 두 손으로 받아내기가 무섭게 얼굴에 끼얹어 올리기를 수 번. 눈꺼풀의 떨림이 겨우 멎었다 싶을 즈음 수도꼭지를 닫아 잠그며 이내 긴 한숨을 토했다.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아내고 숨을 고르는 동안 이럭저럭 마음은 가라앉았지만 겨우 시선을 들었을 때에도 낯빛은 심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열세 살의 나이로 검사석에 서게 된 이래, 몸가축에는 항시 주의를 기울여 온 자신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카르마의 사람답게 흠 잡을 데 없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일념에 따라 거울 앞에 서서 용모를 가꾸기란 카르마 메이에게 있어 가히 의식의 반열에 든 습관이었다. 그러할진대, 당장 거울면에 비치고 있는 것은 ‘완벽’과는 한없이 거리가 멀어 보이는 민낯이다. 발갛게 도드라진 눈가며 웃음기 없이 처져 있는 입매 따위, 패자(霸者)의 뒤편에 선 패자(敗者)에게나 걸맞은 몰골이거늘.

그러나 이 또한 카르마 메이가 지닌 면면임에 틀림없다. 자신답지 않은 모습 —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라 하여 그것을 부정하고 감추는 데 급급해서는 안 된다. 손수건에 은은하게 밴 백단향이 목소리를 입는다면 그처럼 설득해 올 것이라 되뇌며, 주먹을 쥔 손에 힘을 꾹 들였다가 스르르 풀어내었다. 터미널의 중간 길목에서 흐느끼는 내내 등과 어깨에 얹혔던 손의 온기, 그로부터 피어나던 기묘한 안도감을 자각할수록 얼굴에 열이 오르는 작금의 상태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제 뜻대로 제어되지 않는 감정은 ‘완벽’하지 않은 스스로를 직시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울음이 잦아들자마자 반쯤 도피하다시피 화장실로 향했던 근본적인 이유란 기실 마음을 다스릴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카르마 메이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느냐면 — 속사정이야 어쨌든 마냥 시간을 죽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늘 챙겨 다니는 손가방에서 화장 도구들을 꺼내 늘어놓았다. 기초화장을 손보는 선에서 메이크업을 고치고 아직 부기가 남아 있는 눈가를 손끝으로 눌러 매만진 뒤 그녀는 소지품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빛깔의 옷차림을 한 그 남자를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화장실에서 예닐곱 걸음 떨어진 곳, 탑승 수속장으로부터는 제법 멀어진 통로 자리에서 미츠루기 레이지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언뜻 들려오는 이야기며 자못 심각해 뵈는 표정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다음 재판을 위한 지시를 내리는 모양이었다. 통화가 일단락될 때까지 기다려볼까 싶은 마음이 무색하게도 상대는 이쪽의 인기척을 금시에 알아차렸다. 아무쪼록 부탁한다는 당부의 말을 마지막으로 휴대전화를 집어넣은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와 서는 순간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꽤나 필사적으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붉은 재킷의 가슴팍에 남은 눈물 자국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서로 간의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짐짓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리며 카르마 메이가 입을 열었다.

“빌린 건 돌려주겠어. 이제 그만 돌아가지 그래.”

“설마하니 선약이라도 있는 건가?”

“이 늦은 시간에? 그럴 리가.”

그다지 웃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의 물음에 부정을 표하기 위해 부러 코웃음을 쳤다. 탑승 수속을 마무리해야 하니 이만 여기서 헤어지자는 거야. 지금도 충분히 아슬아슬한 시간인걸. 시곗바늘의 짧은 쪽이 10의 자리를 스쳐 지난 지 오래인 것을 확인하고서 꺼내 든 핑계는 일견 그럴듯했다. 하지만 손수건을 되돌려받은 남자는 겨우 그 정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침착하게 응수해 왔다.

“여긴 법정이 아니지만, 그 명백한 모순을 향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겠군. 네가 예약해 둔 항공편이 아침 6시 40분에 떠나는 뉴욕 행 비행기라는 건 알고 있다.”

“뭣, 잠깐. 그건 또 어떻게…….”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꽤 오랫동안 대기해야 하리라 보네만. 조금이나마 그 시간을 내게 할애해 줄 수는 없는가?”

처음부터 이리 될 것을 예상하기라도 했는지, 여유롭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미츠루기 레이지였다. 영락없이 허를 찔린 꼴이 되고 말았음을 깨달은 카르마 메이는 아랫입술을 천천히 빨며 미간을 좁혔다. 눈앞의 남자가 단시간 내에 출국 심사대를 통과해 여기까지 왔다는 건 공항 측으로부터 다소의 협력을 구했음을 의미할 터. 상급검사의 직위에 있는 자가 사적인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직권을 남용한 것은 썩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 뒷감당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재 검사’로 이름난 남자이니만큼 그쯤이야 알아서 수습할 수 있으리라 치부하며 그녀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앞서에 비하면 한층 진실에 입각한 두 번째 이유로 기필코 그를 돌려세워낼 심산이었다.

“당신에게도 내게도 요 며칠은 꽤나 다사다난했지. 채찍을 돌려주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라면 이제 더는 용건이 남아 있지 않을 테니,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피차간에 좋으리라는 제안이야. 그간 누적된 피로를 덜어내는 면에서.”

“으음?”

“흥, 시치미를 떼 봐야 소용없어. 오오토로 신고의 재판뿐만 아니라 아야사토 마요이의 생환까지 염두에 두느라 간밤에 이래저래 바빴을 게 뻔하잖아? 아마 4시간도 못 되게 겨우 눈을 붙이고서 법정에 출두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이라면.”

“그야 부정하지는 않겠다만,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을 등한시할 만큼 피로감이 극심하지는 않다.”

“마무리를 지어야 할 일?”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대로 너를 떠나보내기에 앞서 지난 1년 간의 회포를 풀었으면 싶다는 이야기인데.”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운을 떼는 남자의 얼굴에는 눈에 띄게 머쓱해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뜻밖의 제안에 잠시 멈칫하였던 카르마 메이 또한, 그에 못지않은 낯빛을 띠고서 혼잣말을 하듯 웅얼거렸다.

“……바보 같네.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해도.”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의외로 문제 해결의 적기일 수 있다네. 지금이라도 해묵은 감정을 풀어내는 게 침묵과 회피로써 교착 상태를 이어 가는 것보다야 나을 테지. 앞으로 영영 보지 않을 사이가 아닌 한에야.”

“…….”

“조금 전과 같이 울상이 된 얼굴로 내 기억에 오래 남고 싶지는 않을 게 아닌가? 다음 만남을 기약하기도 쉽지 않은 판국이니 더더욱 제안을 받아들여 주기를 요청하는 바이네.”

듣는 쪽에서 민감하게 받아들일 이유만 쏙쏙 골라다 들이대는 말재주가 과연 그답게도 얄미운 재능이라, 카르마 메이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거절의 언사를 내비치지는 못했다. 부친의 죽음과 장례를 겪었던 당시, 이쪽에서 먼저 연락을 끊고 지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지를 상기하는 것이 먼저였다. 지난날의 실수를 통해 배운 게 있다면 시급히 바로잡아야 한다는 설득을 온몸으로 증명해 낸 남자에게 뒤처질 수 없다는 오기 또한 언제나와 같이 굳건했다. 잠깐의 고심 끝에 그녀는 뺏들다시피하였던 캐리어의 손잡이를 그에게 도로 내밀었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남아있다면 그야말로 ‘완벽’하지 못한 마무리가 될 테지. 제안을 수락하겠어. 단, 조건을 하나 붙일 거야.”

“조건이라면……?”

“지난 1년 간 있었던 일을 이만 털어내자고 했지.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용의자나 다름없는 인물로 규정하고, 임의 동행을 요구하는 방식을 취하겠어.”

“……상당한 폭탄 발언이로군. 꼭 그래야만 성에 차겠는가?”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나는 검사라고 말한 건 당신이야. ‘검사답게’ 이 사건의 모든 정황을 파악하려면 취조를 벌이는 게 당연하잖아.”

카르마 검사로부터 심문을 받는 걸 각오할 자신이 있다면, 어디 한번 도전해 봐. 꽤나 살벌하게 들리는 뒷말을 덧붙인 카르마 메이가 턱짓을 해 보였다. 전초전을 선언하는 그녀의 앞에서 미츠루기 레이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해했다. 그럼 우선 근처의 라운지로 가도록 하지. 취조의 목적으로든, 항공편을 기다리기 위해서든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장소가 우리에겐 필요할 것이네.”




프라이어리티 패스를 제시하고 들어선 프리미엄 라운지는 국제선 터미널보다도 한산했다. 평일 심야, 그것도 비수기에 해당하는 3월 하순인 만큼 이용객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도 라운지 내에는 모든 편의시설이 부족함 없이 갖추어져 있었다. 개중에서도 미츠루기 레이지가 염두에 둔 장소는 라운지의 정 중앙에 위치한 뷔페 섹션이었다. 지금쯤 호텔 반도에서 청구한 영수증을 받아들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누군가가 결국 카드를 꺼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유가 그에게도 존재했다. 친혈연의 가족들조차 잘 모르는 사매(師妹)의 오랜 습관 — 중요한 일정을 앞두었을 적이면 끼니 한두 번쯤은 예사로이 건너뛰는 걸 알고 있던 까닭에, 승용차의 핸들을 잡는 내내 염두에 두었던 생각들 중에는 식사에 관한 건도 있었다. 하루의 절반에 달할 비행시간을 고려하자면 이륙 후 최소 2시간은 지나서야 첫 기내식이 제공될 테고, 빈속에 약을 털어넣는 우를 범해서야 안 될 일이므로 섭식의 문제는 분명 카르마 메이에게 중했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다소의 우려가 있었으나 다행히 뷔페의 스테이션에는 셰프가 대기하고 있었다. 옆자리의 메뉴판에 올라 있는 음식들은 지금도 주문이 가능하다며 응대해오는 셰프에게 미츠루기 레이지는 그라블랙스를 올린 스뫼레브뢰 두 접시와 미네스트로네를 부탁했다. 주문한 음식들이 만들어지는 동안 입맛을 돋울 전채요리 두어 가지를 플레이트에 담아오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아직 열기를 띠고 있는 구운 아티초크의 잎을 손수 떼어내는 수고로움까지 불사하는 그의 맞은편에서 카르마 메이는 짧게 혀를 찼다. 제 쪽에는 나이프 없이 오로지 스푼과 포크만이 놓여있음을 막 깨달은 참이었다.

“이쯤 되면 과잉 보호야, 미츠루기 레이지.”

“탄환 적출 수술이 바로 어제였지 않나. 당장은 이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후유증이 오래 갈 수도 있는 게 총상이다.”

총상, 그리고 탄환의 적출.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을 지닌 단어들을 읊어낸 남자의 표정이 흐려지는 것을 카르마 메이는 놓치지 않았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누군가의 그림자를 이틀 전에 있었던 사고에 겹쳐 본 양 착잡하게 깊어진 그의 눈빛을,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몰라볼 리 없었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안정이 필요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 데 대해서는 상당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네.”

“출국 준비를 끝내두고 남은 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야. 바라지도 않은 부채 의식을 드러내봤자 내게 실례가 될 뿐인걸.”

“법정에 들어설 적부터 네가 팔의 부목을 풀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내 생각은 쓸데없는 비약이라 치부할 수 없다. 게다가 오오토로 신고를 연행할 때도 채찍을 휘두르지 않았는가. 상처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가차 없는 기세로 말이지.”

“범죄자들은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려 들기 마련이고, 검사로서 그런 흉악범을 상대로 얕보이는 건 성미에 맞지 않거든. 오오토로 놈, 실제로는 코로시야에게 보복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눈이 멀어서 예상 미만의 추태를 부릴 뿐이었지만. 어쨌든……, 그 또한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하고서 취한 행동이야.”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메이. 여기 와서도 부목을 하지 않을 필요가 있나?”

“그야, 그건……. 수염의 코트처럼 깜박했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네.”

아티초크의 밑단에 달린 과육을 음미하며 얼마간 뜸을 들이다가 내놓은 대답이었다. 궁색한 변명으로 읽힐 줄 알면서도 그것 이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삼켰던 진통제의 약효가 다해 가는 줄 알면서도 종횡무진으로 움직였던 이유란 기실 논리정연하게 정리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니 다소 비겁하더라도, 더 이상의 추궁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취지에서 말을 얼버무리는 쪽이 그녀의 입장에서는 편했다. 마침 주문한 요리가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테이블 벨이 울리는 참이기도 했다.

“그러면 이렇게 결론을 내도록 하지. 네게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존재하였듯, 이 또한 내 나름의 책임 의식 같은 거라네. 그러니 나의 판단과 행동이 썩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손윗형제다운’ 아량을 보여주기를 바라네. 부디.”

다녀오는 길에 이쪽에서 쓸 나이프도 하나 챙겨오라는 언질을 주었건만, 보란 듯이 쏙 빼먹고 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그것이었다. 저 좋을 대로 논쟁을 갈무리하고는 나이프의 날을 밀어내는 이의 고집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 허, 하는 탄성조의 헛웃음이 카르마 메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잘린 오픈 샌드위치를 접시째 밀어내는 데에서조차 미츠루기 레이지는 꿋꿋이 제 페이스를 유지했다. 하루 반나절 가까이 잊고 있었던 허기가 이제 와 동하는 데에서 육신의 간사함을 느끼며 그녀는 결국 포크를 들었다.

메인 디시를 음미하는 동안에는 그 어떤 긴요한 화제라 해도 냅킨 아래에 감춰두어야 하는 법. 테이블 매너에 있어서도 ‘완벽’한 교육을 받은 이들답게,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접시 위에 놓인 것에 집중하는 두 사람이었다. 가벼운 저녁 식사로 안성맞춤인 스뫼레브뢰와 한 김 식혀 나온 지중해식 야채 수프 모두 빈속에 자극적이지 않아 좋았다. 디저트의 마지막 조각을 목 뒤로 넘기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낸 뒤에야 카르마 메이는 천천히 운을 떼었다. 아마노가와 가문에서도 행방을 모르길래 최소한 미국으로 가지 않은 줄은 알고 있었어. 짐작할 수 있었던 건 딱 거기까지였지만. 말끔히 비워진 접시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톡, 톡, 두드리며 자백을 촉구하는 제스처는 덤이었다.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는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발언 중 거짓이 드러난다면 위증의 대가를 치르기를 각오하고서 임해야 하는 증언의 시간이다. 손에서 내려놓은 식기를 접시의 한쪽 면에 가지런히 모아 낸 미츠루기 레이지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짐작대로다. 검사국을 떠나 있는 동안 조이치로 씨를 비롯한 기존의 인맥에 기대는 일은 일절 없었다. 그 대신 부국장의 소개로 유럽의 사법기관을 견학하고 있었다. 내가 검사국을 떠나 있는 동안 사문위원회의 결정을 보류시키고, 직위가 말소 처리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사람도 그였지.”

“부국장이? 제법 의외의 이야기네. 상부 사람들 중 정치적인 행동을 드러내어 리스크를 지려 들지 않기로 평판이 자자한 사람이라 기억하고 있는데. 썩 각별한 사이도 아닌 상급검사 하나를 위해 그리 선심을 썼을 줄이야.”

“국(局) 내의 파벌 다툼과 무관하게 윗선에서 버텨 온 사람이 검사국장의 직을 대행하였기에 한시적으로 택할 수 있었던 일종의 편법이었지. 다만 ‘죽으려던’ 사람의 목숨줄을 여며 놓은 그 결정이 전적으로 선의에 기초한 것만도 아니었다.”

DL-6 케이스와 SL-9 케이스의 진상 규명을 계기로 빗발치기 시작한 재심 청구 중 일부가 인용되었던 것이 전해 4월의 일이다. 악화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이루어진 감사에서 비위행위가 드러난 검경 고위직 중 일부가 경질을 당했고, 지방검찰청장 또한 작금의 사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발언과 함께 사의를 표명했다. 미・일 검찰청 간 인사교류 프로그램을 구실 삼아 파견 근무를 나온 초여름까지도 인사변동의 문제로 소란하였던 검사국의 면면을 카르마 메이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초 계기가 된 사건들의 주요 관계자였던 남자가 자취를 감추고 서서히 망각되어 간다는 불합리함 — 있어야 할 자리에 더는 존재치 않는다는 모순이 어찌나 불쾌하던지. 그러니 더욱 완벽한 ‘복수’를 고취하겠노라 다짐했었건만.

귀국하고서 곧장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를 추궁받는 대목에 이르러서도 그의 변론에는 군더더기랄 것이 없었다. 신임 국장이 취임하고 청문의 당사자까지 복귀했으니 사문회가 재개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간의 행적에 관한 진술서를 제출하고 보직 해임을 철회하는 데 필요한 소명 절차를 밟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노라 토로하는 남자의 표정으로부터 카르마 메이는 친숙한 형태의 피로감을 엿보았다. 최종적으로 직무 복귀를 명 받은 날 후지미노 이사오의 피살 사건이 일어났다는, 우연의 농간이 촘촘히 아물려 낸 현실이 환기되고 나서도 몇 분 간 침묵을 지킨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납득하기에 불충분하다면 관련 자료를 보여줄 수도 있다. 해외에 체재하는 동안 관여했었던 일들은 모두 비공식적으로 협조한 것들이지만 사실 여부를 증명하기 위한 절차는 빠짐없이 거쳤다. 사문회의 임원들과 검사국장을 상대할 때에도 수리되었으니 신뢰도는 충분히 담보될 수 있겠지.”

“됐어. 여태까지의 일들에 관한 조서를 꾸민다고 가정한다면 당신의 증언은 내용 형식적 요건을 확실하게 충족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안심하기엔 일러. 당신이 내게 미운털이 박히게 된 이유가 겨우 그것 하나뿐이지는 않으니까.”

증언을 채택하겠노라 선언하면서도 집게손가락을 살짝 치켜든 채 거리감을 벌려내는 언동의 어디에도 우스울 구석은 없었다. 그런데도 미츠루기 레이지는 아아, 하며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한 반응이 순수하게 놀라운 나머지 카르마 메이의 눈이 찰나간 동그랗게 떠졌다가 못마땅한 무엇을 보는 양 가늘어졌다. 카르마의 절대적인 기치를 등진 채 멋대로 떠났다가 돌아온 눈앞의 남자가, 어떤 면에서만큼은 변한 게 없다는 게 새삼스럽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도 안 되게 변해버린 주제에.”

“말이 되는지 되지 않는지는 제대로 들여다봐야 알 수 있지 않겠나.”

오늘 이 자리에서 너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전부가 아니다, 메이. 진중하기 그지없는 말씨와 더불어 곧이 들린 잿빛의 눈동자로부터 끈질김이 엿보였다. 카르마 고우의 그늘 아래에서 오직 완벽한 승리만을 목적하게끔 연마받은 시선과 언동을 유지하면서도 전혀 낯선 길목에 발을 붙이고 선 사형(師兄)의 두 번째 변(辯)을 묵인하겠다는 암시를 담아, 카르마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폭 좁은 몰이해로부터 이제 겨우 한 발을 빼냈을 뿐인 당장의 상황을 낙관하지 말라 경고하듯 홧홧하게 푸른 시선 속에서.

다시금, 미츠루기 레이지의 입술이 움직였다.



처방받은 약 중에는 신경안정제 또한 들어 있다고 했다. 병원장을 사칭하던 환자가 병실에 숨어들었다가 채찍으로 흠씬 두들겨 맞는 소동이 벌어졌던 이후,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자 담당의가 처방전을 한 차례 수정해 주었다고. 떠날 때 떠나더라도 그런 돌팔이는 경범죄로 잡아넣어야 했다며 골을 내다가 숨죽여 하품을 하는 카르마 메이의 그 모습이 미츠루기 레이지의 시선에는 퍽 딱해 보였다. 열 시간 가까이 맨정신으로 통증을 참아 가며 움직인다는 건 극도의 스트레스에 처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전형적인 자학의 행태다. 그 사실을 본인이 알든 모르든 이미 일어난 일을 아주 뒤집어내기란 불가능하니 우선은 불문에 부쳐 둘 뿐. 트라우마의 해소에 관해서는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는 쪽이 주효할 테니 현재로서는 가장 손쉽고 빠르게 피로감을 흩어낼 수 있는 방법을 권하는 것이야말로 강구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조명이 꺼진 라운지 베이를 지나 레스팅 스위트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어느덧 새벽 한 시에 접어든 상태였다. 1, 2인용 베드룸은 모두 대실이 되었다며 난색을 보이는 직원에게 ‘직무상의 협조’를 구하는 방법까지 감수한 끝에 간신히 프라이빗 룸의 키 하나를 받아낼 수 있었다. 본디라면 투숙객에게 제공되지 않는 관계자 전용 공간이라던 프런트의 설명이 괜한 말이 아니었는지 함께 들어선 방에는 카우치 소파와 사무용 데스크, 자잘한 탕비용 물품 따위가 비치되어 있었다. 모던한 디자인에 제법 널찍한 규모라고는 해도 그 느낌이 침대만 하지는 못할 테지만 카르마 메이는 개의치 않겠다며 소파에 몸을 뉘었다. 다섯 시에 깨워 달라는 말을 끝으로 눈을 감은 그녀가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무렵, 미츠루기 레이지는 재킷을 소리 없이 벗어들었다. 늘 휴대하고 다니는 펜과 수첩을 포켓에서 꺼낸 뒤 겉옷을 그녀에게 덮어주고는 PC가 설치되어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전원의 스위치를 올렸다.

전해 사법계에 닥쳤던 유례 없는 풍파의 주요 관련자로서 검사 미츠루기 레이지가 향후 겪어 나가게 될 일들은 결코 만만하다 여길 것이 못 된다. 키노시타 다이사쿠의 선처를 요구하고자 검사국장실에 발을 들였을 당시 코앞에 닥쳤던 이야기들을 복기하자면 대략 그 정도로 정리될 수 있었다. 검사국장의 엄포를 상대하고 원하는 바를 끝내 관철하면서도 상부에서 어떻게 처우를 결정할지에 대해 우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카르마 고우와 간토 카이지라는 양대 ‘전설’을 잃은 검경 집단이 힘껏 쇄신에 나섰다고는 하나, 무릇 하나의 조직이 변모하는 것은 개개인의 변화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진실을 은폐하여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의 술수는 더욱 교묘해질 테고, 도덕률이 지닌 한계를 악용하는 폐습 또한 얼마든 되풀이될 수 있다. 밑바닥 없는 환난이라 명명함 직한 그 모든 리스크를 인지하고도 미츠루기 레이지는 법치의 최전선에 재차 발을 디뎠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심판하는 체제가 정당성을 띠고 합의 속에 존속하는 한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옥석을 가려 내듯 진실을 드러내고 선악을 매다는 지난한 싸움에 머리와 손을 보태 줄 동반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에.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엔터를 누르자 곧 익숙한 템플릿의 웹 페이지가 화면에 떠올랐다. 몇 시간 전 유선상으로 처음 연락을 주고받은 수사과의 형사를 비롯하여 검찰청 휘하의 실무관들이 전달해 온 문서들을 훑어내리다 말고 미츠루기 레이지는 미간을 좁혔다. 자정을 갓 넘긴 시각이 수신일로 찍혀 있는 최상단의 전자 문서는 요 며칠간 그가 다루지 않았던 사건명을 제목으로 두고 있었다. 과연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아, 당초 송치를 결정했던 카르마 검사가 미 검찰청으로 복귀하게 된 현황이 수석검사실에 제때 전달되지 못한 와중에 해당 사건의 공판 기일이 만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는 자초지종이 문서의 본문에 기술되어 있었다. 통상적인 업무 프로세스를 거칠 경우 못해도 사흘의 시간이 걸릴 터라, 부득이하게 약식 절차를 통해 미츠루기 검사에게 이관하노라는 통보에 혀를 차면서도 그는 결국 버튼을 클릭해 전자 서명을 마쳤다.

같은 스승으로부터 법정 기술을 사사한 동문답게 카르마 메이가 피의자를 신문하고 조서를 꾸며 놓은 방식은 그에게 퍽 친숙했다. 구형을 논고하는 과정에서 검찰 측이 사용할 자료들 중 일부가 불완전하게 갈무리되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을 만한 일 처리였다. 담당 검사를 재지정하고 급히 이관하는 과정에서 관련 문서의 일부가 누락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서면상의 내용만으로 파악하기 힘든 부분에 관해서는 그녀가 깨어난 뒤 직접 물어보면 될 터라 결론지으며 그는 메일함의 필터 분류를 조정했다. 2017년 7월부터 12월 말엽까지, 한 사람으로부터 격주에 한 번 꼴로 송신된 메일들이 ‘중요’ 태그를 띤 채 화면에 가지런히 출력되었다. 발신인: 이토노코기리 케이스케. 검찰청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물밑에서 꾸준히 손발 노릇을 해 온 부관으로부터 상신받은 자료들 중 하나로 커서가 옮겨 갔다. 곧, 좌상단에 2017년 7월 첫 주의 날짜가 기재된 스크랩 이미지가 모니터에 출력되었다.

<부패 검사의 후예, 이름과 함께 굴욕 또한 이어받아>. 어느 일간지에 특집 기고문으로 실린 기사는 자극적인 필치로 뽑힌 헤드라인에 걸맞게 최악의 가도를 달리는 내용을 자랑했다. 공판 당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최대의 쟁점 — 피고인에게 제기된 ‘영매 살인’의 혐의가 결정적인 증거와 모순으로써 파훼되었던 과정은 뒷전으로 밀어둔 채, 패소자의 실추된 명예를 가리키며 냉소하고 과거 이력의 신빙성으로까지 의심을 비약하는 데 전념한 이 옐로 저널리즘을 누군가는 오락처럼 소비했을 것이다. 스톡홀름에 체재하였던 당시, 신문 가판대에서 간간이 마주친 타블로이드지의 내용들 또한 근본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았기에 단언할 수 있는 바였다. 부정하게 쌓아 올린 위업이 탄로 나고 그러한 전적에 상응하는 형(刑)에 처해진 스승, 한달음에 구심점을 잃고 홀연히 종적을 감춘 사형, 그들 모두가 흐릿한 과거형으로 닦여 나가기 시작한 무대에 발을 붙인 이가 바로 카르마 메이다. 한층 무거워진 이름을 더께처럼 짊어졌을 그녀가 여태껏 무엇을 어찌 상대해야 했는지를 눈앞의 자료가 뚜렷이 방증해 왔다.

기사문 하단에 실린 포트레이트를 묵묵히 응시하던 잿빛의 시선이 오른편의 벽면으로 흘렀다. 전구색의 조명 아래에서 카우치 소파의 색감은 선홍빛에 가깝게 번져 있었고, 그에 어쩔 도리 없이 진전되는 연상 작용이 탄식을 돋우었다. 무패의 이력을 잃고 도주하였던 당신이 무슨 염치와 권리로 나의 보호자를 자처하느냐는 노호를 직면하였던 순간을 되새기며 미츠루기 레이지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곤히 잠들어 있는 누이 제자의 표정과 숨소리에서 통증을 억누르는 기미가 느껴지지 않기에, 심금을 묵직이 눌러 가라앉히는 저릿함을 그는 수월히 털어낼 수 있었다. 근 하루 사이 자신에게도, 그녀에게도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오늘 법정에서 거두어 낸 승리는 ‘완벽’에 헌정되지 못할 결과이기에 더욱 온전한 의미를 띠며, 신뢰해 마지않는 이들과 함께 진실을 엄정히 밝혀냈다는 데에 무게를 두겠노라는 소감을 경청하던 카르마 메이에게서 미츠루기 레이지는 완연한 화해의 조짐을 보았다. 각자 외로이 버텨 낸 1년의 시간을 헛되이 하지 않으면서도 그 같은 단절이 서로를 상처 입히는 일은 더는 없으리라는 확신이 한낮의 불빛보다도 환하였기에.

막후(幕後)의 새벽, 졸음은 한 순간도 찾아오지 않았다.



오전 5시 정각, 경쾌한 멜로디의 모닝콜이 울렸다. 네오에도시티의 정의로운 활극과는 하등의 연관도 없을 클래식의 선율은 그에게도 자못 익숙한 ‘몬티의 차르다시’였다. 어깨를 흔들어 깨우기도 전에 눈을 뜬 카르마 메이는 졸음기 없는 얼굴로 손가방을 챙겨 화장실로 향했다. 십여 분 후, 여느 때와 같이 선명하고 날카로운 눈매로 돌아온 그녀가 정말로 눈 한 번 붙이지 않았느냐고 반신반의하며 물어 왔을 때, 미츠루기 레이지가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지극히 간결했다. 다섯 시에 깨워 달라고 내게 부탁하지 않았나. 명쾌하게 떨어지는 그 대꾸의 어디가 우스운지 짤막히 웃음소리를 낸 카르마 메이가 룸 키를 넘겨받았다.

체크아웃을 끝내고 국제선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공교롭게도 항공기 점검의 문제로 뉴욕 행 항공편의 이륙이 두 시간 정도 늦춰질 예정이라는 안내문이 게이트 앞에 게시되어 있었다. 크게 못마땅해하는 내색도 없이 라운지 베이로 가 있자며 돌아서는 그녀에게 미츠루기 레이지는 흔연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동 도중 맨입으로 두 시간을 통째로 죽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며 자판기 앞에 서는 그를 카르마 메이 또한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라운지 베이의 창가 자리에 착석했을 즈음에는 초콜릿 바를 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메이. CE-9로 케이스 분류가 결정된 사건을 기억하나? 다국적기업의 중역과 자회사의 부사장이 저지른 탈세 스캔들 말이다. 오늘 자정 무렵에 내 쪽으로 케이스 배당이 확정되었는데, 당장 다음 주 월요일이 첫 공판일이더군. 당시 수사 과정에 관해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그 건이라면……,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지. 인터폴과 금융위원회의 자문까지 얻어내 용의자들의 신병을 확보했는데, 손발이 따로 놀던 수사본부의 실책으로 영장 심사에서 난항을 겪었거든.”

사건명을 듣자마자 표정이 험악해지기도 잠시, 카르마 메이는 모두 변론을 진행할 때처럼 당시 상황을 명료히 읊어내었다. 주범의 해외 도주 우려가 높다고 판단하여 우선 급한 대로 용의자들을 긴급 체포했지만 압수수색이 늦어지는 바람에 증거물 확보에서 다소의 공백이 생겼다 했다. 그 또한 엄밀히 따지자면 흠결 있는 수사였던 셈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업무상의 미스를 인정하는 데 미츠루기 레이지는 적잖이 놀랐다. 카르마의 ‘완벽’을 의심하느냐며 발끈하는 대신 공소 과정에서 미진했던 지점을 짚어내는 그러한 태도야말로 하룻밤 사이 카르마 메이가 이루어 낸 장족의 발전일 터다. 잠시 표정을 관리하지 못한 탓에 그녀로 하여금 채찍을 꺼내 들게 만드는 약간의 불상사가 있었지만, 그쯤이야 아무래도 좋을 만큼 좋은 조짐이었다.

법정에서 제대로 된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주말 내로 증거물 리스트를 갱신하고 피의자 신문 또한 보완해야 한다는 데 그들은 최종적으로 의견을 같이 했다. 사후 수사에서 역점을 둘 부분을 정리하여 경찰 측에 연락을 취하는 동안 카르마 메이는 초콜릿 바의 마지막 도막을 씹으며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통화가 종료됨과 거의 동시에, 뉴욕 행 항공편의 탑승 수속이 곧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이 스피커에서 출력되었다. 이제 정말로 가야 할 때가 되었다며 캐리어의 손잡이를 버팀목 삼아 자리에서 일어나는 카르마 메이를 향해 미츠루기 레이지가 목소리를 내었다.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한 가지 더 남아 있노라고.

“실은, 근시일 내로 시작될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추천을 받은 상태다. 외국의 법정 제도를 연구하고 국내 실정에 맞게끔 도입할 방안을 찾는 것이 주요 취지이자 골자라더군. 지난해에 ‘비공식적으로’ 쌓은 경험을 살리며 그간의 업무 공백을 상쇄해보라는 검사국장의 지시 또한 있었다.”

“말하자면 전화위복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네. 하지만 내게 축하의 인사를 듣고 싶어서 꺼내는 이야기는 아닐 테고. 당신이 아무리 바보 같은 남자라도 그 성품은 과시욕과는 거리가 머니까 말이지. ……그래서?”

장갑을 낀 손을 호기롭게 펼쳐 보이며 본론을 요구하는 그녀에게 그가 내놓을 수 있는 정보는 간결하면서도 완벽했다. 첫 번째 일정은 북미의 주요 대도시에서 소화될 예정이었고, 근래 들어 급증하고 있는 이민자 출신 범죄자들의 강력 사건들에 관한 판례의 법리 해석과 더불어 시민 배심원제를 다루는 쪽으로 주제 또한 얼추 가닥이 잡혀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와 워싱턴의 연방 법원이 1차 연수지 후보군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며 반응을 보여 오는 카르마 메이의 눈앞에서 미츠루기 레이지는 아주 잠시간 멈칫하였다. 그리고는 화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5월 중으로 유럽의 서북부를 방문하는 걸 염두에 두고 있는데, 코펜하겐의 지역 법원을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 덴마크 고유의 사법 시스템과 관련 규약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만큼 썩 순탄치 않은 일정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래도 올보르 카니발 기간을 전후로 사나흘쯤은 여유가 생길 듯하니, 가능하다면 그때 시간을 내어 동행을 해 줬으면 한다.”

“유럽은 내 활동 권역도 아니거니와 그 나라의 특수한 시스템에 관해서는 정보가 적은걸. 미츠루기 레이지, 당신은 어떤 이유에서 내게 동행을 요청하는 거지? 미 검사국에 협조를 요청하려는 거라면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 적임자를 알아보는 쪽이—.”

“덴마크 최북단, 코펜하겐에서 7시간 가량 떨어진 곳에 스카겐이라는 휴양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그레넨은 북해와 발트해가 마주치며 ‘세상의 끝’을 이루는 명소로 유명하지. 끊임없이 부딪치되 결코 섞이지 않는 두 바다가 공존하며 이루는 풍광을 네게도 보여주고 싶다.”

“…….”

“함께할 의사가 있다면, 네가 실망하는 일이 없게끔 만전을 기하여 여행을 준비토록 하지. 그걸 2년어치의 생일 선물로 받아들여 준다면 좋겠네만.”

내내 고심하며 아껴 두었던 속엣말을 털어놓은 미츠루기 레이지를, 고개를 외로 기울이고 팔짱까지 낀 자세의 카르마 메이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다 풍경이라, 꽤 낭만적인 이야기를 할 줄 아네.”

“……음.”

“카르마의 시간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다는 걸 모르고서 꺼낸 얘기는 아닐 거라고 믿고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내가, 완벽하지 않은 에스코트 따위를 용납할 리 없다는 것 또한.”

삼류 여행 잡지 수준의 안내를 했다가는 채찍질 몇 번으로 끝나지 않는 응징을 내리겠어. 이 조건부의 허락이야말로 당신의 제안에 대해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야. 대화에는 마침표를, 만남에는 쉼표를 덧붙이는 사매의 그러한 재치에 미츠루기 레이지는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늘 자네를 알아 온 이상으로 명심하겠네, 카르마 검사.”



뉴욕 행 항공기의 이륙 준비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어나운스가 곳곳에서 울렸다. 차단봉의 벨트를 당겨 잠근 승무원이 게이트를 단속하고 자리를 뜰 때까지도 미츠루기 레이지는 카르마 메이를 배웅했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두 달 후의 만남을 기약하며 마주 잡았던 손의 온기가 심금에 불어넣은 감정을 어떻게 명명하면 좋을지, 아직으로서는 뚜렷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더라도 — 이쪽을 향해 등을 보이며 떠나가던 이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 보이던 것만은 못내 다행스러웠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격언을 몸소 실천하겠다며, 돌려받은 채찍을 말아 쥐고 서서 ‘완벽’의 벽을 넘겠다는 포부를 전하던 그녀에게서 건네받은 작별은 최선의 결말임에 틀림없었다. 짙은 호선을 입가에 띤 채 비행운이 흩어지는 모양새를 주시하던 남자의 품속에서 휴대전화의 착신음이 흘러나왔다. 

수사관으로부터 발 빠르게 들어온 보고에 귀를 기울이며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의 등 뒤로 안온하게 개인 하늘만이 남게 된 3월 24일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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