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

식목일에는 나무를 심자

블랙배저 NCP

2차 by 전단
37
1
0

세계수의 자식들은 세계수를 사랑했다.
취기가 돌기라도 하는 날엔 옥상에 올라가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며 어딘가 그리운 표정을 짓는 형형한 금안의 소유자들. 세계수가 오염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된 날에도, 세상이 불타 황급히 도망가야만 했던 그 마지막 날에도, 영영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하며 밟은 그 새로운 땅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세계수를 사랑했다. 성공적으로 탈출하여 지구에 왔을 때에도 세계수의 아이들은 눈물로 그 애정을 드러낼 정도였다. 울음을 그치고 나아가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밀어내 두었던 세계수의 부재는 종종 다시 모습을 드러내어 크나큰 상실감을 되새김질하게끔 종용한다. 옥상에서 바람을 맞던 힐데베르트는 문득 생각했다. 이 그리움은 어디로 가게 될까? 그 황금빛 나무를 다시 마주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기어코 정해놓은 수명을 뛰어넘어 버린 자식들을, 세계수는 과연 용서해 줄까?

찬 바람이 뺨을 훑고 지나가 술기운이 조금 가셨다. 화장실에 간다고 잠시 나온 참이라 오래 자리를 비우면 선임들이 걱정할 것이다. 지난번에는 옥상에 올라왔다고 혼나기도 했었고... 또 올라왔다는 걸 들키면 정말 사달이 날지도 모른다.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따듯한 공기가 그를 반긴다. 황금빛 나무가 그립고 동족들의 원망이 유독 마음 아픈 오늘이 송년회 날이라 다행이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상념을 깨뜨리고, 힐데베르트는 그 속으로 자연히 녹아든다. 웃고 마시고 떠들며 괴로운 기억을 밀어낸다. 아담의 죽음을, 레이의 망설임을, 카일의 분노를···.




힐데베르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오전 9시가 다 되어갈 즈음이었다. 도저히 뜨이지 않는 눈을 들어 올리고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집어 들자 진동이 울리며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메신저 알람이다. 발신자 최 윤. 

> 너 오늘 할 일 없으면 연무장이나 좀 와라. 

> 좀 이따 들리겠습니다.

대충 핸드폰을 두들겨 답장을 보내고, 다시 베개에 고개를 파묻는다. 아, 눈이 너무 뻑뻑해… 따듯해서 나가기 싫어. 조금만 더 자고 가야겠다.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 그는 자연스레 침구의 포근한 느낌에 몸을 맡겼다. 다시 눈을 뜨자 거대한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힐데베르트는 자연스레 나무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이 연결된 감각이, 들어오는 시각적 정보가 눈앞에 있는 나무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게 해주었다. 흩날리는 황금빛 꽃씨가 포근하고,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한, 가지 하나하나가 가장 낮은 이를 굽어살피시는 그립고도 그리운 나의…


세계수시여.


“...헉!!”

힐데베르트의 상반신이 급하게 튀어 올랐다. 등 뒤가 축축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피니 눈을 동그랗게 뜬 아미가 시야에 들어왔다. 왜 아미가 여기 있지? 상황 파악을 하고자 눈을 살짝 굴리니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이 보였다. 창밖이 시꺼멨다. 어라? 힐데베르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눈 뜨고 있었던 것이 아침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 더 잔다고 밤이 될 만한 시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제 사수가 문을 벌컥 열고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들어올 때까지 멍하니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흐르는 침묵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을 즈음 아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빠, 힐데 악몽 꿨나봥.”

“그런 건 누가 봐도 알겠는데.”

윤이 힐데베르트를 힐긋 쳐다봤다. 저건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인데. 그러고 보니 아침에 문자를 했었지. 무슨 내용이었더라? 아 그래, 연무장에 간다고 했었어. 윤이 기다렸겠구나. 연무장에 오지도 않고, 연락도 받지 않으니 직접 찾아왔으리라. 벌써 밤이니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니까.

“자느라 사수를 바람맞히는 후임은 네가 처음일 거다. 안 그래?”

“...지금이라도 연무장으로 뛰어갈까요?”

“미쳤어? 내일이 임무인데 이 시간에 뭘 한다고?”

“대체 얼마나 잔 거야? 힐데 밤 세웠어?”

아미가 끼어들어 물었다. 왜 이렇게 오래 잔 건지 힐데베르트 본인도 의문이었다. 그냥 몇 분 더 자고 싶은 마음에 굴복했을 뿐인데 어째서 시간이 이렇게 지나가 버린 걸까. 임무 전 마지막 휴일은 어디로 간 걸까. 코어 밖으로 나가기 전 렉시크 누들을 먹고야 말겠다는 계획은 또 어디로 간 거지…

“모르겠습니다. 윤의 메시지에 답장하고 다시 잠들었는데…”

힐데베르트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밖은 어두컴컴하다. 그가 모르는 크리처가 나타나 하늘을 덮어버린 건 아닐까? 진짜 말도 안 돼. 다치지도 않았는데 12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시간을 잠으로 보낸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그 긴 시간을 잠으로 보낼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힐데베르트의 시선을 따라 윤과 아미도 창밖을 지켜보았다.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으리라. 윤이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돼…”

“힐데 너무 많이 자서 어디 아픈 줄 알았어!”

“보아하니 썩 좋은 꿈을 꾼 것 같진 않은데… 궁상떨다 내일 가서 빌빌대지 말고 다시 자든가 해라.”

잠이 오긴 하려나? 윤이 덧붙였다. 아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전해져 오는 온기에 힐데베르트가 엷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나쁘지 않은 꿈을 꿨어요.”

그리운 느낌이었다. 벌써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세계수가 나왔던 것 같다. 처음 지구에 왔을 땐 눈이 벌게지도록 울었지만, 이제는 덤덤한 척 넘길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언제까지고 상실에 발목 잡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세계수도, 아담도, 레이도 모두…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까. 윤이 그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미는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들에게 힐데베르트의 ‘괜찮다’는 믿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힐데베르트는 괜찮다는 말밖에 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걱정하는 주변인들을 달래기 위해 상습적으로 내뱉곤 하는 말이었으니까. 힐데베르트에게는 괜찮지 않을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갈비뼈가 골절되고 기흉이 생겨도 아무 티 내지 않고 뛰어다닐 정도로 고통을 잘 삼켰다. 주변인들은 기어코 삼켜낸 고통과 슬픔이 어디로 가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아미가 슬픔을 꾹 참는 것이 보였다. 정말 괜찮은데. 힐데베르트는 어느 순간 이러한 불신 또한 짊어지고 살아가기로 했다. 그야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 이제 와서 괜찮지 않다고 하면 인사부장과 진득한 면담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미는 펑펑 울 것이고, 예현 또한 제 걱정에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게 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 카이로스의 귀에 들어가 엄청난 잔소리와 감정 전이의 늪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은 절대 겪고 싶지 않았다. 

“저 진짜 악몽 꾼 거 아닙니다.”

그가 쩔쩔매며 선임들에게 해명했다. 정말 별일 아니라 생각해 줄 때까지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들은 정말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돌아갔다. 컨디션 관리 잘하라는 잔소리도 들었다. 힐데베르트는 침대를 정리하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집을 청소하고 씻은 후에는 선물 받은 신작 게임을 했다. 평범하게 재밌는 RPG 게임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을 하다 보니 날이 밝았다. 아쉽게도 하늘을 뒤덮는 크리처 같은 건 없었던 모양이다. 검을 챙겨 본부로 향하자 먼저 와 있던 선임들이 그를 반겼다. 윤, 아미, 리카르도, 그리고 힐데베르트. 다른 조에서 작업하는 동안 시선을 끄는 팀이었다. 작업은 이틀 정도 걸린다고 한다.

포탈을 타고 이동하자 도시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채로 몇십 년간 방치된 건물들. 쩍쩍 금이 가고 색이 바랜 도로. 그들은 그 중심부로 이동했다. 힐데베르트는 크리처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몰려오는 크리처들이 느껴진다. 수를 세는 건 무의미하다. 배회하던 많은 것들이 그를 찢어 죽이기 위해 이동했다. 선임들이 전투를 준비했다. 힐데베르트 또한 검에 손을 올려놓는다. 앞으로, 


3초.


2초.


1초.



발도했다.



쾅!

검격이 도로를 수평으로 마주 보고 날아간다. 크리처를 가르고 날아간 검격은 건물에 부딪히고 나서야 사라진다. 검격에 충돌한 건물이 무너져 적의 진입로를 하나 차단했다. 힐데베르트가 곧장 등을 돌려 선임들과 같은 방향을 보고 섰다.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자, 크리처들이 속절없이 쓸려 나갔다. 워낙 쏟아지는 양이 많아 크리처의 기세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크리처들이 다른 크리처들의 시체를 밟고 진군했다. 끊이지 않는 총소리를 뒤로하고 비행형 크리처 쪽으로 다시 검격을 날리며 기척을 훑었다. 동족은 오고 있지 않았고 근처에 있는 크리처들은 전부 이쪽에 모인 것 같으니, 한차례 크게 쓸어내면 한숨 돌릴 수 있으리라. 

힐데베르트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선임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듯 몸을 피했다. 그가 대검을 바로 쥐었다. 묵직하게 한 번 휘두르자, 검격이 일대를 휩쓸었다. 선임들이 남은 크리처를 사냥하는 것을 지켜보며 다시 한번 육감에 집중했다. 줄곧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단 말이지… 그가 죽은 크리처 사체를 뒤적이자 작은 씨앗 같은 것이 하나 나왔다. 미약한 기운에 힐데베르트가 의문스럽게 그것을 쳐다보니 아미가 통통 튀어와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힐데, 뭐 보고 있어?”

“크리처 안에서 나온 겁니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해서 봤더니…”

“씨앗처럼 생겼넹. 뭐가 느껴지는데?”

힐데베르트가 그것을 들고 곰곰히 생각했다. 사실 너무 미약해서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낯설지는 않은 기분. 이 감각을 분명 전에도 느낀 적이 있다. 요동치는 생명력. 황금빛 나무 앞에 섰던 기억. 축복받은 순간 느꼈던 이어지는 감각. 지구에 넘어온 줄곧 그리워했던 것. 그런 종류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어지는, 음… 뭔가 세계수가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이어지는 느낌에 관해 설명하려다, 콜튼조차 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축약하여 설명하니 아미가 눈을 반짝이고, 윤이 세계수 소리를 듣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리카르도도 분위기를 읽은 듯 그것을 관찰하기 위해 가까이 왔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크리처 체액이 잔뜩 묻은 평범하고 좀 누렇게 생긴 씨앗일 뿐이었다. 

“이게 대체 뭐길래~?”

글쎄요… 힐데베르트가 말끝을 흐리자 윤이 그것을 빼앗아 들었다. 그는 그 씨앗 같은 것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관찰해 보더니 어디선가 폴리에틸렌으로 만들어진 지퍼백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샘플 채취하듯이 그것을 지퍼백에 집어넣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거 한 번 심어봐라.”

“어디에요? 집 앞마당?”

그가 뭐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힐데베르트를 빤히 쳐다봤다. 씨앗이 담긴 지퍼백을 그에게 떠넘기고는 더러워진 손을 닦았다. 

“거기서 뭐가 나올 줄 알고? 코어 밖에 심어야지. 그냥 적당히 기억할 수 있을 만한 곳으로 골라.”

윤의 조언을 받아 고른 장소는 코어에서는 조금 멀지만 종종 업무를 하러 나가며 들릴 수 있고, 무슨 일이 벌어지면 바로 대처할 수 있으며, 변수가 적은 땅이었다. 그들은 그곳에 조심스레 씨앗을 심고는 근처에서 숙영했다. 힐데베르트는 윤이 예현에게 씨앗에 대해 무전으로 보고하는 것을 들으며 잠들었다. 선임들의 배려로 그의 불침번 순서는 마지막이었다. 오늘도 그는 꿈을 꾸었다. 

그리운 냄새가 났다. 힐데베르트는 멍하니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용의 사체가 시야 한구석에 들어왔다. 내려다보니 팔이 으스러져 가루가 되고 있었다. 그것이 금빛 포자와 함께 흩날린다. 나는 이때 기뻐했던가. 몽롱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찬란한 황금빛이 눈부신 나무는 축복과 황금빛 꽃씨를 내렸다. 무얼 해야 하는지 알게 된 것처럼 자연스레 용에게 다가가 그 에너지를 흡입했다. 팔이 재생하고, 기력이 넘쳐 흐른다. 용의 사체는 어딘가 파먹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바람이 나무를 부드럽게 훑고 지나가자, 약간의 잎사귀가 포자와 함께 천천히 떨어졌다. 힐데베르트는 그 모습을 전부 눈에 담았다. 찬란한 황금빛이 눈부

“힐데, 일어나…!”

“.....아.”

방금 뭔가 끊기지 않았나? 눈을 뜨니 아미가 조용히 그를 깨우고 있었다. 이번엔 놀라면서 일어나거나 식은땀을 흘리는 일은 없었다. 잠꼬대 같은 걸 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힐데베르트가 정신 차리고 모닥불 앞에 걸터앉으니 아미가 잠자러 들어갔다. 육감으로 주변을 훑어보았으나 선임들을 깨워야 할 만큼 위협적인 것은 없었다. 주변에 사체가 몇 구 있는 것이, 자는 동안 몇 번 조무래기들이 습격한 모양이었다. 불침번을 서는 동안 도검 관리용 기름으로 검을 간단히 관리해 주었다. 중간에 방문한 크리처 두 마리는 선임들이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처리했다. 멍하니 꿈을 되짚어 보던 중 그 씨앗이 전날보다 잘 느껴진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두 시간 정도 지난 후엔 선임들을 깨웠다. 길게 자지 못한 아미가 조금 피곤해했다. 다음 작업 개시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머물렀던 자리를 정리하고 씨앗을 보러 갔다. 힐데베르트의 의견이었다.

“오잉.”

“식물이 하룻밤 새에 이렇게 자랄 수 있는지 몰랐는걸~...”

“확실히 일반적인 상황은 아닌데.”

윤이 나무에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 사람 키의 반 정도 되는 그 나무는 얼마 나지 않은 황금색 잎을 흔들고 있었다. 힐데베르트가 육감으로 주변을 살폈다. 어제 심었던 그 씨앗이 맞았다. 애매모호하던 느낌도 보다 확실해져 그는 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나무, 역시 세계수 같습니다.”

한순간도 그 느낌을 잊은 적이 없다. 흡입하지 않아 세계수의 불효자로 불리었을지언정 매일 밤 잠들기 전 연결된 느낌을 되짚지 않은 날이 없었다. 지구로 넘어온 후에도 힐데베르트는 침대에 누울 때마다 습관적으로 세계수를 찾았고, 이젠 없다는 서글픔에 잠겨 우울하게 잠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그는 아직도 종종 잠들기 전 세계수를 찾는다.

“그게 왜 크리처한테서 나왔지?” 

“글쎄요.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이곳에 넘어오기 전에 삼키기라도 한 걸까? 힐데베르트가 얼버무리자 윤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나무의 여린 잎이 바람에 살랑였다. 금빛 포자가 흩날릴 것만 같아 멍하니 그 나무를 바라보았다. 꿈에서마냥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그를 현실로 끄집어낸 것은 녹색 눈 선임의 목소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빨리 성장하는 것 같은데~...”

“지금은 안 자라고 있지 않습니까?”

“나무는 원래 밤에만 자.”

“성장 촉진제라도 있는 건 아닌지~?”

리카르도가 비죽 웃었다. 여기서 성장 촉진제라 함은 힐데베르트를 가리키는 것이 명확했다. 넷 중 세계수의 자식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힐데베르트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설마요…’ 하고 중얼거렸다. 윤이 나무를 관찰한 후 몇 가지 특징을 메모했다. 저것도 예현에게 보고하겠지. 작업이 시작될 때가 다가오자 오토바이를 타고 전날보다 더 작업 장소에 가까운 위치에 자리 잡았다. 미리 한 번 쓸어둔 탓인지 오는 크리처가 많지는 않았고, 덕분에 작업  팀과 미끼 팀 모두 무사히 본부로 복귀할 수 있었다. 분대장이었던 윤이 보고서를 올리자 다음날 과학자와 배저 몇 명이 차출되었다. 그날 밤 힐데베르트는 이불의 온기를 느끼며 세계수의 흔적을 더듬었다. 거리가 멀어진 탓에 뭔가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는 서글퍼하기보단 약간의 기대를 하는 것을 택하고 잠들었다. 이번 밤에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푹 자고 일어나니 예현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 힐데, 임무 끝나자마자 미안한데 일어나면 본부로 좀 와줄 수 있겠어? 

> 지금 가겠습니다.

간결히 답장 후 기지개를 쭉 켜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양치하며 입을 옷을 찾아다녔다. 아침 식사는 생략하고 곧바로 본부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쭉 올라가 총사령관실에 발을 디디자, 예현과 스카가 그를 반겼다. 임무 중 심은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것이라고 한다. 연구원들이 그새 뭔가를 알아낸 걸까?

“듣기로는 그 나무가 처음에 폭발적인 성장을 한 것에 비해 전혀 성장하지 않고 있다고 했어.”

“아예 멈춘 겁니까?”

“응. 네가 한 번 살펴줬으면 해서. 괜찮을까?”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예현이 싱긋 웃으며 바로 갈 수 있도록 조치를 해놓겠다고 말했다. 힐데베르트는 곧장 포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포탈을 타고 이동하니 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띄었다. 갈라지고 빛바랜 도로. 일자로 쭉 이동하면 나무를 심었던 곳이 나왔다. 힐데베르트가 오토바이를 타고 쭉 이동하자 어린나무 한 그루와 연구원들의 베이스캠프 같은 것이 보였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나무 옆에 서있던 기계에서 삐 삐 삐 하는 소리가 났다. 언젠가 병원에서 봤던 심장 박동수를 세어주는 기계와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자, 베이스캠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뭐야? 왜 여기 있냐.”

“예현이 좀 보러 와달라고 해서요. 연락 못 받으셨습니까?”

기계 알림음에 아연실색하여 뛰쳐나오는 과학자들 뒤로 윤이 천막을 대충 걷어내고 나왔다. 기계는 계속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윤이 그걸 잠깐 보더니, 나무의 상태를 살피는 듯 샘플을 채취하고 그것을 빤히 관찰하였다. 채취한 나무껍질은 기계에 들어가 분석되기 시작했다. 

“저거 보여? 네가 오자마자 수직 상승했다.”

“...저 소리 좀 못 끕니까?”

“어려울 건 없지.”

저거 너 오기 전에는 조용했어. 윤이 덧붙이며 기계를 조작하자 금방 소리가 멎어 들었다. 그는 이것이 나무의 활동 에너지를 측정해 주는 기계라고 설명해 주었다. 치솟는 수치가 증명해 주는 것은 하나뿐이다. 리카르도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성장 촉진제라도 있는 건 아닌지~?’ 

힐데베르트는 그 가능성을 ‘설마요…’ 라며 얼버무렸다.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그는 세계수의 자식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도 하나 있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힐데베르트는 황금빛 잎사귀를 어루만져 보고는 베이스캠프 안을 살폈다. 이름 모를 선임 한 명이 총을 손질하고 있는 것을 인사하니 살갑게 맞아주었다. 주변 크리처를 쓸어버리고 잡일을 좀 돕고 나니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연구원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연결된 여러 기기가 작동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 나무가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리라. 그는 나무를 관찰하는 연구원들 사이에 앉아 육감에 집중했다. 그렇게 두시간 가량 가만히 앉아 있으니 나무의 성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힐데베르트와 나무는 확실하게 이어져 있었으므로. 벅차오르는 감각에 울음이 날 것 같아 그는 베이스캠프 안에 들어가서 자는 척을 했다. 그러곤 누워서 감각을 한참 되짚어 보다 꿈 없는 잠에 들었다. 매일 들려오는 동족들의 원망 소리가 유독 신경 쓰이지 않는 밤이었다.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느낌이 났다. 눈을 뜨고 일어나니 그의 사수가 말없이 쫓아오라는 손동작을 하곤 나갔다. 베이스캠프 바깥에는 이제 꽤 자라 타고 올라도 될 것 같은 크기의 나무가 있었다. 이 정도라면 코어 안에서도 미약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으리라. 황금빛 포자가 살짝 흩날렸다. 옛적에 보았던 풍경을 생각하며 살짝 웃었다.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작고 미약함에도 그것은 틀림없는 세계수라.

“몸에 별 이상 없지?”

있으면 바로 말해. 윤은 그렇게 말하곤 연구원들 사이에 끼어들어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말이 몇 번 오가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접이식 야외 의자를 펼쳐 나무 근처에 자리를 잡고 다시 주변을 훑었다. 명목상 힐데베르트는 연구원들의 경호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다른 선임과 함께 겸사겸사 주변에 있는 크리처들을 잡고 다녔다. 동족들의 명을 받고 오는 크리처는 단 하나도 없었다. 카일 쪽도 상당히 당황했으리라. 난데없이 인간 측 진영에서 세계수가 나타났으니. 

한낮의 베이스캠프는 조용한 편이었다. 성장이 이루어지는 밤에 주로 연구를 진행했기 때문에 낮에는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뻗어 있었다. 윤은 무전으로 예현에게 뭔갈 보고하고 있었고, 다른 선임 한 명은 주변을 둘러보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힐데베르트는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베이스캠프를 마주 보고 세계수 옆에 걸터앉았다. 반대편에서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무를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익숙한 기척. 느껴지는 생생한 분노와 증오. 말할 것도 없이 카일이었다. 세계수가 느껴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줄곧 지켜보고 있었겠지. 

“설마 여기서 검을 빼 들 생각은 아니겠지?”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대화할 생각이 없는 건가? 힐데베르트는 현재 제 친우의 머리가 얼마나 돌아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유사시에 대비하여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육감을 곤두세우고 긴장하고 있자니 건너편에서 답이 들려왔다.

“너야말로 여기서 검을 빼 들 건 아니겠지.”

무슨 속셈이지? 카일이 읊조렸다. 세계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난데없이 인간들이 그것을 키우고 있었으니까.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하루 종일 그 나무에 붙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자기들이 마구잡이로 보낸 크리처 몸속에 세계수의 씨앗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현실성이 좀 떨어지는 이야기이긴 하다. 

“너희가 친히 보내준 마물이 가지고 있길래 심어봤지.”

“뭐?”

상대는 황당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감지하기엔 너무 미약한 수준이었지. 마물을 가까이서 직접 상대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 또한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카일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힐데베르트도 조용히 살랑이는 잎사귀를 관찰하고 있었다.

“지복을 받기 시작한 이후로 세계수가 오염되기 시작했지. 그 과오를 반복할 셈이냐? 힐데베르트.”

“아니, 세계수가 멀쩡히 잘 자랄 것이라는 데에 희망을 걸어 보기로 했지. 알잖아? 지구는 세계수 없이도 잘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둘의 의견은 옛적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좁혀지는 법이 없었다. 카일의 분노는 여전했고, 힐데베르트는 카일을 제 손으로 베어내겠다는 다짐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들이 맞붙지 않는 이유는 그저 사이에 나무를 하나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세계수의 자식이었고, 세계수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고 있었다. 또한 부모 앞에서 싸우지 않을 정도의 사리 분별을 할 줄 알았으며 여린 나무 옆에서 칼을 휘두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검을 뽑아들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후 카일이 떠났다. 힐데베르트는 지구에 대해 떠올렸다. 영생을 얻고 난 후에도 세계에 큰 이변은 없었다.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오염도, 절대 끌 수 없는 불도 이 세상에는 단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힐데베르트의 고향 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세계수였지만 지구를 지탱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신이랍시고 무언갈 떠받드는 것은 여럿 봤지만 그 중에 정답이 있지는 않았다. 그는 지구의 기반이 굉장히 단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괜찮겠지. 다시 자랄 세계수가 오염되어 세계를 뒤엎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의 순리를 벗어난 것을 더이상 짊어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남아있는 동족들의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계수는 존재 자체만으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터전. 여린 잎맥을 보듬어주는 신성한 나무. 세계수는 돌아온 후에도 제 자식을 내치지 않았다. 여전히 금빛 나무는 여린 잎맥을 보듬을 줄 알았다. 지금도 그의 최우선은 동족이다. 뿌리가 코어까지 뻗어나갈 정도로 거대해지면 동족들은 그게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보고 기뻐할 수 있겠지. 세계수는 기꺼이 그들을 품어 줄 것이다.. 그리하여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이 나무를 끝까지 키우기로 다짐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